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재(樂善齋) 권역(圈域)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
그리고 상량정(上凉亭), 한정당(閒靜堂), 숙종 때 지은 취운정(翠雲亭)을 총칭하여 낙선재(樂善齋)라 부르고 있다
장락문은 낙선재의 정문이다
장락문(長樂門)은 낙선재(樂善齋)의 정문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라 한다.
낙선재(樂善齋)의 남행각(南行閣)은 12칸으로 되어 있다
낙선재(樂善齋) 남행각(南行閣)은 12칸으로 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와 낙선재(樂善齋) 상량문(上樑文)에는 1847년 헌종(제24대 왕) 13년에 낙선당 옛터에 낙선재(樂善齋)
건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이 서재겸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다.
낙선재(樂善齋)의 의미는 선한일을 즐겨한다는 뜻이다
낙선재(樂善齋)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은 낙선재(樂善齋)를 집무실로 사용하였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영친왕 비였던 이방자 여사가 낙선재에서 기거하였다.
낙선재(樂善齋)
1926년 4월 25일 조선 제27대 순종 임금이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승하하자, 순종의 계후(繼后)이자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비(尹妃,1894~1966년)가 이 곳에서 생활하다 1966년 2월 3일 73세까지 낙선재(樂善齋)에서 별세하였다.
1910년에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될 때, 흥복헌에서 어전회의 진행을 병풍 뒤에 숨어 엿듣고 있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대신들이 한일합방조약에 옥새를 찍으라고 순종황제에게 강요하자,
병풍 뒤에서 회의를 엿듣던 순정효황후가 옥새(국새)를 가져다가 치맛자락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다.
친일파 대신들도 차마 황후의 치마를 들출 수는 없는지라 주저했는데
윤택영의 형이자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덕영에게 결국 옥새를 뺏앗겼다.
그후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자 순정효황후도 이왕비(李王妃)로 격하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순종과 함께 창덕
대조전에서 지내다가 1926년 4월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도 잃고 남편도 잃었으니 단청 입힌 집에 머무를 수 없다"는
고집과 함께 임금이 거주하는 대조전에서 순종의 뒤를 이을 영친왕 부부가 머물렀던 낙선재 석복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방자 여사의 자전적 수기<세월이여 왕조여>에 33살 나이에 과부가 된 순정효황후(윤씨)를 같은 여자로서
동정하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윤씨의 삶이 너무 슬프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선재(樂善齋) 뒷뜰에 꾸며진 괴석(怪石)과 화계(花階)
낙선재 뒷뜰에 꾸며진 화계의 모습
낙선재와 석복헌 뒷뜰에서 낙선재 마당과 석복헌 마당으로 갈 수 있는 통로 입니다
석복헌(錫福軒)은 낙선재(樂善齋)를 건립한 이듬해인 1848년 8월 11일 헌종 14년에 후궁인 순화궁(順和宮)
"경빈 김씨"의 처소로 건립하였다.
석복(錫福)’은 ‘복을 내려 준다’는 의미이며,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라는 염원을 담은 뜻이다.
헌종(조선 제24대 왕)은 1834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올랐다.
재위 3년에 효현왕후를 맞았으나 그녀는 후사없이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1843년 계비의 간택이 있었다. 헌종은 관례를 깨고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
이때 헌종이 마음에 둔 "경빈 김씨"가 간택되기를 바랐는데, 효정왕후가 새 왕후 계비로 결정되었다.
1847년 헌종이 나이가 많은데도 효정왕후 홍씨가 3년 동안 후사의 기미가 없자
헌종은 이를 핑계 삼아 1847년(헌종 13) 10월에 경빈 김씨(慶嬪 金氏)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헌종은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서재겸 휴식공간으로 사용하였으며
후궁으로 맞이한 경빈 김씨(慶嬪 金氏)를 위해 1848년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처소로 쓰게 하였다.
조선 제24대왕 헌종은 1827년에 태어나 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 1849년에 승하하였다.
(재위 기간 : 1834년 ~ 1849년)
※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 洪氏) 1831년 3월 6일(양력) ~ 1904년 1월 2일
경운궁(현, 덕수궁) 수인당에서 73세의 나이로 훙서하였다.
