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X일, 다시 백두대간의 한 구간에 도전했다. 1주일 전 백두대간의 [고치령 ↔ 늦은목이] 구간을 산행한 뒤 1주일만에 다시 상업산악회가 이끄는 대간팀에 동행하여 백두대간을 한 칸 더 줄일 심산이었다. 청명한 하늘 밑의 깨끗한 숲속을 6시간여 동안 마음껏 걸을 수 있는 행복한 산행을 기대하였기에, 잠실역앞 S산악회의 전용버스가 떠나는 집합장소로 가는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방법에는 한꺼번에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며칠이고 걷는 방법이 있겠으나, 직장에 다니는 나로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주말의 하루를 내어서 산악회 버스에 동승해서 지리산에서 시작한 종주가 덕유산, 속리산, 소백산과 태백산도 지나고 오늘은 덕항산 구간을 가게 된 것이다.
아침 7시에 잠실벌을 떠난 산악회 버스는 중부고속도로의 치악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한 후 제천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나가 38번 국도에 진입한 뒤 동쪽으로 계속 달려 10시 50분쯤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강원도 태백시 적각동 피재에 산객들을 내려 놓았다. 지난 4월 26일 싸리재에서 금대봉과 매봉산을 거쳐 건의령까지의 한 구간을 가던 중 산불위험을 이유로 이곳에서 산행이 중단되었었고, 오늘은 이곳 피재에서 지난번 목적지인 건의령을 지나 덕항산을 넘은 다음 자암재까지 가야 한다.
오늘은 하늘이 흐려있고 어제 비가 온 관계로 산불위험은 거의 제로일 듯하다. 오늘 가야 할 길이 멀어서인지 산객들은 모두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거침없이 어제의 비에 씻긴 깨끗한 숲속 대간길로 스며든다.
지난 번에 산불방지기간이어서 가지 못했던 부분(피재-건의령)과 다음 구간(건의령-자암재)을 합하여 오늘 운행거리는 17km 가 넘을 것 같고, 자암재에서 대간길을 탈출하여 왼쪽 아랫동네인 태백시 삼수동 귀네미마을까지 가려면 다시 3km 이상을 내려가야 하므로, 전체 걸어야 할 거리가 20km는 넘을 것 같아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오늘의 최고고도는 지각산으로 1,080m이다. GPS를 작동시켜 산행의 시작점인 피재의 고도를 체크해 보니 해발 914m로 꽤 높은 지점에서 오늘 산행이 시작됨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피재에서 최고점까지의 높이 차이는 불과 200m 이내라서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비가 올 듯 하던 하늘은 차차 개어가서 기분이 상쾌해지는데, 나무들도 어제의 비로 깨끗이 몸을 씻고 말쑥한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는다. 거무티티하던 줄기들에선 연두색 여린 잎들이 새로 나와서 새로운 봄을 구가하고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봄이다. 봄, 그리고 5월 좋은 계절이다.
봄과 겨울이 서로 맞서서 사람들에게 잔인하다고 욕을 먹던 4월은 가고, 이제 봄이 완연하게 지배하는 계절 5월이다. 새들은 노래하고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품는다. 완만한 언덕을 오르내리는 길은 푹신한 낙엽에 덮여 그야말로 양탄자길이다. 산행 시작 25분이 지나 삼각점이 설치된 작은 봉우리 위에 도착했다. 길은 다시 완만하게 아래로 향하는데, 여기서부터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 건의령까지의 길은 오르내림이 적어 힘들 게 없을 듯하다.
카메라에 경치를 기록하며 가는데 큰 변화가 없는 숲길이라 여러 곳의 풍경을 찍을 필요는 없겠다. 단조롭지만 평화롭고 아늑한 숲길이 계속 펼쳐진다, 진정한 평화는 이렇게 조용한 모습을 띠어야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을 것 같다.
12시 19분, 산행시작 후 1시간 반이 채 안되어 건의령에 도착했다. 여기서 오늘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기에 다들 모여서 식사를 준비하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오늘 점심 준비는 색다른 방법으로 하기로 지난 주 이미 공고가 되어 있었는데, 밥과 반찬을 여성 회원들이 준비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와서 들어보니 일부 책임감 있는 남성 회원들도 같이 거들었다고 한다. 밥과 반찬을 큰 그릇에 한데 모아 모두 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든 다음, 산행에 참가한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방법이다.
