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국학이야기
1. 탈춤
고구려의 무악(舞樂),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오기(五伎) 등과 같이 대륙에서 전래된 산악백희(散樂百戱)가 향악화(鄕樂化)되고, 고려의 산대잡극으로 이어지며, 조선 전기에는 사찰기악의 민속극화가 이루어져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현재의 것과 같은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 드라마로 정립되었다.
탈놀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연기자가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로 분장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연극의 일종으로 기원은 농경의례설, 기악설(伎樂說), 산대희설(山臺戱說)의 세 가지로 논의된다.
굿의 형태에서 본 탈춤
그러나 탈춤의 기원은 문화기록보다는 인간들이 사람들의 능력을 초월한 무엇인가를(神)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러므로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든 정신문화적인 측면에서 시작한 '굿' 형태에서 찾아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것은 곧 어떤 제례식보다는 생활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연희의 장소는 실제 그들 삶의 현장이고 연희의 시간 은 바로 삶의 현재인 것이다. 즉, 농산물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이 노력을 초월한 어떤 영험한 신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돌, 나무, 별, 달 이 모든 것이 신의 대상이 되어 농사를 짓기 전에 제단을 쌓아놓고 빌기 시작했고, 추수 때는 풍요로운 수확에 감사를 빌며 다음 해의 농사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활 속에 점점 깊이 파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대상이 되는 신은 점차 늘어나게 되고, 그 중에 액신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얼굴에 탈을 쓰고 시작한 탈춤의 기원으로 생각되며, 내용도 처음에는 간단하여 대사가 없는 묵극에서 점차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그 배경에 비례해서 대사가 늘어나고, 그 안에 사이사이 여흥도 끼게 되어 지금의 탈춤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탈춤은 농촌마을 자체에 깊이 뿌리를 박고 전승 되었으며, 판을 단순한 굿에서 물려받은 갈등 구조에 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갔다.
예술로 승화된 도시 탈춤
또한 탈춤은 환경에 따라 농촌탈춤과 도시탈춤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농촌 탈춤은 여러 가지 허용해 주는 범위 안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하고, 마을굿을 떠나서는 공연할 수 없었으며, 탈춤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경제적 능력도 갖기 어려웠었다. 이렇게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약했던 농촌은 식민지적 근대 문화와 부딪치자 쉽게 위축되고, 일제의 탄압을 거치면서 대부분이 전승이 중단되어 현재는 대본이 채록된 하회별신굿탈놀음 하나뿐이다. 이에 비해 도시 탈춤은 상인, 이속의 경제력과 생활의 여유를 배경으로 자라났기 때문에 비록 위치는 농민들의 위치와 다를 바 없었으나, 도시에서는 양반의 지배력이 농촌만큼 강하지 않고, 도시의 상인과 이속이 양반과 대항할 수 있는 사회적, 정신적 능력에서 농민보다 앞섰기 때문에 전부터 있어 온 농민의 농촌 탈춤을 기반으로 하여 이를 더욱 높은 수준의 것으로 계승 발전시켰고, 우리 문화재 내지 예술에서 탈춤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고하게 성립시켰다.
(탈춤의 지역분포)
북부지방 -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중부지방 -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남부지방 - 고성오광대탈춤, 가산오광대 탈춤
통영오광대탈춤, 동래야유
기타 - 하회별신굿 탈놀이, 북청사자놀음
(시대별 탈춤)
[ 고구려 ]
탈의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무용총 벽화에서이다. 고구려인들은 이미 4세기 이전부터 마상재(馬上才), 칼싸움, 막대기와 공을 던지는 농환(弄丸)등의 잡회가 성했으며, 『고려사』에는 고구려 가악(歌樂)의 명칭이 기재되어 있다.
[ 백제 ]
백제 시대의 탈의유산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많이 남아 있다. 7,8세기의 기악면(탈)이 일본에 현재 2백여 개나 보존되고 있음은 실로 백제의 탈문화까지도 일본에 전달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 신라 ]
한가위나 팔관회에서 연희되었던 신라악들은 다분히 중국의 '산악백회'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크게 검무(劍舞), 무애무(無碍舞), 처용무 오기(五伎)를 꼽을 수 있으며, 이 가운데 무애무만이 탈춤이아니다.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처용무는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토착 신앙과도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만들어 대문 위에 걸어 놓음으로써 나쁜 귀신을 쫓았다 한다.
