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寫實主義)<realism>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태도. 추상예술·고전주의·낭만주의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미술·문학에서 이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A.콩트가 주창한 실증주의의 영향과 함께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와 환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세기 중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예술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중세 유럽에서도 낭만적·공상적 소설과 함께 사실적이며 풍자적인 우화시(寓話詩)나 《여우 이야기》와 같은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예술유파로서 확실하게 사실주의가 나타난 것은 19세기이며, 먼저 회화부문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G.쿠르베가 당시의 아카데미즘 화풍에 반항하여, 돌 깨는 작업이나, 목욕하는 여인 등 지극히 현실적인 그림을 사생(寫生)하였으며, 특히 유명한 《오르낭의 매장(埋葬)》(1850)과 같은 작품으로 사실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제자에게 “천사를 본 일이 있는가. 그대 아버지를 보고 그려라” 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쿠르베의 친구인 샹플뢰리가 문학의 영역에서 사실주의를 주장한 것이 프랑스 문학사에서 사실주의 투쟁의 시초라고 한다. 사실주의는 특히 19세기 후반에 활발하였고 과학존중 사상과 실증주의는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다. 또 이 무렵에 유럽의 지도권을 쥐고 있던 중산계급층의 상식이나 실증정신이 이를 뒷받침한 것도 사실이다. 문학에서는 소설, 특히 사회를 잘 관찰하고 쓴 사실파 소설이 발달하였다.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은 모두 이러한 선상에 놓고 볼 수 있으며, 《보바리 부인》 《가정교육》과 같은 소설이 사실주의의 교과서처럼 생각되던 시기였다. 다만 플로베르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어 단순한 사실주의 작가로 볼 수만은 없다. 시민사회가 일찍 발달한 영국에서는 사실주의 문학의 발달도 빨라, 18세기부터 이런 유형의 작품이 많이 나왔으며, 그후 C.디킨스와 G.엘리엇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 러시아 근대문학에도 사실주의가 크게 영향을 주었는데, 고골리·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특이한 러시아적 사실주의를 탄생시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를 단순히 낭만주의의 반작용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반항하여 고전주의의 추상성·보편성에 대해서, 구상성(具象性)을 강조하고, 특수한 사상(事象)에의 관심을 높였기 때문에 이미 사실주의적 특색을 그 작품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방색(地方色)’ 등도 낭만주의의 발상이었으며, 사실주의 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역사성(歷史性)’의 발달도 낭만주의가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그 발전을 촉진한 것도 낭만주의이다. 19세기 소설의 대부분이 ‘역사적’이며 연대기적(年代記的) 의미를 지니고 발달한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유럽의 사실주의는 문학적으로는 E.졸라 등의 자연주의 유파(流派)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주의의 너무도 편향된 작풍을 자연주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사실파나 자연주의의 원리가 되어 있던 과학만능주의의 지나친 처사에 대해 반작용이 일어났다. ‘사실(寫實)’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문제에서 전세기(前世紀)에 대해 대립하고 있으며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문학에서도 상당히 변화하고 있다. 19세기에는 항상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조되었으며 물상(物象)을 그릴 때에도 ‘누가 보고 있는가’, 즉 시점(視點)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에는 소설뿐만 아니라 르포르타주까지도 그것을 보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시점이나 의식(意識)이 중요시된다. 물론 20세기에 와서도 《티보가(家)의 사람들》과 같이 19세기적인 사실적 수법의 작품이 있으며, 순수한 사실주의라고 할 수는 없으나 A.말로, T.만 등과 같이 시대적 의미나 내용을 지닌 문학작품, 즉 사실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포함한 작품을 쓴 사람들도 있다.
【한국의 사실주의】 풍자적·사실적 성격을 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 등 고대 소설에서도 연원을 찾을 수는 있으나,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광수(李光洙)·최남선(崔南善)의 계몽문학에 이어 일본을 거친 사실주의·자연주의 사상이 유입된 이후부터이다. 특히 1919년의 3·1운동으로 실의와 좌절에 빠진 시대상황은 사실주의 문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같은 해 창간된 잡지 《창조(創造)》에는 김동인(金東仁)의 《약한 자의 슬픔》, 전영택(田榮澤)의 《천치? 백치?》가 게재되어 처음으로 사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또한 염상섭(廉想涉)·현진건(玄鎭健)의 작품은 자연주의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모두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작품도 사실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5년 이후의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특징지어지며, 30년대에는 김유정(金裕貞)의 토착적 사실주의와 이상(李箱)의 심리적 리얼리즘이 대두하였다.
