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중동 문명
1. 페니키아(성경:베니게)(BC3000- BC900경) 명칭: 시리아, 레바논 해안지대의 고대지명으로 그곳에 사는 주민의 명칭이기도 하다. 지역: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접한 지역,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역으로 현재 레바논과 거의 동일하다. 주민: 셈족, 헤브라인과 함께 가나안 계, 후에 혼혈 문명: BC 20세기경, 이집트 표음문자인 22자의 알파벳트를 만들었다. 미술, 공예에 뛰어나고, 금, 은, 보석, 상아, 유리로 만든 공예품과 염색제품을 오리엔트와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지게 하였으며, 목재, 올리브, 포도, 건어물의 수출, 곡식과 농산물이 풍부하였다. 역사: 현재의 레바논 역사와 동일 하여, 레바논 역사와 함께 다루기로 한다. 정치적으로는 통일 된 적이 없으며, 항구도시 중심으로 뭉친 도시연맹의 형태로 해상 무역을 하였고, BC3천년경 이주해 BC 2613년경- BC 2200경 이집트와 교류(상업과 종교)를 시작하여 이집트 고왕국이 무너지고, 아모리인이 페니키아를 침략할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페니키아를 지배한 사람들은 BC 18세기 힉소스인이다. BC 16세기 신왕국시대의 이집트인, BC 14세기 히타이트인, BC 13세기 이집트 신왕국인(세티 1세, BC 1290-79 재위), BC 12세기(람세스 3세, BC 1187∼56 재위)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온 침략자들에게 지배당했다. BC10세기 아시리아가 지배자가 되었고, BC10 세기경 도시국가 티레(두로)가 주도권을 가지고 지중해 서쪽으로 진출하여 북아프리카 연안의 카르타고, 기데스(스페인), 제노바, 시라쿠사, 크레타 등에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였다. BC 538년 키루스가 2세가 통치하던 아케메네스 왕조가 점령하였고,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침입할 때 8개월에 걸쳐 저항했으나 결국 항복하였으며, BC 64년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로 합병되었다. AD 300-634경 기독교를 받아드린 로마 황제들은 이 지역을 보호했으며, AD 6세기 때 시리아에서 박해를 피해 레바논 북부에 정착한 그리스도교도인들이 원주민들을 개종시켜 마론 교회를 세웠다. AD 7세기 이슬람교도가 시리아를 정복한 후 레바논남부에 자리를 잡았으며, 400년 후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드루즈교(20%만 비밀을 아는 고대 그리스정교의 혼합체)로 신앙을 바꾸었으나 해안도시는 수니파가 늘어났다. 11 세기말 십자군이 세운 나라들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 뒤 시리아와 이집트를 지배한 맘루크 왕조에 속하게 되었고, 15-18세기 유럽 중 특히 프랑스의 영향이 증가했으며, 레바논 특색을 가진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발전시켰다. 1516년 맘루크 대신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하였으나 그리스도교가 늘어나면서 마론파와 드루즈파의 갈등이 생겼으며, 1860년 지방을 통치하던 드루즈파가 마론파 기독교들을 학살하였다. 이 학살로 프랑스가 개입하여 오스만 술탄을 압박해 레바논 산에 기독교인들의 산악 자치주를 만들게 했고, 1923년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군정의 통치를 받던 시리아와 레바논을 국제연맹이 정식으로 통치를 프랑스에 위임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났고, 1946년 11. 26 정식으로 독립하여 레바논 정부는 1943년 이루어진 국민협정이라 불린 구두 합의에 따라 운영되었는데 국민협정은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에서 뽑고, 총리는 수니파 회교에서 뽑는다. 국민의회 의장은 시아파 회교에서 뽑는 것이었는데 협정은 20년 동안 관행으로 잘 시행 되어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경제적으로는 중동의 금융과 상업의 주요중심지로 발전하였지만 1958년 범아랍주의에서 힘을 얻었다. 회교인의 빠른 인구증가로 주민도 많아지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미국의 도움으로 진압되었고, 국가와 행정기관에서 기독교의 비중이 너무 크다는 회교의 불만은 그대로 남았다. 1948-49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수십만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남부 난민촌에 정착했고, 1970년 요르단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본부는 레바논으로 옮겨 군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5-76년 PLO가 이스라엘을 여러 번 습격하자 기독교가 우세한 레바논정부는 국내 PLO의 군사 활동을 억제하려고 하였는데 이슬람교도는 PLO를 지지하며, 팔레스타인이 연합해 거의 매일 전투를 벌어 졌고, 기독교가 밀렸다. 기독교가 밀리자 시리아는 이스라엘 개입을 막기 위해 약 2만의 군대를 보냈으며, 1976-82년 시리아 군대와 다국적 국제연합군이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이에서 정전유지에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내의 팔레스타인 군대를 몰아내려 레바논으로 진격했으나 1985년 레바논 종교집단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철수했고, 1989년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여러 곳이 파괴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이프에서 마론파 그리스도교 대통령, 수니파 이슬람교도 총리, 시아파 이슬람교도 국민의회 의장이 모여 합의로 총리와 국민회의 의장의 권리가 확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내전의 불씨는 남아 다국적 국제연합군이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시돈(Sidon, 사이다): 레바논 지중해의 고대 항구도시로 지금은 남부레바논의 행정, 어업, 교역, 및 주변 농촌시장의 중심지이며, 또 사우디부터 1,720㎞의 트랜스 아라비아 송유관의 종점으로 원유저장소 역할을 하고 있다. 페니키아의 가장 고대도시 중에 하나로, BC 3000년대에 건립되어 그 후 1,000년 동안 번영했고, 수많은 지배자가 바뀌었으며, 이 도시는 자주색 염료와 유리제품으로 유명했다. 십자군시대에 지배자가 여러 차례 바뀌면서 파괴되었으나 다시 재건되었고, 오스만투르크 밑에서 1517년 이후 거의 400년 동안 번창했으며, 특히 17세기 준(準) 독립국인 드루즈의 수장 파흐르 앗 딘 2세의 지배 때 가장 번영했다. 프랑스는 다마스쿠스의 외항으로 발전시켰으나 1791년 오스만투르크의 레바논 총독 아흐마드 알 자자르가 프랑스 상인들을 성 밖으로 쫓아내어 무역이 크게 쇠퇴했다. 183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으며, 현재는 두로와 함께 레바논 항구로 발전되었다. <페니키아 고대도시 시돈의 십자군 해성 (海城, Castle of Sea)> ![](https://t1.daumcdn.net/cfile/cafe/15079D204C887B1F29) 두로(Tyre, 티레, 수르): 레바논 남부 해안의 항구도시로 BC 2000년경부터 로마시대까지 페니키아의 주요 항구도시로
