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憲(조헌 1544~1592) 이곳은 우저서원 이라고 하는 곳이며 서원은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요즘으로 말하면 중학교 수준의 학교입니다. 서원은 그 지역 출신이나 그 지역과 관계가 있는 훌륭한 분의 위폐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다. 이곳 우저서원은 김포시 감정동 출신의 조헌선생의 위폐와 영정이 모셔진 곳입니다. 조헌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의 선봉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7백 의사와 함께 장렬히 殉國(순국)하신 분으로 어려서 집은 가난했지만 글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웃 동네의 글방에 다녔 서당에 가려면 도중에 여우고개라는 곳을 넘어서 다녀야 하는데, 하루는 서당을 가느라고 이 고개를 넘어가는데 예쁜 처녀가 나타나더니 중봉선생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는 날마다 중봉선생은 기운이 없어 보이고 얼굴이 창백해 보이니까 글방선생님께서 이상해서 물어보셨어요. “너는 어째서 얼굴에 화색이 없고 병색이 되어 가느냐? 너 요새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냐?"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하고 중봉이 대답하자 훈장선생님은 재차 다그쳐 물었더니, 이에 중봉선생은 그안의 일을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은 은 이 말을 듣고 "그 처녀하고 입을 맞출 때, 무슨 구슬 같은 것을 네 입에 넣었다가 다시 제 입으로 가져가지 않더냐?" 하니까 중봉선생이 "그렇습니다." 라고 하니까 "훈장선생님은 그 처녀는 인간이 아니고 여우가 둔갑을 한 처녀인데 네 정기를 빼앗아 가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입을 맞추고 구슬을 네 입에 넣거든 입을 꽉 다물고 돌려주지 말고 거기서 쏜살같이 뛰어 오너라" 하고 일렀어요. 다음날 중봉선생은 훈장선생님이 이른 대로 그 처녀가 입을 맞추자 구슬을 입에 문 채 처녀를 떠밀고는 도망하려 하니, 처녀는 구슬을 도로 빼앗으려고 달려들었었다. 그러면서 뺏고 빼앗기지 않으려 한참 옥신각신 하다 중봉이 그 구슬을 그만 삼켜버리니까 처녀는 슬피 울며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나서 중봉이 서당에 가니, 선생이 그 구슬을 가져왔거든 내어 놓으라고 했다. "여우에게 그 구슬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옥신각신 하다가 삼켜버렸습니다." 하고 말하니 선생은 "어허, 아까운 보배가 없어 졌구나, 너는 그 구슬을 삼켰으니 지리(地理)는 환히 알지만 천문(天文)은 모르게 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전해져 내려오는 중봉 조헌의 다섯 살 때 이야기 조헌이 동네 아이들과 함께 천자문을 배우고 있을 때 집에서 가까운 둥구나무 아래 정자에서 갑자기 나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밖이 소란했다. 마침 마을 사또 행차가 지나가는 길이였다. 같이 공부 하던 아이들은 호기심에 앞을 다퉈 구경하러 나갔으며, 서로 행차 구경한다고 야단법석 이였으나, 아이들이 다 빠져 나가고 정자나무 아래는 조헌 혼자만 남았다. 사또 행차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많았고 혼자 있는 것이 심심했겠지만, 아버지의 분부가 분부인 만큼 다섯 살짜리 조헌은 마음을 가다듬고는 큰 소리로 천자문을 읽었다. 앞길을 지나려던 사또가 어디선가 천자문을 읽는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들려와서, 사또는 호기심이 동해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행차를 돌렸는데, 너 댓살 밖에 안 된 어린 꼬마가 자리에 단정히 앉아 천자문을 줄줄이 외우고 있는 모습이 보여 가던 길을 멈춘 사또는 말에서 내려와 정자 아래 어린 조헌의 책 읽는 모습을 가까이 와서 보고, "허허 그 녀석, 참 기특도 하구나"하며 어린 아이인 중봉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래 네 이름은 무어고 나이는 얼마 인고 ?" 중봉은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사또 말에 대답했다. "그래 이름은 헌 이고 나이는 다섯 살이라, 다른 아이들은 행차를 구경하겠다고 저 길가에 모여들었는데 헌 은 어찌하여 꼼짝도 하지 않고 이렇게 혼자 앉아 천자문을 읽고 있는고?" 하니까, 중봉이 무릎을 꿇고서 말하는데, "네. 마음을 다하여 글을 읽으라는 아버님의 엄한 분부가 계셨기 때문이옵니다.'라고 하니까, "아버님의 엄한 분부라. 그렇다면 아버님의 이름은 어떠하며 너의 집은 어디인고?""네 아버님은 응할 응자에 복지자 이오며 집은 저 건너 구두물이옵니다." 사또가 이렇게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그 대답 또한 막힘이 없었다. 사또는 어린아이가 행동거지나 대답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갖고 있던 부채를 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공손히 절을 하면서 "아니 되옵니다. 아무런 명분이 없이 남의 물건을 함부로 가질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지체 높으신 어르신이 아끼는 물건을 어떻게 감히 가질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 옵지만 거두어 주시옵소서." 사또가 애써서 부채를 주려고 했지만 조헌은 한사코 받지 않았다. 또렷또렷한 대답에다 이런 모습을 본 사또가 마음에 조헌을 새겨뒀다가, 중봉의 부친을 찾아가 "댁의 자제분은 지금은 비록 어리지만 뒷날 반드시 큰 학자가 되어 세상에 도를 심을 것이니 깊이 경하할 일이요" 하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중봉선생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통진 앞바다에 난데없이 대팻밥이 떠 밀려 오므로 사람들이 중봉선생께 무슨 징조인가 물었다. 