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대로(義州大路)를 따라
“先人의 흔적을 더듬어 옛길을 달리다.”
때 : 2008. 5. 8(금)
일정
12:30 학교 출발
13:00~13:10 서대문
13:20~13:50 독립문
14:10~14:20 숫돌고개
14:30~14:50 망객현
15:10~15:30 벽제관터와 그 주변
15:40~15:50 혜음령
16:00~16:30 용미리 석불
16:50~16:10 파주목 관아터
16:30~16:45 화석정
18:00~ 갈릴리수산 장어구이백반과 함께…
오늘은 의주대로를 따라 떠나볼까요? 길-인간이 만들어 낸 길에는 보편적인 원칙, 즉 최소 에너지로 가장 빨리 목적지에 가고자 하는 경제 원칙이 적용됩니다. 한 사람이 걸어간 길을 그 다음 사람이 따라 걷고, 또 그 다음 사람이 그 발자국을 따라 걷고 … 그래서 세월따라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집니다. 평지에서는 가능하면 곧게 가지만 늪이 나오면 살짝 피해 갑니다. 높은 산을 만나면 가장 낮은 고개를 찾아 넘고, 계곡을 따라 길을 만듭니다. 강을 건널 때도 흐름이 빠른 여울은 피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길은 결국 꼬불꼬불해집니다.
20세기가 되면서 굽은 길들이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큰산을 만나면 터널을 뚫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아 건너갑니다. 논도 밭도 사람 사는 집도 어지간하면 밀고 지나갑니다. 구절양장 같은 옛길이 반듯하고 넓게 바뀌면서 이동 시간도 엄청나게 단축되고 걷기에도 힘이 덜 들게 되었지만, 이제 그 길은 사람들이 걸어서 이동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휙휙 속도감을 자랑하며 자동차들이 달립니다. 이리저리 큰길에 난도질당한 옛길에는 이제 사람의 발자취를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상처난 채 버려진 옛길을 찾아가는 것은 마치 폐허 속에 버려진 옛 고향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제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라도 이런 길을 갈 수는 없을 테니 이 길은 꼭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무심코 나선 길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다리가 아프고 발가락도 아파오고 땀도 나고……. 하지만, 이런 고통을 잠시 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덧 사유(思惟)의 늪 속에 빠져듭니다. 걷는 것은 사유(思惟)입니다. 삶의 여유(餘裕)이자 작은 쉼표입니다. 빠르고 쉽고 편리함만을 찾아 허겁지겁 살아가는 생활 속에는 깊이 있는 생각이 끼어들 곳은 없습니다. 옛길은 고독하고 힘이 들고 돌아가는 길이지만 그 길에는 깨우침이 있고 삶의 여유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고 선인(先人)들의 숨결이 있습니다. 개발로 인해 생채기난 옛길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느리지만 천천히 물어물어 찾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의주대로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 여행의 출발점을 돈의문으로 잡았습니다. 돈의문(敦義門)! 흔히 서대문이라 불리었습니다. 원래는 흥인지문에서 광화문을 통과하는 일직선상에 있었으나, 한양의 다른 성문과 달리 지은 후 두 번이나 옮겨 다니다가 1915년 일제가 전차 복선화 공사를 하면서 철거해버려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돈의문 밖에 있었던 경기감영 터에는 현재 적십자병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경교(京橋)도 없어지고 무악재로 가는 길이 곧게 뻗어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에 맞아 숨진 경교장만 강북삼성병원 앞에 그 이름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감영 옆에는 서북지방으로 가는 파발이 있었습니다. 예전엔 파발동이 있었는데 지금은 평동(平洞)에 모두 흡수되고 말았습니다.
돈의문을 떠나 천연정을 바라보며 영은문으로 갑니다. 천연정이 있던 곳은 지금의 동명여자중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임금이 직접 나와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慕華館) 자리에는 우리은행지점 등 몇몇 상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청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5백년 청의 속국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하고 다시는 어떤 나라에도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여망이 담긴 성금을 모아 영은문을 헐고 지었다는 독립문도 고가차도 때문에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옆으로는 서재필 동상이 있는 독립공원과 서대문 역사박물관이 보입니다.
무악재를 넘으면 조선 시대 나라에서 운영하던 숙박시설 홍제원(弘濟院)이 있었습니다. 서북지방의 양반관료들이 의주대로를 따라 도성 안에 들어오려 하는데 돈의문이 닫히면 하는 수 없이 성 밖에서 묵었습니다. 신분질서가 엄연하던 시절에 양반들이 상민들과 섞여 주막에 묵을 수는 없었겠지요. 국가가 재난을 당하면 홍제원은 일시적으로 재난 백성을 구제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답니다.