시돈의 식민지로 세워진 듯하며, BC 14세기 이집트 기록에는 속국으로 나온다. 섬(인조)과 육지에 걸쳐 있고, 궁전, 바실리카 등 주요시설은 섬에 있고 아고라(시장)와 대규모 전차경기장 등은 육지에 건설하였으며, 전차경기장 관중석 아래는 상점들로 형성된 시장이 있었던 복합건물이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이집트에서 독립한 후 모든 지중해지역과 교역관계를 맺어 시돈을 누르고 교역중심지로 부상했으며, BC 9세기에 이곳 개척자들은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 식민지시를 세워 로마와 경쟁상대가 되었다. BC 10, 9세기에 상인과두제로 권력을 제한받던 왕들이 지배하면서 페니키아 도시 중에 가장 번영을 누렸던 것 같으며, BC 8, 7세기는 아시리아가 지배했고, BC 585-573년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오랜 포위공격을 받았으나 잘 이겨냈으며, BC 538-332년 페르시아지배에서 페니키아의 패권도시라는 지위를 잃었으나 계속 번영을 누렸다. BC 332년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7개월 동안 포위공격이 실패하였다. 부유포대(浮遊砲臺)로 둑길을 건설하여 섬에 접근 한 끝에 티레를 점령했고, 이 때 건설한 둑길은 무너지지 않고, 섬을 반도로 만들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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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화풀이로 1만 명의 주민이 처형하고, 3만 명이 노예로 판 것이 유명한 사건이다. 그 후 그리스 문화에 속한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이집트), BC 200년에는 셀레우코스왕국, BC 68년 로마의 지배하였으며, 티레는 견직물과 뼈고둥류에서 추출한 자줏빛 염료로 유명했다. AD 2세기에 큰 규모의 그리스도교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기독교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이곳에 묻혔고, 638-1124년 이슬람지배 시대에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로서 12, 13세기에는 십자군 국가로서 번창했다. 제3차 십자군원정 때 강에 빠져 죽은 신성 로마제국황제 붉은 수염(바르바로사) 왕 프리드리히 1세가 1190년 이곳 성당에 묻혔으며, 1291년 이슬람교도 맘루크인들에게 점령되어 파괴된 후에는 예전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반도 남쪽에서 퇴적물로 덮인 항구가 프랑스 베이루트고고학연구소의 탐사로 발굴되었으나 페니키아 시대 유물의 대부분은 현재 매장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1994년 인구는 약 8만 명이다. 레바논에서 유일하게 년 중 물이 마르지 않는 강인 리타니 강은 알비카 계곡 대부분을 관류하여 티레 (현재의 수르) 부근에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간다. <두로의 칼리굴라 개선문>
베니게(행 11:19) 이들이 레바논 해안지역에 만든 2개의 큰 도시가 두로(현 수르)와 시돈(현 사이다)가 있다. 두로: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한 지역으로 아셀지파에게 분배한 땅(수19:29)이며, BC 10세기 전 히람왕이 다윗궁과 솔로몬성전 건축 시에 나무와 석재, 그리고 금속기술자를 보내기도 했다.(삼하5:11) 바울이 7일간 있을 때에 필립 집사 딸 4명이 예루살렘에 가면은 체포된다고 만류하였다.(행21:2-7) 아구스도로부터 헤롯이 하사받아 레바논남부(두로, 시돈) 및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 시리아를 포함하여 헤롯가문이 다스리고 있었고, 예수님이 이곳 수로보니게의 여인 딸이 귀신들린 것을 고쳐주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였는데(막7:26), '수로(수르)보니게'는 베니게(카르타고)와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시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함의 자손이 시돈을 건설하였고, 성전 건축 시 벌목공을 고용 하였으며(왕상5:6), 시돈 왕 히람의 딸 이세벨이 아합왕에게 시집올 때 바알 신을 가지고와 하나님의 진노가 아합 왕에게 내렸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징벌하였다.(왕상16:31) 헤로데(헤롯) 1세가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고, 예수님이 이곳에 전도 여행을 하였다.(막 7:31) [이후의 역사] 마-비쟌틴 제국-사라센제국-십자군-맘루크-오스만 투르크-영국-프랑스-[레바논]