석복헌(錫福軒)과 서행랑(西行廊)
석복헌(錫福軒)과 동행랑(東行廊)
1849년(헌종 15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하자, 경빈 김씨는
순원왕후 김씨(순조 비)와 신정왕후(익종(효명세자)의 비)에게 정성을 다하여 받들었으며
효정왕후(헌종의 계비)에게도 예를 다하면서 검소하게 생활을 하다. 1907년(광무 11년) 6월 1일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1789년 6월 8일 ~ 1857년 9월 21일)는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정비(正妃)이자
문조(효명세자, 文祖)의 어머니이며 헌종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安東 金氏)이다.
※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조대비)는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의 4대를 지내면서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궁중의
최고 어른이된 대왕대비(조대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자신과 익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고종)시킨다.
수강재(壽康齋)
수강재(壽康齋)의 수강(壽康)은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의미이다.
"서경" 홍범편에서 말하는 오복(五福)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에서 따온 말로, 장수와 강녕을 기원한 말이다.
오복(五福)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서경" '홍범편'이다. 그 뒤 여러 경전에 인간 오복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
오복은 : 첫째가 수(壽),
인간의 소망이 무엇보다도 장수를 원하기 때문이다.
둘째가 부(富)로,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인 것이며,
셋째가 강녕(康寧)으로,
일생 동안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넷째가 유호덕(攸好德)으로, 덕을 좋아한다는 뜻은 오래 살고 풍족하고 몸마저 건강하기를 바라며,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보람있는 봉사를 해보자는 것이 미덕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고종명(考終命)은 죽음을 깨끗이 하자는 소망으로, 모든 사회적인 소망을 달성하고
남을 위하여 봉사한 뒤에는 객지가 아닌 자기집에서 편안히 일생을 마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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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재에는 마지막 황실 가족인 덕혜옹주(1912~1989)가 머물렀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얻은 아주 귀한 외동 딸이었다.
고종(高宗)과 복녕당(福寧堂) 양씨(梁氏) 사이의 딸 덕혜옹주는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일신국민학교) 5학년이던
1925년 열네 살의 나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동경 학습원(學習院)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인 조발성(早發性) 치매증으로 고생하였다.
1931년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다케시[宗武志] 백작과 강제 결혼하여 3년만에 딸(宗正惠)을 얻었으나 지병인
정신분열증이 계속되었다. 1951년 이혼을 당한 이후 결혼에 실패한 딸마저 실종되자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朴正熙)가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기착한 기회에 영친왕(英親王)의 부인인
이방자(李方子)가 면담하여,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직후부터 5년간 서울대학교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후 창경궁(昌慶宮) 낙선재(樂善齋)와 연결되어 있던 수강재(壽康齋)에서 생활하였다. 계속된 치료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다가 1989년 4월 21일 상오 11시 40분에 별세하였다.
그 해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소재한 홍유릉(洪裕陵)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이듬해에 이방자(李方子:1901~1989) 여사도 귀국해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
이은(李垠)의 부인으로 마지막 황태자비였다.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는 각각 낙선재와 수강재에 머물면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77살의 나이로 낙선재에서 숨을 거둘때까지 28년 동안 거처했던 곳이다.
함께 생활하던 덕혜옹주가 떠나서일까? 열흘 사이로 4월 30일에 이방자 여사도 눈을 감았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많은 고생을 한 덕혜옹주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썼다는 낙서 한 장은 낙선재에 대한 생활과 조선황실의그리움이 그려저 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은 대한 제국 초대 황제(1852~1919, 재위 1863~1907)이며,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이다.
가장 혼란한 시기에 왕위에 올라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정치 싸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운동, 을사조약 등 큰 사건에
시달렸다. 1897년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고쳤고 황제가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로 개원(開元)하였다. 1910년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퇴위하였다.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2016년 8월 5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서관 기획전시관>에서 <신안 해저유물 전시회>를 관람(성인 5,000원)하고,
해 질 무렵 전철2호선 강변역 옆의 <강변테크노 CGV영화관>에서 <덕혜옹주>란 영화를 관람하였지요. 그리고
경춘선 금곡역에서 내려 덕혜옹주 무덤을 찾아가는 그날이
2016년 8월이였는데 그 해 여름은 푹푹찌는 폭염과 열대야 일수가 20일째 이어젔답니다.
