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인도
[6일] 2009년 5월 2일 토요일 델리 관광 [무굴제국(1526-1858)의 황제들] [5장- [7]-2. 무굴제국 참조] 델리와 자이푸르 그리고 아그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이곳에 해당하는 황제들을 간단하게 기록한다. 티무르후손 중5대손 바베르가 제국을 세우고, 악바르부터 아우랑제브까지 15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3대 악바르(1542-1605): 앜바르 또는 아크바르로 표기하기도 하는 그는 무굴을 대제국으로 만든 사람으로 아그라를 수도하여 아그라 성을 만들었으며, 자이푸르(라자스탄 지방)의 소국들과 동맹을 맺었다. 4대 아들 자한기르(1605-27) 세계의 정복자 뜻을 가진 그는 특별이 기록할 것이 없으나 그가 소유한 보석이 세계최고라고 하는데 진주는 220만 캐럿, 에메랄드는 93만 캐럿, 루비는 37만 캐럿, 다이아몬드는 28만 캐럿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5대 손자 샤자한(1628-58)은 아그라와 델리에 많은 건축을 건설 황제이다. 6대 증손자 아우랑제브(1658-1707)는 수도를 델리로 옮겼고,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지만 실정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마지막 황제가 되었으며, 1707년 7대 황제에서 1858년 20대 황제까지는 명목상의 황제들이다. ★나디르 샤(샤: 황제): 1739년 무굴제국의 수도를 함락하여 제국을 실제로 멸망시킨 사람인데 델리로 가던 중에 나무꾼 일화는 3장-[5]-3. 이란왕조들 아프샤르 왕조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열차 식이라고 주는 빵조각은 10루비만 주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것이었고, 너무 양이 적어 이것을 먹고 어떻게 점심때까지 견딜 수 있을 가? 걱정부터 되지만 어쩌랴! 힘들고 어려웠던 기차여행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델리성은 가보고 싶지만 일정에 없으니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올드 델리에 있는 자마 마스지드 사원으로 향했다. 사진기는 요금을 받는다고 하여 여러 명이 같이 온 사람들은 한명만 가져가면 되었으나 개인으로 온 사람들은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사진기를 차에 놓고 맨 발로 북쪽에 있는 문으로 입장을 했다. 자마 마스지드의 자마는 ‘금요일’의 뜻이고, 마스지드는 영어로 ‘회교 사원’으로 ‘금요일에 기도하는 사원’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밖에서 본 사원은 붉은 사암석을 많이 사용하여 ‘붉은 사원’이라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중앙에는 신도들이 앉을 수 있도록 빈 공간으로 흰 대리석 한 장에 한명이 앉게 되어 있는데 한번에 1만 명 정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할 만큼 넓으며, 까마귀 같은 새들이 많이 보인다. 둥근 돔과 건물은 사암석과 인도대리석으로 만들었고, 벽에 쓰인 글자는 코란의 내용이라고 하며, 메카방향인 서쪽을 보고 기도를 한다고 한다. 건물의 조각은 타지마할에 가장 많이 사용한 상감기법과 음양으로 돌출된 영각기법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가장 큰 올드 시장이 보이는데 올드 델리는 90% 이상이 회교들이라고 하는데 나올 때 쯤에는 뜨거운 바닥을 맨발로 다니는 것이 좀 힘들었다. ★자마 마스지드: 타지마할로 유명한 샤자한(Shah Jahan)이 1644년 공사를 시작해서 죽은 후 1656년에 완공되었으며, 인도이슬람 사원 중 가장 크며, 긴 소매 긴 바지차림이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상감기법(象嵌技法): 바탕에 무늬를 파내고, 그 자리에 맞게 아름다운 색깔의 재료로 메워 넣고 가공하는 공예기법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우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단점이다. 또 아름다운 색깔은 대부분 보석 같은 재료에서 얻기 때문에 재료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도 단점이며, 우리가 자랑하는 상감청자도 이 기법을 사용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자마 마스지드 사원>