2. 아시리아(성경: 앗수르)(BC3000- BC612) 명칭: 수호신'앗수르(Assur)'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지역: 이락크북부, 티그리스강과 자브강의 합류지점의 삼각지대으로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 이다. 주민: 셈족, 아시리아인 역사: 원주민은 셈족(族) 계통이 아닌 스바르투인(人)이라고 하며, 아시리아의 용감한 왕들이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점령하여 최초의 세계제국 건설하였다. 광대한 영토, 잘 훈련된 강력한 군대, 조직화된 관료, 완비된 역전제도에 의해 통치했으며, 그들의 기병, 전차는 공포의 대상이고, 점령지의 무거운 과세, 잔인한 행동, 약탈 등 가장 악질적인 민족으로 점령지역의 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앗수르 정책은 정복한 민족을 다른 나라에 보내 혼혈시켜 그들의 민족정신을 파괴하여 복종시켯는데 북 이스라엘이 이 정책으로 끌러가게 된다. [아시리아 연대기는 차이가 있어 이곳에서는 할레이저서 '성서핸드북' 것을 사용했으며, 왕의 연대는 재위 기간이다.] BC 3000년경부터 셈계(系)의 아카드인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세력을 가지게 되었고, 언어와 풍습 그리고 신앙 등이 셈화(化)하였으며, BC25 세기경 도시국가 성립하였고, 수메르문명의 전진기지로 사용하였다. 이 수메르인이 끊임없는 침입과 악조건이 강하고 용감한 아시리아 인이 형성되었으며, 바빌로니아에서는 산출되지 않는 보석, 목재, 석재를 교역하여 군사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BC 1300경 샬마네세르 1세(Shalmaneser)는 바빌로니아 전 지역을 점령하여 통치하였다.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 (Tiglath-pileser: 재위BC 1115?-BC 1077?) 전차대(戰車隊)도 창설한 그는 히타이트의 쇠퇴의 틈을 타, 수도 아수르의 전승기념비 기둥에 42개국을 평정하였다고 기록할 만큼 위대한 건설 자이었다. 페르시아만, 지중해연안, 소아시아 지역지배 하는 강대국을 만들었으나 그 다음 또 쇠퇴하였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Assur-nasipal: BC 885-BC 860)는 호전적이고 잔인했으며, 고대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나라로 만들었고, 샬마네세르(샤르마네세르) 3세(BC860-BC 825)는 이스라엘과 처음으로 싸운 아시리아 왕이다. 산시 아닷(BC825-BC808), 아닷 니라리(BC808-BC783), 샬마네세르 4세(BC783-BC771), 앗수르 루시(BC753- BC747) 때에는 쇠퇴했으며,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BC 746-BC 727)의 개인적인 이름 즉 별칭은 불(Pul)이다. 그는 바빌로니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팔레스타인의 가자를 점령하여, 아시리아 제국 황금시대의 기초를 다졌으며, 샬마네세르(샬마나사르) 5세(BC 727-BC 722)는 사마리아를 포위 중 사망하여 왕위가 사르곤왕조에게 넘어갔다. 사르곤 2세(BC722-705)는 샬마네세르의 죽음에 편승하여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여 히브리어로 '정통 왕'이라는 뜻의 '사르곤왕조'를 열었으며, 이는 아시리아의 마지막왕조이다. 그는 BC 2350년경 셈계 아카드인 사르곤1세(재위 BC 2350-BC 2294)가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한 사르곤왕조(또는 아카드왕조)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사르곤 2세라하였을 것이다. 정책은 선왕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사마리아를 정복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백성을 아시리아로 이주시켰고, BC 720년에 다마스쿠스를 격파하였으며, 바빌론에서 엘람(Elam)을 분리시켰다. 센나케리브(Sennacherib: BC 705-BC 681)의 별칭은 '산헤립'으로 가장 유명한 왕으로 그는 사르곤의 아들로 왕의 치세에는 끊임없는 반란으로 일생을 반란 진압을 위한 원정으로 일괄하였다. 그는 니네베를 아시리아의 새 수도로 삼아 궁전과 수도(水道)를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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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르하돈(에살 핫돈 Esar-haddon: BC 680-BC 669)는 센나케리브가 형들의 음모로 암살된 뒤 형제간 왕위 다툼의 내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고, BC 671년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함락시켰다. 누비아 국경까지 정복하여 가장 위대한 왕 중에 하나였고, BC 669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재원정 도중에 죽었다. 아슈르바니팔(앗술 바니팔 Ashur-banipal: BC 668-BC 626) 그가 살던 시대의 아시리아는 그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형과 골육 전쟁을 일으켜 서아시아 전토를 동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어 국력은 현저하게 피폐되었다. 영토를 엘람에서 이집트까지 확장시켰으나 그의 시대는 몰락기였고, 왕은 잔인하였으나, 예술, 특히 문학을 애호하고, 니네베에 대도서관을 지어 고문서를 수장(收藏)하였고, 이 자리에서 발굴된 2만여 점의 토판이 있다. 이 토판에는 신화, 문화, 역사, 의학 등에 걸쳐 있고, 지금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아시리아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BC 612년 아슈르바니팔 왕이 죽은 뒤의 내분이 생겼다. 이를 틈탄 바빌로니아에서 독립한 나보폴라사르와 메디아인의 동맹군의 공격을 받아 사르다나팔로스(Sardanapalos) 시대에 니네베의 함락과 더불어 멸망하였다. [이후의 역사] 바빌로니아-페르시아-알렉산더 제국-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비잔틴 제국-이스람제국- 아바스왕조- 몽골의 일 한국-오스만투르크-영국-[이락크] <'니느웨'의 궁전과 티그리스 강>
앗수르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였고, 아시리아 연대기에 나오는 히브리 왕은 10명으로 오므리, 아합, 예후, 므나헴,
