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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7, 27
20일 밤 태국으로의 출발은 또 다른 기분이었다. 1967년 아세안의 설립당시 주도국 5개국에 들어가는 동남아의 선진국, 인도네시아는 처참히 허물어졌어도 아직 강건해 보이는 나라, 1997년 외환위기의 시발국, 바트라는 돈의 단위가 어느 나라 것인지를 알게 한 나라, 신문광고에 항상 뜨는 가장 싼 관광을 즐길 수 있는 나라, 국왕이 존재하며 존경받는다는 나라, 성전환수술의 대국, 여장 남자가 많은 나라, 더러우면 더러운대로 보여주며 외화를 버는 나라, 한번도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은 갈대외교의 대국, 성스런 인사법과 공창제도가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나라…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태국의 이미지였다. 인도네시아는 수없이 드나들어 이제 몇번 갔는지 모르겠으나 태국은 처음이었다.
자카르타에서 방콕은 싱가폴에서 잠시쉬는 시간까지 5시간쯤 걸린다. 한국에서 마닐라까지 4시간이니 자카르타에서 방콕도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비행기가 뜰 때마다 느끼는 아련한 기분, 언제 이 나라 또 오나하는 기분, 인도네시아는 예외이지만… 내 옆에 앉은 스페인 여자는 옷도 이쁘게 입고 얼굴도 이쁘나 이상하게 표정이 어둡다. 이 여자도 내가 한국에서 떠날 때와 같은 고민이 있는 것일까? 뒤적이는 여권을 보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이번에도 아랍에서 자카르타로 방콕으로 스페인으로 가는 중이라니 바쁜 여자인가 보다. 비행기가 떴나 하자 싱가폴의 창이 공항에 도착했다 한다. 그 곳에 내려 면세점을 둘러보며 시간을 죽였다. 아니 시간을 죽이다니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는 시간이 돈이기에…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도 시간을 죽이는게 아니라 언제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해외여행중엔 ‘죽이는’ 시간이 종종 있다. 그게 다 공부려니 위안을 한다. 다시 비행기에 오르려니 싱가폴에서 방콕으로 가는 손님이 정말 많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한국말 특히 노인네들의 경상도 사투리가 인상적이다. 효도관광을 가시는 모양.
비행기가 방콕에 착륙한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새로운 나라에 발을 딛는구나. 근데 마중나오신다는 삼성친구들은 나와 있을까? 이렇게 노란바지를 입었는데 못찾기야하겠어? 하며 공항을 빠져 나갔다. 양쪽으로 길이 나 있으니 한 쪽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우습게도 잠시 멈춰 어렸을적 놀 때 외웠던 주문대로 ‘어느쪽이 맞을까요 알아맞춰보세요’ 가 끝나자 마자 왼쪽을 택해 나갔다. 그러자 서서히 보이는 박과장님의 모습. 참 반가웠다. 나에게 하루도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자기들의 선생님인양 반겨주는 박과장님과 김과장님! 은희가 잘 가르쳐 친구인 나도 덕을 보는 모양이다.