건의령에 먼저 도착한 나는 고개 주변에 피어있는 꽃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며 비빔밥이 다 되기를 기다리데, 드디어 밥이 다 되었다고 여성 산행대장이 회원들을 부른다. 여성 회원들의 준비만 믿고 아무 것도 싸오지 않고 식사에 무임승차한 나에게는, 고맙고도 맛이 있는 한 끼의 밥이었다.
건의령은 한의령이라고도 불리운다는데, 차가 다닐만한 길이 백두대간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산림청에서 세운 입간판이 이 고개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한의령(寒衣嶺), 태백 상사미에서 삼척 도계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건의령(巾衣嶺)이라고도 한다. 고려말 때 삼척으로 유배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충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고갯마루에 관모와 관복을 걸어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하며, 고개를 넘어 태백산중으로 몸을 숨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고개이다. 여기서 관모와 관복을 벗어 걸었다고 하여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의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인 약 600년전, 자기들이 믿고 따르던 나라인 고려가 망함에 새로운 정권인 조선에는 협력을 할 뜻이 없는 꼿꼿한 선비들이, 관모와 의복을 이곳에다 버리고 백두대간 주변으로 자취를 감추고 두문불출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멀지않은 금대봉 밑 싸리재의 다른 명칭이 두문동재이다. 그렇다면 두문동재의 두문동은 정권과 담을 쌓고 두문불출하던 선비들이 있던 곳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내게 퍼뜩 떠올랐다.
요즘도 그런 선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기가 신봉하던 사상이나 정치세력이 몰락한 후 구차하게 배를 갈아타기 보다는, 백두대간의 깊은 숲속에서 숨어살며 자기수양을 해가는 분들도 꼭 있을 것만 같았다.
12시 46분, 식사시간이 끝나고 이제부터 각자의 역량으로 덕항산, 자암재를 지나 산행의 최종 목표지점인 귀네미마을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곳에 서울로 갈 버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건의령의 표고를 보니 844m이다. 다음 목적지인 푯대봉까지는 제법 경사진 오르막길이다. 식사를 한 후인지라 걷기에 제법 힘이 들었다. 오후 1시 5분, 건의령을 출발한 후 20분만에 푯대봉(해발 1,010m)으로 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곳 삼거리의 표고는 998m이다. 푯대봉은 이곳에서 앞쪽으로 100m만큼 떨어져 있는데, 대간길은 우측으로 꺾여서 진행되므로 힘을 절약하기 위해 푯대봉 봉우리에 들르는 것을 생략하고, 오른쪽 내리막길을 따라서 대간길을 계속했다.
푯대봉 삼거리를 내려가서 봉우리를 두개 넘어 안부에 도달하니, 대간길 왼쪽으로 숲을 훼손하여 목장과 과수원을 만들어 가는 지점에 오게 되었다.(오후 1시 38분) 목장을 만들기 위해 숲이 흉하게 파헤쳐져 있었는데 대간이 파괴되는 아픔이 이곳에도 있었다.
이곳부터는 경사가 아주 심한 비탈오름길로 매우 힘이 드는 길이었다. 길 위에 통나무를 눕혀 놓고 계단처럼 만든 길인데 지금까지의 길 중 가장 경사가 심한 듯 했다. 땀을 흘리며 표고 870m 근처에서 975m까지 100m가 넘는 표고차를 계속해서 치고 올라가야 했다.
여기에서 지도를 살펴보니 현장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발견된다. 목장에서 급경사를 치고 올라가면 해발이 1,161.6m나 되는 봉우리가 있는 것으로 지도에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975m 정도의 봉우리 밖에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날씨는 어제의 흐릿함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숲 위로 해가 밝게 비추었다. 해발 1,000m에 가까운 고지대인지라 공기는 선선하고 바람이 불어주어 걷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여린 잎들이 피어나는 연두색 숲길을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속세를 떠나서 나 자신만의 신선놀음을 즐기는 날이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절정이다. 표고 1,000m 가까이의 청정지역을 걸으며 더 높은 봉우리인 덕항산으로 한걸음씩 다가갔다. 그 곳이 마치 천국인 것처럼.