헌종의 할머니이자 선대왕 순조(제23대 왕)의 비 순원왕후 처소로 조성한 수강재(壽康齋)는
고종황제의 막내딸 덕혜옹주가 1962년부터 ~ 1989년까지 28년간 머물렀던 수강재(壽康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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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화루(承華樓) ㅡ 상량정(上凉亭) ㅡ 낙선재(樂善齋)
<동궐도>와 <궁궐지>에서는 삼삼와와 연결된 2층 누각으로된 건물 1층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이라 부르는
방으로 문과 벽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에 다 뜯기고 현재는 외부와 트인 공간으로 변했으며 2층은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소주합루(小宙合樓)라 하였는데
헌종 때 낙선재를 지으면서 승화루(承華樓)로 고쳐 서재로 사용하며 많은 서책을 보관하였다.
헌종은 장서를 목록 별로 정리하여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이라 하였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를 잇는다’는 뜻으로
고금의 많은 책과 글, 그림을 널리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이다.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을 보면, 보관하던 책이 무려 3,742책이며 서화(글, 그림)가 총 665점에 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헌종은 승화루 옆에 낙선재를 건립하고 훙서하기 전까지 낙선재를 주요 활동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는 본 기능을 잃고,
일제가 순종과 왕실의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설치한 창덕궁 경찰서의 건물로 쓰이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를 잇는다"는 의미이다.
고금의 서적과 서화를 널리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 받든다는 의미다.
상량정(上凉亭)은 낙선재 화계 뒤편의 육각 정자이다.
<궁궐지>와 <동궐도형>에 “육모정 평원루(六隅亭 平遠樓)”라고 하여, 본래 이름이 평원루(平遠樓) 였음을 알 수 있다.
순종 이후에 이름을 바꾼 듯하며, 서쪽 담장에는 원형의 만월문(滿月門)이 있다.
상량(上凉=서늘한 량)이란 <시원한 곳에 오른다>는 뜻이다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翁樹崑, 1786~1815년)이 쓴 평원루(平遠樓) 현판이 문화재관리국에 소장되어 있으며
옹수곤은 추사 김정희와 가깝게 교유하였으나 요절했다.
한정당(閒靜堂)은 낙선재 구역에 있는 건물로 석복헌 뒤편에 있다.
한정(閒靜)의 뜻은 <한가롭고(閒) 고요하다(靜)>는 의미이다
순종 재위기에 그려진 《동궐도형》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일제강점기인 1917년 이후에 건립한 듯 하다.
한정당(閒靜堂) 내부 구조
한정당 온돌방 내부의 기둥마다 시를 적은 주련을 걸어두었고, 온돌방 내부의 창문에도 시를 써두었다.
㉠ 奇石盡含千古秀(기석진함천고수) = 기괴한 돌은 온통 천고의 빼어남을 머금었고
㉡ 異花長占四時春(이화장점사시춘) = 기이한 꽃은 길이 사계절의 봄을 차지하네.
수천 년 묵은 기괴한 모습의 수석과~
기이한 꽃이 사시장철 번갈아 피어나는 풍경이로다~
라고 표현하였다.
㉢ 映日花開百和香(영일화개백화향) = 해를 받아 꽃이 피니 온갖 향기 풍기도다.
㉣ 凌雲樹有千尋勢(능운수유천심세) = 구름까지 솟은 나무는 천 길의 형세가 있다
햇살 아래 고운 꽃이 향기롭게 피어 한적하고~
하늘에 닿도록 천 길 높이의 나무가 솟아 있다~
라고 풍경을 표현하였다
㉤ 百尺樓臺瞻紫氣(백척누대첨자기) = 백 척 누대는 자색의 기운 우러르고
㉥ 三春花鳥醉東風(삼춘화조취동풍) = 삼춘의 꽃과 새는 동풍에 취하도다.
지상의 높은 누대, 즉 누각은 천상의 하늘을 바라보고~
봄 내내 꽃과 새가 어울린 나른한 봄날의 동풍에 취하도다~
※ 삼춘(三春)은 봄의 석달을 뜻하며 맹춘(孟春), 중춘(仲春),계춘(季春)으로 나뉜다
㉦ 彩毫閒試金壺墨(채호한시금호묵) = 채색 붓으로 한가로이 금병 속의 먹을 시험하고
㉧ 靑案時看玉字書(청안시간옥자서) = 청옥(靑玉) 책상에서 때때로 주옥같은 글을 읽네.
좋은 붓에 귀한 먹을 묻혀 글씨를 쓰고~
청옥으로 만든 귀한 책상에서 훌륭한 글을 읽는다.
석복헌(錫福軒)의 뒷뜰인 화계와 한정당(閒靜堂)
취운정(翠雲亭)은 수강재 북측 화계 위에 있는 정자로, 1686년(숙종 12년)에 지어졌다.
