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청(옥터) 순례길 B코스를 가다
먼저, 포도청에서 모진고초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13세의 어린나이에 교살된 유대철 베드로의 이야기 로 시작하겠습니다.
신앙을 증거하려면 시뻘건 숯덩이를 삼켜라!
1839 년의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소년 유대철(베드로, 1826-1839년)
구리 대통으로 너덜거리는 허벅지를 떼어냇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호하였다. “어떠한 형벌로 다스린다 해도 천주교
를 믿는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 이번에는 포졸이 시뻘건 숯덩이를 집게로 꺼내 성인의 입에 갖다 대며 말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끝까지 믿는다면 입을 벌려라.” 그러자 소년 유대철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요. 그 숯덩이를 제 입에 넣어보세요. 제 마음이 변할 줄 아세요.”라고 답하였다. 작은 천사의 용기는 흉악한 박해자들의 손길을 뛰어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 어린 천사를 형장으로 끌고 가지 못하고 포도청의 옥에서 교살하고 말았으니, 때는 1839년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이었다. 이때 유대철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3살이었다.
2014년 7월 19일
개포동성당 홍보분과 와 레지오 단원 총11명이 포도청(옥터) 순교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새남터,절두산,서소문 이 처형지라면 이번에 다녀온 포도청터는 순교성인들이 모진 고문과 살과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받고 순교한 고난과 고초를 당한 곳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함을 느낍니다..
오전8시
포도청 순례에 앞서 개포동본당 성모동산에서 오늘 순례를 위해 특별히 본당 김태정 비오신부님의 강복과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시성전 순례의 참의미를 느낄수 있는 순례가 되길 바란다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종로성당(포도청 순례지 성당)
도착한 곳은 종로성당으로 포도청터 관할지에 있으며 2013년 2월 28일자로 염수정 대주교로부터 '포도청순례지 성당' 으로 승인받았으며 좌,우 포도청(옥터)에서 일어났던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적인 사건과 의미를 일깨우고 선조들의 신앙모범을 따르기 위해 성당 내에 성지순례 현양관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103위 성인 중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를 포함한 22위가 포도청에서124위 중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 을묘박해의 3위를 포함한 복자 5위가 장살,교수,옥사,아사 로 순교한 곳 입니다.
현양관에는 안내봉사자의 설명을 자세하게 들을수 있습니다. 현양관 안내를 받으시려면 종로성당 본당 사무실 (02)765-6101 로 전화하셔서 미리 예약하시면 현양회에서 자세한 설명과 함께 포도청 옥터 순교지를 둘려보실수 있습니다.
순교지 현양관 방문은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원할한 관람을 위해서는 10~15명선이 가장 좋을듯 합니다.
▼ 현양관 내부에서 한양도성내 좌,우포도청, 의금부, 순교터를 설명하시는 모습
천주교 신자 색출에 앞장선 포도청
1784 년 겨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6년)의 집에서 있은 첫 세례식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후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해 내는 일은 좌 · 우 포도청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체포된 신자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때로는 매질 아래 목숨을 던지고, 목에 오라를 걸고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일각을 지체하지 말고 천주학쟁이들을 색출하라!” 조정의 추상같은 명이 있을 때마다 좌 · 우 포도대장들은 포교와 포졸들을 닦달하였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포도청의 영역은 박해가 계속될수록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포졸들의 육모 방망이와 홍사(붉은 오랏줄)는 이리저리 쫓기는 신자들을 겨냥하여 춤을 추곤 하였다.
종로성당 포도청(옥터) 순교지 현양관 관람은 '순교지 기도' 바친후 마무리 하였습니다.
순교지 기도문
순교자들의 임금이신 하느님!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느님께서는 신앙 선조들에게 섭리의 손길을 펴시어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영광스러운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도록 돌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나이다.
더 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포도청을 순례하면서 간절히 청하오니 우리의 훌륭한 성인과 순교자들의 모범을 보시고
그분들의 거룩한 신심과 순교 용덕을 본받게 하소서.
또한, 오늘을 살아가는 참 신앙인으로서 순교자들의 영광을 위해 언제나 기도하며,
가족과 이웃과 모든 공동체를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으로 도와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종로성당 업무가 시작되는 9시30분 이전부터 저희 개포동성당 식구들을 위해 미리 나오시어 약30여분동안 열심히 열성적으로 포도청(옥터) 순교지 와 종로통 일대의 천주교적 역사적 의미 그리고 포도청에서 신앙을 증명하시며 순교하신 성인과 124위 복자의 신앙을 설명해주신 현양회 자매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 순교지 현양회 회장님과 봉사자 그리고 개포동성당 순례객과 기념사진..