![](https://t1.daumcdn.net/cfile/cafe/143AF8264CAAE00D27)
[인도 문(인디아 게이트: India Gate)] 인디아 게이트로 향하면서 델리에 살고 있다는 샌디가 가이드를 했는데 델리에 흐르는 ‘야무나’ 강은 갠지스 강의 여동생 강이라고 불릴 만큼 인도의 2번째 성스러운 강이라고 한다. 내년에는 영연방의 올림픽이 델리에서 열린다고 하였고, 인구는 1.300만 명이라고 하나 비공식적으로는 1.80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하며, 인디아 게이트에 도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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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문으로 가다가 철조망 안 연못 중앙에 있는 규모가 작은 아치형의 건축물은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들진 기념비이라고 한다. 맞은편에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 인디아 게이트이며, 아치형 통로 사이로 보이는 3개의 깃발은 인도의육군, 해군, 공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막 촬영을 시작하려는 예쁜 리포트가 보였으며, 마이크에는 ‘NDTV’이라고 적혀 있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NDTV (New Delhi Television Limited)이라고 한다. 나머지 영문은 실력이 없어 해석하지 못했으나 인도전역이 아닌 델리에서만 국한된 방송국 같다. 규모도 단출하여 촬영기사과 리포트 뿐이었고, 리포트 아가씨는 웃으며, 우리 팀들과 여러 번 모델이 되 주어 우리를 즐겁게 하였는데 촬영 중에 내 룸메이트에게 질문을 했다. 후에 룸메이트에게 물으니 날씨를 묻는 것 같아 오늘은 좋은 날씨라고 대답을 했다고 하였으며, 여행 중에 촬영 팀을 만난 것은 인천공항서 한번 외국에서는 3번째이다. ★인디아 게이트: 1차 세계대전서 전사한 8만5천여명 인도병사이름이 새겨졌으며, 또 아프간 북서전선에서 죽은 13,516명의 영국군과 인도군의 명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42m의 위령비(탑)의 초석은 에드윈 루티엔스(Edwin Lutyens)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21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졌고, 10년 후 아르윈(Irwin)경이 국가에 헌납했다고 한다. 인도정치의 심장부라고 하는 비자이 초크에서 동서로 뻗은 라지파트 거리 동쪽 끝에 있으며, 밤에는 화려한 조명의 야경과 불꽃놀이 등을 즐기는 시민들의 광장이라고 한다.
<예쁜 ‘NDTV' 리포트와 함께>
![](https://t1.daumcdn.net/cfile/cafe/153AF8264CAAE00D28) [인도정부빌딩] 이곳은 차를 세울 수가 없다고 하여 차 안에서 보는 것으로 대신하였는데 국토가 큰 인도답게 광장, 도로, 건물들도 매우 크게 느껴졌는데 어떤 건물이 대통령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현재 인도는 선거기간 중이라고 하며, 7억 명이 넘는 유권자와 80만개의 투표소를 한꺼번에 선거를 치루면 공권력이 분산되어 부정선거도 막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권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1달 동안 지역별로 나누어 선거를 한다고 하며, 의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은 상징적이고, 실권은 총리가 쥐고 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델리지역이 하루에 30분만 수도 물이 나오고, 사정이 나쁠 때는 7박8일도 간다지만 선거기간 중에는 수돗물과 전기의 사정도 좋아진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다수인 힌두교를 물리치고, 소수인 시크교도이며 경제학자인 ‘만모한 싱’총리가 재선에 성공하고
