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 씨족사 및 역대 주요인물.
1.씨족(氏族)의 연원(淵源)
시조는 알평(謁平).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평(謁平)은 하늘에서 진한(辰韓) 땅 표암봉에 내려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으로 진한 육부촌장(辰韓六部村長)의 수장(首長)이 되었다고 한다.
경주이씨(慶州李氏) 대종보(大宗譜) 상계(上系)편에 보면 그는 BC 69년 3월 1일 탄생한 혁거세(赫居世)를 양육하여 BC 57년 4월 15일 왕으로 추대한 뒤 개국좌명공신에 녹훈되고 아찬(阿粲)에 올라 군무(軍務)를 장악했다고 한다. 그 후 유리왕 9년(서기 32) 봄에 양산부(楊山部)를 급량부(及梁部)로 고치면서 그의 후손에게 이씨(李氏)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사후(死後) 법흥왕 23년(536) 문선공(文宣公)으로 시호(諡號)하였고 무열왕 3년(656)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그러나 그 뒤의 계대(系代)를 실전(失傳)되어,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세계(世系)를 적은 것이 연유가 되어 그가 중조(中祖) 곧 기세조(起世祖)가 되었다.
2.본관지 연혁
경주(慶州)는 본래 신라의 옛 수도이나. 고려 태조 18년(935)에 경순왕이 항복하자 나라는 없어지고 다만 경주(慶州)라 칭하였다.
성종(成宗,961~997) 때에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고 현종(顯宗,992~1031)조에는 강등시켜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 복귀 반란을 꾀하였다 하여 관내의 주(州)ㆍ부(府)ㆍ군(郡)ㆍ현(縣)을 빼앗아 안동, 상주에 나누어 예속시키기도 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에 경주부(慶州부)로 개칭, 옛 이름을 다시 썼고 1895년(고종 32)에 군(郡)이 되었으며 1955년 경주시(慶州市) 설치와 더불어 나머지 지역은 월성군(月城郡)으로 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이(李)ㆍ최(崔)ㆍ김(金)ㆍ노(盧)ㆍ박(朴)ㆍ배(裵)ㆍ설(薛)ㆍ손(孫)ㆍ온(溫)ㆍ윤(尹)ㆍ전(全)ㆍ정(鄭)ㆍ풍(馮)씨 등이 있었다.
3.씨족사(氏族史)
시조 은열왕 이알평(李謁平) 이후의 실전세계(失傳世系)에 대하여는 백사공파(白沙公派)의 '무진보(戊辰譜,1868년 고종 5)'에서 28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했고, 또 광무 연간의 '갑진보(甲辰譜, 1904년)'에서도 35대의 실전세계(失傳世系)를 수록하였는데, 이 자료의 발견경위와 내용 등이 분명치 않아 신빙할 수 없다는 점이 '정묘대종보(丁卯大宗譜, 1987년)' 《실전세계(失傳世系)의 고찰(考察)》에 밝혀져 있다.
우리나라의 이씨(李氏)는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몇 본(本)의 이씨(李氏)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분관(分貫)한 것이다.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에서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 이씨(陜川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 이씨(車城李氏)가 갈라졌다. 또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중조인 이거명(李居明)의 후손에서도 몇 개의 관향이 나누어졌다.
이거명(李居明)의 증손 이윤장(李潤張)의 후손이 평창이씨(平昌李氏)로, 아우인 이윤원(李潤遠)의 후손이 가평이씨(加平李氏)로, 5세손 이주좌(李周佐)의 후손이 아산이씨(牙山李氏)로, 6세손 이우칭의 후손이 재령이씨(載寧 李氏)로, 이양식(李陽植)을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 17세손 이영행(李永倖)의 후손이 진주이씨(晉州 李氏)로, 22세손 이반계(李攀桂)의 후손이 원주이씨(原州李氏)로 갈려 나갔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 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배출하면서 삼한(三韓)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고려 말에 생존했던 17~21세조의 조상을 파조(派祖)로 하여 14개파로 나누어진다.
17세조인 이규(李揆)의 후손이 평리공파(評理公派), 이관(李琯)의 후손이 이암공파(怡庵公派),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 익재공파(益齋公派), 이지정(李之正)의 후손이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천(李蒨)의 후손이 국당공파(菊堂公派), 이매(李邁)의 후손이 부정공파(副正公派), 이과(李薖)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이수(李蓚)의 후손이 사인공파(舍人公派)로 나누어진다.
15세조인 이강(李康+羽)의 후손이 판전공파(判典公派)이고 21세조 이지수(李之秀)의 후손이 월성군파(月城君派), 19세조 이양오(李養吾)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이존오(李存吾)의 후손이 석탄공파(石灘公派), 이존중(李存中)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이존사(李存斯)의 후손이 교감공파(校勘公派)이다.
이 14대파(大派) 아래에서 70여 개의 소파(小派)로 다시 나누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융성하기는 상서공파(尙書公派)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집》, 익재공파(益齋公派)의 이른바 《8별(鼈)집》, 그리고 이완(李浣)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菊堂公派)를 들 수 있다.
조선조에 상서공후 《백사(白沙)집 》에서만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왔고, 익재공후 <8별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명,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 좌의정 1명을 배출해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
‘정묘보(丁卯譜,1987)’ 상계(上系)에는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이 소판(蘇判)이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판(蘇判)이나 병부령(兵部令)은 신라시대에 진골(眞骨)만이 할 수 있는 관등(官等)ㆍ관직(官職)이었다.
3세조인 이금서(李金書)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 하는데, 4세조, 5세조는 각각 병정(兵正)ㆍ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냈다 한다.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시랑(正朝侍郞)은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품(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4세조, 5세조가 경주(慶州)나 혹은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향리출신이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6세조 이주복(李周復) 이후는 중앙관직을 띤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12세조 이선용(李宣用), 13세조 이승고(李升高)의 경우에는 고려 향직(鄕職)인 군윤(軍尹)ㆍ보윤(甫尹)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진(李瑱)은
충렬왕 6년(1280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제2등으로 뽑히고 동생 이세기(李世基)는 제3등으로 뽑혔는데 이를 천장급제(天場及第)라 불렀다. 문한학사(文翰學士), 시독학사(侍讀學士), 밀직승지(密直承旨) 등을 역임하시고 안향(安珦)이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 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여 주자학을 가르쳤다.
이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치고 , 충선왕이 즉위한 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충숙왕 원년(1314년) 상의회의 도감사(商議會議都監使)로 성균관에서 성리학 보급에 전력을 다하여 여러 문생을 키워냈으며 충숙왕 2년(1315)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박충좌(朴忠佐) 등을 뽑았다. 그후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이세기(李世基)는
밀직부사(密直副使)ㆍ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고려조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의 아들로,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요. 외교가이며ㆍ문장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년(충렬왕 13)~1367년(공민왕 16)』이다.
그는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白頤正)에게서 배웠다. 충렬왕 신축년(1301년)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이때 지공거 국재공 권부(權溥)가 사위로 맞이하였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元)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조자앙(趙子昻)이라고도 함』 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충숙왕 3)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충숙왕 6) 충선왕을 따라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충선왕이 토번(吐蕃)에 유배되자 원(元)나라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고(暠)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했다.
충혜왕이 원(元)에 잡혀갔을 때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元)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 복위가 반복될 때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다.
공민왕이 즉위(1352년)하여 우정승(右政丞)ㆍ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공민왕 2)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右政丞)으로 재임, 1356년(공민왕 5)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王)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공민왕묘정에 배향되었다.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민간가요(民間歌謠) 17수(首)를 한시(漢詩) 7언 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는 고려가요(高麗歌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외에 ‘역옹패설’이 있다. 후손들은 ‘익재난고’와 ‘역옹패설’을 합하여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그가 만권당(萬卷堂)에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하루는 충선왕이 만권당에서 대륙의 쟁쟁한 시인 문사들과 시회(詩會)를 열었다. 이 때 충선왕의 시에 “닭울음소리는 흡사 문 앞 버들가지 같구나『계성흡사문전류(鷄聲恰似門前柳)』라는 한 구절을 충선왕이 읊자 중국 학사들이 그 출처를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충선왕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이제현(李齊賢)이 선뜻 응대하기를 “우리 동인(東人, 우리나라 사람) 시(詩)에 '옥두초일일금계창(屋頭初逸日金鷄唱), 이사수양요요장(怡似垂楊요요長)' 이라는 시귀가 있는데, 이는 닭울음소리의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이니, 전하께서도 이 뜻을 취하심이요,
또 한퇴지(韓退之,한유)의 <거문고>란 싯귀에도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네『부운유서무근체(浮雲柳絮無根蒂)』라는 말이 있으니 옛사람도 이는 곧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소”하고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동인시화(東人詩話)]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청종 1)~1927)』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그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원(元)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讚,기릴 찬)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 제110호로 지정돼 있다. 그의 아들
이달존『李達尊 : 1313년(충선왕 5)~1340년(충혜왕 1)』은
익재공의 스승인 백이정(白頤正, 1247~1323/주자학 도입)의 사위가 됐다. 충숙왕 때 18세(1330)로 과거에 올라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이르렀으나 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다녀오다가 장림역에서 28세(1340)로 갑자기 요절하였다.
아, 이에 앞서 군이 태부인(太夫人)의 상을 당했을 적에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종족이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그 뒤에 학업에 종사하여 글을 잘하고 일에 종사하여 재간을 보이자, 그가 가업을 제대로 이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었다.
하늘이 만약 이 사람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여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게 하려고 했다면, 어찌하여 수명을 더 빌려 주지 않고 이렇게 했단 말인가. 아, 슬픈 일이다. 국당(菊堂) 이천(李蒨)은 충렬왕 25년(1299)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정당문학(政堂文學)ㆍ밀직사사(密直司事)ㆍ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僉議政丞)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고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밖의 고려조 인물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이칭(李偁)ㆍ이치연(李侈連)ㆍ이총섬(李寵暹)과 이핵『李翮,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ㆍ이강『李康+羽,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ㆍ이인정『李仁挺,문하평리(門下評理)』ㆍ이보림『李寶林,정당문학(政堂文學)』ㆍ이존오 『李存吾,우정언(右正言)』ㆍ이달충『李達衷,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이 두드러져 각각 분관 또는 분파조로 모셔지고 있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는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급제, 수원서기(水原書記)를 거쳐 사한(史翰)에 발탁, 1366년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王)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변호로 극형(極刑)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뒤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대사성(大司成)에 추증되었다.
이달충(李達衷)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 좨주(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ㆍ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했다. 1359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되었다가 팔관회(八關會) 때, 왕(王)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기용되었다.
신돈(辛旽)에게 주색(酒色)을 삼가라고 공석(公席)에서 직언(直言)하다가 파면, 1371년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후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고, 1395년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조선초기에 현직에 오른
이래(李來)는
이존오(李存吾)의 아들이다.
아버지 이존오(李存吾)가 신돈(辛旽)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울화로 죽은 후 이어 신돈(辛旽)이 처형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록사(典客錄事)에 특임되었다. 우왕 9년(1383) 문과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 간관(諫官)에 등용,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파인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의 주살(誅殺)을 건의했으며, 뒤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에 유배, 곧 풀려나 공주(公州)에 은거했다.
조선 개국 후 정종 1년(1399)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도고 이듬해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제2차 왕자(王子)의 난(亂)을 평정,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발탁되고,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2등(佐命功臣二等)으로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다.
1407년(태종 7)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좌빈객(左賓客)을 지내고, 1408년 지의정부사겸판경승부사(知議政府事兼判敬承府事)에 이르렀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 3명의 대제학, 1백 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조선조에서 이씨(李氏)들은 중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유명한 <8별집>은 이익재(李益齋)의 후손으로 그의 7대손되는 이공린(李公麟)의 일화에서 비롯된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사위이다. 장가든 첫날 방 그는 큰 자라가 나타나 ‘내 아들 8형제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신부에게 물으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8마리를 사다가 부엌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공린(李公麟)은 신부와 함께 자라의 새끼를 들어다 물에 놓아주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뒷날 이공린(李公麟)은 박(朴)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덟을 두었다.
오(鼇)ㆍ구(龜)ㆍ원(黿)ㆍ타(鼉)ㆍ별(鼈)ㆍ벽(鯁)ㆍ경(鯨)ㆍ곤(鯤)이라고 거북 구(龜) 아니면 고기 어(魚)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文章)>으로 꼽혔다. 그런데 셋째 원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죽음으로서 첫날 밤 자라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맞아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17대가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은 자라를 먹지 않는 것을 가법(家法)으로 지켜온다.
이공린(李公麟)은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장인인 박팽년(朴彭年)이 죽은 후 그 죄에 연좌되어 30여년을 금고당했다. 그러다가 성종조에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절부(節婦)로 표창을 받음으로써 그 자식으로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성종 13년(1482) 무과를 거쳐 현령(縣令)이 외었으나 셋째아들 원(黿)이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죽자 청주(淸州)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伸寃)되고 청주(淸州)에 거주하다가 죽었다.
이구(李龜)는
성종 23년 문과에 급제,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동생 원(黿)의 화(禍)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기용되어 교리(校理)ㆍ승지(承旨)ㆍ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이원(李黿)은
성종 20년(148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연산군 1년(1495)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무오사화(戊午士禍,1498) 때 봉상사(奉常寺)에 재직하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諡號)를 주자고 건의(建議)한 일로 곽산(郭山)에 장류(杖流), 4년 후에 나주(羅州)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이사균(李思鈞)은
중종조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연산군 4년(149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으로 재직하던 중 폐비윤씨(廢妃尹氏)의 복위(復位)를 반대하다가 보은(報恩)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으로 교리(校理)에 오르고,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다.
을묘사화(乙卯士禍,1519년)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일파라는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 후 공조참판(工曹參判)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고 후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몽량(李夢亮)은
명종 즉위 후 위사공신3등(衛社功臣三等)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다. 대사간(大司諫)ㆍ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557년(명종 12)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1559년(명종 14)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다음 해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1562년(명종 17)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李恒福)은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후예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년 5월 23일부터~1598년 12월 16일 까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했고, 전후 정승에 올라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黨爭)을 조정하는데 전력한 그는 조선조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선조 13년(158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관직에 나아가 1589년(선조 22)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고 평난공신 3등(平難功臣三等)이 되었다. 도승지(都承旨)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왕(王)을 호종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덕형(李德馨)과 명(明)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전국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했다. 선조 31년(1598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선조 32) 좌의정(左議政), 다음 해 우의정(右議政)으로 전임, 도원수(都元帥)로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을 겸직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승진했다.
1602년(선조 35)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2년 뒤 호성공신 1등(扈聖功臣一等)에 봉해졌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1618년 광해 10)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죽은 그 해에 바로 복관(復官)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영조 때의 좌의정(左議政) 이태좌(李台佐), 소론(少論)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李敬一) 등이 모두 백사(白沙)의 후손이다.
이시발(李時發)은
조선 후기『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에, 병조참판, 형조판서, 삼남도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양구(養久), 호는 벽오(碧梧) 또는 후영어은(後潁漁隱). 이원(李黿)의 고손이며, 이발(李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경윤(李憬胤)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대건(李大建)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김도(金燾)의 딸이다. 이덕윤(李德胤)의 문인이다.