[ 고려 ]
통일신라와 조선을 이어 준 고려는 북방 민족의 잦은 침탈을 받으면서도 독창적 문화를 성장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신라 때부터 무속 신앙이 기반이 되어 서민 놀이와 외래종교인 불교의 영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 조선조 ]
조선 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고려조에서와 같은 규모는 아니더라도 연등회와 팔관회등의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산대나희(山臺儺戱)는 풍요를 기리고 귀신을 쫓는 나례로서, 양란(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관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도감패'들은 뿔뿔이 흩어져 차츰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산대놀이의 광대들은 그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여러개의 놀이패를 조직하여 오늘날까지 그 맥을 전승해 내고 있다.
그 연원을 신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처용무는 많은 변천 과정을 거쳐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대표적인 탈춤이었으나 지금은 처용무, 학춤이 거의 별개로 추어지고 있다.
탈춤의 주요 재료인 ‘탈’은 가면을 뜻할 뿐만 아니라 [탈나다]의 말에서처럼 재앙이나 병을 뜻하기도 한다.
그 예로 음식을 잘못 먹어 배가 아플 때 '배탈'이 났다고 하고, 다친 곳이 덧나도 '탈났다'고 하며 무슨 일이건 잘못되어도 '탈났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또한 남사당에서는 탈놀이를 '덧뵈기'라고 하는데, 다른 무엇을 하나 쓰고 본다는 의미이다. 가면은 사용하는 것은 재앙이나 병을 가져오는 악신이나 역신을 쫓으려고 할 때는 그보다 더 무섭고 힘이 있는 것을 쓰고 쫓아 버려야 한다는 신앙이 있었다. 이러한 가면은 주변에 가까이 두기를 꺼려했다. 장례식에서 쓴 방상씨는 물론이고, 한 마을의 지킴이로 모셨던 탈들도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당집에 보관하였다. 수렵생활을 하던 원시인들이 수렵 대상물인 동물에게 접근하기 위한 위장면으로, 뒤에는 살상한 동물의 영혼을 위로하며, 또한 그 주술력을 몸에 지니기 위한 주술적 목적에서 비롯하여 점차 의식용으로 변모. 발전되었다고 한다.
2. ‘차레와 제사‘의 의미
차레'는 한자가 아닌 '채움과 비움'에 대한 순수한 우리말이다. 국가적인 명절이나 개인의 기제사 모두 '차레'라하고 그 가운데 가장 큰 차레를 '마차레'라 하여 상고시대의 영고나 동맹 등 하늘에 국가와 백성의 안녕에 대한 기원을 올리는 제천행사를 말하는 것이다.
차레를 지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스스로(개인부터 공동체까지)가 얼마나 비우고 채울 수 있는지,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다가올 시절을 준비하는 밝고 아름다운 한마당을 치러내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차레는 하늘과 통할 수 있고, 지난 과거(조상)와 서로 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 가족부터 나라까지의 모든 공동체가 전체가 하나 되는 공동체 의식과 ‘한’의 완성을 이르는 과정을 실천하였다. 그것은 다음 차레까지 어떻게 각각의 공동체의 전체 방향과 운영계획을 논의하는 것으로. 차레는 단순히 제사 행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사를 마친 다음에 각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그 결과를 서로가 나누고 공유하는 시간까지가 차레의 전체 내용이다. 그리고, 차레의 성격은 각 공동체의 범위와 규모에 따라 달랐다. 국가 차원에서 지내는 차레는 그 나라의 가장 큰 지도자가 대주가 되어 하늘에 기원하는 국가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고, 기제사의 경우는 조상님의 기일을 중심으로 그분의 뜻과 행(行)을 살피고, 이를 기준으로 가족 공동체의 질서를 확인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마땅히 달라져야할 것이 있고, 그럼에도 달라져서는 안 될 것이 있듯이 차레와 관련해서도 지킬 것과 버릴 것이 반드시 있다. 그 가운데 버려야할 것이 허례허식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할 것은 차레를 지내는 주체와 차레의 대상에 대한 염원이다.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만 차레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전제는 전통문화 속에 녹아 있던 한겨레의 선도문화의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한다. ‘목욕재계’의 의미가 외부의 몸만을 깨끗이 하는 의식이 아닌 내면의 세계까지 정화하려는 것으로 의식(儀式)이 아닌 주체와 염원(念願)에 대한 갈구라는 점에서 차레를 넘어 국학(國學) 전체의 핵심 알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차레 상차림에서도 조상에 대한 예(禮)를 알 수 있다. 제사를 올릴 철(節)의 제물을 상위에 차려 하늘의 기운을 받아 땅과 사람이 어울려 이룬 세상의 모습을 하늘과 조상님께 보이는 과정 안에 ‘채움과 비움’이 함께 하는 것이다. 차레를 지낼 때, '한'과 하나 된다는 염원이 없고, 조상의 신(혹은 영)이 차레에 함께 한다는 생각이 없고 허식(虛飾)이 자리 한다면 차라리 차레를 지내지 않는 것이 좋을듯하다.
