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하씨호군공파밀양 입향세거지 기념비
이곳은 진양하씨 호군공파의 밀양입향 세거지이다. 마을이름은 대항이고 또는 수동이라고도 한다.
호군 휘 비공은 고려 구국충절신 증 문하시랑 동평장사 휘 공진 시조공의 16대손인데 조선조 초
호군으로 재임중 단종의 손위로 1455년에 기관하고 고장진주 수곡면 효자리 정곡에서 은거하다
만년에 외조부 고려 공민왕 의 외손 재령이씨 사재령 휘 일선공이 계시는 밀양으로 전거하였다. 공은
아드님 세분을 두었는데 장자 휘 구천공은 성균생원 이고 차자 휘 치천공은 별시위 사과 를 지냈고
삼자 휘 수천공은 사간원 헌납과 외보찰방 을 역임하였다. 휘 구천공 의 아들 휘 충공 호 돈재선생은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문인으로 문과급제하고 사헌부 집의 로 재직중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사직원
를 내고 귀향하였다. 호군공의 5세손 휘 재정공 은 임진왜란 으로 부모를 여의시고 자호를 영모재라
하여 재사를 지었다.호군공 의 후예들이 각기 분파되어 전국 각처에서 번성하게 가문을 빛내고 있다.
이와같이 550 여년의 긴세월에 고장의 옛모습은 찿아보기 어렵지만 지금도 영모재.동강재.
추모재.호성재.보본재.두곡정 들이 남아있고 대대의 선영이 내려다 보고 계시는 유서깊은 고적지
이다.
서기 2016년 병신 정월 22일
진양하씨 호군공파 종중에서 세우다.
하비(河備)생졸미상
진강 부원군 문정공 하시원(侍源)의 현손이며 통정대부 부윤 하윤구(允丘)의 증손이고 한성판윤 하유(遊)
의 손자요 초계군수 하지명(之溟)의 아들이다. 진주 수곡면 효동으로 돌아와 은둔하다가 외가가 있는 밀양 대항으로 전거 하였다. 공은 오위(五衛) 부사직을 지낸후 선략장군 호군(정4품 중안관직)에 특제되었으나 1455년 단종 손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호군공파의 파조이다.
하비공의묘의 무인석. 왕릉 이외에는 무인석을 잘세우지않는데 이곳은 무인석이 문인석 같아보인다,
묘갈명
밀주의 대항리는 우리하씨가 대대로 살아온땅이다. 하씨가 거처를 이곳으로 정한것은 호군 공에서 비롯되었다. 공의 휘는 비(備)이고 단종조의 사람이다.
진양에서 태어나 만년에 밀양에 이거했다. 이곳 한목에서 돌아가셨으며 한목 구대곡(九岱谷) 명당에 장사 지냈다. 공의 배위 곽씨의 묘는 진주의 효자동에 있다. 대저 임진란때 밀양은 마침 그 충돌지점에 위치하여 공의 후손들은 전전하다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문헌 또한 소실되었기에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아! 통탄스럽도다. 우리하씨계통은 진양에서 나왔고 고려 증문하시랑동평장사 휘 공진을 시조로 삼는다.
이후로 대대로 잠영이 이어서 나왔졌다. 8대에 이르러 휘 식은 판사 평 부사와 진강군에 추증되고 그의 아들 휘 시원은 우의정 진강 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문정의 시호를받았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부 휘 윤구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을 지냈으며 조부의 휘 유(遊)는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판윤을 역임했다. 아버지 휘 지명(之溟)은 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고 어머니 숙인 재령이씨로 안렴사 일선의 따님인데 부덕(婦徳)이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으며 15~16세에 이르러서는 시문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관직은 선략장군 호군에 이르렀고 관직에 있을때 의리로 스스로 격려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었을때에 단계 하위지공과 대화를 나누다가 말이 당시의일에 미치자 강개하여 오열하였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평생의 줄거리다.
배위 영인 포산곽씨 는 의영고사 득종의 따님이며 3남4녀를 낳았다. 장남 구천은 생원으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도의로 사귀었다. 차남 지천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과를 지냈고 3남 수천은 수찬을지냈으며 외직으로 찰방을 역임하였다. 딸은 이숙정.전맹원.정원종.남치신(남곤의부)에 출가 하였다.
