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송문학회 군포 문학답사 2024. 5. 28.
작가 김선화의 흔적을 찾아서
* 오전9시 30분 산본역 4번 출구 출발
(임승학 기사님 폰 010 5800 3481)
* 11시 30분-대전시 유성구 세동 영송정 도착.
시비 <내고향 상시동> 견학
* 세동 출신, 진잠농협 김종우 조합장님 환영인사
* 황득연 석장님 및 지인들 소개.
* 책 나눔의 시간
* 12시 강은순 맛집 식사
* 오후1시 30분 세동 출발 –신도안 괴목정으로 이동
잠깐 김선화 고향 소개 및 작품이야기. 옛 신도안 사람들.
* 오후2시 청양군 칠갑산 천장호 출렁다리로 이동 산책.
* 오후3시 구기자동동주 한 잔~~
* 오후4시 30분 모두 버스 탑승. 즐거운 귀가
푸른 솔 굽어보는 큰 마당가
- 세동(細洞) 편
김선화
행정구역상 대전이다. 우리가 자랄 때는 ‘충청남도 대덕군 진잠면 세동리’였는데, 지금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세동’으로 불리는 곳이다. 예서 생태자연학습장 등 우리 밀 수확에 열정을 쏟는 사람들이 있어 길을 서둘렀다.
예전에 선생님 아들로 통하던 말 수 적은 그, J는 나와 초등학교동기생이며 내 작은아들의 대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젊은 날을 외지에서 살다가 10여 년 전부터 고향에 돌아와 마을을 가꾸며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탯자리를 상실한 아픔을 안고 사는 나로서는 돌아와 깃들 고향마을이 건재한 그곳 친구들이 마냥 부럽다. 아울러 옛 모습을 갖추고 있는 그 땅이 귀하게 여겨진다.
계룡역에 내리니, 역사가 말끔한 신사의 모습이다. 호남선열차가 지나는 두계역이 새 이름으로 거듭나 고속열차까지 척척 붙들어 세웠다가 보내준다. 그곳에서 지워지지 않는 완행열차의 향수가 되살아난다. 짐 보퉁이를 들이밀던 장꾼들과, 숨을 몰아쉬며 몸을 비집고 들던 통학생들의 땀내가 끈끈하게 와 닿는다. 객지로 돈 벌러 나간 어린 공원들이 금쪽같은 시간을 아껴 밤차를 이용하던 풍경도 훤히 그려진다. 시간에 쫓겨 월급만 건네고 돌아서야 한다는 철없는 딸의 말을 믿고 농번기중에 15리 밤길을 달려와 눈에 핏발서 있던 젊은 아버지의 시름겨운 심정도 너울거린다.
그러한 애환어린 역에서 서성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 시원스레 뚫린 도로가 거리를 좁힌다. 오래 전부터 물길 따라 촌락이 형성된 지역으로 ‘상세동’, ‘중세동’, ‘하세동’을 합하여 세동이라 부른다. 대를 물려오는 구어(口語)대로 표현하면 그냥 ‘상시동’, ‘중시동’, ‘하시동’이다.
‘세동’이니 ‘세동리’니 ‘세동마을’이니 하는 지명은 전라도 진안에도 있고, 경상도 함양에도 있다. 특히 공주 유구읍의 세동리는 가는 줄기의 물길 따라 형성된 자연부락들 이름까지 대전의 세동과 같아, 산세나 물세를 살펴 이름 붙이는 우리네 정서의 공통점을 인식하게 된다. 내 벗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일찍이 대전시내에서부터 버스가 드나드는 등 판로가 개척되어 있어, 중세동 하세동 쪽의 상추재배 등이 성하다. 지금도 녹색지대의 원형으로 전형적인 전원마을임을 증명한다.
드디어 J가 기다리는 마을입구에 다다르니 품새 좋은 정자나무 한그루가 먼저 품을 벌린다. 푯돌에는 1945년, 광복기념으로 마을주민이 합심하여 백운산기슭에서 옮겨 심은 수호목이라 적혀있다. 오는 사람 환영하고 가는 사람 환송한다는 ‘영송정(迎送亭)’이란 의미가 정겹다. 푸근하고 격조 있는 마을의 인심이 느껴진다. 당시는 둘레가 어른의 두 손안에 들었다하는데, 65년이란 나이를 더하며 저리 어엿하니 큰 그늘이 되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이리 흐뭇한데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얼마나 뿌듯할까. 한데 모여 뛰놀고 얼싸안고 강강술래를 했을 흔흔한 품이다.
무엇보다도 정자나무는 균형을 잃지 않아야 아름답다. 기우는 곳 하나 없는 것이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의 정신세계와 버금간다. 바로 이곳의 영송정이 그러하다.
“세동에선 훌륭한 사람이 줄줄이 나왔대. 교육자도 나고, 판사도 나고, 기자도 나고…. 김씨, 송씨, 정씨, 조씨, 황씨…. 두뇌 좋은 사람이 많대.”
우리들은 자랄 때 어른들로부터 뒷산 너머의 마을에 대해 그리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친구들 간엔 인근학교 선생님의 자제가 있고, 서울 가 기자로 활동하는 분의 자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석하고 성격이 유하여 요즘 말로 개그 잘하는 친구도 있었다. 표정만으로도 장난기어린 그가 수업시간에 한번 입을 열면, 교실 안은 이내 폭소의 도가니가 되곤 하였다.