숙종이 유독 이곳을 좋아하여 취운정을 소재로 한 시를 여러 편 지었다.
㉠ 취운정제영시(翠雲亭題詠詩)
㉡ 취운정육영시(翠雲亭六詠詩)
㉢ 9일에 취운정에 올라(九日登翠雲亭) 등
숙종(조선 제19대 왕)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정비는 인경왕후, 계비는 인현왕후, 제2계비는인원왕후이다.
(재위 기간 : 1674년 8월부터 1720년 7월까지)
45년 10개월을 재위하여 조선 역대 임금들 중 영조(51년 7개월) 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며,
(영조(81세), 태조(72세), 고종(67세), 광해군(67세), 정종(62세)에 이어 여섯 번째로 장수한 왕이다.
동월도를 보면 서쪽과 남쪽에 나무 판장을 두었으며,
서쪽 판장 옆에는 취병을 두고, 취병 가운데에 아치 문을 설치한 모습이 나온다. 지금은 다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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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정각 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문인 영현문
영현문을 들어서면~
성정각 동쪽에 붙어 있는 누각 보춘정
성적각(昌德宮誠正閣)에는 내의원(內醫院)인 보호성궁(保護聖躬)과 조화어약(調和御藥) 있습니다
내의원(內醫院)에 걸었던 조화어약(調和御藥) 편액은 창덕궁 <궁궐지>에 따르면 내의원의 현판 글씨는 영조가 썼다고 합니다
글씨를 보면 어(御)가 약간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문장에서 국왕을 의미하는 글자를 적을 때는 줄을 바꾸어 약간 위로 쓰는 것이 원칙으로
대두(擡頭)라고도 하고 개행(改行)이라고도 합니다.
이 현판에서도 ‘어(御)’는 국왕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대두시킨것 입니다.
조화어약(調和御藥)은 임금(御)께서 드시는 약(藥)을 만든다(調劑)는 뜻이라 합니다
창덕궁 궁궐지에 따르면 내의원 보호성궁(保護聖躬)의 현판 글씨를 영조가 썼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호성궁(保護聖躬)의 글씨를 보면 성궁(聖躬)이 약간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문장에서 국왕을 의미하는 글자를 적을 때는 줄을 바꾸어 약간 위로 쓰는 것이 원칙이기에
대두(擡頭)라고도 하고 개행(改行)이라고도 합니다.
이 현판에서도 ‘성궁(聖躬)’은 국왕을 의미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대두시킨 것입니다.
보호성궁(保護聖躬)은 성궁(聖躬 : 임금의 몸)을 보호(保護)한다는 뜻입니다
창덕궁 성정각(昌德宮誠正閣)은 조선시대에 동궁이라고 불리던 왕세자가 경서(經書)를 공부하던 건물로
왕세자가 하루에 3번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의 서연(書筵, 冑筵)을 받았던 곳이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05년(숙종 31)에
왕세자가 이곳에 있다가 뜰에 내려와 비답(批答)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전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정(誠正)이라는 이름은 <대학>에서 유래하였으며 성의(誠意), 정심(正心)에서 앞 글자를 따서 붙였다.
즉 <성심성의껏(誠) 바른(正)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다.
1782년(정조 6)에 동궁전인 중희당(重熙堂)이 건립되면서, 이 건물은
초계문신의 시험을 치르거나 대신을 만나는 곳으로 활용되어 희정당(熙政堂)과 함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왕세자의 공간이었지만, 1917년 창덕궁 내정 화재 때는 잠시 순종황제 내외가 머물기도 했다
1895년(고종 32)에 내의원(內醫院)을 전의사(典醫司)로 개편한 뒤,
궐내각사 구역에 있던 내의원의 현판, 의약 도구 등을 옮겨와 내의원 물품 창고로 사용하였다.
성정각은 세자의 독석처였으며, 임금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때는 내의원으로도 사용되기도 했었다.
동편에는 희우루라는 2층 누각이 있으며 1층은 현재 개방되어 있다.
(궁궐의 약방으로 사용하던 보춘정)
성정각(誠正閣) 동쪽 누각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남쪽엔 보춘정(報春亭)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희우(喜雨) 뜻은 비(雨)가 내려 기쁘다(喜)이다. 1777년(정조 1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성정각 누각을
고처 지을 때와, 완성 후 임금이 처음 행차할 때 비가 내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희우(喜雨)’로 지었다고 한다
동궐도(東闕圖)에는 희우루 아래층에 벽을 설치한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는 상태이다.
