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세부 3박5일 18.12.10~14 모두투어]
[전 일정]
●01일 21: 35 LJ037 김해(PUS) 출발(4h 20m 소요)→ 00:55 세부 막탄 국제공항 도착→ EGI 리조트
●02일 막탄 관광[1 체험다이빙 강습 2 열대과일 구매체험 3 헬멧 다이빙 투어]
●03일 세부 관광[1 마젤란 십자기 2 산토 니뇨 성당 2 산 페드로 요새 3 탑스 언덕 전망대]→
막탄 귀환[1 온돌 전신 마사지 2 민속 디너]
●04일 막탄→ 오슬롭 투어→ 막탄 귀환 및 관광[1 산토니뇨 성당 2 라푸 라푸 동상 및 마제란 기념비]
●05일 00:45 LJ038 세부(CEB) 막탄국제공항 출발(4h 15m)→ 06:05 김해(PUS) 도착 후 해산
[1일] 12월 10일 화요일
● 일정: 21: 35 LJ037 김해(PUS) 출발(4h 20m 소요)→ 00:55 세부 막탄 국제공항 도착→ EGI 리조트
[세부(cebu)의 역사]
필리핀 중앙에 위치한 세부 주는 167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세부 시는 인구는 350만으로 필리핀 제2도시이며,
남북 길이가 225km, 동쪽엔 레이테 섬과 보홀 섬, 서쪽 타뇬 해협 건너에는 네그로스 섬 있다.
세부 섬과 보홀 섬 사이에는 작은 막탄 섬과 올랑고 섬이 있으며, 1521년 마젤란이 막탄 섬에 상륙함으로 처음
유럽에 알려졌고, 1565년 미구엘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세부에 상륙하여 식민지화 했다.
차츰 세력을 넓혀 천주교를 번창 시켰으며, 수도를 마닐라로 이전하였고, 스페인과 원주민 사이에 결혼하여 낳은
혼혈아를 ‘세부아이’라고 불렀고, 중국과 일본의 혼혈도 많으며, 중국 화교들이 세부의 경제권을 독차지 했다.
스페인이 지배할 때는 무식하고 배고파야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생각에 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나 미국이
지배할 때는 학교도 지어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영어가 자리 잡게 되었고, 그 덕분에 많은 어학연수원이 생겼다.
[세부와 막탄 그리고 마젤란]
세부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마젤란이 처음 상륙한 곳이 세부라는 것이고, 죽은 곳이 막탄이라는
것이었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었던 것은 마젤란이 필리핀에 상륙했을 때 일이다.
마젤란이 상륙한 곳의 지명이 궁금해서 배를 타고 있는 원주민에게 물었고, 원주민은 무엇을 하고 있는 지로 물은
것으로 알고 배를 젓고 있다는 말로 ‘루손’이라고 한 것이 지금의 마닐라가 있는 섬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젤란은 루손 섬에는 가지 않았을 같고, 또 세부 섬에서는 너무 먼 거리에 있어 보이지도 않는
섬이라 루손 섬의 이름은 잘 못 알고 있는 것 이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루손은 '큰 빛'이라는 뜻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학생 때 읽은 마젤란 전기에 대한 것으로 기억에는 원주민과
싸울 때 원주민에게 자랑하기 위해 대포를 다 쏘아서 막상 전쟁 때는 쏠 대포가 없어 패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안 것은 마젤란이 라푸 라푸 추장과 싸우기 위해 상륙했던 막탄 해협은 좁고 물길이 얕아 대포를
가진 배가 들어 올 수 없어 작은 배로 이동했다고 했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아도 사실 같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홍사익과 신동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가 했는데 전혀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좀
아쉬워서 홍사익과 신동파 씨 이야기를 참고로 기록해 보았다.
[홍사익 이야기]
일제 때 일본군의 장군으로 중장까지 오른 사람은 영친왕과 홍사익 두 사람이 있으며, 홍사익은 1887년 2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 태어나 1905~09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다녔다.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으나 육군무관학교를 폐지되어 같은 달 9월 일본으로 유학갔고,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남방군 총사령부 병참총감이요 연합군 포로 취급이 병참소관이이라 포로수용소장을 겸하고 있었다.
미군포로수용소가 바로 세부에 있었고, 그는 2차 대전의 전범으로 포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필리핀에서 열린
미군 전범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언도 받고 1946년 9월 26일에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재판 중에 자신의 변호와 변명도 하지 않았고 어떤 발언과 질문에도 응답하지 않았고 최후의 진술마저
거절하였으며, 갇혀있던 165일 동안 목사가 넣어준 신약성서와 구약의 시편을 열심히 읽었다.
처형장에서 구약 시편 51편을 읽어달라고 청하였다고 하였는데 그의 죄목에 하나였던 김에 대한 이야기로
포로에게 검은 종이(김)를 먹여 포로를 학대했다는 죄목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남방에는 포로수용소가 많았고 패전 3~4년 전부터 징용으로 끌어온 많은 조선인이 배속되어 있었고, 이 중에
필리핀의 포로를 담당하였던 조선인은 일본에 학대받다가 학대할 포로가 생겼다.
조선인들은 필리핀인들에게 학대는 대단하였다고 하며, 우리나라 이야기라 자세한 내용은 피하기로 한다.
애들이 울면 유럽에서는 '타타르(몽골)가 온다.'라고 하였고, 우리가 어릴 때에 '일본 순사가 온다.'라고
하였는데 필리핀에서는 '조선 사람이 온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조선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일시에 해소 시켜 준 사람을 여기에 소개하려고 홍사익 이야기를 하였다.
18년 4월 24일 중국 태향산 여행 중에 천계산에서 옆에 앉은 중국 사람이 2차 대전 때 일본인과 전투를 했다고
설명을 했는데 그 일본군을 지휘한 사람이 홍사익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는 1941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이 되어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고, 팔로군에 소속된 우리 독립군도 4명이 전사했으며, 2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가 여단장이자 화북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조선인들은 그의 덕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동파 이야기]
이 분은 지금도 농구가 국기인 필리핀은 나이가 많으면 다 기억할 정도이라고 하며,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70년대 아시아에서 이름을 떨쳤던 슛의 신이었다고 한다.
휘문고 재학시절 19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고, 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필리핀과 결승에서 무려 50점을 혼자 넣어 한국에 우승을 안겼으며, 아시아에서 영웅으로 군림하였다.
