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불가리아,세르비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3일] 10년 6월 30일 수요일
일정: 부카레스트 → 2.불가리아의 벨리코투르노보 이동(175km 3.5시간) 관광 → 아르바나시 이동(4km, 10분) →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이동(230km, 3시간 반) → 호텔 (벨리코 투르노보 성으로 가는 길) 이번 여행코스는 유럽에서 내려오는 코스가 아니고 올라가는 코스라 날이 갈수록 더 좋은 곳으로 가기 때문에 매일 기대해도 좋다고 한다. 어제 차우셰스쿠 중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카레스트 시내를 벗어났다. 차우셰스쿠 부인 엘레나는 빚은 갚기 위한 수단과 국가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인구증가를 계획으로 피임과 중절을 법으로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 실천 계획으로 가임여성은 피임여부를 단체로 신체검사를 받게 하였으며, 아이가 없는 부부에겐 특별세를 내게 하여 임신한 여성은 헝가리나 이웃나라에 가서 중절 수술을 받았다. 이것을 안 정부는 임신부는 여행을 금지시켰으며, 몰래 가다가 들키면 사살 당했는데 그래서 자연이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아 정부는 고아원을 경영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도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낙태 사건을 영화로 만들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가 4개월, 3주, 2일의 약자로 ‘432’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되었다고 한다. 유로본부의 지원금으로 새로 만들었다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넓은 대평원이 놀고 있는 곳도 많았다. 또 알렉산더 대왕이 때문에 마케도니아라는 나라를 가보고 싶어 하는데 이 나라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며, 이 국명 때문에 그리스와 마찰이 많다고 한다. 루마니아 여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는 것은 귀에 바람이 통하면 기가 빠져 나간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래서 방에 창문도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좁은 도로를 따라 루마니아의 국경도시 '지우르 지우'와 불가리아 국경도시 '루쎄' 사이에는 흐르는 도나우 강이 국경의 경계를 이이루며, 다리를 건너면 도로표지판에 영어와 발칸과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키릴문자와 함께 표기 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불가리아의 요구르트와 장미 이야기) 이제는 우리에겐 요구르트의 대명사로 쓰이는 불가리스의 나라만 기억되는 불가리아에 들어와 이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불가리아는 잘 사는 나라였지만 인구가 적어 경제규모가 작다고 한다. 요구르트 때문에 장수국가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아니라고 하며, 요구르트 계란이나 우유를 반쯤 발효시킨 것이라고 하며, 요구르트에는 유산균이 많아 몸에 이로운 식품이나 불가리아 것은 맛이 없다고 한다. 불가리아에는 건강식품으로 만든 좋은 제품을 불가리아 가이드에게서 구입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료에 세계의 장미꽃 90%를 생산한다고 해서 어디든지 장미를 가꾸는 농장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장미농장이 보이지 않아 궁금했다. TC는 궁금함을 풀어주었는데 장미오일은 여성호르몬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는 불가리아의 장미축제를 보기 위해 온 팀을 딱 한 번 인솔한 적이 있다고 하며, TC도 장미꽃이 만발한 농장을 상상했다고 한다. 장미축제가 열리는 카잔룩 물어물어 찾아갔으나 축제가 끝난 뒤라 볼 것이 없었다고 하며, 장미는 발칸 산맥과 트라키아 평야 사이에 있는 계곡(로즈밸리-rose valley)에서 생산되는데 장미 3천송에서 1g의 오일을 얻을 수 있기에 가격이 비싸다고 한다. 자료에 본래 장미축제일은 매년 6월 첫째 주의 토, 일요일에 열리지만 사정에 따라 축제일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고 하며, 축제기간에 민속 의상을 입은 아가씨들과 꽃 따는 체험도 할 수 있다. 거리도 장미꽃으로 뒤덮인다고 하지만 꽃이 피면 바로 수학하기에 만발한 장면은 보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리고 장미꽃을 수출하는 나라로 네덜란드, 이스라엘, 일본, 한국 등으로 알았는데 자료에 세계최고가 불가리아라고 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여행으로 장미꽃이 아니고 오일이라는 것을 알았고, 또 세계의 90%가 아니고 70~80%이라는 것도
다시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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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호두나무, 자귀나무 이야기) 드라큘라백작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는 길도 아름답지만 해바라기 밭이 너무 아름다워 이번 여행에서 좋은 추억 중에 하나이다.
해바라기를 보면서 옛날에 아는 분이 만주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해바라기 씨를 간식으로 먹던 이야기를
해 준 것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TC가 똑 같은 이야기를 해 준다. TC는 이곳의 아이들이 러시아 군인처럼 먹었다는 것만 다를 뿐인데 러시아 군인들은 배급받은 해바라기 씨를 담아 가지고 다니는 작은 가방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해바라기 씨를 먹었던지 한 주먹 입에 털어 넣은 후 이빨로 씨를 까먹고 껍데기를 뱉어 내는 속도에 기가 막힐 정도라고 했다. 나중에 TC가 소피아 로렌 주연한 '해바라기'라는 영화를 보여주어 감명 있게 봤는데 내가 옛날에 본 영화는 기억은 희미하지만 달랐으며, 한 아가씨를 두고 두 청년 사이에 펼쳐지는 뻔한 줄거리를 가진 영화로 착한 청년은 해바라기 밭에서 일하는 가난한 청년이다. 나쁜 청년은 당연히 그 밭 지주의 아들인데 착한 청년과 해바라기 밭 속에서 데이트하던 그 장면 때문에 해바라기 밭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불가리아의 해바라기 밭>
불가리에서 보이든 호두나무는 우리나라 것보다 잎이 조금 더 좁은데 슬로베니아까지 어디든지 흔하게 보였으며, 펠레슈 성의 조각재료로 쓰였다고 하여 어디서 구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으며, 호두나무는 조직이 치밀하여 충격에 강하지만 무르기 때문에 섬세한 조각과 연마도 잘되 마무리가 쉽고, 도장과 접착에도 친화성이 있어 고급가구 재료라고 하며, 어릴 때 비싸게 팔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자귀나무도 보였는데 이 나무는 합환목이라고 부르는데 합환은 환희를 함께한다는 뜻으로 남녀의 잠자리를 의미하여 애정목이라고도 한다. 또 꽃이 부채 같아 부채나무라고 부르는데 옛날 선비들이 집 안의 화목을 바라는 뜻으로 정원에 많이 심었고, 줄기는 신경통, 류머티스의 약용으로 쓰인다. 갑자기 절벽에 가옥이 많이 보여 넓은 땅을 나두고 저런 곳에 집을 지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졌을 때 이미 우리는 벨리코 투르노보 도시 안에 있었다. 험한 양 계곡 사이에 세워진 집들이 계단식으로 쌓아놓은 것 같이 이어져 있어 어디가 경계인지 모호하게 느껴졌으며, 매우경사진 도로는 좁았다. 아마도 이 도시는 방어적면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되어지는 곳으로 인구 7만도 안 되는 작은 도시이라 잠간 사이에 통과하였다. 도시의 제일 높은 곳으로 생각되는 곳에 차가 멈추고 내리니 아래로는 도시가 보이고 앞에는 바로 성곽이 보였으며, 가이드를 만나 바로 성으로 향했다.
<불가리아의 야생화>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관광] 발음하기도 힘든 이 성은 궁전을 방어했던 성으로 현재 복원중이라고 하며, 교회로 올라가기 전 도시 전체의 그림을 보았다. 이 지역은 얀트라 강이 복 주머니처럼 감싸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는 생각이 들지만 눈으로는 전체를 확인 할 수는 없었으나 강이 심하게 굽어 있는 것은 보인다. 발칸지역의 교회 모두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거나 돈을 받기에 가이드가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사진은 찍는 것을 포기했지만 감시가 심하지 않는 곳에서는 각자가 알아서 찍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모승천 교회 안에 들어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이 교회는 '대 주교' 교회로 1973년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발칸의 모든 교회 이름들은 그 교회에 있는 것 중에 이름난 조각이나 아이콘에 따라 교회의 이름으로 부른다고 하며, 이 교회도 성모승천의 그림이 있어 교회 이름이 되었는데 이곳에 있는 그림은 최근에 그린 것 같은 대형벽화가 성화 같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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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중에 당시의 사형 제도를 그린 그림으로 팔 다리를 묶어 절벽에 떨어지는 그림은 칼 요한 왕이 생포한 볼드윈에게 사랑을 고백한 왕비가 처형당하는 그림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이 교회는 예배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것은 기억에 없고, 22명의 짜르가 살았다는 궁전으로 향했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아 어떻게 왕들이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으며,그래도 그림에는 제법 궁전 같아보였인다. 그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을 들었으며, 국기 밑에 있는 곳이 왕실인데 규모가 작은 것은 이 지역이 유럽에서는 아시아적이라 집들을 작게 짓는 관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너편 산등성이에 보이는 흰 건물이 서기장이 있던 곳이라고 하며, 이 나라는 민주화로 되면서 피를 흘리지 않는 유일한 국가로 이 나라도 루마니아처럼 체제만 바뀌고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그림의 좌우가 바뀌어 그려졌다는 것 밖에 기억나지 않았으며, 멀리 보이는 산 아래가 성벽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바위가 성벽처럼 보였다. 궁전 앞에는 오페라 공연을 위에 설치한 무대가 성의 일부처럼 위장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차로 돌아와 아르바나시로 향했다. 돌아와 사진을 찾아보니 잘 못 되어 동영상으로 볼 수 없도록 너무 짧게 찍혀 인터넷에서 찾아 보았더니 본 것보다 더 대단한 곳이었는데 사진이 실물보다 더 잘 나오는 곳인지는 몰라도 내가 정말 그곳에 갔다 온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본 것이 적었다.