중봉이 "그것은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침략하려고 수 없이 배를 만드느라고 대패질한 그 대팻밥이 우리 조선에까지 흘러와서 그렇다." 고 말했다. 중봉이 그 여우구슬을 삼켰기 때문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환히 알 수 있었던 것이라 하며, 그 후 몇 년 안가서 아니나 다를까 왜구가 쳐들어 와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는데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이다. 보은현감에 재직할 시에는 당시 충청도에서 치민제일의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는 토정 이지함, 율곡이이선생님과 같은 분에게 가르침을 받았어요. 특히 율곡의 학덕을 기리고 배운다는 뜻으로 後栗(후율)이라 스스로 부르기도 하였다. 1584년 겨울 충청도 옥천군 안 읍 밤 티의 궁벽한 산골로 은거하여 後栗精舍(후율 정사)를 짓고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강학에 정진하는데 힘썼다. 그는 또한 여러 차례에 걸친 강직한 상소를 올렸는데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에는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리며 앞으로 일 년 안에 왜구가 쳐들어 올 것이니 대비를 해야 된다고 하며 제 말을 들어주시지 않으려면 이 도끼로 제 목을 치십시오. 하였으나 받아 드려지지 않아 충청북도 옥천으로 내려가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며 예측대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남의 고명경,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5월에 거병한 그는 충청북도 보은군 수리치재(車嶺)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수차례 의병을 규합하여 8월 1일에는 마침내 의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써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록 조헌선생은 殉國(순국)하였지만 그와 의병들의 활약으로 왜적들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퇴각함으로써 당시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이 회복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의 제해 활동과 함께 다시금 조선이 일어설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후 그는 유학을 천명하고 충절의 의리를 실천하여 조선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묘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포 태생이면서도 옥천이나 금산에서 더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조헌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옥천으로 내려가 후학을 가르쳤고 후손들도 옥천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김포에는 그의 후손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에 용이 하늘로 솟은 못이 있다하여 용소말이라고 하다가 중봉 선생께서 용같이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는 곳이 되라고 붙여진 이름 龍村(용촌). 어쩌면 중봉 선생 그 자신이 용촌마을의 용이라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400여년전 중봉 선생의 혼을 마을 구석구석 찾아볼 수 있는 용촌마을은 국난 극복의 의병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마을이다. 趙憲(조헌 1544~1592)은 호가 重峰(중봉)이며 1544년(중종39)에 태어나 1567년(명종22)에 24살에 문과에 급제 하였다. 1591년 일본의 사신이 오자 왜적에 대비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趙憲(조헌)은 고경명, 곽재우, 김천일과 함께 壬辰四忠臣(임진사충신) 중의 한 분이다. 1754년(영조30)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유적지는 지금 錦山(금산)에 700의총이라는 이름으로 성역화 되어 있다.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의 정자, 호조 좌랑,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沃川(옥천)에서 靈圭(영규)등 승병과 의병 1,700명이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錦山(금산)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치열했던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금산 전투라 일컬어 숭모하게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전쟁이 끝난 다음, 나라에서는 그들의 시체를 한 곳에 묻어주고 '칠백의총' 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들의 장한 넋을 위로했으며, 조헌에게는 높은 벼슬을 내리고, 일등공신으로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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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