베가, 호세아, 웃시아,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이다. [이스라엘과 관계되는 왕들] 살만에셀 3세(BC860-825)는 샤르마네세르 3세로 그의 검은 비석에 '나는 이스라엘 아합 왕의 전차 2.000대와 군인 10.000명을 무찔렸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오무리의 아들(후계자), 예후의 조공인 금, 은, 금주전자, 금잔, 주석, 왕홀(王笏), 창을 나는 받았다'를 기록했다.(성경에 없음)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6-727)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로 별칭이 '불'이라고 부르는 왕이며, 북쪽 이스라엘을 포로로 하였으며, BC734년 이스라엘의 베가왕 때로 이것을 제1 갈릴리 포로라 한다.(이사야 7장, 왕하15 :29,) 디글랏 빌레셀 비문에 '오므리 땅(이스라엘) 사람들을 재산과 함께 앗수르에 끌고 왔다'라고 기록했으며, 그는 또 '그들의 왕 베가는 그들이 전복시켰다. 나는 호세아를 세워주었다. 그는 나에게 금 10달란트와 은 1.000달란트를 바쳤다'라고 기록하였다. 살만에셀 5세(BC 727-722)는 샬마네세르 4세로 사마리아를 포위 만하여 점령하지 못하고 죽었다. 사르곤 2세의 비문에 '앗수르왕...사마리아에 가서 3년을 에워쌌더니...드디어 사마리아를 취하고 사람을 잡아 앗수르에 이르러...바벨론으로부터 사람을 보내어 사마리아의 모든 성읍에 두니라'라고 기록했다. (왕하 17:5-6, 24) 사르곤 2세(BC722-705)는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고, BC721년 이스라엘을 포로로 했다. 이는 이스라엘의왕 호세아 때로 제2 갈릴리 포로라 한다.(왕하17:24) 사르곤 2세의 비문에 '나는 첫 해에 사마리아를 정복하고, 포로 27.290명을 잡아왔다. 조공을 바치지 않는 다른 나라 사람을 사마리아에 살게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이 사건으로 사마리아는 유대족속에서 멸시 당하고, 성전에 가지도 못하는 이방인 신세가 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요4: 7-29) 이 때에 활동한 선지자는 호세아, 이사야, 미가 이다. 산헤립(BC705-681): 가장 유명한 왕으로 예루살렘에서 천사에게 패하였다.(대하 32장) 에사르하돈(에살 핫돈, BC 681-BC 668) 비문에 '나는 서쪽 나라 왕 22명에게 궁전에 사용할 건축자재를 바치게 했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유대 왕 므낫세'의 이름이 있다. 아슈르바니팔(BC 668-626)은 남(유대) 왕 므낫세(BC697-BC642)를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가 BC 665년에 다시 돌려 보냈다.(대하 33 :11)
니느웨(Nineveh:니네베) 요나는 적국(敵國)인 니느웨(니네베)로 가서 그 주민들에게 경고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으로 도피하다가 항해중에 큰 풍랑을 만나 선원들이 제비뽑기를 제안하였다. 요나가 제비에 뽑혀 바닷속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자기의 사명을 완수한 구약성경의 인물이다. 현 이라크의 쿠윤지크 및 네비 유누스 부근으로 도시 모슬이 있으며, 성경에서는 '니느웨'이고, 아시리아의 수도, 티그리스와 자브강 만나는 삼각지대에 있고, 넓이가 약100만평이다. 궁전이 발견되었으며, 요나의 언덕은 두 번째로 큰 언덕인데, 이름이 '유나'이고, '유나'는 '요나'의 토착어로 이 언덕의 약5만평의 넓이로 높이는 30m이며, 여기에 '요나'의 무덤이 있다. 이곳은 너무 신성시되어 대규모의 발굴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며, 지금도 주민들에 의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앗수르 니느웨 성읍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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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빌로니아(성경: 바벨론)(BC4000- BC536)
명칭: 바빌론은 '신의 문'이 어원이다. 지역: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지명이다. 주민: 원주민은 수메르 인으로 후에 셈족인 아카드(악키드)인 들어와 통일을 하게된다. 역사: 역사는 고대 바빌론 시대와 신 바빌론으로 나누어 진다.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 (BC4000- BC1600경) BC40 세기경 고대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이 통일국가 건설 하였고, BC 2350년경 셈계 아카드인 사르곤1세(재위 BC 2350-BC 2294)가 눈부신 활동을 시작하여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아카드왕조(또는 사르곤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아카드 왕국이 수립되면서 바빌로니아(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북반부를 아카드, 남반부를 수메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도는 아가데였으나 그 소재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BC21 세기경 수메르인 우르나무가 제3왕조 건설하였으며, BC 19 세기경 제1왕조 6대왕 함무라비가 제3왕조 평정하고 엘람서 시리아까지 대 제국건설 하였다. 중앙집권제 확립과 바빌론 성벽 쌓았고, 신전을 재 건립하였으며, 운하건설하여 무역 융성하게 함으로 국력이 충실하게 되었고, 가장 위대한 함무라비(?-BC1750)왕은 법전을 반포(수사서 발견)했으며, 이것을 함무라비법전이라 한다. 함무라비 시대에 대제국의 중심지로 가장 번영하였고, BC16 세기경 히타이트인에게 멸망했으며, 후에 아시리아시대에 완전파괴로 유물이 적고, 마리서 발견된 점토판(토판)이 2만장 이상 발견되어 귀중한 자료이다. (신 바빌로니아 시대) (BC 625-BC 536) BC16 세기경 셈계(系)의 유목민으로 바빌로니아 남부에 정주한 칼데아인은 차차 세력을 신장하여 BC 625년 바빌론의 총독으로 있던 나보폴라살(제위 BC 625- BC 604)은 아시리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독립 하였다. 바빌론을 수도로 하였고, 그 후 메디아왕국과 연합하여 BC 612년 왕자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버지를 섭정하여 메대( 메디아) 왕 캭사레스(각사레스)와 연합하여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아시리아제국을 붕괴시키고, 신바빌로니아(칼데아제국)를 건국하였으며,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재위 BC 604- BC 562)를 느부갓네살 2세라고도 하는데 그는 국내 각지의 신전을 부흥시켰다.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력의 충실을 꾀했으며, 또 수도 바빌론을 정비하여 성벽을 쌓고, 그 주위에 도랑을 파고 성문을 단단히 축했으며, 이때를 바빌론의 부흥시대로 고대 세계의 중심지로서 크게 번영한 국가이지만 단명하였다. 에빌·메로닥(BC561-BC560), 네리그릿살(BC559-BC556), 라바스·마르덕(BC556)는 단명하였고, 나보니도스(BC 555- BC 536)의 아들 벨사살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섭정하는 중에 BC 536년(또는 BC 539년)에 멸망했다. 성경엔 느부갓네살 아들 벨사살로 되어 있으나 세계사 연대에는 3왕이 단명하여 6년을 넘기지 못하고, 독신자(篤信者) 왕 나보니도스 때 페르시아제국의 키루스(고레스) 왕에게 멸망하여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 하였다.(단 5장) 신 바빌로나아 제국의 [이후의 역사] 페르시아-알렉산더 제국-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비잔틴 제국-이스람제국- 아바스왕조- 몽골의 일 한국-오스만투르크-영국-[이락크]
