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루 - 톡톡
김정우는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쓴 걸 지나치다, 할 정도로 싫어했다. 또 김정우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알레르기까지는 아니어도 꽃가루를 왕창 들어마신 날에는 하루 온종일 재채기를 달고 살았으니까. 또한 김정우는 공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조금만 무서운 걸 본 날에는 날이 새도록 눈도 감지도 못했으니. 이 외에도 김정우는 날치알을 좋아하지 않는다. 연어도 그닥 즐겨 먹진 않았다. 또, 또.
“… 갑자기 웬 커피야?”
“어, 그냥 마시고 싶어서.”
“이걸…?”
하나 요즘 김정우는 나에게 조금 낯설었다. 손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유독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휴대폰 배경화면은 어울리지 않게 노란 튤립 한 송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인터넷 검색창에 어설프게도 근처 연어 맛집을 검색하고 있는 꼴을 보자니 참,
“너 연애하니?”
“뭐래.”
“아님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
“… 뭐야 이 정적은?”
“티 많이 나?”
김정우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답지 않게 붉어져 있는 귓불이 참으로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매번 퉁명스런 모습을 보일 땐 언제고 저렇게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속이 더부룩해져 왔다.
“네가 물었잖아. 난 왜 연애 안 하냐고,”
“어, 그랬지.”
“나 너 때문에 안 해. 내가 너 좋아해서.”
“…….”
“좋아해 정우야, 삼 년 됐어. 너는?”
“…….”
“너는 그 사람 좋아한 지 얼마나 됐니.”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그랬다. 사랑에 기간을 따지는 게 제일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내 사랑의 기간을 들먹였다. 내가 저를 절절히도 짝사랑하는 동안 저 자식은 다른 사람을 보며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 야.”
“잊어버려.”
“…….”
“나 지금 술 취했잖아.”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튀어나와서.
짝사랑의 말로
1.
취했을 리가 없었다. 맥주 반 캔에 취했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그간 그와 함께 했던 술자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 많이 마셨네.”
“그런가 봐.”
그럼에도 김정우는 모르는 척을 한다. 얕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도 못하는 주제에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퍽도 뻔뻔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명백한 거절.
“이만 가자.”
“그래. 데려다줘, 어지러워.”
“언젠 안 데려다준 적 있어?”
“… 그러네.”
어지럽지도 않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되지도 않는 연기를 했다. 정말 취한 척. 배짱 좋게 고백을 내뱉은 주제에 굳건한 사이에 금이 갈까 두려움에 떨었으니까.
“이여주.”
선선한 바람이 차게 식은 뺨을 감쌌다. 차라리 바람이 더 따뜻한 거 같기도 하고.
“세 달 됐어.”
“뭐가.”
“걔 좋아한 지.”
“…….”
“그냥,”
그렇다고. 춥다, 입어. 어깨 위로 둘러지는 후드집업이 익숙했다. 고작 반팔 티 하나 걸친 저가 더 추울 텐데도 둘러지는 호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없으면 섭하다 느낄 정도로 당연했으니까.
“잘되면 소개 시켜줘.”
“…….”
“나한테 제일 먼저.”
그의 다정함은 항상 선을 지켰다. 그게 못내 숨을 막히게 함에도 그를 놓지 못했다. 여름이 다가오기 전 밤의 바람에도 내 추위를 걱정하는 그가 다정해서, 주량을 알면서도 빤히 다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그가 고마워서, 답을 바라지 않고 한 질문임을 알면서도 끝내 대답을 내놓는 그가 잔인해서.
“그럴게.”
“…….”
“꼭.”
그럼에도 그가 좋아서.
2.
애당초 내 고백 하나에 김정우의 사랑이 멈출 거란 바보 같은 생각은 않았다. 그냥, 그저, 아주 조금이라도 더디게 흘러가길 바랐을 뿐.
“정우야!”
“어, 왔어?”
유독 가까워진 둘이 눈에 띄었다. 그가 누굴 좋아한다, 직접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냥 바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늘 강의 언제 끝나? 나 얼마 전에 갔던 학교 근처 연어 집 엄청 맛있더라. 너도 좋아한다고 했지?”
“응, 그랬지.”