관물헌(觀物軒), 경우궁(景祐宮)터, 제생원(濟生院)터, 승문원(承文院)터, 계동궁(桂洞宮)터,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 관물헌(觀物軒) :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 개화당(開化黨)이 갑신정변 때
청국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독립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으로
고종(조선 26대 왕)을 모시고 작전 본부로 삼았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12월 4일(양력) ~ 1884년 12월 6일(양력) :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은 민씨정권의 친청수
구정책으로 인해 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개화파는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변을 계획했다.
개화파는 일본의 후원을 업고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군사권, 재정권을
장악한 후 정강을 발표했다. 그러나 민 씨 등의 수구당(守舊黨)과 청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하자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 경우궁(景祐宮=종로구 율곡로 75. 현대건설 빌딩 주차장)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이다.
1823년 수빈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에 옛 용호영 자리에 사당을 짓고 궁호를 <경우궁>이라 하고,
다음 해 2월 신주를 봉안했다.
수빈 박씨는 살아서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본 유일한 후궁이다.
갑신정변 때 고종이 이곳으로 피신했는데, 왕을 알현하러 오던 조정 중신들이 이곳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이 경우궁(景祐宮)은 1908년에 육상궁(종로구 궁내동 1-1 청와대 내)으로 옮겨졌다.
정조는 왕비1명과 후궁4명을 두었는데, 효의왕후는 정조가 세손 시절인 1762년 혼인하여 후에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정조는 여러 명의 후궁을 들였다.
1778년 홍국영의 누이동생을 원빈에 봉하여 후궁으로 들였으나 다음 해에 죽고, 1780년 다시 화빈 윤씨를 들였으나 다음 해에
산실청을 설치한 기록만있으니, 아이를 낳았으나 일찍 죽은 것으로 보인다.
1782년 마침내 궁녀 성씨에게서 왕자를 얻으니 곧 문효세자다. 30세가 넘어 첫 번째 아들이 탄생했고, 성씨는 의빈에 봉해졌다
그러나 2년 후 의빈 성씨는 딸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
문효세자도 5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후사가 끊긴 왕실은 또다시 후궁을 간택했고 이때 들어온 이가 수빈 박씨다.
1787년에 빈호를 '수빈'으로 받아 가례를 치렀다.
정조의 후궁 4명 중 3명은 간택을 받은 정식 후궁이고 의빈 성씨만 승은을 입은 후궁이다.
수빈 박씨는 입궐 3년 후인 1790년 왕자를 낳았으니 훗날의 순조다.
수빈 박씨가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순조를 낳던 날,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날 새벽에 금림(禁林)에는 붉은 광채가 땅에 내리비쳤고, 해가 한낮이 되자 무지개가 태묘(太廟)의 우물 속에서 일어나
오색 광채를 이루었다. 백성은 앞을 다투어 구경하면서 이는 복되고 길한 일이라 했고 모두 기뻐했다>
◈ 제생원(濟生院) : 1397년에 세워진 빈민 치료 및 미아 보호소, 의녀(醫女) 양성기관이다.
◈ 승문원(承文院) : 조선시대에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관청의 터, 조선 건국 초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로 설치되었다가
1410(태종 10)년에 승문원으로 개편되었다. 처음에는 이곳 양덕방(陽德坊)에 있었으나 1443년(세종 25년) 이후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으로 옮겨 다니다가 1787년(정조11년)에 이르러 다시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두었다가 1895년(고종 32)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 계동궁(桂洞宮)터 : 흥선대원군(大院君)의 조카이자, 조선 고종(高宗)의 사촌형인 이재원(李載元, 1831~1891)이 살던 집터이다.
1884년(고종 21) 12월,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강요로 창덕궁(昌德宮)에서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그곳에서 근신(近臣)들이 개화당(開化黨)에 의해 참살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고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경우궁보다 협소한 계동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고종은 그 후 곧 환궁하였지만 창덕궁에서도 가장 협소한 관물헌(觀物軒)에 머물렀다.
◈ 관상감(觀象監) : 조선 시대, 천문, 지리학, 측후, 역수(曆數), 기후 관측, 각루(刻漏) 등의 사무를 맡아보는 관청.
◈ 관상감 관천대(觀象監 觀天臺, 보물 제1740호) : 세종 16년인 1434년에 하늘을 관측하는 시설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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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개화당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홍영식(洪英植)이 총판으로 있던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킵니다.