(벨리코 투르노보 성의 자료) 얀트라 강 상류에 있는 벨리코 투르노보는 1187~1393년 사이 두 번째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였고, 13세기 차르베츠 언덕 궁전에는 22명의 짜르가 살았다. 1230년 이반 아센 2세(1218~1241)의 황제가 불가리아 왕국의 독립선언이 ‘순교자 교회’에서 선언되었다고 하며, 이 황제시대에 슬라브 문화의 중심지로 ‘불가리아의 아테네’라 불렸다. 1393년 오스만제국에게 멸망 했으며, 그 후 5세기에 걸쳐 교육 문화의 중심역할은 이어졌고, 1867년 오스만터키에게 저항하는 무장봉기의 중심지가 되었고, 2차 대전 때 반파시즘의 최대거점이었다. ※차르(tzar, czar): 또는 짜르는 로마의 카이사르(씨저) 이름으로 슬라브 족은 황제의 칭호로 사용했는데 이름 때문에 생긴 일화를 소개한다. 러시아 역사학자가 네부카드네자르에 대한 연구서적을 발간하였다가 그 학자는 유배당하고 서적은 몰수 되었다고 하는데 이유는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czar)는 러시아 말로 '황제가 없다.'라는 뜻이 되어 반역죄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큰 사진: 벨리코 투르노보 성의 차르 궁전, 작은 사진: 좌우가 바뀌어 그려졌다는 궁전의 복원도>
[아르바나시(Arbanasi) 관광]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4km 밖에 안 떨어진 울창한 숲속에 있는 '아르바나시'라는 아담한 동네에서 불가리아 전통식으로 점심을 먹고 산책을 겸한 관광을 나섰다. 이 지역도 안동 하회 마을 같이 전형적인 농촌의 골목에는 예쁜 야생화도 피어 있는 분홍색 기와를 올린 돌담 집이 있는 정겨운 풍경의 동네이다. 골목을 따라 전통 집들을 구경하는데 대문이 열려 있어 내부을 보니 정원이 아주 잘 되어 있는데 대문에 별 3개가 있는 것이 지금은 숙박업을 하는 것 같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탄생교회에 안으로 들어가 설명을 들었다. (탄생교회-Nativity Church) 이 지역에 있는 3곳의 정교회 중에 아이콘이 가장 많다고 하는데 그림과 함께 2000개가 넘는 다고 하며, 1632~1649년 사이 그려졌다고 한다. 왼쪽 앞에 교회의 이름이 된 '탄생그림'은 사람의 일생을 그린 것이라고 하며, 달력 그림의 하단은 지옥을 그린 것이라고 하고, 프레스코 화는 오래 될수록 더 선명해 진다고 하며, 그림이 어두운 것은 촛불의 그을음 때문이라고 하며, 지금은 지운 것이 이 정도라고 한다. 예배는 남녀가 다른 공간에서 보는데 성모 마리아 죽음 그림 뒤편이 여자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요사이는 정교회도 강론을 한다고 하며, 옛날에는 서서 예배를 드렸으나 요사이는 의자들을 놓고, 기부 액수에 따라 순서대로 앉았다고 하며, 이곳을 떠나 전통가옥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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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턴트 살리예브 하우스) 이 지역은 황제가 자기 양자에게 주었고, 그 후 귀족들이 살아 좋은 집들이 큰 편이라고 하며, 그런 집들이 지금은 영업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통 가옥은 17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에 몇 차례에 걸쳐 개축된 곳으로 불가리아의 민속과 전통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곳이다. 집 구조는 돌을 쌓으면서 지진에 견디도록 나무를 중간, 중간에 넣었으며, 2층은 주거 공간이고, 3층은 저장용으로 사람은 살지 않았다고 한다. 1층은 이 지역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표시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곳으로 가축들이 사는 공간이라 층수에서 제외되고 사람 사는 2층이 1층이 된다. 오늘 우리 개념과 달라 자주 실수하던 유럽 엘리베이터 개념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학이었으며, 내부에 전시된 것 중에 옛날에 숯불을 넣어 쓰던 다리미가 우리와 같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변소로 대변을 보는 입구가 삼각형인데다가 크기도 작아 과연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모두들 보고 웃었다. 이곳은 지나는 길에 있어 보여 주는 관광지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떤 면으로는 불가리아 인들이 진정한 문화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엘리베이터 층수도 알게 된 유익한 곳이다.
<콘스탄트 살리예브 하우스 전통가옥에 전시된 불가리아 옛 사람들의 생활 도구>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로 가는 길) 소피아로 가면서 가이드가 불가리아에 오게 된 동기 또 불가리아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개인적인 이야기는 옮길 필요도 없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불가리아 국민성에 대한 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은 남의 일도 잘 도와주는 착하민족이라고 하며, 갱단도 주민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한다. 착하지만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인 면도 있어 외국인 차량을 파손하는 일이 많은데 가이드도 피해를 입었다고 하며, 공무원의 월급은 600(90만원)유로 정도라고 한다.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도 먹었지만 아직도 해가 있어 호텔 앞에 있는 공원을 산책을 했다. [4일] 7월 1일 목요일 일정: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관광 → 3.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이동(380km, 5.5시간, 국경 40분) → 호텔 [소피아(Sofia) 관광] 시내로 향하면서 한국의 차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으면 한 택시 회사는 현대에서 생산하는 아반떼만 80%를 가지고 운영하는데 손님들의 칭찬이 대단하다고 한다.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궁 앞을 지나면서 경비병의 임무 교대식을 보았는데 경비병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가이드 말로는 한국 TV에서 가장 초라한 교대식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소피아 관광은 전부 걸어서 하며, 점심을 먹은 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이동한다. (스테파비델리아 광장) 버스에서 내리고 처음 간 곳은 '스테파비델리아 광장'으로 이곳은 로마시대부터 천연 온천수의 샘터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식수로 받아가고 있다. 수도는 잠금 장치도 없이 계속 쏟아지고 있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담벼락 옆의 작은 돔 지붕 아래는 물과 관계가 있어서 그런지 바다의 신 포세이돈 조각상도 있다. (바냐바시 모스크) 조금 이동하여 바냐바시 모스크가 보이는 작은 광장으로 이동하여 분수대 뒤로 보이는 로마시대 목욕탕이라고 하는데 건물은 로마시대 것이 아니고 현대식 건물로 현재 공사 중이라고 한다. 바냐바시(banya bach)는 많은 목욕탕(many baths) 즉 ‘공중목욕탕’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며, 거대한 돔과 하늘까지 치솟은 첨탑이 유명하다고 알고 왔지만 평범한 이슬람식 사원이다. 1576년 오스만제국 최고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설계했다고 하며, 자료에는 70여 개의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된 사원에 하나이고, 현재는 이 사원만 명맥을 유지한다고 했다.
<바냐바시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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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페트카 지하교회)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중앙백화점 부근 지하도 있는 중세교회로 고대 로마사원 위에 건축했다고 하는 벽을 돌로 장식한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건물이다. 자료에 내부는 화려하고 독특한 건축술과 가치 있는 프레스코 화는 오늘날은 문화 기념물로 간주된다고 했지만 내부는 보지 못했으니 알 수가 없고, 건축술은 긍정하기가 좀 힘 든다. 1395년부터 지배를 받던 터키의 지배자 터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지하에 지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를 오래 동안 속인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지럽지만 그 만큼 종교를 지키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다. 그 예로 TC는 이곳의 나이가 많은 분들은 현대인들과 반대로 긍정의 뜻으로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부정의 뜻으로 머리를 앞뒤로 꺼덕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개종을 강요하던 터키인들이 개종했는지를 물으면 했다는 뜻으로 머리를 앞뒤로 꺼덕였으나 속으로는 ‘아니다’라고 한 것이 이유라고 이야기했다.