호텔로 향하며 느껴지는 방콕은 야트막하고 아늑하다. 너무 늦게 도착하여 많은 것을 볼 수 는 없었으나 도시의 밤풍경이 정겹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김과장님이 예약해놓은 Princeton park hotel. 본인이 장기투숙하고 있는 호텔이기도 하다. 이렇게 깨끗하고 좋은 새 호텔이 아무리 promotion기간이라지만 3만원이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경쟁력 그 자체이지 않은가? 안에 들어가니 더 좋다. 물가가 싼 인도네시아의 여러호텔을 돌아다녀보아도 3만원에 이정도의 침대는 절대 얻지 못한다. 방에 들어가 셋이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내가 직접 가르친 교육생들이 아니므로 이런 대화는 처음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참 스스럼없이 잘 풀린다. 그건 곧 이 분들이 좋은 사람들이란 뜻 아니겠는가? 난 선생님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고 말하는 김과장님은 어딘가 나를 닮아있다. (ㅎㅎ)
두 분이 돌아가고 난 뒤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도 없는 호텔방에 있으면 여기 어딘가 몰카가 있는 것 아냐? 하는 생각이 든다. 오현경, 백지영뿐만 아니라 아무나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세상. 아무도 없을 때 신중하라는 그 옛날 이율곡 선생의 ‘독신(獨愼)’이라는 가르침이 이 첨단 시대의 가르침이라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음날 아침 박영석 과장님과 찾아간 곳은 유명한 Wat Phra Kaew 이다. 방콕은 아침 10시까지 정체가 너무 심해 10시 이후에 움직이는 것이 정석이라 한다. 인도네시아와 같이 일방통행로가 많고 기사는 없으므로 외국인이 혼자 차를 몰고 다니기엔 불편한 도시라 택시를 많이 이용하게 된다. 택시는 인도네시아와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어느 택시나 미터기가 있다. 자타르타에도 미터기 없는 택시가 많고 반둥만 가도 미터기 없는 택시가 즐비한 것을 볼 때 방콕은 많이 발전한 도시이다. 가는 길은 국왕이 존재하는 나라답게 곳곳에 국왕의 커다란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늙고 건강하지 못한 몸에도 전국 곳곳을 순방하며 나라의 발전에 일조하고 있다는 국왕이 인상적이었다. 대학원때 읽은 아티클에 써있기는 아침에 스님들이 공양을 위해 마을을 순회한다고 하는데 이른 아침이 아니어서였는지 공양을 받는 스님은 없고 책을 낀 주황색 스님복을 입은 중들이 간간히 눈이 띈다. 태국은 소승불교이며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자신을 치부하기 보단 금박을 사 불상에 덧입힌다. 이는 산업화가 덜 된 미얀마가 훨씬 더 할 것이나 태국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현재의 삶 보다는 내세의 삶을 위해서이다.
방콕의 10시는 죡자의 10시보다 더 더우면 더 더웠지 덜하지 않다. 찌는 더위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Wat Phra Kaew는 옥으로 된 불상이 있어서 옥으로 된 불상의 절이라고 하는데 서양인들은 에메랄드 사원이라고 한다. 커다란 불당안에 이 사원의 정수인 프라깨우 불상이 있는데 초록색의 불상이 황금옷을 입고 있다. 태국은 여름, 우기, 겨울의 세 계절이 있다고 하는데 (인도네시아에는 없는 겨울이 여기는 형식상이나마 있는 모양이다)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왕실에서 불상에 옷갈아 입히는 행사를 직접한다고 한다. 이 프라깨우 불상은 1464년에 란나왕국의 치앙라이에서 처음 발견된 후 람빵, 치앙마이, 현재 라오스의 북부도시 루앙프라방, 현 라오스의 수도 위앙짠 등으로 옮겨 다녔다고 한다. 그 후 톤부리 왕조의 딱신이 라오스를 정벌하며 가져와 ‘왓 아룬’에 보관하다가 짜끄리 왕조로 왕권이 넘어가면서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제자리를 찾아 왔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1462년이라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30년 이전이고 우리나라에서는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든후 20년후이다. 우리나라가 이조시대 유교의 영향아래 있을 때 태국은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이 유래되고 있었다. 불당앞의 건물의 벽에는 고대인도의 서사시인 라마야나의 태국판인 라마끼안이 그려져 있는데 인도네시아에도 라마야나를 주제로 와양을 공연하고 있음을 볼 때 이 곳 저 곳 인도문화의 강력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왓뿌라께오옆의 Grand Palace는 1782년부터 1789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 시기라면 1789년에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재위한 정조가 아마도 자기 아버지 장헌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수원성을 짓고 서울서 수원을 오가고 있었을 것이다. Grand Palace는 태국양식과 유럽양식이 조화를 이룬 것 같은 아름다운 모습인데 아직도 외빈이 방문하면 이 곳에서 접견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왕궁과 왓 프라깨우에 들어가는 입장권엔 위만멕궁전 입장권이 딸려있어 그냥 들어갈 수 있다고 표파는 아가씨가 가르쳐준다. 얘들은 이렇게 친절하다고 박과장님이 감탄을 하신다.
