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가 아닌 몽골이어야 한다.
우리는 몽골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과거 사회주의 국가였던 나라, 한반도보다 7배나 큰 나라, 바다가 없는 나라, 땅은 넓은데 인구가 적은 나라, 지도상에 온통 사막과 적갈색으로 표기된 불모의 땅이나 다름없는 나라, 동북아시아에 있으면서도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인식되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과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몽골리안 루트, 유목생활, 징기스칸, 고려와 원과의 관계 정도의 지식이나 알고 있지나 않았을까.
이번 여행에서 몽골을 최종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무엇에 끌려 이 나라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에 도움을 줄 목적으로 몽골에 대한 사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 얼마 안되는 서적과 인터넷에서 자료를 뽑아 보기도 했다.
몽골(Mongolia)은 원래 용감함이란 뜻을 지닌 부족명이었으나 징기스항이 통일함으로써 민족명으로 변화된 말이고 국가명칭이 되었다. 몽고(蒙古)라는 명칭은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이 주변민족을 비하시키기 위해서 쓴 말이다. 교과서에 실린 대로 몽고라고 알고 있었으니 무지의 소산이다.
현지에 가서 배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몽골은 소련 다음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 나라며, 소련 다음으로 사회주의를 버린 나라라는 것이다.
왜 우리 일행은 몽골(Mongolia)을 여행지로 선택한 것일까? 오지여행을 즐기기 위해서, 여행경비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이끌려서… 아무튼 모르겠다.
사업이나 선진문물을 배우려면 우리보다 잘 사는 일본이나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야할 것이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얘기로는 여름에는 북쪽으로 겨울에는 남쪽으로 가라는 조언도 참고가 될 것이다.
바이칼 바다에서 시작되는 몽골리안 루트를 확인하고 답사하고 싶었고 우리와 문화적, 유전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경민과 유목민의 문화적 차이와 기후 조건에 따른 생태적 차이 등 많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2002년 7월 21일 오후 4시 30분 춘천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탑승객은 버스기사와 우리 일행 4명이 전부였다. 3시간 가까이 차창으로 전개되는 낯익은 풍경을 보며 내일 부터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게 될 설레임에 가벼운 떨림이 전해진다.
인천공항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공항 대기실에서 잠을 자기로 하였다. 공항 부근에는 마땅히 잘 곳도 없고, 인천이나 서울 쪽에서 잠을 자더라도 다음날 일찍 서둘러야 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하였다. 집 떠나면 고생인데 배낭여행 예행연습하는 셈치고 달게 잤다. 때로는 이런 거친 잠도 보약이 될 수 있다.
7월 22일 6시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공항이용료 지불, 출국신고서 작성 등 탑승준비를 완료하였다. 울란바토르행 비행기의 이륙 예정시간은 7시 40분이었다. 탑승이 약간 지연되어 8시 5분에 이륙하였다. 울란바토르행 KE 867편은 앞으로 2시간 50분 동안 서해바다, 베이징, 고비사막 상공을 통과하며 울란바토르(Ulaanbaatar)의 보얀트오한 공항에 10시 55분 경에 착륙할 것이다.
10,000M 상공에서 시속 1,000Km로 비행기는 날고 있다. 저 아래 뭉게구름이 떠있고, 구름 아래 낯선 풍경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사막과 초원에 띠처럼 사방으로 난 길. 민둥산에 언뜻언뜻 보인던 나무숲일지도 모르는 검은 모습...
기내에서 미리 작성한 입국신고서를 제출하고 공항대기실로 빠져나오자 팻말을 들고 사람을 찾는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온다. 공항대기실에는 가이드를 맡기로 한 김장구씨가 나와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징기스항시대의 몽골을 전공하기 위해서 울란바토르에 왔다고 하였다. 여기에 온지 3년 6개월 되었으며 철저하게 동화되어 생활하고 있었다.
해발 1,700M의 울란바토르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햇빛은 강열하였고 무더운 날씨였지만 습기가 없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에서 습기가 없다는 것은 그나마 행운일 것이다.
주차장에서는 7살 정도의 사내아이가 차를 닦고 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닦는다. 그 아이로 보면 세차비를 받으면 좋을 것이다.
한국회관에서 나온 승합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토올강의 물줄기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울란바토르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내를 관통하는 토올강은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여러 지류를 모으고 울란우데의 셀렝게강으로 흘러들어가 바이칼바다로 간다고 한다.
폭이 작고 수량도 적은 토올강변에는 나무가 있고 풀의 색깔도 푸르다. 한가하게 소와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구릉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산에는 햇빛을 많이 받는 쪽(남쪽)은 나무가 없는 회갈색의 민둥산이고 그 반대 쪽(북쪽)에는 나무가 보인다.
한국회관에 여장을 풀고 그 곳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차를 빌려(오후 사용료 20,000투그리 : 우리돈 20,000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시부터 시내를 관광하기로 하였다.
자연사 박물관 관람으로 울란바토르(붉은 영웅) 여행의 첫 포문을 열었다. 관람료는 외국인 1700투그리, 내국인 1500투그리 였다. 사진을 촬영하려면 별도의 돈을 내야 한다.(카메라:1000투그리, 비디오:5500투그리)
자연사 박물관에는 약 7000만년 전의 공룡들로 가득하다. 공룡들이 다시 환생하여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알모사우르스, 바르스볼드(큰 것), 모나미쿠스(작은 것), 파키스팔로 사우리아, 오스트리히 라이크 카니보르스 디노사우르스, 오스트리히 라이크 디노사우르스 갈리미노스, 자이언트 이쉬 타르보사우르스(제일 크고 거대함. 몸무게 2-3톤)가 보고 있다. 타르보사우스의 전신뼈 화석, 디노사우르스 앞발 화석, 맘모스 이빨 화석, 코뿔소 화석, 공룡알 화석이 전시되어 있는 고생물관이 유명하다.
다른 방에는 몽골지역에 살고 있는 각종 야생동물(사슴, 곰, 독수리, 눈표범)이 박제되어 있고 다른 나라에서 온 것들도 방을 차지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위해 교육용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있다.
자연사 박물관을 관람한 후 잠시 휴식을 취하며 물을 사먹었다. 탄산이 들어있는 바이칼 생수 밖에 없다. 쉬고 있는 우리들 앞으로 왔다갔다 하는 몽골 아가씨들의 복장 때문에 아찔한 현기증이 난다. 눈요기감으로는 제격이다. 젊은 여성들의 복장은 한결같이 짧은 핫팬츠, 배꼽티 차림이고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서구식 체형이다. 유제품으로 인한 체형의 변화일 것이다.
비싼 돈들여가며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나라에 와서 눈요기감을 곁눈질하며 졸음을 쫓는 여유는 분명 사치일 것이다. 에로티시즘의 작가 바타유는“인간에게는 3가지 사치가 주어져 있다.”라고 말하였다. 먹기, 섹스, 죽음이 3가지 사치라고. 여기다가 관광(여행)을 하나 더 추가하여 4가지를 사치라고 규정하면 어떨까.
다음 예정지는 박물관이었다. 입장료는 1인당 2000투그리였다. 물론 사진과 비디오 촬영비는 별도로 내야한다. 박물관에서는 한국과 몽골 공동유적조사 5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이미 전시되었다고 하였다. 2시에 개막했다고 하였는데 팜플렛같은 자료는 보이질 않는다. 자료를 얻으려고 했는데 동이나고 말았다고 하였다. 자료가 귀한 나라이기 때문에 불티나게 없어진 모양이다.
사슴돌, 선그림의 바위그림, 동물뼈에 사람 얼굴이 그려진 유물(BC7000년-BC2000년) 등은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와 흡사하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집자리 밑에 뼈를 구부려 넣은 무덤 유적(여자 무덤, 신석기시대 : BC7000년-BC2000년)이었다. 이 방법을 썼다면 우리나라의 고인돌 유적에 대한 의문점 하나가 해결될 수도 있겠다.
흉노시대의 비단옷(BC100년-AD100년)도 눈길을 끈다. 옷장식이 화려하다. 과거나 현재나 몽골인들은 현실을 중시한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다. 코담배(돌이나 뼈를 파서 담배 비슷한 것을 넣어 흡입한다)도 많이 구입하고 큰 것을 구입하여 자랑한다. 허리에 찬 장식도 화려하다(칼, 젓가락 등을 꼿는다. 현재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젓가락 대신 포크를 즐겨 쓴다. 현대 몽골인은 젓가락질을 잘 못한다.)
흰색과 검은색의 말총은 항(징기스항)을 상징한다. 아랍에서 도입된 녹색염료는 징기스항의 후손만 사용한다.
쿠빌라이항시대에 만들어진 황제복음이라는 글씨가 분명한 비문에는 황제라는 글자를 두 칸 앞에 썼다. 그렇게 쓴 것은 세계를 황제 밑으로 둔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1246년 칸이 몽골제국에 와있던 카르핀을 통하여 교황에게 보낸 편지가 1920년 발견되어 공개되었다.
“하늘 아래 모든 땅은 몽골의 땅이니 너희들도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즉시 천명이 내릴 것이다.”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던 징기스항의 후예들이 회회포로 바그다드를 공격하고 그 기세로 헝가리까지 공격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왜 거기서 발길을 멈추고 돌렸는가. 말과 소의 먹이도 안되는 거친 풀이 무엇에 쓸모가 있겠는가. 농사를 짓는 것은 동물이나 하는 것, 농사를 짓는 사람은 동물과 같은 것, 그래서 오늘도 그들은 농사를 포기하고 풀을 찾아 동물떼를 이끌고 초원을 누비고 다닌다.