이분과 더불어 김영기, 김영일은 필리핀이나 대만에서 한국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데 무엇보다도 그를 좋아하는
필리핀은 한국 사람에 대한 감정을 혁신시킨 것은 그의 공로이라고 한다.
필리핀은 광적일 정도로 농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좁은 공터나 야자나무에 달린 농구보드를 보면 알 수 있다.
[세부 막탄(CEB) 국제공항 입국수속(Immigration)]
여행 다니다가 이렇게 입국수속이 더딘 것은 처음이었는데 밤 1시에 도착해서 졸음도 오고 피곤한 몸으로 3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다.
기다리는 사람 모두가 한국 사람이어서 나부터 반성을 많이 하는 시간이었는데 공항사정이 나아질 때까지라도 좀
더 생각하고 와야 하지만 오기 전에는 알 수가 없으니 이런 사실을 알리지 여행사 책임도 있다.
입국수속 할 수 있는 곳이 14개인데 10개만 하는 공항도 그렇고 아이들과 노인은 수속 밟는 곳이 따로 만들어
그들에게 배려하면 좋을 것인데 어린 아이들과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는 부모도 참으로 힘들어 보였다.
다시는 오고 싶은 마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실을 알려서 여행을 자제하거나 공항 측이 여행자들을 위해
배려하는 그 날까지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려 본다.
[2일] 12월 11일 수요일 ● 일정: 막탄 관광[1 체험다이빙 강습 2 열대과일 구매체험 3 헬멧 다이빙 투어]
어제 새벽에 도착하여 잠시 잠이 들었으나 한국에서 일어나는 시간에 잠이 깨였고 다시는 잠들지 못할 것 같아
아침을 10시까지 준 다고 했지만 너무 늦게 먹는 것도 미안해서 일찍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세면실은 물론이고 샤워기 물은 수압이 낮아 앞으로 나오는 물보다 줄을 타고 내리는 것이 더 많았으며,
악어의 눈물만큼이나 너무 적게 나와 답답하기가 입국수속보다 더 했고, 세부여행을 마칠 때까지 불편했다.
EGI 리조트 주위를 구경하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리조트 북쪽에는 인터넷에서 많이 봤던 더 코브 식당도 보였다.
[헬멧 다이빙 투어]
조식 후 EGI 리조트 경내를 구경을 했고, 1시에 한국가이드를 만나 점심을 먹은 후 모두투어 여행자 29명이
모였으며, 여기서 부산에서 왔고, EGI에서 묵는 6명을 알게 되었는데 2명을 돌아가는 시간이 빨랐다.
옵션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그는 봉급 없는 대신 옵션으로 살아간다고 했는데 사실은 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봉급 없는 그를 위해 너무 힘들지 않는 것을 선택했는데 스쿠버 다이빙 같은 것은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헬멧 다이빙, 오슬롭 투어, 어메이징 쇼를 하기로 했고, 부산에서 온 부부는 스쿠버 다이빙과
오슬롭 투어, 어메이징 쇼를 같이 하기로 했으며, 각자 정해준 지프니를 타고 먼저 시장으로 갔다.
거기서 열대과일을 사고 싶은 사람만 사고 나머지는 작은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지프니에 올라 다이빙과
헬멧 다이빙 하는 장소에 도착하여 먼저 이론과 수경 물 빼기, 이퀄라이징, 수신호 등을 교육받는 줄 알았다.
교육은커녕 옷 벗고, 잠수복입기에도 바빴는데 물 먹은 잠수복입기가 얼마나 힘든지 간신히 입고, 수심이 얕아
배가 있는데 까지 걸어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으며, 배를 타고 헬멧 다이빙 하는 본 배에 도착했다.
물속에 들어가면 코 막고 힘주어 코를 풀면 귀가 뚫린다는 이야기만 듣고, 무거운 헬멧을 씌워주면 사다리를 타고
바다 속으로 내려가면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포즈만 취하다가 올라왔다.
이 사진은 이메일로 쏘았다고 했으나 아마도 허공으로 날아갔는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도
안 왔는데 헬멧 다이빙은 바가지를 업어서 물속에 밀어 넣으면 공기 때문에 바가지 속으로 물이 안 들어간다.
이 원리를 이용하는 것으로 산소는 공기를 계속 주입하여 얻어지며 공기의 부력이 커서 헬멧이 무척 무겁고, 바다
속에서 발이 땅에 닫지 않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아서 다이빙하는 사람이 밀어 주거나 보조해 준다.
그들이 준 깡통을 흔들면 많은 물고기가 많이 모여 들어 보기가 좋았고, 헬멧 투어 후 주위 구경을 했는데 아침에
리조트에서 보였던 더 코브(The Cove)는 라이브 해산물 레스토랑(Live Seafood Restaurant)이다.
이 레스토랑 앞에는 아름다운 알그라도 섬(Alegrado Island)은 인공 섬으로 리조트가 있고, 헬멧 다이빙 남쪽으로
화이트 샌드 리조트가 보이며, 더 남쪽에 있는 EGI 리조트로 향했는데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자유 시간이어서 이 시간 일정을 가이드와 상의 했는데 세부 구시가 유적은 35불이라고 하여
의외로 싸다는 생각이 들었고, 관광비는 우리가, 점심은 부산 부부들이 사기로 하고 같이 가기로 했다.
[3일] 12월 12일 목요일 ● 일정: 세부 관광[1 마젤란 십자기 2 산토 니뇨 성당 2 산 페드로 요새 3 탑스 언덕
전망대]→ 막탄 귀환[1 온돌 전신 마사지 2 민속 디너]
아침 일찍이 일어나 어제는 북쪽으로 구경을 했기에 오늘은 남쪽으로 향했는데 얼마 가지 않으니 모두투어 일행이
묵고 있는 J PARK ISLAND가 있었으며, 입구가 잘 조성되어 있어 보기가 좋았다.
경비원에게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더니 안 된다고 하였는데 후에 조사해 보니 내부도 너무 잘 조성되어 있어
그 풍경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앞으로 더 갔으나 인가도 드물고 농촌풍경이 나타나 되돌아 왔다.
EGI 정문과 리조트의 다른 모습을 사진에 담았으며, 8시 30분에 가이드가 보내준 봉고를 타고 향했는데 M.L.
퀘존 내셔널 하이웨이를 따라 세부 섬으로 향했고, 도중에 막탄 산토 니뇨 성당이 보였지만 사진은 찍지 못했다.
