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섬세한 통찰의 향연
이태희(시인, 인천대 강의교수)
시는 언어의 축제다. <서곶문학> 창간호라는 축제의 향연에 초대되었다. 첫 배를 띄운 다섯 분의 동인들은 등단한 지 5년 안팎의 ‘젊은’ 시인들이다. 창간호에 실리는 간단한 프로필과 사진으로 미루어 다섯 시인은 생물학적으로는 ‘중년’에 이른 분들이다. 그중 세 분은 이미 첫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래서 이분들을 다시 이름 붙여드리자면, ‘중년 신인’이랄 수 있겠다. 세칭 ‘꽃중년’이라는 말처럼 원숙하면서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새내기 시인들인 셈이다. 이분들이 펼치는 축제의 향연에 초대되어 모처럼 시의 향기에 흠뻑 빠졌다. 해설을 맡기에는 워낙 과필이요 졸필이라 충분히 그 향기를 전할 수 있을지 자못 저어되지만, 작품이 실린 순서대로 간략한 독후감을 옮기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고자 한다.
하서 시인의 시에서는 이 시대와 사물을 바로 보려는 정신이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를 읽으며 김수영을 생각했다. 하서 시인의 시가 김수영의 시를 닮았다는 말이 아니라, 김수영 시인이 「공자의 생활난」에서 “이제 나는 바로 보마/事物과 사물의 生理와/사물과 數量과/限度와/사물의 愚妹와 사물의 明晰性을” 바로보겠다던 그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비친 시대의 모습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백미러」이다.
···광장
···분노·백만
···시민·함성·행진
···촛불·민심·탄핵·광화문
세
종
대
왕
권력····
탈·헬조선····
왕실장·내시·왕조····
안가·십상시·섭정·비선····
문고리·삼인방·미르·K스포츠····
재단·승마·줄기세포·백옥·7시간·의혹····
길라임·드라마·통일대박·창조경제·굿·팩트···․
고산병·괴담·자괴감·여성·사생활·비아그라·권력····
오방색·혼밥·VIP·음해·태극기·좌빨·성조기·종북·어버이····
나
라
사
랑
-「백미러」 전문
우선 이 시는 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시각적 형태주의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정렬로 처리된 1연의 시어들은 동사 하나 없이 10개 명사의 집합으로만 구성되었지만, 2016년에서 2017년에 걸쳐 광화문 광장에서 펼쳐진 탄핵 집회를 형상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왼쪽 정렬로 처리된 2연의 42개 시어들은 하나 같이 한 인물을 겨냥하고 있다. 모두 탄핵의 대상이 된 그 인물과 관련된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이 어째서 한 인물과 연결되는가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목과 그 형태이다. ‘백미러’란 제목은 시인이 자동차의 ‘백미러’를 통해 본 풍경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백미러’라는 완충 장치, 혹은 거리 두기를 통해 본 광장의 풍경은 어떠한가? 시인은 대조되는 두 장면을 보여주고만 있을 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각 행의 시어 수를 제한하고 배열 방식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보여주려는 시각적 형상은 무엇인가? 일단은 깃발의 형상이다. 다른 집회도 그러하겠지만 광화문 집회에서 무수한 깃발이 펄럭였다. 1연과 2연은 그러한 깃발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 하나는 두 깃발을 지탱하는 깃대(?)로 사용한 단어이다. 1연 깃발의 깃대는 ‘세종대왕’이고 1연 깃발의 깃대는 ‘나라사랑’이다. 여기서 섣불리 ‘세종대왕’이라는 깃대는 어떤 의미이고, ‘나라사랑’이라는 깃대는 어떤 의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전자는 현명하고 어진 임금으로 평가되는 역사적 인물이라서 깃대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고, 단지 광화문 광장 중앙에 위치한 동상의 주인공이기에 차용되었을 수도 있다. 후자는 보통명사로서 가지는 본연의 뜻 그대로 가져왔을 수도 있고, 특정한 단체의 이름이기에 깃대로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깃발로 형상된 것으로 보이는 1연과 2연이 혹자에게는 ‘깃발’이 아니라, ‘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깃발은 흔드는 것이지만, 칼은 베는 것이다. 깃발은 외침을 동반하지만, 칼은 상처를 동반한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저 깃발 뒤의 숨은 칼을 보라고.
지하차도 옆
편도 3차선, 가운데 차로
사거리 신호 따라 모래폭풍 같은 자동차들
그 사이, 탄탄대로 후루룩 국말아 드시며 손수레 가신다
막무가내, 여울 속 바위 같다
까만 모자에 얼룩무늬 군복 입고
태극기 성조기 날리며
골판지 박스 댓 장 싣고
손수레 가신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
헌 콘크리트담장 같은 어깨로 전하는 가르침
토 달지 말고 순순히 비켜가거라
아스팔트 하얀 점선자락 길게 풀며
가신다
우회전하면 인천대로
서울 길 어디에 가 닿는지
낱낱이 힘껏 다 밟아봤다는 듯
좌회전 신호에도 직진 직진
광내며 가신다.