다양한 민족들의 전통복장, 유목민들의 생활용품은 유목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자료이다. 몽골의 역사적, 인류학적 전시물이 정리되어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몽골인의 문화와 농경생활을 하는 동북아인의 문화는 분명히 다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중국 쪽으로 기운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는 말과 숙식을 제공한다. 고려 무신정권시대 위정자들이 강화도로 도망갔을 때 본토의 피해는 엄청나게 컸다.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피해가 커진 것은 그 당시의 정세를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 우매함이 아니겠는가. 세계 정세를 바로 인식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교만일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몽골제국의 침략사에서 우리나라만 40년 동안 줄기차게 항전하였다고 자랑스러움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무지함의 극치가 아니가.
그렇게 배운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결국 고려는 몽골에 굴복하고 혹독하게 그 대가를 지불하였다. 여자와 매까지 조공으로 바치지 않았는가.
이번 여행을 통해 또 하나 교정한 것이 있다. 징기스칸이 아니고 징기스항이라고 써야 옳다는 것이다. 칸은 한자문화권에서 쓰는 것이라는 것이다.
징기스항은 누구인가. 920년부터 1130년 까지 200년 가까이 몽골평원의 유목민들에게는 의탁할 주인이 없었다. 위그르가 신강으로 도망가서 공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때 그가 나타나 종교와 정치를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전 부족을 통일하고 몽골평원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몽골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지면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힘이 없음을 한탄한다. 그러나 힘을 길러 복수하는 사람들이다. 얼마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몽골에서는 거의 대부분 6시 까지 관람객을 입장시킨다. 시간 전에 입장한 관람객에 한하여 6시 이후에도 관람을 허용한다.
세 번째 찾은 곳은 초이진 람 사원이었다. 입장료는 1인당 2,200투그리 였다. 사진과 비디오 촬영을 하려면 별도의 돈을 내야한다. 초이진 람 사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35분이었다. 울란바토르에 있는 티벳불교의 대표적인 사원이며 19-20세기 몽골 건축의 걸작품이다. 17-20세기 회화, 주조, 자수, 조각품, 몽골식 아플리케가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자나바르도가 조각한 석가모니와 신의 나무, 청동상이 있다. 자나바르도의 초상도 있다. 입구에는 사천왕상이 있고 흥인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중국, 만주, 몽골, 티벳불교가 혼재되어 있는 모습이다. 라마교라고 알고 있던 상식은 잘못된 것이다. 티벳불교라고 수정하여야 한다.
첫날부터 많은 것을 수정해야 했다. 잘못 알고 있던 지식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일은 즐겁다.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는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초이진 람 사원에도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다. 몽골생활을 우리보다 오래한 김장구씨는 여기서는 생각날 때 기념품을 사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재고 저리재다가는 하나도 못산다는 것이다. 내일은 없다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세군데 기념품을 파는 곳을 지나쳤는데 빈손이다.
초이진 람 사원의 관광을 끝내고 걸으면서 시내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숙소까지 걸어서 30분이면 된다고 하였다. 차를 돌려보냈다.
차도는 적당히 건너가면 된다. 신호등은 거의 무시된다. 걸어가다가 다른 사람의 발을 밟으면 돌아서서 손을 내밀어 악수하면 된단다. 악수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생불로 유명한 나착도르지 쉬인의 동상이 보인다. 원래는 서울의 거리에 있었는데 이 곳으로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자본의 위력이 여기서도 통하는 모양이다. 한류 열풍이 몽골평원에 불고 있다.
도시구획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넓은 도로, 넓은 인도 그 사이의 조경이 아름답다. 인민혁명당사, 정부청사, 오페라극장, 문화궁전 등 건물의 규모가 웅장하다.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은 어느 도시나 비슷하다.
사회주의 시절의 냄새가 그대로 묻어 있다. 사회주의 시절의 향수를 가장 잘 웅변해주는 것은 전기설비에 있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을 구석구석까지 전파시키기 위해 전기시설의 설치를 강조하였다.
건물은 크게 만들고 소비보다도 많이 생산하는 것이 사회주의 경제의 특징이다. 비효율적인 경제정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경제는 쇠퇴하고 말았다.
큰 건물 주변에는 어김없이 이동식 전화가 있다. 전화를 걸면 통화가 안되더라도 기본요금을 내야 한다. 전차버스도 있다. 전차버스비는 100투그리, 일반버스비는 200투그리, 소형버스비는 200투그리이다. 일반버스와 소형버스의 차이점은 소형버스는 시골 구석구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차가 다니는 도로에는 신호등이 더러 있으나 거의 무시된다. 다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건너면 된다. 낡은 차들이 잘도 달린다. 간혹 시동이 꺼져 멈춘 차들도 보이고 접촉사고로 싸움을 하는 장면도 눈에 띈다.
밤 10시가 넘어 해가 진다. 하늘은 새떼소리로 가득하다. 북쪽의 여름이라 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진다.
한국회관 건물에는 호텔과 식당과 노래방과 나이트클럽이 있다. 노래방과 나이트클럽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밤늦게까지 시끄럽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쉽게 잠들지 못한다. 비교적 싼 숙소를 구하여서 그런 줄 알았는데 울란바토르에 있는 모든 호텔의 공통점이란다.
7월 23일 울란바토르에서의 첫 일출을 보기 위하여 6시에 밖으로 나왔다. 반바지에 반팔티 차림인데 약간 춥다. 바람이 스치고 간간이 자동차소리와 새소리가 섞여 들리는 상쾌한 아침이다.
6시 45분 태양이 산위로 떠오른다. 햇빛이 너무 강열하여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 선그라스를 끼지 않고는 햇빛을 바로 볼 수 없다. 현대인은 선그라스를 이용하여 햇빛을 차단할 수 있지만, 옛날사람들은 눈을 작게 하고 광대뼈를 튀어나오게 하는 진화과정을 통하여 햇빛과 모래바람을 차단하면서 기후에 맞게 적응하여 왔다. 이들이 현재 몽골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9시 15분 복드한 궁전박물관(겨울궁전)을 관람하였다. 입장료는 1인당 2200투그리였다. 사진 촬영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의 돈을 받는다. 8대 복드한(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이며 8대로 끝났다)인 자브장 담바 후타그트 8세가 1924년까지 20년 동안 여기서 통치하였다. 토올 강둑에 있던 여름궁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겨울궁전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복드한은 서쪽에서부터 끊임없이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마지막 복드한이 정착한 곳이 이곳이고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가 되었다. 만약 다시 복드한이 나타난다면 동쪽으로 이동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나바드로상이 눈에 들어온다. 자나바드로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데 젖가슴이 드러난 보살이다.
눈표범의 가죽 150장으로 만든 게르에서 통치자가 작전회의를 했을 것이다. 이곳의 복드한 궁전은 겨울용인 셈이다. 여름에는 북쪽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10시 35분 자이상 전망대에 올라갔다. 차가 전망대 중턱에 까지 올라갈 수 있다. 염소떼가 길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었을 것이 틀림없는 레닌 뱃지를 펼쳐놓고 팔고 있다.
자이상 전망대는 동몽골의 할가강에서 소련군과 몽골의 연합군이 일본의 관동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관이다. 전망대에는 하과수렝 장군의 동상이 있다. 전쟁에서 죽은 무명용사와 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전망대 바로 뒤에는 오브의 돌무더기가 있고 가운데 밖혀있는 버드나무에는 어김없이 푸른색의 천이 매어져 있다.
전망대에서 보면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가까이는 토올강이 동에서 서로 길게 흐르고 강건너에는 제법 높은 건물들이 보이고 그 너머 언덕에는 달동네와 비슷하게 게르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전망대 바로 밑에는 이태준 애국지사를 기리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직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토올강의 다리를 건너면 복드한의 겨울궁전이 보인다.
정부종합청사, 국회의사당, 문화궁전, 국립 오폐라와 발레극장 같은 사회주의 시절에 만들어진 큰 건물로 둘러쌓여 있는 광장에는 수흐바타르의 칼을 빼어든 기마동상이 있다. 1921년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새 국가의 기틀을 세운 수흐바타르를 기리는 동상이다. 민족적인 성향을 나타내자 소련에 의해 제거되었다.
“만일 우리 모두가 공통된 노력과 의지가 있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배우지 못할 것이 없으며, 실패할 것이 없다.”이런 문구가 동상 밑에 새겨져 있다.
얼마나 자신감에 찬 의지의 표현인가. 수흐바타르는 몽골의 영웅이다. 수흐바타르 광장, 수호바타르시, 수호바타르역…
전망대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고 울란우데(러시아연방 중의 하나로 브리야트공화국의 수도)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울란바토르역으로 출발하였다. 모스코바로 향하는 기차는 오후 1시 50분에 울란바토르역에서 출발하였다.
7월 29일 오전 9시 30분 몽골의 울란바토르역에 도착하였다. 7월 28일 오전 7시 30분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브리야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를 거쳐 여기까지 장장 26시간을 달려와서 멈추었다.
우리 일행은 6박 7일 동안의 바이칼바다 관광이 무사히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울란바토르역에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한국회관으로 이동하여 짐을 정리하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여독을 풀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휴식에는 잠이 최고일 것이다. 밖이 소란하여 잠에서 깨어났다.
