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종주 1구간(산줄기 149일째)
일 자 : 2002년 12월 17일
구 간 : 몰운대 ~ 구덕산 ~ 엄광산 ~ 개금사거리
날 씨 : 맑음
도상거리 : 18.2km
몰운대 - 3.1 - 홍치고개(140) - 0.9 - △233.7m - 2.9 - 봉화산(△149.6m) - 5.3 - 대티고개 - 2 - 구덕산(568m) - 2.6 - 엄광산(△503.9m) - 1.4 - 개금사거리
산행시간 : 9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새로운 시작
낙동정맥의 시작은 몰운대다. 몰운대는 낙동정맥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빠져들며 형성된 하나의 섬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몰운도(沒雲島)라 불리는 섬이었으나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가 쌓이어 다대포육지와 연결되었다.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몰운대(沒雲臺)라 한다.
07시 이른 아침 몰운대 표지석이 마중 나온다. 낙동정맥의 첫발은 몰운대를 향하면서 시작된다. “하나님 우리의 산줄기를 찾아서 새로운 시작입니다. 백두대간 분수령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모든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몰운대로 향하는 몰운산 산책로에는 때마침 하루를 시작하는 시민들로 길을 메운다.
몰운산은 몰운대의 몰운섬을 이루고 잇는 산으로 해발 78m이다. 구릉에 가까운 산으로 산정부분이 둥그스레한 중순형으로 되어있고, 사면 또한 완만하나 산기슭의 끝 부분은 낭떠러지의 단애를 이룬다. 산 전체가 짙은 송림으로 덮여 있고 이 때문에 두송산, 금티산과 함께 조선시대 경상좌수영 관할의 봉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몰운대에 있는 다대포 객사(客舍 : 부산시 유형문화재 3호)와 정 운 장군의 순의비(殉義碑 : 부산시 기념물 20호) 그리고, 다대동 입구의 윤공단(尹公壇 : 부산시 기념물 9호)이 임란 당시의 처절한 격전을 일깨워 주고 있는 곳이다.
07시 25분 초소가 있는 몰운대에 선다. 절경중의 절경으로 펼쳐지는 바다, 다대 8경중의 하나인 몰운관해(沒雲觀海)는 바로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경에 해당하는 것 같다. 되돌아서면서 오른쪽으로 산허리길로 10여분 후 화손대에 선다. 때마침 동녘 하늘엔 구름사이로 해가 떠오르며 특공대의 대장정을 축하해 준다.
횟집촌을 빠져나오며 만나는 해안도로,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길로 다시 아파트단지를 끼고 오른쪽으로 4차선 도로를 따라 언덕길을 오른다. 응봉초등학교을 지나 능선마루에 서니 좌측으로 강과 바다가 만나며 놀라운 생태계를 이루는 낙동강 하구가 활짝 열린다. 그리고 낙동정맥 종주대의 리본들이 반갑다.
정맥길은 무단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부착된 공사장으로 들어선다. 공사가 중단상태인 공사장을 끼고 이어지는 비포장길을 따라 좌측으로 낙동강 하구를 보며 걷는다. 낙동강은 태백시 황지 못에서 발원하여 영남지역을 굽이굽이 흘러 남해로 흘러드는 가야와 신라천년의 민족애환과 정서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남한에서 가장 긴 강이며 전 국민의 약 14%가 상주하고 있는 곳이다. 낙동강 하구둑과 을숙도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08시 28분 홍치고개다. 좌측으로 홍티마을이 있어 붙여진 듯한 홍치고개에는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계단길을 따라 한차례 가파르게 올라선다. 시야에 들어오는 두 개의 봉을 바라보며 키 작은 솔밭을 따라 넓은 등산로를 10분 가량 걷다가 오른쪽으로 응봉 봉수대(233.7m)에 오른다.
표지석과 안내문이 서있는 응봉 봉수대는 전기통신이 시작되기 이전의 군사통신시설로써 1898(고종 35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곳의 봉수대는 1530(중종 25년)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곳에서 서울까지 연락되었다고 한다.
축대 위로 자갈이 깔린 넓은 공터에서 내려다보는 부산 시가지는 바다와 육지가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북동쪽으로 가야할 시약산의 시설물이 너무나 멀게 보인다. 정맥은 왼쪽으로 몇 걸음 내려서다가 곧바로 직선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한차례 급경사로 떨어진다.