궁전에서 나와 태국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시어머님은 내가 애들에게 불충실한 점을 나무라시느라 끼때마다 꼭 밥을 먹여야한다고 주장하시지만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나 같은 사람이 국제인이 아닌가? 뭐 이런 생각을 하며 남의 나라 음식을 먹는다. 사실 그 나라에 애정이 있으면 음식도 맛있다. 태국음식은 인도네시아 음식보다 훨씬 먹기 적합하다. 이 나라도 인도네시아와 같이 커피가 무지 강하다. 왜 그리 쓰게 먹는 것일까 의심스럽다.
다음은 Jim Thomson’s House였다. 멍청한 택시기사들은 Jim Thomson’s House라고 하면 못알아 들으므로 National Stadium 근처라고 해야 아는 것 같았다. Jim Thomson은 미국의 장교로서 2차 대전이후 태국에 들어와 태국의 비단 산업발전에 이바지 했다는 그러다가 말레이시아 카메룬을 여행중 실종되었다는 인물. 그렇게 실종되어 더욱 신비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가 살던 집은 전통 태국풍의 목조건물로 보이는데 그 옛날 혼자 살던 집으로 보면 상당히 크고 아름다운 것 같다. 미국이란 나라에서 동양의 한 이름 없는 나라로 흘러 들어와 그 나라에 정착하여 실크 산업발전에 힘썼다니 보통 사람은 아닌듯하다. 그가 사용했다는 침실, 그가 밖을 내다보며 명상했을 창문등을 보며 또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짐톰슨, 그의 이름은 브랜드화되어 그 하우스는 물론 다른 유명한 매장에서도 판매되고 있다한다.
그 곳을 둘러보고 커피한 잔하고 있자니 인니 지역전문가 Leo의 전화가 왔다. 카오산 거리에 있다하여 모두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짐톰슨하우스에서 카오산 거리로 가는 교통수단은 예상외로 수로를 달리는 배다. 짐톰슨 하우스의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72 킬로미터의 수로가 있다고 하는데 그 수로가 교통로로 이용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운하가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다가 겨울이면 얼어 스케이트장도 되는 것을 생각할 때 태국은 물이 얼 일이 없어 항상 배만 다니겠지만 한국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볼수 없는 이런 광경은 참 재미있는 현상이었다. 배가 잠시 쉬는 정류장(?)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출퇴근길 일반인들로 붐빈다. 시커먼 강물위에 떠 있는 수상가옥들은 빈민들이 사는 곳 같다. 인도네시아 철길옆의 낡은 빨래를 널어놓은 작은 집들과 같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며 살까? 누구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누구는 선진국에 태어나 자부심가지고 살며 어떤이는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가난하게 산다. 부자의 정신적 고통과 가난한 이의 고통은 비교할 수가 없다. 가난은 정신적 고통과 함께 육체적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나라에 태어나 그럭저럭 가방끈만 길어 이런 곳을 둘러보는 나는 그저 신께 감사할 수밖에 없다.