개화당은 국왕과 왕후를 창덕궁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고 군사 지휘권을 가진 수구파 거물
한규직(韓圭稷), 윤태준, 이조연(李祖淵) 등과 민씨 수구파 거물인 민태호(閔台鎬), 민영목(閔泳穆)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여 처단하였다. 그리고 개화당의 배신자인 환관 유재현(柳在賢)도 처단하였다.
개화당의 신 정부는 12월 5일 새로운 개혁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개화당은 동시에 국왕의 이름으로
미국공사·영국총영사·독일영사 등 각국 외교관들을 초치하여 신 정부의 수립과 개혁정치의 실시를 알렸다.
개화당의 정변에 놀란 청군 측은 12월 5일 개화당의 지지자로 위장한 심상훈(沈相薰)을 경우궁으로 들여보내
왕후 민씨(이후 명성황후로 추존)와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 그들의 계획을 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청군의
계획을 알게 된 왕후는 경우궁이 좁아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창덕궁으로 환궁을 적극 주장하자 국왕도 이를 지지하였다
김옥균은 창덕궁은 너무 넓어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 방어에 극히 불리한 점을 들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지만, 고종의
명에 거역할 수 없어 경우궁 옆의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桂洞宮)으로 국왕과 왕후의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경우궁보다
넓었으나, 개화당의 소수 병력으로도 창덕궁보다는 방어가 유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왕후는 계속해서 창덕궁 환궁을 요구하였고 국왕은 또한 왕후를 적극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은 끝까지 방어에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본군 병력이면 청군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12월 5일 오후 5시 국왕과 왕후의 거처는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겨졌다.
개화당의 국왕에 대한 호위는 경우궁에서와 마찬가지로 국왕을 중심에 넣고,
① 내위(內衛)는 개화당의 장사들(충의계 맹원들과 사관생도 약 50명)
② 중위(中衛)는 일본군(약 150명)
③ 외위(外衛)는 조선군 친군영 전후영병(약 1,000명)으로 하여금 3중으로 방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창덕궁이 너무 넓어 개화당은 극히 불리한 입지적 조건에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의 혁신 정강은 12월 5일 저녁부터 12월 6일 새벽까지 식사도 거른 채 밤을 새워 협의되어, 6일 오전 9시경에 국왕의
전교 형식(傳敎形式)으로 공포되고 서울 시내의 요소에 게시되었다.
또한, 이날 오후 3시 고종이 개혁 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서 공포한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였다.
김옥균의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의 14개 조항이다.
현대건설 사옥 자리는 조선 초기에는 제생원(濟生院)과 승문원(承文院),관상감(서운관)이, 조선 후기에는 경우궁·계동궁이,
근대에는 휘문고가 있던 곳이다. 현대건설 건물 정면 입구쪽에 <현대> 표지석이 있다. 그 앞 도로변에 <계동궁 터>
표석이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사당인 경우궁, 계동궁에 잠시 머물기도 했던 곳이다.
경우궁과 제생원(濟生院) 자리엔, 휘문고등학교가 세워졌다가 지금은 현대건설 빌딩이 자리잡고 있다.
<현대건설 사옥>이 들어선 이 터에는 조선 초에 서운관이 있었는데, 세종 때 서운관이 관상감으로 명칭 변경되다
관천대의 별칭은 첨성대이다. 창경궁 궐사내전에 있는 관천대는 보물 제851호로 1688년에 세워졌다.
창경궁 궐내각사에 있는 관천대는 2.2m, 관상감 관천대는 3.4m, 경주 첨성대는 9.4m다.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75(현, 현대건설 빌딩 주차장)의 경우궁터 표지석
1884년 10월 17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고종과 왕비, 후궁들은 경우궁으로 피신한다.
다음 날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경우궁 대청에서 현직 관료인 수구파들을 죽인다.
그리고 고종(제26대 왕)은 근처에 있는 이재원의 집 계동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창덕궁 관물헌으로 돌아갔다.
갑신정변이 끝난 다음 해에 고종은 경우궁을 육상궁 근처 인왕동으로 옮길 것을 명한다.
"경우궁이 얼마나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곳인가? 그런데 한번 역적 무리들이 침범해서 더럽힌 뒤부터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서
어느 하루도 마음속에서 잠시나마 잊은 적이 없었다.