압승을 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참고로 인도는 힌두교(82.6%) 회교(11.4%), 시크교도(2%)이다. [바하이 사원(Bahai temple)] 샌디는 바하이 종교는 싸우지 말고, 각자종교를 인정하고, 잘살자는 종교이기에 이 사원에서는 어느 종교이든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하며, 26년 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하얀 연꽃을 닮은 아름다운 사원은 다가갈수록 더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신발을 벗고 걸어가면 안내자들은 입장한 사람들이 정원을 초과하지 않도록 통제를 하는데 내부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기도할 수 있는 의자가 원형으로 놓여 있으며, 아름다운 외부보다는 내부는 별 다른 장식은
없는 소박하고 엄숙한 분위로 잠시 머물다가 나왔는데 건물 아래는 연꽃 잎을 상징하는 연못이 있다. [바하이 사원과 바하이(마슈리크 알아드카르: mashriq al-adhkar) 신앙] ★바하이 사원: 이 사원은 외관이 연꽃을 닮아 ‘연꽃 사원(Lotus Temple)’이라고도 불으며, 세계에서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이며, 1986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마슈리크는 신비한 숫자 9를 믿는 신앙에 맞추어 9면체로 만들었으며, 27(3×9)개의 연꽃을 표현하고, 또 9개 연못은 잎을 상징하며, 높이 약 40m의 사원은 연꽃이 반쯤 핀 모습을 형상화했다. 흰 대리석, 시멘트, 백운석 등으로 만든 경이적이고 장엄한 사원은 현대 인도의 타지마할이라고 부른다. ★바하이 신앙: ‘마슈리크 알아드카르’는 아랍어로 '새벽에 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는 곳'의 뜻이라고 한다. 사원에서 주는 팸플릿에는 바하이 신앙은 1844년 이란의 바압(문의 뜻) 청년은 자기는 선구자이며, ‘약속된 분’이 온 다고 예언하였고, 1850년 순교했다. 바압을 신봉하던 바하올라가 1853년 투옥 중에 자기가 예언된 자임을 암시받고 또 선언함으로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바하이라고 하며, 그들은 바하올라가 종교적 인물, 모세, 예수, 석가모니, 무하마드 등을 모든 종교의 공통된 근원인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자(使者)로 믿고 있다. 그들은 세계 인류의 평화증진과 융합시켜야 할 공동운명체이며, 종교와 과학의 조화, 남녀의 평등을 실현을 주된 신앙으로 하여 이슬람권에서는 탄압도 받았으나 지금은 세계 각국에 신자가 늘어나고 있다.
<아름다운 바하이 사원>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AF8264CAAE00E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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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샤르담(Akshardham) 사원] 돈만 아는 중 가이드가 인도인이 ‘7대 불가사의’라고 할 만큼 델리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사원으로 절대로 후회하지 않고, 후회되면 돈을 돌려주겠다고 하며, 옵션을 할 것을 권했다. 아침을 열차 식으로 하자는 이유도 사실은 경비도 절약하고, 옵션을 하기 위하여 시간 벌기의 수단으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또 인도에 올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항상 가격은 입장료보다 더 받지만 다른 여행에서 옵션은 볼만
만했기에 20달러를 내고 중 가이드를 따라나섰다. 이곳은 무료 입장이라 몽땅 중 가이드가 챙겼지만 진작무료인줄 알았다면 조금 뒤에 따라가면 될 것인데 ‘아는 것이 돈이다.’라는 말을 배우는 데는 공짜가 아니다. 이 사원의 몸 검사는 정말로 장난이 아닌데 얼마나 까다로우냐? 하면 1번째는 공항처럼 위험한 휴대품이 있는가 하는 검사를 하고, 2번째는 직접 몸에 무엇을 지녔는지 검사를 하는데 혹시 낙서나 구호를 적을 가봐 루주까지도 안 된다. 사진기는 물론 저들은 안에서는 팔고 있는 물까지도 안 되는 것은 물장사를 하기위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돈, 여권, 볼펜, 종이 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슨 사정이 있어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검사를 받는 동안 도로 나가고 싶을 정도이었는데 하여튼 거지같은