“나 오늘 강의 세 시에 끝나는데, 먹으러 갈까?”
“아….”
“응? 오늘 안 돼? 너도 수업 세 시에 끝나지 않아?”
그가 향한 시선의 끝. 그 아이. 다정한 눈빛은 저의 마음을 숨길 생각을 않았으니까. 평소 김정우가 그리도 읊어대던 이상형과 똑닮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 아이였다. 그러니까, 나와는 정반대의. 잠시 난처함이 스쳐 지나간 얼굴이 저를 향했다. 선약이 생각난 거겠지. 김정우가 보고 싶다 노랠 불렀던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었으니까. 무려 한 달 전부터 잡아놓은 약속. 평소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그의 입이 쉬이 열리질 못했다. 그 아이와의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단 뜻이었고.
"얘 수업 세 시에 끝나."
"……."
"그치?"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답 역시 하나. 전혀 쿨하지 않으면서 쿨한 척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하는 것. 난 오늘 지윤이랑 영화 보려고. 그 말에 불편하게 엉켜있던 시선이 그제야 풀어지기 시작했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 그에겐 보이지 않았던 걸까, 아님 다 알면서도 모른 척 고갤 돌린 걸까. 신이 나 잘 먹지도 못하는 연어를 먹자 떠드는 꼴이 우스울 만큼 사랑스러웠다. 너에게 그런 면도 있었구나. 저 아이가 아니었다면 난 평생 그런 모습을 알지 못했겠구나. 순식간에 바닥을 치는 기분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 수업 경영관에서 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 끊이질 않는 대화 소리에 귀가 멀어버릴 것만 같아서. 배려 없어. 그럴 걸 바랄 입장이 못 된다는 걸 알면서도 울컥 감정이 차올라서.
3.
홀로 집에 가는 길이 유난히 어색했다. 곧 꺼질 듯 음침하게 깜빡이는 가로등도, 고양이 울음소리가 퍼지는 골목도, 자주 듣던 음악까지, 모든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 진짜 그냥 혼자 봐버릴까."
볼 생각도 않았던 영화가 문득 간절해졌다. 그것마저 안 하면 정말 억울할 것만 같아서. 얼마 남지 않은 거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조금은 조급해진 것도 같았다. 뛰다시피 도착한 영화관은 유독 사람이 많았다. 하필이면 개봉하는 영화가 인기가 많은 게 문제였나.
"지금은 커플석밖에 남지 않아서요."
"아…."
예매도 하지 못하고 멈추어버린 손이 머쓱하게 허공을 배회했다. 손안의 카드가 유독 창피하게 느껴졌다. 미리 알아보고 올 걸 그랬나. 길게 늘어져있는 줄에 다른 걸 예매할 생각도 못 한 채 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저기.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저…, 혹시 같이 보실래요?"
"… 네?"
"저도 그 영화 보고 싶은데, 볼 사람이 없어서요."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 위로 붉어져있는 뺨이 눈에 띄었다. 아…. 사실 그닥 보고 싶었던 영화는 아니었다. 하도 김정우가 노래를 부르길래 그를 위해 보고 싶은 체 했을 뿐. 영화를 못 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조금 창피했던 걸 빼면 별 미련은 없었다. 애초에 그 때문에 되지도 않는 자존심에 홀로 보러 온 거였으니까. 미련 없이 떠나가려던 걸음이 멈칫 굳었다. 어…. 쉬이 이렇다 할 대답도 내뱉지 못한 채 눈만 굴리고 있으면 조금은 곤란한 듯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 뒤에 손님들이 기다리셔서요. 잠시 잊고 있던 길게 늘어져있는 줄이 그제야 생각났다.
“여기…,”
“이게 뭐예요?”
“영화값이요. 아까 정신이 없어서 못 드렸네요.”
저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곁에 서있는 남자, 그리고 계산을 기다리는 직원까지. 얼떨결에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의 손에는 아까 봤던 커플석으로 예매 완료된 티켓이 쥐여진 후였다. 그제야 남자가 계산을 마쳤다는 걸 알아채고 손안의 만 원을 그에게 건네면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돈을 받는 대신 웃어 보였다.
“제가 이거 안 받으면,”
“…….”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우리.”
4.