탁탄 섬 전체는 마젤란을 물리친 추장 이름인 라푸 라푸 시이며, 막탄 섬 북부에 있는 비행장은 전체 면적의 1/4에
해당 하고, 비행장에서 해협 쪽이 다운타운(Downtown)으로 시청과 관공서가 있다.
여기서부터 차량이 밀리기 시작하는데 어제 밤 입국수속과 별로 다른 것이 없을 정도 인데 리조트에서 마르셀로
베르나르 페르난 다리(Marcelo B. Fernan Bridge)까지 약 8km 정도인데 30분 걸렸다.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아크투라 탱크 터미널(Arctura Tank Terminal)과 원소스 물류 아시아 주식회사(팔콘 유통
센터) 창고가 보이며, 물세계 세부(Waterworld Cebu)라는 워터파크가 보인다.
다시 마젤란십자가 까지 약 9km를 무려 1시간 걸려 도착했으며, 가이드 없이 관광했기에 모든 것은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을 기초로 작성하였다.
[마젤란 십자가 관광]
처음간 곳은 수그보 광장(Plaza Sugbo)에 있는 마젤란 십자가가 있는 건물은 1521년 필리핀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라자후마본 추장과 가족을 위해 세웠으며, 정 6각형으로 지름이 10m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건물이다.
십자가는 세계일주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처음 증명한 마젤란이 세부에 상륙하여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세운
나무십자가로 본래는 산토 니뇨 교회에 있었으나 영험한 기적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조금씩 떼 갔다.
이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옮겨 검은 철판으로 씌웠고 천정엔 당시 십자가를 세우던 모습과 세례 받는
모습 등의 그림이 있으며, 이 십자가로 인해 현재 80~90% 이상이 믿는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또 전 세계에 필리핀이 알리는 계기도 되었지만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 역사적 사건이 있는 곳이며, 세르히오
오스메냐 동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세르히오 오스메냐(Sergio Osmena 1878~1961): 세부 시에서 출생하였으며, 1906년 세부 주(州) 주지사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고, 1907년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1916년까지 의장직을 맡았다.
양원제 성립 후 1922년까지 하원 의장을 역임하였고, 1935년 필리핀은 공화국이 되어 대통령 케손과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1942년 일본군의 점령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44년 케손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45년 2월 미국이 일본에게 승리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에게서 자치정부를 이양 받아 1946년 7월 4일 더디어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제3공화국을 출범시켜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마누엘 로하스 패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바실리카 산토 니뇨 교회(Basilica Del Santo Nino Church) 관광]
이 교회는 마젤란 십자가와 같은 수그보 광장에 있으며, 광장 북쪽에 있는데 이 성당에 있는 아기 예수상(산토
니뇨)은 1521년 마젤란이 상륙에서 처음 세례를 준 사람이 세부의 지도자 라자후마본이라고 한다.
라자후마본의 부인에게 마젤란이 선물했던 것이었는데 1565년 스페인의 초대총독 미구엘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큰불을 질렀었으나 손상되지 않고 발견되어 그 성스러운 자리에 총독과 안드레스 신부에 의해 교회가 건립됐다.
현재 교회는 1737년에 재건축한 것이라고 하며,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엔 사람들이 모여 앉자 휴식하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좀 더 가면 붉고 짧은 초들이 있는 곳은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곳도 있다.
좀 더 가면 우측엔 ‘ㄷ’ 모양의 건물이 있는데 지도에는 ‘바실리카 델 산토 니뇨 순례자 센터’라고 되어 있으며,
중앙 정면에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상이 있고, 중앙공간은 행사장이며, 끝에는 4개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누구인지를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었고, 이 교회는 1941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본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는 ‘Basilica Del Santo Nino’라는 글자가 있다.
이것은 필리핀이 400년 이상의 기독교 역사를 가진 기독교국임을 인정한 것으로 1965년 교황 바오르 6세가
이 교회를 대성전으로 승격하여 새긴 글이라고 한다.
이 입구로 들어가면 본당 예배실로 연결되는데 예배실 입구는 막아 놓았고, 사진도 찍지 못하게 하여 아기 예수상
앞에서 기도 하는 사람을 멀리서 찍어 보았는데 아기 예수상은 잘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 걸린 그림들만 구경했는데 이 건물 중앙에는 스페인에서 많이 본 파티오(Patio) 정원이 있어 반가웠다.
※바실리카(Basilica): 바실리카는 라틴어로 2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고대 그리스는 주로 법정을 말하였고, 고대
로마인들의 공공건물을 말하였으며, 또 하나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종교적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 위대한 성인, 중요한 역사적 사건, 또는 정교회에서 전국 총대주교 등과 관련을 갖고 있고,
국제적인 예배 중심지 역할을 하는 교회에 바실리카라는 이름을 붙인다.
바실리카라는 교회는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를 위해 대 제단을 보유할 수 있는 권리와 특별사면권이 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바실리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크며 교황이 특별한
전례 의식을 거행하는 성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따라서 현재 바실리카에는 2가지 뜻 중에 하나는 고대 건축의 문맥에서 공공건물을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건축의 문맥에서 대규모의 유서 깊은 성당을 가리키는 것이다.
※파티오: 아랍식 정원(안뜰)으로 사각형으로 둘러싸인 집 가운데 있으며, 알람브라 궁전도 파티오 형식의 대형
건물인데 아마도 이런 양식은 건물의 태양의 채광이 방을 밝혀 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된다.
회교는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어 그들의 방이 파티오를 중심하여 있으며 4명의 부인은 4계절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사실인지는 모르겠고, 코르도바는 ‘파티오’ 꽃 축제도 있다.
※미구엘 로페스 데 레가스피(Miguel Lopez de Legazpii): 1510년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며, 1545년 멕시코의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했고, 이곳 부왕 루이스 데 벨라스코는 1521년에 발견한 필리핀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1565년 레가스피에게 5척의 선단을 이끌고 멕시코 남서부의 아카풀코 항구를 출발하게 했다.
그는 세부에 도착하여 북부 루손 섬에서 남부 민다나오 섬까지 필리핀 전역을 점령했고, 1566년 세부에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1570년 루손 섬을 정복하고, 1571년 마닐라 시를 건설했다.
