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자료는 캐나다 개혁교회의 부모들에 의해 설립된 크레도 기독교 초등학교 Credo Christianl Elementary School-CCES https://www.credochs.com/cces/ 의 교과 과정을 번역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CCES 교장 선생님의 허락 하에 CCES 에서 우편으로 직접 전달 받은 문서를 번역한 것이며, 오래 전에 번역한 것이어서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고, 문서의 일부는 내용의 중복 등의 이유로 인해 번역이 빠진 부분도 있습니다 -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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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5:14-30)
차례표
1 사명의 천명
2 입장의 천명
2.1 언약과 가정
2.2 신앙
2.3 헌신
2.4 절대성
2.5 학습자 중심 ( Learner - Focus)
2.6 격려와 촉진 ( Enabling and Facilitating)
2.7 능동적인 배움
2.8 지속적인 배움
2.9 통합
2.10 특별한 필요를 가진 학생들
2.11 평가와 검사
2.12 보고
3 배움과 가르침을 결정하는 원칙들
3.1 배움과 배우는 자
3.2 가르침과 가르치는 자
3.3 배움의 환경
3.4 평가와 검사
3.5 보고
4 교육의 목표들
5 초급 과정의 목표들
5.1 지식
5.2 기술
5.3 태도
6 중급 과정의 목표들
6.1 지식
6.2 기술
6.3 태도
7 학과목 분야들에 대한 근거
7.1 초급 수준을 위하여
7.1.1 미술
7.1.1.1 시각 예술
7.1.1.2 음악
7.1.1.3 연극
7.1.2 인문학
7.1.2.1 성경 탐구
7.1.2.2 언어학
7.1.3 실용 예술
체육 교육
7.1.4 과학
수학
7.1.5 사회 과학
7.2 중급 수준을 위하여
7.2.1 미술
7.2.1.1 음악
7.1.1.2 시각 예술
7.1.1.3 연극
7.2.2 인문학
7.2.2.1 언어학
7.2.2.2 프랑스어
7.2.2.3 사회 탐구
7.2.2.3 성경 탐구
7.2.3 실용 예술
체육 교육
7.2.4 과학
7.2.4.1 수학
7.2.4.2 과학
8 학과목 영역들의 일반적인 목적들
8.1 초급 수준을 위하여
8.1.1 미술
8.1.1.1 음악
8.1.1.2 시각 예술
8.1.2 인문학
8.1.2.1 성경 탐구
8.1.2.2 언어학
8.1.3 실용 예술
체육 교육
8.1.4 과학
수학
8.1.5 사회 과학
8.2 중급 수준을 위해
8.2.1 미술
8.2.1.1 음악
8.2.1.2 시각 예술
8.2.2 인문학
8.2.2.1 언어학
8.2.2.2 프랑스어
8.2.2.3 사회 탐구
8.2.2.4 성경 탐구
8.2.2.5 교회사
8.2.3 실용 예술
체육 교육
8.2.4 과학
8.2.4.1 수학
8.2.4.2 과학
9 학년별 목표
9.K 유치부
9.1 1 학년
9.2 2 학년
9.3 3 학년
9.4 4 학년
9.5 5 학년
9.6 6 학년
9.7 7 학년
10 학년에 따른 배움의 기술(記述)들
10.K 유치부
10.1 1 학년
10.2 2 학년
10.3 3 학년
10.4 4 학년
10.5 5 학년
10.6 6 학년
10.7 7 학년
머리말
북아메리카의 개혁교인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identity)과 기업(heritage)에 몰두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과 기업은 북아메리카의 주류를 이루는 기독교인들의 그것과는 별개의 것(distinct)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받는 교육이 매우 강조 되는 곳, 그 곳에서부터 우리는 왔다. 네덜란드의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기를 원했던 기독교 교육을 공인 받기 위해서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싸웠다. 우리는 학교를 자녀들이 그들의 기독교 가정에서처럼 양육되어지고 교육을 받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우리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시작하신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생애의 수고efforts)을 예배(service), 사도정신(discipleship), 청지기정신(stewardship)의 관점에서 본다. 우리의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언약관계를 중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씀을 듣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자녀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모든 것에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 주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보기로하고 교육한다.