영화가 재미없었나 봐요.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 이대로 헤어져야 하나 인사라도 하고 가야 될까 고민하고 있으면 나지막이 뱉어진 남자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영화는 역시나 딱히 흥미를 끌지 않았던 터라 뭐라 대답을 할지 망설여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차라리 보지 말걸 그랬나, 하는 후회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사실 제 취향의 영화는 아니었어요. 이상하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짧게 말을 뱉으면 남자는 웃어 보였다. 그런 거 같았어요. 어느덧 걸음은 영화관 밖으로 다다른 후였다.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떠있던 해가 온전히 저의 모습을 감춘 거리는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고 영화관을 나오는 내내 속으로 준비했던 끝인사를 뱉으려 입을 떼기도 전에 먼저 말을 뱉은 건 남자였다.
"이거."
"……."
“혼자 영화 보기 싫을 때 연락 주세요.”
“…….”
“아니어도 주면 더 좋고.”
영화 티켓 뒤 적혀진 번호 열한 자리가 낯설었다. 끝내 그가 받지 않은 만 원이 생각났다. 두어 번 더 건넸음에도 받지 않는 그에 결국은 도로 지갑으로 돌아가야 했던. 다음에는 다른 장르로 봐요. 뜬금없이 뱉어진 말이었다.
"보기 싫어하셨잖아요."
"… 네?"
"영화 예매 전부터 보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길래,"
"아…."
"누구랑 같이 보는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
"더 물어보면 실례겠죠."
가볍게 웃은 남자가 먼저 걸음을 틀었다. 데려다주겠다고 하면 도망칠 거 같아서, 먼저 갈게요. 즐거웠어요. 연락은, 언제든 주세요. 미련 없는 걸음이 떨어졌다. 가만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 역시 걸음을 옮겼다. 그냥, 신기한 하루였다. 평소엔 하지도 않던 혼자 영화를 보러 가고,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영화를 보고. 그 사람한테,
"… 티가 많이 났나."
다음을 제안받고. 티켓 위로 쓰여진 번호 열한 자리를 바라보다 그 옆에 나란히 쓰여져 있는 이름 석 자를 바라봤다. 김도영. 이름이 이리도 잘 어울리는 사람은 김정우 다음으로 처음이었다. 김정우도 딱 김정우처럼 생겼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상하게 들뛰던 마음이 거짓말같이 차분해졌다. 대충 가방 안으로 티켓을 넣은 후 걸음을 옮기면 역시나 머릿속을 꽉 채우는 건 그에 대한 생각이었다.
데이트는 잘 했으려나,
연어도 못 먹으면서 뭘 제대로 먹긴 했을까,
이 영화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안 본 척하고 한 번 더 같이 봐줄까,
… 이미 그 애랑 봤으려나,
미련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했다. 영화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자리한 자취방이기에 도착은 금방이었다. 여전히 음침하게 깜빡이는 가로등에 부러 걸음을 빨리하면 낯익은 인영이 눈에 띄었다.
"… 김정우?"
"늦었네."
신이 나 그 애와 약속을 잡을 땐 언제고 한없이 가라앉아 있는 얼굴에 이상하게 마음이 쿵쿵 뛰었다. 왜 여기 있어. 대체 언제부터 기다린 건지 가늠조차 가지 않아 물으면 대답은 않고 빤히 바라보는 눈길에 불편한 감정이 몰려왔다.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벌써 헤어진 거야?"
"… 했는데."
"응?"
"전화,"
했었다고. 알맞은 대답에도 묘하게 핀트가 맞지 않았다. 여전히 낮게 가라앉은 얼굴을 바라보다 그제야 영화를 본다며 무음으로 돌려놨던 게 생각났다.
"아, 미안. 영화 본다고 무음으로 해놔서."
"영화 봤어?"
"아까 본다고 했잖아."
“한지윤은 너랑 그런 약속 한 적 없다던데.”
그제야 알아챘다. 묘하게 가라앉아있는 얼굴이, 내내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가, 김정우가 화가 났기 때문이란걸. 무슨 이유에서 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겠지만.
"소정이랑 무슨 일 있었어?"
"뭐?"
"아니, 기분 나빠 보여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 이여주."
"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은 너한테 있었지."