몽골에서는 고학년의 학생들 중 희망자에 한하여 방학동안에 야영활동 같은 교육과정을 시킨다는 것이다. 이 교육활동은 돈이 들어가므로 주로 잘사는 학생들만 참가한다. 부모들이 자가용으로 데려오고 데려간다. 학생들을 싣고온 버스가 4대 대기하고 있다. 야영활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학생들과 야영활동을 시작하려고 모여드는 학생들로 어수선하다.
몽골의 학교는 10학년제이고 국가에서 교육비를 부담한다. 대학부터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오후 4시 몽골여행의 일정과 코스를 확인하기 위하여 최종 회의를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4박 5일 동안의 몽골 역사기행인 셈이고,. 유적 탐사와 함께 경치가 좋은 곳이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이 있으면 보자고 했으니 유람도 함께 하는 셈이다. 일정과 코스는 이미 만들어졌으므로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일행 4명과 김장구씨와 현지인 가이드 촐롱이 참여하여 지도를 보면서 마지막 점검을 하였고, 차량문제는 촐롱이 확인하기로 하였다. 촐롱이 한가지 부탁을 하였다. 가는 길에 시간을 내주면 자기 고향에 들려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현지인 가이드비 하루 20달러, 이스타나 승합차 하루 사용료 30,000투그리(기름값은 별도), 운저기사와 가이드의 먹고 자는 비용은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단다.
일단 우리한테는 유리한 조건이다.
오후 5시 20분 한국회관 여사장님의 도움으로 사막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6시 이후에는 문닫는 상점이 많으므로 물건을 살 때 주의해야 한다. 그 분은 문막이 고향인데 우리에게 잘해주셨다. 깔판과 모기향은 사장님이 빌려주셨고 몽골빵, 물, 라면, 쌀, 일회용 카레, 일회용 짜장, 쨈, 가스, 일회용 컵 등 사막에서 4박 5일 동안 먹을 것을 준비하였고 사탕과 초콜렛은 선물용으로 준비하였다. 김장구씨가 브르스타와 큰 냄비를 가져오기로 하였다.
현지에 가면 그곳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주장과 적당히 우리 것을 먹어도 된다는 주장이 공존하지만 만일을 위해, 그리고 사먹을 곳이 없는 곳에서는 해먹어야되기 때문에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 옳다.
대구에서 혼자 몽골로 배낭여행을 오신 84세의 김준기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15일 동안을 머무른다고 하셨다. 원래는 할머니와 함께 오실 작정이었는데 갑자기 편찮으셔서 혼자 오셨다고 하였다. 그 분은 여러 방면에 박학하셨고 특히 역사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우리와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주로 그 분이 많이 말씀하셨고 우리는 경청하는 쪽이었다. 몽골 땅에 와있을지도 모를 청자나 금속활자를 찾는 것이 소망이라고 하셨다. 11시가 넘었는데도 그칠 기세가 아니다. 연세가 많은 데도 흐트러짐이 보이질 않는다. 엄청난 모험을 하시는 그 분이 존경스럽다.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살아있다면 배낭여행을 하고 있을까.
잠을 많이 자야 하는데 잠이 쉽사리 오질 않는다. 밖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때문인가. 아니면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셀레임 때문인가.
7월 30일 6시 50분에 일어났다. 지난 밤은 아주 잘 잤다. 여행 후 처음 있었던 달콤한 잠이었다. 8시에 출발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서둘렀다. 식당에서 아침을 김밥으로 싸주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하다. 이스타나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다. 배낭을 차에 싣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운전기사가 정비사를 한명 더 데리고 왔다. 사막길을 잘 모르거나 정비를 못하는 기사일 것이다. 약속과 다르다.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만만히 보고 덤벼들 염려가 있다. 남의 나라 땅에온 우리는 약자가 아닌가.
차를 바꾸기로 하였다. 시간이 길어져도 관계없다. 잠깐의 불편으로 4박 5일 동안 편안하다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 촐롱이 전화를 걸었다. 포르간(러시아제 봉고)으로 교체했다. 사막과 같은 험한 지형의 운행에 좋다고 하였다. 하지만 목받침이 없어 조금은 불편하고 장시간 타면 목이 아플 것이다. 차가 튈 때 천장까지 닿을 것이다. 단단히 조심하자.
하루 운행료 40,000투그리(휴발류값 별도)로 계약하였다. 휴발류 1L에 305투그리, 휴발류가 경유보다 싸다. 엔진오일도 한통 샀다.
운전기사는 갑자기 사막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으므로 짐을 꾸릴 시간이 필요하였다. 운전기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잠시 정차하였다.
10시 40분 드디어 사막으로 출발하였다. 미터기가 17,676Km를 가리킨다. 포르간은 시내를 빠져나와 보얀트오하(공덕이 있는 언덕) 공항을 끼고 남쪽 방향으로 선회하여 달린다. 아스팔트길을 시원스럽게 달린다.
아이다스(두려움) 언덕에 오브가 있다. 오브를 촬영하기 위하여 정차하였다. 차를 세울 때는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돌고 정차한다고 하였다. 그래야만 행운이 온단다.
11시 30분 투브 아이막(도청)의 종모뜨(작은숲)를 지났다. 초원지대의 숲이라니 신기하다. 이곳에서 가이드 촐롱은 외할머니와 함께 고학년을 공부하였다.
15분 후 만치링 히드 사원에 도착하였다. 이 사원에는 18살 처녀의 정강이뼈, 혹은 임신한 여자의 정강이뼈로 만든 간랑호른이라는 악기가 있단다.
입장료는 외국인 3500투그리, 내국인 700투그리, 차량 300투그리이며 사진 촬영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의 요금을 내야한다. 입장료 차이가 너무 커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만치링 히드 사원은 1750년에 만들어졌고, 1937년 파괴되었으며, 1990년에 다시 복원하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몽골 역사에서 1937년은 대단히 중요한 해이다. 이 때 많은 사원의 문화재들이 우상 또는 아편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우리 민족은 3이라는 숫자를 가장 좋아하는데 몽골인들도 3과 9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특히 9와 그 배수를 아주 좋아한다. 왜 18살 처녀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인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는 81이라고 하였다.
18살 처녀의 정강이뼈, 혹은 대퇴부뼈로 악기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도 짐승도 다같이 취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짐승을 잡을 때도 단숨에 숨통을 끊어 고통을 덜어준다. 사람이 살기 위하여 짐승을 죽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말, 소, 염소, 양떼를 다른 초지로 이동시키고 있는 유목민을 만났다. 낙타가 마차를 끌고가는 보기드문 광경이었다. 마차에는 그들의 생활용품이 전부 실려있을 것이다. 이동하고 있는 유목민 중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사람이 우리에게로 왔다. 뎀베렐이라는 75세 된 노인으로 촐롱 외할아버지 친구라고 하였다. 우리가 예견했던 것처럼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담배를 한 대 권하였다.
12시 45분 처음으로 초원에서 게르를 보았다. 길에는 얼마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소의 사체가 있다. 냄새를 맡고 날아온 독수리들이 사체 주변에 모여든다. 죽은 동물을 버릴 때는 반드시 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바람부는 쪽으로 버린다.
양떼가 산으로 올라가니까 온통 흰색이다. 양들은 끼리끼리 모여 그늘을 만들어 더위를 피한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초원에서 보이는 하늘은 아주 가깝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초원에는 여기저기 타르박이 뚫어놓은 구멍이 보이고 송장메뚜기 소리가 요란스럽다.
13시 40분 사슴돌 이전 단계의 선돌을 보고 점심을 먹었다. 해발 1400m의 초원에서 빵을 먹는 식사. 먹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이다.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다닌다. 뭉게구름이 햇빛을 가리자 원형의 거대한 그늘이 초원에 만들어진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봤을 때 검은 물체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다.
경배의 산, 사나운 산, 산의 이름을 말하여도 안되고 산을 넘어서도 안된다. 그것은 유목민들의 금기사항이다.
유목민들이 사용할 겨울집을 처음으로 보았다. 겨울집 가까이에는 나무로 울타리를 친 짐승우리가 있다. 겨울집은 북쪽에 언덕(산)이 있어 최대한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 짓는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삶의 흔적일 것이다.
몽골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부자도 조뜨(재앙 : 가믐, 눈, 바람) 한 차례면 족하고, 영웅도 화살 하나면 족하다.”
새끼 한 마리가 낀 쌍봉낙타 10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초원에 놓아 기르다가 주인이 이동할 때 데리고 간다고 하였다.
15시 10분 13세기 몽골시대 석인상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석인상의 머리가 잘려져 나갔다. 남녀 석인상으로 동쪽에 있는 것이 여자일 것이다. 티벳불교가 들어오면서 두상이 파괴되었다. 석인상 주변에 큰 돌들이 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몽골평원에서는 주인공이 바뀌면 전시대를 철저히 파괴하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다. 약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배려인가.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과시인가. 초원은 여러 민족의 격전장으로 그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묘, 성, 석상, 사원 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후흥 헝거리. 석인상이 있는 산의 지명이 사랑스런 아가씨란 뜻이란다. 산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동쪽에 있는 석인상의 이름을 사랑스런 아가씨로 지어주면 어떨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18살 사랑스런 아가씨로 불러주면 어떨까.
촐롱의 부모가 거주하는 게르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게르가 어디쯤 있느냐고 물으니까 웃으면서 산너머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자기도 1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기 때문에 게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단다. 이동하기 때문에 찾으면 된다.
