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스탈린 시대(1928-53) 1928년 이후 그는 소련의 모든 것을 당이 통제하게 하였고 통제권을 이용하여 경제변혁으로 몰고 갔으며, 신 경제정책 중에 민간인의 소규모 공장들을 국유화하였다. 그는 소련을 1류 공업국으로 변화시키고, 과학기술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농업은 손해를 입었으며, 1937년 농민들을 집단농장에 강제로 이주시킨 것이 큰 사건이 있었고, 그 중에 *한인도 끼어있었다. 사회주의 실현은 스탈린의 이상이었고, 공산주의 이외는 무엇이든 부르주아(가진 자=착취자)로 금지되었고, 1934-40년 사이 강제적인 공업화로 인한 폐해와 혹독한 상황에서 불만을 품은 자들을 부르주아적 혐의로 수백만 명을 체포하여 추방 및 소탕하는 대숙청을 시작하였다. 1939년 독일의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스탈린을 불안하게 했고, 아직 독일과 전쟁을 치를 만큼 강하지 못하였기에 독, 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넓은 영토를 불로소득으로 얻었다. 그것은 폴란드 일부, 우크라이나, 발트 해 연안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합병했고, 핀란드 일부을 점령하였고,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략해 쾌속 진군하였다. 독일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저항이 완강해졌고,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는 전환점이 되어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여 1945년 초에는 베를린에 도착하였다. 2차대전에서 소련의 승리는 초강대국이라는 지위를 얻었고, 동독, 우크라이나, 일본서 양도받은 극동 변경의 식민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동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까지 점령하였다. 점령한 모든 국가는 스탈린의 뜻을 추종하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바뀌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동서간의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스탈린의 공업화운동은 중공업과 군사력에서 미국에 버금가는 나라로 만들었고, 새로운 산업 엘리트가 큰 영광을 누렸다.
*한인(까레이스끼이) 1937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 사이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이 6천㎞나 떨어진 황막한 중앙아시아를 개척하기 위하여 강제이주 당하였다. 우즈베키스탄 16,272 가구에 76,525명, 카자흐스탄 20,170가구 95,256명으로 총 36,422 가구에 171,781명이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주 전 한인 지식인 2,500명을 총살하였다. 또 소리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한인 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며 강제 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강제 이주에 대한 통보 역시 출발 며칠 전에야 이루어졌다. 거의 맨몸으로 정든 땅을 떠나야 했고, 이 와중에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한인들의 농사에 대한 집념은 상상을 초월하였으며, 화물차와 가축 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채 엄청나게 추운 시베리아의 강풍 속을 42일 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하였다. 먹을 것과 물을 전혀 공급하지 않아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정차하면 한인들은 이 때를 이용하여 사람이 먹는 것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구해다 먹으면서 여행을 하였다. 대소변은 기차가 서는 곳이면 역이나 허허벌판를 가리지 않았고, 제대로 먹지 못한 노인과 어린이는 홍역으로 사망하였으며, 한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토굴이나 창고, 마구간 등을 개조하여 겨울을 났다. 방바닥은 맨 땅이었고, 그해 겨울은 길고도 무서운 고통 속에 살았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1938년 인구 표본 조사를 보면 1천 명 당 42명이 사망하였고,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강제 이주 후 1953년까지 약 16년간 한인들은 모든 것이 제한된 일정한 거주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하였으며, 교육이 금지되었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와 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고, 이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가운데서 한인은 벼농사를 시작해 우즈베키스탄은 주요 쌀 농사 지역으로 변화시켰고,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켜 소련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 콜호즈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 영웅을 낳았다. 인구 대비 노력 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인데 이들을 러시아어로 한인이라는 뜻인 '까레이스끼이'라 부른 것은 러시아에서 한인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려가 러시아의 영토였다는 의미라고 한다. 까레이스끼들을 살아남게 한 것은 한(限)이라고 하며, 그래서 한이 많아 한인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주 당시의 움막과 생활 모습> <우즈벡 침간 산 아래 자리 잡은 한인 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