"…."
"한지윤이랑 영화 본다며."
근데 이젠 되려 내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김정우가 화내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내가 누구 때문에 없던 약속도 만들어냈는지 뻔히 알면서 몰아붙이는 그에 울컥 억울함이 밀려와서. 덩달아 굳어진 입술에서 조금은 감정에 찬 말이 튀어나왔다.
"약속을 잡은 건 지윤이랑이 아니라 너랑이었지."
"……."
"근데 네 그 잘난 데이트 때문에 내가 손수 깨준 거잖아."
"누가 해달래?"
"어, 네가 해달라고 했어."
"……."
"너 아까 망설였잖아. 박소정이 물어봤을 때 걔한테 가고 싶어서 내 눈치 봤잖아."
"……."
"그래서 손수 없던 일로 만들어 줬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여름이 다가와 차지도 않은 밤공기가 유독 매섭게 느껴졌다. 이젠 이 상황이 억울해지기 시작해서. 내가 누구 때문에 재미도 없는 영화 본다고 한 건데, 누구 때문에 있지도 않은 약속을 만든 건데. 누구 때문에 혼자 거길 가서, 누구 때문에 재미도 없는걸 억지로 보고,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나 너랑 싸우려고 온 거 아니야."
"근데 그렇게 보이게 하고 있잖아 네가."
… 너 때문에 내가. 답답한 듯 제 머릴 쓸어넘긴 정우가 곧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진짜 한숨 나오는 게 누군데. 손에 쥐여진 가방끈을 움켜잡곤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그를 지나치기도 전에 붙잡혔지만.
"싸우기 싫어. 나중에 얘기해."
"여주야."
"알고 나니까 신경 쓰이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그거 신경 쓰여서 그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게 억울했다. 긍정을 뜻하는 침묵이란 걸 알았으니까. 결국은 내가 문제라는 거잖아. 내가 널 좋아해서, 혼자만 삭이고 있으면 될 감정을 굳이 꺼내서 너한테 보여줘서, 그게 널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그러니까, 지금 그런 네 맘을 정리해 줘야 할 사람 역시 나라는 거잖아.
"정우야."
"……."
"대단한 마음 아니야. 삼 년, 길지. 근데,"
"……."
"그 마음 삭아 없어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잖아."
끝내기 전에 가볍게 던져본 거야. 너 신경 쓰이라고 한 말 아니고. 김정우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분명 그가 원한 말을 해줬을 텐데도 여전히 굳어져 있는 표정은 풀릴 생각을 않았다. 그러한 그를 바라보다 찬찬히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어쩌면 나에게 하는 말,
"그러니까,"
"……."
"달라질 건 없어. 너도, 나도."
달라질 건 없다. 그도, 나도.
선우정아 - 삐뚤어졌어 (2018 Ver.)
사랑을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열일곱의 끝자락이었다.
“이여주?”
“…….”
“… 너 무슨 일 있어?”
절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해도 그 안에 김정우는 없을 거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정우야.”
“… 너,”
“나 어떡하지.”
근데 사랑해버린 거다. 그 누구도 아닌 김정우를.
5.
십 년을 알고 지냈지만 그와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크게 모나지 않은 그의 성격 덕도 있었고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맞다고 보는 내 덕도 있었다.
“싸웠냐?”
“뭐가.”
“김정우랑, 싸운 거 아니야?”
처음으로 그와 다퉜다. 다퉜다고 하기에도 애매했지만 서로 대화는 고사하고 얼굴도 채 보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으니 적어도 나에겐 다툰 것보다도 더 크게 다가왔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럼에도 내뱉는 대답은 부정이 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서로 인사도 않고 지나치는 이 상황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싸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뭐. 지윤이는 눈치가 빨랐다. 저가 의심하고 있는 사실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갔으니까.
근데 쟤네 요즘 진짜 묘하다니까? 어제 박소정이랑 김정우랑 둘이 술 마시는 거 본 애 있다는데? 다만 이러한 데까지는 그 눈치를 끌어내지 못하는 게 조금 원망스러울 뿐이다. 오늘 아침부터 끊임없이 들은 얘깃거리였다. 인원이 적은 과 특성상 조그마한 가십은 크게 부풀어지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다란 소문이 되어 퍼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박소정이랑 김정우가 단둘이 술을 마셨다며 시작된 소문이 둘이 썸을 타고 있다는 말로 막을 내렸으니. 덕분에 잘 되지도 않는 표정관리를 하루 종일 하고 있는 나였고.