누구에게나 고향에 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촐롱은 신이 났는지 어릴 때 있었던 추억거리를 들려준다. 여섯살 때 할아버지(외할아버지)와 함께 염소를 보러 나갔다가 길을 잃었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비오는 밤이 무서워 말 밑에 안장을 깔고 앉아 있었다. 일곱 살 때 누나(이모)와 함께 낙타 달구지를 끌고 소똥을 줒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어 낙타를 붙잡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찾으러 나왔다.
몽골의 가족제도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유지된다. 남녀평등의 개념은 사회주의 이전부터 있었던 유목민들의 특징이다.
16시 드디어 촐롱이 게르를 찾았다. 세 개의 게르가 보인다. 차들도 보인다. 촐롱의 고향에 온 것이다. 촐롯트강(돌이 있는 강)에서 돌처럼 강하게 살라는 뜻으로 외할아버지가 촐롱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늘까지 촐롱은 이름처럼 강하게 살아왔다. 인구 2,500명 밖에 안되는 작은 바인차강솜(군)에서 모스코바 사범대학에 유학하고 있는 것은 큰 자랑거리일 것이다.
옛날에는 촐롯트강에 물이 많아 목욕도 하였는데 지금은 비가 와야 흐른다고 하였다. 비가 왔는지 제법 물이 고여 있고 소들이 물을 먹고 있다. 큰 돌들이 많이 보인다.
촐롱이 손님들을 데리고 온다고 미리 연락을 하였는지 임시로 게르를 만들어 놓았다.
유목민들의 이동식 천막집인 게르 : 출입문을 남쪽으로 내었고 중앙에는 2개의 기둥이 있다. 흰천으로 덮인 둥근 천정에는 4개의 줄로 단단히 묶어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가운데 구멍을 만들었는데 낮에는 환기를 시킬 수 있고 밤에는 덮는다. 겨울에는 난로를 놓고 연통을 뺄 수 있게 만들었다. 당구 큣대 크기의 버드나무 막대기를 서까래처럼 우산살 모양으로 얹었다. 둥글게 만든 벽은 격자 모양의 나무로 연결하였는데 말총으로 단단하게 묶었다. 양털로 짠 덮개를 둘러쳤다. 옆으로 3번 줄을 매어놓았다. 겨울에는 몇 겹 덧씌운다. 바닥에는 깔판같은 것을 깔아놓았다.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은면 안된다. 기둥 사이로 사람이나 물건이 왔다갔다 하면 안된다. 2개의 기둥 뒤에는 상이 놓여 있다. 일종의 음식상인 셈이다. 준비해간 선물은 처음 게르에 들어갈 때이 상에 놓으면 된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사탕, 초콜렛, 일회용 라이타, 스타킹, 양말, 비누, 치약, 담배, 볼펜, 손수건, 화장품 등이다. 남자들은 담배를 좋아하고, 여자들은 화장품을 좋아한다. 특히 즉석 사진기로 사진을 빼주면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다. 최고의 대우란 게르에서 공짜로 잠을 잘 수 있고, 염소 허르헉 요리와 운좋으면 타르박 요리를 먹을 수 있다.
북쪽 방향에는 불상이나 가족 사진을 놓고 손님이 오면 북쪽에 모신다. 북쪽이 상석인 셈이다. 생활도구를 넣어두는 궤는 원형을 따라 놓아둔다.
아이락이 들어왔다. 막걸리와 비슷한데 흰색이다. 잘못 먹으면 설사를 할 수 있다. 물도 없고 목욕할 수 없는 곳에서 설사가 나면 큰일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숙성이 잘못되고 변질된 것을 먹으면 설사를 할 수 있단다.
식도락가의 말을 빌리면 그 지방의, 그 나라의 자랑거리인 음식을 맛보는 것이 최대의 즐거움인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않겠는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왔는데 안먹을 수야 없지 안겠는가. 설사할 때는 설사를 하더라도.
고비에서 나는 아이락이 가장 좋다. 남쪽 고비에는 아이락이 없다. 가장 좋은 아이락은 가을에 만들어진다. 가을에는 풀이 다르고 말이 그것을 먹기 때문에 17도 까지 올릴 수 있다.
아이락 만드는 법 : 소가죽통에 먹다남은 아이락, 혹은 효소를 넣고 새로 짠 말젖을 넣는다. 그리고 3천번 이상 막대기 끝에 구멍이 뚫린 도구로 젓는다. 숙성이 잘된 것은 흰빛이 나며, 걸죽하면서 달고 시큼하다. 숙성이 잘못된 것이나 변질된 것은 걸죽하지 않으며 신맛이 난다.
촐롱의 아버지가 아이락을 따라준다. 두 손으로 그릇을 들고 막걸리 마시듯 먹으면 된다. 깨끗하게 비워버리면 벌로 3잔을 받아야한다. 먹다가 바닥에 조금 남겨야한다. 조금 남기면 다시 가득 따라준다. 사양하면 안된다. 먹기 싫거나 배가 부르면 그냥 놓아두면 된다.
물 대신 아이락을 먹는다. 촐롱의 외할아버지는 하루에 2L-3L를 마신다고 하였다.
촐롱의 집안은 옛날부터 아이락을 잘 만들기로 소문이 나있다. 휴가철에 아이락을 먹기 위해 울란바토르에서 160km를 달려온 친척도 있었다.
초원에 난 여러 갈래 길에서 차들이 오고 짐승떼를 몰고 나갔던 젊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말을 타보라고 하면서 길들여진 놈으로 끌고 왔다. 말이 사람을 태운다. 말타기를 할 때는 왼쪽에서 타며 왼발을 먼저 올리고 탄다. 안장에서 일어서면 달리므로 처음에 조심하여야 한다.
촐롱의 아버지가 하루 자고 가라고 한다. 유목민들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고, 촐롱과 가족들간의 1년 만의 해우를 위하여 하루 묵어가기로 하였다.
촐롯트강에 가서 큰 바위도 밟아보고 물을 먹는 소떼도 구경하고 초원을 걸어보았다. 화장실은 사람이나 짐승이 잘 안가는 곳에 가서 볼일을 보면 된다.
몽골에서는 7-8월이 휴가철이기 때문에 촐롱의 친척이 거의 다 모였다. 무엇보다도 촐롱이 모스코바에서 1년 만에 돌아오고 또한 한국인 손님을 데려왔으므로 염소를 잡는다고 하였다.
염소를 잡을 때 앞다리를 잡고 명치를 칼로 찌르고 그 안에 손을 넣어 손가락으로 대동맥을 끊는다. 염소 1마리의 숨결이 감쪽같이 끊어진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고기와 가죽을 분리시킨다.
염소 허르헉하는 방법 : 각을 뗀 고기를 젖짜는 통속에 넣는다. 미리 구운 돌을 화덕에서 꺼내 고기사에 넣는다. 사이 사이에 통감자, 양파, 소금, 고추처럼 생긴 양념과 물을 넣고 통을 밀폐시킨 후 불을 때면서 끓인다. 통풍 구멍이 뚫린 화덕은 사방이 막혀 있고 나무와 말린 소똥을 땐다. 고기가 익으면 통속에서 꺼낸다. 익은 염소고기와 담백한 국물과 통감자를 함께 먹는데 기막히게 맛있다. 고기를 꺼낼 때 뜨거운 돌도 함께 꺼내는데 공기놀이하듯 양손에서 왔다갔다 하면 몸에 좋다고 하였다. 이것도 손님 먼저 하라고 한다. 돌을 땅에 떨어뜨리면 웃음거리가 된다. 뜨겁고 서툴렀기 때문에 몇 번 떨어뜨려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던 사냥꾼이 돌아오는데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타르박을 잡아가지고 왔다. 생김은 토끼와 비슷한데 무게가 많이 나갔다. 쥐과에 속하는 타르박은 떼를 지어 땅굴을 파고 산다. 초원에 있는 큰 굴들은 대부분 타르박이 파놓은 것들이다. 타르박의 강한 호기심을 이용하여 잡는 독특한 사냥법을 쓴다. 헐렁한 흰색 옷을 입고 흰말 꼬리털을 매단 막대기를 흔들어 타르박의 시선을 빼앗으며 가까이 접근하여 때려잡는 독특한 사냥법이다. 현재도 이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총으로 머리를 쏘아죽인다. 머리를 쏘지 않으면 보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르박 사냥법을 들으면서 다람쥐를 생포하여 용돈을 쏠쏠하게 벌었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긴 막대기 끝에 올가미를 만들어 다람쥐 앞에서 흔들면 앞발로 올가미를 뒤집어써 잡힌다. 다람쥐가 미국과 일본에 수출되어 외화를 벌어 들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미련한 다람쥐, 미련한 타르박…
아니다. 인간이 동물의 생태를 역이용하는 교활함일 것이다.
타르박 보독하는 방법 : 털가죽을 손상시키지 않고 내장과 고기를 떼어낸다. 내장은 버리고 고기의 각을 작게 떼어내 달군 돌과 양파, 소금 등의 양념과 함께 넣는다. 머리는 떼어내 버리고 모가지 부분을 단단히 묶는다. 도치램프를 이용하여 털을 끄슬리며 굽는다. 안팎에서 열을 내는 원리를 이용한 요리법이다. 껍질을 태운 고기가 맛이 있다. 안에서 익은 타르박도 담백한게 기막히게 맛이 있었다.