배에서 내릴 때는 한 여자가 손을 내밀어 내리는 것을 도와준다. 배에 오르기 전 그녀의 다리가 길어 눈이 갔었는데 바로 그녀가 친절을 베푼다. 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끝까지 감동으로 남는 것을 보면 나도 어디서나 친절을 베풀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약속한 장소로 가기위해 뚝뚝이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했다. 인도네시아의 베모와 같은 이 작은 차는 매연을 마시며 달려야하지만 외국나온 기분을 맘껏 느끼게 해준다. 내가 탄 뚝뚝이 기사는 끼가 넘치는 젊은 남자였던 모양이다. 자기 머리위에 있는 미러로 자꾸 나를 쳐다보더니 내리고 나자 잘가라며 오른팔에 입을 맞춘다. 그 사람이 맛사지보이였다면 어땠을가? 한비야의 태국여행경험을 들어보니 맛사지보이가 자꾸 유혹을 하더라는데…
레오를 만나기 위해 마침내 도착한 카오산로드. 이 곳은 배낭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홍익인간이라는 작은 식당을 겸한 여행사가 붐비는 것을 볼 때 값싼 여행을 하기 위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역인 것 같았다. 카오산 로드는 폭이 12미터, 길이 400여 미터라고 하는데 갖가지 메뉴를 갖춘 식당과 커피숍들을 만날 수 있고, 비싸지 않은 옷과 액세서리들을 마음껏 살수 있다. 여기 저기 늘어져 내 세상이라고 자고 있는 개들의 천국인 것도 같았다. 그 개들이 복날 물량이 달리는 한국의 보신탕집으로 온다니 참 끔찍하다. 뭘 먹고 자란 누구의 개인지도 모르는 개들이 한국인을 찾아 바다건너 오다니… 카오산 로드는 그리 훌륭하지 않아도 문화의 거리라 이름붙어 차들의 통행이 금지되는 한국의 거리와 비슷하다. 너무 비싸지 않아서 정이 가는 거리말이다. 배낭을 메고 자유롭게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나이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이젠 그렇게 다닐 자신도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이젠 잠자리도 깨끗하고 좋은 곳만 찾으며 그런 안락한 곳에서 책읽고 휴식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이가 되었기에 조금은 서글프다.
카오산 로드에서 다음으로 간 곳은 방콕의 유흥가이다. TV에서 보자니 한국인들이 자주 간다고 하는데 어떤 곳인가 조금은 궁금했다. 내가 여자인고로 1단계에도 못미치는 업소에 들어갔는데 번잡한 시장통에 문을 열어놓고 영업을 한다. 아무나 보아도 되는 그리고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업소였다. 불교의 국가가 참 웃기기도 한다. 말레이시아가 제법 엄숙한 이슬람 국가이면서 겐팅하이랜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도박업소를 가지고 있다면, 태국은 누구나 두 손을 모으며 사원이 있는 곳은 어디서나 버스안에서도 인사를 하면서 조금만 들어 가면 퇴폐업소가 즐비한 나라이다. 하긴 우리 나라야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니 할 말이 없다.
호텔에 돌아오니 11시가 넘었다. 즐거운 하루를 넘기며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다음날은 열반의 절이라는 Wat Pho를 방문했다. 김과장님의 말로 이 사원에는 46 미터의 와불상이 있다. 불당을 가득 채우고 웃으며 누워있는 와불상. 높이는 15 미터이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나 우리는 사진을 찍었다. 와불상을 보면 웃음이 난다. 석가는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고행을 선택하여 얼마나 수도만 했던지 그 머리는 달팽이집들로 울퉁불퉁한데 그도 쉬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누워있는 불상은 위안을 준다. 석가는 그 나이에 자비를 외쳤고 예수는 그 젊은 나이에 사랑을 외쳤다. 그 나이라면 모두 영웅이 되길 꿈꾸며 세상을 다 안으려 했을텐데 사랑이니 자비를 외친 그들은 성인임에 분명하다. 어짜피 신앙도 선택. 내가 돈을 선택했다면 돈이 나의 신앙이 될 수도 있고 예수나 석가를 선택했다면 그게 나의 신앙이다. 그렇게 똑똑한 이들이 내세가 있다고 했으면 아마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믿으려고 노력한다.