제사문화는 유교의 영향 이전부터 있었던 우리 겨레문화의 원형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있었던 '샹'이라는 수행체계를 계승한 것이다.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하고 문화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있는 현(現)시대에 차레의 전통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할 시대정신인 국학(國學)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시대정신(國學)을 바로 세우는 일이 어렵다고 할 수는 있지만, 바로 그 일이 민족이나 겨레운동을 한다는 개인이나 단체의 진정한 몫이 아닐까한다.
시대정신(國學)을 바르게 하는 일에 차레의 참다운 정신이 들어간다. ‘비우고 채울 것’, ‘버리고 지킬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명절이 돌아왔다. 이번 설에는 을유년 한해 ‘참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농사를 지어봄이 어떨까 제안해 본다.
- 국학운동시민연합 소식지 05.02월호 중에서 -
3. 세시풍속에 나타난 우리의 모습
우리나라는 1년을 사계절에 따라 24절기로 나누고 중요한 시기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날을 두어 명절로 삼았다.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자.
설날은 새해 첫날이라 원단(元旦)이라고도 한다.
‘설’은 근신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설빔으로 갈아입은 뒤 제상이나 사당에 세찬을 차려 놓고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조상님께 감사를 올리는 의식이므로 기제(忌祭)와는 달리 신주를 모시지 않으며 절차도 간단하다. 차례가 끝나면 집안의 어른부터 나이순서로 세배를 올린다. 세배는 정초부터 보름안에 드리면 실례가 되지 않는다. 그다음 친척이나 마을 어른을 찾아가 세배를 들인다.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던 부녀자는 계집종을 예쁘게 꾸며서 가까운 친척에게 문안을 보내는데, 이때 가는 여종을 문안비(問安婢)라 한다.
대보름날은 새해 첫 번째로 맞는 보름이다. 그래서 상원(上元)이라고도 한다. 대보름 하루 전인 14일에 새벽을 알리는 닭이 울면 퇴비 한 짐을 져다 논에 부린다. 한해 농사가 시작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도 담겨있다. 이날 나무 위에 매달아 두었던 수숫대 묶음을 내려 1년 동안 쓸 비를 맨다.
대보름 아침에는 호두 따위의 단단한 과일 껍질을 깨물어 마당에 버리는 ‘부럼’을 한다. 아침밥은 전날 미리지어 놓은 오곡밥을 아홉 번 먹는다. 김 한 장으로 밥을 싸서 먹는 복쌈, 호박고지, 무말랭이 고사리 등 여름 나물을 삶아 먹는 진채식(陣菜食)도 있다. 오곡밥을 약식으로 여겼고, 김밥은 노적(露積)의 곡식을 상징하며, 진채식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귀밝이술(耳明酒)을 한 잔씩 마신다.