펠리페 2 때 초대 필리핀 총독으로 이었으며, 1568년과 1571년 2차례에 걸친 포르투갈의 공격을 격퇴했고,
1572년 마닐라에서 심장마비로 죽었으며, 그의 이름은 루손 섬 남동부 도시와 공원 등에도 많이 사용된다.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관광]
1738년 스페인식민지 시절에 이슬람의 해적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쪽과 남쪽 바다를 바라보는 귀퉁이에
세워졌으며, 건설할 당시는 해변이었겠지만 지금은 건물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스페인식민지 시절 이 후 미국식민지 시절에는 미군기지로, 일본식민지 시절에는 포로수용소이었으며, 주차장에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안토니오 피가페타 동상(Antonio Pigafetta Monument)이다.
동상이 남쪽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방향을 알기가 쉬우며, 내부에는 작은 박물관도 있었는데 산토 니뇨 성당에서
보지 못한 아기 예수상의 그림과 스페인인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태양의 빛을 반사하려고 위에 걸쳤던 흰 천과
당시 스페인인들이 사용했던 국기가 인상적이다.
성벽 위를 걸으면서 한 바퀴 돌면 요새 관광은 끝났는데 성 앞에 장치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있었으나 더운
날씨 때문에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으며, 이제는 전망대로 향했다.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 1491~1534): 베네치아출신으로 막탄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마젤란과
함께 출발한 270명 중 살아서 귀환한 18(동양인 4명 포함 21명?)명 중에 한 사람으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에 대한 보고서’를 기록했는데 방문한 곳의 주민, 식생, 날씨, 지리 및
항해 정보와 언어 자료까지 방대한 자료를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다고 한다.
[탑스 언덕 전망대(Tops Hill Lookout) 관광]
이번 여행기를 쓰다가 가장 많이 후회한 곳이 이 전망대인데 조금만 더 검색을 했으면 이곳이 아니고 바로 밑에
있는 레아 신전을 갔으면 신전도 보고 전망대처럼 똑 같이 세부와 막탄 섬도 볼 수 있었다.
탑스 언덕(Hill)의 높이는 해발 800m로 노을 지는 낙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국에 온 기분을 만끽한다고 했으나
좀 과장된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반원형 건물에는 레스토랑 겸 휴식처가 있다.
이 건물을 잘 이용하면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그런 감각이 없어서 놓치고 말았으며, 막탄 섬 뒤로 보이지는
않지만 초콜릿 언덕(Chocolate Hill)으로 유명한 보홀 섬이 있다.
그 섬에는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세계에서 제일 작은 안경원숭이라 불리는 ‘따르시스 원숭이’는 야행성으로
현재는 멸종 위기에 있는 원숭이로 언제 와서 볼 수 있을 런지? 내려오는 길에 세부 거리를 구경했다.
멀리서도 보이던 예쁜 건물은 ‘워터프런트 세부 시티 호텔 카지노(Waterfront Hotel & Casino Cebu City)이었고,
그 반대편으로 세부 IT 파크(Cebu I.T. Park)도 보였으며, 점심을 먹고 리조트로 향했다.
[스톤 마사지]
아직 저녁 먹기엔 이른 시간에 한국 가이드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마사지클럽이어서 아마도 어제 옵션으로 신청한
사람들이 마사지 받는 동안 우리는 대기하고 있다가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줄 알았다.
우리도 방을 정해 주어 어제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더니 ‘이것은 일정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런 줄 알았더라면
안 시켜 줄 것인데...‘라고 농담을 했고, 우리는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일반 마사지와 비슷했으나 조금 다른 것은 뜨거운 돌로 마사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한국인에게는
잘 맞는 것 같아 앞으로 유행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마사지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몹시 심하게 내렸다.
이것이 스콜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해 차를 탈 때나 내릴 때 필리핀 사람이 받쳐 주는 우산에
의지했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민속춤을 보면서 저녁을 먹는 ‘민속 디너’이었다.
좀 늦게 도착하여 민속춤은 이미 시작했으나 비가 시야를 가려 잘 볼 수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비가 조금씩
잦아들면서 민속춤과 불춤을 볼 수가 있었고, 다 마친 후에는 팀을 걷으려 다녔다.
리조트로 향하는 길은 배수시설이 잘 안 되어 있어서 그런지 그 작은 비에 물이 넘쳐흘러 다니기에 불편했으며,
내일은 오슬톱 투어를 하기 위해 2시에 일어나야 해서 옷을 입은 채로 잤다.
[4일] 12월 13일 금요일 조- 리조 중- 현지 석- 삼겹살 ● 일정: 막탄→ 오슬롭 투어→ 막탄 귀환 및 관광
[1 산토니뇨 성당 2 라푸 라푸 동상 및 마제란 기념비]
[오슬롭 고래상어 관찰(Oslob Whale Shark Watching)]
새벽 2시에 세계여행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기상하여 대충 세수하고 로비로 나가 한국가이드를 만나 일행들을
태우려 어제 들어가지 못했던 ‘J PARK ISLAND’ 리조트는 캄캄한 밤인데도 화려함을 알 수가 있었다.
이제는 세부 섬의 맨 끝에 있는 오슬롭으로 향했는데 비속을 필리핀 가이드만 함께 하며, 쉬지 않고 3시간 30분을
달렸고, 시내는 조명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해 놓아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대부분 사람들은 잠이 들었으나 잠도 오지 않았지만 밖은 캄캄해서 볼 것이 없어 지루했고, 6시
10 쯤에 도착했으며, 다행이도 비는 끝졌으나 아직 캄캄해서 잠시 대기했다.
6시 30분 집합장소에서 설명이 있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필리핀 현지 가이드에게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맞기는 바람에 바다에 나간 사람들의 관경이 장관이었지만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명조끼와 스노쿨링 장비를 지급받아 입고는 15명 정도로 작은 배를 타고 고래상어를 못나가게
쳐놓은 그물을 따라 수십 척의 배가 일렬로 늘어서고 나면 우리는 배에서 내려 물에 들어갔다.
처음엔 머리를 물에 넣는 것도 싫었으나 멕시코 칸쿤에서 스노쿨링를 해 보았기에 차츰 적응이 되어 머리를 물에
넣고 고래상어를 찾으니 무지하게 큰 녀석이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거대한 몸에 거대한 입을 가졌다.
고래상어의 거대한 꼬리나 지느러미에 부딪치면 다치지 않을 생각해서 처음엔 떨어졌으나 유심히 살펴보니 너무
천천히 움직이어서 다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부터 마음 놓고 접근을 했다.
고래상어 뒤를 따르거나 몸에 붙은 물고기들은 먹이를 얻으려는 것인지? 공생 관계인지는 몰라도 따라 다녔다.