[성 네델리아(나탈리아 St. Nedelya church) 교회]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일정에는 없었지만 다시 모일 장소로 적합하여 이곳에 온 것 같다. 이 교회는 1856~ 1863년 사이 네오비잔틴양식으로 건축했으나 여러 번 개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며, 1925년 보리스 3세가 공산당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이때 150여명이 사망하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짜르(황제)는 무사했다고 하며, 그 사건이 앞의 벽면 검은 판에 기록되어 있다. 내부는 가톨릭처럼 벽화가 화려하였고, 성만찬예식이 거행되고 있었으며, 이곳도 서서 예배를 드렸으나 현재는 의자를 배치하여 헌금순위로 앉고 남으면 연장 순위로 앉는다고 한다. 아침, 저녁으로 2번 보는 예배는 신도가 없어도 행해지고 성호를 긋는 순서가 가톨릭과 반대이며, 신부는 서품을 받기 전에는 결혼이 가능하나 진급은 미혼자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성인을 모시는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이는 비토샤 대로는 도시의 가장 번화가였는데 각각 헤어져 관광한 후 다시 여기서 만나기로 하여 회계사님 부부와 같이 왼편도로를 따라갔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삼성의 간판으로 반가워 기념사진을 찍고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사람과 차의 왕래는 많지 않아 인도를 벗어나도 지장을 없었다. 전차인 트램(tram)만 오가고 있었으며, 명품쇼핑가 이어서 그런지 가격도 비쌌고, 다시 돌아 올 때는 반대편 뒷골목을 가보았는데 화려한 과일가계를 빼고는 볼 것이 없었다. 다시 대로를 따라오다가 사자가 2마리가 있는 법원건물을 보고 제자리로 돌아왔으나 일행이 안 보였고, 시간이 좀 남아 혼자 옆에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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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도중에 계단이 있어 내려가니 사방이 현대식 건물로 싸인 중앙에 로마식 벽돌 유적지가 있어 놀랬으며, 혼자 횡재한 것 같아 사진을 찍고 싶지만 사람이 없다. 혼자 사진을 2장 찍고 건물 통로를 통과하자 아침에 본 대통령 궁 앞이 아닌가? 거기서 예쁜 동양여인과 남자들을 만났는데 한국 사람들이었으며, 더운데도 전통복장을 한 2명의 경비병 사이로 모두들 몰려가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을 나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을 찌고 나오면서 여자한 사람이 ‘스미마셍’이라고 경비병에 인사를 했고,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말을 여기서 듣다니! 이것은 하와이 현지 가이드가 외국에서 잘 못했을 때 얌체 같아도 한국 사람이 욕 안 먹도록 일본사람인 것처럼 하라고 가르쳐 준 말이다. 가이드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서울 심포니 단원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마도 그 분들 같다고 한다.
<법원 앞에서 본 소피아 거리>
[성 게오르기(St. George Rotunda) 또는 게오르기우스 교회)] 다시 간 곳은 아까 혼자서 감탄했던 유적지로 앞은 대통령궁, 교회 뒤는 쉐라톤 호텔, 교육부, 국회의사당, 백화점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곳에 이런 유적지가 있다. 현재는 건물들로 인해 발굴할 수 없었지만 구시가지 아래 전부가 유적지라고 하며, 앞은 로마 시대의 목욕탕이라고 하고, 뒤편 2층이 원형으로 된 건물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로마목욕탕 위에 건축한 건물로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며, 터키지배 때는 이슬람사원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입구부터 붉은 벽돌로 안에는 컴컴하여 잘 보이지도 않지만 예배드리는 사람과 향내로 가득하며, 귀퉁이의 공간에는 시대가 다른 듯 한 유물도 보인다.
(대통령궁과 왕궁) 구 공산당 본부가 현재의 대통령궁이라고 하며, 이렇게 중요한 곳을 경비병 2명이 지키고 있는 것이 우리는 이해가 안 되지만 그것도 경비보다는 관광객을 위해 있는 것 같다. 대통령궁에서 광장건너편 대각선으로 보이는 1,2층의 노란색건물이 러시아가 투르크와 전쟁에서 승리하여 1908년 불가리아 3차시대 왕정을 열었던 궁전이라고 한다. 시메온, 보리스 3세 시메온 2세가 거주했다고 하며, 시메온 2세는 망명했다가 돌아와 시메온 당의 당수도 역임했고, 국무총리도 했다고 한다. 가이드가 말하는 숫자는 틀린 곳이 많아 질문도 해보았는데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그렀다고 하지만 기억은 착각할 수도 있어 자료를 인용하기로 했다.
<불가리아 왕국의 궁전>
[세르디카(Serdica) 지하 유적지] 이 유적지는 대통령궁과 국무총리실을 연결할 지하도를 파다가 발견되었다고 하며, 기원전 6세기 경에 이 지역에 트라키아 세르디 족이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점령한 후 3세기경에 유적들을 건축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동문에 해당하는 성벽과 2개의 탑이라고 하며, 정형적인 로마의 빨간 벽돌과 석조 벽도 보인다. 당시에 사용했다는 통로는 돌들은 미끄러울 정도로 반들거리며, 통로 옆에는 발굴된 석판 같은 유물 몇 개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중에 세르디카 유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름만 세르디카 유적지이지 그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세르디 족이 처음 정착했다는 장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닌광장의 벼룩시장) 식당으로 가다가 깃발을 들고 서 있는 동상이 보였으며, 이름이 레닌광장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 동상은 레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모습도 비슷하다. 이곳에는 벼룩시장이 서는데 규모가 큰 편으로 구 공산당 시절 것은 다 있는 것 같은데 그중에 당시의 동전, 화폐, 훈장, 악기, 이콘 등의 그림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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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에서 기념품을 사지 못해서 이곳에서 사기로 마음먹고 찾았지만 살 것이 없었는데 무늬가 은은한 은색의 작은 뿌롯지가 있어 물어보니 문스톤(moonstone)이라고 한다. 마음에 들어 물어보니 50유로라고 해서 돌아서니 10유로를 달라고 해서 흥정하여 8유로를 주기로 하고, 10유로짜리 지폐를 주었다. 1유로가 2레바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가진 유로가 없다며 2레바만 주고, 속이려고 한다. 문스톤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았는데 우리말로는 문장석(月長石)이라고 하며, 보석의 일종으로 스리랑카에서 많이 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부산의 나이 많은 분은 중고 아코디언을 사서 나에게 운반을 부탁했는데 가지고 다니는 것은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은데 요사이 기억력으로는 놔두고 올 가봐 걱정이 된다. 매번 만나는 것이 어려워 못 도와 드렸는데 고생을 많이 하시는 것 같다. [성 니콜라이 교회(Saint Nikora church)] 식당으로 가면서 바로 옆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로 들렸는데 이곳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 규모가 작지만 아담하고 예쁜 교회인데 외부 모양부터 러시아 양식인 지붕에 둥근 양파모양으로 내부는 기억이 없다. [성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St. Alexander Nevsky church)] 발칸반도에서 가장 큰 성당은 러시아정교회로 네오비잔틴양식의 건축물이라고 하며, 불가리아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가 투르크와 전쟁(1877~1878)을 하여 승리하였다. 그때 죽은 20만 명의 러시아 군인을 기념하기 위해 1882년 착공하여 1912년에 완공하였는데 30년 동안 건축했고, 1960년 러시아가 기증한 20kg의 금으로 도장을 했다. 내부 면적은 1,300㎡로 당시 소피아인구 2.5천명일 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큰 건축물인지 알 수가 있으며, 하나님을 그린 그림은 보기가 어려운데 이곳에 있다. 프레스코, 벽화, 조각 등은 주위에 있는 6개 나라 예술가들의 작품이라고 하며, 거대한 조명기구 샹들리에가 인상적이고, 교회이름은 투르크와 전쟁을 치룬 불가리아 '건국의 아버지'로 예우 받는 러시아황제 알렉산더 네프스키 2세(Alexander Nevsky 재위1855-81)의 이름에서 왔다. 이 황제는 국경을 함께하고 있는 캐나다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이 두려워 1967년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팔았으며, 이 땅을 사들인 국무장관 스워드는 어리석은 거래를 했다고 하여 '스워드의 어리석은 행위 (seward folly)'라고 했고, ‘스워드의 아이스박스’라며 비아냥거림도 받았다.
<거대한 성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
(소피아 도시의 역사) BC8세기 트라키아 부족인 세르디족이 정착했고, BC29년 로마가 정복하여 세르디카라고 불렀고, 트라야누스 황제(98~117)와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가 지배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수도를 비잔틴 전에 옮기려 했던 곳이라 애정을 가지고 자주 들렸으며, 이때에 도시가 번영하면서 강력한 성벽들을 건립했다고 한다. 342~343년 그리스도교 주교들의 중요한 회의체였던 사르디카 공의회의 개최지였으며, 4세기 후반 동로마제국에 속했다. 441~447년 동로마제국이 조공을 받치지 않자 훈족의 왕 아틸라는 비잔틴을 점령할 수 없어 441년 베오그라드를 443년에는 소피아를 점령했다. 809년 크룸 왕이 합병시키고 슬라브어로 스레데츠(그리스어 트리아디차)라 불렸으며, 1018~ 1185년 제2차 불가리아제국은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382년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여 동양적인 특색이 두드러졌으며, 1878년 1월 4일 러시아군대에 의해 터키 지배에서 벗어났고, 1879년 4월 3일 불가리아의 수도로 정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에게 점령당했으나 1944년 러시아군대에 의해 해방되어 1947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역사적인 유물로는 복구된 성 게오르기우스 교회, 보야나 교회, 성소피아 교회를 비롯하여 2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구공산당 본부, 정치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영묘 등도 유명하며, 인구 120만(2001)이다.
(소피아 이름과 지혜의 여신상)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갔을 때 그리스어로 ‘하나님 지혜’라는 뜻을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그 소피아가 14세기 이후 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는지 자료를 찾아보았다.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는 서로마를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고 이곳도 지배하여 제국을 증대시켰고, 537년부터 이스탄불에 소피아 성당의 건축을 시작했다. 성당은 지진으로 3번 무너진 후 건습 법으로 시공하여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았는데 규모는 작지만 이름도 같은 소피아 성당을 이곳에도 건축했다. 이것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참고로 옮겨봤으며, 레닌광장에 있는 지혜의 여신상은 1989까지 레닌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지혜의 여신은 매력적인 아테네 여신을 말하는데 왼팔에는 아테네를 상징하는 부엉이가 있고, 오른팔에는 올리브나무로 만든 월계관을 들고 있으며, 황금 관을 쓰고 있다.