행운이었을 것이다. 여행 첫날 좋은 아이락을 맛보고 염소 허르헉하는 방법과 타르박 보독하는 방법을 동시에 다 구경하였으니 분명 행운일 것이다. 촐롱의 게르에서 잠자기로 한 결정은 잘한 일이다.
오후 9시 30분 시원한 바람이 초원을 지나간다. 서쪽 하늘에는 일몰이 시작되려는지 엷은 구름으로 가득하다.
사방에 흩어졌던 가축들이 게르를 향하여 몰려온다. 말탄 애들과 젊은이, 그리고 검은개 3마리가 가축떼를 몰고온다. 말, 소, 양, 염소는 몇 마리인지 세지 않는다. 대신 자기 가축들의 특징을 다알고 있다. 말 1마리에도 360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염소와 타르박이 요리되는 시간에 가족들이 모여 배구를 한다. 초원의 배구. 말만 들어도 멋있다. 방금 가축떼를 몰고온 젊은이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몽골 장기(샤타르)를 하는 여유도 보인다.
여러 갈래 길에서 트럭과 오토바이가 몰려온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모습이지만 몽골평원에 불어오는 강력한 변화의 바람이기도 하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외할아버지가 전 가족과 친척을 데려와 인사를 시킨다. 유난히 형과 누나라는 호칭이 많다. 여기서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형이라고 지칭한다. 아버지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자은 삼촌동생이라고 부른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이거나 어머니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들을 누나라고 부른다. 어머니 형제들 중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여자는 누나동생이라고 부른다.
촐롱의 외할아버지는 우리가 선물한 소주를 한 잔씩 서열 순으로 돌렸다. 12시에 끝났다. 인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온 사람들은 트럭을 타고 돌아간다.
하늘에 있는 별들이 모두 초원을 향하여 쏟아지는 것같은 밤이다. 초원에 누워 별을 보며 잠을 잤으면 좋겠다.
바람소리 때문에 깨었다. 7월 31일 새벽 5시 였다. 바람이 세차게 게르를 때린다. 어제 밤에 초원에 누워 별을 보며 잠을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객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말들이 보이질 않는 걸로 보아 벌써 가축떼를 초원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하늘에 반달이 걸려 있다. 태양은 지평선에 모여있는 얇은 구름층을 뚫고 찬란하게 떠오른다. 일출 광경은 어디서나 보아도 황홀하다. 산에서 솟아오르던 울란바토르, 울란우데, 타이가숲에서 떠오르던 동바이칼의 엥할록, 울란바토르행 기차를 타고 오며 본 일출이 제각각이다.
작은 주전자에 담긴 물이 양치하고 세수할 물이다. 물이 귀한 곳이기 때문에 아껴야 한다. 물이 떨어지면 사람도 가축도 죽는다. 물이 흔한 동바이칼의 엥할록에서도 물을 절약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침식사는 수태차와 빵을 으름(우유로 만들며 쨈과 같음)에 발라 먹었다. 올이 굵은 국수를 수태차에 말아먹는 것도 괜찮았다.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한다. 8시 40분 촐롱의 가족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촐롱의 사촌동생에게 라이타를 선물하였더니 좋아한다. 가슴을 부딫치며 양쪽 볼을 부비는 몽골의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바인차강솜을 지나 풀이 아주 작은 초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준비해온 아이락을 한잔 하였다. 미터기가 17857km에 멈추어 있다.
데렝에서 경주마를 훈련시키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경주마는 다른 말들과 격리시켜 매어놓는다. 말의 몸통을 덮개로 씌웠다. 땀을 내어 무게를 줄이려는 훈련의 방법일 것이다. 기수는 끊임없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말과 교감한다. 마치 시골 농부가 밭갈이할 때 소를 부르던 소리와 비슷하리라.
솜 나담에 출전하기 위하여 훈련하고 있다고 하였다. 투브 아이막에서는 8월 달에 별도로 나담을 한다. 전국적인 나담축제는 울란바토르에서 7월 11일-13일 까지 거국적으로 열리며 전통적인 3대 민속경기인 말타기대회, 씨름대회(버흐), 활쏘기대회가 성대하게 치루어진다. 옛날에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1921년 사회주의혁명이 달성된 7월 11일을 기념하는 전국민의 축제형태로 바뀌었다.
아이락을 먹고 쉬어 가란다. 필요하다면 재워줄 수도 있단다.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게르 안에는 나무침대가 둘, 생활용품을 넣어두는 궤가 4개, 북쪽에는 사진틀 2개가 정리되어 있었다.
사탕과 초콜렛, 손수건을 선물로 주었다. 학교다니는 아이들에게 볼펜을 하나씩 주었다. 담배를 남자들에게 권했더니 여자들도 달라고 하였다. 여자들도 담배를 피우는 걸 또 잊어먹었다.
애들 3명이 한국으로 돈벌러갔고 1명은 헝가리로 갔다. 사진틀 속에는 한국에서 찍은 사진도 들어있다.
11시 20분 작별인사를 하자 잘가라며 유제품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포르간의 미터기가 17907km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1시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자 초원에는 풀보다 모래가 많아졌다. 드디어 사막에 온 모양이다. 가도가도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며 나타났다. 가끔은 색다른 모습도 나타난다.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 때문에 사막여행이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초원에서 시동이 꺼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낡은 차를 만났다. 낡은 차는 짐을 가득 싣고 있었다.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몽골인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내일처럼 도와준다. 언제 이런 어려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동을 걸어주었다. 우리는 대신 바위그림이 있는 정확한 장소를 물어보았다.
한참동안 우리와 평행선을 달리던 낡은 차는 다른 길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다시 손짓으로 알려준다. 멀어져가는 낡은 차에는 할아버지와 운전기사와 아이가 타고 있었다. 여자는 없었다. 게르를 설치할 장소에 미리 가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한국으로 돈벌러간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혼하고 어디론가 가버린 것은 아닐까.
멀어져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인천공항에서 울란바토르로 올 때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간다는 얌이라는 여자가 짐 하나 들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 떠올랐다. 짐이 많아서 통과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작은 상자를 테이프로 꽁꽁 묶었는데 사탕이라고 하였다. 의심나면 풀어보이겠다며 서툰 한국말을 했다. 여행자 신분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야박함이 이제야 후회스럽다. 우리는 너무나 메마른 인정 속에 이웃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오지 않았는가.
몽골인이 한국인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첫째 2살 때부터 말타기를 배운다. 둘째 열상 이상이면 무엇인가 일을 한다(세차, 이동전화, 장사, 구걸 등) 셋째 상대방이 잘못했다면 바로 따진다. 넷째 곤경을 당한 상대방에게 도움을 준다.
오후 1시 20분 우연히 게르를 설치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게르를 설치하는 광경을 보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동바이칼의 엥할록에서 울란우데로 돌아오는 길에 러시아인 장례식을 본 행운이 계속 좋은 일만 생기게 하는 모양이다. 염소 허르헉, 타르박 보독, 경주마 훈련, 게르 설치 광경, 코담배피우는 법 등 귀한 일만 보았다.
우리는 담배와 사탕과 초콜렛을 선물로 주며 사진을 찍겠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주인은 아이락을 대접하였다. 이틀동안 다른 아이락을 세번째 맛보고 있다. 코담배도 권한다.
코담배피우는 방법 : 코담배통을 오른손으로 받아 뚜껑을 열고 살짝 떠서 코에 대고 소리나게 맡은 다음 주인에게 오른손으로 돌려준다.
2시 10분. 델게르 촉트의 바위그림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바위들이 풍화작용에 의하여 훼손되고 있었다. 양기르(산양), 사슴 등이 면그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바위그림을 본 후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었고 촐롱이 싸가지고온 올이 굵은 국수와 염소고기와 타르박고기도 함께 먹었다.
3시 10분. 2번째 바위그림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여기에는 대형사슴이 그려져 있었다.
대형사슴이 그려져 있는 바위그림을 뒤로 하고 또 달린다. 초원지대에서 보기 드물게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갔다. 아주 색다른 모습이다. 유적이나 좋은 풍경을 보고자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또한 운전기사 엥헤는 험한 바위길을 잘 달린다. 처음 계약하였던 이스타나 승합차로는 이런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길로 갈 수 없으면 몇 시간 돌아가야 한다. 사막에 와서 보니까 차를 포르간으로 교체한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고 여겨졌다. 많이 염려했던 것처럼 뛰지도 않고 목도 아프지 않다. 이스타나 승합차는 아스팔트길이나 좋은 초원의 길이 제격이다.
바위가 많고 나무가 많은 곳에 수드트(수드:약용식물) 폐사원이 나타났다. 이 사원은 밖에서 보이지 않게 요새처럼 바위 속에 숨겨져 있었다. 주어진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만든 이 사원은 건물 벽을 황토흙으로 견고하게 만들었다. 사원 위의 바위봉우리에 올라가면 넓게 트인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멀리 돌아온 포르간 2대가 수드트 폐사원 앞에 멈춘다. 서양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들도 폐사원을 보고 바위봉우리 위로 올라가 사방을 조망한다.
5시 10분. 아다착에 도착하여 기름을 가득 채웠다(1L-310투그리). 포르간은 양쪽에 기름 탱크가 있고 안에는 플라스틱기름통이 하나 있다. 사막을 여행하는 전문 차량인 것이다.