바빌론 도시 바빌로니아의 수도이고,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에 있엇던 메소포타미아 고대도시로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고, 제1왕조 6대 함무라비가 수도로 삼을 때 가장번성했으며 아시리아시대는 남부 요충지로, 신바빌로니아시대는 세계 중심지였다. 페르샤 점령 후 BC 539 년 키루스(성경: 고레스)2세 때 시민의 반란으로 크게 파괴 되었고, BC 4세기 알렉산더 3세가 제국의 수도로 정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쇠퇴 하였다. 에사길라의 신전에 있는 '지구라트'는 구약시대의 바벨탑의 원형으로 인정되고 있고, 다니엘이 살던 궁전을 살펴보면 성 둘레는 96Km이고, 성벽 높이는 100m이며, 두께는 25m이고, 성벽사이에 400m의 수로가 있었다. 250개의 초소와 100개의 놋쇠 문이 있으며, 유프라테스강과 연결된 문이 25개이고, 강 밑으로 높이 4m, 폭이 5m, 지하 터널이 있으며, 폭이 10m, 길이가 800m의 다리가 있다. 모르닥(벨)과 아스달(여신: 이슈타르- 아스타르네) 신전에는 금으로 만든 황금 상의 무게는 2.25톤으로, 높이는 6m이고, 느부갓네살이 사는 궁전과 평지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 규모는 대단하여 상상하기가 힘든며, 바빌론에 있었던 *공중정원은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이다. <바벨론 도시의 모형도 피라미드 모형이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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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세미라미스 공중 정원-空中庭園) BC6 세기경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만든정원으로 멀리서 보면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메디아(메대)
왕국에서 시집온 '아미티스'는 삭막한 바벨론을 보면서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하였다. 왕이 왕비를 위하여 만들었다고하며, 바닥은 가로 400(m) 세로 400(m)에 높이 15m이고 층수가 7층으로 계단식 발코니( 테라스) 정원 밑에는 서늘한 방을 만들어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전체 모양은 피라미드 형이다. 층마다 꽃, 덩굴식물, 과일나무를 심어 무척 아름답게 꾸며 놓았고, 물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펌프로 마지 막 층의 옥상 물탱크까지 올려서 쓰고, 따로 필요 한곳은 물뿌리개로 주었는데 멀리서 보면 동산 같았다고 한다. 또 공중 정원의 폐허에서 기름과 곡식을 정기적으로 분배받은 이름이 나열된 토판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에 '유대의 왕, 여호야긴'의 이름이 있었다. 다른 이야기로 러시아 역사학자가 네부카드네자르에 대한 연구서적을 발간했는데 러시아는 황제를 차르(tzar, czar)라고 하며,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czar)는 러시아 말로 '황제가 없다'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그 학자는 반역죄에 해당되어 유배당하고 서적은 몰수되었다고 한다. <공중정원과 바벨탑의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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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신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역사는 구약성서 많이 등장하는데 그 중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느부갓네살과 고레스이며,
느부갓네살(BC604- BC562)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로 다니엘서와 예레미아서에서 등장한다. BC 605년 부왕 나보폴라사르의 생전에 네코(성경: 느고) 2세가 거느린 이집트군을 카르케미시(성경:갈그미스) 전투에서 격파하였고으며(렘45 :2), BC605 년 남 유다 왕 여호여 김 시대이다. BC 597년 유대 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으로 끌고가 완전정복 되었고, 이 것을 '제 1회 바벨론 유수'라고 하며, 이 때 선지자 에스겔과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같이 끌러갔다. BC581년 유대 마지막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 간 것을 '제 2회 바벨론 유수'이며, 그 전에 예레미야와 많은 유대인은 애굽으로 도망갔고(렘 43장), 제 1, 2 회 때 유대왕국 상류계급 사람들과 주민이 신(新)바빌로니아로 포로가 되어간 것 합쳐 '바벨론 유수'라고 하며, BC538년 귀환까지의 약 반세기 기간을 '바벨론 유수기'라고 한다. 이 때 끌려간 유대인을 69년 후 바사의 고레스왕이 귀환 시켰고, 에빌·메로닥(BC561-BC560)은 성경의 에윌므로닥으로 여호야긴을 석방하여 왕과 함께 식사를 하게 하였으며, 37년 동안 속국이 된 다른 왕보다 우대했다.(왕하 25 : 27-30) ※ 구약성서에서 갈대아(칼데아)는 바벨론(바빌로니아)과 같은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4. 메디아 왕국(BC900경- BC331) 이란 북서부의 있는 우르미아 호수 주위에 이란계의 파인 마다 또는 마타이족과 또 다른 지파인 아케메네스파가 있었고, 마타이족이 먼저 이동하여 세운 왕국이 메디아 왕국이다. 명칭: 메디아(성경: 메대)는 노아 손자 즉 야벳의 셋째 아들 '마대'의 자손 땅 이름에서 유래 하였고(창10:2), 앗수르의 유대인 포로는 이곳으로 보내졌다.(왕하17:6) 지역: 이란 전 지역 이다. 주민: 이란계의 파인 마다 또는 마타이족(메디아족)이다. 