다음 코스는 왓포 맛사지 스쿨이다. 김과장님은 여기서 자격증을 얻었노라 자랑을 하신다. 열심히 배우고 있는 학생들과 가르치는 선생들이 넓은 방을 메우고 있었다. 태국은 무언가 특화를 잘 하는 것 같다. 공창제도나 마사지 또는 수상시장 등등…
다음으로 간 곳은 Wat Arun 즉 새벽사원이다. 새벽에 가야 제멋을 느낄수 있다고 한다. 싱가폴의 머라이언 파크는 밤에 가야 제 맛이라는데 우리는 항상 우리 시간에 맞춰 다닌다. 배로 강을 건너 왓 아룬에 도착했다. 새벽이 아니라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 사원은 아유타야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톤부리 왕조에 와서는 딱신왕이 왕실 사원으로 재건했다한다. 참 역사가 길기도 하다. 아유타야 시대는 1350년에 열리기 시작한 것 같은데 동남아 최고의 강국이었으며 짜오프라야 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어 거대한 곡창지대를 바탕으로 왕국이 번영할 수 있었다. 1378년에 아유타야의 제 2대왕인 Boromariga I세가 쑤코타이를 아유타야에 합병함으로써 국토를 통일했다. 1511년에는 태국역사상 최초로 서양국가와 수교를 하게 되니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1511년은 여러모로 유명하다. 그 이후 유럽의 각국은 앞을 다투어 아유타야와 수교를 맺었다고 한다. 동남아에 서구 세력이 진출한 것은 일단 냉장고가 없었던 시대에 고기를 신선하게 저장하기 위한 향료때문이었다고 하는데 태국도 그랬을까? 그럼 태국도 후추를 비롯한 향료가 많이 나는가? 어쨌든 아유타야는 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시대였다. 1767년에 아유타야는 지금은 보잘 것 없는 버마에 점령되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776년이 미국의 독립이니 그 바로 이전에 동남아 최강국이 운명을 달리 하고 있었다. 갑자기 태국의 역사로 박사학위를 한 조흥국 교수님이 타이전통의상을 입고 와 강의하시던 생각이 났다. 사람이 한번 들어본 것과 안들어 본 것은 그 체감에 있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비록 태국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어도 여기저기서 들어본 지명과 왕국들을 다시 듣는 것은 생생한 체험이다. 새벽사원은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지 이곳에 걸터앉지 마시고 사진찍지 마시오라는 한글이 붙어 있는데 한국인들은 그 앞에서 꼭 한장씩 사진을 찍고 내려갔다. 김과장님 왈 ‘한국사람은 말을 안 듣거든요?’
다음은 택시를 타고 해부학 박물관에 갔다. 한번 와봐도 길눈이 어두워 잘 모른다며 입구를 찾아 헤매는 김과장님은 참 귀엽다. 나도 길눈이 어두워 한번 간 길은 절대 한번에 못찾는데 저렇게 길눈이 어두워도 공부는 잘 하는가보다하는 생각에 위안을 얻는다.
법의학 박물관은 Forensic Medicine Museum이라하고 해부학박물관은 Anatomy Museum이라고 하는데 내가 가본곳은 법의학 박물관인것같으나 (두 곳을 다 간 것인지) 김과장님께 해부학 박물관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각종 범죄로 살해된 사람들의 신체일부를 보존하고 있고 125명의 어린이를 살해하여 먹었다는 씨우이라는 사내의 미라도 보존하고 있다. 눈뜨고 못 볼 장면이 많은데 왜 전시를 하는 것일까? 왼쪽으로 비스듬히 서 있는 엽기적 살인마 씨우이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끔찍한 관광지이다.