5m 안에는 접근하지 말라고 되어 있었으나 나도 지킬 수 없었고, 고래상어도 지키지 못해 2번이나 부딪치기도
했는데 많이 움직이다보니 조끼 붙은 끈이 느슨해져서 조끼가 머리 위로 올라와 불편했다.
그때서 다리 사이에 끼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참고 견디었고, 배 위를 오르려고 하면 바닷물 때문에 몹시
무거워 힘들었으며, 이제는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뭍으로 나갔다.
‘선라이즈 그릴 하우스(Sunrise Grill Haus)’라는 식당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한국가이드는 고래상어가 어부들 에게 잡혀 멸종 위기라서 그물 안에 가두고 보살피고 있다고 했는데 EBS에서
방영하는 ‘세계테마기행’에서는 처음 고래상어에게 먹이를 주었다는 어부를 찾아갔다.
어부는 먼저 고래상어와 친숙해졌을 때 먹이를 주었고, 그 후로는 고래상어가 이곳에서 상주하면서 어부생활을
접고 고래상어 관찰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어부 때보다는 풍족한 삶을 누린다고 했다.
그 어부의 덕택으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고, 배 위에서 먹이를 계속 뿌려 주면서 관광객
옆에서 머물도록 했으며, 물속에서 고래상어와 함께 사진을 찍어 주는 현지 사람도 있었다.
나는 찍히는 줄도 몰랐으나 확대해서 사진을 보니 분명히 나였으며, 아침은 라면에 김밥을 먹고 투말록 폭포로
향했으나 옷이 젖어 불편했고, 옷과 신발은 비행기를 타기 직전까지 갈아입지를 못했다.
리조트에서는 이미 체크아웃하고 짐은 오늘 귀국할 수 있도록 다 가방에 넣은 상태로 한국가이드가 맡았기에 짐과
만날 수 없어 갈아입지 못한 상태로 다녀야 했는데 고래상어 투어를 어제만 했어도 이런 일을 안 당했을 것인데....
솔직히 가이드를 위해 하는 옵션이었으나 너무 힘들었고, 돈 쓰기도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 하루였다.
[투말록 폭포(Tumalog Falls) 관광]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름도 모르는 폭포를 보고 간다기에 희망을 가지고 갔으나 물줄기가 보슬비 같아 보이지
않아서 ‘머리카락 폭포(hair falls)’라고 이름 붙였다가 한국에 돌아와 투말록 폭포라는 것을 찾아냈다.
필리핀의 3대 폭포라고 했지만 너무 초라했으며, 돌아오는 길은 매우 번잡해서 갈 때보다 1시간이 더 걸렸고,
필리핀에 많이 있는 오토바이 택시 ‘트라이시클’은 그 작은 곳에 5명의 손님을 태우는 것이 신기도 했다.
‘트라이시클’은 너무 많아서 교통에 지장을 주는 것이 좀 흠이었으며, 오다가 기울러진 특이한 건물도 보였다.
[가이드의 이야기]
2시쯤에 늦은 점심을 먹고 이제는 큰 차에 올라 이번 여행자들이 처음으로 모두 모여 라푸 라푸 동상이 있는
유적지로 향했으나 너무 짧은 거리라 차에서 내리지 않고 한국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필리핀에 오게 된 동기 필리핀 여자와 결혼한 이야기 그리고 26년 전에 부인과 팔라완 여행 이야기를 했는데
사적인 이야기이라 기록하지 않으나 중부 팔라완의 ‘푸에르토프린세사’는 스페인 여왕의 이름이라고 했다.
여왕은 너무 아름다워 자기 이름을 붙였다고 했으나 1479년 이후 통일스페인 2명의 여왕은 똑 같이 이사벨이라
인터넷을 검색하니 ‘공주의 항구’라는 뜻이며, 아담과 이브가 되어 무인도 호핑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팔라완의 맨 북쪽지역 이름인 엘니도(El Nido)는 황금 뜻으로 황금마을(엘도라도,Eldorado)도 같다고 했는데
정확한 엘도라도는 '황금을 칠한 사나이'의 뜻으로 한 때는 유럽에서 우리나라도 엘도라도라고 했다고 한다.
팔라완 섬의 경치가 좋다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온 것은 우리 손녀가 20년 2월 달에 봉사활동 오기에 때문이다.
인터넷이야기는 가이드가 알고 있는 것의 10%도 안 되며 또 필리핀에서 살면서 겪은 이야기라고 했으나 이야기
중에 틀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잘 못 알고 있을 것인데 가이드는 잘 알고 이야기해야 한다.
2만 2천 개의 섬을 가진 인도네시아가 1위이며, 그 다음이 7천개의 섬을 가진 필리핀이고, 동남아시아의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10개국이 있다.
그중 인종의 차이가 나는 필리핀은 1565~1898년까지 330년간 스페인지배를 받았고, 같은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멕시코인이나 중앙아메리카인과 비슷한 것은 스페인들이 사용했던 혼혈정책이라고 한다.
이 정책은 알렉산더가 생각했던 ‘하나의 세계’로 즉 세계를 하나의 종족을 하나로 만들어 세계를 한 국가가 되게
하려고 자국민을 데리고 다니면서 점령한 땅에 남겨 두고 오는 혼혈정책이다.
스페인도 지배하던 나라들의 지배자들과 혼혈하여 그들이 복종하도록 한 것은 색 다른 이야기이라 신선했으며,
또 미녀가 많아 세계미인 대회에도 입상이 많은 이유라고 했고, 가이드 인생도 바뀌었다고 해서 웃었다.
우리나라 역사 중에 고려말기 왕들 중에 1274년부터 충렬왕부터 1351년 공민왕까지 7명의 왕이 있고, 그 6명의
왕 이름 앞에 충성할 충(忠)가 들어간 것은 원나라 황제에게 충성한다는 뜻이라고 해서 또 한 번 신선했다.
15~16세기에 가장 강력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1492년 스페인은 콜럼버스를 통해 중남미를 정복했고, 1521년
마젤란을 보내 세계 일주를 통해 찾아낸 곳이 필리핀으로 처음 상륙한 곳은 당시 무인도였던 사마르 섬이다.
두 번째 상륙한 곳이 막탄이고, 그는 막탄의 추장과 싸움에서 활에 맞아 죽었다고 했으나 피가페타의 기록에는
언월도 같이 생긴 넓은 칼에 맞아 죽었다고 했으며, 그 칼은 라푸 라푸 동상이 들고 있는 칼이다.