장남 구천은 4남4녀를 두었는데 장남 주는 현감을지냈고 차남 충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호는 돈재라 하고 점필재 문하에서 수업하였다.3남 순은 진사이며 4남은 벼슬하지않았다.(이하생략)
오호라!공은 일찍이 불행한 시대에 관리로 더이상 나아갈뜻이 없었으니 향리에 물러나 가업을 세웠고 화락하고 단아함을 백세에 흐르게 하였으니 실로 아름다운것이다. 공은 본래 역경과풍수지리의 학문에 정통하여 한목에 거처를 정하였다. 처남 해남 현감 곽안방 공이 와서보고 감탄하면서 칭찬하기를 "이땅의 자손만대 의 복받을터가 되기에 충분하도다.남천의 물이 말라도 하씨는 없어지지않으리라" 하였다.이말이 거짓이 아니었으니 공이 베푼은덕의 무궁함과 우리하씨 자손의 경여와 오래도록 발전함으로 가히징험이된다.공의 후손들은 흠모와 감격으로 칭송이 그치지 않은데 비석을세우고 사적을기록하며 이어 명에이르되 "아! 이곳수동이여 휼륭하신 공이 터잡은곳이로다.좋은사람의 복받은땅이라.그후손이 이리번창하도다.후인의 엉긴정성을 비석에 새겨 추모의정을 붙이오니 영원한향불에 영혼의 오르내림이 양양하소서"
임인년3월
후손 재용(載用)삼가 짓다
호군공 배위 영인포산곽씨묘
진주시 수곡면 대천리 산41번지 에있다. 팔각형의 둘레돌이 둘려져 있어며 각 모서리에 기둥을세웠으며
덮개돌을 얹은모습이 조선시대의 초기의 묘제를 잘나타내고있는 묘이다. 경남문화재 기념물42호 이다.
하비공의 아버지 하지명(河之溟) :생졸미상-대항리가 세거지가 된이유
진강부원군 문정공 시원의 증손이고 가선대부 한성판윤을 지낸 유(遊)의 삼자이다.자.호 와 생졸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영락 계모(1423년)에 진사에 입격하여 초계(현 합천)군수를 지냈다. 공은 밀양에 거주하던 사재령 이일선의 따님 재령이씨 에게 장가들어 당시의 관습에 따라 밀양과 세거지 원당을 오가며 생활했다.
사재령은 고려왕실 외손으로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개경을떠나 밀양부 조음리에 은거하였으며 그의넷째
아들 이오 는 함안 모곡리로 옮겨 은거지 주위에 담을쌓아 담안을 고려동 이라 일컬었다.
공은 3남2녀를 두었다. 장자 현은 진사에 합격한후 사온서 직장을 지냈으며 원당에서 정곡으로 이거했다.
이때부터 공의 9세손인 석계공 세희께서 사곡(진주)으로 이거할때까지 송정가의 세거지가 되었다. 차자(次子) 비(備)는 문음으로 호군을 지냈으며 당시의 관습에 따라 외가의 세장지(世庄地)에 거주하게 되어 후손
들이밀양 대항리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재령이씨 일선공(하비공의 어머님 집안) 집안
고려말경 공민왕 부마이신 이소봉을 시조로 하고있다.아들 두분이있는데 일상.일선 이시다.
휘 일선공은 자녀 6남1녀가 있어며 고려조가 망하자 자녀를 데리고 경남 밀양 조음(대항리)으로 은거
했다고 되어있다.6남은 여러파조.계은공파(1남.휘신).사정공파(2남.휘술).생원공파(3남.휘축).모은공파(4남.휘오).처사공파(5남.휘유).6남(휘인)은후손없음.그중 1녀가 바로 진주 하씨로 시집갔다고 되어있다.묘소는진주 수곡에 있어며 도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그중 재령이씨 인구중60%가 4남.모은공파라 한다.