그 박물관에서 나와 태국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Vimanmek Palace로 향했다. 이 궁전은 라마 5세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영어설명에서 라마 몇세라는 말이 수시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왕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 듯했다. 아유타야 왕조가 1767년 버마에 멸망하고 7개월뒤 아유타야의 장군이었던 Taksin이 나라를 재건하고 톤부리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게 되지만 1782년 Chakri장군에 의한 쿠데타로 왕권은 넘어간다. 짜끄리 , 즉 현왕조의 라마 1세에 의해 수도는 다시 짜오프라야강건너로 옮겨져 이 곳이 지금 왕궁등이 있는 지역이라한다. 라마 5세에 의해 지어졌다니 그후로부터 한참이겠으나 몇 년인지 잘 모르겠다. 위만멕궁전은 너무 아름답고 분위기가 좋다고 김과장님이 자랑했으나 그 날은 너무 관광객이 많아 가이드가 일찍 끝내버렸을 뿐 아니라 시끄러워 망쳤노라 아쉬워했다. 그러나 3층 짜리 건물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각각의 방들을 다 돌아보았으니 나는 만족한다. 왕실에서 사용되던 물건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기도 하며 현 왕비가 수집한 수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다. 왕실에서 사용하던 침대는 양쪽으로 우아한 커튼이 쳐진 것이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2시반에 시작한다던 태국 전통춤 공연은 여행책자가 잘못되어 보지 못했으나 대학교때 은희가 추던 태국춤을 회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때가 바로 엊그제 같다. 어떻게 우리에게 20년이란 세월이 흘러갈 수 있을까? 2학년 축제때 태국어과의 어떤 애가 이상한 의상을 입고 나타나 손가락춤을 야릇하게 엄청 잘 추었었는데 그애가 바로 최은희이다. 공부도 잘해 시험때면 도서관에 앉아있는 그 애의 주변엔 책을 들고 뭘 물어보려는 띨띨한 애들로 가득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게 이상한 글자를 해독하려면 하나 잘하는 애가 있어야 하는게 당연했던 것 같다. 물어보는 애들이 꺼벙한게 아니라 은희가 똑똑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향한곳은 World Trade Center이다. 이 곳은 폭탄을 맞지 않았다. 이 곳은 방콕 최대의 쇼핑 및 유흥가이다. 이 곳에 들어선 백화점 매장중 Naraya라는 가방 메이커 매장을 찾았는데 집에 돌아갈 때 선물로 살 가방들이 즐비했다. 1000원대부터 비싸보았자 6000원대이다. 디자인도 적당하고 가볍고 색상도 촌스럽지 않다. 사이즈도 갖가지이다. 실컷 산 것 같았으나 지불할 때 보니 36000원이었다. 박리다매의 원조였다. 더 많이 사올것을하는 후회가 든다. 지금 나의 명단에 없는 사람이라도 나중에 선물을 할 기회가 있을터인데… 이해인의 선물에 대한 단상에 보면 1. 선물할 대상이 선택되면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직접 아니면 간접적으로라도 꼭 알아본다. 2. 상대에게 너무 부담되지 않고 나의 처지에도 맞는 것을 고른다. 3. 물건만 건네지 않고 마음이 담긴 카드를 정성스럽게 곁들인다. 4. 선물받는 이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준다. ‘정성을 많이 들인거니까 절대 누구주지 마세요’등의 토를 달지 않는다. 5. 선물한 것에 대해 너무 자랑하거나 떠벌이지 말고 선물받는 이에게도 나에게도 고요한 향기가 되도록 침묵속에 기도하는 마음을 지닌다. 6. 선물이 허영심과 이기심의 대상이 되지 않게 진정 상대를 위한 것인가, 순수한 것인가 물어보고 아니라면 포기하는 용기를 지닌다. 7. 선물의 습관을 꾸준히 이어가려면 평소에도 늘 생각을 해두고 별도의 상자나 바구니를 만들어 선물이 될 만할 것들을 미리미리 넣어둔다. 이해인의 이 선물에 대한 단상이란 수필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 ‘사람은 떠났어도 선물은 말을 하네요!’라고 내가 말을 하면 그 물건에선 오래 익혀둔 감사의 향기가 난다”라는 구절이다. 늘 기억하고 있었지만 7번을 잊어버려 여분의 좋은 선물을 사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Naraya에서 쇼핑을 한 후 그 건물에서 쑤끼를 먹었다. 스끼야끼, 샤브샤브등과 같은 담백한 음식이다. 커다란 냄비에 넣을 아주 많은 내용물중에 자기가 먹고 싶은 것들은 고르는 것이다. 오늘의 가이드로서 언제나 탁월한 선택을 하는 것으로 믿게된 김과장님의 선택을 따라 맛있게 먹었다. 인도네시아라면 물리아 호텔의 지하식당에서 맛있는 쑤끼를 맛볼수 있다.