1. 사명의 천명 (Mission Statement)
우리들 부모의 기독교 학교(parental Christian School)의 목적은
우리의 자녀들이 그들 개개인의 잠재력을 개발시키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책임 있는 청지기의
삶에 필요한
지혜, 기술 그리고 태도들을 습득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사명은
“책임 있는 청지기”에 대해
서술하는데,
책임 있는 청지기란:
관계적 존재(a relational being) 이다:
- 생애의 권위 있는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자신의 언약의 하나님을 섬기며,
- 자신의 이웃과 모든 피조물의 선(good)을 추구 하며,
-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선물에 대한 적절한 보살핌을 통하여 자신을 위한 선이 무엇인지 추구 한다.
반영적 존재(a reflective being) 이다:
- 모든 피조물이 죄의 저주아래 있음을 인식 하며,
-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주권(the redeeming Lordship) 아래 있음을 인식 하며,
- 생애의 모든 영역에서 기술과 지식을 개발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기꺼이 사용하려고 해야 하며 그리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이 세대의 정신을 알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시험할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광범위한 지식의 기반으로부터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2. 입장 천명 (Position Statements)
우리의 기독교 학교들은 인본주의적인 철학으로부터 그 이상과 실행(vision and practice)이 유래된 광범위한 교육적 환경 속에서 그들(=우리의 기독교 학교들)이 기독교 교육의 이상과 실행을 능동적으로 증진하는 환경 속에 있는 자신의 천분을 깨닫는다. 다음의 입장 천명은 우리 기독교 학교들의 차별성(distinctiveness)을 명확히 한다. 그들(=다음의 입장 천명)은 공립학교를 움직이는 브리티시 콜롬비아 중급 프로그램(B.C Intermediate Program)에 대한 대조(comparison)로서의 역할을 한다. 또한 그들(=다음의 입장 천명)은 교과과정을 위한 공식적인 기초적인 체제를 제공함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하며 학교들의 질을 향상시킬 예정이다.
( B.C =브리티시 콜롬비아 ; Credo 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캐나다의 주-역자주)
언약과 가정: 배움의 기독교적 배경. (Covenant and Family: The Christian context of learning)
태초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약속한 언약을 사람과 세우셨으며 사람들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요구하셨다. 사람은 반역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하였고 사람 스스로 죄의 저주 속에 빠져 들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 속에서 한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그들과 은혜의 언약을 세우셨다. 세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상속자인 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 그들이 구원과 영생의 약속들을 받을 것임을 표시한다. 이 언약 안에서 그들은 “새로운 순종에 대한 의무”를 또한 가지게 되는데, 예를 들어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인하여 그들은 그 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겸손한 순종으로 그 분을 섬기기를 소원한다.
자신들의 세례시의 서약에 대한 응답으로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위한 기독교 교육을 찾는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 안에서 교사들은 부모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을 돕기 위해 위임받은 임무(in loco parentis)를 가진다. 학생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순종하며 존경하듯이 자신들의 교사들에게 순종하며 존경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교사들은 부모를 대신할 수 없으며 또는 부모의 책임을 떠맡으려 해서도 안 된다. 더구나, 교사들이 부모들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이 이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또한 책임을 진다. 교사들은 또한 그들이 (학생들을) 개종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성령님은 세례 때의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신실한 응답으로 학생들을 이끌기 위해 그들(교사들)의 기독교적인 모범과 가르침을 사용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주셔왔다. 우리는 세대를 통하여 언약의 약속들이 전해지기 위한 일차적인 단위로서 가족을 세우셨음을 깨닫는다. 성경에 따라 우리는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교육하는 일차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깨닫는다. 그들은 이 책임을 폐해서는 안 된다. 언약은 우리에게 ‘새로운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학생들의 행동과 훈련을 위한 기준과 표준 속에서 성경적인 예상을 세우고 유지해야만 한다.