6세에 아버지가 죽고, 1589년(선조 22)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상지(駱尙志)가 인솔하는 명나라 군대가 경주에 주둔했을 때 접반관(接伴官)으로 임명되었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전적 · 정언 · 사서를 역임하였다.
1594년 병조좌랑에 재직 중 명나라 유격장(遊擊將) 진운홍(陳雲鴻)을 따라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영을 방문해 정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듬 해 병조정랑으로 승진해 순무어사(巡撫御史)를 겸임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된 뒤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겨울 찬획사(贊劃使)로 임명되어 충주의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또 조령(鳥嶺)에 방책(防柵)을 설치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분조(分朝)의 호조참의가 되어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 보급을 관장하였다. 1602년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4년간 선정을 베풀다가 1604년 형조참판을 지냈다.
이듬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포루(砲樓)와 성곽을 수축하고 그 해 가을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했다가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광해군의 특명으로 오도참획사로 임명되어 다음 해 평안도에 가서 민폐를 크게 고치고 둔전(屯田)을 설치해 군량을 충족하게 하였다.
이 때 연산군의 척속(戚屬)인 옥강만호(玉江萬戶) 변일(邊溢)이 청병(淸兵)의 침입을 막지 않고 성을 버리고 도망해 사형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크게 노해 이시발에게 책임을 묻자 신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 해 이괄(李适의 난 때 체찰부사(體察副使)로 난의 수습에 공을 세웠다.
그 뒤 삼남도검찰사(三南道檢察使)가 되어 남한산성의 역사(役事)를 감독하다 병을 얻어 자택에서 운명했다.
저서로 『주변록(籌邊錄)』 · 『벽오유교』가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이광좌(李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 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이광좌(李光佐)의 8촌 형인 이태좌(李台佐) 또한 소론(少論)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삼종(三從) 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이종성(李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렀는데, 이 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국당공파(菊堂公派)에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뒤 효종ㆍ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李浣)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군산(群山)을 삭평턴들 동정호(洞定湖) 넓을랏다.”하는 시조 한 수가 <뜻을 두고도 못 이룬> 한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는데, 조선조에서 무인(武人)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은 7명 뿐이다. 국당공(菊堂公)의 파조인 이천은 아들이 4형제『경중(敬中)ㆍ배중(培中)ㆍ달충(達衷)ㆍ성중(誠中)』였는데 그 중 성중(誠中)이 조선 원종개국공신이 되어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냈다. 그의 6대손이 바로 이완(李浣)이다.
이완(李浣)은
인조 2년(1624)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인조 21년(1643)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하였다. 효종이 송시열(宋時烈) 등과 북벌(北伐)을 계획하자 효종 3년(1652)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발탁되고, 다음 해 훈련대장(訓練大將)이 되어 신무기(新武器)의 제조(製造), 성곽(城郭)의 개수(改修)ㆍ신축(新築) 등으로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내고,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재임되었으나 1659년 효종이 죽어 북벌(北伐)계획이 중지되었다. 1673년 포도대장(捕盜大將)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완(李浣)의 아버지 이수일(李守一) 역시 이름난 무장으로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세 차례나 역임하면서 여진(女眞) 토벌에 공이 많았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부원수로 도원수 장만(張晩,1566~1629)과 함께 서울 길마재『안현(鞍峴)』 전투에서 반군을 격파한 공을 세워 공신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국당(菊堂)의 맏아들 경중(敬中,고려 판병부사(判兵部事)의 후손에서는 손자 정보(廷輔)가 세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정보의 후손에서 이정암(李廷馣)ㆍ이정형(李廷馨) 형제가 선조조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명신으로 꼽혔다. 정암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의 동생 이정형(李廷馨)은
성리학의 대가로 형과 함께 임란(壬亂)에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ㆍ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집(知退堂集)’ 등의 저서가 남아 전한다.
오천(梧川) 이종성(李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 : 장헌세자(莊獻世子)』 묘정에 배향되었다. 영조 3년(172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1736)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ㆍ도승지(都承旨)ㆍ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1744)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영조 28년(1752)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당했다가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大院君)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浦)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 등 저술을 남겼다.
조선조 경주이씨(慶州李氏) 가문에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으로 지목되는 이벽(李檗)이다.
정조 3년(1779)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강상면(江上面) 앵자봉(鶯子峰) 기슭 천진암(天眞庵)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ㆍ정약용(丁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薰) 등 10여 명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학무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서교『西敎 : 천주교(天主敎)』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 천주교회의 출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이 천진암(天眞庵) 강학회를 시발로 1785년 숨질 때까지 7년 동안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1785년 1월 그는 서울 명례(明禮)방(현 명동(明洞))에 사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권철신(權哲身)ㆍ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ㆍ약종(若鍾) 등 신자들과 예배를 보다 붙잡혔다. 당시 사학(邪學)으로 배척되던 서학(西學)을 공부하던 이들응 사회적으로 큰 제재를 받게됐다.
그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으로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이르고 야단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이벽(李檗)은 신앙과 효도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끝에 문을 닫고 들어앉아 식음을 끊었다.
기도와 독서만으로 버티기 10여 일 만에 탈진한 그는 쥐통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잊혀진 그의 묘소를 포천(抱川)에서 찾아내 발굴, 천진암(天眞庵) 아래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셀患? 칼날 아래의 순교보다도 더 거룩한 순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근세의 경주이씨(慶州李氏) 인물로는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李相卨)과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수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있다.
이상설(李相卨)은
1894년(고종 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904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이 되고, 이어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올랐다. 이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자결(自決)을 시도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패했다.
1907년 화란(和蘭)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열리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이준(李儁)ㆍ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헤이그에 가서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거부당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성명회(聲鳴會)를 조직하여 합방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각국에 발송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력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이시영(李始榮)은
백사(白沙)의 11세손이며 이종성(李宗城)의 5대손으로 한말(韓末)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다. 28세에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그는 일제(日帝)에 나라가 망하자 만주(滿洲)로 망명, 유하현(柳河縣)에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양성에 힘썼다.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수립되자 법무총장(法務總長)ㆍ재무총장(財務總長)을 역임하였다.
193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에 피선(被選), 1933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위원겸법무위원(國務委員兼法務委員)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귀국,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委員長)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부통령(副統領)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정치노선이 알라 1951년 물러났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이상용(李相龍)은
한일합방 직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 2세 교포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행하였고, 1912년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단장(團長)이 되어 교포 계몽에 힘썼다.
3ㆍ1운동 때는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포들의 자치활동(自治活動)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조직에 참여하여 그 독판(督辦)이 되고, 1926년에는 임시정부(臨時政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근년 작고한 애산(愛山) 이인(李仁)도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제(日帝)하 변호사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변호했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한글학회)사건 때는 회원으로 그 자신이 붙들려 가 4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제헌국회의원, 대법원장 직무대리, 검찰총장, 법무부장환, 반민특위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했다.
1960년 참의원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애산(愛山)은 몇 해 전 돌아가며 자신의 재산을 모두 <한글학회>에 기증하였따.
애산(愛山)과 함께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李甲成)이 근년까지 <유일한 생존자>로 독립운동의 표상이 되어오다 81년 돌아갔다.
4.파명록(14개 대파)
평리공파(評理公派)ㆍ이암공파(怡庵公派)ㆍ익재공파(益齋公派)ㆍ국당공파(菊堂公派)ㆍ부정공파(副正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ㆍ사인공파(舍人公派)ㆍ판전공파(判典公派)ㆍ월성군파(月城君派)ㆍ직장공파(直長公派)ㆍ석탄공파(石灘公派)ㆍ진사공파(進士公派)ㆍ 호군공파(護軍公派)ㆍ교감공파(校勘公派)
5.주요 세거지
정묘보(丁卯譜,1987년)에 보면,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지금의 황해도 금천(金川)에 대대로 분묘(墳墓)를 썼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 것으로 미루어 상계(上系)가 일찍이 고려가 건국할 무렵에 금천(金川)에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2008년 1월 24일 및 2월 13일 두번에 거쳐 필자가 답사 하였음)
그러다가 17세 이규(李揆)의 자손들은 이규의 증손(曾孫) 이석(李碩)이 여말(麗末)에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전남 나주(羅州)로 퇴거(退居)한 뒤에 일부가 그 곳에 자리 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대체로 23세 이절(李節)의 대 이래로 경기도 안성(安城), 경북 예천(醴泉)ㆍ안동(安東)ㆍ상주(尙州)ㆍ경주(慶州), 전남 함평(咸平) 등지에 나뉘어 살았던 것 같다.
17세 이관(李琯)의 자손들은 21세 이인로(李仁老)가 단종 손위(端宗遜位) 때에 전북 임실(任實)의 두곡리(杜谷里)로 살았던 이후에 임실에 많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이관(李琯)의 동생 이제현(李齊賢)의 자손들 중에서 18세 이서종(李瑞鍾)의 후계(後系)가 21세 이지회(李之會)ㆍ이지대(李之帶)의 대에 경산(慶山)의 자인(慈仁)과 경주(慶州)에 많이 세거했다.
23세 이성지(李成枝)의 대에 제천(堤川)에 각각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18세 이달존(李達尊)의 후계(後系)는 20세 이미(李美)가 태종조에 제주(濟州)로 유배된 이후 일부가 제주(濟州)에 터를 굳혔던 것을 비롯해서 안성(安城)의 죽산(竹山)ㆍ완주(完州)의 고산(高山)ㆍ청원(淸原)ㆍ영일(迎日)의 흥해(興海)ㆍ상주(尙州)의 함창(咸昌) 등지에 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제현(李齊賢)의 셋째아들 이창로(李彰路)의 후계(後系)는 21세 이문(李聞)이 경북 영일(迎日)의 흥해(興海)로 낙향(落鄕)하였고 20세 이종지(李鍾地)가 단종조 갑술년(甲戌年,1514)에 지금의 함남 이원(利原)으로 유배되었으므로 이 무렵부터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한편 17世 이천의 자손들이 22세 이만선(李萬善)ㆍ이완원(李完元)의 대에 의성(義城)ㆍ대구(大邱)ㆍ산청(山淸)ㆍ철산(鐵山)에, 23세 이간(李簡)ㆍ이시영(李時迎)의 대에 안동(安東)ㆍ선산(善山)ㆍ청도(淸道)ㆍ순천(順天) 등지에 정착했던 사실이 ‘정묘보(丁卯譜)’에 보이며, 이천의 동생 이매(李邁)의 자손들은 18세 이경원(李敬元) 이애로 4대에 걸쳐 용인(龍仁)ㆍ봉산(鳳山)ㆍ상주(尙州) 등지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17世 상서공 이과(李薖)의 자손들은 안동(安東)ㆍ양양(襄陽) 등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과의 동생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이수가 여말(麗末)에 평북 곽산(郭山)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 머물러 살았던 이 후에 곽산에 세거했던 것 같다.
15世 이수(李蓚)의 자손들은 20世 이귀산(李龜山) 이래로 경주(慶州)에 살았으며, 17世 이손보(李孫寶)의 자손들은 21世 이득산(李得山) 이래로 의성(義城)에 살았다고 믿어진다. 1930년 당시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익재공 후손들이 충북 청원군(淸原郡)일원, 충남 보령군(保寧郡) 미산면(嵋山面), 전북 완주군(完州郡) 봉동면(鳳東面),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전남 해남군(海南郡) 화산면(花山面), 무안군(務安郡)ㆍ영암군(靈岩郡)ㆍ진도군(珍島郡) 일원, 경북 달성군(達城郡) 성서면(城西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월성군(月城郡) 천북면(川北面)ㆍ강동면(江東面), 청도군(淸道郡) 청도읍(淸道邑), 상주군(尙州郡) 낙동면(洛東面), 영일군(迎日郡)ㆍ경산군(慶山郡) 일원, 경남 밀양군(密陽郡) 단양면(丹陽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울주군(蔚州郡) 일원, 평북 박천군(博川郡) 동남면(東南面), 정주군(定州郡) 임포면(臨浦面), 함남 이원군(利原郡) 남면(南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오늘날 자손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은 영암군(靈岩郡) 영암읍(靈岩邑) 망호리(望湖里)이다. 이 곳에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처음 자리잡은 것이 450여년 전, 이제현(李齊賢)의 9대 손인 이반기(李磻琦)가 정미사화(丁未士禍,1547년 명종 2)를 피해 이 마을로 오게 되면서부터이다. 현재 이 마을 1백여 가구가 경주이씨(慶州李氏) 자손들이다.
6.역대 주요인물
■ 신라조(실전세계)
○1世 시조(始祖) 은열왕(恩烈王) 이알평(李謁平)
○2世 이유(李侑) : 신라인. 자(字) 지사(智士), 호(號) 사관존자(四觀尊者), 시호(諡號) 문화공(文和公). 관직(官職)은 좌내사 좌군주
(左內史 左軍主)로 생이 검달(生而儉達)하고 역학달도(力學達道)하여 나이 이십에 이르러 신장대풍(身長大風)하고 신화여용(神和麗
勇)하니 역과인(力過人)으로 사관존자(四觀尊者)라 호칭하였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에 내진사기문장(內辰思其文章)하였다. 관직(官職)은 증좌내사(贈左內史), 좌군주(左軍主)라 하였다. 자세
한 기록은 문집에 있다. 배위(配位)는 양씨(楊氏)로 사물국(史勿國) 양번(楊蕃)의 사위이다. 설하에 일남이녀를 두었다.
○3世 이타(李陀) : 신라인, 자(字) 용백(庸伯), 호(號) 표공선생(瓢公先生), 시호(諡號) 문성(文成), 벼슬은 좌우내사시중(左右內史侍
中)이다.
○4世 이중가(李仲嘉) : 신라인, 자(字) 자강(子康), 호(號) 문간(文簡), 관직은 태사령(太史令)이다. 문장과 효제를 겸한 능사로서 유리
왕(儒理王) 조시 남해부사(南海府使)와 명조사관(名祖事官) 부령상서(副令尙書)로서 박혁거세(朴赫居世) 왕(王)의 사위가 되고 대보
정국공신(大輔靖國功臣) 좌령승(左令丞) 내사시중(內史侍中) 태사령(太史令)으로 87세 장수하였다.
문간공(文簡公)의 매부(妹夫)에 남해왕(南解王)으로 휘(諱)는 민(慜: 朴氏)이며, 그 아들 유리왕(儒理王)은 박치리(朴治理)이고, 석탈
해왕『昔脫解王 : 탈해이사금(脫解 尼師今)』은 남해왕(南解王)의 사위요, 유리왕(儒理王)의 매부(妹夫)이다. 부마(駙馬)의 배위는 박
씨(朴氏)로 신라 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딸이다.
○5世 이석(李奭) : 신라인, 각간(角干)은 신라 십칠 관등(十七官等) 가운데 첫째 등급(等級)의 벼슬이다.