6시 30분, 같은 건물에서 28 days later 라는 영화를 보았다. 끔찍했지만 재미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저녁먹고 극장에서 혼자 팝콘을 다 먹었으면서 (권 대리는 안먹는 것 같던데) 밤참으로 신라면을 또 맛있게 드신 김과장님은 인생의 낙이 많은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박과장님의 아파트 아래층에 있는 맛사지 샾에서 태국식 맛사지를 받았다. 만원정도에 한시간을 해주는 전통 맛사지이다. 인도네시아처럼 피부를 문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동네도 이런 맛사지가 있겠지만) 주무르고 뒤트는 맛사지이다. 한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기분좋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마사지샾이 그렇게 어두운 것일까? 어두울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우와! 오늘 정말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했다.
23일. 밤비행기로 집에 가는 날이다. 사실 인도네시아에서 어려운 일이 끝났을때부터 집에 가고 싶기는 했다. 애들한테 워낙 미안했으므로…
아침엔 김과장님과 재래시장을 돌았다. 시계나 목걸이가 얼마나 싼지… 민주에게 줄 은목걸이를 4개 사고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그리고 겨레에게 선물할 시계, 남편에게 줄 목걸이를 하나 샀다. 태국여자들은 인도네시아애들과 마찬가지로 몸에 딱 붙는 스판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옷을 한번 사보려니 모두가 몸에 붙는 것 같다.
재래시장을 돌고 나서 뱀농장을 방문했다. 태국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곳이며 독사 연구를 하기도 한다. 뱀에 관한 슬라이드를 한 30분 보여주고 뒤이어 뱀쇼를 보여준다. 연간 뱀에 물려죽는 인구가 7000여명이나 된다하니 독사연구가 필수 적이기도 할 것이다. 뱀농장은 조금 지루한 기미가 있다. 뱀이 느물거리며 파격적인 쇼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방콕의 명동이라는 싸얌스퀘어를 돌고 싸얌센터에 있는 시즐러에 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태국 시즐러의 돼지갈비를 맛볼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와 먹느냐가 식사의 맛을 결정하는 것 아니겠는가? 태국에서의 식사는 다- 맛있었다. 태국은 어디서나 맘대로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데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 곳에 오기전 수원 남부경찰서의 살인사건을 맡아 통역할 때 형사들에 쫓기다가 넘어지면서 팔을 삔 한 인도네시아애가 김밥을 시켜주자 한쪽 손으로 안간힘을 다해 소시지를 발라내는 것이었다. 보기가 불쌍해 소시지를 골라내고 내가 먹여주었었다. 돼지고기가 옆에 있으면 그 옆의 음식도 의심하는 인도네시아와는 참 틀리는 나라이다.
이제 김과장님은 임무를 끝내고 박과장님과 공항에 가기전까지 방콕을 구경하게 되었다. 싸얌센터의 맞은편에 있는 Discovery center에서 산 물건은 없어도 이것 저것 둘러 보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세일하고 있는 매장마다 여자들이 붐비고 있었다. 일단 방콕의 명동은 한국과 다르지 않다.
다음 일정을 발맛사지로 정하면서 공중전철을 이용하였다. 어제도 한번 이용하였으니 오늘은 보기만 해도 익숙한 기분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정체가 되면 되는대로 대책이 없는 도시이다. 지하철이 없으니 늦으면 핑계가 길이막혀서 이다. 한 시간을 늦어도 ‘macet’ 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약속시간에 늦으면 ‘macet’, 출근을 못하면 친척이 돌아가신거다. 그러나 방콕은 위로 다니는 지상철이 있다. 게다가 어디쪽에서 탑승할지 오른쪽 왼쪽 표시가 명확하게 되어있어 헤멜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도 배워야 할 점인 것 같다. 은행에서 대기표발행이라는 간단히 시스템이 돌아가고 난 후 줄서서 아우성을 치는 일이 없어졌듯 지하철도 이렇게 하면 간단할 것을… 인도네시아에서는 이런 지상철이나 지하철을 만들 돈도 없고 만들어 놓았자 이용할 능력이 없다하니 딱하기 그지없다.