검사를 마쳤는데 무료이라는 알았다면 그 정도의 몸 검사는 참아겠지! 사원은 '스와미나라얀(swaminarayan sect)'이라는 개인 종파가 만든 사원으로 2000년 11월에 시작하여 5년 동안 공사를 하였고, 2005년 11월 6일 공식 개장되었다고 한다. 사원의 규모와 조각은 말로서 표현하기가 힘들정도로 대단하며, 중앙의 신전은 더우면 따뜻하고, 추우면 따뜻한 성질을 가진 대리석을 사용했다고 한다. 붉은 색깔의 건축물은 라자스탄의 적 사암인데 돌들은 붙이지 않고 끼우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철재나 콘크리트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부만 아니라 지붕부터 기초까지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은 남인도에 있는 유적들의 것을 복사했다고 한다. 조각은 양각과 음각을 이용한 영각기법을 사용했다고 하며, 지금도 미술생도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날카로운 숫돌로 갈아내고 있었는데 인도의 수많은 고대유적들의 건축과 조각들을 바탕으로 하여 현대판으로 재구성한 느낌이 들었고, 세월이 흐르면 점점명성을 더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20달러가 아깝지 않았다. 중앙에 있는 신전내부는 호두로 만들었다는 방에는 ‘나라얀’의 조각상이 있으며, 9개의 커다란 돔형천장으로 구분된 큰 홀의 243기둥과 천장은 각각 다른 문양으로 되어있어 찬란함을 더해 준다. 두건을 쓰고 있는 ‘나라얀의 황금상’도 있으며, 나무아래에서 설법하는 것을 표현한 것도 있고, ‘나라얀’의 젊을 때 모습도 있으며, 수도자들의 조각도 있다. 신전의 기단(基壇)에 있는 ‘코끼리 신(가젠드라: Gajendra)’을 예찬하는 148마리의 코끼리 중에는 기도하는 수도승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코끼리도 있으며, 1.000마리의 공작새와 다른 동물의 조각상도 있다. 이 모든 동물의 조각상은 그 모양이 각각 다 다르지만 모두가 히말라야 산맥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 주위에 있는 연못과 분수는 건축물이 부식되지 않도록 습도를 맞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고, 밤에는 분수 쇼도 열린다고 하며, 중앙의 통로는 연꽃 모양이라고 한다. 중 가이드가 이 사원을 건축하는데 우리 돈 약 2.000억 원이 들었다고 하며, 11만평의 세워진 거대한 신전, 인도정원, 연못, 사원, 아이맥스영화관 등이 있다고 하나 우리는 신전만 보고 행랑을 따라 나왔다. 이 사원을 샌디는 한글로 ‘어처담’이라고 적어 주었는데 인도인들은 이렇게 발음하는가 보다. ★악샤르담 사원: 악샤르(Akaha:불멸의 뜻) 담(dham: 안식처의 뜻)은 '불멸의 안식처'이다. 세계에서 가장부유하다고 하는 ‘나라얀’ 종파를 시작한 성자 스와미나라얀과 그 종파들의 내용을 표현하였으며, 7,000여명의 장인과 3,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중앙에 있는 신전의 높이 43m, 폭 96m, 길이 110m으로 적(赤) 사암과 백 대리석으로 건축되었으며, 건축에는 이탈리아 까라라(Carrara) 화강암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식물군, 동물군, 무용수들, 음악가들, 2만여 개의 무르띠(murti: 신상), 힌두의 위대한 사두(sadhu: 고행자)들, 아차르야(acharya: 중요한 종교적 스승)의 인물상들이 있다. 돌아와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사원을 폭파하려는 정보가 있어 몸 검사가 철저하다고 하며, 규모는 세계최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입장료도 없는데 20달러를 주었지만 후회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악샤르담 사원의 원경>