진골(眞骨) 이상만이 오를 수있었다. 관직은 각간 좌령승(角干左令丞), 소시부터 문장과 서예가 유명하여 유리왕(儒理王)조 때, 중위도
위(中尉都尉), 대사관박사(大司冠博士),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고, 탈해왕(脫解王)때 좌보상등공신(左輔上等功臣) 각간(角
干) 좌령승(左令丞) 등의 직에서 현상(賢相)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대아찬(大阿餐)으로서 수천우두(授千牛頭)하여 진골(眞骨)로서 인
화선정(人和善政)의 영상(領相)이었다.
○5世 이문상(李文祥) : 신라인, 자(字) 선장(善長), 호(號) 박헌(朴軒), 시호(諡號)는 문장(文莊). 관직은 대아찬 좌령승(大阿餐 左令
丞), 소시부터 문장과 무예가 뛰어나 파사왕(破娑王)조 때 등관하고, 중위박사(中尉博士)로서 대농승(大農丞), 좌내사(左內史) 영(令)
으로 누차 천거되었으며, 대보상등정국공신(大輔上等定國功臣) 좌령승(左令丞) 대아찬(大阿餐)을 역임하였으며, 덕행문장(德行文
章)에 탄복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은 송헌선생(松軒先生)으로 불리었으며, 증직(贈職)으로 좌내사(左內史) 시중(侍中) 태위령(太
尉令) 상서사(尙書事)로 받고, 법흥왕(法興王)은 문장공(文莊公)으로 시호(諡號)하고, 계림후(鷄林候)에 추봉(追封)하였다.
○7世 이방(李昉) : 신라인, 자는 두건(斗建), 관직은 어사대부 내사시중 태사령(御史大夫 內史侍中 太史令)으로, 재능과 문장에 덕이 있
어 지마왕(祗摩王)조 때에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집사전적(執事典籍)을 하였고, 일성왕(逸聖王)조 때는 대소가야국(大小伽倻國)과
감문(甘文), 갈문(葛文) 두나라에도 특사로서 지용과 아량으로 우호외교에 대공(大功)을 세우고, 아달라(阿達羅) 왕조 때에는 대보상등
공신(大輔上等功臣) 섭률도위령(攝律都尉令) 상서(尙書)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내사시중(內史侍中) 태사령(太史令) 등 40여 년
간 관직에 몸 바쳐 명상대신(明相大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7世 이구(李昫) : 신라인, 관직은 대아찬 대논령부령(大阿餐 大農令副令), 문장지용(文章智勇)이 형인 이방(李昉)과 같아 세인의 칭송
을 받으며, 누차 전공을 세워 관직에서 중랑장(中郞將), 평시랑 중령(平侍郞 中令), 대농령 부령(大農令 副令), 감철사(監鐵使)로 진골
(眞骨)이며 대아찬(大阿餐) 벼슬을 역임하였다.
○8世 이수장(李秀章) : 신라인, 자(字)는 희창(僖淐), 호(號) 賢主, 관직은 통정사 시중(通政事 侍中), 태사대부(太史大夫)를 역임했으
며, 덕민(德敏)한 성품에 학문을 즐겨 일성왕(逸聖王)조 때 등관하여 내한직각(內翰直閣)으로 왕(王)의 무도함을 조리 있게 교화시켜서
왕도(王道)에 어긋남을 자책반성(自責反省)케 하니 선생을 칭송하여 호를 현주(賢主)라고 하였으며,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입조(立
朝)이후 40여 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며, 도위령(都尉領) 상서사(尙書事)를 역임하였고, 좌우내사 농령(左右內史 農令) 통정사 시중(通
政事 侍中) 태사대부(太史大夫) 등의 국정참여로 나라의 인물이라 세칭 되었다.
○8世 이수엽(李秀曄) : 신라인, 관직은 총재태위 종승령(冢宰太尉 宗承令), 소시적에도 문장이 능했고, 일성왕(逸聖王)의 사위로서 벼
슬이 태상시 박사(太常侍 博士), 간의대부(諫議大夫) 총재태위 종승령(冢宰太尉 宗承令) 등을 역임하였다.[駙馬]
○9世 이수(李綏) : 신라인, 자(字) 문우(文禹), 관직은 대순사사좌우령(大純事司 左右令), 아달라왕(阿達羅王)조 때 입조(入朝)하여 연
일현령(延日縣令)으로, 벌휴왕(伐休王)조 때에는 보국한림좌판원정광(輔國翰林 左判院正匡)으로 있었고, 나해왕(奈解王)조 때에는
복사 대각간(僕射大角干)으로서 어명(御名)에 따라 골포(骨浦), 칠포(漆浦), 우포(右浦) 등 삼국을 무사장군(武士將軍)과 더불어 문무
모사(文武謀士)로 진압하고 접찰어사(接察御使)로서 뿐만 아니라 많은 공적을 세우고 다시 입조(入朝)하여 대보상등공신(大輔上等功
臣)에 대순사사 좌우령(大純事司左右令)으로 우천두(牛千頭)를 받는 아찬(阿餐)에 이르렀다.
○10世 이기정(李起貞) : 신라인, 자(字) 야방(耶邦), 시호(諡號)는 충선공(忠宣公), 관직은 보국대장군 대아찬 상주국(輔國大將軍 大阿
餐 上柱國), 중화유지과인(重和裕智過人)하여 첨약지절구경문(瞻略志節九經文)으로 나해왕(奈解王)조 때 등조하여 태위문하(太尉
門下) 진사(秦事) 정사당(政事堂) 대각간(大角干)에 오르고, 조분왕(助賁王)조 때는 모사장군(謀士將軍)으로 첨해왕(沾解王) 때에는
벌사국(伐沙國) 전시(戰時)에서 충의지장(忠義之將)인 모사장군(謀士將軍)의 면모를 세우고, 상등대보공신(上等大輔功臣) 보국대장
군(輔國大將軍)을 거쳐 대아찬(大阿餐) 상주국(上柱國)으로서 수우천두(授牛千頭)하고 법흥왕(法興王) 때는 충선공(忠宣公)이라 시
호를 받았다.
○11世 이미선(李美善) : 신라인, 자(字)는 자장(自章), 호(號)는 운제선생(雲悌先生), 시호는 문경공(文敬公), 관직은 광록대부 태사령
(光祿大夫 太史令), 학문과 도덕군자의 성관의력(性寬儀力)함을 첨해왕(沾解王)이 전해 듣고 인덕(仁德)을 살피니 과연 그 의행(儀行)
에 감복하여 국정참여를 명하고 친근(親近)하였다.
미추왕(味鄒王)조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 대광보국(大匡輔國) 상등정국공신(上等定國功臣) 좌우령승(左右令丞)과 진골(眞骨)로서
아찬(阿餐)벼슬에 대광태위(大光太尉)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령(太史令) 등 찬란한 관직을 노령(老齡)으로 은퇴하여 경치 좋은 금
오산곡(金鰲山谷)에 들어가 생전에 좋아하던 문장으로 인덕(仁德), 성선(性善), 충신(忠信), 효제(孝悌)와 송죽도리(松竹桃李)의 식수
권학(植樹勸學) 등 수덕현행(修德賢行)으로 97세에 종신하니 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운제선생(雲悌先生)이라 하여 모두들 칭송하였으
며 태종(太宗)은 여선기행(如仙其行)을 보령(報靈)의 뜻으로 문경공(文敬公)이라 시호하였다.
○11世 이지렴(李之廉) : 신라인, 이미선(李美善)의 동생으로 문장과 학식이 유능하여 형제가 같이 등관하고 대보상등정국공신(大輔上
等定國功臣)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대농령(大農令) 아찬(阿餐) 상주국(上柱國)으로 진골품계(眞骨品階)였다.
○12世 이성립(李成立) : 신라인, 자(字)는 경행(景行), 관직은 대사간(大角干), 대보상등 대아찬(大輔上等 大阿餐), 청결강직(淸潔剛
直)한 성품으로 학식이 풍부하여 유례왕(儒禮王)의 사위로 입조하여 집사과충직천지(執事果忠直遷知) 진사시랑(秦事侍郞) 평안도 도
총관(平安道都摠管), 정해군령(定海軍令)과 지금의 밀양(密陽)에서 좌내사(左內史) 통정사(通政事) 등을 지낸후 대각간(大角干)으로
서 진골(眞骨)의 대아찬(大阿餐)에 우천두(牛千頭)의 록을 받았던 기임왕(基臨王) 때의 현상(賢相)이다.(駙馬)
○12世 이원립(李元立) : 신라인, 자(字)는 인숙(仁淑), 관직은 길찬(吉餐), 이성립(李成立)의 아우로 형제간에 문장이 출충해 유례왕(儒
禮王)과 기임왕(基臨王)의 두 조정에 등관하여 상등공신(上等功臣) 대보사마(大輔司馬) 길찬(吉餐) 등 진골계 관직을 역임했다.
○13世 이서(李曙) : 신라인, 자(字)는 맹기(孟己), 관직은 대아찬 상주국(大阿餐 上柱國), 학문과 효제지도행(孝悌之道行)으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기임왕(基臨王)조에 등관되어 남기정(南畿停)의 도총관(都摠管) 정해군령(正海軍令)과 울주(蔚州)에서 여러 차례 아
척간(阿尺干)에 천거(遷擧)되었고 대보상등공신(大輔上等功臣) 농승령(農丞令) 충공좌(忠恭坐) 정사당(政事堂), 성골. 진골 품계만
이 가질 수 있는 대아찬(大阿餐) 상주국(上柱國)에 올랐다.
○13世 이요(李曜) : 신라인, 청백사(淸白吏)로 관직은 대각간(大角干), 이서(李曙)의 아우로 문학에 깊어 현사(賢士)로 유명하여, 박사
(博士) 협률도위(協律都尉)로, 상서사(尙書事)를 거쳐 대각간(大角干)으로 상등(上等)으로 진골품계(眞骨品階) 대아찬(大阿餐) 벼슬
로서 유명한 현상(賢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4世 이계훤(李啓烜) : 신라인, 관직은 각간 상주국(角干 上柱國), 정능문학(正能文學)하여 기임왕(基臨王) 때 나마(奈麻)의 주사(主
事)에 천거(遷擧)되어 북기정(北畿停)의 도독(都督)으로 있었고, 백제(百濟)와 상침시(相侵時)에는 도독원병(都督援兵)으로서 백제
군(百濟軍)을 대파한 전공으로 등관(登官)되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등공신(上等功臣) 각간(角干) 아찬(阿餐) 상주국(上柱國)
으로 흘해왕(訖解王)조, 기임왕(基臨王)조 등에서 명상(明相)임을 사기(史記)에서 볼 수 있다.
○15世 이걸(李傑) : 신라인, 관직은 광록대부 태사령(光祿大夫 太史令), 소웅 위력(少雄偉力)하여 흘해왕(訖解王)조에 등관 연일현감
(延日縣監)의 누차 천거(遷擧)로 낭중령(郞中令)에 오르고 내물왕(奈勿王)의 사위로서 박사령(博士令) 대보정국공신(大輔定國功臣)
복령(復令) 참예(參預) 통정사(通政事) 태위(太尉)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령(太史令)의 관직에 올랐다.(駙馬)
○15世 이돈(李伅) : 신라인, 관직은 대각간 사마 대길찬(大角干 司馬 大吉餐), 소능무예(少能武藝)의 지용과인(智勇過人)으로 흘해왕
(訖解王)조 때에 집사과(執事果) 사직(思直)에 오르고, 내물왕(奈勿王) 때에는 상등공신(上等功臣)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대각간
(大角干) 사마(司馬) 대길찬(大吉餐) 벼슬을 지냈다.
○16世 이선장(李宣璋) : 신라인, 자(字)는 사수(思壽), 시호는 충원공(忠元公), 관직은 칠성현령(七城縣令), 상대등 충공좌 정사당 태위
(上大等 忠恭坐 政事堂 太尉), 문장이 수려하고 지략이 투철하니 내물왕(奈勿王)조에 등관(登官)하여 칠성현령(七城縣令)으로 있었
고, 실성왕(實聖王)조에는 태상시(太常寺) 박사(博士) 시랑(侍郞)에 눌지왕(訥祗王)조에서는 상대등(上大等) 충공좌(忠恭坐) 정사당
(政事堂) 태위(太尉) 정승(政丞)을 지내고 증직(贈職)에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사령(太史令)에 충원공(忠元公)으로 시호 하였다.
○16世 이혁(李赫) : 신라인, 자(字)는 공계(公季), 시호는 신충공(信忠公), 관직은 증 간의대부(贈 諫議大夫), 형 이선장(李宣璋)을 닮
아 성격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선속전래(善屬傳來)하여 도학(道學)을 연독(硏讀)하고 수많은 제자를 두었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청백한 부인도 의장(衣裝)에 극히 신경을 쓰니 새 옷을 만들어 드리지 못하여도 항시 세탁하여 부군(夫君)의 위신에 손상이 없도록 하여
한 가지 옷에 백번이상이나 기워드리니 주위 사람들은 선생을 소위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칭하며 도덕군자(道德君子)로 널리 알려져
법흥왕(法興王)께서도 백결선생(百結先生)의 절지(節志)를 칭송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증직하고 신충공(信忠公)에 시호하였음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밝혀져 있다.
○17世 이기첨(李基瞻) : 신라인, 자(字)는 존직(尊直), 시호는 충순공(忠順公, 관직은 대아찬 상주국(大阿餐 上柱國), 관후한 성품과 유
문재예(儒文才藝)에 효제덕행(孝悌德行)을 조정에서 전해 듣고 자비왕(慈悲王)의 부름으로 소지왕(炤知王)조를 거쳐 박사시(博士寺)
대농령승(大農令丞)으로 참예정사(參預政事)하고 충공왕(忠恭王) 때에는 재상(宰相)직인 총재태위(冢宰太尉) 대아찬(大阿餐) 상주
국(上柱國)에 참여하니 시호(諡號)는 충순공(忠順公)이다.
○18世 이인흥(李仁興) : 신라인, 자(字) 화행(和行), 호(號) 도간(道干), 시호(諡號 ) 문열공(文烈公), 관직은 증태사령 광록대부 평림후
(贈 太史令 光祿大夫平林候), 문장수재(文章秀才)가 많다지만 시대적으로 당시 그의 능력을 당할 자가 없었다.
소시부터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깊은 산림속으로 들어 수종(樹種)을 선종(選種)하여 치산(治山)하고 많은 수도 덕행(修道德行)의 학
자를 배출하니 세칭 도천선생(道千先生)이라 하였다.