대충 예상은 했던 상황임에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처음엔 화가 났고, 다음엔 맥이 빠졌다. 김정우의 연애를 탓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날 봐주길 원한 적도 없었으니. 그저 그 타이밍이 지금은 아니길 바랐다. 적어도 날 친구로 여겼다면 지금은 안 됐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던 네 뒷모습이 아직도 내 눈엔 선한데,
넌 이렇게 다 잊었다는 듯 굴 순 없는 거였으니까.
6.
“화해 안 할 거야?”
“무슨 화해.”
“야, 나 중간에서 숨 막혀 죽어 진짜. 김정우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그러냐. 한 번을 안 싸우더니.”
모르는 척하는 것도 하루 이틀인 거 알지? 같은 과에 겹치는 수업도 네 개나 되는데 계속 이렇게 지낸다고? 애써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듯 부러 가볍게 말하는 지윤이의 목소리에도 굳은 표정은 풀릴 생각을 않았다. 며칠째 잠잠한 휴대폰이 어색했다. 강의실에 들어오면 맨 앞자리에 다른 동기들과 앉아있는 김정우가 어색했다. 그보다 앞서 몇 번이나 겹치는 강의들을 각자 들으러 간다는 것부터가 어색했다. 그보다 먼저는 집 앞에 김정우가 없다는 게, 그 전날 집에 오는 길이 혼자라는 게, 그 모든 게.
“… 지윤아.”
“왜.”
“분명 내 일상인데 왜 내 게 아닌 거 같지.”
“뭐?”
“… 김정우가 너무 많다.”
쓸데없이. 쓸데없이 너무 많은 걸 공유했다. 친구라는 핑계로 경계도 없이 곁을 내어줬다. 더 억울한 건 이 모든 게 다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일까 봐. 김정우는 잠잠한 휴대폰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듣는 강의도, 내가 없는 길도, 그 모든 게 아무렇지 않을까 겁이 나고 억울하단 거였다.
시선을 돌리면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김정우가 보였다. 쟤네 싸운 거야? 대놓고 수군대는 목소리들을 모를 리 없음에도 한 마디의 부정도 내뱉지 않는 입술이 원망스러웠다.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해주지. 그럼,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허울뿐인 친구? 그마저도 못 되는 관계? 습관적으로 맞부딪친 손톱이 울퉁불퉁하게 뜯겨있었다. 고작 일주일 지적해 줄 사람 없어졌다 이리 티를 내는 모양새가 암담했다. 그러니까 겨우 이 작은 습관 하나에도 결론이 나는 거다. 어떠한 형태로든 김정우의 곁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잠깐 얘기 좀 해]
이도 저도 못한 관계보단 허울뿐인 친구가 나을 테니.
7.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래. 대답 없는 얼굴을 멀거니 바라봤다. 시간이 더 필요해? 얕게 터진 한숨과 함께 열이 몰려왔다. 대체 뭐가 그리도 불만이어서, 굳어 움직일 생각을 않는 입술을 바라보자니 애써 참아왔던 화가 터져버린 거다.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나랑 만나달라고 했어, 아님 네 연애를 반대한다고 했어. 내가 걔랑 있는 시간을 빼앗았어? 나한테 더 신경 써달라고 투정 부렸어?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평소랑 똑같이 굴었잖아.”
“……….”
“근데 왜 네가 변하는 건데 정우야.”
“… 이여주.”
“나는 네 마음 존중하고 네 사랑 응원해.”
입발린 말이 마구 튀어나온다. 전자는 사실이었지만 후자는 완벽한 거짓이다. 응원 같은 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에도 통제를 벗어난 입술은 계속해서 맘에도 없는 말만을 내뱉어내서. … 여기서 내가 뭘 더 해야 되는 건데. 이젠 모든 상황이 억울해지기 시작했으니까. 무언갈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치기, 딱 그 정도의 실수였을 뿐이다. 근데 또 다른 실수가 숨어있던 거다. 겨우 그까짓 실수로 비틀릴 관계가 아니라 단정 짓고 있었단 거. 혼자 멍청하게 단정 짓고 멍청하게 실수하고 말았으니 그걸 주워 담아 엉성하게 붙여놓는 것 역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말했지, 내가 너 좋아한 지 삼 년 됐다고.”