-「푸르른 날에」 전문
「백미러」의 화자의 위치가 자동차 안이었다면, 「푸르른 날에」의 화자도 자동차 안에 있다. 「푸르른 날에」는 편도 3차선의 ‘대로’를 지나가는 ‘손수레’에 관한 시다. 총 5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파격의 2연만 빼면 모두 “가신다”는 서술어로 끝난다. 손수레가 간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각 연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게 변주된다. 1연의 경우 “탄탄대로 후루룩 국말아 드시며” 간다는 내용이다. 편도 3차선이면 제법 큰 도로다. 손수레 운행에 관한 법률이 어떤지 모르지만 손수레가 도로 한쪽을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편도 3차선의 가운데 차로를, 그것도 “사거리 신호 따라 모래폭풍 같은 자동차” 사이로 지나가는 것은 법률이나 규정의 문제를 떠나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니 “후루룩 국말아 드시며 가신다”고 묘사하는 것이다. 파격의 2연은 따로 말하기로 하고, 3연을 보면 “골판지 박스 댓 장 싣고”가신다고 묘사된다. 손수레의 주인이 폐지를 줍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정보다. “까만 얼룩무늬 군복”을 입었다거나 “태극기 성조기 날리며”라는 표현이 특별한 숨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4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헌 콘크리트 담장 같은 어깨로 전하는 말씀”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토 달지 말고 순순히 비켜 가거라”는 암묵적 훈계도 들리는 것 같다. 5연에 오면, 여기에 덧붙여 나(손수레 운전자)도 “서울 길 어디에 닿는지” “낱낱이 힘껏 다 밟아봤다”는 태도가 읽힌다. 더구나 “좌회전 신호에도 직직 직진”하는 위험천만한 장면이 연출된다. 여기까지가 묘사이다. “가신다”는 존칭어가 약간 반어적인 느낌은 들지만, 어디까지나 사실을 그리는 묘사다. 이 사태에 대한 화자의 결정적 인식과 평가는 위에서 파격이라고 언급한 2연의 한 줄에 압축되어 있다. 흐르는 “여울 속 바위 같”이 “막무가내”라는 판단이 그것이다.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탄식인 것이다.
이번 <서곶문학> 창간호에 실린 하서 시인의 작품 중에는 거리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다. 「ID 40604」는 제목 자체가 버스정류장을 가리키고, 앞서 언급한 「백미러」의 무대가 서울 광화문 광장이라면, 「푸르른 날에」는 인천의 어느 도로 위다. 「토요일 오후가 비스듬하다」는 ‘양도 우체국 옆’에서 시작되고, 「객지」 역시 ‘큰길에서 두 번 꺾은 골목’에서 시작된다. 일일이 다 거명하긴 어렵지만, 첫 시집 조지 다이어의 머리에 관한 연구의 목차만 둘러봐도 거리에서 생산된 시들이 다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쯤 되면 하서 시인은 ‘거리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그만큼 세상의 일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은 세상과 사물을 바로 보려는 정신의 결과라 여겨진다.
이은춘 시인의 시에서는 대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자기 성찰로 이어가는 힘이 느껴진다. 특히 이은춘 시인이 시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 중에는 나약하거나 소외된 존재들이 눈에 띈다. 이번 창간호에 수록한 열 편의 작품 중 「문」, 「서부공단역」, 「나방」, 「민달팽이」 등이 그러하다. 「문」에서 다루는 대상은 수족관 속의 바다거북이고, 「서부공단역」은 한쪽 팔이 뭉툭하게 잘린 외국인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이고, 「나방」은 열차에서 구걸하는 아이를 다루고 있으며, 「민달팽이」는 산책로에서 말라죽은 민달팽이가 소재이다. 이들 나약한 존재들로부터 자기성찰을 끌어내는 주요한 시적 기법으로 대조의 방식이 활용된다. 먼저 「나방」부터 살펴보자.
