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금산교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가 우리 문화에 토착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인 ‘ㄱ’자형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 1908년에 세워진 이 예배당은 다행히도 보존 상태가 양호해 1997년에 전북문화재(제136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이는 당시 말을 타고 전주와 정읍을 오가며 전도하던 미국 남장로교 루이스 테이트 선교사였다. 당시 이곳에서 마방이 있어서 말을 타고 전주와 정읍을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 가며 말에게 물을 먹이거나 굽을 수리하곤 했다. 테이트 선교사 역시 이곳에서 말과 함께 잠시 쉬어 가는 동안 이곳 사람들에게 유창한 한국말로 “예수 믿으라”고 하며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결과 마을의 유지인 조덕삼, 박화서, 왕순칠, 강평국, 이자익 등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두정리에 세워진 첫 교회가 바로 금산 ‘ㄱ’자 교회의 전신이다.
금산교회는 점점 부흥하여 1908년에 5칸짜리 예배당을 짓게 되었는데, 강력한 유교 문화 사회 속에서 살아온 교인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관습에 따라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분하여 예배당을 ‘ㄱ’자형으로 지었다. 예배 시간에는 남자석과 여자석 사이에 흰 휘장을 쳐서 서로 보지 못하도록 했다가 1940년대 들어서면서 휘장을 치는 관습을 폐지했다. 이처럼 금산교회는 서양 문화가 한국의 유교 문화와 대립하지 않고 극복하여 잘 토착화된 상징이다. 하지만 금산 ‘ㄱ’자 교회의 진정한 아름다음은 엄격했던 신분의 벽을 신앙 안에서 감동적으로 초월한 성도의 일화로 더욱 빛난다. 그 주인공은 바로 김제 사람 조덕삼이다. “김제의 어느 곳에 서든 조덕삼의 땅을 밟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일대에서 소문난 거부였다. 그런 그가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자가 되자 그의 영향으로 인근 주민 상당수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조덕삼 장로 이자익 장로
성도들이 늘어나자 장로를 뽑게 되었고, 이를 위해 선거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조덕삼은 자신이 당선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장로선거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그의 마부 이자익이었다. 이 결과에 성도들은 당황했다. 반상의 벽이 엄연한 조선 사회에서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던 것이다. 자칫하면 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 소란을 잠재운 이는 다름 아닌 조덕삼이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은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이자익 장로를 세우고 더욱 잘 섬기겠습니다.”
그것은 조덕삼의 신앙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언이자 아름다운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 말을 지켰을 뿐 아니라 자기 돈으로 이자익을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사로 키웠다. 놀라운 순종과 섬김의 자세를 보여준 조덕삼은 이듬해에 장로로 선출되었다. 조덕삼의 지원으로 목사가 된 이자익은 한국 초대 기독교사를 대표하는 탁월한 목사가 되었다. 그는 한국기독교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며 한국 기독교를 이끌었다. 이자익 목사가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분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한 조덕삼 장로와 금산교회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금산 ‘ㄱ’자 교회는 한마디로 한국 초대교회의 초상이다. 아름다운 교회 전통을 만든 두 사람 조덕삼과 이자익의 초상화, 그리고 잘 보존된 당시의 기록물을 비롯해 100년이 넘도록 소리를 내는 풍금과 두레박 우물, 그리고 소박하지만 운치 있는 종 등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한 것은 치열했던 한국전쟁 중에도 교회 건물이 불타지 않고 잘 보존되어 왔다는 점이다. 삐거덕거리는 나무마루와 흙담, 낮은 지붕의 이 한옥 교회에서는 지금도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당 내부 - 남녀칠세부동석
◎ 답사일 : 2017. 9. 16
◎ 글 출처 : 믿음의 땅 순례의 길, 유성종·이소윤, 두란노
첫댓글 금산교회 조덕삼,이자익장로님 아름다운 이야기 잘 읽었읍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