▼ 한양도성도 내 좌,우포도청, 의금부, 순교터표시
현양관에서 순교의 역사를 보고 들고 우리는 지도를 보며 성지순례를 준비하였다.
종로성당을 출발하여 좌포도청, 의금부, 전옥서, 우포도청, 형조터, 경기감영터, 순교자 현양탑이 있는 서소문 네거리까지 복잡한 종로시내를 가르는 총5.7km 의 도보순례를 시작합니다.
좌포도청터 는 종로3가역 3호선 9번출구 앞에 예전 단성사 표지석만 남아 있습니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 하였고 순교성인들과 복자로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 성 장성집 요셉, 성녀 바르바라, 성녀 김루치아, 성녀 조 막달레나, 성녀 유 체칠리아, 복녀 심아기 발바라, 복자 김이우 바르나바 이 있고 1795년 을묘박해 때 124위 복자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천주교와 포도청
조 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임무는 서울을 포도청을 비롯하여 지방의 진영(鎭營)이나 수영(水營) · 병영(兵營) 등에서 담당하였다. 이 중 포도청은 관할 구역인 서울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신자들을 체포하여 압송하였다. 포도청 소속의 포졸들이 다른 지역에서 신자들을 체포해 올 때는 우선 해당 지역 수령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은 뒤, 그 고을을 포졸들과 함께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또한 지방의 진영이나 수영 및 병영에서 신문을 받은 신자들 가운데 상급 기관의 조사가 더 필요한 사람들도 서울의 좌 · 우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같이 포도청에서 직접 체포한 신자들과 지방에서 이송된 신자들은 좌 · 우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사안의 경중에 따라 상급 기관인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어 다시 신문을 받고서 확정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신자 들의 처형은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교수형이나 백지사형(白紙死刑)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 · 우 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좌 · 우 포도청에서 신자들을 심문할 때 형조보다도 매질을 더 심하게 하였기 때문에,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교한 신자들도 많았다. 이렇게 볼 때 좌 · 우 포도청 자리는 박해 시기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좌포도청터에 도착하여 순교자를 위해 기도와 하느님의 종 125위 시복시성 기도를 바친후 표지석과 포도청에서 모진 고문과 고통에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순교하신 성인들의 신앙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교이야기 中 죽음의 곤장 아래서 십자가의 영광을 증언하다
1795 년(을묘년) 5월, ‘북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에서 좌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1752-1801년) 신부를 체포하라고 명했으나 신자들의 기지로 실패한 사건이었다. 대신 포교들은 밀사 윤유일(바오로, 1760-1795년)과 지황(사바, 1767-1795년), 신부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1765-1795년)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으로 압송하였고, 그들은 조정의 명에 따라 혹독한 매질 아래 목숨을 바쳐야만 하였다. ‘비밀리에 때려 죽여 입막음을 하라’는 명이 내려졌던 것이니, 이를 을묘박해라고 부른다. 순교 직전에 우리의 용감한 순교자들은 이렇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저 십자 형틀에 묶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가 대신 죄를 지고 가셨으니, 어찌 자식이 되어서 저 큰 부모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저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천만 번 죽을지언정 그분을 모독할 수는 없습니다.”
의금부(義禁府) 터 순례
의금부 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조선의 군사체제가 정비되면서 의금부 기능은 축소되어 정치범이나 중죄인 등을 다스리는 사법 전담 기관이 되었다. 의금부는 한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었는데, 현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인근의 SC제일은행 화단에 표지석이 서 있다. 천주교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 중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박해 당시,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년),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 등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다.
춤추는 곤장, 난무하는 남형 포 도청에서의 형벌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법 이외의 형, 즉 남형(濫刑)이 자주 적용되곤 하였다. 곤장은 기본이었고, 도적들에게 사용하던 치도곤, 주장질, 팔 다리를 부러뜨리는 주리질(주뢰질)도 행해졌다. 톱질로 살점을 떼어내고, 장대에 거꾸로 잡아맨 뒤 등나무 줄기로 때리는 학춤도 자행되었다.
한국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년)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프란치스코, 1805-1839년) 성인은 주리질과 주장질에 이어 치도곤 110대, 주장과 태장 합 340대를 맞고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형리들조차 놀라 소리쳤다. “저놈의 몸은 육신이 아니라 목석이다.” 그렇게 성인은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포도청의 옥에서 장독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성인의 나이는 35세였다.
의금부터 맞은 편 도로변에 위치 한 전옥서 터(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바로 앞)
백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수감되 있던 곳으로 지금으로보면 구치소 정도 됩니다.