갈색나방 한 마리 여기저기 제 몸을 부딪고 있다 어깨 위로 손등으로 나방이 닿는 곳마다 소스라치는 사람들의 아우성, 그럴수록 날갯짓은 필사적이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나방은 날개도 접지 못한 채 유리창에 붙어 있다
열차와 열차 사이 문이 열리고 헝클어진 머리칼의 아이가 들어선다 앉아 있는 사람들 무릎마다 때 묻은 종이 한 장 올려놓고, 엉클어졌다는 하루를 남의 일처럼 펼쳐놓는다 사람들은 나방을 보듯 힐끔 한번 쳐다볼 뿐, 구겨진 종잇장을 들여다보는 이 아무도 없다
입 꾹 다물고 다시 종이를 거두어가는 손, 나방을 피하듯 얼른 종이를 내던지는 손, 아이는 익숙하게 종이를 주워들고 다음 칸으로 사라진다 유리창의 나방은 죽은 듯 산 듯 날갯짓이 없다
-「나방」 전문
3연의 산문시로 구성된 이 시의 1연은 제목이 가리키는 ‘나방’에 대한 묘사다. 열차에 나방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아마 전철인 것 같다. 열차 안으로 잘못 날아든 나방은 여기저기 부딪치다가 사람들의 어깨 위나 손등에 닿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나방은 유리창에 붙어 있다. 아니 나방이 유리창에 가만히 붙어 있으므로 소란이 잦아들었을 것이다. 여름철에 일어날 만한 풍경이다. 2연에 오면 한 아이가 등장한다. “헝클어진 머리칼의 아이”다. 열차를 옮겨 다니는 중이다. 아이는 “앉아 있는 사람들 무릎마다 때 묻은 종이 한 장”을 올려놓는다. 그 종이에는 “엉클어졌다는 하루”가 펼쳐져 있다. 가난과 배고픔을 호소하는 내용일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들은 “나방을 보듯 힐끔 한번 쳐다볼 뿐”이다. 나방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이가 펼쳐 놓은 종이에 대한 반응이 동일하다. 3연에서 아이는 사람들의 무릎에 놀려 놓았던 종이를 걷어간다. “입 꾹 다물고 거두어가는 손”과 “나방을 피하듯 얼른 종이를 내던지는 손”이 다시 대조된다. 아이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 아이가 다음 열차로 사라지고, 화자의 눈에는 다시 유리창의 나방이 보인다. “유리창의 나방은 죽은 듯 산 듯 날갯짓이 없다.” 일견 평범했을 이 문장은 2연과 3연에서 아이의 종이와 나방이 동일시되고, 나방을 피하듯 종이를 피하는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죽은 듯 산 듯 날갯짓이 없는 것은 나방을 통해 “입 꾹 다문” 아이와 “나방을 피하듯 어른 종이를 내던지는” 사람들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시 전체를 통해 화자의 감정은 극히 억제되어 있지만, 아니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자기 성찰의 시간이 주어진다.
「서부공단역」도 비슷한 구조를 갖춘 작품이다. 화자는 전철의 맞은편에 탑승한 한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본다. 한쪽 팔 끝이 허전한 노동자가 설명하는 서툰 한국말을 들으며 “프레스의 아찔함”이 “내 손끝으로” 전해진다. 순간, 그 외국인 노동자의 “옆에 앉은 이”가 포착된다.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그러면서 “손가락 까딱거리며 스마트폰에만 매달려” 있다. 손가락 까딱거리는 이와 한쪽 손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 이 또한 무심한 듯 절묘한 대비이다. 3연에서 화자의 시선은 다시 외국인 노동자로 향한다. 그는 한 손으로 지갑 속 사진을 무릎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웃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겉으로는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드러내면 웃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매 끝 끌어당기며 한숨을 발아래 떨어뜨리”고 있다. 그런 중에도 무심한 열차는 터널 속을 마냥 달린다. 이처럼 대조의 기법으로 대상을 묘사한 후 독자들을 성찰의 시간으로 데려가는 것이 이은춘 시인이 활용하는 주요한 시적 기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배수지 산책로에 주검 하나 놓여있다
까맣게 타들어간 시간을 보라고
한줌 흙도, 물기도 없는 우레탄 위에 저리 누웠는가보다
등짝 위로 옥죄어오는 햇볕
천천히 말라갔을 파랑의 시간
말라죽는데 왜 길에 나오는 거야?
엄마 손잡고 가던 아이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있다
호미 날에 탕탕 햇볕 튕겨지던 콩밭 고랑
허리 한번 곧게 펴지 못한 채
여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말라가는 시간 쌓아 가던
힘줄 돋은 손등에 꺼멓게 검버섯 돋아나던
어머니
아이가 막대기를 들고
바삭해진 달팽이를 풀밭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민달팽이」 전문
아이와 함께하는 산책길에 민달팽이의 ‘주검’을 만났다. 말라죽은 그 주검은 배수지 옆 산책로에 놓여있어 더욱 안타깝다. 화자는 민달팽이의 주검에서 “까맣게 타들어간 시간”을 읽어낸다. 그 시간은 “등짝 위로 옥죄어오는 햇볕”을 어쩌지 못하고 “천천히 말라갔을 파랑의 시간”이다. 여기서 “파랑의 시간”이란 민달팽이가 죽음의 파도를 타 넘던 시간을 의미한다. “말라죽는데 왜 길에 나오는 거야?” 아이의 질문 역시 안타까움을 동반하고 있다.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는 표정에 그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민달팽이의 “타들어간 시간”은 화자에게 어머니의 “말라가는 시간”을 환기시킨다. 햇볕이 “호미 날에 탕탕” “튕겨”진다고 말할 만큼 강한 여름 한낮의 콩밭 풍경이다. 어머니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을 직접적으로 진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허리 한번 곧게 펴지 못한 채” “힘줄 돋은 손등에 꺼멓게 검버섯 돋아나던” 모습만으로도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이 작품 역시 민달팽이의 “타들어 간 시간”과 어머니의 “말라가는 시간”이 대비되고 있다. 민달팽이의 “타들어 간 시간”이 햇볕 아래서 죽음을 넘나들던 “파랑의 시간”이라면, 어머니의 “말라가는 시간”은 “손등에 꺼멓게 검버섯 돋아나던” 시간이다. 이 무심한 듯한 대비가 또다시 독자들을 성찰의 시간으로 이끈다.