인덕수도학(仁德修道學)과 효제미속(孝悌美俗)으로 유명하여 지증왕(智證王)의 어명(御命)으로 입조하니 실력을 시험하고 과연 현자
(賢者)라 칭송하며 내사(內史) 박사령(博士令) 진사(秦事)에 천거되어 협률도위(協律都尉)로 이제까지 시조(始祖) 이래 제정되었던
제반 관계칭호(官階稱號)와 신라 덕업일(新羅 德業日)의 호칭(呼稱) 또는 율법칭호(律法稱號), 율칙(律則) 등을 제법국호(諸法國號)
및 연호칭(年號稱), 지방명칭(地方名稱), 자타관고칭(自他觀故稱), 국가제후칭(國家帝候稱), 왕칭(王稱), 존호등차칭(尊號等次稱),
신등정의칭(臣等定議稱), 신라시호(新羅諡號) 증법(贈法) 등 칭호제례(稱號制禮), 제상복칭(制喪服稱) 사방지의(四方之義), 신자(新
字), 덕업 직위호칭(德業 職位稱號) 등을 제정하는데 수정 및 검토케 하는 풍부한 학식을 자량(自量)껏 활용하여 조정에 만전을 기하니
그이 고귀함이 세상에 드러났고 이웃 삼한제국(三韓諸國)에서는 대구(大懼)하며 진실로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고 감탄하였다.
왕명(王命)으로 30여 년간 국가법조연구(國家法條硏究)에 갈력(喝力)하고 연로(年老)를 사유로 퇴임한 후에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바탕으로 삼강오륜법(三綱五倫法) 등의 30여 권과 세보(世譜) 20여 권 등을 집필(執筆)하여 후세에 전래하였고, 73세로서 생을 마쳤
다.
역대 왕실과 조정의 중신들은 항시 선생에 감사하였으며, 법흥왕(法興王) 23년(536)에는 선생에게 증직(贈職)으로 태사령(太史令) 광
록대부(光祿大夫) 평림후(平林候)에 추증(追贈)하고 문열공(文烈公)이라 시호하였다.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은 장문(章文) 혜택을 찬사(讚辭)하여 장혜왕(章惠王)이라 추봉(追封)하고 기충기 충백세충(其忠其忠百歲
忠)이며 인흥인흥만세흥(仁興仁興萬歲興)하리라고 선생의 은공(恩功)을 영원토록 상기하는데 칙서(勅書)를 내렸다.
○19世 이확(李木廣) : 신라인, 관직(官職) 어사대부 대농령(御史大夫 大農令), 음덕(陰德)으로 선사적세(善事寂世)하여 법흥왕(法興
王), 진흥왕(眞興王)조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좌내사(左內史) 평장사(平章事) 도위시중(都尉侍中) 박사령(博士令), 어사대부(御
史大夫) 대농령(大農令)을 역임하였다.
○19世 이락(李樂) : 신라인, 자(字) 智良, 시호(諡號) 문정공(文正公), 관직(官職) 상서 좌복야 증 대아찬(尙書 左僕射, 贈 大阿餐), 성
순후용의단정(性順厚容儀端正)하여 이십세에 삼한 각지를 배회(徘徊)하며 풍월(風月)을 읊어 문장을 뽐내며 유학(遊學)을 즐기고 등
관(登官)을 피하며 산수유곡(山水幽谷)을 찾았으나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처사(處士)가 분명하여 삼한시인(三韓詩人)으로 널리 알려
져 진흥왕(眞興王)의 명으로 등관(登官)하여 중서문하(中書門下) 간의대부(諫議大夫) 상서 좌복야(尙書 左僕射)를 지냈던바 진평왕
(眞平王) 때에 대아찬[大阿餐(聖·眞骨品階)에 증직(贈職)되고 문정공(文正公)이라 시호(諡號)하였다.
○20世 이선정(李善禎) : 신라인, 관직(官職) 병부령(兵部令), 내사문하 평장사(內史 門下平章事), 역유재식(亦有才識)으로 진흥왕(眞
興王), 진지왕(眞智王), 진평왕(眞平王) 등 삼조정(三朝庭)을 거치는 동안 진흥왕(眞興王) 때 낭중(郎中)으로서 고구려병(高句麗兵)
이 침범(侵犯)했을 때 사마장군(司馬將軍)으로서 김칠부(金漆夫) 등과 더불어 적팔장(敵八將)을 대파(大破)하고 또한 가야국(伽倻國)
과 싸워서도 크게 이겼으며 잠기현(岑旗縣) 봉전(峰戰)에서 4성(城)을 획득하는 등 누차에 거쳐 전공(戰功)을 세우니 백제(百濟)에서는
많은 총병장(摠兵將)들이 공(公)의 모사(謀士)에 대장군(大將軍)들과 합세하여 평정(平定)하는 대공(大功)을 세우고 다시 조정에 들어
병부령(兵部令) 내사(內史)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대보공신(大輔功臣) 태사태보(太史太輔) 태중대부(太中大夫) 상주국(上柱國)
등을 지내면서 명문(名門)을 이루었다.
○20世 이광옥(李光沃) : 신라인, 진평왕(眞平王)조에 등관하였다.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딸의 이름이 예향(禮香)이
며, 그 아들은 조표용(曺鑣龍)이다.
○20世 이고지( 李誥之) : 신라인, 관직(官職)은 진흥왕(眞興王)조 시 내사시 대부부경(內史侍 大夫府卿)으로 명상(名相)이라 하였으
며, 삼한유사(三韓遺史)에 실려 있다.
○22世 이태휘(李泰暉) : 신라인, 자(字) 내하(乃夏), 관직(官職) 간의대부 중서령(諫議大夫 中書令), 문장(文章)이 대능(大能)하여 중
원(中原)에 유학(遊學)을 하니 당(唐)나라 무덕왕(武德王)이 공(公)의 높은 식견(識見)을 듣고 유문정(劉文靜)을 비적(斐寂)하여 율법
(律法)을 수정(修正)하라기에 수행(遂行)하니 극히 감복(感服)하였다.
국자(國子) 태학(太學) 감시(監試)를 사문생(四門生) 300여 인 중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及第)하니 당년 22세라 크게 치가(致嘉) 하
며,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안마(鞍馬)까지를 사명(賜命)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예부(禮部) 시랑(侍郞)에 누차 천거 되었다.
30세에 천국(遷國) 하여(善德 3년,634) 당(唐)나라 풍습을 청학(請學)케 하고 진덕왕(眞德王) 2년(648)에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
사(平章事) 간의대부(諫議大夫) 중서령(中書令)등으로 참정(參政)하여 이름을 떨쳤다.
○23世 이우영(李友榮) : 신라인, 자(字) 활진(浩眞), 시호(諡號) 문정공(文貞公), 관직(官職) 대아찬 상주국(大阿餐 上柱國), 소독서문
장(少讀書文章)하고, 진덕왕(眞德王) 2년(648) 왕명(王命)으로 당(唐)나라에 들어가 청병사신(請兵使臣) 특파(特派)되어 구현병(救
顯兵)으로 하여금 백제(百濟)를 공벌(攻伐)케 하였다.
그의 학식(學識)이 능숙함을 전해들은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그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케 하였던 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及第)하니 당태종(唐太宗)은 기뻐하며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세자시강(世子侍講)의 직책을 맡게 하였다. 그
리고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은 9월에 청병특사(請兵特使)를 보내오자 선생의 간청으로 쾌히 승인하고 선생의 문장력을 칭송하였다.
환국(還國)하여 당(唐)의 구원병(救援兵)과 더불어 고구려(高句麗)를 쳐서 대공(大功)을 세우고 협률도위위사(協律都尉衛社) 치
리공신(致理功臣) 내사문하(內史門下) 평장사(平章事) 태위(太尉) 상서좌복사(尙書 左僕射) 대보아찬(大輔阿餐) 상주국(上柱國)의
행직(行職)외에 증직(贈職)으로 대사광록대부(大師光綠大夫) 태위(太尉)와 문정공(文貞公)으로 시호(諡號) 받았다.
○24世 이준(李駿) : 신라인, 자(字) 상민(尙民), 시호(諡號) 문량공(文良公), 관직(官職) 내사시중(內史侍中), 재식(才識)이 풍유(豊
有)하여 문무(文武)· 신문왕(神文王) 양조(兩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내사시중(內史侍中)
상주국(上柱國)에 이르고, 시호는 문량공(文良公)이다.
김춘추(金春秋) 무열왕(武烈王)의 부마(駙馬)이다. 배(配)는 승창부인 김씨(承昌夫人金氏)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여(女)이
다.
○25世 이소(李紹) : 신라인, 자(字) 자순(子順), 시호(諡號) 충효공(忠孝公), 관직(官職) 대아찬 태부(大阿餐 太傅), 학예유재(學藝有
才)하여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행실이 투철하고 효소왕(孝昭王) 때 등관(登官)하여 내사시랑(內史侍郞) 대각간(大角干) 문하평장사
門下平章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수태위시중(守太尉侍中)과 성진골품계(聖眞骨品階)에서 받는 품계로 효표려(孝表閭)를 나라
에서 세워 평소 그의 효성(孝誠)을 본받도록 하였다.
○26世 이경지(李敬智) : 신라인, 자(字) 진여(進餘), 시호(諡號) 충장공(忠莊公), 관직(官職) 시중 상주국(侍中 上柱國), 유능재식(有
能才識)하여 성덕왕(聖德王)조에서 충신좌명공신(忠信佐命功臣) 정광력(正匡歷)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平章事) 대농도위령(大
農都尉令) 상서사(尙書事), 사도통정사(司徒通政事)를 역임 하였다. 증직(贈職)에 태사 은청광록대부(太史 銀靑光祿大夫)로 국가 대
공(大功)에 보답하여 충장공(忠莊公)으로 시호(諡號) 하였다.
○27世 이욱(李頊) : 신라인, 자(字) 정세(定世), 호(號) 명암(明巖), 시호(諡號) 충정공(忠定公), 관직(官職) 대각간 상주국(大角干 上
柱國), 소능역학(少能力學)하고 효제유애(孝悌有愛)로 유명한 가문(家門)에 효성(孝誠)이 투철하여 성덕왕(聖德王)이 조정으로 불러
들여 충효행실(忠孝行實)의 특강을 특별전담(特別全擔)하게 하고 한림시랑(翰林侍郞)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직책을 다하였다.
또 효성왕(孝成王)의 잠저(潛邸)에서 신충공신(信忠功臣)의 특강을 하였고, 경덕왕(景德王)조에서는 협모보리(協謀輔理) 좌명공신
(佐命功臣)으로서 수태위(守太尉) 문하시랑(門下侍郞) 동(同) 중서 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대각간(大角干) 도위령(都尉領) 상
서사(尙書事) 시중(侍中) 판어사대(判御史臺) 상주국(上柱國) 등의 관직에서 충효사실의 교화(敎化)와 사대부 집안의 표본인(標本人)
이 되었다.
○27世 이준(李俊) : 신라인, 자(字) 상민(尙民), 법명(法明) : 공굉(孔宏), 관직(官職) 좌내사(左內史), 효성왕(孝成王) 잠저(潛邸)에서
한림현사(翰林賢士)로서 신충공신(信忠功臣)의 교시(敎示)로 좌내사(左內史)에 있었으며,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상의직장(尙衣直
長) 동정(同正)으로 일찍이 왕(王)과 친했으나 자신의 단명(短命)함을 영화로운 직책에서 떠나 입산수도(入山修道)할 것을 결심하고 창
불사(刱佛寺)에 들어 수신(修身)하다가 748년 무자(戊子)에 친시(親試)에 급제(及第)하여 50세의 노장(老壯)으로서 문장을 과시하였
다.
조정(朝庭)에서는 그의 입조(入朝)를 누차 권유(勤諭)하였으나 그 괴로움을 피하여 삭발(削髮)하고 기속사(祈俗寺)에 들어가 공굉(孔
宏)이라는 법명을 받고 노련한 승려(僧侶)로서 도덕수행(道德修行)에 전념(專念)하기를 20년으로, 단명(短命)했던 자신을 70여 세까
지 연장(延長)하던 처세책(處世策)으로 사치와 영예를 초월한 위인정신(偉人精神)을 높이 평가한 원성왕(元聖王)은 기간(其間) 보국공
적(報國功績)을 칭송하며 그를 본(本)받으라 권하고, 조정이 어지럽거나 국사가 고르지 않을 때는 그의 영전(靈前)에 친히 분향(焚香)하
며, 자위(自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8世 이원장(李元長) : 신라인, 자(字) 종보(宗甫), 시호(諡號) 문선공(文宣公), 관직(官職)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문무지용(文武
智勇)이 과인(過人)하여 경덕왕(景德王) 때 진양도독부 도총관(晋陽都督府都摠管) 정해군(正海軍)에 등관(登官)하여 좌내사 태위랑
중령(左內史太尉郞中令)에 누천(累遷)되었고, 혜공왕(惠恭王)조에서 내사시랑(內史侍郞) 문하 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
으로 명성(名聲)이 높았다. 시호(諡號)는 문선공(文宣公)이다.
○29世 이한로(李漢老) : 신라인, 자(字)는 현여(玄如), 시호(諡號)는 문순공(文純公), 관직(官職)은 내사시중(內史侍中), 원성왕(元聖
王) 즉위할 때(785년) 보조치리공신(輔助致理功臣)으로 등관(登官)하여 태사태보 협률도위(太師太保協律都尉) 대농박사령 문하평장
사(大農博士令門下平章事) 내사시중 상주국(內史侍中上柱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국가(國家)에 헌신(獻身)하니 후에
문순공(文純公)으로 시호(諡號)하여 영혼(靈魂)에 보은(報恩)하였다
○30世 이계양(李季陽) : 신라인, 자(字)는 순지(順知), 관직(官職)은 문하시중 상주국 태사(門下侍中 上柱國 太師), 애장왕(哀莊王) 3
년(802)에 등제(登第)하고 헌덕왕(憲德王) 등 양조(兩朝)에서 춘방한림학사(春榜翰林學士) 내사 중서사인(內史中書舍人) 시중 문하
평장사(侍中門下平章事)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서 다시 문하시중 상주국(門下侍中上柱國) 태사은청광록대부(太史銀靑光祿大
夫)에 승진하였다.
○31世 이도(李陶) : 신라인, 자(字)는 상부(常夫), 호(號)는 모계(茅溪), 시호(諡號)는 문숙공(文肅公), 관직(官職)은 상서(尙書), 815
년 을미(乙未)에 등제(登第)하고 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809)에도 중시(重試)에 급제(及第)하여 한림원(翰林院) 태학사(太學士)
승선관(承宣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수태위 평장사(守太尉平章事)하고, 희강왕(僖康王) 원년(元年) 836년에는 협률모위사 치
리공신 도위령(協律謀衛社治理功臣都尉令) 시통정 상서사(侍通政尙書事)에 이르고, 그의 능수능란(能秀能爛)한 별호(別號)가 모계
선생(茅溪先生)이라 불리우고 시호(諡號)는 문숙공(文肅公)으로 증시(贈諡)되었다.
○32世 이사언(李嗣彦) : 신라인, 자(字)는 중인(重仁), 호(號)는 송계(松溪), 시호(諡號)는 문의공(文義公), 관직(官職)은 태사령(太史
令), 희강왕(僖康王)때, 등제(登第)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서 백성의 편에서 선정(善政)하니 흉역(凶逆) 김명소(金明所)로부터
피습(被襲)을 당하여 크게 상처를 입자 세인(世人)들에는 선생(先生)의 억울함을 통탄(痛嘆)하였다.