역사: 아시리아 멸망 후 BC 1000년 전반 이란 고원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이란계 메디아족이 세운 왕국으로 수도는 엑바타나(지금의 하마단)이였으며, 그 기원과 민족은 분명하지 않지만 이란민족의 파인 마다 또는 마타이족으로 우르미아 호수 남쪽에서 말을 사육한 유목민이다. 데이오케스 때에 엑바타나를 중심으로 강성해져 왕국으로 건립되었으나 그는 한 지방의 지배자에 불과하였으며 아들 프라오르테스 때는 이란의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프라오르테스 (Phraortes: 재위 BC 675-BC 653?) 참다운 통일자로 여기며, 키악사레스의 아버지이다. 키악사레스(캭사레스, 각사레스)왕(재위 BC 624-585)은 BC 612년 신 바빌로니아와 동맹하여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아시리아제국을 붕괴시켰다. 그는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여 리디아 왕국과 싸워 소아시아 동반부를 얻었고, 서쪽은 카파도키아(성경 바도기아)에서 동쪽은 인더스강 근방까지에 걸친 대국을 건설하였다. 아스티아게스(재위 BC 585- 550)는 BC 54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성경:고레스) 2세에 살해됨으로써 메디아 왕국은 멸망하였으며, 이 종족이 현재의 쿠르드 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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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페르시아 제국(성경: 바사)(BC700경- BC331)
명칭: '파르시'라는 작은 도시가 어원이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 이다. 지역: 이란, 메디아(성경: 메대- 앗수르 때의 유대인 포로를 이곳에서 귀환했다.) 주민: 이란의 한 지파인 아케메네스파 이다. 역사: BC 815년경 이란 민족의 한 지파가 우르미아호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넘어 남하하여, 수사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에 정착하였으며, 메디아왕국 속국으로 남쪽지역에 있었다. BC 700년경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아케메네스(아케메스)가 수장이 되어 왕조의 기초가 되었고, 키루스 2세(대제, 재위 BC 559-529)는 아케메네스의 현손으로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엑바타나, 현재 하마단)을 점령했다. 소아시아와 그리스계의 도시국가들을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을 시작 하였고, BC538년 대왕 키루스( 영어:카롤레스) 2세는 바빌로니아 수도 바빌론 무혈 점령 하였으며, 유대인 해방시켜 귀국하게 했다. 페르시아 정책은 바빌로니아와 반대되는 것으로 주민을 귀향시키고, 그들의 관습, 풍습, 종교를 간섭하지 않았으며, 인간적이었고, 캄비세스 2세(감비세스, 재위 BC 530-BC 522)는 키루스 2세의 아들이다. 그는 부친이 이룩하지 못한 이집트를 BC 525년 원정하여 점령하였으나 그가 이전에 살해한 아우 바르디아를 가장한 승려(僧侶)인 가우마타가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다. 그는 왕위를 빼앗긴 것을 실의한 나머지 시리아에서 자살하였고, 가우마타는 왕년의 메디아의 세력만회를 꾀하는 7명의 동료와 함께 처형되었으며, 다리우스 1세(대제, 재위 BC 522-BC 486)는 페르시아명으로 '다리야바우시'이다. 캄비세스 2세와 이집트로 원정을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선왕이 죽음으로 귀국하여 가우마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고, 가우마타를 정통적인 계승자라고 오인한 제후들은 다리우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2년간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를 평정한 후 상세한 기록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였고, BC 518년∼ BC 510년 인도의 펀자브 지방을 정벌하였고, BC 492년과 BC 490년(마라톤 전쟁) 두 번의 그리스 원정에 실패했다. 그 후 궁전서 살해 되였으며,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숭상심도 깊었고, 크세르크세스 1세(대제, 재위 BC 486-BC 465)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로 선왕 때부터 일어난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반란을 진압하였다. BC 483년 이후로 그리스원정(제3차 페르시아전쟁) 준비를 하여 BC 480년 봄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그리스군에 패배하자 급거 귀국하였다. 만년에 왕궁에서 호화생활을 누리다가 신하에게 암살당하였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65-BC 425)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으로 서서히 쇠퇴하였다. 다리우스 2세(재위 BC 424- BC 405)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로 시리아, 리디아, 메디아에 내란이 잇달았고, BC 410년 이집트를 잃었으며, 치세는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재위 BC 404-BC 358)는 다리우스 2세의 장자로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여 유프라테스강 서쪽 땅을 잃었고, 소아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국내가 동요하고 궁정 안에서도 암살과 음모가 끊이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이 잇달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자신도 죽었고, 다리우스 3세(재위 BC 336-BC 330)는 최후의 왕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으로 이수스 전투와 BC331년 가우가멜라(알베라) 전투에서 패하여 엑바타나로 도망쳤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추적으로 다시금 박트리아로 쫓겨갔다가 그곳의 총독에게 살해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제국은 멸망하였고, 패권은 아시아에서 서양으로 넘어갔으며, 이 때 가져간 보석이 마차 50대 분량으로 페르시아제국 위에 알렉산더제국이 건설되어 영토는 비슷하다. [페르시아 이후의 역사] 알렉산더 제국(헬레니즘 시대)-파르티아 제국-사산 왕조-부이왕조-사파위 왕조-잔드 왕조- 카자르 왕조-팔라비 왕조- [이란 람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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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툰 '신들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비시툰의 옛 이름은 베히스툰(Behistun)로 부근에 유명한 고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의