전철에서 내려 한 정거장정도를 걸으며 돈도 바꾸고 길거리 노점상에서 태국의상도 샀다. 각 나라 의상을 사서 입으면 그 날의 삶엔 또다른 향기가 난다. 그래서 사놓고 처박아 두지 않을 정도의 디자인으로 골랐다. 박과장님의 디스카운트 실력이 대단한가 보다. 만족할 만한 가격으로 구입하였다.
앰배서더 호텔근처엔 맛사지 샾이 즐비하다. 그 중 한 곳을 골라 발맛사지를 받게 되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놓고 발만 하는 줄 알았더니 차츰 전신을 맛사지 해준다. 나를 담당한 여자는 혈을 아는지 보통 시원하고 아픈 것이 아니다. 맛사지를 다 받고 났을땐 많은 열량이 소모된 느낌이었다. 이런 애들 데려다 남편의 맛사지 전문으로 고용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재미있게 지내다보니 3일이 훌쩍 지나있었다. 태국에서의 3일은 시간이 지나면 어디를 갔는지 잊어버릴 것이나 곳곳에서 느끼고 경험한 사실들은 나의 인성이 되어 우리 애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젠 집에 가야할 시간! 공항도 가까워 참 편리했는데 공항이용도 쉽게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같이 공항이 너무 멀지 않고 도착해서도 내부가 그리 크지 않아 이용이 편리했다. 태국은 확실히 인도네시아보다 선진국이다. 두분 과장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비행기를 탔다. 나는 아무리 오랜만에 만나도 안녕하세요? 아무리 오래 안 만날 사이라도 안녕히 계세요! 정도로 끝나는 우리식 인사가 정말 맘에 들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사람들은 만나면 반가이 양볼을 대고 키스도 하며 헤어질 때도 그렇게 한다. 남녀간엔 별로 하지 않는 인사지만 나는 모르는 척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적용하기도 한다.
남에게 베푼 보시에 집착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보이지 않는 이웃으로부터 베풀어지는 은총의 살아있는 현장인 것인데 우리는 이 은덕에 대해 고마움을 모른다고 최인호씨가 말했다. 우리는 부모의 고마움을 모르고, 선생님의 고마움을 모르며, 태양의 고마움을, 나무의 고마움을, 만년필의 고마움을 모르는 눈 먼 장님들이라고… 그러면서 남에게 베푸는 자비가 결국 자기에게 베푸는 자비이며 남에게 고마워하는 감사의 마음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고마워하는 愛己의 정신을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하루도 가르치지 않은 나에게 조건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태국의 부르스 브라더스! 두분의 자비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평생 잊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태국에서 이렇게 생활하세요.
Think big! 크게 생각하라.
Study all! 배울만한 것은 다 배워라.
Try now! 지금 당장 시도하라.
Enjoy life! 삶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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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기 아주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까페가 풍성해 지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태국은 5번 방문했습니다. 1989(방콕),1991(방콕,푸켓),2006(방콕),2007(방콕,파타야),2009(푸켓-피피섬)......또 가고 싶은 오묘한 매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옛날에 찍은사진들은 스캔을 떠서 화일로 처리해야 하는데 제가 워낙 게을러서 사진을 올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것 같습니다.~ㅠ
마치 책을 읽는것처럼 흥미진진합니다. 후루룩..속독하기 보다는 정독하고 싶어서 천천이 읽어보렵니다.. 내일 다시 읽을래요~(인쇄해서 읽어보고 싶을 만큼 매력있는 문장체를 만났어요.) 오랫만에 독서(읽음,讀)의 즐거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전에 쓴 여행기인데 매력있는 문장체라니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더 보고싶으시면 저의 블로그를 방문하세요. 네이버나 다음에 '최인혜'를 치시면 블로그에 연결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