이은춘 시인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명징한 결구의 사용이다. 이번 창간호에 수록된 작품에서 그 예를 찾아보면, “문은 어디서나 열리고 어디서나 열리지 않는다”(「문」), “노란 머그컵 속 캐모마일이 빙빙 맴돌고 있다”(「난청」), “창밖 하현달이 환하다”(「그림책 읽기」) 등이다. 특히 인용한 구절들은 한 행으로 작품의 마지막 연을 이루고 있다. 첫 시집 늑대거미에도 명징한 한 행으로 마지막 연을 처리한 작품은 다수 발견된다.
박영옥 시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감각적 묘사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박영옥 시인의 작품 속 화자는 대부분 관찰자로서 존재하는데, 이것은 감각적 묘사를 잘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로 생각된다. 제목부터 관찰자적 시각이 느껴지는 「여름 스케치」에서는 “여자1,2-바다 쪽으로 걸어간다”와 같이 대상을 객관화하는 희곡의 지문 같은 구절이 동원되기도 하며, 「모리 커피점」에서는 ““커피향이 좋아요~”/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에서 볼 수 있듯이 희곡의 대사 처리 같은 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이번 창간호에 수록한 10편의 작품 중 가장 감각적 묘사가 돋보이는 부분은 「지붕 위의 마네킹」의 “빗방울들이 팝콘처럼 톡톡 튀는 날은/산수유 꽃눈이 뾰루퉁 해졌다”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감각적 묘사를 통해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립스틱」과 「규동이」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화장대 위 작은 상자
십여 개의 립스틱을 세워 놓았다
그중에서 주황의 립스틱을 바른다
지워지고 나면 아파 보인다는 말에
빨강, 노랑, 초록, 보라, 파랑, 남색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립스틱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어느 색이든 입술에 바르고 나면 빨강색이 된다
숨어버리는 주황을
숨어버리는 노랑을
숨어버리는 초록을
숨어버리는 파랑을
숨어버리는 보라를
숨어버리는 남색을 놓치지 않으면
앵두 같던 내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사라지지 않는, 아니 수없이 사라지는
주황, 노랑, 초록, 보라, 파랑, 남색을 잡으려고
오늘도 거울 앞에 선다
-「립스틱」 전문
여성적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자는 화장대 위에 “십여 개의 립스틱을 세워 놓”고 여러 색깔의 립스틱을 발라보는 중이다. 여성들이 립스틱 색을 골라 바르는 취향을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자신이 선호하는 색을 즐겨 바른다고 생각된다. 작품 속의 화자도 “주황의 립스틱”을 즐겨 바르는 것 같은데, “지워지고 나면 아파 보인다”는 사람들의 지적에 “빨강, 노랑, 초록, 보라, 파랑, 남색” 등 갖가지 색의 립스틱을 그것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고 한다. 아마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문구에 솔깃한 것 같다. 그런데 화자는 “어느 색이든 바르고 나면 빨강색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과학적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입술의 혈색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문제는 화자 자신이 그 “숨어버리는” 색들을 놓치지 않고 싶다는 데 있다. “숨어버리는 주황을/숨어버리는 노랑을/숨어버리는 초록을/숨어버리는 파랑을/숨어버리는 보라를/숨어버리는 남색을”이라고 반복적으로 드러낸 이유는 놓치기 싫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들 각각의 색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말하면 “앵두 같던 나”, 즉 ‘젊음’을 상징한다고 파악된다. 그러므로 화자가 “십여 개의 립스틱을 세워 놓”고 지우기와 바르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젊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붙잡고자 하는 욕망 때문인 것이다.