신앙적 존재 (Religious Being)
서구 문명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무언가 개인적인 것, 교회 생활 또는 주일에 한정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그런 식으로 삶은 신앙적(종교적)이라고, 그것(신앙, 종교)은 삶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있는 것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서 마치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한 사람을 “아, 그는 신앙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람의 삶 전체가 신앙적이라고 믿는다. 신앙은 삶의 방식이다. 삶의 어떤 방식이든 하나님과 관계되어져 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행한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관계이고; 불순종하여 행한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관계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러한 관계는 필연적이다. 신앙을 가지지 말 것을 주장하는 무신론자조차도 자신의 신념을 ‘무 신앙’으로 표현한다. 그의 신앙, 그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과의 부정적인 관계이다. 하나님에 대한 거부로서 그는 그 자신을 또 하나의 신 내지는 신들로 만들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sensus divinitatis’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 모든 사람은 예배할 소원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람이 스스로 고안해 낸 지적 능력의 부분이 아니다 ;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반응은 “예” 이거나 “아니요” 둘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삶의 활동, life-activities’의 방향을 정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반응이다.
사람의 자아의 중심에는, 다스리는 중심(governing centre)으로부터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마음(heart)이 있다. 사람은 자율적(autonomous)이지 못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다. 그는 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 행동한다. 마음이 우리 인간 존재의 뿌리이며, 핵심 이다.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생명(삶)의 문제들이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모든 지배적 중심(all-dominating centre of our existence)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의 출발점은 신자의 중생한 마음인데, 그것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지게 된다. 이러한 출발점(a priori)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신앙적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닫혀져 있는 비 그리스도인에게도 또한 사실이다. 마음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있는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 까닭에, 지식에 이르는 문은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여러분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이 바로 그 곳이며, 그 곳으로부터 여러분의 머리와 지성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신앙 고백인데, 즉 신앙의 선언이다. 그러한 고백의 거절은 필연적으로 다른 신앙의 선언을 낳게 된다.
본질적으로, (지금) 우리는 믿음의 헌신(faith commitment)에 대해 다루고 있는 중이다. 믿음은 마음과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은 우리 생명의 중심인 마음에 이르게 된다. 만약 믿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져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릇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며 어떠한 배움도 ‘잘못된’ 또는 왜곡된 배움이 될 것이다. 성경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faith in the Christ of the Scripture)이 고백되어 질 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가능하며, 우리의 전 활동들에서 체계 있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 삶이 하나님께 헌신되어져야 하기에, 교육적 활동들 역시도 하나님의 법령(ordinance)에 복종해야만 한다. 학교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그 분의 창조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수학, 과학, 또는 다른 어떤 교과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생각하고 부지런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의 본체에 대해 부지런한 것은 아이들이 자신들 개인의 지혜와 삶을 형성하도록 도울 것이다. 교육에 대한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기독 교육자들은 하나님 왕국에서의 책임 있는 청지기로서 무장하며, 자녀들이 가야만 하는 길을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 자신들의 구별됨을 나타내기 위해 주님의 시대의 ‘정신들, spirits'을 이해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만 한다.
헌신
Allan Bloom은 현대교육은 학생들의 정신(minds)을 도덕적 진리에 대해 닫아버리는 상대주의를 가르친다고 주장해 왔다. 학생들은 개방된 정신을 가질 것과, 그들이 그 어떤 것도 진실한 것이나 덕이 높은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그런 정도에까지 관대할 것을 배운다. 세상에 기독교 가정들의 자녀들은 아주 많다. 그들은 별다른 지식 없이 이러한 상대주의의 철학을 취해서 받아들이기 쉽다. 기독교 학교는 이런 것들에 대항해 그들이 무장을 하도록 돕는다. 자녀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와 도덕적 가치를 얻으려 애쓰는 태도를 발달시키는 그런 방법으로 지도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세속적인 철학은 정신뿐 아니라 마음(hearts)까지 닫아버린다.