마젤란이 괌 섬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필리핀 동쪽 레이테만(灣)의 즈르안 섬이라고 했으나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으며, 마젤란은 귀족 출신이라서 스페인 황제 카를 5세와 동문으로 친구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을 복수해 주기 위해 미구엘 로페스 데 레가스피 장군이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고
했지만 마젤란은 스페인도 아닌 가난한 포르투갈의 하류귀족으로 태어나 리스본에서 자랐다.
그리고 1517년에 스페인으로 갔기에 카를 5세와 동문이거나 친구가 될 수 없었고, 또 레가스피 장군을 파견한
때는 1565년으로 이때는 오스트리아 황제 카를(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5세의 아들 펠리페(필립) 2세 때이다.
그래서 황제의 이름으로 필리핀이라는 국명이 되었고, 펠레페 2세는 무적함대로 유명한 황제로 마젤란이 전파한
천주교가 국교가 된 유일한 나라이며, 필리핀의 돈 단위 페소(peso)이다.
페소는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우루과이, 쿠바 등에서도 사용되는 돈 단위로 스페인이 사용했던 돈
단위를 사용한 것인데 치안 까지도 멕시코 급이라고 하며, 1898년 필리핀의 독립에 대한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는 남의 영토를 식민지 하기 위한 전쟁이지만 미국의 남북전쟁은 노예제도나 신분 차이를 없애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좋게만 본 것이고, 역사가들은 남북전쟁의 원인은 확실치 않다고 했다.
역사가들은 북부공업, 남부농업의 문화 차이라고 보고 있고, 노예해방은 당시 남북이 다 같이 언제가 는 해야 할
흐름이었는데 링컨이 당선되자 연방에서 탈퇴한 11개 주가 돌아오지 않으면 노예를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노예를 위한 것이 아니고 노예 없이 농사를 짓을 수 없는 남부에 대한 위협한 것이 더 큰 뜻이며, 거대한
인권의 나라 미국과 남의 나라를 약탈하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충돌이 일어났다고 했다.
인권과 약탈의 충돌이 아니라 뒤 늦게 탄생한 거대한 미국은 이미 이 나라들이 다 식민지화 했기에 무력으로 찬탈
할 수 밖에 없었고, 쿠바의 독립을 거부하는 스페인에게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함대를 보냈다.
쿠바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인 메인 호가 보일러실의 폭발로 침몰했으나 미국은 전쟁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스페인
침몰로 몰아 전쟁을 싫어하는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쿠바와 필리핀 전쟁에서 승리했다.
1898년 12월 파리조약으로 스페인에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쿠바와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도 지배권을
넘겨받아 이때부터 미국은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가이드는 필리핀이 독립됐다고 했다.
미국은 평등의 정책으로 학교도 지어 교육도 시켜 영어가 정착되었으나 사람 이름만은 혈통을 따라 스페인 시절의
이름을 가졌다고 하며, 1941년 2차 대전으로 필리핀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됐다고 한다.
2차 대전은 미국과 연합군 승리로 필리핀 독립은 1946년 마누엘 로하스 정부에 이향하면서 시작되었고, 6.25 때
필리핀은 1.800여명의 해병대를 지원하여 인천상륙작전을 도왔는데 794명이 전사할 정도로 열심히 싸웠다.
그 후 장충체육관도 지어주며 한국을 열심히 도운나라로 필리핀도 일본을 무척 싫어해서 더 예쁜 나라라고 해서
웃었으며, 또 필리핀은 통신에도 도움을 주었는데 서울이 02인 것처럼, 마닐라가 02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천 032, 세부 032이고, 부산 051, 남부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가 051인 것처럼, 이렇게 열심히 한국을
지원했는데 불과 몇 십 년 만에 역전되어 한국은 GDP가 세계 11위이고, 필리핀은 세계 37위이라고 한다.
올해는 경제 개발국을 커밍아웃하고, 경제선진국을 선언했는데 이것을 60년 만에 이룬 나라는 우리가 유일한
나라라고 하며, 얼만 전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경제학 학사 수여식 때 총장이 한 연설이라고 한다.
‘너희들은 경제학도로서 경제개발 공부를 하고 싶으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South Korea(남한)를 공부하라.
굶어죽는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60년 만에 선진국이 될 수 있었는지? 정말로 미스터리한 나라이다.‘라고 했다.
라프 라프 동상과 막탄 산토 니뇨 성당으로 가면서 들은 가이드 이야기와 내 지식을 편집해서 기록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Magellan, Ferdinand): 그는 1480년 포르투갈에서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1495년
인도 원정과 1504∼1511년 사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
15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했으나, 모로코의 무어인과의 거래가 왕의 의심을 사게 되어
불신을 받자 1517년 스페인으로 갔을 때 스페인은 동방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포르투갈이 가로막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정보가 부족하여 번민하는 중에 빛과 같은 존재인 마젤란은 스페인 왕의 신뢰를 받아, 마젤란이
발견한 땅의 총독이 되며, 그곳에서 얻는 이익까지 마젤란에게 줄 것을 약속받았다.
전주(錢主) 앙베르의 상인의 참여와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허를 얻어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를 개척하기 위해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남미를 돌다가 거인족(patagon)을 만나 ‘파타고니아’라는 지명을 남겼고, 험악한 풍랑을 헤쳐 나가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고, 그리고 너무 태평한 바다를 만나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1521년 3월 6일 괌에 도착하여 원주민들의 행동을 보고 ‘라드로네스 섬(도적들의 섬)’이라고 불렀으며, 3월 16일
필리핀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같이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월 27일 이슬람을 믿는 라프 라프 추장과 사이가 나쁜 세부 지도자 라자후마본의 요청을 받고 세부인 300명
정도와 스페인 49명, 그리고 대포도 없이 총알과 화약과 화살마저도 조금만 챙겨 막탄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야만족이라는 것을 너무 얕보고 너무 정보도 없이 쳐들어갔다가 1,500여명의 부족 전사들에 대패하여 부하
14명, 세부인 지원군 150명과 함께 살해당했으며, 피가페타 기록을 정리해서 기록하면
‘적들은 모두 마젤란에게 달려들었고, 적들 중 한 사람이 칼 몸이 흰 넓적한 단검으로 마젤란의 왼쪽 다리를
베었으며, 마젤란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적들은 철창과 죽창으로 진정한 안내자를 죽였다.‘라고 기록했다.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지만 포르투갈 시절 필리핀 아래쪽에 있는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까지
다녀온 적이 있어 지구 한 바퀴를 돈 첫 지구인으로 인정받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아메리카 대륙 서쪽에 태평양이 있다는 것과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출발한 곳에 돌아오면 날짜가 하루 늦어진다는
사실도 밝혔고,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했을 때 빅토리아 호 1척과 생존자는 엘카노 등 18명이었다.