이곳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장터가 있었습니다. 서울이 팽창하면서 주거지가 무악재를 넘어오자 화장터는 고양시 벽제로 옮겨 갔습니다. 홍제원 터를 확인하고 조금 더 내려가면 떡전(餠廛)거리가 나옵니다. 떡전은 사신의 행렬이 지날 때만 열렸다고 하는데 지금의 홍은시장이 되었습니다. 먼 길을 걸으면 금방 출출해집니다. 그 시대의 간식은 떡이었습니다. 다른 떡은 쉽게 쉬어버리기 때문에 인절미가 인기였습니다.
지금은 하천 복개와 고가차도로 개울이 잘 보이지 않지만 모래내(홍제천)를 건넙니다. 평창동에서 흘러오는 홍제천은 화강암지대를 흐르기 때문에 하천바닥과 주변에 모래가 많아 ‘모래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화강암은 석영, 운모, 장석으로 이루어진 암석입니다. 석영을 흔히 모래라 부르는데, 화강암에는 석영 함량이 가장 많기 때문에 하천 주변에는 모래가 흔합니다.
병자란 때 청군은 조선의 친명배금정책에 앙심을 품고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를 삼전도로 끌어내려 굴욕적인 항복을 받고 소현세자ㆍ봉림대군 등 60 여만 명의 인질을 잡아 제 나라로 데려갑니다. 2년 후 조정에서 속환금을 지불하고 끌려갔던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돌아옵니다. 남자의 여자 경험은 훈장(勳章)이 되지만 여자의 남자 경험은 족쇄(足鎖)가 됩니다. 전쟁에서 남자가 지켜주지 못한 여자를 우린 ‘화냥년’이라고 이중으로 학대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여자들은 절개를 잃고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멸시당했습니다. 환향녀들의 자살이 속출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대책이 마련되었습니다. 각 도에 강을 정하여 회절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심신을 씻게 한 후,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사대부가를 엄벌로 다스리기로 한 것입니다. 홍제천도 그 하천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차별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모래내를 건너 녹번고개를 넘습니다. 지금의 국립보건원 앞 작은 개울을 또 건넙니다. 옛 경기감영의 북영(北營)이 있던 동명여고의 작은 언덕이 관터고개입니다. 불광천(연신내)을 지나면 박석(?石)고개를 넘습니다. 임금의 행차가 가끔 있는 고개라 비가 오면 질척거리지 않게 얇은 돌들을 깔았다 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이 고개는 서오릉(西五陵)으로 가는 길입니다. 은평뉴타운 아파트공사가 한창인 박석고개를 내려오면 구파발(검암참)입니다. 돈화문에서 내달린 말이 23리를 달려 여기쯤 오면 지치게 마련입니다. 말을 갈아타야죠. 그리고 벽제참까지 20리를 달립니다. 옛날(舊)에 파발(擺撥)이 있던 곳. 그래서 구파발입니다.
구파발을 지나면 창릉천(昌陵川)을 건넙니다. 창릉천에서 바라보는 삼각산의 자태는 참 웅장합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병자란 이후 청은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의 파병을 요구합니다. 청음 김상헌이 끝까지 반대하다 청의 인질이 되어 이 길을 갑니다.
숫돌고개를 넘습니다. 1592년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은 단숨에 한양은 물론 평양까지 점령합니다. 1593년 1월 명(明)의 파병으로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군대는 평양을 탈환하고 1월 25일 개성까지 탈환합니다. 1월말, 일본군은 남하하는 명군을 막기 위해 이 고개에서 매복을 했고 이곳에 도착한 명의 군대는 크게 패해서 벽제역으로 달아납니다. 여기서 명을 이긴 일본군은 2월에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하다 크게 패해 남으로 철수를 시작합니다.
고양동으로 갑니다. 벽제관! 건물은 없고 터만 남아 있습니다. 관리가 한양을 떠나 첫날밤을 묵는 곳이고 한양으로 가기 전 마지막 밤을 보내는 곳입니다. 벽제역이 있었던 곳에 1625년(인조 3년) 벽제관이 건립되었습니다. 조금 더 가면 고양향교가 있고 옆엔 중남미박물관이 있습니다. 고양관아가 있던 곳은 아파트와 집터로 바뀌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이젠 혜음령(惠陰嶺)을 넘습니다. 땡볕이 내리쬐는 의주대로를 더운 날 걷기에는 참 힘들었을 겁니다. 이 고개엔 숲이 우거져 있었나 봅니다. 우리 임금도 아닌 중국 황제의 은혜(惠)로 그늘(陰)이 덮인 고개라 해서 혜음령이 되었습니다. 골수에까지 박힌 모화(慕華)! 지금 우리 시대에는 모미(慕美)가 문제지요? 혜음령을 넘으면 파주 땅입니다. 혜음령 아래에는 고려 예종 16년(1120년)에 착공해 다음해에 완공된 혜음원이 있던 곳입니다. 임금이 남경으로 갈 때 묵기도 했던 곳입니다.