<지혜(소피아)의 여신 아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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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역사) BC6세기 트라키아제국을 건설하였고, BC342년 알렉산더에 패망했으며, BC15년 로마편입 되었고, 6, 7세기에 슬라브족 남하하여 665년에 고대 불가리아를 세웠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크룸 칸시대에 국력이 증강했으며, 보리스 1세(852~889) 때 대국으로 성장하였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시메온 1세(913~927) 때 국력이 막강하여 913년 비잔틴으로부터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가톨릭과 정교회의 내전과 급격한 영토 확장으로 민중이 피폐해졌다. 1018년 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비잔틴제국의 혼란을 틈타 타르노보를 수도로 하여 다시 일어났다. 이반아센 2세(1218~41) 때 국토는 제1차 때 만큼 확장되고 문화적 경제적 절정을 맞았으며, 1395년부터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79년 러시아가 투르크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투르크에서 벗어나 자치령인 불가리아 공국이 세워지고, 1908년 불가리아 왕국이 되었다. 1913년 7월 시작된 제2차 발칸전쟁의 패전으로 8월 10일에 열린 부쿠레슈티의 강화조약으로 국토의 일부분을 잃었으며, 불가리아 왕국은 발칸의 맹주를 포기했다. 1915년~18년까지 1차 대전 때 동맹국에 가담하여 패전하여 국토가 분할되었으며, 1941년 2차 대전 때 히틀러 강요로 동맹국에 참전하여 약34만이 전사하였다. 1944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중립국이 되었으며, 소련의 침공으로 9월 9일 조국전선정부를 수립하여 나치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연합국으로 전환하였다. 1947년 시메온 2세(2001~05년 공화국 총리)를 소련이 폐위시키고 공산국가인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으며, 1989년 35년간 통치한 토도르 지프코프 공산당서기장이 푸른 혁명으로 퇴진하여 민주화가 되었고, 07년 1월 1일 루마니아와 함께 유럽연합에 가입되었다. 지리적으로 국토중앙을 동서로 지나는 발칸산맥의 40%가 불가리아에 있어 동구의 알프스라 부르며, 600여 개의 온천중에 200여 개는 식수로 가능하다고 한다. ※동로마 바실리우스 2세(976~1025)는 불가리아 포로 1.5만 명을 돌려보내면서 14.850명은 두 눈을 실명시키고, 150명은 한쪽만 실명시켜 1명이 99명을 인솔하게 하였다. 포로를 마중 나온 불가리아 왕 사무엘은 충격을 받아 사망하였으며,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의 살이자'라는 별명 얻었다고 한다.
<붉은 벽돌의 성 게오르기 교회, 폐허의 동로마유적, 오른 쪽 건물은 대통령 궁>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가는 길) 불가리아 관광을 끝내고,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향하면서 TC는 운전하는 기사가 불가리아 사람이라 아침에 인사는 ‘드보르단’이라고 하며, 이것은 좋은 하루라는 뜻이라고 한다. 감사하다는 뜻은 ‘허벌나’라고 하여 모두들 웃었고, 이 지역의 집들은 한 번에 다 짓는 것이 아니고, 살면서 공사를 해서 완공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집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세르비아 국경을 넘고 조금가면 제법 큰 도시가 나오는데 이곳이 콘스탄티누스 1세가 태어난 니시(니슈)라고 하여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이라 놀랐다. ※니시(Nish): 발칸의 중요한 철도분기 도시로 남쪽은 그리스 아테네, 서쪽은 터키 이스탄불, 북쪽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갈 수 있으며, 인구 약 23만으로 철도시설 수리와 경공업 발달했다. 티토 이야기를 들었다. (티토 이야기) 티토 이야기는 기록하지 못해서 TC 이야기와 자료의 것을 함께 기록 한다. 티토는 슬로베니아의 국경과 가까운 크로아티아의 영토 쿰로베츠에서 1892년 태어났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인 크로아티아 사람이고, 어머니는 슬로베니아 사람으로 15명의 형제 중에 7번째로 13살 때 자물쇠 제조공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승 밑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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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부코비나 전선에서 러시아군에 생포되었다가 1920년 돌아와 공산당에 입당하여 1936년에는 정치국 조직부장이 되었고, 1940년 당 중앙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티토의 지휘아래 4만 여명의 공산당원들이 파르티잔 분대를 조직화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영국과 미국의 연합국은 티토에게 무기와 장비를 계속 확대하여 공급하였으며, 1943년 말까지 약 30만 병력으로 늘어난 파르티잔은 독일군 20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1953년 티토는 첫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종신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며, 그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자주와 비동맹주의를 선언하였다.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와 협력하여 25개국이 참여한 비동맹회의를 소집하여 비동맹 지도자로 부상하여 양진영(소련과 미국)부터 그의 환심을 사렸고 했다. 서로 무이자로 많은 돈을 빌려주어 돈은 넘쳐났으나 건설적인 곳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남았고, 1980년 그가 사망한 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쳐왔다. 이것은 나라가 분리되는 요인이 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남았던 몬테네그로도 부강했던 세르비아에게서 경제적으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어 2006년 독립했다. ※파르티잔(Partizan): 파르티잔 단어는 프랑스어 '동지', '당파'라는 뜻의 'parti'에서 유래하며, 정식군대가 아닌 모든 비정규군의 별칭이다.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게릴라(소규모 전투)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하여 빨치산이라고 하며, 보통 빨치산이라고 하면 6·25전쟁 전과 후에 지리산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공비를 일컫는다. 각 정파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을 '파르티잔 저널리즘'이라고 하며, 영화 '부베의 여인'에서 파르티잔 부베가 파시스트 경찰을 살해로 인해 생긴 남녀의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티토 이야기를 들으면서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사바 강을 건너갔고, 주위에 카페가 많아 운 좋으면 공짜 술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호텔에 도착하였다. [5일] 10년 7월 2일 금요일 일정: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관광 → 4.보스니아 사라예보 이동(290km, 5.5시간 국경통과 40분) → 호텔 [베오그라드(Beograd) 관광] 예쁜 수국이 있는 동네를 산책하는데 많은 개들을 만났으나 유독 사나운 개 한 마리가 마음 놓고 산책을 할 수 없게 하였는데 이 개는 북한 대사관 옆으로 보내고 싶다. 버스에 오르며 어제 배운 대로 기사한테 ‘드보르단’ 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는 내가 가이드인줄 알고 악수를 청하며, 가이드이냐고 물어 아니라고 했다. 오늘부터는 현지 가이드 없이 유능한 TC가 혼자서 다 하기에 오히려 기대가 된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내전 때 일로 인해서 전쟁을 좋아하고 잔인한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착하고, 정직하며, 인정이 많다고 한다. 종교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으며, 신앙생활은 자기 생일과 같은 성인을 모시며, 그 성인을 모시는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내부는 화려하다고 하며, 이스탄불에 상징적인 교황이 있다고 한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시내버스에 일본국기와 세르비아 국기가 나란히 그려진 것이 보였는데 일본은 좋은 이미지를 얻기 위해 발 빠르게 버스를 무료로 제공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나라 선교사 가족이 이 나라 사람들이 키가 커서 허리가 휘는 것에 착안하여 세라젬 의료 기구를 무료로 사용하게 하여 지금도 성업 중이라고 한다. 세라젬이나 미건 의료기구들의 판매 전략이 무료로 체험하게 한 것인데 이 나라에서도 통했나보다 올해 세라젬 의료 기구는 7천만 달러를 수출하여 ‘수출 탑’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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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으로 파괴된 건물들) 도시 중심으로 들어서니 먼저 눈에 띈 것은 1999년 68일간 나토 공습 때 파괴된 건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주로 국방에 관련된 건물이라고 한다. 차를 세울 수 없어 그냥 지나가면서 보았는데 어떤 건물이 국방부, 외무부, 방송국인지 기억이 없지만 옆 건물의 손상 없이 원하는 건물만 파괴시켰다고 한다. 현대 무기의 성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은 재정도 문제지만 그때를 기억하고 잊지 말자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그때 중국 대사관도 폭격을 받아 파괴되어 중국이 항의를 하였는데 나토는 오폭이라고 해명했지만 세르비아 공격을 반대한 것에 대한 보복성이 강하다고 한다.
(스카다리야 거리) 베오그라드 관광은 전부 걸어서 하며, 점심을 먹은 후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로 이동한다. 차에서 내리고 제일먼저 찾아간 곳은 19세기 세르비아 예술인의 활동무대였다는 스카다리야 거리였는데 생가보다 짧은 거리로 50m도 안 되는 것 같다. 3명의 예술가 찾아와 모자가 걸어두어 ‘모자 3개’라는 레스토랑을 보고, 보헤미안 화가이자 시인 ‘주네 압스타’의 집 앞에는 그가 파렛트를 들고 있는 동상도 있다. 거리의 끝에 왔는데도 사진 찍으라는 말이 없어 되돌아가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하여 모두들 급하게 사진을 찍었는데 다행이도 거리가 짧아 ‘주네 압스타’를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미하일로 왕의 거리와 공화국 광장) 다음으로 찾은 곳은 예술가의 거리에서 가까운 공화국 광장으로 1841년에 건축된 박물관 앞에는 크네즈 미하일로(Mihail)왕의 기마청동상이 있다. 옆 흰 건물은 우리나라 오페라 가수 ‘이현’씨가 출현도 했다고 하는 오페라하우스이며, 박물관 옆 칼레메그단 요새로 이어지는 대로는 도시의 가장 큰 번화가이다.