신무왕(神武王)이 시행(施行)하던 중시과거(重試科擧)에 최문창(崔文昌 : 文昌候 崔致遠)과 같이 급제(及第)하여 한림원학사(翰林
院學士)로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직위(職位)를 하고 후에 왕명(王命)으로 태자사부(太子師傅)에 위촉(委囑)되자 한림학사(翰
林學士)의 직책(職責)을 완수(完遂)하니 과연 위대한 스승이라고 왕실(王室)의 평판(評判)을 받았다.
기후(其後)에도 문하시중(門下侍中) 태사령(太史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서 국정(國政)에 참여하니 세인(世人)들은 송계
선생(松溪先生)이라 불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의공(文義公)으로 증시(贈諡) 되었다.
○33世 이기(李岐) : 신라인, 자(字)는 공숙(孔淑), 관직(官職)은 상서좌복야(尙書 左僕射), 문성왕(文聖王) 때 등제(登第)하여 한림학
사(翰林學士) 중서시랑(中書侍郞) 간의대부(諫議大夫) 내사 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의 관직으로 참
정(參政) 하였다.
○33世 이위(李渭) : 신라인, 자(字)는 경지(涇之), 호(號)는 조은(釣隱), 시호(諡號)는 충숙공(忠肅公), 증봉(贈封) 車城君, 관직(官職)
은 성주장군(城主將軍), 증『贈 : 공조전서후 벽상공신 보국상대장군(工曹典書 後壁上功臣 輔國上大將軍)』, 분적(分籍) 慶州李氏에
서 수분적 차성이씨 시조(首分籍 車城李氏 始祖), 문무지용과인(文武智勇過人)하여 헌안왕(憲安王)조 원년(元年,857) 무과(武科)에
18세로 급제(及第)하고, 아버지 경주이씨(慶州李氏) 32세(世) 중서사인(中書舍人) 휘 사언(諱嗣彦)과 함께 흉적(凶賊) 김명소(金明
所)에게 피습(被襲)당해 상처(傷處)를 입자 차성『車城 : 機張縣의 古號』에 피해서 그 고통을 받다가 이후 계속 그곳에서 살았다.
경문왕(景文王) 14년(874)에 국란평정공신(國亂平定功臣)으로 차성군(車城君)에 봉(封)해 지면서 아울러 관직(官職)이 성주장군(城
主將軍)에 오르고 록상서사(錄尙書事) 하였다. 연로(年老)하여 직을 물러나서도 해간학사(海間學士)에 임하여 학문을 권장하고, 훈도
하며, 나무를 심고, 바다에 고기를 놓아기르며 은거(隱居)하였다고 하여, 호(號)를 조은(釣隱)으로 얻었다.
마침내 신덕왕(神德王) 4년(915)에 돌아가시매 국가에서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치제(致祭)하였다. 아울러 무덤을 차성군릉(車城君
陵)이라 명명(命名)하고 그 무덤은 기장현(機張縣, 古號 車城) 만화리(萬化里) 뒷산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2년(983)에 공조전서후 벽상공신 (工曹典書後壁上功臣) 보국상 대장군(輔國上大將軍)에 추증(追贈)되고, 시
호(諡號)는 충숙공(忠肅公)으로 내렸다. 이후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차성이씨(車城李氏) 시조(始祖)가 되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월성김씨(月城金氏)로 문성왕(文聖王)조 정양공(貞兩公)의 여(女)이다. 묘소(墓所)는 삽량주(歃
良州) 양주군(良州郡 : 현 梁山郡 鐵馬面) 고촌리(古村里) 북등(北登) 간좌(艮坐)에 있다.
○34世 이희두(李禧斗) : 신라인, 관직(官職)은 문하시중 상주국(門下侍中 上柱國), 헌안왕(憲安王) 때 중제(仲弟) 진두(辰斗)와 같이
중원(中元)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니 중국(中國)에서는 형제(兄弟)의 문장 솜씨를 높이 받들어 한림원(翰林院)에서 한림
학사(翰林學士)로서 직무 하다가 3년 만에 환국(還國)하여 경문왕(景文王) 2년(862)에 별설(別設)한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또 형
제(兄弟)가 같이 급제(及第)하니 세인(世人)들은 과연 명문가(名文家)의 귀족(貴族)이라고 칭찬이 드높았으며 등관(登官)하여 중서사
인(中書舍人) 상서평장사(尙書平章事) 문하시중 상주국(門下侍中上柱國)에 오르고 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추증(追贈)
되었다.
○34世 이진두(李辰斗) : 신라인, 관직(官職)은 병부령(兵部令), 형 희두(禧斗)와 함께 문장이 유능하여 형제가 헌안왕(憲安王) 때 중국
(中國)에 들어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고 한림원(翰林院)에 드니 한림형제(翰林兄弟)라고 명성이 높았다.
3년 후에 형과 같이 귀국(歸國)하여 경문왕(景文王) 2년(862)에 시행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중시(重試)에 형제가 급제(及第)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내서사인(內書舍人) 병부상서(兵部尙書) 등을 역임했다.
○35世 이성(李誠) : 신라인, 자(字)는 중위(仲渭), 호(號)는 법헌(法軒), 시호(諡號)는 문의공(文懿公), 관직(官職)은 시중(侍中), 문장
이 좋아 재식(才識)이 정민(精敏)하고 예서(隸書)에 능(能)하여 역대 필사로서 유명하였다.
헌강왕(憲康王)조 때 급제(及第)하고 등관(登官)하여 한림원(翰林院)의 태학사(太學士)로서 중서간의대부(中書諫議大夫) 내사성평
장사(內史省平章事) 내사상서(內史尙書)로서 정사(政事)에 참여하다가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임해(臨海)에 퇴거(退去)했다.
총명(聰明)한 학사(學士)들에게 훈도권학(訓導勸學)하고 근식목수(勤植木樹)하며 양어방생(養魚放生)하는 것으로 자연을 애호하며
20여 권의 필적문집(筆蹟文集)과 30여 권의 세보문집(世譜文集)을 전가(傳家)하고 훌륭한 문하생(門下生)들을 많이 배출(輩出)하여
나라의 장래 인재(人才)를 육영(育瑛)하며 일생(일생)을 국가를 위하여 몸 바치니, 정강왕(定康王)이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시
중령(侍中領)에 사봉(賜封)하고 법헌선생(法軒先生)이라 받들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의공(文懿公)에 추증(追贈)되었다.
○35世 이백전(李白全) : 신라인, 관직(官職)은 내사시중 대부경(內史侍中 大府卿), 병부령(兵部令) 진두(辰斗)의 장남(長男)으로 관직
이 내사시중 대부경(內史侍中大府卿)이다.
○35世 이전지(李詮之) : 신라인, 관직(官職)은 내사성촉내사대부(內史省屬 內史大夫), 병부령(兵部令) 진두(辰斗)의 차남(次男)으로
문무용암(文武勇巖)하여 내성사 시중(內省事 侍中) 상등대장군(上等大將軍)에 등관(登官)되었다가 진흥왕(眞興王) 때에는 내사성속
(內史省屬)의 내사대부(內史大夫)를 지내며 국정(國政)에 참여하였다.
○36世 이공(李恭) : 신라인, 관직(官職)은 보국상대장군상서사(輔國上 大將軍 尙書事), 백전(白全)의 장자(長子)로서 보국상(輔國上)
대장군(大將軍) 상서사(尙書事) 하였다.
○36世 이한(李翰) : 신라인, 자(字)는 견성(甄城). 관직(官職)은 사공(司空), 백전(白全)의 차자(次子)로서 문장력(文章力)이 탁월(卓
越)하고 덕망(德望)이 높아 문성왕(文聖王)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상서사(尙書事) 어사(御史) 중승상(中丞相) 상주국(上柱
國)의 찬란한 관직에 올랐고 후에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고 대대로 등관되었으며 배위(配位)는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11세손으
로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여(女)이며, 완산파[完山派(全州)]로 분파(分派)하였다.
○36世 이원(李元) : 신라인, 관직(官職)은 중서시랑(中書侍郞), 판원사(判院事) 상주국(上柱國) 중서시랑(中書侍郞)의 관직(官職)에
서 신덕왕(神德王)을 호종(扈從)하고 당(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입국(入國)했다가 927년 국내에서는 견훤란(甄萱亂)이 일어나자
진압(鎭壓)되기를 기다리던중 신덕왕(神德王)이 노환(老患)으로 작고(作故)하자 같은 해 63세(歲)로 끝내 환국(還國)치 못하고 그 곳
에서 별세(別世)하였다.
○37世 이자연(李自延) : 신라인, 관직(官職) 문하시중 상주국(門下侍中上柱國)
○37世 이영장(李令長) : 내사시중(內史侍中)
○38世 이천상(李天祥) : 신라 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38世 이사(李思) : 신라 말, 청도태수(淸道太守)
○39世 이광희(李光禧) : 아척간(阿尺干)
○39世 이개(李開) : 신라 말, 자(字)는 춘계(春桂), 고려가 건국되자 태조의 제안을 받아들여 합천호장(陜川戶長)을 지냈다. 시조 은열왕
(恩烈王) 이알평(李謁平)의 39세(世)로 강양군(江陽君)에 봉군되고 조선 태종 때 강양(江陽)이 합천으로 개칭되어 뒤에 본관을 합천으
로 삼아 경주이씨에서 분적 하였다. 합천이씨 분적(陜川李氏分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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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이거명(李居明) : 신라인, 관직(官職)은 소판(蘇判), 소판(蘇判)이라는 관직(官職)은 신라시대(新羅時代) 골품제도(骨品制度)
의 성골(聖骨). 진골품(眞骨品)만이 천거(薦擧)되던 관직으로 신라 사회계급(社會階級)의 귀족(貴族)만이 봉작(封爵)될수 있었고, 통
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왕(王)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서부터 혜공왕(惠恭王) 때까지는 진골계(眞骨系)에서 왕위(王位)에
올랐던 골품계급사회(骨品階級社會)였음을 알 수 있다.
혁거세(赫居世)를 양육(養育)하여 다른 5촌장(村長)과 더불어 왕(王)으로 추대(推戴)하며 신라(新羅)를 창업(創業)한 양산촌장(楊山
村長)이고,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된 비조(鼻祖) 알평(謁平)의 36세손으로서 전란(戰亂)으로 일시(一時) 실보시(失譜時) 보첩
기록(譜牒記錄)에 원대손(遠代孫)으로 1세(世)라 표기(標記)하였으나 이제 세계(世界)가 분명(分明)하게 되었다. (舊譜 遠代孫)
○2世 이금현(李金現) : 신라인, 관직(官職)은 각간(角干), 재상(宰相),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친자(親子)로서 문무식재(文武識
才)가 탁월(卓越)하여, 병부령(兵部令) 대아찬(大阿餐) 각간(角干)으로서 재상(宰相)을 겸직(兼職)하던 명상(名相)이다.
○3世 이금서(李金書) : 신라 말, 관직(官職)은 랑중(郞中), 신라(新羅) 골품 계급사회(骨品階級社會)의 귀족(貴族)으로서 중국 중원(中
國中原)에 들어가 수학(修學)하여 태수(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의 관직(官職)에 있다가 신라(新羅)가 패망(敗亡)하여 경순왕(敬順
王)이 고려(高麗)에 양위(讓位)하고 입조(立朝)한 후 환국(還國)하였고, 배위(配位)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로서 경순왕〔敬順王 : 諱
傅)의 3녀(女)이다.(駙馬)
○4世 이윤홍(李潤弘) : 신라 말, 병부령(兵部令), 재상宰相)
[고려조]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으로부터
○39世 이윤장(李潤張) : 자(字) 천우(天佑).호(號) 백오(白烏).시호(諡號) 문성(文成).대장군(大將軍). 평창이씨분적(平昌李氏分籍)
○39世 이윤원(李潤遠) : 자(字) 춘계(春季)· 시호(諡號) 충익(忠翊)·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가평이씨 분적(加平李氏分籍 )
○5世 이승훈(李承訓) : 시랑(侍郞)
○5世 이승겸(李承謙) : 판례부사(判例部事)
○6世 이주복(李周復) : 좌사간(左司諫)
○6世 이재정(李齋廷) : 시랑(侍郞)/ 무후(无後)
○6世 이주좌(李周佐) : 상서(尙書)/ 아산이씨 분적(牙山李氏分籍)
○7世 이칭(李偁) : 문하시중(門下侍中)
○7世 이우칭(李禹偁) : 문하시중(門下侍中) / 재령이씨 분적(載寧李氏分籍)
○8世 이치연(李侈連) : 문하시중(門下侍中)
○9世 이총섬(李寵暹) : 문하시중(門下侍中)
○10世 이춘정(李春貞) : 부사(府使)
○10世 이춘림(李春林) : 문하시랑(門下侍郞)
○11世 이현복(李玄福) : 생원(生員). 좌복야(左僕射) / 독자(獨子)
○11世 이녹천(李錄千) : 이부상서(吏部尙書)
○12世 이선용(李宣用) : 군윤(軍尹)
○12世 이신우(李申佑) : 경흥군(慶興君). 병부상서(兵部尙書)
○13世 이승고(李升高) : 보윤(甫尹)
○13世 이양식(李陽植) : 좌복야(左僕射) / 우계이씨 분적(羽溪李氏分籍)
○13世 이작량(李作良) : 천호장(千戶長)
○14世 이득견(李得堅) : 직장(直長)
○14世 이선경(李善景) : 사간(司諫) / 이작량(李作良)의 장자(長子)
○14世 이정핵(李廷翮) : 낭중(郎中). 어사 중승(御史中丞)
○15世 이핵(李翮) : 자(字) 만리(萬里). 호(號) 열헌(悅軒).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15世 이방열(李方烈 : 대장군(大將軍) / 월성군파
○15世 이숙진(李淑眞) : 전중서사인(前中書舍人),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 시랑공파 파조
○16世 이인정(李仁挺) : 호(號) 성암(誠庵). 문하평리(門下評理) /평리공파 파조
○16世 이진(李瑱) : 임해군(臨海君). 호(號) 동암(東庵). 시호(諡號) 문정(文定). 검교정승(檢校政丞)
○16世 이세기(李世基) : 호(號) 송암(松巖). 시호(諡號) 문희(文僖). 검교정승(檢校政丞)
○16世 이임간(李林幹) : 일명 직간( 直幹). 평장사(平章事) 정승(政丞) / 장수이씨분적(長水李氏 分籍)
○16世 이유신(李裕臣) : 예의판서(禮儀判書)
○16世 이신유(李臣裕) : 예의판서(禮儀判書)/판전공 강의 아들
○17世 이관(李琯) : 호(號) 이암(怡菴). 가락군(駕洛君)
○17世 이천(李蒨) : 자(字) 군실(君實). 호(號) 국당(菊堂). 시호(諡號) 문효(文孝).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평장사(平章事)
○17世 이제현(李齊賢) : 자(字):중사(仲思)·호(號):익재(益齋)·시호(諡號):문충(文忠)·문하시중(門下侍中)
○17世 이지정(李之正) : 대호군(大護軍) /호군공파 파조
○17世 이매(李邁) : 부정(副正) / 부정공파 파조
○17世 이과(李薖) : 상서(尙書) / 상서공파 파조
○17世 이수(李蓚) : 호(號) 사인(舍人)·중서사인(中書舍人) / 사인공파 파조
○17世 이원무(李元茂) : 중랑장(中郞將) / 판전공 강의 증손.