생골 옛집 문간방에 규동이네가 세들어 살았다
목이 가늘고 길어 황새목이라 불렀다
구렁이 같이 길게 드러누운 길
규동이는 책보를 메고 늘 혼자 다녔다
어느 날은 망초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서
불쑥 내밀고는 비척비척 고샅길로 뛰어가기도 했다
마을에는 폐병을 앓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외딴집 황씨 아저씨가 그 전해에 죽었고
아랫마을 순덕이도 봄이 오기 전에 죽었다
햇볕이 나락같이 쏟아지던 날
우리는 나란히 중학생이 되었다
규동이는 언제나 창백한 얼굴로 다녔다
느티나무 집으로 이사 가던 날
기울어진 어깨, 기울어진 책가방
자꾸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생골을 떠나온 지 수십 년 가물한 기억 밖에서
규동이가 이불 호청에 심한 각혈을 하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목구멍에서 쓴물이 자꾸만 올라왔다
봄은 겨울 들판처럼 지나갔다
-「규동이」 전문
시에 등장하는 ‘생골’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공주 마곡사 부근의 마을이란다. 물론 동일한 지명이 전국에 많으니 다른 지역일 수도 있으나, 시인의 프로필에 공주 출생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곳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생골 마을은 정감록에 십승지지의 명당으로 언급된 곳이라고도 한다. 시의 화자는 어렸을 적에 살았던 이곳 고향 마을의 ‘규동이’를 회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목이 가늘고 길어 황새목”이라고 불렀던 일과 “구렁이 같이 길게 드러누운 길”이라는 표현이 연상작용을 일으키면서 추억을 북돋운다. 규동이는 “어느 날 망초 꽃다발을 들고 나타나서” 나에게 “뿔쑥 내밀”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목이 가늘고 길었다든가, 늘 혼자 다녔다든가, 비척비척 뛰어갔다는 표현을 통해 규동이는 몸이 어딘가 병약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2연에서 화자는 마을에 폐병 앓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고 회고한다. “외딴집 황씨 아저씨”나 “아랫마을 순덕이”도 폐병을 앓다 죽은 사람이다. “햇볕이 나락같이 쏟아지던 날/우리는 나란히 중학생이 되었다”는 서술에서 밝은 이미지가 제시되면서 무언가 추억의 사건이 더 이어질 것 같았으나, “규동이는 언제나 창백한 얼굴로 다녔다”는 서술에서 규동이가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병약한 아이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어지는 회상의 장면은 이사가던 날의 모습이다. “기울어진 어깨, 기울어진 책가방”은 1연의 “비척비척”과 연결되면서 다리를 절룩거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그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는 것은 무언가 하고 싶은 심중의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3연에서는 그런 규동이의 죽음이 소문처럼 전해진다. “이불 호청에 심한 각혈”을 했다고 하니 규동이 역시 폐병을 앓았던 것 같다. 화자는 이런 부음을 듣고 울컥하는 슬픔에 잠긴다. “목구멍에서 쓴물이 자꾸 올라왔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아마 봄에 부음을 들은 것 같은데, 그 봄이 “겨울 들판처럼 지나갔다”고 진술한다. 황량하고 허허롭기 그지없다는 말이다. 이 시를 읽고 난 후 문득 시인의 첫 시집 아날로그 첫머리에 놓인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시인은 “시인의 임무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을 깨우는 일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하고는 “철부지 때 그 아이도”, “내가 쓴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던 현이도”, “돌아가신 부모님도”, “새둥지로 떠나간 아이들도”, “곁에 있는 남편도” 그립다고 적고 있다. 억측이기는 하나 규동이가 철부지 때 그 아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인의 말>도 그러하지만, 박영옥 시인의 시들은 온갖 그리운 존재들에 대한 회고로 가득하다. 위에서 언급한 「립스틱」이 젊음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고, 「규동이」라는 작품 역시 제목이 된 인물에 대한 그리움의 기록이다.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서곶문학> 창간호에 실린 「구봉도」 역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이 뛰어난 감각적 묘사를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는 바로 그리움의 재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송선영 시인이 그리는 시의 세계는 대부분 풍성한 자연의 세계다. 그 자연의 세계는 아름답다.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여전히 자연은 우리 삶의 근원으로 작동한다. 생명력 넘치는 자연의 세계에서 시인은 에너지를 얻기도 하고, 근심과 시름을 덜기도 한다. 자연 예찬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세계에 간간이 애처로운 개인사가 모습을 비치지만, 대부분 자연으로부터 위안과 평안을 얻는다. 송선영 시인의 펼치는 풍요로운 자연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비닐하우스 거울 앞 딱새 한 마리
종일토록 거울 속 자신에 들이대고
몰아치는 산골바람에
제집 부서진다 울어대는 오목눈이
소나무 위 비둘기 한 마리
알 품으며 끙끙대고
도토리나무 사이 꾀꼬리 꾁꾁 신경질이다
성난 까치는 까까 대며 부추기고
장끼는 깨거덩 깨거덩 짖어댄다
방울새 한 마리 자작나무 뒤에 숨어
호로리 호로리 또르릉 방울 울리며
이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고
먼발치서 뻐꾸기 뻐끔뻐끔 구름 담배 태울 때
휘파람새 휘리릭 휘릭 호각 불 듯 불어대고
오색딱따구리는 돌배나무 타고 뱅뱅 돈다
죽은 느티나무 위 청 딱따구리
신경질 나 따닥딱딱 딱다거리고
갈 곳 없는 까마귀 한 마리 밤나무 뒤에서
사슴벌레 애벌레 소리에 귀 기울인다
어스름 저녁 소쩍새 한 마리
수정산 땅거미 속에서
소천 소천 외치며 어둠을 부른다
-「새들의 지저귐」 전문