![](https://t1.daumcdn.net/cfile/cafe/153AF8264CAAE00E2A) [쿠툰 탑(꾸뜹 미나르: Qutab Minar)] 점심은 처음이자 마지막 현지식인 무굴식 ‘탄두리 치킨’을 맛있게 먹긴 하였는데 중 가이드가 팁으로 놓으라고 하자
모두들 '식사 때 팀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항의 했으나 강요하기에 1달러씩 했다. 집에 다 왔는데도 들리지 못하고 떠나는 샌디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며, 270km 정도 되는 자이푸르를 6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하여 도로사정에 비하여 너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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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툰 탑은 가는 길목에 있다고 하였는데 탑이 보이자 시간이 없어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여 내가 일어나서 사진이라도 찍고 가자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도 동의를 해주었다. 차는 유턴하여 쿠툰탑 주차장에 들어갔으며, 거기서 사진을 찍고, 변소도 들리고 다시 출발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쿠툰 탑을 시간 때문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호텔은 좀 늦게 들어가면 되고, 또 어처담 사원에서도 충분히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는데 점심 팁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지 아니면 쿠툰 탑의 입장료를 있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모든 유적지의 입장료는 5달러로 총 80달러를 챙긴 것으로 인도에서 1달러는 2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대라고 하였는데 80달러는 우리 팀이 3일 동안 먹을 수 있는 큰 금액이다. 점심 식사 후에도 가이드들은 늦게 나온 것은 팁을 챙겨 일부는 식당에 주고, 나머지는 챙기려 한 것은 아닌지? 이제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으며, 늙은 가이드가 싫어지기 시작했는데 나뿐만 아닌 것 같다. ★쿠툰 탑: 세계문화유산이며, 델리남쪽 약15km에 위치하고, 넓은 평원에 높이 73m인데 귀저부의 지름이 14,5m의
총 5층 중 아래 3층은 적 사암이며, 그 위는 대리석과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코란의 문구를 도안한 조각이 외벽에 새겨져 있고,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독특한 이 탑은 ‘빛나는 탑’을 의미하며, 본래는 노예왕조의 술탄인 굽타우딘 아이바크가 힌두교도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1199년에 건축한 것으로 후에 그의 사위인 샴슈딘 일투미쉬가 완성했다고 한다. 각층 사이에 발코니가 있고, 내부는 나선형의 379계단으로 되어있으며, 부지 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문인 알라이 디와자가 있는데 이 문은 회교, 힌두교, 자인교가 하나의 합일을 이루고 있는 형태라고 하며,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정교한 조각과 문향들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 사원의 마당에 굽타 왕조의 것으로 추정이 되는 높이 7.2M의 쇠기둥이 서 있는데 순도 100%를 자랑하며, 아직까지도 녹하나 슬지 않았는데 당대에 순도 100%의 쇠기둥을 만들 수 있었는지 지금도 확연히 밝혀내지 못한 미스터리라고 한다. ★굽타 우딘 아이바크(Qutab-ud-din Aybak ?~1210): 최초의 이슬람 왕조의 술탄으로 ‘꾸뜹우드딘 에이백’ 또는 ‘꾸뜹미나르 아이바르크’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그는 북인도에 세력을 떨친 투르크계의 노예(맘루크-노예)왕조로 무장이었으며, 펀자브지방을 중심으로 독립하여 술탄이 되었고, 델리를 수도로 하여 4년 동안 통치하였다. 1210년 그의 사위 일투트미시는 술탄왕위를 찬탈하여 계승하였며, 인도의 최초 회교국을 이룩하였다.