사당을 옮겨 짓는 문제는 체모(體貌)로 볼 때 아주 신중히 해야 할 문제일 뿐 아니라 또한 일을 크게 벌이는 것에 관계되기
때문에 오늘에야 비로소 그대들과 함께 토의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음 해에 경우궁을 인왕동 자수궁 터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청와대(종로구 궁정동 1-1 칠궁)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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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毓祥宮)을 칠궁(七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육상궁을 비롯한 5채의 사당에 조선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908년에는 연호궁(延祜宮),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고,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정각의 보춘정과 관물헌
고종실록 21년 10월 17일(음력) 기록은
<민영익이 우정국 낙성식에서 피습되고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에게 원조를 청하다>라고 적고 있다.
1884년 4월 22일 왕명으로 신식우편제도인 우정총국의 개설되고 업무개시 8일 후 치러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담장
밖 불길을 신호로 시작된 갑신정변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금호문을 통과해 침전에 이르러
고종 임금에게 급히 변고에 대하여 아뢰고 시급히 옮기어 변고를 피하도록 말씀드렸다.
고종이 황급히 요금문을 통해 지금의 현대 계동 사옥 뒤편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급히 옮겼다.
10월18일에는 종친 이재원의 집 계동궁으로 이어(移御)했다가 청나라와 내통이 된 명성황후가 경우궁이 비좁고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5시경 관물헌으로 들어갔다.
개화당이 창덕궁 중에서도 가장 협소한 관물헌을 이용해 소수의 병력으로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군(淸軍) 공격을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임금을 모시고 창덕궁을 작전본부로 삼았다.
이날 저녁 김옥균 주도하에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안방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제정하고 공포한 후
서울 시내 곳곳에 게시했다. 다음날인 10월 19일 오후 4시경에 1,500여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창경궁 쪽 선인문으로
밀고 들어왔다. 관물헌의 개화당 및 일본군 200여명의 연합군사는 전투를 치렀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오후 6시경에 고종은 후원 연경당으로 다시
옥류천 뒤 북쪽 궁장문인 건무문을 거쳐 군인들의 호위를 받아 성균관이 있는 관우의 사당인 북묘(北廟)로 향했다.
1차, 2차 방어선은 쉽게 허물어졌다. 개화당의 50명의 병사와 몇 안되는 사관생도로 구성된 내위뿐이었다.
싸울 의지를 잃은 일본군과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모두 함께 건무문 쪽으로 해서 궁을
떠났으나 홍영식등 생도 7인만이 뒤따라 북묘의 그 자리에 남아있던 홍영식과 박영교 등 생도 7인이 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김옥균, 서재필등 몇몇은 겨우 몸을 빼내 도주하면서 급진개혁파들이 시도했던 근대국가 건립의 희망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는 관물헌은 1884년 개혁과 정변의 소용돌이 역사의 현장인 갑신정변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창덕궁의 금호문과 요금문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금호문을 통과해 침전에 이르러
고종 임금에게 급히 변고에 대하여 아뢰고 시급히 옮기어 변고를 피하도록 말씀드렸다.
고종이 황급히 창덕궁 요금문을 통해 지금의 현대 계동 사옥 뒤편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급히 옮겼다.
현대 계동 사옥 뒤편 현대 임직원 주차장 입구에 위치한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 터
종로구 계동 140-2 경우궁 옛 터
10월 17일, 18일, 19일은 음력 입니다
순종은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차남으로 1874년 3월 25일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을 포함하여 4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조졸하고 성인이 된 자녀는 순종이 유일하다
9세 때인 1882년에 민태호(閔台鎬)의 딸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를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1926년 4월 25일(52세)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심장마비로 승하하였다.
순종의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나, 3,1 운동 만큼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중희당(터)는 위치는 성정각의 동쪽, 지금의 창덕궁 후원으로 입장하는 곳과 창경궁으로 가는 함양문 앞의 넓은 터이다.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의 정당(正堂=여러 채로 된 살림집에서, 주가 되는 본채)이었다.
중희당(重熙堂)은
창덕궁 성정각(昌德宮 誠正閣) 동쪽에 있던 건물이며, 1782(정조 6)년 지어졌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중희당 터는 성정각을 서쪽에 두고 후원으로 가는 넓은 길이 되어 있다.
◈ 칠분서(七分序)는 중희당과 후술할 부속 건물인 삼삼와를 연결하는 복도이며, 내부는 전부 마루이다
중희당에서 칠분서로 들어와 동쪽으로 두 칸을 가면 길이 남쪽으로 꺾인다. 거기서 4칸을 더 가면 삼삼와가 나온다.