“교육의 조정(control)에 있어서 사람들은 ... 중요한 내용을 제거해 왔고, 많은 우리 학생들을 기능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문맹자로 남겨두게 되었다. 하지만 더 사악한 방법으로, 그것들 자체의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의제(agenda)에 헌신된 이데올로기들이, 영리하게도 대용품 (그것은 정말로 단순히 다른 종교이다)이 하나의 중립적인 대안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 학생들이 그로부터 배우는 전통적인 도덕과 신앙적인 가치들을 차단하는 것에서 성공해 왔다. ”
“...도덕과 신앙적 가치를 무시한 교육은 질 높은 교육으로 적합할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교육은 전인격과 관계될 것이며, 이것은 도덕과 정신적 가치에 대해 어떤 것이 말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학생들은, 그들의 교사와 마찬가지로, 제자가 되라고 부름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제자로 삼은 그들의 주인을 따른다. 그들은 그 분의 가르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경외함으로 그 분의 행하심을 보며, 그리고 그것은 그들을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게 한다. 학생들은 아직 다음과 같이 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지 모른다: “주여, 당신이 가는 곳 어디라도 내가 따르겠나이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발전시키고 있다: 모든 만물 위에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지식이다.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생의 헌신을 하도록 학생에게 요청하는 것이 학교의 명시된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부모와 교사들을 관찰한다. 그들로부터 그는 세상에 대해 배우며, 그들이 말하는 것은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 그들은 반응을 요구한다고 말 하는 것을 듣는다.
본성적으로 잘 못 된 반응들이 있다. 친절함, 근면, 성실, 공평함 등은 우리가 학생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종류의 가치들인 반면에 도둑질, 거짓말, 게으름 등은 잘 못 된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도덕적으로 행동하기를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그들은 출석과 같은 즉각적인 문제들에 대해 적절히 응답할 것을 요구받는다.
우리가 우리의 학생들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헌신의 종류는 그들이 배우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적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들 (Absolutes)
학생들이 배우는 과정이 그들이 배우는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는 현대적인 개념은 최종적인 목표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방법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최종적인 목적, 배우는 것의 내용이 절대적이지 않을 때에만 그럴 수 있다. 기독교 학교들은 진리인 절대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는데, 이것은 사람이 그것이 진리라고 발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이 진리인 것으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탐구가 죄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자유롭게 한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들의 현재 상태에서 교사나 학생도 진리의 모든 것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하나님께서 계시하기를 선택하신 만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과정과 내용 사이의 균형을 지향하는 전략은 내용의 배후에 있는 진리는 그가 그것을 의미 있고 참된 것으로 만드는 것에 의존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학생을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독교 학교는 학생들이 모든 관점들을 수용하도록 요구하는 거짓된 관용의 개념을 조장하지 않는다.
학습자 중심 (Learner-Focus)
모든 배움과 가르침은 그것이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 안에서 그리스도 위에 중심을 두고 있다. 알 수 있는 모든 개념,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기술, 얻을 수 있는 모든 태도는 죄의 세력의 영향 아래 있다. 따라서 교사가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 또는 학습자가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몹시 필요로 한다. 교사는 학생이 더욱이 이 것에 관해 배우도록 관여하게 될 것이다. 효과적으로 가르치며, 학생의 유일함(독특함, uniqueness)을 존중하는 이러한 소망에서 그는 각각의 학생들이 배우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필 것이다. 그의 가르침의 방법론 속에서 그는 학습자 중심이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학생들이 배우도록 하는데 있어서 가장 최선이 될 수단들과 전략들을 채용한다. 이것은 아이가 자신이 배울 것과 방법을 결정한다는 개념에서 자율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자신이 배우는 것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지도록 격려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교사는 배우는 내용과 사용되는 전략의 선택에 대해 여전히 책임을 진다. 학생들이 지식과 기술과 태도를 습득하는 방식에 있어서 조차 그들이 자기 희생, 겸손, 그리고 도덕적으로 바로 서는 것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격려와 촉진 ( Enabling and Facilitating)
지식은 개인적으로 세워지지 않고, 진리는 상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교사는 그가 학생들이 배우도록 돕는 방식을 세심하게 고찰해야만 한다. 그는 학생이 능동적으로 배우도록 동기 부여를 하고 촉진할 환경(setting)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책임 있는 청지기로서의 그들의 성장을 증강시킬 발견들(discoveries)과 경험들에게로 그들을 인도해야만 한다. 그는 단순히 수동적인 ‘따로 있는 안내자’가 아니라, 무엇이 문화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나타내 보이고 삶의 규범들(principles) 속으로 인도하는 데 능동적으로 관여되는 사람이다. 절차상의 지식과 기술의 숙련이 내용을 취득하는 것을 희생시키지 않는 그러한 방식으로 교실을 조직화하는 것은 교사의 책임이다.