<가이드에게 구걸해서 찍은 쿠툰 탑>
![](https://t1.daumcdn.net/cfile/cafe/163AF8264CAAE00E2B) ★델리: 북서쪽은 타르사막, 북동쪽은 히말라야 산맥 사이로 협곡을 지나 야무나 강의 평원에 발달한 델리는 구델리와 뉴델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1,485㎢에 인구는 약 1,010만명 정도인데 이중 구델리는 840만명으로 3번째로 큰 도시로 구델리는 17-19세기 동안 수도였다. 뉴델리는 영국인 새로 건설한 도시로 현 수도, 빈부의 차가 뚜렷한 잔혹한 도시 델리는 강을 등진 델리 성벽 안의 구시가지와 남쪽에 건설된 신시가지 뉴델리와 구별하여 올드델리라 부른다. 델리는 수많은 인종, 각종소음, 색의 홍수, 아우성, 모래먼지, 강한 햇볕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도시로 자이푸르와 아그라를 잇는 ‘황금삼각형’의 북쪽 정점이라고 한다. ★인도: 가이드는 인구가 13억이라고 하나 사전에는 약11억(06년)으로 인종은 아리안(중북부, 70%), 드라비다(남부, 25%), 몽고(3%)이며, 면적은 328.7만㎢으로 한반도 15배이고, 세계 7번째로 크다. 종교는 힌두(82.6%), 회교(11.4%), 시크(2%), 나머지는 기독, 불교 등으로 언어는 힌디어(32%), 14개 공용어, 영어는 보조공용어로 사용한다. [역사는 인도의 고대, 중세, 현대 참조 하세요]
[자이푸르 호텔]
자이푸르를 가이드들은 ‘재플’이라고 발음했으며, 성문을 통과하자 도시가 시작되었는데 호텔에 들어가 방 배정을 하면서 중 가이드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더운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어제 열차에서 씻지도 못했는데 물까지 나오지 않는다고 하자 그동안 싸였던 불만이 터져 나와 모두들 화를 내며, 항의 한 덕분에 더운물을 쓸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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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2009년 5월 3일 일요일 자이푸르 관광 [하와마할(hawa mahal)과 핑크시티(Rose Pink City)] 오늘도 4시에 기상하여 하와마할 궁전으로 향하면서 어제 분위기 때문인지 샌디가 가이드를 했는데 자이푸르는 인도에서 제일 유명한 문화도시로 300년 전에 계획된 도시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현재 핑크시티(25㎢)의 소유는 놀랍게도 한 사람이라고 하며, 모두가 전세, 월세의 계약을 맺고 살고 있다고 하며, 호칭만은 아직도 왕으로 불린다고 한다. 자이푸르는 ‘라자스탄(Rajasthan) 주’의 주도(州都)로 ‘라자(왕)’이고, ‘스탄(땅)’으로 '왕이 사는 땅'이라고 하였는데 자이푸르를 이해하려면 라지푸트 왕국을 이해해야 하므로 아래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핑크시티 안에 있는 하와마할 궁전 앞에서 내려 사진을 찍었는데 궁전의 핑크 색은 인도의 많은 적(赤: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도시 집들과 함께 적 사암 색깔(핑크)의 페인트로 칠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5층의 궁전은 창이 많아서 ‘바람의 궁전’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3층까지만 방으로 되어 있고, 4층과 5층은 앞면에 창만 있고 뒤는 건물이 없는 옥상 같아 바람이 드나들기 쉽기 때문인 것 같았다. 궁중의 여인들이 시가지를 보기 위해서는 3층 옥상인 4층 창문으로 내렸다 보았을 것으로 보이며, 내부는 알 수는 없지만 5층은 구경하는 곳은 아니고, 앞면의 모양을 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와마할: 1799년 건축 된 궁전은 핑크시티 중심가에 있는 5층짜리 성으로 ‘바람의 궁전(Palace of the Winds)’ 또는 ‘바람의 홀(Hall)’로 불린다고 하며, 세상 밖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던 왕궁 여인들이 시민의 일상생활과 시내의 행렬을 볼 수 있도록 높게 건축되었다고 한다. ★핑크시티: 1905년~6년 에드워드7세(1901-10)가 이곳을 방문하자 귀한 손님을 맞게 된 자이푸르는 새로 페인트칠을 하려고 하였는데, 계약업자가 다양한 페인트를 확보할 수 없자 모든 벽을 핑크빛으로 칠하게 되었다. 