( ? 카페) 번화가 거리에 조금 들어가면 이름 입구와 외등에 특이하게도 상호가 ? 로 되어 있는 카페는 1824년 개업 하면서 알기 쉽도록 ‘사보르나 교회 옆 카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카페에 성스러운 이 교회 이름이 들어갔다고 못 쓰게 하여 이름을 다시 지을 때까지 ? 로 쓰기로 한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되어 유명한 카페가 되었다고 하며, 자료에는 교회와 이름이 같다고 못 쓰게 하여 고민 끝에 상호를 ? 로 했다라고 되어있다.
<큰사진: 미하일로 왕의거리, 작은 사진 1: 파괴된 건물, 2: ? 카페, 3: 스카다리야 거리>
(사보르나 교회) 세르비아 정교회의 교회로 1840년 ‘사바’라는 사람이 세웠다고 하는데 웅장하거나 거대한 건물은 아니지만 아담하며, 입구엔 성모마리아가 팔을 벌리고 있는 그림이 있다. 내부 정면엔 액자로 된 여러 개의 성화가 걸려있다는 것은 알았기에 확인을 했으나 나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교회를 들어 갈 때마다 기록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나머지는 자료 것을 옮겨보면 내부는 성화로 가득하며, 천장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4부분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은 입장이 되지 않았으며, 앞 건물에는 실권을 가진 세르비아 정교회의 대주교가 계시는데 나이가 많아 걸을 때 부축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칼레메그단 요새와 역사박물관 그리고 공원] 번화가 끝에 있는 공원을 통과하면 거대한 칼레메그단 요새가 멀리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보람을 찾게 해 주려는 듯 어서 오라고 한다. 이 요새는 시민들의 휴식처인 아름다운 공원,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야외에는 전쟁이 많았던 나라이어서 그런지 무기박물관도 있어 볼거리가 많은 종합 전시장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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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칼레는 터키어로 ‘요새’이며, 메그단은 ‘전장(戰場) 뜻한다고 하며, 쉽게 말하면 보틀 필드(Bottle Field, 전쟁의 들판)이라고 한다.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의 합류 지점의 구릉에 BC 3세기 경 켈트인이 세운 요새 위에 로마제국과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는 535경에 요새를 다시 건축 했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스탄불과 불가리아의 소피아에 소피아 성당을 건축한 황제이다. 그 뒤로도 요새는 다시 증개축 되면서 중세 이후에 요새 안에 있던 마을이 발전하면서 이를 토대로 하여 도시 형태로 발전한 것이 베오그라드이라고 한다. 성 입구엔 예전에 해자로 보이는 장소에 농구장이 이었고, 간판에는 ‘K. K. Partizan’ 쓰인 것은 유명한 세르비아 농구단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 농구단 출신들이 전 세계로 나아가 미국이나 한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하며, 해자로 보이는 성벽과 성벽 사이에는 대포와 탱크로 가득하다.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오른쪽엔 도나우 강과 왼쪽엔 사바 강이 합류되는 것을 보며, 사바 강 쪽에 있다는 승리의 기념탑인 빅토르 동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동상은 한손에 전쟁을 의미하는 칼을 들고 있으며, 한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들고 있다고 하며, 본래 이동상은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고 한다. 동상의 벌거벗은 남자로 심벌이 너무 적나라하여 보수층의 반대로 이곳에 옮겨져 사람이 없는 강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에 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에 승리 탑을 보려고 혼자 달려가면서 오늘부터 맨 뒤에는 TC가 없기에 맨 뒤에 있는 팀원을 따라 갈 수 있는 곳까지만 가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아무래도 참고로 여기서 유진장군의 이야기를 하고 가야할 것 같아 옮겨본다.
<칼레메그단 요새에 전시된 무기들>
※유진(외젠, 오이겐, 1663~1736) 나폴레옹이 7대 전략가 중에 유일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극찬한 작전의 천재로 24번 승리에 12번 부상당했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전쟁(1683-88, 1697, 1715-18), 대 동맹 전쟁(1689~97),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1701~14) 등을 치렀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전투는 1718년 베오그라드이다. 베오그라드 전쟁 때 4배나 많은 투르크 군이 있었고, 아군은 10명중에 1명씩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어 퇴군 할 것을 간청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투르크를 전멸시키고 베오그라드를 장악하여 헝가리와 세르비아를 구하였는데 후에 빈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을 선물로 받았다. 빈에 가서 벨베데레 궁전을 보았고, 그의 동상은 헝가리 부다 궁에서 기마동상을 보았다. (역사박물관) 역사박물관 가는 길에는 대형 대포들이 있었고 박물관 앞에는 작은 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아 더위를 피하여 그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역사적인 곳에서는 설명을 들었으며, 열심히 기록을 했지만 어떤 역사를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3가지는 기억에 남은 것이 있다. 하나는 루마니아의 역사인 드라큘라 백작인 블라드 쩨뻬쉬가 꼬챙이로 처형하는 방식을 다룬 그림으로 검은 바탕에 흰 색을 사용했으며, 꼬챙이 수평으로 놓고 양발을 묶어 사람이 당겨서 죽이는 방법과 꼬챙이를 세워놓고 그 위에 올려놓아 꼬챙이가 항문을 통과해서 목과 등 사이로 꼬챙이가 나와 죽는 방법이고, 팔 다리를 등 뒤로 묶어 옷걸이 같이 생긴 갈고리에 걸어 죽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현재는 보스아의 역사지만 전에는 세르비아의 역사이라 이곳에 있는 라틴다리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하는 사진이다. 나머지는 나토군이 세르비아를 폭격하면서 다리도 했지만 전력을 차단하기 위해 고압 송전선로 위에 뿌렸다는 나일론 실 같은 도체로 이것이 쇼트를 일으켜 차단기가 동작하도록 했다. 자료에 있는 것처럼 많은 불량은 아니지만 로마시대, 터키, 오스트리아, 나토공격 등의 역사적인 사건이 지도, 그림, 사진,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큰 사진: 역사 박물관, 작은 사진: 송전선로에 뿌린 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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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공원입구에 다시모여 점심식사 전까지 각자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 카페’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대부분은 쇼핑가로 가고 몇 명만 공원에 남았다. 혼자 공원 안을 돌아보았는데 여기도 소피아의 벼룩시장 같이 진기한 물건을 파는 장사들이 많았으며, 공원을 찾아온 시민들을 상대로 파는 먹을거리 장사도 많았다.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가 협력해 준 것에 감사해서 만들었다는 프랑스식 정원에는 무엇을 표현했는지도 모를 ‘프랑스 애모 탑’도 보인다. 왼편으로 향하자 낮은 성벽 아래로 사바 강에 보이고, 강에는 많은 선상가옥은 영업을 하는 같이 보였으며, 길에는 그림들을 전시해 놓았다. 돌아오는 숲속에 작고 오래된 건물이 보였는데 돌아와서 알게 되었는데 투르크의 정복자 다마트 알리 파샤의 무덤으로 이 도시에서 중요한 기념물이라 한다. 가장 부러운 것은 이 무더운 더위를 잊을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는데, 공원의 역사는 나무 크기를 보면 알 수 잇을 것 같다. 입구로 다시 오니 아무도 없어 모이기로 한 장소로 향했는데 차도 못 다니는 넓은 대로 옆에는 비싸 보이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진기한 것은 길 가운데 있는 카페이다. 이 카페는 손님들이 시원하도록 하는 장치인데 찬 물을 수증기 같이 뿜어낸 것을 대형 선풍기로 손님에게 불어주면 이 물을 맞게 되면 상당히 시원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에어컨을 사용할 수 없는 야외에서는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라는 생각들이 들었으며, 아침에 시간이 부족하여 제대로 찍지 못한 미하일 왕의 동상을 다시 찾았다. 자료에는 이스탄불의 소피아성당을 모델로 하여 1935년부터 현재도 건축 중이고, 1.2만 명 수용하며, 12m에 4톤 나아가는 십자가와 시바동상이 있다는 사바교회는 보지 못했다. (베오그라드 역사) 벨리그라드(Beligrad)는 하얀 성 또는 도시라는 뜻으로 878년 등장 후 세르비아 왕국 수도가 된 이 도시는 기원전 3세기부터 켈트족이 세웠으며, 로마는 ‘싱기두눔’으로 불렀다. 동로마 제국 때 훈족, 사르마티아인, 아바르족들이 침략했으며, 630년 세르비아인이 이주했으며, 1718년 투르크와 베오그라드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유진장군이 승리했다. 1918~2002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수도, 2005년까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의 수도였고, 인구는 120만 명(2002년)으로, 교외 인구를 합치면 171 만명이다. 세르비아 역사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역사로 묶어 기록한다.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 역사] '남쪽 슬라브족의 땅'의 뜻인 유고슬라비아는 1929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명칭으로 면적은 약 25.9㎢으로 우리나라 남북한의 크기보다 조금 더 크며, BC 6세기 그리스인들이 달마치야 식민지화하했다, BC 3세기 로마세력권 아래 들어갔으며, 9세기 동로마 점령했고, 3세기 초 고트족, 훈족, 아바르족의 침입으로 로마통치력의 약화되었으며, 5-6세기 초 슬라브족이 정착하였다. 7세기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달마치야에 정착하였고, 8~9세기 초 샤를마뉴 대제가 크로아티아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으며, 12세기 세르비아는 비잔틴제국에서 독립하였다. 중세기 가장 훌륭한 통치자 스테판 두샨의 통치기간(1331~55) 중 독립성이 형성하였다. 1102년 헝가리왕국과 크로아티아왕국이 합병하였고, 1463년 몬테네그로 산악지대를 제외한 전역이 오스만제국이 지배했으며, 1830년 오스만제국의 통치하에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러시아와 투르크 전쟁(1877∼78)에서 러시아편에서 싸웠던 세르비아는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독립을 승인했으며, 1882년 왕국을 선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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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합스부르크왕가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여 세르비아와 악화되었고, 세르비아는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그리스와 발칸동맹 결성했다. 1912년 발칸동맹은 제1차 발칸전쟁에서 투르크에 승리하여 투르크는 전 유럽영토의 지배권을 잃었으나 제2차 발칸전쟁의 틈타 트라키아지역을 회복했다. 1913년 제2차 발칸전쟁은 마케도니아 정복지를 두고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가 불가리아에게 승리하여 그해에 부쿠레슈티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세르비아 영토는 2배로 커졌으며, 범 슬라브족의 통일을 바라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저항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1914년 6월 28일 합스부르크왕가 후계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피살되었으며, 왕가는 세르비아의 공모를 확신하고 포격하여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14년 7월 29일 시작된 전쟁에서 승리한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슬라브 민족이 결집하여 슬로베니아 왕국을 수립하였다. 