능동적인 배움 (Active Learning)
교육학적인 연구는 “학생들은 직접적인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만약 학생들이 계획 수립, 정보 공유 (sharing information), 조직화, 그리고 학습 환경(learning situation)을 수행하는 것에 개입된다면 배움은 더욱 의미있는 것이 될 것이다. 학생들은 또한 자신들의 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이 학습 목표들을 세우는 것을 도와야 하며 그들의 일의 성취를 평가하도록 도와야 한다.
능동적인 배움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과과정을 가로질러 효력을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학생들의 배움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또한 학생 중심의 활동(student-focused activities)을 활용하는 것은 교과 과정 위의 각각의 과목의 본질과 성격을 따라가야만 한다.
지속적인 배움 (Continous Learning)
기독교 학교에서 하나님께서 각각의 학생에게 독특한 은사들(gifts)을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다른 속도(rates)와 다른 방법으로 배운다. 동갑내기의 학생들은 많은 공통적인 능력과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공통점은 교사들이 학급 집단 학습(class group teaching)을 위한 교과 내용을 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계획하고 가르치는데 있어서 교사는 아래의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학생 중심의 학습 전략들을 포함하여야 한다:
- 재능이 덜한 (less gifted) 학생들이 배우는 것을 돕기 위해
- 재능 있는 (gifted) 학생들을 풍부하게 하고(enrich) 그들에게 동기 부여를 위해
- 다른 학습 스타일들을 수용(accomodate) 하기 위해.
학생들의 개인적인 특성(individuality)을 존중하기 위해,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교사는 적절할 때는 언제든지 학급 교육(class instruction), 집단 교육(group instruction), 그리고 개별 교육(individual instruction)을 활용할 것이다.
배우는 속도가 학급의 나머지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는 학생들은 소집단 또는 개별 교육의 특권을 더 자주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배우고/가르치는 상황에서 교사는 개별적인 학생의 필요와 장점에 더 잘 부합되는 가르침과 배움의 전략을 계획할 수 있다.
아이들이 동일 학년에 유지하는 것(유급)이 통상적으로는 재능이 덜 하거나 약점이 있는 학생들을 다양한 학년 수준에서의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도록 돕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배움이란 만일 학생들이 유급된다면 심각하게 두절될 수 있는 중요한 사회적 배경을 가지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신들의 동년배들과 함께 학년을 진급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학생들을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 청지기가 되도록 양육하고 있기 때문에 배움은 영적인 배경을 가진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각각의 학생에게 독특한 재능(gifts)과 달란트(talents)를 주셨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자신이 공부의 정상적인 과정을 완결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유급을 통해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인식을 받도록 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학교는 학교의 배움의 지원수단들을 규합하고, 학생의 필요에 상응하는 학습 중재안(learning intervention)을 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배우고/가르치는 상황에서 교사는 개별적인 학생의 필요와 장점에 더 잘 부합되는 가르침과 배움의 전략을 계획할 수 있다.