밤에는 온 마을사람이 들판이나 언덕에 모여 달맞이를 한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라 여겼고, 희면 장마가 들 징조라 여겼다. 떠오르는 달의 윤곽이 희미하거나 달무리가 지면 흉년이 든다고 점쳤다. 둥글게 가득 찬 밝고 환한 달이 뜨면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이라 믿었다.
사람들은 축제로 들떠 지내지만 개들은 재수 없는 날이었다.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이날은 하루 종일 개밥을 주지 않다가 보름이 뜬 뒤에야 준다. 이날 개에게 밥을 주면 개가 마르고 파리가 들끓어 더러워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밥을 굶을 대 ‘개 보름 쇠듯 한다.’고 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개새끼 보름’이라고 자조했다.
한식에는 찬밥, 삼짇날은 진달래 화전
입춘은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로 이때부터 봄이 시작된다. 이날을 맞이해 집지마다 대문이나 기둥에 나라와 가정의 안녕과 봄을 축복하는 글귀를 써붙였다.
“봄을 맞이해 크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며 해를 세워 경사가 많을지로다.”(立春大吉 建陽多慶)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할 것이며 가정은 넉넉하고 백성은 풍족할지로다”(國泰民安 家給人足)
2월 첫날에는 콩을 볶아 먹는 행사를 치렀다. 콩을 볶을 때마다 주걱으로 저으면서 “새알 볶아라, 콩 볶아라.”라고 중얼거린다. 새와 쥐를 몰아내 곡식을 보호한다는 주술이 담긴 말이다. 곡식 씨앗을 솥에 볶으면서 “이 볶자”고 중얼거리거나 “벼룩 죽으라”고 소리치면서 볶은 씨앗을 방안에 뿌린다. 겨우 내내 이와 벼룩의 등쌀에 잠을 설쳐 그것을 몰아내고 싶은 염원을 담았다. 빈대는 19세기에 서양의 상품에 묻어 들어왔는데 “빈대 무서워 초가삼간 태우랴”는 말은 그 이후에 생겨난 말이다.
한식은 동지에서 105일째 되는 날로 양력으로 4월 5,6일 경이다. 이날은 찬밥을 먹는다. 어느 때부터인지 청명이나 한식날, 봄을 맞이하는 뜻에서 불을 바꾸는 행사가 있었다. 불은 만물을 키우는 기운으로 임금이 대궐에서 버드나무와 느릅나무에 붙인 불을 관아에 나누어 준다. 여염에서도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받아다 붙인다. 새 불이 여염까지 이르려면 꽤 시간이 걸리므로 미리 밥을 지어 두었다가 찬밥을 먹는다.
이 풍속은 서로 성묘와 연결되어 조상의 덕을 기리고, 묘소 앞에서 찬밥을 먹으며 근검절약의 마음가짐을 다지고 새로이 농사를 잘 짓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날 벼슬아치들에게 특별휴가를 주어 성묘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이날 바람이 많이 불고 건조하여 화재가 나기 쉬우니 불조심하라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당부한 적이 있다. 그 뒤부터 관아에서는 한식에 불조심 행사를 벌였다.
단오부채, 개장국으로 더위를 이겨내며
단오는 5월에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사람들은 쓴맛이 나는 쑥과 익모초를 뜯어 즙을 마셨으며 여자들은 창포를 잘라 그 물에 머리를 감고 창포 뿌리에 수복(壽福)이라고 써서 비녀처럼 꽂고 다녔다. 이렇게 하면 머리카락에 윤기가 나고 머리털이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단오에는 부채를 주고받는데 이 부채를 받은 사람은 단오선(端午扇)이라 하여 소중하게 간직했다.
유두는 6월에 든다.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이고 과일이 풍성하다. 국수와 밀떡, 수박을 들고 산이나 개울을 찾아 맞이를 하고 잔치를 벌이는데 이를 유두연이라 한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여인네들이 웃옷을 벗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 물맞이하는 풍경을 어린 동자승이 숨어서 구경하는 장면이 있는데 유두의 풍속을 그린 것이다.