○17世 이극량(李克良) : 사성(司成)
○17世 이손보(李孫寶) : (감찰어사(監察御史)
○18世 이수득(李壽得) : 문하시중(門下侍中) / 이암공(怡菴公) 관(琯)의 장자(長子).
○18世 이복득(李福得) : 민부상서(民部尙書) / 이암공(怡菴公) 관(琯) 의 차자.
○18世 이봉생(李鳳生) : 판윤(判尹) / 재령이씨로 이적해 감.
○18世 이서종(李瑞種) : 문하시랑(門下侍郞) / 익재공의 장자.
○18世 이달존(李達尊) : 자(字) 천각(天覺). 전리총랑(典理摠郞). (임해군(臨海君).
○18世 이창로(李彰路) : 밀직사(密直司). 개성군(開城君) / 밀직공파 파조
○18世 이경중(李敬中) : 판병부사(判兵部事). 시호(諡號) 문정(文貞)
○18世 이배중(李培中) : 전리판서(典理判書)
○18世 이달충(李達衷) : 자(字) 지중(止中). 호(號) 제정(霽亭). 시호(諡號) 문정(文靖). 정당문학(政堂文學)
○19世 이원(李遠) : 소윤(少尹) / 18世 제정공(霽亭公) 달충(達衷)의 3子
○19世 이신문(李藎文) : 병부시랑(兵部侍郞) / 평리 공(評理公) 인정(仁挺)의 증손임.
○19世 이성림(李成林) : 시호(諡號) 충렬(忠烈).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우시중(右侍中) /이암공 관(琯)의 손자
○19世 이중실(李仲實) : 판서(判書). 이관의 손자. 이복득(李福得)의 차남이다.
○20世 이인경(李仁敬) : 중장랑(中將郞) / 제정 이달충의 손자/개명(改名)> 이승상(李升商)
○19世 이보림(李寶林) : 시호(諡號) 문숙(文肅). 정당문학(政堂文學). 계림군(鷄林君).
○19世 이덕림(李德林) : 사간(司諫) / 운와공 달존의 장자.
○19世 이수림(李壽林) : 추밀원사(樞密院事) /운와공 달존의 차자.
○19世 이학림(李學林) : 부윤(府尹) / 운와공 달존의 3자
○19世 이원익(李元益) : 대사성(大司成)
○19世 이반(李蟠) : 참판(參判) /익재공의 손자. 밀지공 창로(彰老)의 아들.
○19世 이치(李穉) : 선전관(宣傳官) / 국당공 후 문정공 경중(敬中)의 3자(子)
○19世 이립존(李立尊) : 전서(典書)
○19世 이수(李䇕) : 판서(判書) / 제정공(霽亭公) 달충(達衷)의 3자.
○19世 이원(李援) : 부사(府使) / 국당공 후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長子.
○19世 이부(李芙) : 부사(府使) / 국당공 후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次子.
○19世 이휴(李携) : 판윤(判尹) / 국당공 후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次子.
○19世 이당(李堂) : 집의(執義) / 부정공 매(邁)의 손자.
○19世 이반(李畔) : 승지(承旨) / 밀직공 창로의 아들
○19世 이란(李蘭) : 별장(別將) / 부정공파(副正公派) 파조 매(邁)의 손자임.
○19世 이측(李側) : 만호장(萬戶長) / 19世 이란(李蘭)의 동생
○19世 이승(李昇) : 참판(參判) / 상서공 후손으로 안동판관 이성무(安東判官 李成茂)의 증조부이다.
○19世 이자(李 耔) : 자(字) 심성(深性). 감찰(監察) / 판전공파 파조 강(康+羽)의 고손.
○19世 이양오(李養吾) : 직장(直長)
○19世 이존오(李存吾) : 자(字) 순경(順卿). 호(號) 석탄(石灘). 우정언(右正言)
[조선조]
○이담(李擔) : 대언(代言). 승지(承旨)
○이성중(李誠中) : 시호(諡號) 정순(靖順). 좌정승(左政丞)
○이경지(李敬之) : 대제학(大提學)
○이지협(李芝俠) : 좌의정(左議政)
○이영재(李永梓) : 대제학(大提學)
○이원보(李元普) : 이조참의(吏曹參議)
○이군재(李君梓) : 호(號) 벽호(碧湖). 판서(判書)
○이운경(李云敬) : 첨정(僉正)
○이석(李碩) :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이선(李瑄) :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신(李伸) : 도안무사(道安撫使)
○이정포(李廷浦) : 관찰사(觀察使)
○이승상(李升商) : 시호(諡號) 공의(恭懿). 이조참판(吏曹參判)
○이흥상(李興商) : 자(字) 자연(子衍). 시호(諡號) 양희(襄僖). 계림군(鷄林君).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래(李來) : 자(字) 악보(樂甫). 시호(諡號) 경절(京節). 계성군(鷄城君). 공조판서(工曹判書)
○이근(李根) :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천석(李天錫) : 호(號) 애일당(愛日堂). 좌승지(左承旨)
○이지대(李之帶) : 호(號) 죽은(竹隱). 판윤(判尹)
○이희(李暿) : 초명(初名) 안경(安敬). 자(字) 명중(明仲). 호(號) 청호(淸湖).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입회(李立曾) : 부사(府使)
○이감(李堪) : 자(字) 백승(伯勝). 호(號) 검재(檢齋). 대사간(大司諫)
○이철견(李鐵堅) : 자(字) 연부(鍊夫). 시호(諡號) 양평(襄平). 좌찬성(左贊成)
○이문좌(李文佐) : 호(號) 세촌(細村).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이문보(李文輔) : 도승지(都承旨)
○이윤인(李尹仁) : 자(字) 임지(任之).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성(李筬) : 자(字) 백순(百順). 군수(郡守)
○이문형(李文炯) : 시호(諡號) 문안(文安). 이조참판(吏曹參判)
○이계번(李繼潘) : 참판(參判)
○이문환(李文煥) : 자(字) 요장(堯章). 부제학(副提學)
○이문병(李文炳) : 자(字) 덕휘(德휘). 호(號) 어은(漁隱). 군수(郡守)
○이종윤(李從允) : 자(字) 달가(達可). 호(號) 송와(松窩). 목사(牧使)
○이석손(李碩孫) : 자(字) 사언(士彦). 호(號) 둔암(遯菴). 학자(學者)
○이중현(李仲玄) : 자(字) 군집(君執). 호(號) 송재(松齋). 부사(府使)
○이구(李龜) : 호(號) 사미정(四美享). 목사(牧使)
○이상(李詳) : 부정(副正)
○이사균(李思鈞) : 자(字) 중경(重卿). 호(號) 눌헌(訥軒). 시호(諡號) 문강(文剛).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유일(李惟一) : 좌찬성(左贊成)
○이윤(李潤) : 자(字) 존화(存和). 호(號) 사퇴암(思退庵). 참판(參判)
○이수일(李守一) : 자(字) 계순(季純). 호(號) 은암(隱庵). 시호(諡號) 충무(忠武). 형조판서(刑曹判書)
○이몽량(李夢亮) : 자(字) 응명(應明). 시호(諡號) 정헌(定獻). 우참찬(右參贊)
○이세영(李世榮) : 자(字) 덕승(德承). 호(號) 오재(悟齋). 교리(校理)
○이익(李瀷) : 자(字) 동여(洞汝). 호(號) 간옹(艮翁). 사예(司藝)
○이직(李稷) : 자(字) 여지(汝止). 선전관(宣傳官)
○이서(李曙) :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정(李淀) : 판결사(判決事)
○이완(李浣) : 자(字) 징지(澄之). 호(號) 매죽헌(梅竹軒). 시호(諡號) 정익(貞翼). 우의정(右議政)
○이항복(李恒福) : 자(字) 자상(子常). 호(號) 백사(白沙). 시호(諡號) 문충(文忠). 영의정(領議政))
○이인걸(李仁傑) : 자(字) 영숙(英叔). 호(號) 월재(月齋).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이사영(李士英) : 호(號) 삼성재(三省齋). 군수(郡守)
○이경한(李景漢) : 자(字) 불용(不容). 주부(主簿)
○이대정(李大貞) : 호(號) 양진당(養眞堂). 참의(參議)
○이사공(李士恭) : 자(字) 중경(仲敬). 도총관(都摠管)
○이득윤(李得胤) : 자(字) 극흠(克欽). 호(號) 서계(西溪). 군수(郡守)
○이광윤(李光胤) : 자(字) 극휴(克休). 호(號) 양서(瀼西). 목사(牧使)
○이정암(李廷馣) : 자(字) 중훈(仲薰). 호(號) 사류재(四留齋). 시호(諡號) 충목(忠穆). 관찰사(觀察使)
○이정형(李廷馨) : 자(字) 덕훈(德薰). 호(號) 지퇴당(知退堂).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정혐(李廷馦 ) : 자(字) 사훈(士薰). 호(號) 석천(石泉). 이조참판(吏曹參判)
○이개립(李介立) : 자(字) 대중(大中). 호(號) 성오대(省吾臺). 의병장(義兵將)
○이유태(李惟泰) : 자(字) 태지(泰之). 호(號) 초려(草廬). 시호(諡號) 문경(文敬). 학자(學者)
○이인장(李仁張) : 자(字) 춘경(春卿). 호(號) 양곡(陽谷). 주부(主簿)
○이인하(李仁夏) : 자(字) 하숙(夏叔). 병조참판(兵曹參判)
○이성남(李星男) : 철원부사(鐵原府事)
○이정남(李井男) : 한성부윤(行漢城府尹)
○이기남(李箕男) : 자(字) 정숙(靜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승직(李繩直) : 자(字) 승평(繩平). 대사헌(大司憲)
○이양생(李陽生) : 시호(諡號) 양평(襄平). 포도대장(捕盜大將)
○이유경(李有慶) : 호(號) 오풍(五楓). 학자(學者)
○이결(李潔) : 부사(府使)
○이대유(李大㕀) : 자(字) 경인(景引). 호(號) 활계(活溪). 학자(學者)
○이대수(李大遂) : 자(字) 여성(汝成). 금산군수(錦山郡守).
○이대건(李大建) : 자(字) 여립(汝立). 호(號) 오촌(梧村). 증좌찬성(贈左贊成)
○이흘(李忔) : 자(字) 상중(尙中). 호(號) 설정(雪汀). 시호(諡號) 충장(忠章). 지제교(知製敎). 증좌찬성(贈左贊成).