통합 (Integration)
통합이라는 용어는 배움의 본질(nature)과 가르침의 방법론(methodology)를 일컫는다. 아이들은 그들이 세상을 배우는 것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 사이의 의미 있는 결합을 증진하는 활동에 개입될 때 더 잘 배운다. 중립적인 과목으로 보이는 것들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통합하는 것과 그리고 그 역으로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학생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창조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오며 그리고 그 분께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통합의 형태는 개인적으로 구성하는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본래부터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학교들이 만들기를 원하는 통합된 배움의 종류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구조와 그 속에 있는 그 분의 계획을 이해하고, 그것을 내면화하고, 그것에 대해 반응하기를 시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배우는 자를 냉담하고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배움은 배움이 아니다. 학생이 지식을 획득한다는 것은 그가 반응하며, 그가 그것 때문에 변화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교과 과정적인 통합은 배움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과 타당성에 대한 의문을 말하는 것과, 그리고 한 경우로부터 새로운 상황으로의 배움의 이동을 촉진할 수 있는 결합들에 참여하는 것의 수단으로서 간주된다. 통합된 학습 경험들(integrated learning experiences)을 조직화하는 것은 모든 것들 사이에 그리고 그 속에 존재하는 상호결합(interconnection)을 인정하는 진로(orientation)를 반영한다.
교과과정을 통합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통합의 종류와 정도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에 의존하는 교사의 전문적인 판단에 크게 남아있다: 개별적인 교사의 목적과 전문가적 의견, 사람과 교육적인 자원의 유효성, 학생들의 연령, 그리고 그들의 능력과 관심.
특별한 필요를 가진 학생들 ( Students with Special Needs)
특별한 필요를 가진 학생들은 시각적인, 청각적인, 육체적인, 또는 만성적인 건강의 손상을 가진 이들을; 말하기와 언어 장애; 학습 장애; 행동 장애; 정신 장애; 마찬가지로 매우 재능이 있는 이들을 포함한다. 우리의 기독교 학교들은 각각의 학생들의 스타일과 배우는 속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이 학생들의 필요에 대해 반응한다.
특별한 필요를 가진 학생들은 주님에 의해 우리 가족들에게 위임되었다. 우리는 왜 그 분께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그것을 하시기로 선택하셨는지 항상 충분히 분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속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인정한다. 언약의 자녀로서 그러한 이들 아이들은 공동체의 (전체의 일부로서)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그들의 통합(integration)의 확장이 그들의 특별한 필요의 본질(nature)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안내의 원칙(guiding principle)으로서 우리는 그들을 친밀한 사이(belonging)로서 인정하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학교들 내에서 그들을 위한 교육적으로 책임 있는 학습 경험을 제공해야만 한다. 이것은 자료실(?, resource rooms) 이나 일체 완비된 또는 특성화된 환경 (self-contained or specialized settings)의 적절한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별한 필요를 가진 학생들을 통합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할당하신 능력과 소망과 감정의 차이들을 다른 아이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바르게 평가하도록 가르친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긴 안목에서 (in perspective) 자신들의 장점들과 약점들을 보게 하며, 그들이 행위로 자신들의 이웃을 사랑하도록 격려한다. 통합은 공동체 안에서 더 큰 자각과 수용을 창조하며 행동으로 자신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진단 평가와 수행 평가(Assessment and Evaluation)
만일 학생들이 책임 있는 청지기로서 자라려면, 학교는 학생들의 배움을 향상시키고 지원하는 지속적인 진단 평가와 수행 평가를 그들에게 공급해야만 한다. 이러한 평가와 수행 평가는 배우는 자와 지식의 성경적인 이해를 반영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랑하고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평가하고, 반응(feedback)을 주고, 교정하여야 하는데, 지지하는(supportive) 그러나 지속적인 잘 계획된 교육의 배경 안에서 해야 한다. 디모데 후서와 디도서에서 바울은 교정은 항상 격려와 동반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
“비록 진단 평가와 수행 평가를 구분할 수 있다할 지라도, 이 둘은 종종 서로 교체하여 사용될 수 있다. 진단 평가란 학생이 할 수 있는 것의 증거를 모으는 체계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고; 수행 평가란 증거의 해석에 기초한 판단과 결정을 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위의 지침을 마음에 두고, 우리는 다음의 목적을 위해 학생들을 진단 평가하고 수행 평가한다:
1. 학생들이 습득한 지식과 기술(skill)을 결정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태도와 이해
(attitudes and appreciation)를 관찰하기 위해;
2. 학생들이 그들의 지식과 그들의 기술을 실제 생활 또는 가상(simulated) 경험에서 사용
하도록 요청받을 때 얼마나 잘 그들의 지식을 사용하거나 기술을 수행하는 지를 결정하
기 위해;
3. 좀 더 진행된 교육을 하기 전에 한 논제(topic)에 대한 학생들이 가진 이해의 수준과 학
생들이 도달한 기술(skill) 발전의 수준을 진단하기 위해;
4. 교사가 더 진행된 연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을 돕기 위해;
5. 가르침의 진행 또는 방법론이 어떻게 해야 효과적이게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6. 학생들이 교과 과정의 여러 면들에 대해 반응하기를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7. 목적들(objectives)이 달성 되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8. 교과 과정의 개선이 필요한지를 결정하기 위해;
9. 필요한 곳에 여분의 도움 (extra help)을 주기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10. 학생들과 부모들에게 전달할 가장 유용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보고서 작성 (Reporting)
학생의 성취(achievement) / 발달 (development) 에 대한 보고는 학생의 ‘과정 보고 - Report of Progress (성취와 노력)’ 의 방법으로 수행된다. 그러한 보고는 아래와 같은 용어의 형태로 특별한 정보를 주는 과목별 가닥/영역의 배경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기술과 태도와 개념의 발달을 반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기술과 내용에 대한 숙달
2. 잠재력과 능력
3. 사회적인, 육체적인, 지적인, 정서적인, 미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발달
4. 장점과 단점
5. 변화에 대한 요구
장시간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근거들- 학생들의 작업 견본, 관찰 도구들, 회의 기록, 퀴즈, 시험, 과제, 학급 참여도, 자습 과제, 다른 학생들과 교사들과 상호 작용 - 을 참고하면서 교사는 학생의 발달을 서술하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는 부모와 학생에게 성취도를 알려주는 것이어야 하며 배움과 발달을 인도하는데 유용해야만 한다.
부모-교사 회의는 보고 과정을 보충해 준다. 이들 회의들은 학생에 대한 보고를 상세히 설명하고 학생의 배움을 위해 이익이 되도록 학생의 잠재력에 대한 더 많은 인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짜여진다. 그렇게 함으로 교사와 부모 양 쪽 모두 ‘우리 함께, we-together’ 라는 상호 협력의 태도를 발전시킨다. 함께, 교사와 부모는 책임 있는 청지기의 삶으로 인도되도록 학생들에게 펼쳐주며 가능하게 만든다.
보고서 카드는 등급을 매기는 것(letter grades) 과 의미가 충분한 의견을 적는 것을 활용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의 성취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한다:
1. 학생의 배움의 복잡성이 부득이하게 등급에 의해 제한된다.
2. 그것들은 주관적이다.
3. 그것들은 발생한 배움의 전체적인 증거를 전달하지 못한다.
4. 그것들은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며 참고할 만한 기준이며, 따라서 오해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5. 그것들은 또한 학생의 자존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을) '분류하며, pigeon-hole', ‘실패’ 라는 생각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제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서술하는 평가(anecdotal comments)와 결합하여 등급을 매기는 것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등급을 보고받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편리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등급을 매기는 것은 학생의 성취에 대한 즉각적인 상징을 가지는 요약이다.’ 이들 등급은 반드시 학생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서술에 대한 참고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부모와 학생은 반드시 등급의 해석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학교들을 통하여(throughout) 동질성과 견고함을 강조하면서, 등급을 매기는 것에 대한 기준이 세워져야만 한다.
서술하는 평가는 그것이 학생이 배웠고 성취한 것에 대한 풍부한 묘사가 실려 있는 한 학생에 대한 좀 더 정확하고 완전한 정보를 주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술하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애매한 진술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학생에 대한 보고서는 등급을 매기는 것과 간략한 의미가 풍부하고/도움이 되는 서술 양쪽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이 추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