비문이 있는데 즉 다리우스 1세는 고대 메디아왕국의 수도 엑바타나와 바빌론을 연결하는 옛 가도 연변의 바위산에 있는 150m의 절벽면에 비문과 부조(浮彫)를 새기게 했다. 비문은 페르시아어, 엘람어, 바빌로니아어(아카드어) 등 3개 국어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다리우스의 계도(系圖), 왕위 찬탈자 가우타마의 살해,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났던 반란의 진압, 아후라마즈다 신(神)에 대한 감사 등이 되어 있고, 1837년 영국의 롤린슨이 발견하여, 고대 페르시아어의 부분을 처음으로 해독했으며, 그후 이것을 기초로 해서 다른 2개 국어의 해독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설형문자(아카드어)의 해독사상 획기적인 업적을 끼친 사료로 로제타석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BC 1200년 무렵 고대 페르시아 종교가이며, 사상가인 조로아스터가 30세에 '아후라 마즈다'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포교하여 생긴 종교로 불을 신성시하여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한다. 사후에 시체를 새가 먹는 조장을 하며, 때로는 들개나 짐승들이 먹는다고 하고, '아후라 마즈다'를 유일신으로 믿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이며, 조로아스터가 가고 3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했다. , 그때 구세주가 나타나 천국, 연옥, 지옥에서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악은 멸한다고 하며, 이 사상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의 일부 등 그 후 종교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알렉산더의 침입으로 세력이 많이 약화됐으나 후에 이 종교 제사장인 사산의 손자가 사산왕조를 창시하였고, 이 왕조는 신정국가로 배화교 이론을 확립하였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을 '마고스'라고 부른다. 이들은 점성술(占星術)이나 마술(魔術)에 정통한 사람들로 마태복음 2장 원문에 '마고이'로 표현한 그들이 '마고스'으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찾아간 '동방박사'들이며, 다니엘도 박수장으로 동방박사와 같은 사람으로 선배라고 할 수 있다. '마고이'는 메디아왕국이 망하였을 때에 엘리트들이 되었다고도 말하는 학자도 있고, 마고스는 고대 페르시아어(語)의 마구시(magush), 중세 페르시아어의 무그(mugh) 또는 마기(magi)로 그리스어의 마고스(magos)에 해당된다. 마술을 영어로 매직(magic)인데 이것은 마술을 ‘마기(magi)'라 일컬었던 사제들이 행했기에 마술(magic)의 어원이다. <다리우스2세와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후라 마즈다'>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도시'가 어원이며, BC518년 다리우스1세가 장대한 도시를 건설을 시작하여 완성은 100년 후에 되었다고 하고, 여름 궁전으로 산을 깍은 후에석조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궁전, 후궁, 보물창고 등을 만든 장대한 궁전이다. BC330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정복 당시에 소실 되였고, 당시 오리엔트 건축미술을 집대성하였으며, 기록보관소에서 점토판 2만장을 통하여 당시 상황이 밝혀졌다. <페르세폴리스>
파라다이스(Paradise) 이야기 역사학자 아리안의 '아나바시스'에 기록된 단어로 키루스(고레스)가 만든 '피사가데 성'이 있고, 그 주위에 '파라데스'가
있다고 하였으며, 페르시아어로 '파라다이오스'의 원형으로 이 말은 '인간이 만든 낙원'이라는 뜻이다. 메대어로는 '파라다이짜'이라고 하며, 그리스 작가 크세노폰이 페르시아 왕후 귀족 공원으로 그리스에 처음 소개하였고, 나중엔 사자(死者)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하게 지내는 서해(西海) 끝의 섬을 설명하는데 쓰이기도 하였다. 에덴동산을 파라다이스으로 번역하였고, 신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가는 곳 또는 지옥에 대비된 천국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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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궁(Shusahan)
에스더서에 나오는 수산궁은 혹은 수사(Susan)라고도 하며, 현재는 '슈슈(Shush)'라 하는데 다리우스 1세가 이 곳에 도읍하여 장대한 궁전을 만들고,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쌓아 크게 번영하였다. 바사의 겨울 궁전으로 아닥사스다 1세의 별장으로도 사용되었고, 선사시대에서 페르시아제국까지 이란 문명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였으며, BC40 세기경 엘람 민족이 거주, 신석기 문화를 이룩하였다. BC30 세기경 엘람문자,10진법을 발명하였고,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BC19 세기경 고대 바벨론 시대으로 함무라비 왕과 법전비(法典碑)가 유명하고, 신 바벨론이 시작 되면서 BC521- 485 다리우스1세가 수도로 정하고 궁전을 건축했다. BC478 에스더가 왕비 되었고, AD4 세기 국왕 탄압에 대항한 그리스도교도인들은 국왕의 코끼리 군대에 짓밟혔으며, AD 13 세기몽고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였다.