「새들의 지저귐」은 제목 그대로 새들의 다양한 지저귐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실 별달리 해설하지 않아도 되는 작품이다. 그냥 시인의 들려주는 새들의 지저귐과 묘사를 즐기면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술술 읽히는 이 작품은 그런데 매우 정교하게 직조된 작품이다. 먼저 인용한 「새들의 지저귐」에 몇 종류의 새가 등장하는지 세어보자.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5연의 시에 무려 열세 종류의 새가 등장한다. 대부분 한 마리씩 등장하는데, 열세 마리라고 안 하고 열세 종류라고 한 것은 꼭 한 마리씩만 지저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 열세 종류의 새에 대한 각각 다른 묘사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1연에 딱새와 오목눈이가 등장하는데, 딱새는 “종일토록 거울 속 자신에 들이대”는 모습이고, 오목눈이는 “제집 부서진다 울어대”는 모습이다. 오목눈이가 왜 자기 집 부서진다고 울어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모습이 비치는 거울 앞에서 깝죽거리는 모습은 귀엽고 깜찍한 딱새에게 딱 어울리는 묘사로 생각된다. 2연에는 비둘기와 꾀꼬리와 까치, 장끼가 등장한다. 1연의 새들보다 몸집이 조금 큰 새들이다. 비둘기는 “알 품으며 끙끙대”는 모습이고, 꾀꼬리는 웬일인지 모르지만 “꾁꾁 신경질”을 내는 모습이고, 까치는 “까까 대며 부추기”는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꿩의 수컷인 장끼는 “깨거덩 깨거덩 짖어”대는 모습이다. 다산의 상징이기도 한 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은 자연스럽고, 꾀꼬리가 신경질을 낸다거나 까치가 부추긴다는 표현은 각각 그 새들의 지저귐이 주는 소리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장끼의 짖는 소리를 “깨거덩 깨거덩”이라 표현한 것도 흥미롭다. 3연에는 방울새, 뻐꾸기, 휘파람새, 오색딱따구리가 등장한다. “호로리 호로리 방울 울리”는 방울새, “휘리릭 휘리릭 호각 불 듯 불어대”는 휘파람새의 묘사는 각각 지저귀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고, 뻐꾸기가 “구름 담배 태”운다고 한 것은 지저귀는 소리인 ‘뻐꾹 뻐꾹’을 담배 태우는 모습의 의태어인 ‘뻐끔 뻐끔’과 연결시킨 것이다. 재치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4연에는 청딱따구리와 까마귀가 등장한다. 2연에서 꾀꼬리는 그 지저귀는 소리에 착안하여 신경질을 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4연에서 딱따구리도 신경질이 난 것으로 묘사하는데,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며 내는 “따닥딱딱 딱다거리”는 소리에서 착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까마귀의 경우 지저귀는 소리를 묘사하지 않고, 먹잇감이 될 “사슴벌레 애벌레 소리에 귀 기울인다”고 표현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마지막 5연에는 소쩍새 한 마리만 등장한다. 때는 어스름 저녁이고, 장소는 땅거미에 잠기는 수정산이다. 수정산도 여러 곳에 같은 이름의 산이 있어 정확히 어느 지역의 산인지 알 수 없으나, 소쩍새에 대한 묘사가 “소천 소천 외치며 어둠을 부른다”는 묘사도 주목된다. 전해오는 전설 속에서 소쩍새의 지저귀는 소리는 솥이 적다고, 풍년이 올 거라는 이야기로 풀이되는데, 시인은 “소천 소천”을 외친다고 묘사했다. 흔히 ‘소천’이라는 단어는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으로, 개신교에서 죽음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소쩍새가 올빼미과에 속하는 야행성 조류이기에 시인이 “어스름 저녁에 어둠을 부른다”고 표현한 것은 잘 어울리는 묘사이기는 하나, ‘죽음’을 환기할 수 있는 ‘소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곰곰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이상 거의 동어반복 수준의 설명이었으나, 「새들의 지저귐」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시인의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얼마나 세심한지 잘 알 수 있다.
갈대 우거진 갯고랑 따라 소래염전
물놀이 하며 가무락에 망둥어 잡고
갯가에서 방게에 농발이 잡으며 놀던 자리
빈터 되어 뒤죽박죽 곤죽되었다
나문재 펼쳐진 갯골 썰물에 민물이 흐르고
가마우지와 왜가리 깃털 고르기에 분주하다
염 판에는 억새와 갈대가 판을 치며
오목눈이 떼지어날다 제짝 찾기 바쁘다
가수알 바람* 속에
갈대꽃은 석양에 더욱 붉어지고
삘기는 은빛서리로 달빛을 깔아놓는다
염 판에서 쉼 없이 돌고 돌던 수차
지쳐 곤이 누워 잠을 자고
잔세스칸스 풍차는 가수알 바람에 돌아간다
노을빛 아래 아득히 땅거미 지는 하늘 위
대열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주거니 받거니
저희들 소리로 힘 돋우며
시월 보름달 속으로 들어간다
-「노을 지는 소래 염전」 전문
「노을 지는 소래 염전」은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염전에 관한 시인데, 염전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고, 여전히 자연을 노래하는 시다. 염전은 단지 배경일 뿐이다. 또 다른 면에서의 이 시의 독특함을 말하자면, 식물과 어패류와 새가 각각 네 종류씩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먼저 1연에는 화자가 예전에 잡고 놀던 어패류 네 종류가 등장한다. 가무락, 망둥어, 방게, 농발이가 그것이다. 화자에게 소래 염전은 과거에 물놀이 하며 각종 어패류를 잡고 놀던 공간이었는데, “빈터 되어 뒤죽박죽 곤죽”이 되었다고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는 연이다. 네 종류의 식물은 2연에 나오는 나문재, 억새, 갈대와 3연의 삘기이다. 이들 식물들도 어패류와 화자의 과거를 회상시키는 소재들이다. 네 종류의 새는 2연에 나오는 가마우지, 왜가리, 오목눈이와 5연의 기러기다. 이들 역시 소금 천지인 “염판”에서 자라는 식물만큼이나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가마우지와 왜가리는 깃털 고르기”에 분주하고, “오목눈이”도 “제짝 찾기”에 바쁘다. 5연에 등장하는 기러기는 대열을 지어 “힘 돋우며” 날아간다. 제목은 노을 지는 염전인데, 활발한 생명력으로 가득 찬 풍경이 그려진다. 그중에 5연에서 기러기 떼가 “저희들 소리로 힘 돋우며/시월 보름달 속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은 압권이다. 소금기 가득한 염판 위에서 온갖 동식물들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듯이 시월 보름의 찬 가을 하늘로 기러기 떼가 “대열지어” “주거니 받거니/저희들 소리로 힘 돋우며” 날아가는 풍경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염전을 배경으로 자연의 역동적 생명력을 그린 작품이다.