6시 40분. 아르샹트(샘물, 온천, 약수)에 도착하였다. 풀들이 아주 작았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이들이 어린 사슴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8시 20분. Dutiin shohio비를 보았다. 1640년 청나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촉트 타이지가 애쓴 것을 비석에 새겼다고 한다. 주변에는 바위그림도 많다. 흐리더니 간간이 비가 내린다.
초원길이 고속도로다. 시속 70km로 달린다. 바위 위에 앉아있는 덩치가 큰 독수리도 보인다. 초원은 노을에 의해 황금색으로 빛난다. 노을이 서쪽에서부터 북쪽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노트에 씌여지는 글씨도 빨갛게 보인다.
9시 40분. 델게르항(빛나다) 솜에 도착하였다. 미터기는 18,182km를 가리킨다. 늦은 시간이므로 잠잘 곳을 찾아야한다. 델게르항솜의 인구는 2,500명, 8년제 학교가 있고 학생은 300명이다.
숙소를 구하는 것은 촐롱의 몫이다. 군수에게 우리를 몽한 학술연구단이라고 소개하여 솜의 숙소를 싸게 빌렸다. 1인당 2000투그리 였다.
밥을 하고 카레와 짜장, 김치, 고추장 등을 동원하여 모처럼 한국식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11시 30분에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휴지로 간단하게 하여 정리한 후 한 양동이 물로 양치하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발까지 닦았다.
8월 1일 6시에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덕분에 델게르항솜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 이 작은 솜에도 크게 지은 사회주의식 건축물의 특징이 보인다. 크게 지어진 건축물은 폐가와 다름없는 것들이 많았고 보수하지 못해 낡은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공중화장실이 2개 있는데 하나는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멀리 높은 산이 보인다.
6시 40분 경부터 태양이 엷은 운무층을 뚫고 빛줄기를 하늘로 보내며 비상을 준비한다. 약간 언덕진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광경이 장관이다. 까마귀떼가 여러 소리를 내며 아침을 맞이한다.
우리에게 숙소를 안내한 사람은 사회주의 시절에는 트랙터기사로 초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5년 전에 솜에 취직하여 잡일을 하고 있다. 40살이라고 하는데 50살도 더 넘어 보인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9시가 넘었는데도 솜에는 출근하는 사람이 없다. 출근시간이 몇시인지 모르겠다. 7-8월이 휴가철이기 때문일까?
출발 직전 그에게 아이들 나누어주라고 사탕과 초콜렛을 한 움큼 주었는데 주머니에 넣고 아이들에게는 하나도 안주는 게 아닌가. 이제야 그들 습성 하나를 알았다. 자기에게 준 것은 전부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아버지와 자식 간에도 자기 물건은 주는 경우가 없다. 살기 힘든 풍토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옆에 있던 아이들에게 다시 사탕과 초콜렛을 나누어주고 9시 8분에 출발하였다.
물이 고여있던 웅덩이에는 물이 없고 얼음이 얼어 있는 것처럼 하얗게 보인다. 호지르(말이 먹는 염분)라는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TV에서나 본 여우를 보았다. 초원에 숨어 있다가 눈깜작할 사이에 언덕을 넘어버렸다.
10시 30분 경 투르크시대(AD6세기-8세기)의 무덤과 순장한 무덤을 보기 위해 정차하였다. 미터기가 18,235km에서 멈추었다. 무덤 남쪽에는 사슴돌이 있다.
11시 20분 몽골산맥을 통과하였다. 사막이 끝나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초원에는 나무가 보이질 않는데 사막에는 나무가 보인다. 초원에는 나무가 있고 사막에는 나무가 없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또 틀렸다. 모래와 관목, 국화같은 노란꽃이 만발한 사막을 뚫고 타르닌강에 도착하였다.
타르닌강에는 작은 풀이 많았다. 차힐닥과 데르스란 풀이 물을 가두어 흙이 둥글게 올라온 게 엄청나게 많다. 그만큼 물이 많다는 증거이다. 이 풀은 뿌리가 10m나 내려가기도 한다. 초원의 물저장고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소똥과 동물뼈가 즐비한 이곳에서는 송장메뚜기소리도 요란하다. 고비가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12시에 타르닌강에서 출발하였다.
1시간쯤 달렸을까. 가까이 보이던 산이 더 멀리 보인다. 모래언덕이 도시의 아파트처럼 보인다. 착시현상이었을까. 아니면 신기루를 보고 있는 것일까. 쌍봉낙타도 보이고 여행자를 위한 게르도 보인다. 처음으로 아스팔트길을 만났다. 몽골 알타이 여행사란 한글 표지판도 만났다.
엘슨 타사르 하이(여행자 숙소 겸 식당)는 울란바토르, 아르바이헤르, 하르허린으로 가는 방향의 삼각점에 있었다. 미리 예약한 한국사람들이 있어서 음식의 여유가 없다고 하였다. 보츠(만두)가 조금 있다고 하였다. 친절하게도 밥과 라면을 할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하여 주었다.
오후 2시 20분 쯤 하르허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하르허린으로 가는 길 주변의 초원에는 거의 풀이 없어 땅색만 보였다. 초원길을 달리다 아스팔트길을 달리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1시간 정도 지나서 흉노, 돌궐, 몽골의 중심지였던 하르허린의 에르덴 조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하르허린 : 우브르항가이(내, 배)에 있는 옛날 도시. 오르콘분지에 있는 검은 자갈밭(투르크어)이라는 땅. 화산폭발이 있었으며, 오르콘강이 흐르고 에르데 조 사원이 있는 인구가 17,000명인 몽골에서는 큰 도시에 속한다.
오르콘강이 흐르는 곳에 옛날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체덴발이 사용하던 별장이 있다. 현재는 여행자 숙소로 제공되고 있었다. 버드나무숲이 우거져 있고 별장 건물 양편 화단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목욕물이 주어지며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 별장 건물은 1인당 20,000투그리, 게르는 10,000투그리 였다. 배낭여행자의 숙소로는 너무 비싸 인근에 있는 싼 게르를 골랐다.
내일의 숙소를 미리 정해놓고 4시에 위그르시대의 도성(840-920년경)을 찾아나섰다. 1시간 후 어울항가이(어울-북, 등. 항가이-꽃이 많은)의 카라발가순성에 도착하였다. 우브르항가이와 어울항가이의 경계선인 호통트(옛날에 이슬람교를 믿던 마을)솜에 성이 있다.
오르콘강은 하르허린부터 하류로 내려오면서 동서의 길이가 더욱 길어지는 분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거대한 분지 속에 폐허가 된 성벽이 한 때 이 곳을 지배하였던 위그르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성벽을 따라 관계수로의 흔적도 보이고, 도망자를 감시했을 망루의 흔적도 보인다.
이시대의 물류기지 역할을 했을 성터에는 정적만 흐르는데 새떼가 낮게 날고 양과 염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깨어진 비석도 그들의 비운을 웅변해준다. 초원에는 주인이 바뀌면 전시대의 것들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전통이 있다.
5시 20분 출발하였다. 미터기가 18,426km를 가리킨다.
얼마 못가서 타이어가 펑크났다. 운전기사 엥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솜씨좋게 타이어를 교체한다. 땀을 뻘뻘흘리며 바퀴를 꺼내고 튜브를 꺼내어 평크난 곳을 찾아 쇠줄로 문지르고 접착제를 바른다. 엥케를 도와주기 위하여 한쪽 손잡이가 없는 타이어펌프를 이용하여 열심히 바람을 넣는다. 망치로 타이어의 상태를 파악해보려고 텅텅치기도 한다.
카레이서 출신이라는 엥케의 정비솜씨는 수준급이었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검으며 팔뚝이 굵다. 28살 나이로는 배가 너무 많이 나왔다. 배가 나온 것은 권위의 상징이다. 아무리 배가 나온 것이 권위의 상징일지라도 변화하고 있는 몽골이지 않는가. 배에 찬 복대가 보일 때마다 싱긋 웃는다.
초원길을 달리는 운전솜씨도 최고다. 1960년대 우리의 시골길을 달리던 트럭운전사와 비슷하다. 그때 그들이 최고의 신랑감이었듯이 몽골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달 월급이 3만-5만 투그리인데 그는 5일동안 20만 투그리를 벌었다. 물론 이렇게 운수좋은 달은 6월, 7월, 8월 뿐이다.
6시 40분. 타이어를 교체하고 출발하였다. 1시간 후 샤르골린 다와(노란강의 언덕)에서 운전기사는 오브를 향하여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더니 차를 멈추었다. 왜 3바퀴를 돌지않는냐고 하였더니 씨익 웃는다.
10살 정도의 아이들이 아이락을 팔려고 말을 타고 달려온다. 나이를 물으니까 15살이라고 대답한다. 이아이들도 나이를 올려 대답한다. 아이락 1잔에 100투그리라고 하였다. 촐롱이 먼저 아이락 맛을 보았다. 맛이 좋단다. 나이를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락을 안먹는다고 하니까 10살, 11살이라고 하였다.
조금더 체체를렉 쪽으로 가자 체케르 타미르(힘이 좋은)강이 보인다. 강을 따라 길게 나무가 늘어서 있다. 강주변에는 물저장풀이 많아서 흙이 봉긋봉긋 솟아올라와 있다. 강가에는 소와 함께 샤를락(소와 야크 털과 뿔도 유용하게 쓰인다.