그 후로 핑크 빛은 라자스탄 문화에서 환영을 뜻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가옥은 모든 외관은 핑크빛을 유지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에드워드7세는 빅토리아여왕의 아들로 누이 비키는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어머니이다. ★라자스탄: 인도 북서부에 있는 라자스탄 지역은 7~11세기에 '라지푸트'(Rajput: 왕의 아들)족’이 세운 여러 왕조가 일어났는데 이들을 ‘라지푸트 왕국’이라고 한다. 이들 세력은 16세기 초 절정에 이르렀으며, 왕국의 끝 왕조 카쯔쫘하 왕조의 마하 라자 만 싱 1세는 무굴의 3대 황제 악바르의 능숙한 외교로 지휘관이 되었고, 혼인을 통해 왕조를 지켰다. 1761년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하여 힘의 공백으로 혼란과 분열 속에 있던 무굴제국과 1783년 전쟁을 했지만
패하여 합병되었으나 유럽열강의 세력이 진출하면서 영국과 정략적인 제휴를 하여 식민지 기간에 독립을
유지하였다가 인도 독립 후 타자스탄 주(州)로 편입되었다. ★자이푸르(Jaipur): '자이왕의 성'이라는 의미의 도시는 12세기 라지푸트 일족이 세운 자이푸르 공국이 암베르를
대신할 수도로 1727년 ‘라자 자이 싱 (Rajah Jai Singh) 2세’에 의해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도시는 남쪽을 제외하고 모두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벽 도시로 타자스탄 북서쪽 지역에 있는 주(州)의 3/5에
해당하는 타르사막(대인도 사막)이 가까워 무덥고 건조하다고 한다. 1783년까지 수도이었으나 좋지 않는 환경으로 무굴제국에 병합되었다가 무굴제국의 멸망과 함께 쇠퇴했으며, 현재인구는 인구150만 명 정도이고, '연분홍 도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핑크시티에 있는 하와마할 궁전>
![](https://t1.daumcdn.net/cfile/cafe/17211B274CAAE67060)
[암베르 성(Amber Palace)] 암베르 성으로 향하면서 어제 저녁에 호수 가운데 조명된 아름다운 궁전 같은 건물을 보았는데 그 호수궁전이 다시 보였지만 햇빛이 사진 찍기에 나빠서 오늘 길에 들린다고 했으나 공수표가 되었다. 고개를 넘자 먼 산꼭대기에는 오래된 회색 성이 보였으며, 아래에는 거대한 황색의 궁전이 있고, 궁전 앞에 강이 흘렀으나 건기 때라서 그런지 물은 말라 버리고 바닥만 보인다. 샌디는 성안에는 1.000년 전, 800년 전, 500년 전, 400년 전 등의 여러 시대의 건물이 있다고 하며, 이성은 힌두 성으로 ‘아밀 성’ 또는 우리말 ‘엄마 성’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곳은 ‘요새와 궁전’이 함께 있는 곳이라고 하며, 암베르 성은 바위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건너편 산등성이에는 있는 성벽과 망루를 보면 위로나 옆으로 사람이 다닐 수 없는 큰 담과 같았는데 방어적
목적이 강한 성채임을 짐작케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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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장사꾼들에게 시달리기도 하고, 사진도 찍다가 2명씩 한조를 이루어 궁전을 향해 떠났으며, 처음으로 타 보는 코끼리 택시인데 승차감은 생각보다 영 형편없다. 코끼리 택시기사가 인사를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으나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다정하게 하는 것은 내릴 때 팁을 더 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르막길을 코끼리도 힘 드는지 앞서가던 덩치 큰 코끼리는 움직이지를 안했으나 우리가 탄 코끼리는 무사히 궁전 제 1안뜰(안마당)에 도착하였고, 일정에 있는 것이라 여행사가 요금을 주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팁만 주었는데 예상대로 더 달라고 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내렸다. 