여기서 5명의 특공대원이 정맥길을 놓쳐 첫 번째 특별과외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돌탑이 쌓여있는 십자로안부를 통과하고 작은 오르내림으로 이어지다가 끝 봉(08:59)에서 왼쪽으로 내리막길은 다시 한차례 갈림길을 만나면서 왼쪽으로 내려선 곳이 장림동에서 다대포로 넘나들던 다대고개(09:19)다.
다대고개는 옛부터 장림과 다대를 잇는 유일한 고개로 특히 장꾼들이 많이 이용하던 고개라고 한다. 이어갈 정맥능선은 건물들이 꽉 들어차 들어설 틈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곳에서 모두가 같이 이동하기로 했는데 10여분을 기다려도 오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길을 놓쳤나...
09시 30분 육교를 건너 왼쪽으로 내려선다. 정맥길은 삼환아파트 103동을 만나면서 아파트 좌측 콘크리트 계단길로 오른다. 이어 울퉁불퉁한 콘크리트포장길을 따라 올라서며 만나는 가구공장이 들어서 있는 골목길, 골목길을 이리저리 찾다가 가시덤불을 헤치며 작은 언덕의 통신시설물이 들어서 있는 능선마루(09:47)에 오른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는 특공대원들...
정맥은 오른쪽으로 내려선 곳이 산마트의 대형 간판이 걸려있는 구평가구단지다. 삼거리에서 왼쪽길을 따른다. 마루금을 차지한 시설물과 텃밭, 이어 묘지와 No.2번의 지적 측량점이 있는 봉에 올라선다. 한차례 마루금을 그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잠시 내려서면 장림동과 구평동을 잇는 아스팔트포장도로가 되는데 새로 뚫린 도로라고 동네주민이 귀뜸을 해준다.
평안북도민회의 안내판을 보며 올라선 곳이 149.6m의 삼각점이 있는 봉화산(10:36)이다. 그리고 다시 한차례 내려섰다가 올라선 봉엔 그늘집과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다. 첫 과외를 치른 대원들이 줄줄이 도착한다. 이곳을 자칫 봉화산이라 생각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정맥은 오른쪽으로 3분 정도 내려서다가 넓은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희미한 잡목길로 내려선 곳이 장림고개(11:01)다.
장림고개는 신평1동?장림2동?구평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4차선도로로 신평?장림공단의 주 진입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장림이란 지명은 숲이 길게 우거진 곳이라기 보다는 지형적으로 아미산 둘레에 길게 늘어선 동네, 따라서 장림마을이 들어선 고개라 장림고개라 부른 것 같다고 한다.
장림에는 옛날 장림김이 유명했다는데 일제시기에는 일본사람들이 건너와 김양식을 많이 했으며, 이 때부터 이곳 주민들은 김양식이 생활수단이 되기도 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마루, 지봉 위, 논밭 할 것 없이 새까맣게 김을 말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1970년대 장림?신평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물이 오염되어 김양식은 쇠퇴했단다.
정맥은 부일냉동을 겨냥해 도로를 건너서 자유아파트를 바라보며 보행로를 따른다. 철망울타리에는 한겨울 빨간 열매가 보기 좋다. 정맥길은 대동중학교 정문을 지나 왼쪽으로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는 공원을 통과하며 능선에 붙는다. 이어 오른쪽으로 군사시설물의 철조망을 끼고 간다.
장송 숲 사이로 한차례 올라선 헬기장(11:25), 여기서 잠시 다리 쉼을 하며 보는 시약산과 승학산, 승학산(乘鶴山)은 비록 정맥에서 벗어나 있지만 구덕산과 시약산의 서쪽에 있는 높이 495m의 산으로 고려말 무학대사가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세를 살폈는데 이곳에 오니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높아 마치 학이 나는 듯하다 하여 승학산 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향하여 승학산에서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렸다고 하여 붙여졌다는 강선대(降仙臺)...