주로 자연을 노래하는 송선영 시인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작품 상당수의 말미가 ‘저무는 풍경’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소래 포구의 저녁」의 경우 노을 지는 갯가의 “고층 빌딩의 그림자”로 마무리되고 있으며, 「진달래 화전」의 마지막 시어 역시 “해거름”으로 맺고 있다. 위에서 살핀 「새들의 지저귐」에서도 마지막 연의 마지막 행은 “어둠을 부른다”고 끝나고, 「노을 지는 소래 염전」의 마지막 구절도 “시월 보름달 속으로 들어간다”로 맺고 있다. 이와 같은 ‘저무는 풍경’으로의 마무리가 어찌 보면 자연 묘사에 주력하는 시인으로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하루하루는 저무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에 저무는 풍경에서 시 또한 마무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그것은 시인의 시간관 혹은 세계관이 신화적이며 원형적인 순환적 세계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우로보로스 도상으로 표상되는 순환적 세계관에 기초할 때, 저무는 어둠은 결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건너가는 단계일 뿐이다.
박경분 시인의 작품을 구성하는 주된 정조는 절제된 슬픔이다. 시인은 슬픔을 터뜨릴 듯 터뜨릴 듯하다가 터뜨리지 않고 참아낸다. 머뭇거리는 슬픔, 그것은 터져 나온 슬픔보다 더 애처롭다. 예로부터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 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즐거워하되 음란에 빠지지 말고, 슬퍼하되 마음을 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수천 년 전해오는 동양 시론의 근간이기도 하다. 낙이불음은 모르겠으나 박경분 시인은 애이불상의 정신을 견지하는 시인이다.
엄마는 늘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그랬습니다
허리가 무너지고
무릎이 꺾이고
어깨가 저려올 때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그랬습니다
그 나이 팔순에
한 점,
한 점,
살점 도려 묻는 듯
두 자식을 가슴에 묻으면서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 나는
그랬습니다
-「엄마」 전문
행과 행 사이가 넓다. 아니 한 행을 비우면 연을 바꾼 것이니, 어휘는 적지만 연은 많은 시다. 그런 원칙으로 따지면 모두 13연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문장으로 셈하면 세 문장이고, 글자 수로 셈하면 145자다. 그런데 왜 이런 파격적 구성을 감행했을까? 그것은 할 말을 참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등장하는 어머니의 말씀은 “괜찮다 나는”이라는 딱 한 말씀이다. 반복되는 “괜찮다 나는”과 “괜찮다 나는” 사이의 빈 행간, 이 침묵의 행은 결코 ‘괜찮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엄청난 일이 있었다. “팔순”의 어머니가 “살점 도려 묻는 듯/두 자식을 가슴에 묻”는 일이 있었다. “허리가 무너지고/무릎이 꺾이고/어깨가 저려올” 일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괜찮다 나는”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괜찮아지고 있다 나는”까지 셈하면 일곱 번이다. 이 거센 반복. 이 자리에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던가? 참척의 한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하거나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일 것이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며 극히 절제되고 정교한 언어를 사용한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은 참척의 슬픔을 참다 참다 터뜨린 작품이다. 또한 세심하며 날렵한 문장으로 시대를 꿰뚫어 본 통찰력의 작가 박완서도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참척의 슬픔을 토해냈다. 박경분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머니가 겪은 참척의 슬픔은 「뻐꾸기」에도 등장한다.