실존주의 (實存主義)<existentialism>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실존주의 문학(實存主義文學)
1940~50년대에 프랑스에 전개된, 실존주의 사상이 짙게 반영된 문학. 이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명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협의로 사용하느냐 혹은 광의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유동적이다. 넓은 견지에 설 때 우리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의심, 삶에 대한 근원적 반성, 새로운 생존의 길의 모색 등을 보이는 모든 문학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현대문학에 이르는 동안에 나타난 수많은 문학사상과 작품에 대해서 ‘실존주의적’ 또는 적어도 ‘실존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근래에 이런 문학적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20여 년 간이었다. 러시아 혁명(1918), 세계적 경제위기(29), 나치즘의 지배적 세력(33 이후), 에스파냐내란(36), 제2차 세계대전(40), 그리고 그 후의 미·소간의 냉전, 엄청난 과학의 힘, 약소국가들의 대두 등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이성과 자유의 승리를 믿어온 낙관주의적이며 서유럽 중심적인 사상에 치명상을 입히고 기존의 가치체계의 전적인 붕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40년을 전후한 프랑스의 많은 작가는 사회와 생존의 현실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바탕 위에서 삶의 의미를 괴롭게 추구하려는 공통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말로, 생텍쥐페리, 베르나노스는 이미 전전(戰前)부터 역량을 보인 작가들 중의 대표적 존재이며, 전후에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그리고 카뮈에 의해서 이 경향이 한결 심화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47년경부터 저널리즘이 크게 유행시킨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이들의 활동을 지칭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전전(戰前)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파스칼, 심지어는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을 그 사상적 선조(先祖)로 보려고 하였다. 이상이 넓은 의미에서 사용될 수 있는 실존주의 문학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을 협의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누구보다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표현을 가리킨다. 사실에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철학과 창작활동을 긴밀히 연결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특히 《존재(存在)와 무(無)》(43)에서 인간 존재의 우연성, 의식과 대상의 관계, 인간이 타고난 괴로운 자유, 타인과 나의 존재론적 관계, 일정한 상황 속에서의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서 생성(生成)되어 나가야 할 우리의 운명 등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후설의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이 철학적 성찰은 순리적(純理的)이며 사변적(思辨的)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양태와 행위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실존적 모습에 대해서 뜻깊은 조명을 던진다는 커다란 이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문학과 상통할 수 있는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와 무》를 비롯한 그의 철학적 저작에 표명된 인간관의 형상화(形象化)이며, 문학적 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토(嘔吐)》(38)로부터 《문학이란 무엇인가》(47)를 거쳐 《알토나의 유폐자(幽閉者)》(60)에 이르는 수많은 소설과 희곡과 평론은 개인적 차원에서, 또 후기에는 사회적 차원에서 삶의 상황을 응시하고 분석하고 초월하려는 그의 매우 지적(知的)인 태도의 표현들이다. 이렇듯 실존철학을 밑에 깔고 있는 사르트르의 문학이 그 시대의 가장 큰 주목의 대상이 되자 보부아르와 카뮈도 역시 그와 동류의 작가로 취급되었다. 물론 그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보부아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르트르와 흡사한 사상을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르트르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감성(感性)과 여성의 존재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카뮈는 《이방인(異邦人)》(42)과 《시시포스의 신화》(42)에서 이른바 부조리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구토》의 사르트르와 동질적인 작가로 속단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두 작가의 사상적·감성적 출발점이 매우 다르고 그들의 도달점은 오히려 대극적(對極的)이라는 것이 더욱 더 밝혀지고 있다. 51년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나오자 일어났던 두 사람의 극적(劇的)인 충돌은 그들을 갈라놓고 있는 거리가 지극히 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카뮈 자신은 그 후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사적 견지에서 볼 때 제 나름대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와 새로운 윤리의 모색을 시도한 이들의 문학을 ‘실존주의 문학’이라고 한데 묶어 부르는 것이 전적으로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이 명칭 속에 그리스도교적 입장에 선 마르셀의 작품이나 무니에의 평론이 의당 포함되며, 프랑스 이외의 지역의 작가, 가령 콜린 윌슨이나 그레엄 그린 등의 작품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