1929년 영토를 확장한 국왕 알렉산다르 1세는 국명을 유고슬라비아왕국으로 선포했다. 1946년 2차 대전 후 공산주의자 티토는 6개 공화국을 연합한 유고연방을 소련이 두려워했으며, 티토는 소련에 도전하면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자주와 비동맹주의를 선언했다. 그가 죽은 1980년부터 경제가 악화되었으며, 1989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대통령으로 당선 된 밀로세비치는 최고 권력자에 되었다. 1989년부터 동유럽에 몰아친 공산정권들의 붕괴는 유고연방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1991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가 1992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가 독립했다. 유고연방의 붕괴과정에서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대 세르비아민족주의’를 제창하였다. 그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에게 민족주의를 촉발시키고, 타민족 학살을 주도하는 내전을 시작했으며, 1992년 4월 27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수립했다. 독립으로 인해 내전 중인 나라와 1995년 12월 평화협정 조인으로 내전이 끝났다. 1997년 밀로세비치는 대통령이 되었고, 2003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을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개칭했으며, 코소보 자치주는 90% 주민이 알바니아계로 회교를 믿는 지역이지만 세르비아계가 만든 많은 유적지와 교회들은 성지에 해당하는 만큼 절대로 넘길 수 없는 곳이었다. 밀로세비치는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알바니아어의 사용을 금하자 알바니아인들의 1998년 지하무장단체인 코소보해방군(UCK)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세르비아는 인종청소로 주민들을 대규모로 학살하여 코소보 사태를 만들었다. 1999년 3월 나토는 밀로세비치를 응징하기 위하여 68일(11주)간 공습하였고, 2000년 민중 봉기로 실각하여 전범재판을 받는 중 2006년 3월 11일 옥사하였다. 2006년 6월 3일 몬테네그로가 마지막으로 독립하여 유고는 다시 6개의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2008년 2월 코소보(인구 230만, 면적 10,887㎢)는 국제적인 합의 없이 세르비아로부터의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했으나 아직은 미승인 국가로 우리나라 외 60개국의 승인을 받았다. 6개 공화국 분해된 나라들 중에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만 다시 기록한다. [세르비아(면적 88,391㎢, 인구 735만 명) 수도: 베오그라드] 1992년 4월 27일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면적 102,173㎢, 인구 약 1.100만 명)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이 유고슬라비아 명칭으로는 3번째이다. 2006년 ‘몬테네그로'가 독립하여 세르비아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국토와 인구가 줄었는데 코소보'마저 독립하면 더 줄게 된다. [마케도니아(면적 25,713㎢, 인구 약 200만 명) 수도: 스코플례] 1991년 11월 7일 독립, 인종은 마케도니아인이 인구의 2/3 이상을 차지하며 남 슬라브어를 사용하며, 소수민족으로 알바니아인, 터키인, 세르비아인이 모여 사는 지역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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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의 복잡성] 1) 2개의 언어: 라틴, 키릴 몬테네그로 2) 3개의 종교: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회교 3) 3개의 문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4) 3개의 민족: 슬라브, 게르만, 아시아(투르크-회교), 인종의 복잡성은 1차 세계대전으로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전쟁의 낳게 하였다. 5) 9개 공화국: 1. 슬로베니아 2. 크로아티아 3. 보스니아 4. 헤르체고비나 5. 스르프스카 6. 마케도니아 7. 세르비아 8. 몬테네그로 9. 코소보 6) 4번의 인종 청소 1. 제2차 대전 중 유고가 동맹국들이 점령하고 분할하자 1941년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가 독립 국가를 선포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승인을 받았다. 이 신생국은 파시스트 조직인 안테 파벨리치는 독일의 도움을 받아 극도로 잔인한 독재정치를 펼치고 '인종정화'를 내세워 수십만의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 반파시스트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하였다. 2. 1992∼5년 내전 때 세르비아가 먼저 보스니아에서 보스니아인종 청소 3. 1992∼5년 내전 때 세르비아에 대한 보복으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종 청소 4. 1998년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알바니아계인종 청소 (사라예보로 가는 길) 짧은 만남에 아마도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베오그라드를 점심을 먹은 후 이미 일정에 예보 된 대로 사라예보로 향하면서 오전에 보았던 파괴된 건물을 다시 보았다. 사라예보로 가는 길은 좁고 몹시 험한데 국경을 넘어 스르프스카 공화국 지역으로 들어가면 무엇을 먹고 살까? 할 정도로 산악지대가 많아 터널도 있고, 댐도 보인다. (드리나 강의 다리) 드리나 강이 보이면서 발칸반도의 대문호 이보 안드리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의 고향 비셰그라드에 있는 ‘드리나 강의 다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다양한 민족들이 살면서 인종 간, 종교 간의 충돌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슬픈 역사를 겪은 다리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특이한데 그는 이 소설로 196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드리나 강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이루는 강으로 베오그라드에서 도나우 강과 합류하는 사바 강의 가장 큰 지류로 발칸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이라고 한다. 이 소설처럼 슬픈 역사는 과거나 현재까지도 계속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설의 다리는 아니지만 드리나 강의 다리를 건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라는 이상한 나라로 들어섰다. 3개의 공화국이 상존하는 이 이상한 나라에 대하여서는 아래 역사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처음 보스니아의 관광이 시작할 때에는 우리나라와 외교관계가 정상화되기 전이라서 이 나라의 힘이 있는 정치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는 지금처럼 호텔이나 식당도 제대로 된 곳도 없었지만 그 정치가는 자기이익에 관련된 곳에만 식당이나 숙소를 정해주었다고 한다. 그 정해준 호텔이 산 속에 있어 교통도 불편하지만 겨울에도 난방이 잘 되지 않아 관광객들이 불편이 많아서 TC가 정치가에게 여행을 포기할 것처럼 전화해서 해결되었다고 한다.
<드리나 강의 풍경>
(사라에보) 사라예보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저런 산 위에 도시가 있다는 신기할 정도였는데 트레베비치 산기슭과 밀랴츠카 강의 좁은 골짜기에 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보스니아 내전 때 세르비아가 포위하기 좋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으며, 지형으로 인해 도시가 협소하여 주차난이 심하다고 한다. 오전에 ‘사보나 교회 옆 카페’를 본 것처럼 교회 옆에 카페가 있는 거리를 지나면서 이곳에 대한 종교이야기를 들었으며, 구 시가지로 들어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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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이슬람 교인들은 여기에 살기위해 투르크 때문에 개종했기에 신앙을 잘 안 지키며, 세르비아 정교인은 각자의 성인 이콘을 부적같이 지니며, 믿는다고 한다. 보스니아는 44% 정도가 이슬람교도이고, 헤르체고비나는 17%가 가톨릭을 믿는다고 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 한 후 1992년 4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3년 7개월간 세르비아가 침략하여 국토의 49%를 장악한 곳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중에 사라예보가 가장 혹심했다고 하며, 그 때 부서진 시청사와 구시가지의 건물들을 보며, 우리가 묵을 호텔은 신시가지를 지나 외곽에 있다고 한다. 호텔로 가는 길에는 로마가 휴양지로 만들 정도로 유황온천이 있는 곳이라 지금도 유황냄새가 난다고 하며, 호텔 주위는 큰 술집이 있어 해가지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이 호텔은 결혼식도 많이 하는 곳이라 이곳 결혼식은 밤새도록 노래하는 풍습 때문에 주말이면 밤새도록 시끄럽다고 했는데 주말이지만 금요일이라 체험하지 않기를 바랐다. 호텔로 들어가는 어두워진 골목에는 TC 말처럼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으며, 호텔이 생각보다 번잡했는데 무슨 호텔이 방음도 안 했는지 결혼식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6일] 7월 3일 토요일 일정: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관광 → 모스타르 이동(136km, 2.5시간) 관광 → 5.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닉 이동(142km, 3시간 국경 20분) → 호텔 (호텔에서) 호텔은 산책할 공간이 없어 호텔 앞에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한다는 큰 수영장이 있어 그곳에서 산책을 하려고 입구를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물류창고 주위와 어제 젊은이들이 찾아든 술집 주위를 산책하다가 식사 때마다 함께하여 항상 고맙게 생각하던 부부님이 보여 안 가본 곳으로 갔다. 다리를 건너가자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이 있어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신나게 다니면서 아름다운 정원과 주위로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이름을 가진 호텔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 주위에 있는 도랑에서 많은 김(수증기)들이 보였는데 TC 말처럼 일행들이 온천이 물 같다 고 하니 갑자기 백과사전을 본 것 때문에 복잡해진다. 그럼 이 냇가는 보스나 강의 상류이란 말인가? 그러하다면 이 근처가 로마인들의 휴양지 ‘일리드자’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궁금증은 있지만 알 수는 없었다.
