경주 김씨 상촌공파는 11대손 저(箸)가 이곳 봉화에 낙향한 후 나날이 번성하였는데
이당(怡堂, 김성환 장로)의 고조부가 되는 완희 (자는 周玉, 호는 성와)는 배위가 순흥 안씨였다.
그는 병자년 흉년(凶年)이 들자 면민을 위해 300석의 곡식을 내놓아 기민(饑民)을 구제하였으며,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이참판의 어린시절 스승으로 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그후 이 참판(李參判)이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도임(到任)한 후
성와 선생을 초청하여 사제(師弟)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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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당의 중제 김병환 장로와 김기원 장로가 이당의 조부 삼보당 김인제 선생의 묘에서 -
또한 이 참판은 안동부에 가뭄이 들자 재물을 준비하여 태백산기우제(太白山祈雨祭)를 올리려 갈 때면
반드시 선생댁에 들러 하루를 지내고 갈 정도로 스승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표했는데
이렇듯 이 참판이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을 정도로 성와 선생은 인품과 덕성을 갖추고 있었다.
이당(怡堂)의 증조부는 상호(자는 성화, 호는 설매(雪挴))로 배위는 파평윤씨이다.
묘소는 매화낙지(挴花落地) 형국에 안장되었다.
이당의 증조부인 설매공때가 되어서야 경주김씨 상촌공파가 봉화군 상운면 설매리에 입향(入鄕)하게 되었다.
증조모인 파평윤씨는 출가하여 올 때 두명의 노복(奴僕)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녀는 타고난 현모양처(賢母良妻)로 집안의 살림을 일구고 시부모님을 봉양(奉養)하고
내조(內助)를 잘하여 어려웠던 가계를 크게 일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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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면 성곡리 전경. 주마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
특히 그녀는 데리고 온 노복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 주위의 귀감을 사기도 했다.
이당의 증조부 또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을 일생의 업(業)으로 삼았으며
배움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을 가르치는데도 성심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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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
삼로당 가족은 “진인사대천명”을 실천하며 덕을 가업으로 쌓아왔다.
그들은 지금도 “덕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찾아온다”는
옛 선인의 말을 가훈으로 여기며 살아오고 있다.
그들이 삶의 최고 가치를 덕을 베푸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덕을 베푸는 것은 곧 삶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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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집을 방문하는 손님에 대한 접대가 극진해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또한 예의 도덕이 몸에 배어 있어 선비가의 전통과
충효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행실을 지키는데 일생을 바쳤다.
이당의 조부는 인제(人濟, 자는:利涉)이고 호는 삼보당(三寶堂)으로
1854년에 태어났는데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며 배위는 강릉 최씨이다.
이당의 부친은 동선(동선, 자는 화보, 호는 삼로당)으로 1882년에 태어났으며 배위는 안동권씨 이다.
삼로당(三路堂) 김동선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선비가의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일가친척간의 우애와 친목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등 주위의 귀감이 되는 덕성(德性)을 기르고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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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당의 부친과 모친인 삼로당 김동선, 권만 부부의 회갑기념. -
삼로당은 봉화 상운면 선돌의 권 진사 댁에 내왕하면서 한문을 배우다가
성년이 되어 안동군 녹전면 서삼동(西三洞) 말바우의 권중익씨의 장녀 권만(權漫) 여사와 결혼했다.
그는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으며, 슬하에 7남매를 양육하고 교육시켜 모두 성취하였다.
삼로당의 처가(妻家)는 안동시 녹전면 서삼동이었는데 당시 처갓집은 상당한 부자였다.
하루는 선생이 처가를 방문하였는데 처남이 생활고로 어려워하는 그를 보고
쌀 3두(斗)만 가지고 가라 하니 선생은 “금년에 3두를 주면 내년에는 6두를 주어야 합니다”고 하면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삼로당은 일제말기에 흉년이 들자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5남 2녀를 키우는데 정성을 쏟아 부어 가풍을 잇게 하였다.
장남은 영환(寧煥), 차남 성환(聖煥), 3남 규환(奎煥), 4남 병환(柄煥), 5남 기환(琪煥)이고 2녀는 김득이, 김말분이다.
삼로당의 장남 영환(1903년생)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엄한 유가(儒家)의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여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독골의 박진운(朴鎭雲) 씨의 장녀 박연이(連伊) 여사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원(基元) 장로, 차남 기대(基大) 목사, 3남 기영(基永) 장로, 4남 기목(基睦)을 두었다.
또한 삼로당의 차남 성환은 송태령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기진(基振) 장로, 차남은 기수(基秀) 목사이다.
삼로당의 3남 규환(1909년생)은 송만봉 여사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락(基洛) 장로, 차남은 기준(基準) 장로이다.
삼로당의 4남 병환(1914년생)은 이정찬 여사와 결혼하여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탁(基卓) 장로, 차남은 기덕(基德) 장로, 3남은 기태(基泰) 목사이다.
또한 삼로당의 5남 기환(1916년생)은 안정임여사와의 사이에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창 장로, 차남은 기주 장로, 3남은 기홍, 4남은 기윤, 5남은 기동을 두었다.
이당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 기현(基賢) 원장, 장남 기진(基振) 장로,
교수인 차남 기수(基秀) 목사이다.
애석한 일은 딸 기현이 부군 송명익과의 사이에
3남매 (장녀, 송은선 교수 · 차녀, 송영선 교수 · 아들, 송호선 과장)를 두고
강릉보육원장으로 재직중에 넷째를 분만도중 세상을 떠났다.
이당은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사업에 전념했던 딸을 일찍 잃은 슬픔에 딸이 이루지 못한
사회복지분야에 한층 전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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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당의 성곡 집으로 이당이 유동에 있을때 부인이 주마산에 산나물을 뜯으러
갈때마다 이집을 보며 "언제나 저집에 살까" 하며 되뇌이던 집이다. -
이당의 장남 기진은 4남 4녀를 두었다.
장남은 한의학 박사이자 인애가 한방병원장인 덕호(德鎬) 장로,
차남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영호(榮鎬) 목사, 3남 정호(正鎬) 사장, 4남 대호(大鎬) 위원장이다.
또한 장녀 덕순(德順), 차녀 덕희(德姬), 3녀 덕인(德仁), 4녀는 덕필(德必)이다.
맏 자부인 윤종옥 박사는 상담·교육학 박사로 현재 영주지역 사회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당의 차남 기수 목사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인호(仁鎬)는
산부인과 전문의로 차병원에서 재직하고 있고, 차남 명호(明鎬) 과장, 그리고 1녀는 신덕(信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