○이시중(李時中) : 호조참판(戶曹參判)
○이시성(李時省) : 자(字) 자삼(子三). 호(號) 기봉(麒峰). 도호부사(都護府使)
○이주(李宙) : 자(字) 대백(大伯). 호(號) 삼수재.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시위(李時衛) : 자(字) 사강(士强).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종준(李宗準) : 자(字) 중구(仲句). 호(號) 용재. 현감(縣監)
○이탁영(李擢英) : 자(字) 자수(子秀). 호(號) 반계(盤溪).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28世 이시발(李時發) : 자(字) 양구(養久). 호(號) 벽오(碧梧). 시호(諡號) 충익(忠翼). 형조판서(刑曹判書). 증영의정(贈領議政)
○이시망(李時望) : 호(號) 국은(菊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경국(李敬國) : 호(號) 각암(恪庵). 부정(副正)
○이돈(李暾) : 자(字) 자승(子昇). 호(號) 한천(寒泉). 의병(義兵)
○이두연(李斗然) :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중협(李重協) : 자(字) 화중(和仲). 호(號) 삼호당(三湖堂).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세장(李世章) :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세필(李世弼) : 자(字) 군보(君輔). 호(號) 귀천(龜川). 시호(諡號) 문경(文敬). 형조참판(刑曹參判)
○이세구(李世龜) : 자(字) 수옹(壽翁). 호(號) 양와(養窩). 목사(牧使)
○29世 이경연(李慶衍) : 이조참판(吏曹參判)
○29世 이경휘(李慶徽) : 자(字) 군미(君美). 호(號) 묵호. 시호(諡號) 익헌(翼獻). 이조판서(吏曹判書)
○29世 이경억(李慶億) : 자(字) 석이(錫爾). 호(號) 화곡(華谷). 시호(諡號) 문익(文翼). 좌의정(左議政)
○29世 이경선(李慶善) : 자(字) 군선(君善). 초휘(初諱) 경징(慶徵). 호(號) 남포(藍浦). 증 예조참의(贈禮曹參議)
○이회원(李會元) : 호(號) 백곡(白谷). 좌승지(左承旨)
○이광좌(李光佐) : 자(字) 상보(尙輔). 호(號) 운곡(雲谷). 영의정(領議政)
○이태좌(李台佐) : 자(字) 국언(國彦). 호(號) 아곡(鵝谷). 시호(諡號) 충정(忠定). 좌의정(左議政)
○이인환(李仁煥) : 자(字) 문백(文伯). 호(號) 생곡(生谷).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송제(李松齊) : 자(字) 수부(秀夫). 호(號) 죽암(竹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종백(李宗白) : 자(字) 태소(太素). 호(號) 목천(牧川). 시호(諡號) 정민(貞敏). 호조판서(戶曹判書)
○이종성(李宗城) : 자(字) 자고(子固). 호(號) 오천(梧川). 시호(諡號) 문충(文忠). 영의정(領議政))
○이렴(李濂) : 호(號) 야헌(野軒). 방어사(防禦使)
○이경양(李敬養) :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경륜(李敬倫) : 참판(參判)
○이경일(李敬一) : 자(字) 원회(元會). 호(號) 청헌(聽軒). 시호(諡號) 효정(孝定). 좌의정(左議政)
○이석규(李錫奎) : 자(字) 치성(穉成). 호(號) 동강(東江). 시호(諡號) 효정(孝貞). 우참찬(右參贊)
○이용상(李容象) : 호(號) 귀호(龜湖).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진원(李進源) : 자(字) 영석(永錫). 좌찬성(左贊成)
○이격(李格) : 자(字) 천로(天老). 호(號) 만오(晩悟). 총관(摠管)
○이계조(李啓朝) : 자(字) 덕수. 호(號) 동천(桐泉). 시호(諡號) 문정(文貞). 이조판서(吏曹判書)
○이광두(李光斗) : 자(字) 윤여(潤汝). 호(號) 강헌(江軒). 직제학(直提學)
○이집두(李集斗) : 자(字) 중휘(仲輝). 호(號) 파서(琶西). 이조참의(吏曹參議)
○이현직(李顯稷) : 통제사(統制使)
○이유응(李裕膺) :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유승(李裕承) : 자(字) 경선(景先). 시호(諡號) 효정(孝貞).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유원(李裕元) : 자(字) 경춘(景春). 호(號) 귤산(橘山). 시호(諡號) 충문(忠文). 영의정(領議政)
○이보영(李輔榮) : 참판(參判)
○이규홍(李圭弘) : 자(字) 원오(元五). 호(號) 오하(梧下). 의병장(義兵將)
○이학영(李鶴榮) : 자(字) 윤명(允鳴). 참판(參判)
○이규팽(李圭祊) :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종필(李鍾弼) : 참판(參判)
○이면우(李冕雨) : 자(字) 주경(周卿). 호(號) 송은(松隱).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건영(李建榮) : 자(字) 사행(士行). 호(號) 춘관(春觀). 관찰사(觀察使)
등과(登科). 음사(蔭仕) 인명(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이주좌(李周佐) (목종)
○이인정(李仁挺) (충렬왕조)
○이진(李瑱) (충렬왕조)
○이세기(李世基) (충렬왕조)
○이부(李槫) (충렬왕조)
○이규(李樛) (충렬왕조)
○이제현(李齊賢) (충렬왕조)
○이천(李蒨) (충렬왕조)
○이달충(李達衷) (충숙왕조)
○이달존(李達尊) (충숙왕조)
○이배중(李培中) (충숙왕조)
○이성중(李誠中) (충목왕조)
○이보림(李寶林 ) (공민왕조)
○이립존(李立尊 ) (공민왕조)
○이준(李蹲) (공민왕조)
○이존오(李存吾) (공민왕조)
○이수림(李壽林) (공민왕조)
○이정견(李廷堅) (공민왕조)
○이학림(李學林) (공민왕조)
○이존사(李存斯) (우왕조)
○이승상(李升商) (우왕조)
○이당(李堂) (우왕조)
○이래(李來) (우왕조)
○이반(李蟠) (우왕조)
○이실(李室) (우왕조)
○이합(李合) (우왕조)
[조선조]
문과(文科)
○이담(李擔) 대언(代言) ○이종(李從) 현령(縣令) ○이백검(李伯黔) 정언(正言) ○이계선(李繼善) 지평(持平)
○이물민(李勿敏) 한림(翰林) ○이문형(李文炯) 참판(參判) ○이윤인(李尹仁) 감사(監司) ○이익(李翊) 참의(參議)
○이문환(李文煥) 승지(承旨) ○이문요(李文饒) 현감(縣監) ○이유인(李有仁) 대헌(大憲) ○이잠(李箴) 부사(副使)
○이익배(李益培) 예좌(禮佐) ○이감(李堪) 부윤(府尹) ○이종윤(李從允) 장령(掌令) ○이거(감정(監正)
○이문좌(李文佐) 전적(典籍) ○이종준(李宗準) 사인(舍人) ○이오(李鰲) 옥당(玉堂) ○이원(李黿) 예좌(禮佐)
○이구(李龜) 예좌(禮佐) ○이사균(李思鈞) 이판(吏判) ○이사종(李嗣宗) 돈정(敦正) ○이문창(李文昌) 전적(典籍)
○이해(李海) 주서(注書) ○이몽량(李夢亮) 참찬(參贊) ○이몽윤(李夢尹) 옹정(甕正) ○이을규(李乙奎) 군수(郡守)
○이영(李瑛) 사인(舍人) ○이사영(李士英) 군수(郡守) ○이정암(李廷馣) 판서(判書) ○이상(李詳) 부정(副正)
○이정형(李廷馨) 이판(吏判) ○이홍업(李弘業) 지평(持平) ○이대진(李大震) 군수(郡守) ○이항복(李恒福) 영상(領相)
○이방준(李邦俊) 현령(縣令) ○이시발(李時發) 형판(刑判) ○이흘(李忔) 참판(參判) ○이정혐(李廷嫌) 승지(承旨)
○이광윤(李光胤) 교리(校理) ○이휘음(李徽音) 학유(學諭) ○이종언(李宗彦) 형좌(刑佐) ○이협(李浹) 사정(寺正)
○이정원(李挺元) 이의(吏議) ○이익(李瀷) 장령(掌令) ○이경상(李慶相) 문학(文學) ○이기영(李奇英) 정랑(正郞)
○이숭언(李崇彦) 부사(府使) ○이경선(李慶善) 현감(縣監) ○이경항(李慶恒) 사예(司藝) ○이상언(李尙彦) 공정(工正)
○이덕배(李德培) 현령(縣令) ○이성룡(李聖龍) 판서(判書) ○이경억(李慶億) 좌상(左相) ○이경휘(李慶徽) 이판(吏判)
○이시성(李時省) 첨지(僉知) ○이시술(李臣術) 이의(吏議) ○이구휘(李耉徽) 판교(判校) ○이달의(李達意)(장령(掌令)
○이경과(李慶果)(지평(持平) 이후(李煦)(판결(判決) ○이박( 李煿) 첨지(僉知) ○이영갑(李英甲) 도사(都事)
○이세장(李世長) 이랑(吏郞) ○이인환(李寅煥) 이참(吏參) ○이굉(李宏) 감사(監司) ○이송제(李松齊) 현감(縣監)
○이정(李楨) 호참(戶參) ○이인엽(李寅燁) 이판(吏判) ○이석억(李碩億) 예좌(禮佐) ○이회원(李會元) 지평(持平)
○이적의(李適意) 지평(持平) ○이세현(李世賢)(예좌(禮佐) ○이인병(李寅炳) 감사(監司) ○이인소(李寅熽) 은대(銀臺)
○이광좌(李光佐) 영상(領相) ○이태좌(李台佐) 좌상(左相) ○이횡(李宖) 감사(監司) ○이몽엽(李夢曄) 지평(持平)
○이서장(李瑞章) 승지(承旨) ○이태화(李泰和) 병좌(兵佐) ○이종백(李宗白) 판서(判書) ○이창석(李昌碩) 첨지(僉知)
○이중배(李重培) ○이태시(李泰始) ○이종성(李宗城) 영상(領相) ○이서곤(李瑞坤) 승정(承正) ○이석표(李錫杓) 전백(全伯)
○이형만(李衡萬) 옥당(玉堂) ○이덕관(李德觀) 찰방(察訪) ○이종적(李宗迪) 대성(大成) ○이성분(李聖盆) 찰방(察訪)
○이수근(李壽根) 찰방(察訪) ○이석상(李錫祥) 승지(承旨) ○이광배(李光培) ○이분만(李盆萬) 첨지(僉知)
○이시일(李時逸) 형랑(刑郞) ○이경양(李敬養) 이참(吏參) ○이왕건李王建 ) 현감(縣監) ○이경륜(李敬倫) 판서(判書)
○이영철(李永喆) 정언(正言) ○이복윤(李福潤) ○이경일(李敬一) 우상(右相) ○이집두(李集斗) 판서(判書) ○이상만(李相萬)
○이경오(李敬五) 부사(府使) 이덕연(李德淵) ○이태희(李泰熙) 지평(持平) ○이한교(李漢僑) 주부(主簿) ○이언오(李彦五)
○이집운(李集運) ○이정규(李廷奎) 감사(監司) ○이덕규(李德奎) 부윤(府尹) ○이이희(李頤熙) ○이한영(李漢英) ○이영로(李永老)
○이중협(李重協) 참판(參判) ○이사덕(李師德) 현감(縣監). 이중술(李重述) 승지(承旨) ○이행민(李行敏) 장령(掌令)
○이강(李鋼) 통례(通禮) ○이인흥(李麟興) ○이조형(李祖馨) 승지(承旨) ○이문형(李文馨) 승지(承旨) ○이치오(李致五) 사과(司果)
○이익배(李益培) 지평(持平) ○이규팽(판서(判書) ○이복주(李福周) 승지(承旨) ○이석규(李錫奎) 이판(吏判) ○이경함(李敬涵) 이
참(吏參)
○이형좌(李衡佐) 승지(承旨) ○이형규(李亨奎) 교리(校理) ○이용우(李龍雨) 승지(承旨) ○이계선(李啓善) 판서(判書) ○이계조(李
啓朝) 이판(吏判)
○이희규(李希奎) 승지(承旨) ○이계우(李啓宇) 참판(參判) ○이계철(李啓哲) 수찬(修撰) ○이영필 교리(校理) ○이유승(李裕承) 이판
(吏判)
○이유원(李裕元) 영상(領相) ○이유응(李裕膺) 판서(判書) ○이상설(李相卨)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시영(李始榮) 승지(承旨)
○이수영(李壽榮) 직각(直閣) ○이석영(李石榮) 승지(承旨) ○이유석(李裕奭) 참판(參判) ○이주영(李胄榮) 대사헌(大司憲) ○이보영
(李輔榮) 참판(參判)
○이교영(李敎榮) 참판(參判) ○이유선(李裕璇) 승지(承旨) ○이응(李應) 한림(翰林) ○이종원(李鍾元) 참판(參判) ○이종필(李鍾弼)
참판(參判)
○이종형(李鍾瀅) 승지(承旨) ○이종협(李鍾浹) 교리(校理) ○이종익(李鍾翊) 승지(承旨) ○이집호(李集鎬) 주서(注書) ○이회영(李
晦榮) 장령(掌令)
○이재영(李載榮) 대간(臺諫) ○이규백(李圭白) 승지(承旨) ○이규섭(李圭燮) 주서(注書) ○이신영(李臣榮) 주서(注書)
[무과(武科)]
○이석(李碩) 병판(兵判) ○이수일(李守一) 형판(刑判) ○이완(李浣) 우상(右相) ○이인하(李仁夏) 대장(大將)
○이인걸(李仁傑) 부총관(副摠管) ○이돈(李暾) 중군한천(中軍寒泉) ○이정(李玎) 별천(別薦) ○이장원(李長元) 부호군(副護軍)
○이빈(李彬) 부사(府使) ○이용준(李容駿) 병사(兵使) ○이용상(李容象) 형판(刑判) ○이계호(李啓好) 병사(兵使)
[조선조 급제자 정록]
01. 이 담(李 擔) : 太祖 2년 春場, 乙科 3위 대언(大言)
02. 이 종(李 從) : 太祖 5년 式年試, 同進士 14위 현령(縣令)
03. 이백검(李伯黔) : 世宗 2년 式年試, 同進士 2위 정언(正言)
04. 이계선(李繼善) : 世宗 14년 式年試, 同進士 5위 지평(持平)
05. 이물민(李勿敏) : 世宗 26년 式年試, 丁科 14위 한림(翰林)
06. 이문형(李文炯) : 世宗 29년 式年試, 丁科 9위 참판(參判)
07. 이윤인(李尹仁) : 世宗 2년 式年試, 丁科 12위 관찰사(觀察使)
08. 이 익(李 翊) : 文宗 1년 增廣試, 丁科 27위 참의(參議)
09. 이문환(李文煥) : 端宗 1년 增廣試, 丁科 1위 승지(承旨)
10. 이문요(李文饒) : 端宗 2년 式年試, 丁科 15위 현감(縣監)
11. 이유인(李有仁) : 世宗 5년 式年試, 丁科 3위 대사헌(大司憲)
12. 이익배(李益培) : 世宗 8년 式年試, 丁科 12위 예조좌랑(禮曹佐郞)
13. 이 잠(李 箴) : 世祖 8년 式年試, 丁科 16위 부사(副使)
14. 이 감(李 堪) : 世祖 12년 高城別試 4위 부윤(副尹)
15. 이종윤(李從允) : 世祖 14년 式年試, 乙科 5위 장령(掌令)
16. 이 여(李 呂) : 睿宗 1년 秋場, 丙科 감정(監正)
17. 이문좌(李文佐) : 成宗 14년 式年試, 甲科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
18. 이종준(李宗準) : 成宗 16년 別試, 甲科 사인(舍人)
19. 이 오(李 鰲) : 成宗 17년 式年試, 丙科 이조조랑(吏曹佐郞)
20. 이 원(李 黿) : 成宗 20년 式年試, 丙科 예조좌랑(禮曹佐郞) 甲子士禍때節死
21. 이 통(李 通) : 成宗 23년 式年試, 乙科 1위
22. 이 구(李 龜) : 成宗 23년 式年試, 丙科
23. 이사균(李思鈞) : 燕山 4년 式年試, 乙科
24. 이사종(李嗣宗) : 中宗 2년 增廣試, 丙科
25. 이문창(李文昌) : 中宗 11년 式年試, 丙科
26. 이 해(李 海) : 中宗 14년 式年試, 丙科