칠석은 음력 7월 7일
여름철에는 복날이 세 번 들어있다. 복(伏)은 ‘꺽는다’는 뜻으로 여름 더위를 꺾는 날이다. 더위를 피서가 아니라 더위를 정복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복날이면 조정에서 벼슬아치들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었고 여염에서도 고기를 삶아 먹는 풍습이 있다. 복날 개를 잡아먹는 풍습은 고려시기에 처음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복(伏)은 사람(人)과 개(犬)을 합성해 만든 글자이니 뭔가 개와 연관이 있을 듯싶다.
풍년을 축하하고 조상님께 감사하세
추석은 “달이 가득 차다”는 뜻으로 한가위라고도 한다. 만월이 나타나고 햅쌀이 나는 철이라 조상숭배 의식과 축제마당이 함께 어우러졌다.
신라 때는 한가위를 맞이해 여자들이 길쌈 시합을 벌였는데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라졌다 추석은 조상의 음덕을 기원하고 풍년을 축하하는 의식이 조화된 즐거운 축제일이다. 추석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즐기는 농경축제의 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9월에 양(陽)의 기운이 겹치는 중양절이 든다. 10월은 가장 높은 달이라 하여 상달이라 하였다. 10월에는 굿과 고사도 지낸다. 하늘은 공경하여 우순풍조(雨順風調)를 기원하며 부정을 물리지고 살(煞)을 제거하는 의식이다. 굿이나 고사에는 더러 무당을 동원하기도 한다.
세시풍속은 해마다 쳇바퀴 돌 듯 되풀이 된다. 물론 신분과 재산 정도에 따라 그 내용이 구분되기도 하고 산촌, 어촌에 따라 풍습이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농경문화의 한 전형으로 오랜 새월을 거치며 역사성을 지니고 조선 후기에 정착되었는데 산업사회를 겪으며 오늘날은 거의 사라졌다. 이제는 민속놀이라는 이름으로 재현되는 모습을 보는 정도이다.
- 이이화『놀이와 풍속의 사회사』중에서 -
4. 줄다리기
줄다리기
- 줄의 제작부터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까지 주민들을 한마음으로 결집시키는 대동놀이이며 다산과 풍성한 수확을 기리는 대표적 민속놀이이다.
줄다리기는 중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 일원에 널리 분포하는 놀이로서, 삭전(索戰)· 조리지희(照里之戱)· 갈전(葛戰)이라고도 한다. 시기는 주로 정월 대보름날 행하지만 동래(東萊)지방에서는 단오날, 제주도에서는 한가위, 전라도 서해안 지방에서는 2월 초하룻날 행하기도 한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祈雨祭)의 형태로써 행하는 지역도 있고 전남지방의 고싸움의 기원이 되는 한국의 대표적 민속놀이다.
그 기원(起源)과 유래(由來)에 관해서 정확한 고(古)문헌은 전해지지 않으나 하늘의 아들 한웅이 강림하시고 이어 나라를 다스리시는 단군이 탄생한 것을 축하하는 행사로 농악이나 씨름 등과 같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민속놀이로 산신제의 하나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중국의 《수서(隋書)》,《전당서(全唐書)》에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줄다리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한국기록은《동국여지승람》에 처음 소개되었다. 제주목(濟州牧) 풍속조에는 조리지희(照里之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매년 8월 15일에 남녀가 모두 모여 가무를 즐기고, 좌·우편으로 나누어 큰 동아줄 끝을 잡아당겨서 승부를 결정한다. 중간에 줄이 끊어져서 두 편이 땅에 쓰러지면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는다. 이를 조리의 놀이라 한다." 하였다.
또한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에 '충청도와 경기도에서는 줄다리기를 행하는데, 이는 옛날의 혈하희(血河戱)에 해당된다.' 하였으며, 또한 영남에서는 '칡으로 만든 줄을 당겨 승부를 결정함으로써 점풍(占豊)을 하는 갈전(葛戰)이 있다.' 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줄을 꼬는 일부터 시작한다.
대개 짚을 사용하나 영남지방에서는 칡을 사용하기도 한다. 줄은 암줄과 수줄을 각각 만들어 끝을 연결하며 줄의 끝은 올가미모양으로 틀어져 있는데 이를 도래 또는 머리라고 하여 결승선까지 상대방의 도래를 끌고 오면 이기는 것으로 이긴 쪽의 줄에는 영험(靈驗)이 있어 거름에 섞으면 풍년이 들고, 지붕에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고, 배에 실으면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하여 앞 다투어 잘라갔다.