바사 이사야의 예언(사 13: 17)이 실현으로 바빌로니아는 망하고, 유대인의 귀환이 이루어진다고 예언되었으며, 바벨론은 반(反) 기독교의 대명사로 쓰인다. [성경과 관계되는 왕들을 살펴보면] 성경의 고레스는 키루스 2세이며, 유대인에게 귀한을 명령하여 이로써 이사야 예언이 실현 되었다. 성경의 아닥사스다는 캄비세스 2세이며, 성전 건축을 중단시켰다.(에스겔 4:7,11,23) 성경의 다리오는 다리우스 1세이며, 예루살렘 성 재건의 방해를 금지할 뿐 아니라 많은 원조를 하였고, 활동한 선지자는 에스겔, 학개, 스가랴가 있다. 성경의 아하수에르왕은 크세르크세스(구셀구세스) 1세이며, 왕비는 에스더이고, 왕비가 된지 5년 후에 왕비의 4촌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로 부터 유대인을 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 부림절이다. 하만의 총리직은 모르드개가 차지 하였고(에스더), 만약에 여기서 유대인이 모두 죽었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시기는 길이 막혔을 것이며, 에스더는 이것을 알지 못하했만 미리 예비하였다. 사지에서 구해낸 에스더 왕비는 지금도 유대교와 기독교도 모두에게 구원의 여인으로 추앙 받으며, 유대인들은 에스더 왕비의 남편 아하수에르 왕을 유대인들의 보호자로 존경을 한다. 성경의 아닥사스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로 유대인에 매우 관대했고,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재건을 허락했으며 (에스라, 느헤미야), 1.000km 이상 떨어진 조국의 오순절에 참가하여 성령강림을 참관하였다.(행2:9) 키루스는 아시리아 정책과 반대로 점령지 문화는 파괴하지 않았고, 원하면 그들의 종교도 지킬 수도 있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였고, 정책에 의해 유대인도 귀향하였으며, 고레스는 귀향하는 그들을 도와주었다. 귀환 도중 모두가 본국으로 돌아 온 것이 아니고 살기 좋은 곳에 정착했는데 그들이 터키나 동 유럽에 퍼진 유대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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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 있는 성경의 유적지] 바벨론에 잡혀간 다니엘 묘소와 바벨론 포로의 후손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묘소와 하박국 선지자 묘소가 있다. (다니엘 묘소) 수사는 바사(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건설한 겨울 궁전으로 하마단에서 남쪽으로 600㎞ 떨어진 곳으로 현재는'슈슈( Shush)'라고 하며, 이곳을 다니엘 무덤이라고 확정한 사람은 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사위라고 한다. 3000㎡에 이르는 넓은 묘역은 AD900년께 이슬람 술탄 시절 조성되었으며, 수사의 가장 큰 이슬람 사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니엘(Daniel) 은 BC 597년 유대인의 귀족으로 소년 시절 니느웨 성읍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학문을 배우며, 토판을 정리하였다고 한다.(단1,2장) 그는 느부갓네살과 친구로 꿈을 해몽해 준 일로 인하여 명예로운 지위에 올랐지만 고관들의 질시로 두 친구와 함께 풀무불 속에 던져졌으나 무사하자, 다시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도 여호와의 가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흔히 ‘믿음의 용사’또는 ‘신의 절대적인 가호’의 상징으로 믿으며,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박수장(마고스의 장)이 됐다고 하며, 수사궁까지 60여년간 박수장으로 활약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다니엘서 8장 2절에 엘람도(道) 수산궁이 있는 을래 강변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메시아에 대한 계시를 받는데 참고로 엘람은 노아의 손자이며, 셈의 아들이다.(창세기 10:22, 역대상 1:17, 에스라 2:31) 가브리엘은 눅 1장 19절 제사장 사가랴에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 준 그 천사로 다니엘 이 후 처음으로 사가랴에 나타났고, 니엘서 9장 1절에는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와 아들 다리오 이름도 보여 기록은 다니엘이 기록하지 않고 후세에 쓰였진 것으로 보인다. <사자굴 속에 있는 다니엘> (에스더와 모르드개 묘소) 바벨론에 잡혀갔다가 풀려나 페르시아왕국으로 넘어온 유대인 가운데 아하수헤르 왕의 왕비로 간택된 에스더 왕비와 4촌 모르드개를 기리는 묘소로 테헤란 동쪽 350㎞ 떨어진 고대 메대(메디아)와 바사의 수도 엑바타나에 있다.
엑바타나는 름궁전이 있고, 현재는 이란의 남부 하마단이라는 도심에 있으며, 묘소는 유대교 회당 형식으로 지어진 전실과 묘실로 나뉘어져 있고, 현재도 유대교 랍비가 관리한다. 지하실에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시신이 담겨 있다는 돌 관이 보존돼 있고, 묘소에 얹혀진 돔은 7백년전 몽골 지배 때 올려졌다고 하며, 묘실로 들어가는 400㎏ 돌문은 2400년 전 모습이라 한다. 에스더를 기리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가장 많이 찾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로 묘소에서 20㎞ 떨어진 알반드산 계곡에는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르 왕과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 대왕을 칭송하는 거대한 암벽에 베히스톤이 있다. (하박국 선지자의 묘소) 묘소는 하마단 남쪽 100㎞ 거리에 있는 사르칸에 있으며, 성소로 잘 가꾸어져 있다고 한다. (동방박사 4인 기념관) 테헤란에서 하마단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카츠빈은 800년만에 페르시아 민족이 이민족을 몰아내고, 사파비왕조를 건설한 곳으로 왕궁 유적 뒤쪽 10분 거리엔 동방박사 4인을 기리는 기념관과 모스크가 있다. 카츠빈 땅에서 별을 따라 서쪽으로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했던 3인과 출발은 같이 했으나 불행한 이웃을 돌보다 끝내 경배하지 못하고 돌아온 나머지 1명을 추모하는 기념관이며, 카츠빈은 무슬림의 주요한 기도장소이다. 여기서 역시 10분쯤 거리엔 예수가 직접 찾아와 제자들을 교육시키고 하나님의 계시를 전했다는 900년 전 지어진 대형 모스크가 있으며, 현재 메인 돔 내부는 예수 당시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한 발굴작업이 진행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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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정보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