27. 이몽량(李夢亮) : 中宗 23년 式年試, 丙科
28. 이몽윤(李夢尹) : 中宗 23년 式年試, 丙科
29. 이을규(李乙奎) : 中宗 30년 別試, 甲科
30. 이 영(李 瑛) : 中宗 34년 別試, 丙科
31. 이사영(李士英) : 明宗 16년 式年試, 甲科
32. 이정암(李廷馣) : 明宗 16년 式年試, 丙科
33. 이정형(李廷馨) : 宣祖 1년 別試, 甲科
34. 이홍업(李弘業) : 宣祖 12년 式年試, 丙科
35. 이대진(李大震) : 宣祖 12년 式年試, 丙科
36. 이항복(李恒福) : 宣祖 13년 謁聖試, 丙科
37. 이방준(李邦俊) : 宣祖 18년 式年試, 丙科
38. 이시발(李時發) : 宣祖 22년 增廣試, 丙科
39. 이 흘(李 忔) : 宣祖 24년 式年試, 丙科
40. 이정혐(李廷嫌) : 宣祖 27년 別試, 丙科
41. 이광윤(李光胤) : 宣祖 27년 別試, 丙科
42. 이 흘(李 忔) : 宣祖 30년 重試, 乙科
43. 이휘음(李徽音) : 宣祖 39년 式年試, 乙科
44. 이종언(李宗彦) : 光海 1년 增廣試, 乙科
45. 이 탁(李 濯) : 光海 2년 式年試, 丙科
46. 이정원(李挺元) : 光海 2년 式年試, 丙科
47. 이 익(李 瀷) : 光海 4년 式年試, 丙科
48. 이경상(李慶相) : 仁祖 5년 式年試, 乙科
49. 이기영(李奇英) : 仁祖 5년 式年試, 丙科
50. 이숭언(李崇彦) : 仁祖 9년 別試, 丙科
51. 이경징(선)(李慶徵/慶善) : 仁祖 11년 式年試, 乙科
52. 이경항(李慶恒) : 仁祖 17년 式年試, 乙科
53. 이덕배(李德培) : 仁祖 17년 式年試, 丙科
54. 이경억(李慶億) : 仁祖 22년 庭試, 甲科
55. 이경휘(李慶徽) : 仁祖 22년 庭試, 丙科
56. 이상언(李尙彦) : 仁祖 26년 庭試, 丙科
57. 이시성(李時省) : 孝宗 1년 增廣試, 丙科
58. 이시술(李時述) : 孝宗 3년 增廣試, 丙科
59. 이구휘(李耉徽) : 孝宗 8년 式年試, 乙科
60. 이경과(李慶果) : 孝宗 8년 式年試, 丙科
61. 이 후(李 煦) : 顯宗 1년 式年試, 乙科
62. 이 박(李 煿) : 顯宗 1년 式年試, 乙科
63. 이영갑(李英甲) : 顯宗 1년 式年試, 丙科
64. 이문재(李文在) : 顯宗 1년 式年試, 丙科
65. 이문빈(李文彬) : 顯宗 3년 增廣試, 乙科
66. 이세현(李世賢) : 顯宗 13년 別試, 乙科
67. 이세장(李世長) : 顯宗 3년 增廣試, 乙科
68. 이인환(李寅煥) : 顯宗 6년 庭試, 丙科
69. 이 굉(李 宏) : 顯宗 13년 別試, 丙科
70. 이송제(李松齊) : 肅宗 5년 式年試, 丙科
71. 이 정(李 楨) : 肅宗 8년 增廣試, 丙科
72. 이인엽(李寅燁) : 肅宗 12년 庭試, 乙科
73. 이회원(李會元) : 肅宗 13년 式年試, 丙科
74. 이석의(李碩意) : 肅宗 13년 式年試, 丙科
75. 이적의(李適意) : 肅宗 16년 式年試, 甲科
76. 이인병(李寅炳) : 肅宗 19년 謁聖試, 甲科
77. 이인소(李寅熽) : 肅宗 19년 謁聖試, 丙科
78. 이광좌(李光佐) : 肅宗 20년 別試, 甲科
79. 이태좌(李台佐) : 肅宗 25년 庭試, 丙科
80. 이 홍(李 宖) : 肅宗 25년 增廣試, 丙科
81. 이몽엽(李夢曄) : 肅宗 25년 增廣試, 丙科
82. 이중배(李重培) : 肅宗 28년 式年試, 丙科
83. 이단장(李端章) : 肅宗 31년 增廣試, 丙科
84. 이하곤(李夏坤) : 肅宗 34년 式年試, 丙科
85. 이태화(李泰和) : 肅宗 37년 式年試, 丙科
86. 이중협(李重協) : 肅宗 39년, 增廣試, 甲科
87. 이창석(李昌碩) : 肅宗 37년, 式年試, 丙科
88. 이사덕(李師德) : 肅宗 40년, 增廣試, 丙科
89. 이운용(李雲龍) : 肅宗 40년 增廣試, 丙科
90. 이중술(李重述) : 肅宗 40년 增廣試, 丙科
91. 이행민(李行敏) : 肅宗 44년 庭試, 丙科
92. 이태시(李泰始) : 景宗 1년 式年試, 乙科
93. 이인흥(李麟興) : 景宗 1년 式年試, 丙科
94. 이 강(李 鋼) : 景宗 1년 式年試, 丙科
95. 이종백(李宗白) : 景宗 3년 增廣試, 丙科
96. 이종성(李宗城) : 英祖 3년 增廣試, 丙科
97. 이서곤(李瑞坤) : 英祖 4년 庭試, 丙科
98. 이석표(李錫杓) : 英祖 9년 謁聖試, 甲科
99. 이형만(李衡萬) : 英祖 11년 增廣試, 丙科
100. 이덕관(李德觀) : 英祖 11년 式年試, 甲科
101. 이종적(李宗迪) : 英祖 12년 庭試, 乙科
102. 이성익(李聖益) : 英祖 14년 式年試, 丙科
103. 이수근(李壽根) : 英祖 15년 庭試, 丙科
104. 이석상(李錫祥) : 英祖 29년 謁聖試, 乙科
105. 이시일(李時逸) : 英祖 32년 式年試, 丙科
106. 이광배(李光培) : 英祖 35년 式年試, 丙科
107. 이익만(李益萬) : 英祖 39년 耆老庭試, 丙科
108. 이경양(李敬養) : 英祖 48년 庭試, 丙科
109. 이 건(李 王+建) : 英祖50년 式年試, 丙科
110. 이경윤(李敬倫) : 英祖 50년, 庭試, 乙科
111. 이영철(李永喆) : 英祖 50년, 增廣試, 甲科
112. 이복윤(李福潤) : 英祖 51년, 庭試, 丙科
113. 이집두(李集斗) : 英祖 51년, 庭試, 丙科
114. 이경일(李敬一) : 英祖 51년, 庭試, 乙科
115. 이 만(李 萬) : 正祖 1년, 式年試, 乙科
116. 이복윤(李福潤) : 正祖 4년, 式年試, 丙科
117. 이진택(李鎭宅) : 正祖 4년, 式年試, 丙科
118. 이경오(李敬五) : 正祖 7년, 增廣試, 丙科
119. 이덕연(李德淵) : 正祖 10년, 式年試, 乙科
120. 이태희(李泰熙) : 正祖 13년, 式年試, 丙科
121. 이한교(李漢喬) : 正祖 14년, 增廣試, 丙科
122. 이집운(李集運) : 正祖 24년, 庭試, 丙科
123. 이영로(李永老) : 純祖 1년, 增廣試, 丙科
124. 이영곤(李永昆) : 純祖 4년, 庭試, 乙科
125. 이이희(李頤熙) : 純祖 4년, 式年試, 丙科
126. 이영순(李永純) : 純祖 5년, 增廣試, 丙科
127. 이영석(李永錫) : 純祖 7년, 謁聖試, 乙科
128. 이조형(李祖馨) : 純祖 9년, 增廣試, 丙科
129. 이동한(李東翰) : 純祖 14년, 式年試, 丙科
130. 이진묵(李鎭默) : 純祖 22년, 式年試, 丙科
131. 이규팽(李圭祊) : 純祖 23년, 庭試, 甲科
132. 이명적(李明迪) : 純祖 27년, 增廣試, 丙科
133. 이치오(李致五) : 純祖 28년, 式年試, 丙科
134. 이계우(李啓宇) : 純祖 30년, 庭試, 丙科
135. 이계조(李啓朝) : 純祖 31년, 式年試, 甲科
136. 이계철(李啓哲) : 憲宗 2년, 庭試, 乙科
137. 이회영(李晦榮) : 憲宗 4년, 庭試, 甲科
138. 이유원(李裕元) : 憲宗 7년, 庭試, 丙科
139. 이유응(李裕膺) : 憲宗 9년, 庭試, 丙科
140. 이규백(李圭白) : 憲宗 12년, 式年試, 丙科
141. 이 형(李 馨) : 憲宗 13년, 庭試, 丙科
142. 이 표(李 杓) : 憲宗 13년, 庭試, 丙科
143. 이유석(李裕奭) : 憲宗 14년, 別試, 丙科
144. 이계선(李啓善) : 哲宗 1년, 增廣試, 乙科
145. 이경일(李擎日) : 哲宗 1년, 增廣試, 丙科
146. 이진경(李震璟) : 哲宗 6년, 式年試, 丙科
147. 이유승(李裕承) : 高宗 1년, 增廣試, 丙科
148. 이용우(李龍雨) : 高宗 2년, 式年試, 乙科
149. 이규덕(李圭德) : 高宗 2년, 式年試, 丙科
150. 이규섭(李圭燮) : 高宗 5년, 庭試, 丙科
151. 이동영(李東榮) : 高宗 6년, 庭試, 丙科
152. 이보영(李輔榮) : 高宗 10년, 式年試, 丙科
153. 이주영(李胄榮) : 高宗 11년, 增廣試, 甲科
154. 이수영(李壽榮) : 高宗 11년, 庭試, 丙科
155. 이집호(李集鎬) : 高宗 13년, 式年試, 丙科
156. 이교영(李敎榮) : 高宗 13년, 式年試, 丙科
157. 이익준(李翊濬) : 高宗 17년, 增廣試, 丙科
158. 이익준(李翊焌) : 高宗 19년, 增廣試, 丙科
159. 이익권(李寅權) : 高宗 20년, 式年試, 丙科
160. 이인형(李寅衡) : 高宗 22년, 式年試, 丙科
161. 이재영(李載榮) : 高宗 22년, 式年試, 丙科
162. 이문환(李文煥) : 高宗 22년, 增廣試, 乙科
163. 이석영(李石榮) : 高宗 22년, 增廣試, 丙科
164. 이인근(李寅根) : 高宗 24년, 庭試, 丙科
165. 이종필(李鍾弼) : 高宗 27년, 別試, 丙科
166. 이시영(李始榮) : 高宗 28년, 增廣試, 丙科
167. 이규백(李圭白) : 高宗 28년, 式年試, 乙科
168. 이종원(李鍾元) : 高宗 28년, 式年試, 丙科
169. 이유선(李裕璇) : 高宗 29년, 別試, 乙科
170. 이종영(李鍾瀅) : 高宗 30년, 謁聖試, 丙科
171. 이종익(李鍾翊) : 高宗 30년, 庭試, 甲科
172. 이종근(李鍾根) : 高宗 30년, 庭試, 丙科
173. 이종협(李鍾浹) : 高宗 30년, 庭試, 丙科
174. 이상설(李相卨) : 高宗 31년, 式年試, 丙科
175.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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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0 0 0
벌열(閥閱)
●상신(相臣) 8명
○영의정 4명 ○좌의정 3명 ○우의정 1명 / 총8명
영의정 : 1.이항복(李恒福) 선조조. 2.이광좌(李光佐) 경종조. 3.이종성(李宗城) 영조조. 4.이유원(李裕元) 고종조.
좌의정 : 1.이경억(李慶億) 현종조 2.이태좌(李台佐) 영조조 3.이경일(李敬一) 순조조
우의정 : 1.이완(李浣) 현종조
●공신(功臣) 11명
1.이래(李來) 태종조. 이차왕자난2등공신(二次王子亂二等功臣). 2. 이승상(李升商) 태종조. 이차왕자난4등공신(二次王子亂四等功臣) 3.이흥상(李興商) 단종조. 계유정난3등공신(癸酉靖難三等功臣) 4.이양생(李陽生) 세조조. 이시애난토벌3등공신(李施愛亂討伐三等功
臣) 5.이철견(李鐵堅) 성종조. 성종즉위4등공신(成宗卽位四等功臣) 6.이극정(李克正) 중종조. 중종반정3등공신(中宗反正三等功臣) 7.이항복(李恒福) 선조조. 정여립옥사3등공신(鄭汝立獄事三等功臣). 호성1등공신(扈聖一等功臣) 8.이사공(李士恭) 선조조. 호성1등
공신(扈聖三等功臣) 9.이정암(李廷馣) 선조조. 임진왜란2등공신(壬辰倭亂二等功臣) 10.이수일(李守一) 인조조. 이괄난토벌2등공
신(李适亂討伐二等功臣) 11.이탁남(李擢男) 인조조. 이인거모반적발2등공신(李仁居謀叛摘發二等功臣)
●문형(文衡/대제학) 4명
1.이래(李來) 태조조 2.이항복(李恒福) 선조조. 3.이인엽(李寅燁) 숙종조 4.이광좌(李光佐) 경종조
●청백리
1.이정보(李廷俌) 세종조. 관찰사(觀察使). 2. 이항복(李恒福) 현조조 영의정(領議政)
● 호당(湖堂)
1.이종준(李宗準) 중종조 사인(舍人) 2.이원(李黿) 중종조 예조좌랑(禮曹佐郞) 3.이항복(李恒福) 선조조 영의정(領議政)
●경연(經筵)
1.이유태(李惟泰) 효종조. 이참(吏參) 2.이세필(李世弼) 숙종조.이참(吏參)
●절의(節義)
1.이존오(李存吾) 고려말 두문제현(杜門諸賢) 2.이원(李黿) 연산무오사화(燕山戊午士禍) 3.이경선(李慶善) 병자호란 순절(丙子胡
亂殉節)
4.이중협(李重協) 경종신임사화(景宗辛壬士禍) 5.이시영(李始榮) 독립운동(獨立運動) 및 순의제인(殉義諸人)
●장신(將臣)
1.이완(李浣)(인조조·훈련대장(訓練大將) 2.이인하(李仁夏)(숙종조·총융사(摠戎使) 3.이현직(李顯稷) 고종조. 통제사(統制使)
●명륜(明倫)
준비중
●문집(文集)
《동암집(東庵集,이진)》. 《익재난고(益齋亂藁,이제현(李齊賢)》. 《역옹패설,이제현(李齊賢)》. 《익재집(益齋集,이제현(李齊賢)》. 《유금강록(遊金剛錄,이원(李黿)》. 《재사당선생일집(再思堂先生逸集, 이원(李黿)》. 《운곡실기(雲谷實記,이광좌(李光佐)》. 《화곡유고(華谷遺稿,이경억(李慶億)》.《청헌유고(聽軒遺稿,이경일(李敬一)》. 《활계집(活溪集,이대유(李大㕀)》. 《제정집(霽亭集,이달충(李達衷)》.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이득윤(李得胤)》. 《장육당시고(藏六堂詩稿,이별(李鼈)》. 《눌헌집(訥軒集,이사균(李思鈞)》. 《산은유고(汕隱遺稿,이상정(李相定)》. 《경해록(經解錄,이석손(李碩孫)》. 《망세음(忘世音,이석손(李碩孫)》. 《양와집(養窩集,이세구(李世龜)》. 《악원고사(樂院故事,이세필(李世弼)》. 《소주서(小朱書,이세필(李世弼)》. 《답문의례(答問疑禮,이세필(李世弼)》. 《왕조례(王朝禮,이세필(李世弼)》. 《동호예설(桐湖禮說,이세필(李世弼)》. 《주변록(籌邊錄,이시발(李時發)》. 《벽오유고(碧梧遺稿,이시발(李時發)》. 《기유일록(己酉日錄, 이시발(李時發)》. 《기봉집(麒峰集,이시성(李時省)》. 《난국재집(蘭菊齋集,이예환(李禮煥)》. 《임하필기(林下筆記,이유원(李裕元)》. 《가오고략(嘉梧藁略,이유원(李裕元)》. 《귤산문고(橘山文稿,이유원(李裕元)》.《초려집(草廬集,이유태(李惟泰)》. 《석탄집(石灘集,이존오(李存吾)》. 《오천집(梧川集,이종성(李宗城)》. 《상례초(喪禮抄,이정암), 《동각잡기(東閣雜記,이정형(李廷馨)》. 《황토기사(黃兎記事,이정형(李廷馨)》. 《용토기사(龍兎記事,이정형(李廷馨)》. 《수춘잡기(壽春雜記,이정형(李廷馨)》. 《지퇴당집(知退堂集,이정형(李廷馨)》. 《용재유고(慵齋遺稿,이종준,李宗準)》. 백사집(白沙集,이항복(李恒福)》. 《북천일록(北遷日錄,이항복(李恒福)》. 《주소계의(奏疏啓議 2권,이항복(李恒福)》.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이항복(李恒福)》.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항복(李恒福)》. 《관주일록(觀周日錄, 이흘(李忔)》. 《오계문집(梧溪文集,이흘(李忔)》. 《설정문집(雪汀文集 3권,이흘(李忔)》. 《산술신서(算術新書,이상설(李相卨)》. 《법학만초(法學謾艸,이상설(李相卨)》. 국가론(國家論,李相卨)》. 《식물학(植物學,이상설(李相卨)》. 백승호초’(百勝胡艸,이상설(李相卨)》. 《화학계몽초(化學啓夢抄)》. <끝>
집필 야촌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