드디어 오늘 여정의 끝인 체체를렉(정원)에 도착하였다. 8시 40분 어울항가이의 아이막에 도착한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심에는 나무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도시 체체를렉. 서쪽 능선은 동산처럼 보이고 북쪽은 바위산으로 나무도 있고 제법 웅장하다. 해지는 쪽에서 약간 우측으로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보인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페인트칠을 하여 불상을 가렸는데 지금은 칠이 벗겨져 볼 수 있다.l 도심보다는 북쪽 능선에 게르가 많이 모여 있다.
훕친 어르트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여관보다 못하다. 1인당 2500투그리, 침대없이 바닥에서 자면 1500투그리, 사워를 하려면 2000투그리를 별도로 내야한다. 아래층에 식당이 있기 때문에 방에서 식사준비를 하면 안된다.
호텔에서 잡일을 맡고있는 돌람수렝이라는 여자는 서른 살로 제법 뚱뚱하다. 울란바토르에서 의학과를
전공하였는데 일자리를 찾아 여기까지 와서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다.
9시 30분. 해가 서쪽의 바위동산으로 가라앉는다. 해가 뜰 때처럼 빛줄기가 구름을 뚫고 부채살 모양으로 퍼진다. 산봉우리에 구름이 걸려있는 틈을 비집고 비추는 빛줄기가 강렬하다.
10시 30분. 저녁식사를 끝냈다. 촐롱과 엥케는 우리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는지 식당에 내려가서 시켜먹겠다고 하였다. 김장구씨도 그들과 같이 먹겠다고 한다. 양고기와 물에 말은 국수를 먹었더니 힘이 난다고 웃는다.
11시가 넘어서 따뜻한 물이 나왔다. 목욕을 하니 기분이 좋다. 손톱의 때도 발냄새도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와 함께 사라지는 느낌이다.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 촐롱의 게르에서 본 북두칠성은 멀리 북쪽 하늘에 보였는데 이틀동안 서쪽으로 많이 이동한 모양이다.
새벽에 너무 목이 말라 깨어났다. 정적을 깨는 개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달무리진 게 보인다. 하늘에는 별이 많지 않다.
동료들은 피곤한지 코를 골며 정신없이 잠을 잔다. 모든 인간은 코를 골며 자는 것이 같다고 한 메카를 순례하던 말콤엑스의 말이 기억되는 밤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밤이 되기를…
8월 2일 7시. 새떼소리가 요란하다. 날씨가 쌀쌀하여 잠바를 꺼내 입었다. 건너편 주유소의 가로등 3개는 아직도 켜져있다. 가로등 주변에는 밤새 죽은 흰나방이 널려 있다.
해가 떠오른다. 동쪽 하늘에 구름이 많아 해뜨는 것이 선명하지 않다.
훕친 어르트호텔을 출발하여 시내에 있는 민속박물관을 관람하였다. 1724년에 건립한 사원을 민속박물관으로 쓰고 있는데 몽골에서 2번째로 큰 박물관이다. 1인당 입장료는 3,000투그리이며 사진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 요금을 내야한다.
어린아이가 늑대젖을 빨고 있는 돌궐인의 조상설화가 새겨진 돌, 앞에는 태양, 뒤에는 달이 새겨진 사슴돌, 18살 처녀의 뼈로 만든 악기가 특히 유명하다.
중심 절에는 몽골인들의 풍습, 전통 생활도구, 무기류, 말안장 등이 전시되어 있고 두 번째 절에는 종교와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사원은 1937년 스탈린의 숙청 때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져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11시. 민속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타이하르 촐로를 보기 위하여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름길도 있는데 공사 중이서 통행이 금지되었다. 어제 해가 넘어가던 그 언덕에 올라 체체를렉을 둘러보았다. 서, 북,동쪽에는 게르가 많다. 언덕을 넘어가자 왼쪽 강변에는 나무가 있고 오른쪽에는 숲이 보인다. 1시간 정도 지나자 나무가 있는 산지가 끝나고 초원이 펼쳐진다. 감자농장도 보인다.
12시 30분. 이흐(큰) 타미르강 또는 허이트(북) 타미르강 부근에서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솟아올랐다. 신기루인가. 정신없이 초원을 달리다가 강건너 바위산과 겹쳐진 타이하르 촐로를 구별하지 못한 의아함 때문일 것이다.
타이하르 촐로 : 초원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 덩어리다. 위대한 바타르나 영웅이 타이하르 촐로 꼭대기에서 바위를 던져 거대한 뱀을 죽인다는 전설이 있다.
포르간은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돌고 멈춘다. 바위 꼭대기에는 오브가 있다. 바위에는 글씨가 많이 쓰여져 있다. 전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기원일 것이다. 주변에는 양떼가 가득하다. 말탄 아이들이 아이락과 머루(보라색 열매인데 맛이 시큼하다)같은 것을 팔려고 왔다.
아이락 한 잔. 위대한 바타르나 영웅이 거대한 뱀을 죽이는 기분으로 아이락을 쭈욱 들이킨다.
나무로 숲을 이룬 타미르강이 바로 옆으로 흐른다. 강물은 차고 깨끗했다. 주변에는 여행자 숙소가 있고 나무그늘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다.
하르허린으로 가려면 체체를렉를 거쳐가야 한다. 돌아갈 때 보이는 산은 기괴한 모습이다. 산의 북쪽 면에는 침엽수림이 우거져 있고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 면에는 나무가 없다.
2시 10분. 다시 체체를렉에 돌아왔다. 엥케는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하였다. 보츠와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재래시장 구경도 하면서 쉬다가 4시에 출발하였다. 미터기는 18,612km를 가리킨다.
5시 10분에 돌무지무덤에 도착하였다. 중앙에 큰 돌무지가 있고 주변에 다섯 줄 정도 딸린 무덤이 있다. 발굴한 흔적으로 중앙의 돌무지가 함몰되어 있다. 현무암 돌들이 많다. 특히 동남, 서남에 무덤이 많다.
5시 50분 샤르골린 다와에 도착하였다. 오브에서 차를 시계방향으로 한바퀴돌고 멈추었다. 말탄 아이가 아이락을 팔려고 왔다. 촐롱이 맛을 보았다. 아침에 가져온 아이락이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 맛이 상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먹으면 틀림없이 설사를 한단다. 좋은 아이락은 걸죽하고 달고 시큼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쉽지만 참을 수 밖에.
오브스(서부) 아이막에서 트럭에 생활도구를 싣고 울란바토르로 이사를 가는 일행을 보았다.
이르쿠츠크에서 울란바토르로 올 때 보았던 모스코바에 가서 물건을 사다가 판다는 가족들, 말탄 아이들이 아이락을 파는 것, 오브스에서 울란바토르로 이사를 가는 모습 등은 현재 몽골 평원에 부는 변화의 바람이리라.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변화의 바람이리라.
오후 7시 30분 하르허린에 도착하였다. 오르콘강이 흐르는 곳에 있는 체덴발 공산당 서기장이 사용하던 휴양소 부근의 게르를 예약했었다. 외국인 3,000투그리, 내국인 2,500투그리란다. 침대가 놓여있는 게르다. 체덴발 서기장이 사용하던 별장을 개조한 숙소에 비하면 굉장히 싸다.
숙소를 관리하는 곳에서 설거지와 밥을 해주어 편했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이 있는 법. 손수건과 스타킹을 선물로 주었다.
저녁을 먹고 배구공을 빌려 축구를 하였다. 이름붙여 초원의 축구, 1인당 1,000투그리를 내기로 걸었다. 배구공을 빌려준 여자아이에게 노트와 볼펜과 초콜렛을 선물로 주었다.
그 여자아이는 가족과 함께 놀러왔다고 하였다. 우리의 학제로 보면 초등학교 6학년이다. 영어를 아주 잘하였는데 매일 왕복 100리를 말을 타고 학교에 간다고 했다. 노트를 모으는 것이 취미라고 하였다. 한국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고 하며 새벽 2시가 넘도록 돌아가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부모가 나와서 데려갔는데 마지못해 발길을 돌린다.
왜 그들은 외국어를 잘하는가. 글자가 없는 사람들의 기억력은 비상하다. 암기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 촐롱이 1996년에 답사하였던 유적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도 그것에 한 부분일 것이다.
8월 3일 7시 구름이 낮게 낀 맑은 날이다. 오르콘강에서 머리를 감았다. 어제 밤에는 날파리가 너무 많아서 강물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아침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1235년 징기스항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오고타이)가 하르허린을 세계물류의 중심지(은본위 경제)로 만들기 위해 성을 쌓았다. 쿠빌라이항이 베이징으로 세계물류의 중심지를 이동하기 전까지 20년 동안 번영을 누렸던 곳이다. 동서 2-3km, 남북 4-5km의 거대한 성을 쌓았다. 4문을 통해서 몽골인, 사신, 군인, 장사꾼이 서로 다른 문으로 드나들었다. 그 후 명의 침입과 내분으로 여러차례 불에 타 폐허로 남았다.
성 입구에는 길이 2m, 높이 1m나 되는 거대한 돌거북이 있다.
이 성은 1949년 몽골과 소련이 합동으로 지표면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현재 궁전 중심지를 독일이 발굴하고 있어 접근이 금지되었다.
몽골의 성은 통치자가 거처하는 장소가 아니다. 포로로 붙잡혀온 사람들이 살았고 물건이 유통되는 물류기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외적을 방어하는 역할은 더욱 아니다.