◈ 삼삼와(三三窩)는 중희당에서 칠분서를 통해 연결된 6각형 건물이다.
와(窩)는 직역하면 움집, 굴이란 뜻이라 한다. 일상에서는 주로 별장이나 정자 등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용도도 서재나 서고, 또는 휴식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내부는 한 칸으로, 바닥은 마루이다.
<동궐도>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동궐도>에선 석조 기단이 창이 날 정도로 높아 사실상 1층 공간이 있었지만 현재는 단순한 기단으로 낮아진 상태다.
◈ 승화루(承華樓)는 삼삼와와 연결된 2층 누각이다.
1층은 세자가 읽을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의신각(儀宸閣)
2층은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소주합루(小宙合樓)라고 불렀는데, 주합루가 왕실의 도서관이었던 점에서 소주합루도
도서실의 기능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헌종(조선 제24대 왕) 때 낙선재를 지으면서 승화루로 바뀌었다.
승화(承華)는 정화(精華)를 잇는다’는 뜻으로, 많은 책과 글, 그림을 수집하여 그 빼어난 정화를 이어받는다는 의미이다
중희당은 1782년 (조선 재22대 왕 정조 6년) 정조의 장자인 이순(문효세자)이 태어나자 세자를 위해 지은 집이다
당시로서는 31살에 얻은 굉장히 귀한 아들이었다.
정조는 후궁 소생임에도 이순을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봉하고, 장차 사용할 동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창덕궁과 창경궁의 동궁은 영조(조선 제21대 왕) 말년과 정조 재위 초반을
거쳐 전부 불타고재건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새롭게 지은 것이 바로 중희당이다.
이순은 이 곳에서 세자로 책봉받으니 이가 곧 문효세자이다.
문효세자는 책봉 2년 만인 1786년(정조10년) 불과 5살의 나이로 요절했고 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도 같은 해 이 곳에서 눈을
감았다. 중희당이 동궁의 기능을 잃자 정조는 여기서 신하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펼치는 등 다양하게 편전으로 활용하였다.
순조 때는 여기서 부마(공주/옹주의 남편이자 임금의 사위)의 삼간택을 행하기도 했다.
1827년(조선 제23대 왕 순조 27년)에 당시 세자였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중희당이 정당으로 사용하였다.
효명세자는 이 곳에서 조회를 열고 정사를 보는 등 중희당을 자신의 정치공간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1849년(조선 제24대 왕 헌종 15년)에는 헌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세자가 없던 철종(조선 제25대 왕 )시절엔 쓰지 않았다.
고종은 이 곳에서 관례를 올린 뒤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명성황후의 간택과 왕세자(훗날의 순종(조선 제 27대 왕, 대한제국기 제2대(재위:1907∼1910) 황제)의 관례도
여기서 행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궁중행사들을 열었으며, 창덕궁에서 외국의 외교관들을 접견할 때에도 이 곳을 활용했다.
1891년(고종 28년), 고종이 중희당을 옮겨 지으라는 명을 내렸고,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경복궁으로 이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 지금까지 재건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른다.
세자의 교육을 위해 여러가지 천문기구들이 중희당 마당에 놓여 있던 것을 <동궐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측우기와 해시계, 풍기대, 소간의 등 여러 천문, 기상 관측 기구들을 놓아
백성들의 삶에 중요한 날씨를 살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동궐도의 중희당>
정조는 즉위 직후 개혁의 공간으로 규장각을 건립하면서 규장각의 2층에는 수많은 책과 선왕의 어진을 보관하는
주합루(宙合樓)였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세자의 공간으로 중희당을 건립하며,
바로 연접하는 곳에 주합루를 모방한 소주합루(小宙合樓: 헌종대 승화루로 개칭)를 세워주었다.
헌종은 정조를 이어받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 낙선재를 바로 이 소주합루에 기대어 그 옆쪽에 건립하였다.
영조(21대 왕) ㅡ 정조(22대 왕) ㅡ 순조(23대 왕) ㅡ 헌종(24대 왕) ㅡ 철종(25대 왕)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동궐도〉와 현재의 창덕궁 선정전 주변을 비교해보면 마당이 원래보다 동서쪽이 좁아진 상태이고, 선정문도 현재보다 더욱
앞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선정전의 회랑과 인정전의 회랑에 석축을 높이 쌓고 통로를
만든 뒤 복도 건물을 세워 연결시키면서 이전 제도와 다르게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85년 보물 제814호로 지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