전술종합훈련장이 들어서 있는 안부에 내려섰다가 ‘96 임도 표지석, 그리고 송전탑이 있는 봉에 오른다. 능선분기점이다. 정맥은 넓고 선명한 내리막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희미한 길을 찾아 내려선 곳이 감천고개(11:46)다. 어느새 중식시간, 오늘의 특별메뉴는 기사식당이 자랑하는 갈치찌개 백반이다. 정맥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린다.
12시 20분 감천고갯마루 삼거리에서 육교를 이용해 도로를 가로지르고, 마루금에 들어서 있는 옥천초등학교, 이어 만나는 장평중학교 교정에 들어서서 특공대작전을 벌인다. 이어 맨션 울타리를 넘어서며 만나는 감천1동 산마루, 괴정배수지 담장을 끼고 오른다.
밋밋한 봉우리(12:43)에는 납작한 묘 1기가 자리잡고 있다. 시야가 열리며 좌측으로 시약산과 승학산이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와 있다. 되돌아보면 송전탑이 있는 능선분기점에서 장평중학교로 이어온 정맥능선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할 정맥능선의 돌탑봉이 높아만 보인다.
마을길 안부, 산불초소를 뒤로 한차례 힘겹게 오르다가 왼쪽으로 올라선 봉우리(13:03)에는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돌탑 위에 우정탑이라 새겨져 있다. 우정탑을 오르기 전 우측으로 조금 떨어진 또 하나의 봉우리가 삼각점이 있는 247.2봉 같다.
평탄한 정맥능선을 걷다보니 우측으로 용두산 전망대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바다 위에 떠있는 오륙도가 정겹게 다가온다. 봉우리를 넘고 묘지군락을 통과하다보니 부산의 명물인 영도를 잇는 영도다리가 모습을 들어낸다. 영도는 1, 4 후퇴 때 잠시 피난 나와 머물렀던 곳이다. 영도 어느 공동묘지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 단칸방을 얻어 살면서 고향에 가는 날만 기다렸던 어린 시절, 왜 그렇게 말이 안 통하는지...
같은 집에 살던 정자라는 1살 위인 여자아이, 부산 사투리가 신기해 흉내를 내다 하루종일 싸운 기억이 있다. “어무이여” “뭘라꼬” 이 것이 발단이 되었고, 우리는 그 해 5월 4일 부산을 떠나던 날에서야 화해를 하게 되었다. 정자야 나 고향 간다. “잘 가래이” 그리고 50년의 세월, 지금쯤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억새밭에 능선을 가르다가 내려선 곳이 까치고개(13:20)다. 서구 아미동과 사하구 괴정동간을 넘나드는 교통로이다. 까치고개란 이곳 고개에 까치가 유별나게 많이 찾는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즉, 1910년 일제강점을 전후하여 지금의 천주교 아파트 부근에 아미화장장이 설치되면서 영혼을 달래는 위령제가 자주 열렸고, 때마다 제물의 음식찌꺼기가 까치먹이로 제공됨에 따라 아미동?감천동?괴정동 일대의 까치가 한낮에도 먹이를 찾는데서 '까치고개'라 부르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산 중턱까지 주택가로 변하여 옛 자취는 거의 사라진 상태다.
13시 30분 대티고개에 내려선다. 서구 서대신동과 사하구 괴정동 사이를 오가는 고개로서 이 고개는 부산의 중심지인 중구?서구와 사하구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도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옛 부산쪽에서 괴정쪽으로 가려면 지금의 아미동(162.4m)에서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여 법원 뒤쪽 고개를 넘어 현재의 대티터널 위쪽 대티마을까지 올라서 괴정동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고개는 1930년대 고개를 따라 새로운 차도가 생기기 전까지 옛 부산 쪽에서 하단지역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교통로 구실을 하기도 했다.
대티고개의 또 다른 이름으로 옛부터 괴정?하단 주민들은 괴정에서 대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티고개라 부르지 않고 재첩고개라 불렀다고 한다. 소나무가 울창하여 솔티(松峙)라 불리기도 하는 이 고개는 본래 길이 험한데다가 산짐승과 도적들이 자주 나타나 부산장으로 하단 재첩을 팔러 가는 아낙네들이 괴정삼거리에서 모여 다 함께 이 고개를 넘었다는데서 재첩고개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나...