하비공파 의 파조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10세 |
하공진 拱辰 시조공 | 칙충 則忠 | 탁회 卓回 | 정재 挺才 | 남수 南秀 | 소 邵 | 부심 富堔 | 식 遈 | 시원 侍源 | 윤구 允丘 |
11세 | 12세 | 13세 | 14세(1) | 15세(2) | 16세(3) | 17세(4) | 18세(5) | 19세(6) | 20세(7) |
유 游 판윤공 파조 | 지명 之溟 | 비 備 호군공파파조 | 구천 | 충 沖 | 종억 | 유 | 재정 再淨 영모재실 | 윤경 潤京 원모재실 무안.동산 | 한명 韓明 |
21세(8) | 22세(9) | 23세(10) | 24세(11) | 25세(12) | 26세(13) | 27세(14) | 28세(15) | 29세(16) | 30세(17) |
만창 晩昌 추모재실 | 우일 遇一 | 태용 泰龍 보본재실 | 도자항열 圖 | 정자항열 禎 | 규자항열 奎 | 운자항열 運 | 재자항열 載 | 진자항열 鎭 | 영자항열 永 |
수창 壽昌 동강재실 | 치일 致一 | 기용 起龍 | 도자항열 | 정자항열 | 규자항열 | 운자항열 | 재자항열 | 진자항열 | 영자항열 |
하비공파 의 후손하구천(河遘千)생졸미생
자는 맹청(孟淸)이다. 초계군수 를 지낸 휘 지명(之溟)의 손자이며 호군 비(備)의 아들이다. 점필재(佔筆齋)
김종직(金宗直)과 도의로 교우하고 아들 충(沖)을 그문하에 수학하게 하였다.세조조에 생원에 입격했다.
배위는 의인(宜人)문화유씨 로 승함(承涵)의 따님이며 4남4녀를 두었다.아들은 현감 주(澍).돈재공(遯齋公)
충(沖).진사 순(淳).그리고 영(泳)이며 사희는 이희적.손난줄.어득호.참의 민여익 이다. 안동인(安東人) 번계
김윤동 의 묘갈이 있다.
하충(河沖) 1466년세조11~1525년중종20
자 는 충포(沖圃). 호 는 돈재(遯齋)이다. 호군 비의 손자이고 구천의 아들이다.공의 조부 호군공이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단계 하위지 를 찾아가 수양대군의 불의에 비분강개한 마음을 토로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효자동 에 잠시 은거하다가 외가가 있는 밀양수동(대항리)으로 이거하였다. 부친 생원공(휘 구천) 이 근동에 사는 점필재 김종직 과 도의로 교유하게 되면서 공이 공이 점필재 문하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공은 소싯적부터 총명하여 다섯살에 시를 지었으며 15세부터 이미 시로서 이름을 날렸다. 뜻이 돈독하여
점필재가 칭송하기를 "학문이 깨끗하고 순정하여 의리가 분명하니 능히 가르칠 만하다.그 행의 의 덕이
결코 작록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사과를 거쳐 성종17년(1486년) 문과에 급제 하였다.
홍문관 정자.사헌부집의 를 거치면서 성종의 문치를 보필하였고 매양 경연에 입시하여서는 성의가 간간하여 성종이 공을 매우 중히여겼다. 연산이 즉위한후 왕의 황음무도 한 행위를 수차례 간하였으나 깨닫지 못하자 사직소를 올리고 연산원년에 귀둔하였다. 공이 은거한 3년뒤에 무호사화가 일어나 점필재 문하생을 비롯한 영남출신 신진사류들이 참화를 당하였다. 스승 점필재마저 부관참시의 화를입자 공은 화앙산으로 들어가 산채로 연명하며 사흘동안 통곡하였다.해불시가 전해진다.
배위는 숙인 순천박씨로 짐의 문유의 따님이며 두아들을 두었으니 종영과 낙포.종억이다.돈재집이 있다.
하지천(河直千)생졸미상
자는 중청(仲淸)이다. 호군 비의 아들이다.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나고 문장이 일찍부터 드러났다.벼슬은
별시위 사과 를 지냈다. 사과공파의 파조이다.
임진왜란과 대항리의 항전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 4월13일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가 부산포 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왜군의 주력부대는 좌.중.우 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였다.
좌군 = 동래-기장-좌수영-울산-경주-영천-의흥-군의-문경
중군 = 동래-양산-밀양-청도-경산-대구-안동-선산-상주
우군 = 동래-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성주-지례-금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
남도의 지리적으로보면 양산.울산.밀양이 점령당한다면 그즉시 충청.강원.전라.경기 전체로 진군할수있는
진격로를 확보한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것이다. 그만큼 밀양이 중요한 지리적 진격로라 하겠다.3일만에
부산방어선을 격파한 일본군은 5일후 밀양성을 점령 하기에 이르렀다.밀양부사 박진의 결사항전으로
밀양에서 진군을 늦추는 효과는 있어으나 밀양백성은많은 약탈과 살인을 당하였다.