좀 더 북쪽을 향하면 광탄면 용미리에 용암사(龍岩寺)에 석불(石佛)이 서 있습니다. 차에서 내려 잠시 걷습니다. 조선 후기 이해응이란 사람이 사신을 따라 베이징을 가면서 잠시 이곳에 들러보고 시를 남겼나 봅니다.
물결 같은 흐린 구름 산머리를 지키는데 (曇雲如浪護山頭)
돌부처 분신하여 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石佛分身幷兩肩)
만 겁을 바람에 갈리면서도 그대로 우뚝 서 (萬劫風磨猶卓立)
멀리 태조와 호응하여 위로 하늘을 지르고 있다. (懸應太始上干天)
<계산기정(1803)>
파주(坡州)의 땅이름은 파평(坡平)에서 왔습니다. 파평은 고려의 윤관(尹瓘, ?~1111)을 호족으로 하는 땅입니다. 조선의 세조는 그의 왕비가 윤씨인지라 부인의 고을을 파평에서 파주로 승격시켰습니다. 조선에 와서는 그 힘이 좀 떨어졌습니다.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沈之源, 1593~1662)이 죽자 윤관의 묘 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뒤로 4백년 간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문중 간에 땅 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다행히 2006년에 잘 조정되었답니다.
파주는 큰 도회인 목(牧)이었습니다. 큰 관아가 있었지만 중심지가 문산으로 옮겼고 지금은 금촌으로 옮겨졌습니다. 옛 관아는 현재 파주초등학교와 주변 군부대까지였으나 지금 파주초등학교에 그 터의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파주초등학교에서 문산(汶山)을 거쳐 임진나루로 갑니다. 임진강이 굽이치는 풍광 좋은 곳에 화석정(花石亭)이 있습니다. 화석정이 있는 곳이 파주시 문산읍 율곡리(栗谷里)입니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홈그라운드입니다.
아이들에게 우스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자기 노력 없이 경제적으로 편하게 사는 방법으로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첫째, 부자 부모를 만난다. 둘째, 부잣집 무남독녀 외동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셋째, 로또에 당첨된다. 답은 셋째입니다. 그만큼 확률이 희박하다는 얘기지요.
율곡은 첫째, 둘째 모두에 해당합니다.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파주는 덕수(德水)이씨의 세거지였습니다. 무남독녀의 아내와 살면 힘든 면도 있습니다. 신씨는 툭하면 친정인 강릉으로 가 버렸습니다. 조선시대에 시집오면 친정은 거의 발걸음을 못하는 법인데 신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양에서 관리를 하던 율곡의 아버지는 원주에 오는 길에 강릉에 사람을 보내 중간 지점인 평창에서 만나 율곡을 잉태했습니다. 사임당 신씨는 친정에서 율곡을 낳았고, 율곡은 어린 시절을 강릉에서 보냅니다. 이이는 1573년에서 1580년까지 율곡리에서 보내고 한양에서 죽었지만 선영이 있는 파주 동문리에 묻힙니다. 그리고 그의 묘가 있는 곳에 자운서원(紫雲書院)이 세워집니다. 물론 사임당 신씨의 묘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오만 원권 화폐의 인물로 여성으로 하기로 했고 그 대상을 사임당 신씨로 하기로 하자 여성단체가 먼저 반발했습니다.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의 권력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율곡은 붕당의 과정에서 결국 서인의 편에 서게 됩니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일당 독재가 이어집니다. 그 기호학파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장기집권을 하면서 학문적 권위자 율곡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여성이자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신화는 만들어졌습니다.
화석정은 려말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야은 길재(冶隱 吉再, 1353~1419)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율곡의 5대조 할아버지가 세종 25년(1443) 정자를 세웠고 나중에 화석정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십만의 군대를 양성하자던 율곡은 임진란 전에 죽었습니다. 임진란이 일어난 1592년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온 길로 왔겠죠? 4월 29일 밤 임진나루에 도착했습니다. 그믐날 밤이라 매우 캄캄했습니다. 한시 바삐 도망은 가야겠고 임진강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백사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으로 임진강을 건넜다 합니다. 또 전설이 만들어집니다. 율곡은 임금이 북으로 피난 갈 걸 알고 정자의 나무에 기름을 많이 먹여놓아 오랫동안 탈 수 있게 해 놓았다나…….
터만 남은 화석정을 철종 14년(1673)에 다시 세우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 불타 없어집니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화석정을 다시 세웁니다. 현판은 박정희가 씁니다. 씁쓸…
분단 상황이 더 이상 북으로 가는 우리 발길을 막습니다. 장어나 먹으러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