빅토리아 호 1척에 가득실린 향료로 인해 모든 항해 비용을 상쇄하고도 이윤이 남았다고 한다.
[막탄 라푸 라푸(Lapu-Lapu) 동상 및 마젤란 기념비 관광]
막타 섬 전체가 ‘라프 라프 시’인데 그의 동상이 있는 리버티(Liberty)공원 앞길에는 원색으로 그려진 가면 같은
그림이 라프 라프 추장으로 자세히 보면 잘 생겼는데 그는 필리핀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그의 동상 앞에서 나이를 먹은 여자 경찰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아마도 진급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라프 라프 동상 뒤 일직선상에 마젤란 기념비가 있다.
영웅의 동상과 그의 적이었던 사람의 기념비가 함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마젤란의 기념비가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들에게 전해준 종교의 덕분이 아닌지?
2019년 올해가 1519년 마젤란이 세비야 항구를 출발한지 꼭 500주년 되는 해이어서 그것을 상징하는 커다란
꽃이 있는 곳에서 마젤란이 들어왔다는 좁은 해협과 맹그로브 숲을 바라보면서 당시를 회상해 보았다.
작고 예쁜 정원을 구경한 후 차에 올라 막탄 산토 니뇨 성당으로 향하면서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이드의 이야기]
필리핀에서는 도시나 농촌이나 말할 것 없이 ‘집과 집 사이에는 성당이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것은 필리핀
원주민들의 부자나 권력자들이 지배자 스페인과 결혼이나 권력을 얻기 위해 성당을 지어서 헌당을 했다고 한다.
성당은 최소 150~200년 된 것으로 종교만은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시아의 중남미라고 한다.
우리보다 잘살던 필리핀이 가난하게 된 것은 독재자 마르코스와 ‘사치의 여왕’으로 불리는 이멜다의 독재정권
재임 중에 마르코스 가족과·친지들은 횡령 및 부정으로 필리핀 경제를 유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 부치면 미국의 약탈 기업이 한목을 했고,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와 대다수의 가난한 농민 사이의 소득
격차는 컸다는 것이고, 정치의 불안 그리고 민다나오 섬의 이슬람의 반란이 경제를 침몰시켰다고 한다.
민다나오 섬은 우리나라 외무부에서 여행금지 지역으로 지정한 것은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많은 무슬림들이
필리핀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무슬림반군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바오는 인구가 500백만이라고 했으나 약 140만으로 제 2의 도시이며, 필리핀의 7,400개 섬은 범인들이 숨기에
좋은 장소이어서 치안이 무척 나빠 이 때문에 마약과 불법무기가 많다고 한다.
마약은 공급이 수요를 앞질러 무척 싸져서 우리나라에서 몇 십 만원 하는 것도 여기서는 4달러라고 한다.
빈민촌을 지나가면서 필리핀의 1억 5백만 명의 인구 중에 우리나라 남북을 합친 인구인 8천만 명은 이렇게 살고,
나머지 2천5백만 명은 미국의 중 상류 층의 삶을 살기에 절대로 후진 국가는 아니고 빈부격차가 크다고 한다.
필리핀도 1~2 백만 원 가지고는 한국처럼 살 수 없다고 하며, 가이드의 생활비도 400만 원 된다고 했는데 세부
중심부에 있는 7~80층 아파트에 살고, 지프니가 아닌 에어컨 나오는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빈부 층이 사먹는 빵은 방부제가 들어가 8일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가격은 2~4 페소이지만 세부 중심가는 당일
구워서 파는 단팥빵은 80~120 페소 하는데 1페소는 한국 돈 약 23원이라고 한다.
말린 망고의 가격차가 크게 나는 것은 필리핀에서 40도가 넘는 가장 더운 4~5월에 태풍을 만나 떨어진 것을
수거하여 썩은 부분을 잘라내기에 큰 것이 없고 조각조각 난 낙과는 색, 당도, 방부처리를 한다고 한다.
말린 망고를 살 때 망고 하나를 두 조각낸 모양이 있는 것을 고르면 되고, 조각조각 난 것은 사다가 미운 사람에게
선물하라고 해서 또 한 번 웃었고, 호세 리잘과 아키노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래에 기록했다.
그리고 현재 대통령 두테르테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많이 배우지 못했다고 했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다바오 시 검사로 재직할 때 범죄자들에게 가차 없는 검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고, 다바오 출신이기도 하다.
그가 집권한 것이 4년인데 길거리에서 경찰 총에 죽은 범죄자들이 1만9천 명이나 된다고 하며, 우리나라도 이런
대통령을 수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먼저 해야 할 전쟁은 마약이 아니고 부패와 전쟁이라고 한다.
그와 가족은 부패로 부를 축척한 아주 나쁜 대통령으로 빈민들에게 돌아갈 예산을 대통령부터 차례로 착취해서
그들에게 돌아갈 돈이 없었고, 그들은 살기 위해 주변에 흔한 마약을 팔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있는 마약에 중독되어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놓고 범죄자라고 쏴 죽이는 사람이 바로
두테르테 대통령인데 필리핀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팩트(fact, 사실)이라고 한다.
EGI 리조트 옆에 있는 J. PARK를 예로 들면서 그 사장은 미국 부유층에 사는 400만 명의 중에 하나로 한국인들은
돈 벌려고 간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좋은 곳에 살기 위해 간 사람들이라 모두가 부유하다고 했다.
가령 J. PARK는 1년에 100억 페소의 수입을 올렸다고 하면 그들은 세무서에 1~2억을 뇌물로 주고 세금 한 푼도
내지 않고 몽땅 미국으로 가져가기에 아무리 관광객이 와도 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못한다고 한다.
이런 부패를 두테르테 대통령도 알고 있지만 부패와 전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먼저 감옥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빈민 자들을 잘 살게 한 후 그래도 마약을 하면 쏴 죽여도 된다고 했다.