한편, 당산굿에서도 줄다리기가 행 해 지며 이를 줄다리기굿이라 하는데, 승부가 나면 당목에 줄을 감아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암줄과 수줄의 연결이 남녀(男女)의 성행위를 상징하고 줄이 비를 뿌리는 용의 모습과 비슷하며 대보름날 행해진다는 점에서, 풍성한 수확을 기리는 신앙(信仰)적 차원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줄다리기는 이처럼 신제(神祭)의 성격이 강해 천신강림제라고도 불리운 반면, 일반적으로 남·녀의 성행위를 모방한 주술적(呪術的) 성격도 존재한다.
암· 숫줄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렇거니와, 두 줄을 결합하거나 응원할 때에도 두 줄을 남·녀의 성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에서 여성이 승리하도록 결말을 내는 것 또한 다산(多産)이 곧 풍요(豊饒)를 상징한다는 믿음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줄다리기를 성행위에 비유하는 해석은 줄에 대한 금기와 속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주민들이 합동으로 만든 줄을 상주(喪主)나 여성이 넘으면 줄이 끊어진다는 금기(禁忌)가 있어서 엄하게 지키기도 하지만, 또한 불임여성(不妊女性)이 넘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이 있는 탓에 기회를 엿보다가 줄을 넘으려는 여자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줄다리기를 마친 연후에 줄의 처리방식 또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줄다리기에 있어서 가장 큰 의의는, 과거 농촌에 있어서 대동단결(大同團結)의 축제마당으로서 정초부터 대보름 또는 2월 초하루까지 이어지는 명절의 대단원을 장식한다는 점이다. 줄다리기는 농촌 노동력의 주축을 담당하는 청·장년층을 중심으로 모든 주민들이 참여하는 행사로서, 줄의 제작으로부터 경기에서의 승패가 결정되는 순간 이후까지 주민들을 한마음으로 결집 시키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대동놀이의 대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줄다리기도 여타의 전통놀이와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强占)기에 중단된 경우가 많다. 특히 신작로(新作路)의 이설과 철도의 개통에 의하여 교통로가 크게 변하면서 상업이 쇠퇴한 지방에서는 일찍이 중단된 반면에 일제 강점기에 장시가 발전했던 곳에서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지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의성(義城), 경상남도 영산(靈山), 전라남도 장흥(長興),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기지시(機池市)의 줄다리기가 유명하며 해방 이후에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줄다리기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입상을 계기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1969년 경남 창녕의 영산 줄다리기(제26호)에 이어서, 1982년에는 충남 당진의 기지시 줄다리기(제75호)가 문화재로 집중 육성되고 있다.
이 두 경우는 본래 각각 읍내와 큰 장시에서 행해지던 줄다리기로서 마을 단위의 줄다리기에 비할 규모는 아니었는데, 최근 문화재로 보호·육성되면서 지역축제의 성격을 되찾게 된 셈이다.
한국·중국·일본 외에도 수렵민인 에스키모, 캄차카반도의 이텔리멘족(族), 또 농경민족인 동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등 수도경작민(水稻耕作民) 사이에서는 축원의미의 연중행사로 행해지고 있다.
스포츠로서의 줄다리기는 1908년 런던올림픽대회에서 정규프로그램 이외 보조 프로그램으로 채택한 일도 있다.
국제줄다리기연맹의 규정에는 길이 33.5∼36m 밧줄을 8명씩 두 패로 나누어 마주 끌어당겨서 2m 이상 끌어당긴 편이 이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각자 체중별로 구분하여 8명 체중합계가 가장 가벼운 쪽이 400㎏ 이하이고, 약 40㎏마다 1계급씩 올라 가장 무거운 쪽은 800㎏ 이상이고 3판 2선승제이다.