대티고개를 뒤로 오른쪽으로 전신주에는 많은 종주자들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을 노란색의 리본 하나가 반갑다. 철 난간이 설치된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며 한동안 골목길을 따라 올라서니 산불초소가 보이는 산길이 나타난다. 그리고 시약산 : 1.7km를 가리키는 이정표, 정맥의 오름길은 통나무계단을 따라 가파르게 시작된다.
고도 280m 정도 되는 봉에 오르고 가족묘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는 안부에 내려섰다가 산불초소를 뒤로 연이어 힘겨운 오름길은 방화선을 따라 오른다. 능선마루에 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지나온 능선들 그리고 부산시가지, 천마산과 장군산 아래 빌딩 숲이 바다와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벤치가 있어 발목을 붙잡는 바위봉을 넘어 힘겨운 오름길로 한동안 올라선 곳이 천문관측소가 자리잡고 있는 높이 565m의 시약산(14:23)이다. 자갈이 깔린 공터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절로 탄성이 나온다. 지나온 정맥의 수많은 봉우리들, 서쪽으로 496.2m의 승학산이 학이 나르는 날렵하게 솟아있다. 동남쪽으로 부산시가지와 영도, 그리고 바다에 떠있는 배들이 아스라이 잡힐 듯 보인다.
정맥은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잠시 되돌아 내려서서 콘크리트포장길을 따라 안부에 내려섰다가 통신탑을 보며 구덕산을 향해 오른다. 높이 562m의 구덕산(九德山)은 서구와 사상구 그리고 사하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짙은 산림으로 덮여 있는 깊은 계곡이 발달되어 옛부터 부산지방의 명산으로 이름나 있다. 옛날 고저기(古底岐) 또는 구지기(久至岐)라고도 불리어 오던 구덕산은 풍치가 빼어났다고 했는데...
정맥은 구덕산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서야 하지만 정맥꾼들에게 허용을 하지 않는다. 다시 되돌아 내려와 왼쪽으로 지루하게 이어지는 콘크리트포장길을 따라 허리길로 내려서면 구덕령(15:04)이 된다.
구덕령은 높이 220m의 고개로 구덕기재, 구덕재로 불리는 옛부터 대신동과 구포쪽으로 오가는 교통로로 구덕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구포?양산?밀양?김해방면으로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던 왕래가 잦았던 고개로 이름나 있다. 그리고 부산장과 구포장을 잇는 고개였는데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두 시장이 서는 날이면 보부상과 일반 장꾼들이 줄을 잇다시피 했던 곳이다.
구덕교통 1번 버스 종점인 듯 넓은 고갯마루에는 꽃집으로 즐비하다. 꽃마을 도로를 따르다가 오른쪽으로 줄줄이 달려있는 리본들이 정맥꾼들을 부른다. 방화선을 따라 통나무 계단길 좌우로 소나무숲이 한결 푸르러 보이는 오름길은 코가 닿을 듯한 급경사의 힘겨운 오름길이다.
15시 39분 통신탑을 바라보며 3분 정도 올라선 곳이 표지석이 서있는 엄광산이다. 부산진구와 동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503.9m의 산으로 전형적인 노년산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한때 고원견산(高遠見山)으로 불리던 산이다. 고원견산이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으로 우리 고유지명이 아닌 일본식 지명인데 1995년 우리지명 바로 찾기 운동에 결실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멀리 빌딩숲 위로 마치 무엇을 엎어놓은 듯 우뚝 솟은 백양산이 모습을 들어낸다. 휘둘러 보는 조망이 뛰어나다. 부산은 ‘富山’이란 명칭이 처음 기록되었는데 1481년(성종12년) 부자??富‘자가 가마솥??釜’자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라고 한다.
작은 오름내림 끝에 삼각점(부산 22, 1992)이 있는 봉우리 직전 돌탑이 있는 능선분기점에서 정맥길은 내리막길로 급하게 뚝 떨어져야한다. 한동안 사정없이 고도를 낮춘다. 임도를 가로질러 완만한 내리막길은 이내 개금2동 도로가 된다. 겨냥하며 내려선 백병원이 우측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금1동을 가로지르며 10분 가량 더 내려선 곳이 가야로, 16시 35분 개금 전철역이 있는 개금사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힘들었던 시간도 지금 이 시간 소중하고도 즐거운 추억으로 가슴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