이 순간만큼은 나의 자아가 백두대간과 일체가 되어 숨쉬고 움직이는 듯 느껴졌다. 산에 의지해 사는 동물처럼 순수하고 소박해지고 싶다. 한 마리 사슴처럼 자연 속을 헤치며 하염없이 걸었다. 목표가 있지만 목표가 없는 것처럼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내가 요리하는 느낌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산 아래 세속에 두고 온 골치아픈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숲의 정기에 취해 대간길을 신들린 듯 걸어갔다. 약간 완만해진 길로 그 다음 봉우리에 올라가니 GPS로 잰 고도가 1,003이다.(오후 1시 51분) 23분 후(오후 2시 14분)에는 1,006봉에 도달하였다. 지도에 표기된 것과는 약간 다른 높이의 봉우리들이다. 약 10분 후에는 고도가 910m인 안부에 도착하였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을 여러 개 넘은 후에 도달한 곳으로, 이 안부는 이 부근의 능선길 중에는 꽤 낮은 곳이었다.
다시 언덕을 치고 올라가니 오후 2시 40분, GPS상 1048m의 봉우리(지도엔 이곳 표고가 1,055m로 표기됨)에 도달하였다. 이제 9명의 지아비를 희생시켰다는 여인의 이야기가 담긴 구부시령도 머지않았다. 급한 경사길을 내려가 한참을 가니 오후 2시 51분, 드디어 구부시령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구부시령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간판이 서 있었다.
옛날 이 근처 마을에 살던 한 여인이 남편을 얻었으나 계속 죽게 되어 9명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선뜻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지역에 음기가 서려 남자들의 힘을 빼앗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좀 더 다른 뜻이 있을 것 같기도 하나 생각을 더 하지 못하고 구부시령을 지나쳤다. 이렇게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일어날 법한 일 같지도 않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내가 더 이상의 해석을 하지 못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산행의 시작점인 피재를 떠난지도 이미 4시간이 지났다. 이제 내 몸의 힘도 많이 소진되어 덕항산으로 오르는 발길이 무겁다. 덕항산에 가서 좀 쉬리라 작정하고 말을 안 듣는 몸을 달래서 계속 전진한다. 땀도 나고 숨도 가쁘다. 그러나 덕항산을 지나면 남은 길은 거의 내리막길로 오늘의 고생도 거의 끝난다고 생각하니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갈만하다고 할 수 있었다.
구부시령에서 남들이 쌓아놓은 돌탑 위에 작은 돌 하나를 올려 놓으며 무사산행을 빈 나는,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와 내부에서 불붙는 자기 자신의 감흥에 취해서 원래 가야할 북쪽으로 난 나도 모르게 벗어나 버렸다. 그래서 동쪽인지 서쪽인지 구별이 안 되는 길로 백두대간길이려니 하면서 희미한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갔다.
한참 걷는데 앞뒤로 동행하던 산객들이 보이지 않고 아주 깊은 숲속에 홀로 서게 되었다. 길을 잘 못 가고 있구나 깨달은 순간이었다. 숲속 나무사이론 오후의 봄날 햇살이 나무들 사이로 사선을 그으며 가득 비추는 아름다운 정경이, 이곳이 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날 정도였지만 낯선 곳에 선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 때 앳된 동자승 한 명이 숲에서 나와 인사를 한다.
“하이맛님, 잘 오셨습니다. 저희 마을로 가시죠.”
“여긴 어디이며 당신은 누구요?“ 두려움은 호기심으로 쉽게 변한다.
“이곳은 600년전 고려의 선비들이 숨어 살던 두문동이오며 신선의 마을이라고도 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무릉도원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저는 여기
심부름꾼이지요”
“이럴 수가? 그럼, 그 이야기들이 사실이란 말인가? 전설의 무릉도원이 실재한다고?”
나는 나대로 마음속에 퍼뜩 집히는 바가 있었다. 우선 태백에는 자개문을 지나면 오복동이라는 무릉도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떤 이가 백두대간에 관해 쓴 책에서 보았었고, 금대봉 밑 싸리재의 다른 이름이 두문불출하는 마을의 고개라는 뜻을 가진 두문동재라는 사실과, 고려때 이성계를 피하여 선비들이 건의령에 관모와 의복을 걸어놓고 이 근처의 백두대간으로 숨어들었다는 건의령 입간판의 글이 상기되었다.
그 동안 백두대간의 깊은 숲길을 걸을 때마다 깊숙한 숲속 어딘가에 무릉도원이 숨겨져 있지나 않을까 하는 나의 의문이 오늘 풀린 것이다. 동자는 나를 데리고 절벽에 나 있는 석회석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문은 돌로 막혀 있었는데 동자가 신호를 하자 그 문은 스르륵하고 열렸다. 캄캄한 굴 속을 내 배낭속에서 꺼낸 헤드랜턴에 의지해 얼마 쯤 지나가자 갑자기 밝은 세상이 나오고, 저 건너 숨어있는 마을로 가는 배가 한 척 나타났는데 거기가 검문소였다. 나는 젊은 경비원에게 GPS를 끈 사실을 확인당하고 전화기와 소지품을 맡겨야만 했다.