[사라예보(Sarajevo) 관광]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인구 30만) 우리는 ‘산 속의 정원도시’라는 구 시가지를 찾아가 사라예보의 어원이 된 ‘사라이 오바이’는 ‘궁중의 정원’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밀랴츠카 강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이 강은 보스니아 내전 때 세르비아의 포위하고 저격병들 죽인 시체를 버린 장소로 낮에는 저격병들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먹을 물을 구하지 못한 산동네의 사람들은 밤에 이 강에 내려와 오염된 물을 먹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외로움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강 건너 이름도 재미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빨간 차양이 있는 이 집은 체코 건축가가 도시를 아랍 식으로 건설할 때 이사 안 가고 버틴 집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주위의 균형을 파괴한 집이라고 비난받았다고 하며, 이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세계사를 배울 때 몹시 궁금했던 곳으로 당시에는 이곳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역사적인 장소 라틴다리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자료와 조금은 차이가 있다.
<밀랴츠카 강가의 빨간 차양의 집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다리) 1914년 6월 28일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암살음모가 있다는 첩보를 알았지만 자신의 방문으로 이 지역의 유대가 강화될 것을 희망하고 열차로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제국군대의 감찰장관 자격으로 방문한 대공은 장군복장을 하였으며, 6대의 차량 중에 무개차를 타고 수행원과 함께 이 지방의 지사인 오스카르 포티오렉 장군의 영접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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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좁은 도로에 들어섰을 때 보스니아의 독립을 바라는 ‘남슬라브 운동가’들이 암살계획을 세우고 6명의 청년이 가담하였으며, 그 중에 한명이 행진하는 대공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투척한 폭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는 폭탄이 대공의 자동차에 맞고 튀어 올라 뒤따르던 자동차 밑에서 폭발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에 가깝다. 또 하나는 혈기왕성한 태자가 그 폭탄을 주워 던졌다는 이야기는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여튼 이 폭탄에 다친 사람은 수행원들이었으며, 이들을 방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다가 길을 잃고, 라틴다리 부근에 도착했을 때 포티오렉 장군이 길이 잘 못 들었다고 소리쳤다. 급히 차를 돌리려고 멈추었을 때 기회를 잡은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대공부부에 접근하여 총격을 가하였고, 그들의 죽음은 유럽 재앙의 시발점이 되었다. 가브릴로는 만 20세에서 한 달이 부족하여 그가 받을 수 있는 최대형량인 20년을 선고받았으며, 그는 이미 결핵에 감염되었던 그는 감옥의 고통과 잘 먹지 못해 1918년 결핵으로 죽었다. 이 다리를 한 때는 ‘가브릴로 다리’로 바꾸었으나 세계의 항의로 다시 라틴다리가 되었다. 이 다리 옆에 있는 그 때를 잊지 않으려고 건물 벽에 있는 진열장에는 당시 사진의 있고, 내용은 진열장 아래에 있는 대리석 적혀 있다. 1882년 조선과 수호조약을 맺었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신분이 낮은 조피(소피)와 결혼한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대공이 피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그들의 죽음을 신의 천벌로까지 생각했으나 외무장관의 설득을 결과를 생각지도 않고 1914년 7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1차 대전이 일어났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전성기 유럽의 영토는 1/9일로 줄어들어 소국으로 전락되었으며, 발칸은 화약고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큰 사진: <1차 세계대전의 발단이 되었던 사라예보 사건의 현장 '라틴다리'>
작은 사진(왼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가브릴로
작은 사진(오른 편): 사건현장에 있는 당시의 사진들로 왼편 유리 상자에는 대공에 대한 것이고, 중앙에는
요제프 황제에 대한 것이며, 사진에는 없지만 우편에는 가브릴로에 대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가지후스레프 베그(베고바드자미야) 모스크] 다음으로 찾아 간곳은 사라예보를 건설한 오스만의 술탄(1521-41)의 시신이 안치된 ‘가지후스레프 베그 모스크’라는 회교사원으로 지배자답게 규모가 크다. 모스크는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라는 뜻이라고 하며, 회교국가의 국기에 많은 있는 초생 달은 마호메트가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 새벽 초승달이 있을 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원은 ‘가지후스레프 베그’ 술탄의 이름으로 1530년에 건축한 했다고 하며, 모스크 마당 한편에 있는 건물은 그의 시신을 안치한 석관이 있다. 건물을 돌아본 후 밖으로 나가면 ‘바슈카르지아’ 거리로 옛날에 상인들이 드나들었다는 여관의 건물은 관광 상품을 파는 상가이고, 마당은 음료를 마시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변소위치와 만날 장소를 정하고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하고 헤어졌다. ※모스크는 영어로 메스키다는 스페인어이고 아랍어는 마스지드인데 회교의 예배건물 또는 빈터를 말하기도 하는데 집단예배를 보는 대사원은 하나뿐으로 그곳에서 군사, 정치, 사회, 교육 등 많은 공공행사가 거행되는 회교의 예배당 건물이다. 모스크는 일반적으로 지붕은 있지만 옆이 탁 터졌으며 뾰족탑인 미나레트(minaret)가 있고, 건물 벽 내면에 코란이 있는 반원형으로 움푹 들어간 미라브는 예배인도자인 이맘의 자리이로 메카를 향하여 있으며, 오른쪽 계단 꼭대기에는 설교자가 교탁으로 이용하는 민바르가 있다. 또 초승(초생)달은 초저녁에 뜨므로 그믐달이 맞을 것 같으며, 만국적십자 조약(제네바 협정)에 따라 이슬람교 국가들은 적십자 대신 적신월(赤新月)을 사용한다. 어디서 읽은 내용으로 이슬람 국가들이 초승달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군대는 낮에는 뜨거운 사막에서 움직일 수가 없고, 대보름에는 발각될 염려가 많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가장 움직이기가 좋은 시간이 초승달이 뜨는 시기였다고 하며, 그들의 역사는 초승달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큰 사진: 가지후스레프 베그 모스크, 작은 사진: 바슈카르지아 옛날 상인이 드나들던 여관자리 현재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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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슈카르지아, Bascarsija) 사라예보는 사실상 15세기말 투르크가 점령하면서 교역 중심지와 이슬람문화의 거점으로 발달했기에 그들이 만든 거리에 지금도 터키식 제품을 만드는 작은 공방이 많다. 반들반들한 돌들이 박힌 거리를 따라가면 공방들이 직접 만든 가죽제품, 도자기, 금은세공, 직물 등은 스승이 제자에게 가업을 물려준다고 한다. 관광객을 상대로 수두록 빽빽하게 전시되어 그 많은 상품을 관광객이 다 소비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여 누가 소비해주는지 궁금하다. 작은 가계들이 모여 있는 상가도 구경한 후 도로하나를 건너면 투르크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거리가 나오는데 터키거리의 건물이 단층이 많지만 이 거리는 층수가 많은 건물이 많다. 오스트리아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 거리는 두브로브니크의 상인들이 거주했던 라틴구역은 유럽식의 거대한 건물들은 주상복합식이라고 한다. (성심 성당) 이곳에는 여러 개의 성당이 있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두개의 탑이 있는 가톨릭의 예수님 '성심 성당'으로 1889년에 지어 졌으며, 예수님 상 위에 장미 조각이 있고, 유대교식의 강론대가 인상적이다. 이 성당 앞 광장에서 현대차를 전시하던 현지인들이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으며, 손을 잡고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아마도 화보에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로 유명한 마지막왕조 로마노프왕조가 기증한 성모상이 있는 교회로 예배를 전통식으로 서서드린다.