6. 진또배기
진또배기의 진또는 ‘나루’란 뜻이기도 하고, 대나무를 뜻하는 ‘긴대’가 ‘진대’로 변하고, 다시 ‘진또’로 변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배기는 ‘박혀있다’,‘박이’란 뜻이다. 즉 ‘바다에 떠내려 온 솟대를 나루터에 박았다.“는 말과 ’하늘 높이 솟아있는 대‘라는 두 가지 뜻이 모두 진또배기의 어원이며, 간절한 소원을 기원하면 꼭 이루어진다고 전해오고 있고, 천지인의 삼원사상을 의미한다.
진또배기는 바로 솟대요 나루를 지켜주는 신대이다. 돌로 쌓건 나무로 세우건 솟대는 하늘나라로 통하는 신목이다. 그래서 솟대 위에 않은 새는 신조(神鳥)이다. 그러니 그 새가 오리이건, 학이건 원앙새이건 상관없다.
일본 신사의 대문을 ‘도리이’라고 하는데 실제 새는 없다. 그러면서 ”새가 있다“는 이름이 붙은 것은 원래 그 대문 위에 새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신사의 대문은 한국에서 건너간 솟대이다.
신조의 심리적인 기원에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는 현세와 내세의 매개자로, 죽은 자의 영혼을 타계로 운반하는 중계자 또는 안내자로 여긴 결과 매장풍습이 나왔고, 여러 신화에는 수호자나 사자로 여겨 신성자의 출현을 알리는 영조 또는 영매의 역할을 다하였다.
또, 신조의 신앙적인 기원은 마을 어귀에 서서 액이나 살, 또는 잡귀의 침입을 막는 수호신적 존재이며, 풍수리지적인 비보물로서 지리적 형국에 따라 보허, 진압, 살막이, 화재박이 등의 기능을 하기도 하며 풍농과 풍어, 행운과 방재 등 축원의 대상이기도 하다.
강릉시 강문에는 한국의 솟대문화 중에서 가장 잘 보전되어있다.
강문 진또배기제는 매년 음력 4월15일 자정에 강문 여서낭당에서 강문어촌계의 주관으로 치르는 제례이다. 강문 어민들은 험한 바다에 나가서 파도와 싸워야 하는 처지라 특별히 신의 가호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바다로 나갈 때에는 반드시 뱃머리에 서낭님을 모시고 떠났다. 그래야 삼재(물?불?바람의 재난)를 면하고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 아직도 이 강문 마을의 어민들은 서낭님의 각별한 가호가 필요하다.
김교헌은 『신단실기』에서 서낭당 제사의 유래는 단신제라 했다. 단신제를 지내던 터는 지금도 만주 땅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그 곳 사람들 전설에 따르면 태고 때 단신제를 지내던 터라고 한다. 대개 수풀 속에 단을 쌓았을 뿐 당집은 없어서 그 태고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단신제는 고구려와 발해, 요, 금을 거쳐 줄곧 그 전통을 이어온 것이다.
서낭제는 바로 단신제의 유풍이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단신제의 유풍이 서낭제로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단군 민족의 고유문화인 것이다.
강문 진또배기에서 남서낭당 쪽을 바라보면, 동해안 특유의 소나무가 멋지게 늘어져 있다. 저 소나무 숲이야말로 성스러운 신림이요, 성림이다. 단군사화에 나오는 신단수인 것이다. 신라로 말하면 경주의 시림이요 계림인 것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인의 아들 환웅이 신단수 아래 내려오시니 젊고 아리따운 웅녀가 단수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웅녀의 소원을 들어 아기를 갖게 하니, 이가 곧 단군이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민족의 시조 이야기가 이 곳 강문 마을의 남녀 두 서낭당과 진또배기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진또배기는 우리에게 이국적인 인상을 준다. 순수한 우리 것인데도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랜 옛 것이라 마치 그것이 남의 것인 양 느껴지고 있다. 진또배기는 역사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것을 무시하고 버려 왔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외래문화에 젖다 보니까 본래의 우리문화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솟대를 민속박물관에만 세워 놓을 것이 아니라 국립박물관 현관에도 세워 놓아야 한다.
첫댓글 화일로 다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귀한자료인데, 겹쳐서 보이질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