산 뻐꾸기
품지 못하는 알 남의 둥지에 몰래 두고
에미 예 있다 뻐꾹
미안하다 뻐꾹
달 뜨도록 뻐꾹
해 뜨도록 뻐꾹
우리 엄마
딸 하나, 아들 하나 산 날망에 묻어 놓고
보고싶다 뻐꾹
잘 있느냐 뻐꾹
해 지도록 뻐꾹
별 지도록 뻐꾹
-「뻐꾸기」 전문
스스로 둥지를 짓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의 습성과 진종일 울어대는 울음을 흥미롭게 연결시킨 작품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놓고는 “에미 예 있다 뻐꾹/미안하다 뻐꾹”, “달 뜨도록 뻐꾹/해 뜨도록 뻐꾹”하고 운다는 묘사만으로도 이 시의 슬픔의 정조는 충분한 긴장미를 획득하고 있는데, “우리 엄마/딸 하나, 아들 하나 산 날망에 묻어 놓고”라는 4연의 삽입은 어머니가 겪은 참척의 슬픔을 더욱 극대화한다. 그런데 그 참척의 슬픔은 시인 혹은 화자 자신의 몫이 아니다. 「달이 맑아」라는 작품을 통해서 엄마의 “딸 하나 아들 하나”는 화자의 “아우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어머니가 겪은 슬픔과는 결이 다를 것이다. 이 말은 아우들을 잃은 화자의 슬픔이 가볍거나 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달이 맑아」에서는 어머니의 슬픔이 아닌 화자의 슬픔을 “내 몸 어디인 줄은 몰라/빗금치며 내려 드는/이 서늘함”이라고 아주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뻐꾸기」에서는 그러한 자신의 동생을 잃은 슬픔은 말하지 않고 어머니의 슬픔만 곡진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 자신의 슬픔은 드러내지도 못한 채 어머니의 슬픔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말하지 않은 그 참음이 더욱 애처로운 여운을 준다는 말이다. 이것이 애이불상을 떠올린 연유이다.
예배당 불빛이 보이는 담장 아래
돌과 돌과 돌들 사이
담장 너머로 길을 내던 어린 환삼덩굴 싹
들고양이 무심히 밟고 갔다
환삼,
발가락이 부러졌다
환삼,
엎어져 시들어갔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예배당 불빛은 노란데
돌과 돌과 돌들 사이
그래도
추적추적 비는 내려
절름발이 환삼덩굴 굼지럭, 굼지럭
망촛대, 방아잎 당당한 허리 아래로
납작 엎드려 기어간다
예배당 불빛이 멀어진다
돌과 돌과 돌들사이
둥글게 살아라
말은 말일 뿐
네모가 되어버린 환삼덩굴
온 몸으로 가시를 세우고
잎 마디마디 톱니를 물고
돌과 돌과 돌과 돌들을 파랗게 밟고
고개 빳빳이 치켜세운다
예배당 불빛은 불빛일 뿐
-「환삼덩굴」 전문
백과사전을 살펴보면, ‘환삼덩굴’은 ‘훼손된 들에 흔히 자라는 덩굴성 한해살이풀’이란다. 사진도 찾아보니 이름은 몰랐지만 낯익은 풀이다. 거친 가시가 있는 풀. 위의 시에서 환삼덩굴은 무심히 밟히고 부러지고 엎어지고 시들어가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풀이다. 그 환삼덩굴은 돌과 돌들 사이에서 자란다. “온몸으로 가시를 세우고”, “돌과 돌과 돌과 들들을 파랗게 밟고/고개를 빳빳이 치켜 세우”고 자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런 환삼덩굴에 대한 묘사 사이사이에 “예배당 불빛”이 지속적으로 끼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환삼덩굴이 자라는 곳이 바로 “예배당 불빛이 보이는 담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밟히고 시들어가고 기어가고 가시를 세우며 자라는 환삼덩굴과 예배당 불빛의 교차는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훼손되고 버려진 것들과 예배당 불빛의 대조가 주는 울림이 있다. 그런 소외된 것들에게 예배당 불빛이 좀더 따뜻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예배당 불빛은 멀어”지고 결국 “예배당 불빛은 불빛”일 뿐이라는 결구가 냉랭하고 쓸쓸하게 와 닿는다. 이 구절은 나약하고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직접적 손길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들린다.
박경분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대상들은 대부분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대상들이다. 간혹 「유월 한낮」처럼 “팔순의 엄마/낮게 코 고는” 평화로움이 제시되기는 하나, 아슬아슬한 평화이다. 대체로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약한 존재들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절제된 어조로 담담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 주목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멕시코 출신 시인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라는 멋진 시론집에서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고 했다. <서곶문학> 창간호의 향연을 둘러보면서 떠오른 문구이다. 우리 시대에 시인은 많고 시는 읽히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과람한 해설자를 포함하여 ‘중년 신인’들의 젊은 시절에는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그 혁명적 기능이 많이 위축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시는 여전히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해방의 방법”으로 존재한다. ‘중년 신인’들이 보여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통해 <서곶문학>의 독자들도 스스로 ‘내면적 해방’의 길에 동참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첫댓글 여러해 전 글을 찾아 올리시느라 수고하셨군요.
역쉬 일꾼!
ㅎㅎ
여기가 아니고 3호 해설입니다. ㅎ
그런데
저도 뭘 잘 못 건드렸는지
늑대 거미 서평이 위로 올라가 있네요.ㅋ
@나무소리 나보다 더 씨게 낙상하신 듯
연탄재좀 보내드리까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