<예수님 '성심 성당'과 전시 중인 현대차>
(보스니아 귀족의 전통가옥) 우리는 다시모여 지은 지 250년 되었다는 전통가옥을 찾았는데 귀족의 가옥이라 규모가 매우 큰 편으로 이 집도 동물이 살던 1층은 당시는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람 살던 2층은 문 아래의 벽 전체를 의자 형식으로 꾸민 아랍식의 구조로 되어 있었고, 불가리아 전통가옥처럼 변기 구멍이 △ 모양으로 뚫려 있다. 그 아래는 이동식 U 모양의 변기통이 다 차면 교체했던 것 같았으며, 집은 계단부터 모두가 목재로 되어 있었는데 250년 동안 견딘 것이 대단하다. (전통시장) 어제 예보했던 대로 여러 명의 상인들이 세르비아 저격병에게 살해당한 전통시장을 찾아가 사랑스러운 손녀들을 생각하며, 망고와 무화과 말린 것을 샀는데 매우 좋아했다. 차를 타기 위해 오는 길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중세부터 살다가 15세기 후반 집단 추방된 세파르디 (스페인 뜻) 유대인들을 받아 드리고 세금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 독립으로 돌아가 지금은 100명도 안 되며, 그들이 신앙생활을 했던 다윗별이 그려진 유대회당도 보았고, 세르비아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거대한 4층 건물이 방치되어 있다. 우리가 가본 곳의 범위가 좁아 세르비아 포위 때 그들이 살기 위해 뚫었던 터널이며, 처절했던 장소들을 체험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저주 붙은 황태자의 자동차)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로 가는 중에 옛날에 읽었던 황태자의 저주 붙은 자동차가 생각나 이야기를 꺼내더니 TC가 다시 들려준다. 대공의 주문으로 1914년 프랑스 파애튼 자동차 공장에서 생산된 빨간 색의 오픈카로 색깔이 황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대했으나 대공은 사라예보에서 타기로 하고 가져왔다. 대공이 죽은 후 차는 시장이 몰고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한 팔을 잃어 운전사를 고용했는데 시골 길에서 전복되어 시장과 운전기사는 목이 부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차의 저주는 없다고 장담하던 시장의 친구인 의사가 몰고 다녔는데 그도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었으며, 차는 의사 친구인 사업가에게 양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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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는 차를 몰고 오르막을 오르다 시동이 꺼졌고, 이 때 마차를 발견하여 차의 견인을 부탁했으나 말이 몹시 싫어해서 억지로 견인하던 차가 갑자기 시동이 걸렸다. 차는 앞으로 돌진하여 말과 마부를 치어죽게 하였고, 사업가는 충격으로 머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사망했다고 하며, 차는 파란색으로 칠해져 경매에 들어갔다. 경매로 한 시민에게 팔렸고, 서민은 황태자가 탔던 차라며 친구에게 자랑했으며, 5명의 친구를 태우고 질주하던 중 돌 벽에 충돌하는 사고로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이 차를 사들어 박물관에 전시했는데 1944년 차를 소중하게 관리하던 칼 브르너라는 안내원이 차를 닦고 있을 때 연합군이 폭탄을 투하했다. 박물관 천장을 뚫고 들어온 폭탄은 브르너와 차를 산산조각 내어 차의 저주도 멈추게 되었는데 과연 대공은 차의 저주로 죽었을까? 아니면 대공의 죽음이 차의 저주를 불렀을까? 세간에 화재가 되었지만 1차 대전 때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원혼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황태자 가족과 저주 붙은 자동차>
(사라예보 이야기) 트레베비치 산기슭을 흐르는 밀랴츠카 강의 좁은 골짜기에 있고, 발칸반도 최대의 회교 도시로 많은 모스크, 회교 풍으로 장식된 목조주택들, 옛 투르크의 장터, 시민 1/2이 회교도이다. 주요 모스크인 가지 후스레프 베이(1530)의 사원과 알리파샤 사원(1560~61) 등이 있다. 1922년 보스니아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와 내전으로 37개월간(1992.4~95.10) 포위당하고, 폭격과 함께 단수, 단전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760m(45분 거리)의 생명의 터널을 뚫어 살아남았으며, 인구는 약 43만 명이라고 한다. 1996년 내전으로 많이 파괴된 것을 사우디 등 주변의 회교국가 복구해 주었다. 1973년 4월 9일 유고시절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이에리사, 정현숙의 한국여자대표팀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구기로 세계를 제폐한 곳이다. (모스타르로 가는 길) 디나르 알프스 산맥을 따라 모스타르로 가는 길에 보이는 산악이 많았으며, 자연이 산동네도 많이 보였는데 경작지가 적어 식량의 자급자족이 어렵다고 한다. 티토의 활동 무대였다는 네레트바 강 따라 가는 길은 아름다운 산세와 더불어 매우 예쁜 경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 강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댐이 있다고 한다. 다리를 통과 하고, 잠시 내려서 아름다운 주위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차에 올라 모스타르 다리의 폭격한 이유를 들으며, 그에 대한 에피소드도 들었다. 크로아티아가 보스니아가 세르비아와 내전 중인 틈을 노려 1993년 모스타르 다리를 폭격한 이유는 2가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메주고레에 대한 이야기만 들었다.
<모스타르로 가는 길의 산악지대와 네레트바 강>
[메주고레(메주고리, 메주고리예) 이야기] 이곳에서 멀지 않는 ‘메주고레’라는 지역이 잇는데 이곳은 1966년 성모 마리아가 아이들에게 발현했다고 하여 가톨릭 교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포르투갈의 파티마처럼 교황청의 공인을 받지는 못했지만 성지를 찾는 많은 신자들의 관광 수입도 있고, 가톨릭 교인이 많은 크로아티아로는 꼭 갖고 싶은 성지이기 때문이란다. TC가 한 여행팀을 인솔할 때 성격으로 인해 따돌림 받던 수녀자매는 메주고레에 꼭 가야한가고 하면서 그 비용은 자기들이 부담한다고 해서 데려다 준 적이 있다고 한다. 후에 그들을 만났을 때 자매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하며,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더라고 하면서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변하는 것을 보고 신기했다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그곳에 이르면 해준다고 하였고, 크로아티아는 이 폭격으로 인해 전쟁을 일으킨 전범자로 지금까지도 유로에 가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은 헤르체고비나 지역으로 국기도 크로아티아 것을 걸기에 보스니아 국기는 볼 수도 없다고 하며, 자료에는 이곳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보스니아는 표기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나쁜 감정은 스포츠를 할 때에도 자주 나타나 충돌하기에 크로아티아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경찰이 외출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고 한다. TC는 모스타르가 발칸여행에서 가장 덥다고 했지만 산악지대라서 믿지 않았으나 실제로 와보니 몹시 더워서 걷기조차도 힘들었는데 다리의 사진이 있는 곳에서 설명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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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타르( Mostar) 관광)] 모스타르의 어원은 크로아티아어로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로 오래된 다리(Old Bridge)이라는 의미라고 한다는데 우리말로는 ‘구닥다리’이다. 네레트바 강을 건너기 전의 이슬람지역과 강 건너 가톨릭지역을 잇는 다리라고 하며, 1566 회교 풍으로 건설한 다리는 강폭이 제일 좁고, 지반이 견고한 바위 위에 건설했다. 평상시 높이는 강물 위에서 30m 정도라고 하며, 다리 위가 경사졌기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이 닫는 폭만큼 돌출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1993년 파괴된 다리를 복원하기 위해 세계의 모든 나라가 참여했는데 그 중에 다리를 파괴한 크로아티아도 참여했고, 1.700만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먼저 잠수부들이 물속에 있는 조각들을 건저 내 조립하여 2004년 재건되었다고 하며, 자료에는 기공식 때 찰스 황태자 참관했다고 한다. 설명을 들은 후 반들거리는 조약돌 거리를 따라 다리입구에 들어서면 왼편 벽 아래 작은 돌 위에 "Don't forget 1993!"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으며, 위에는 사진을 찍지 마라는 표시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심보가 괘씸했으나 아마도 이렇게 작게 만들고 이슬람 측에 있는 것을 보면 이슬람 측에서 세운 것 같다. 크기가 작고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다리를 파괴한 크로아티아를 조국처럼 여기는 헤르체고비나의 반대 때문이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TV에서 방영한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모스타르 다리도 함께 방영된 것을 본적이 있는데 눈이 쌓인 계절인데도 다리의 난간 위에서 뛰어내리는 청년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청년이 관광객을 위해 그런 줄 알았는데 오늘 와서 보니 팁을 위해 뛰어 내리는 것을 알고는 실망과 함께 생계를 위해 험한 일을 하는 것이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TV에서 본 화가 바칸을 만나면 그림이라도 하나 살려고 했지만 만난 수가 없었으며, 다리를 건너 사진이 잘 나온다는 곳까지만 갔다 온 것이 모스타르 관광의 전부이다. 모스타르의 인구 8만으로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역할은 하는 곳으로 네레트바 강 연안에 위치하며, 중세 투르크식 건축물이 많고, 로마시대의 성이 있다고 한다. 400년간 터키시대의 회교사원 등이 유명하며, 1878년~1918년 오스트리아 지배 때 세르비아 애국운동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모스타르는 중요한 유적지로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이 지역도 내전 때 상처로 부서진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된 것이 보였다.
<모스타르 다리(구닥다리)>
(독립 후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의 현재역사) 면적: 51,129㎢, 인구: 3,858,000, 수도: 사라예보(인구 약 30만) 1992년 3월 실시한 다민족 공화국 수립하는 국민투표에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 계는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독립을 반대하여 혹독한 내전을 치루고 독립했다. 내전으로 황폐화되었고, 이 기간에 각 민족들이 자신들이 차지한 지역에서 타 인종을 일소하는 '인종청소'가 자행되어 현재도 그 감정이 남아 있다. 1995년 12월 평화협정 조인으로 내전이 끝나고 협정에 따라 세르비아 정교회 교인이 많은 세르비아계인 스르프스카(Srpska) 공화국은 동쪽의 북쪽 대부분을 차지했다. 17% 가톨릭 교인이 있은 크로아티아계인 헤르체고비나공화국은 서부의 남부를, 이슬람 신자가 44%인 보스니아 공화국은 중부와 북서부를 차지하였다. 국경 없는 3개의 각공화국은 1명의 대통령을 선출하여 8개월마다 돌아가며 하고 있지만 분리 독립의 욕구가 커서 언제까지 한 나라로 있을지 의문이 된다. 이 나라는 오랜 오스만 제국의 지배 동안에 회교로 개종한 슬라브인으로 인구의 6/15 가량, 5/15 가량의 세르비아인, 3/15 가량의 크로아티아인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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