마을에는 살구꽃, 라일락, 그리고 진달래 등 봄꽃이 만발하였는데 꽃 중의 압권은 역시 핑크빛의 복숭아꽃과 보랏빛의 라일락이었다. 복숭아꽃의 현란한 색깔이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라일락 향기가 코를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나는 마을의 원로에게 안내되었는데. 그에게서 이 마을의 유래와 주민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신선으로 몇 백년씩 계속 살고 있는데, 마을을 다스리는 원로들은 고려 때 건의령에 관복을 반납한 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동굴을 지나서야 바깥세상으로 통할 수 있는 비밓스러운 이곳을 발견하고, 밖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서로 서약하고 살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주민의 구성은 매우 단출하여 수십 명에 불과하고, 가끔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 중 쓸 만한 사람은 동자를 보내 이곳 주민이 되도록 데려온다는 것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구부시령 과부의 아홉 남편들이 모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들의 심성이 착한 것을 안 이 곳 원로들이 젊은 사람을 영입하기 위해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 것이 한 200년쯤 되었다고 하는데, 아까 검문소를 지키는 사람이 그중 가장 어린 사람으로 100살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 삼십 밖에는 안 되어 보였다.
이곳은 자연의 섭리로 먹을 것이 자연히 마련되고 질병도 없어, 사람들은 오락과 스포츠에 시간을 보내는 듯 했다. 그래서 모두 젊은 모습과 기력을 간직하며 오래 산다고 한다. 나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본 다음 근처 냇가 옆의 정자나무 밑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한 편에선 서너명의 노인들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른 평상에선 젊은이들이 노트북으로 무선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었다. 고스톱으로 노름을 하는 그룹도 있다 하는데 그곳엔 내가 이곳에 완전히 받아들여진 다음에야 안내하겠다고 한다. 노름엔 어느 나라 셈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못하였다.
저녁식사는 한옥으로 지은 식당에서 할 수 있었는데 현미가 섞인 오곡밥과 곰취, 참취, 삼잎국화 등 산나물과 명태국을 먹을 수 있어 내 입맛에 꼭 맞았다. 식후에 제공되는 차는 순국산 둥글레차라서 중국제 둥글레차와는 그 맛이 천지차이로 깊고 그윽한 향기를 풍겼다. 그리고 삼척 환선주라든가 하는 명주를 한 잔 주는데 나는 그 술을 받아먹자 깊은 잠에 빠져 달게 잘 수 있었다. 최근의 불면증이 다 날아간 셈이었다.
다음날 일어나 마을사람들이 즐기는 운동을 보니 축구, 탁구, 소프트볼과 인공사면에서의 스키 등이 있었고, 암벽등반도 인기가 있는 듯 했다. 마침 근처에 적당한 바위가 있어 로프를 매고 바위에 매달린 몇사람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안내하는 이에게 여기서 다른 소일거리는 없느냐고 물었더니 숲속에 지어진 아담한 건물 한 채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은 산악도서관이었다. 몇사람의 연구자들이 거기서 무언가 읽으며 토론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볼 만한 것은 등산에 관한 방대한 자료였다.
나는 마침 궁금하던 차에 조선시대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이 썼다는 <산경표>를 서가에서 찾아 살펴보니, 원문인 한문에 덧붙여 한글번역문과 해제까지 만들어져서 원문과 같이 묶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미 이곳 연구자들이 번역을 하고 해석을 잘 해 놓은 터라, 나는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산경표를 다 읽은 다음, 잇달아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어놓은 유산기(遊山記)들을 읽기 시작했다. 친절하게도 이 유산기들도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있어서 한문에 조금 어두운 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동안 읽고 싶어도 구하지 못해서 읽지 못한 산에 관한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한참을 산서(山書)에 빠져 지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내 감각으로는 한 달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이제는 산서에 몰입했던 것이 시들해지자 집에서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하마부인도 슬슬 보고 싶어지고, 서울에서의 생활도 생각이 나서 마을에서의 퇴출을 신청하였다. 나는 원로에게 안내되었고, 오랜만에 그와 직접 대면하였다.