내가 인식하는 세동은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많았는데 특히 남자애들이 대세였다. 학교가 파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개구쟁이들의 행렬이 이웃동네 아이들의 줄보다 길었다. 물론 마을이 커서 그러했겠지만, 그런 것들이 어린 눈엔 힘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요즘 이 지역은, 친환경사업의 일환으로 우리 밀 생산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통기법으로 누룩을 빚는다. 계룡산에 에워싸인 신도안에서 그리로 들어서는 길목엔 ‘동문다리’라는 지명이 있어, 객관적으로도 잘 알려진 마을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 의해 그쪽으로 천도가 이루어졌더라면 동대문이 섰을 명소로 통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근거야 어찌되었든 아들 못 낳는 여인이 떡을 층층이 괴어놓은 듯한 동문다리 바위에 정성을 들이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더 난무하다. 그처럼 신령성을 안고 있는 바위가 마을 서쪽의 수문장역할을 한다. 바위아래서 돌을 던져 신비의 구멍으로 쏙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의 잔재를 별로 인정하지 않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사람의 기복신앙은 우리의 언어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어온 일 아니던가. 국문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주술적 의식에 의해 사람들의 정서가 통용되던 시절이 엄연했으니 말이다. 그런 것을 세월을 이만쯤 비끼고서야 하나하나 헤아려보게 된다.
내 탯자리에서 보면 시루를 닮았다 하여 ‘시루봉’이라 이름 붙은 산이 그 너머에서는 노적가리를 쌓은 형국이라 하여 ‘노적봉’이요, ‘노적산’이다. 이번에 확인한 바, 실제로 투덕투덕 산이 살져있다. 보는 눈이 풍요롭다.
한참 지형구경에 빠져있는데 장화를 신은 J가 작업복에 흙을 잔뜩 묻히고 나타났다. 이곳저곳 마을일을 살피다가 허겁지겁 달려온 폼이다. 그날따라 마을을 둘러보러 온 타지인(他地人)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몸이 열이어도 모자라겠다는 J가 미덥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아름답게 꾸며진 길을 걷는다. 층층의 연지(蓮池) 저만치로 노송군락지가 들어온다. 마을안쪽―몇 그루 굽은 소나무가 그야말로 긴긴 세월 풍상을 그러안고 우뚝하다. 지나간 옛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들려주는 훈장님 모습이다. 그 아래서 나는 노송의 이야기를 듣는다. 새로이 단장해 놓은 연못과 산책로를 굽어보며 끄덕이는 자애로움이 물씬 풍긴다.
농촌 대부분이 노년층인 이 시대, 장년의 모습으로 고향에 깃들어 전통과 개화를 접목시키고 있는 손자에게 혹은 후학에게 ‘얘야, 잘하고 있구나’ 하는 선인들의 격려가 덤으로 얹히는 듯하다. 바꿔 말하면 산천초목이 사람 사는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결국 자연과 사람은 하나다.
봄날 하루 친구들의 고향마을을 산보이던 나는, 같은 시대 산 너머마을에서 등을 기대고 살아온 정으로 헌시 몇 소절 남기고 돌아선다.
노적산 아래 옹기종기
물길 따라 칠십 호
푸른 솔 굽어보는 큰 마당가
수령 깊은 느티나무 한 그루
기상의 품 너~울 너~울
상시동 중시동 하시동 하늘가에
세월막이 그물 치는데
개구쟁이 놀이 흥겨워라
추임새 넣으며 알곡 털던 울 아버지
어~헤라~ 동동 물 긷던 울 어머니
움푹한 주름살 떠받치고
성성한 백발 빗질하다가
서낭당 지나 저 편 동문다리
웅숭깊은 아들바위 닮아 걸음 총총…
- 詩 ‘내 고향 상시동’ 전문
『창작수필』 2010/ 수필집 <나무속의 나무> 게재
장날
김선화
먼 길 장 서는 날, 돈이 될 푸성귀들이 토방에서 밤을 샜다. 하루나 한단 30원, 무 한 개 5원, 참외 한 개 20원, 도라지, 감….
울퉁불퉁한 보퉁이들이 푹 꺼지면, 그것들은 이내 우리들의 꿈이 되어 돌아왔다.
공책, 크레파스, 육성회비….
어머니가 이고 나가면 조금 멀리 가고, 아버지가 지고 나가면 집에서도 바라다 보이는 저만치 둥구나무 아래 멈추곤 했다. 미리 마중 나온 장사꾼들에게 통째로 넘기고는, 빈 지게로 터덜터덜 돌아와 어머니의 잔소리세례를 받는 아버지. 집에서 멀어져 장 가까이로 갈수록 물건 값이 오르는 이치를 아버지는 알아, 지극히 당연한 바가지를 긁히고 또 긁혔다.
그러면서도 열에 아홉 번은 그 둥구나무기점을 넘지 못하고, 맘씨 좋게 훌훌 짐을 부렸다. 하루나 한 단 20원, 무 한 개 3원, 참외 한 개 10원으로 값이 매겨져도 아버지는 그런 쩨쩨한 것에는 연연해하지 않았다. 사람의 사주팔자를 헤아리고, 우주의 기운을 살펴 택일을 하고, 산세나 땅의 혈맥을 짚어 망자를 흙으로 돌려보내는 일에 더 신이 나 있던 양반.
덕분에 우리 형제들은 늘 배가 고팠다.
*2005年 3月 쓰다./ 5매수필집 <피사체 너머에는>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