103위 성인 중 전옥서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혹독한 감옥생활로 순교한 성인이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입니다. 1785년의 명례방사건 때 김범우 토마스가 형조로 끌려가 신앙을 증거한 이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하거나 순교했던 장소 입니다.
우포도청 터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특히 기록상 명확히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 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도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했습니다. 병오박해 때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밤을 보낸 곳도 우포도청입니다.
기해일기를 펴낸 현석문 가롤로 성인도 김임이 데레사, 정철염 가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서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며 순교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 입니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던 신자들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 가운데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르 는 우포도청에서 아사 로 순교하였으며, 이들은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포도청 터 표지석은 현재 종로1가 89번지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신사옥 앞 화단 에 있습니다.
형조터
형조는 조선시대의 중앙관서인 육조의 하나입니다.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 최필제 베드로 ․ 윤운혜 루치아 ․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 남명혁 다미아노 ․ 김효임 골롬바 ․ 김효주 아네스 ․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습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정문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습니다.
경기 감영터
경기감영이 설치된 것은 태종 때의 일이었다.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에 경기 행정편제가 개편되었다. 이때 광주와 수원의 관할인 군현을 갈라서 경기좌도라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경기 우도로 했습니다. 그 후 1413년에 경기 영역을 다시 한 번 조정하여 좌․우도로 나누지 않고 경기로 확정하면서 도관찰사를 파견하였고, 감영을 수원에 설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감영은 경기도 광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한성부 내 서대문 밖 반송방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던 박해기였지만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 권상문 세바스티아노, 홍인 레오 등 체포된 신자들은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순교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순교자 조용삼입니다. 조용삼은 11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었고,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으나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다시 옥에 갇힌 지 며칠 만인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경기감영 터 표지석은 종로구 평동 164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에 서 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 성지
서소문은 조선시대 수도 한성의 출입 성문이던 네 개의 도성 대문과 네 개의 소문 가운데 하나인데, 서소문의 정식 이름은 소의문입니다. 서소문 밖의 네거리 광장은 조선시대 공식 사형집행지였는데, 그 광장은 문안에서 아현고개와 남대문 밖 칠패시장으로 통하던 성문 밖에 생겨난 주막거리 광장이었습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주막과 주위의 시장은 ‘파루인정제’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침에 성문이 열리면 도성 출입이 가능하나, 저녁에는 성문을 닫아 통행을 금지하니, 통행인들이 문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성문 밖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에 이들을 상대로, 성문 밖에 취락이 생겨났고, 광장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따라서 관에서는 중죄인을 사형에 처할 때마다 군중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쉽고, 또한 사형죄인들이 갇혀 있던 포도청이나 의금부와 가까운 서소문 밖 네거리 광장을 사형 집행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서 순교자가 처음 생긴 것은 1801년 신유박해 때로,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명도회 초대 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와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참수로 순교하였습니다.
▼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순교자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사이 가운데 현양탑 꼭대기에 비둘이 두마리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네요.... 비둘기는 성령을 의미하죠...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성 남종삼 요한 등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처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으며, 그중 마흔 네 명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면서 한국 교회사상 가장 많은 성인이 탄생한 곳이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 마른 사람들!
첫댓글 참..의미있고 기억에 남는 순례 였습니다... 적극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우리 개포동 신자분들이 서울의 성지순례를 통해 순례자로써 다시 신앙을 굳건히 하고, 작게는 본당의 복음화 임무에 온전히 헌신하길 바랍니다...^^
참, 홍보분과 분과원님들 모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순례자의 기도하는 마음 잘 전달 받아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교회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와 한국의 순교자들의 전구가 모든 개포동 교우 순례자들과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홍보분과원 성지순례의 길 수고 하셨구요, 본당신자 모두에게 귀감이 되길 바랍니다.
분과원들과 교우들과 함께 할수 있어 좋았고요.... 참 의미 있는 순례 었슴니다...
우리 성당 교우들도 꼭 한번씩 다녀왔으면 하는 바람 입니다...
우리 한국 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하는 소중한 순례였습니다.차량운전과 자료조사및
촬영,그리고 사전 도상훈련을 비롯한 여러가지로 준비하고 기도로 함께 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뜨거운 7월 도보로 성지순례때 흘린 땀방울만큼 값진 시간이었습니다.토마스 사무장님도 측면에서 도와주심, 고맙습니다! 회장님의 기도도 더욱 감사합니다^^^
소개된 사진,도보길에 참여하신 교우님들
각 형터 마다에서 순교하신이 의 세세한 자료들에 감사 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참고하셔서 더욱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심코 걸었던 세종문화 회관 앞마당이 순교자 성지인줄 이제야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