“이곳이 싫소?”
“그건 아니옵니다만 사람이 재미로만 살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빠진 게 무엇이오?”
“눈물 젖은 빵이옵니다. 노동의 뒤에 오는 성취감이 제겐 꼭 필요하옵니다.”
“허어, 우린 수백년간 신선같은 생활을 계속해 왔오. 하늘이 주는 걸 먹으며 개인의 교양과 체육에 모든 시간을 쓰고 있음에 이를 탓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죄송합니다. 나가서 일 좀 더 하다가 은퇴한 뒤에 오면 안 되겠습니까?”
“안될 말이오. 여기는 그런 양로원이 아니오. 후회할 때가 올거요. 안되었지만 퇴출을 허가하리다. 단, 각서는 쓰고 가시오.”
“고맙습니다.”
나는 이곳의 위치는 물론 존재여부에 대해서도 함구할 것이라는 각서를 쓰고, 하이맛이라고 알파벳 글자로 서명해 준 다음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무릉도원을 나올 수 있었다. 물론 각서에는 단서조항이 있었다. 약 10년후인 2017년이 되면 나의 산행소설에 이 마을의 존재에 대해 언급할 수도 있다는 조항이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면담한 원로를 설득한 결과였다.
내가 산행기록을 공개할 2017년 쯤에는 이미 그들이 이곳을 떠나 더 깊은 숲속인 다른 곳으로 이주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기에, 이 사실을 들어 그때 쯤에는 이 마을의 존재에 대해 내가 글로 남겨도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원로를 설득하였고 그가 동의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나 혼자서 무릉도원에 갔던 일을 계속 가슴 속에 품고 무한정 숨기기에는 너무나 답답해서 살 수가 없노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기에, 10년전 그가 허락했고 10년이 넘은 오늘 공개가 된 것이다.
동자의 안내로 석회석 동굴의 돌문을 나온 나는, 동자의 안내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구부시령까지 올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대강 동쪽으로 내려가서 해안 쪽에 있는 도시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기에, 삼척시내까지 하루만에 걸어 내려올 수 있었다.
배낭속의 휴대폰을 꺼내 하마부인에게 전화를 하려하는데, 전화기는 이미 고장 나 있었고 녹이 슬어 고물이 되어 있었다. 시내로 더 걸어 나가니 중앙역이라는 간판이 붙은 유리와 철로 되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화려한 건물이 서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고속열차가 턱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골 삼척에 언제 고속철도가 생겼지?’
사람들의 옷차림도 내가 백두대간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2007년보다는 훨씬 야하고 아주 화려했다. 원색에 가까운 옷을 걸친 사람들에게 나는 땀에 절고 어두운 빛깔의 등산복을 입은 촌스러운 한 노인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는 듯 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세월이 꽤 흘렀다는 것을 주변 분위기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몇 년도요? 선거는 끝났오?”
나는 마침 내옆을 지나가던 잘생긴 남학생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지금이 2037년인 것도 모르세요? 어디 외국에 다녀 오셨어요?”
“아니? 벌써 2037년이라고? 그게 정말이오?”
“예, 그렇습니다.”
청년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그곳 동굴 속 무릉도원에서의 신선놀음 시간 한 달이 대한민국 시간 30년에 필적했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나 한편으론 지금이 2037년이라면 90이 가까울 나의 나이를 가늠해 보고, 내가 여태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릉도원에 대한 지나친 호기심이 나에게서 30년이란 시간을 빼앗아 갔지만 그놈의 호기심이 또 발동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한 가지 중요한 걸 물으리다. 2007년 대선에선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소?”
“제가 태어나기 전이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아빠에게 여쭈어 볼게요. 아빠! 2007년에 대통령 선거 있었나요? 그렇군요, 그럼 그때 누가 당선되었었나요?”
학생은 전화기도 없이 텔레파시로 자기 아버지에게 묻고 있었다.
- 끝 -
첫댓글 ㅎㅎ 픽션인지 넌픽션인지^^
암튼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낼 무릉도원주 무제한으로 올리겠습니다 ^^
선배님 !
그 무릉도원의 정확한 위치좀 알려줌 안되나요.
지두 거기가서 이쁜 여자 골라 수백년 살믄 안될까요.
요즘 정치하는 넘들보면 제 눈과 귀를 버리니까, 아주 이참에 무릉도원에서 지낼까봅니다.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