“……….”
“근데 우리 알고 지낸 건 십 년이야. 나한테는 널 좋아한 삼 년보다 너랑 친구로 지냈던 그 십 년이 더 중요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짓이겨진 입술엔 통증이 없었다. 새하얗게 질려버린 머리와 함께 통각 역시 고장이 난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정우야…. 이것 역시 거짓이야. 정우야 나는, 나는 지금 당장 돌이켜 봐도 그 오랜 십 년의 세월보다 널 사랑했던 삼 년의 시간밖에 기억이 나질 않아. 십 년은 흐렸고 삼 년은 너무 짙었어. 그래서 아무리 그 위로 물을 붓고 흔적을 지운다 한들 그건 점점 더 짙게 번질 뿐일 거야. 그러니까 정우야,
“그냥 다 못 들은 거로 하고,”
“…….”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우리?”
넌 점점 더 번지는 그걸 모른 척 무시하면 돼.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https://soundcloud.com/l2shareost19/monday-kiz-punch-another-day-hotel-del-luna-ost-part-1
8.
그래, 어쩌면 이러한 끝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넌 그게 돼?”
화가 난 음성이 귓가를 때린다.
“안 될 건 뭐가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싫다고 하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하고. 그런 네 앞에서 내가 뭘 더 어떻게 하라고.”
“너한테 뭐 하라는 거 아니야.”
“그럼 뭐, 그냥 이대로 지내자고? 이렇게, 그냥 남이 되자고?”
“여주야."
내가 할 거야. 뭐든, 내가 한다고. 넌 삼 년이잖아. 난 이제 고작 일주일이야. 나한테도 노력할 시간을 좀 줘.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았다. 너의 노력이 무엇을 이뤄내고자 하는지 또한 알았다. 심장이 무겁게 들뛰었다. 그러한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너와 나의 마음이 같다면 어떨까.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너에게서 듣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넌 그 말을 하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정우야, 나는 그 상상을 하면서도 한 번도 행복해본 적이 없어. 되려 두려움을 느꼈어. 그 상상 속 너의 표정이,
딱 지금과 같았거든.
김정우는 모른다. 마음을 노력해보겠다는 그 말이 얼마나 무섭게 날 들쑤시는지.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매번 다정하던 네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리도 잔인하게 다가올 수가 없어서. 고작 일주일. 거짓을 잘도 고한다. 차라리 싫다고 했다면 지금보단 덜 원망스러웠을까. 달아오른 눈가가 김정우를 향했다. 원망 서린 눈을 참 덤덤하게도 내려다본다, 너는. 그러니까 너는,
“알고 있었잖아 너.”
“…….”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확신하진 못 하더라도.”
“…….”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었어 너.”
사실 너는 하나도 다정하지 않았다. 다 알면서 선을 긋는 다정은 잔인하기만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끝내 옆에 두는 못돼 처먹은 심보. 그럼에도 그런 네가 절절하게도 좋아서.
“그래, 그렇게 해.”
“…….”
“이젠 네가 노력해.”
“…….”
“난 더 이상 못 해먹겠다 정우야.”
사랑이 되지 못할 걸 알았다. 노력으로 건넨 감정이 어떻게 사랑이야, 동정이지. 그래도 한 번쯤은 받고 싶어서. 한 번쯤은 친구가 아닌 관계로 옆에 있어 보고 싶어서.
“친구, 그런 거… 못 하겠어 이제.”
길고 긴 짝사랑의 말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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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도 정우도 너무 맴찢ㅜㅜㅜ 특히 정우....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갑자기 10년 알고 지낸친구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차마 거절하고 친구로 계속 지낼 수도 그렇다고 남남으로 지낼 수도 없어서 노력하겠다는 말이 너무..... 안타까워요ㅜㅜㅜㅜㅜ 물론 그러다가 둘이서 진짜 좋아하고 사귀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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