가이드도 20대에는 일은 안하고 술만 먹고, 마약하는 필리핀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40대가 넘으면서 그들을
이해가 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아키노 대통령과 호세 리살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 간단하게 기술하며, 산토 니뇨 성당에 도착했으나
비가 몹시 내려 차에서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성당인데 비 때문에 안 볼 수는 없었다.
※지프니(jeepney): 찦(jeep)+포니(pnoy)의 합성어라고 하며, 라스피나스에 있는 사라오 지프니(Sarao Jee
Pney) 공장에서 만든 지프니(Jee Pney)는 필리피노들이 만든 걸 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고 남은 군용 지프를 개조해 만든 것이 시초로 버스와 지프의 중간 형태처럼 생겼으며, 다양하게
색칠해서 독특하게 만들었고, 양옆으로 12명 정도타지만 승객이 많을 때는 위에 타거나 매달려서도 간다.
※호세 리잘(Jose Rizal, 1861~96년): 그는 사탕수수 농장주인 아버지와 최고 고등교육을 받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페인에서 의학 공부를 하였으며, 그는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의사, 저술가, 시인, 언론인, 교육가, 필리핀의 독립 운동 할 때 무장투쟁론에 반대하면서
‘들고 있는 총칼을 다 내려놓아라. 총칼을 들고는 절대로 독립할 수 없다. 대신 자식들에게 책을 주라. 그러면
독립이 온다.’라는 말을 남겼고, 처형되기 전날 지은 스페인 시 ‘마지막 이별’이 걸작이다.
미국에는 가장 존경 받는 링컨이 가장 많이 쓰이는 1센트 동전에 들어가 있듯이 필리핀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전 1페소에 호세 리잘이 있으며, 마닐라 시에 그의 공원과 박물관이 있다.
※아키노(Aquino): 아키노는 이탈리아의 지명이름인데 필리핀에 아키노 가족은 3명이 유명하며, 그 중 1932년
타를라크 주에서 태어난 베니그노 아키노 2세(Benigno Aquino II, 1932~1983년)가 있다.
그는 필리핀의 야당 정치인으로 1972년 마르코스는 계엄령 선포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83년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으나 마닐라 공항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고, 전국적인 반정부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가이드는 대통령 일 때 죽은 것으로 착각했으며, 다음이 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1933~2009년)로
그녀는 타를라크 주에서 필리핀 최대의 지주이자 제조업 재벌인 코후앙코 가문의 딸로 태어나 1955년 베니그노
아키노 2세와 결혼했으며, 1983년 남편이 죽자 1986년 야당연합의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공식적으로 마르코스가 이겼다고 발표했으나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군부도 마르코스의 계속집권을
거부하면서 아키노를 필리핀 대통령으로 선언하여 11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미국은 이를 인정했다.
그는 경제적인 불평등에 항거하는 계속적인 소요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해 강력하지 못한 대통령으로 평가되었고,
1992년 대통령에서 물러나 국제 해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참여 했으나 2009년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다음은 베니그노 아키노 3세(Benigno, 1960년)로 1983년 아버지가 피살되자 가족과 함께 귀국했고, 1998년부터
3선의 하원 의원을 지냈으며, 2007년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2009년 전 대통령인 어머니가 사망했다.
어머니 추모열기 덕분에 자유당 대선후보로 영입됐고, 2010년 대선에 출마해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아들과
엄마가 모두 대통령에 당선되는 세계 정치사에서 유래 없는 일이 일어났으며, 16대 현 대통령이 두테르테이다.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Roa Duterte): 1945년 3월 28일 생으로 남 레이테 주에서 태어나 남 다바오 주
다바오에서 성장한 그는 1970~80년까지 다바오 시 검찰의 검사로 재직했다.
재직할 당시 범죄자들에게 인정사정없는 검사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으며, 1988년 지방검사직을 사직하고, 다바오
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3선 연임 제한규정에 걸려 딸은 시장, 아버지는 부시장이 되었다.
다시 시장으로 당선되어 총 22년간 다바오 시정을 이끌면서 90년대에 무슬림 무장단체와 공산군 활동 등으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던 도시를 시민에게는 폭죽 절대금지, 길거리 담배금지, 길거리 금주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시내 요소마다 검문소를 설치하여 침입세력을 막았으며, 자경단을 운영해 범죄 용의자 1,700여명을 재판
없이 처형하였고, 중국인 소녀를 유괴하여 성폭행한 남성 3명을 공개 처형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징벌자(The Punisher)'이지만 다바오 도시는 밤에도 안전한 도시가 되었고, 2016년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하여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초법적 살인을 통해 범죄를 일소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거침없는 막말 행각으로도 유명해지면서 ‘필리핀의 도널드 트럼프’라고 불린다.
[탄 산토 니뇨 성당(Sto. Nino de Mactan Church) 탐방]
이 성당은 지도에 ‘Basilica Minore del Santo Nino de Mactan Santo Nino'라고 표기 되어 있으며, 언제 세워진
것도 알 수 없지만 세부 시내에 있는 산토 니뇨 성당과 똑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성당이다.
성당의 외형은 스페인병사들의 모자를 형상화해서 만들었기에 좀 특이했고, 내부는 비가 오는 관계로 어두웠으며,
정면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상이 있고, 세부 시내에서 못 보았기에 궁금했던 아기 예수 상이 있어 반가웠다.
신부가 앉았던 의자가 많이 낡았고, 문도 다 부서진 고해성사 자리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했기에 저토록 낡았을 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며, 이제는 저녁을 먹고 마지막 남은 옵션을 보러갔다.
[어메이징 쇼(Amazing show) 관람]
‘대단히 놀라운 쇼’라는 뜻을 가졌지만 출연진들이 모두 게이들이라고 하며, 한 캔의 음료수를 받고 자리에 앉아
관람을 하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마지막 관람객과 같이 하는 부분만 조금 찍었다.
놀랄 일도 없었으나 얌전하게 생긴 한국 여성 관람객이 웃기는 것이 더 재미있었으며, 이제는 마사지 업소에 있는
샤워장에서 샤워를 했는데 여기도 물이 적게 나오는 것은 비슷했으나 리조트보다는 좀 나았다.
이제는 공항으로 이동하여 부산행 비행기를 타는 과정은 입국 때보다는 조금 사정이 나았다.
[5일] 12월 14일 토요일
● 일정: 00:45 LJ038 세부(CEB) 막탄 국제공항 출발(4h 15m)→ 06:05 김해(PUS) 도착 후 해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