돌거북 주변에 상인들이 몰려와서 옛날 물건을 팔고 있다. 옛날 돈, 코담배통, 향로, 티벳불교 불상 등인데 비싼 것을 사려면 반출증을 꼭 챙겨야 출국할 때 낭패를 면할 수 있다. 반출증은 에르데 조 사원에서 써준다고 하였다.
에르덴 조 사원의 입장료는 무료인데 절의 내부를 보려면 1인당 3,000투그리를 내야한다. 물론 사진과 비디오 촬영은 별도의 돈을 내야한다.
올해 10학년을 졸업하고 9월에 몽골 국립종합대 일어과 입학 예정이라는 인드라라는 안내원이 안내를 맡았다. 인드라는 친절하고 성의껏 안내하고 설명해 주었다.
이 사원은 몽골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징기스항의 29대손 아구다이항이 1596년 세웠다. 폐허가 된 궁전터의 석재를 이용하여 사원을 건립하였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지었다.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탑이 있는데 99개가 둘레에 있고 9개가 사원 안에 있다.
건물이 모두 62개 였는데 외적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18개만 남았다. 스탈린시대에는 3개의 절만 남기고 파괴되었다. 승려들은 죽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당하였다. 하지만 많은 수의 동상, 전통 탈 탕카는 보존되었다. 이것들은 가까운 산에 묻거나 주민들의 게르에 숨겨졌기 때문에 보존되어졌다. 1944년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1965년 박물관이 되었다.
18살 처녀의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도 있다. 1대 복드한인 자나바드르의 초상도 있다. 황금불탑이 남북으로 2개가 가로놓였다.
서사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는 나이든 3불이 있는데 흙으로 만든 다음 금으로 도금을 하였다. 벽화에는 8가지 성물이 표현되어 있다.
중사에는 가운데 모셔진 불상이 부처의 젊은 시절 모습이고 해와 달, 앞에는 부처를 지키는 수호신(남,녀), 뒤에는 부처의 제자 8명(부처의 사상을 관장하는 제자)이 새겨져 있다. 좌측에는 극락세계를, 우측에는 건강, 행복을 나타내는 부처가 있다.
동사에는 가운데 모셔진 불상은 부처의 어린시절의 모습이고 좌측에는 평화, 우측에는 황교의 수장을 나타내는 부처가 있다.
아요시의 절은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큰 눈을 통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관찰한다.
황금탑에서는 11시에 경전을 읽겠다고 소라로 알린다. 참이라는 불교음악을 할 때 쓰는 탈과 복장도 있다. 노란 복장의 승려들이 경전을 돌려보며 읽고 있다.
사원 북동쪽에는 행복과 번영의 광장으로 불리는 곳에 거대한 게르 터가 있다. 높이가 15m, 지름이 45m, 8개의 기둥을 설치하였던 구멍이 있다. 아구다이항이 겨울철에 돌아와 사용한 게르라 한다. 300명이 모일 정도로 광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에르덴 조 사원에 대하여 성심껏 설명을 해준 인드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손수건을 선물하였다. 뜻밖에도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한다.
11시 40분. 주유소(1L:345투그리)에서 기름을 넣고 울란바토르를 향해 출발하였다. 미터기는 18,738km를 가리킨다. 1시간 10분 정도 지나서 엘슨 타사르 하이에 도착하였다. 식당 안에는 탁자가 4개 있고 가운데는 포켓볼을 칠 수 있게 꾸며져 있다. 벽에는 나무판에 그린 큰 그림이 3점 걸려 있고 일본 달력이 8월에 정지되어 있다.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날은 식탁이 많았고 포켓볼대가 밖에 있었다. 주문을 많이 받아서 물건이 없어 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점심으로 수태차와 보츠(1인당 3-4개 정도 먹으면 된다)를 주문하였다. 보츠 1개는 80투그리다. 디스담배를 800투그리에 사고 큰 카스맥주도 1000투그리에 사먹었다.
2시에 울란바토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아스팔트길인데 많이 파여 있었고 공사구간이 많아 차라리 초원으로 달리는 게 편했다.
3시 50분경 두루미 2마리를 보았다.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졌다. 농사를 짓기 위해 트랙터로 초원을 갈아업고 있었다. 미터기는 18,888km에서 정지되었다.
5시 20분. 룽솜의 토올강 변에서 아이락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강변에는 쉬는 사람들이 많았다. 룽(용) 언덕은 용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대개 여기오면 울란바토르에 다왔다고 하는 안도감에서 쉬고 간다는 것이다. 강가에는 말들이 물을 먹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다. 타르박을 팔기도 한다. 30분 쉬고 출발하였다.
50분 정도 울란바토르 쪽으로 가자 제법 큰 밀밭이 보였다. 밀밭 너머 산에는 야생말 타히가 살고 있다. 타히는 20세기에 멸종되었는데 독일과 스위스에 가있던 종자를 다시 들여왔는데 다행히 적응을 잘 하고 있다고 했다.
엥케가 갑자기 차를 세웠다. 그 바람에 사람들이 한 쪽으로 쏠렸다. 외국인이 타서 시비하려는 것은 아닐까. 엥케가 차에서 내려 경찰관한테 갔다 왔다. 음주단속 중이란다. 룽솜의 강변에서 엥케가 한사코 아이락을 사양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7시 50분 드디어 울란바토르 톨게이트에 들어왔다. 통행료 500투그리를 냈다. 미터기에 19,082km가 표시되었다.
4박 5일 동안 1,406km의 대장정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서서히 대장정의 막이 내리듯 포르간도 천천히 울란바토르로 빨려들어간다.
30분 정도 시내로 들어가자 고려반점이 보인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 와서 내일의 일정을 토의하였다. 토의 결과는 텔레지관광을 포기하고 쉬면서 쇼핑을 하기로 하였다.
8월 4일. 날씨가 흐렸고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반팔티를 입고 활동하였다가는 감기걸리기에 안성맞춤이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텔레지를 포기하기로 한 결정이 아무래도 잘한 것같다.
쇼핑을 나갈 시간인데 소나기가 퍼붓는다. 초원지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비는 줄기차게 내린다. 사람들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다닌다.
쇼핑을 끝내고 비가 그치기를 고대하며 이태준 애국지사 공원으로 갔다.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 선생은 1883년 11월 21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현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여 1911년 제2회로 졸업하였다. 김필순, 주현칙과 함께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독립활동을 하였다. 세브란스 인턴 근무 중 1912년 중국 남경으로 망명하여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다 처사촌이 된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1914년 몽골 후레로 가서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설하였다. 특히 화류병 퇴치에 앞장섰다. 몽골 최후의 황제 주치의가 되었고 황제의 임질을 고쳤다고도 한다. 1919년 몽골 최고의 훈장인 에르데닌오치르를 받았다. 1921년 2월 러시아 백군에 의해 피살되어 38세의 일기로 마감하였다. 묘지는 성산인 비그르(트?)산에 있다고 전한다. 1980년 한국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태준 공원을 관람하고 나오자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었다. 비온 뒤라 햇빛은 강렬하였다.
간단사원을 관람하려고 발길을 돌렸다.
19세기 중엽에 건축된 이 사원은 현재 몽골에서 가장 큰 사원이며 과거 공산정권 하에서 유일하게 종교활동을 보장받았던 곳이다. 1937년 이 사원도 숙청대상이었으나 외국인의 관광시설로 만들기로 하여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입구에 돌사자가 2개 있다. 염원을 기원하는 오브 형태의 철주도 보인다. 광장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있으며 비둘기 먹이를 파는 아이들도 있다.
20톤 규모의 위풍당당한 미그지드 장라이시그 불상은 높이 26m를 자랑한다. 몽골의 모든 이들이 돈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8월 5일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짐을 정리하며 휴식을 취했다.
울란바토르 보얀트오하 공항의 이상 기류로 인하여 대한항공이 이륙하지 못했다고 하는 소식이 전해진다. 내일이면 갈 수 있겠지…
8월 6일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었다. 새떼가 소리를 지르며 하늘로 비상한다. 처음 울란바토르에 왔던 날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사람들의 복장이 어느새 긴옷으로 변했다.
오늘은 비행기가 이륙했단다. 오후 1시 30분이면 비행기에 타고 있을 것이다.
오던 날처럼 고학년 학생들은 야영활동을 끝내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고 그 버스는 다시 새로운 학생들을 태우고 갈 것이다. 버스 4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학생들로 활기에 넘친다.
또 올 수 있을까? 울란바토르여 안녕!
첫댓글 상세한 몽골여행기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아주옛날 유목민 시절 오브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우리의 성황당 역활을했다고 하네요..원래는 말에서 내려 세바퀴를 돌고 온길에 대한 감사와 가는 길에 대한 안녕을 빌었는데...요즘은 자동차 시대라....쩝~~~우리기사는 돌기는 커녕 경적을 세번울리고 가던데...능청스럽게이렇게만해도 된다고 하면서.....^^
아~ 정말 가고시포!
좋은글 감사합니다. 스크랩해갑니다.
좋은글감사합니다.
여행기 잘읽고갑니다. 스크랩해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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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기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운영진이 많아지면 까페규칙을 만들어질 것입니다.
카약타고 내려올때 보던 노란색 버스세워 두고 운동화 비슷한걸 하는것이 몽골의 방학기간중하는 야외 학습이군요....
방학동안 학생들이 야영활동을 합니다. 테를지에는 야영활동을 하는 캠프들이 많습니다.
여기두솔님이 ㅜ.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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