수동(대항리)은 경북청도가는 화악산넘어가는길목 요제원(청도면.요고리)에서 청도각남.대구달성으로
가는역로주변이다.한목은 그당시꽤큰마을이었다.소수의항전으로 하비공의 후손들은 몰살을당하였다.청송으로 피난간 재정공이 유일한생존자이며 지금의 하비공후손들은 하비공의5대손 재정공의 후손들이다. 재정공은10년의 피난후귀향하여 아무도없는 황폐해진 한목에 그의외숙 진주유씨 유여주의 주선으로 마을뒤쪽 한골에 터를잡고 초당을짓고 이곳에기거하면서 여읜부모 선조님을 영원히 사모한다는 재액을남겼다.부모님과 그시대의 조상님의 기일날짜 가없는것은 생졸미상이 많은 조상님것은 임진왜란으로 많은화를당했다고 전해져온다.아~슬픈일이오다 많은조상님 들을 왜놈의만행에 잃어으니....
밀양에서도 소수의 의병활동도 있었다.산내면 형제골을 지리적피난처거점으로 게릴라전법으로
전공을 세웠다.밀양손씨.여주이씨등 재지사족 가문들이 주도하여 그들이 군사와 군량을 부담하였다.
밀양이외의 지역에서는 의승장으로 평양성전투 등을 승리를 이끈 유정.정인홍 중군장으로서 낙동강의 방어
앞장섰던 손인갑가문.곽재우의 휘하의 밀양인사들의 활약이 있었는데 밀양 의병항쟁사 를 발굴하여 공개되길 기대해본다.밀양은 지리적위치로 인하여 전쟁3국(일본.조선.명나라)중요한 지역이었다.전쟁기간 동안 많은 피해를 당했지만 군관민 합심하여 일본군에 항전한 대표적인 군현이었다고 한다.
*요제원-밀양청도면 요고리에서 청도군 각남면으로 넘어가는고개.요고저수지 위쪽에 위치하고있는마을로
옛이름은 요제원리.요고리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밀양부 서북쪽37리 지점에 있다고한다. 수안역에서 청도로 가는길목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원이 있었던곳으로 옛날에는 주막집이많았다고 한다.이원은
임진왜란이후에 폐지되었다.이길이 청도로 가는역로(예전에 벼슬아치가 역마를 갈아타고 숙박하는하는곳)
이곳으로 많은사람들이 왕래 했다고한다.
고려시대의 처가살이
고려시대는 남녀가 결혼하면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다. 연애결혼도 가능했고 이혼과 재혼도 자유로윘다.
무엇보다 재산상속도 균등했다. 이처럼 자유분방한 시대였으나 여성들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지만 여성
들의 대외활동은 활발하지 못했다. 고려시대의 결혼풍습은 솔서혼(率壻婚.사위를거느리는혼례)이라 하여
결혼하면 여자는 친정에서 살았고 남자는 처갓집으로 들어가 일정기간 처가살이하는 풍습이 있었다.
장가를간다 의 말뜻이다. 겉보리 서말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않는다.뒷간과 처갓집은 멀수록좋다. 는말은
조선후기에 나온말이다. 이제도는 조선초기의 국가이념인 성리학과 주자사상으로 확고히 하는과정에서
많은 공격을받는다.처가살이 혼속때문에 여자들이 자기부모 세력을 믿고 남편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군다.
하여 조선개국공신 정도전과 같은이는 외척을멀리하고 경계하는 정치를하였다. 이후로 남아선호사상 과
가문을중시하는 고착화 되어갔다 . 고려는 오래된 역사이지만 개방적인모습은 근대시대와 닮았다는 생각
이든다. 여성이 사회적지위가 낮은시대도 아니었는데 왜. 여성들은 외부활동도 없고 이름도 내세우지
못했을까. 부모봉양하며 집안살림에만 만족해야 했으니 말이다. 현시대는 여성상위시대 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