후에 인터넷을 보니 요금이 80루피라고 하여 여행사가 요금을 지불하지 안 해도 되는 금액으로 대부분 일정에 포함된 체험은 여행자들의 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이다. 부담할 수 없는 금액은 옵션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했을 것인데 여행사가 경비를 부담하는 하는 것처럼 일정에 넣는 것은 어느 여행사나 마찬가지이다. 샌디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테라스에서 멀리는 있는 오래된 성벽을 구경하였고, 계단을 올라 요새의 궁전 제 2안뜰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이 ‘금고(金庫)’라고 하며, 이유를 말했다. 당시에는 물이 가장 중요하여 금 같이 여겼고, 또 안보 때문에 물이 어디에 있는지 비밀이었다고 한다. 제 2안뜰에는 칸막이가 없는 적 사암 기둥과 대리석기둥이 조화를 이루는 건물은 지금의 법원 같은 역할을 하던 ‘미팅 룸 (Meeting Room)'으로 ‘디완 이 암(Diwan i am)’이라고 한다. ‘디완 이 암’은 왕이 백성의 소리를 듣고 해결해주거나 귀족들이나 정부각료들과 의논하던 장소이기에 왕이 거주하던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고 한다. 반대편에는 '카쯔쫘하 왕족'의 가족 사원인 ‘실라 데비(Shila Devi-실라 마다)’ 사원에는 ‘라자 만 싱’이 벵골에서
가져 온 돌 모양의 ‘깔리(Kali)’ 신상은 신성하게 여기는데 깔리는 시바 신의 부인으로 전쟁의 여신이다. 제 2안뜰 앞에 있는 낮은 계단을 오르면 자이 싱 1세가 건축했다는 궁전이 나오며, 입구에는 프레스코화로 탁상 위에 앉아 있는 코끼리의 신 ‘가네샤’ 그림이 보인다. 이 코끼리는 450년 전 그림으로 기도하는 코끼리 신인데 '행운이여 어서 오세요(welcome good luck)’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200동안 건설한 건물들은 힌두교, 불교, 회교형식을 다 합했다고 한다. 무굴의 4대 황제 자한기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디완 이 암’의 장식을 덧칠하여 본모습을 감춰야 했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화려했다고 한다. 격자 화랑의 입구 안에는 왕 외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는 통로를 지키는 파수꾼이 있었다고 하였고, 여름 방 문 앞에는 물이 있어 시원하게 하였다고 한다. 목욕탕을 지나 특별회의실이라고 하는 곳은 벽이 없는 공간으로 12명의 부인이 커튼을 치고 있었다고 하며, 왕비 실 옆에는 내시가 있었던 장소도 있으나 가장 경이로운 것은 작은 직사각으로 뚫린 구멍이다. 이 작은 구멍은 밑이 보이지 않지만 화장실인데 여기에 일을 보면 통로를 거쳐 건물 뒤에 있는 계곡으로 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거울 궁전인 세쉬 마할로 향했다. 왕과 왕비의 침실로 사용했던 거울궁전은 촛불 하나로도 환해지도록 방 전체를 거울조각으로 모자이크를 하였다고 하며, 외부의 장식이 화려하기가 말로 표현하기에는 실력도 부족하다. 올라갈 때는 코끼리를 타고갔지만 내려 올 때는 계단으로 된 길을 따라오면 기념품을 파는 상가도 있으며,
다 내려오면 아담한 정자가 있는 정원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한다. ★암베르 성: 1037~1726년까지 카쯔쫘하(카츠츠와하: Kachchwaha) 왕조의 수도이자 요새이었다고 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 성은 자이푸르 북쪽 약 11km 떨어진 언덕위에 있으며, 1600년에 마하 라자 만 싱 1세(Raja Man Singh)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의 모습은 스와이 자이 싱(Swai Jai Sin)에 의해서 18세기에 완성되었다고 하며, 이 성은 적 사암과 대리석을 사용하여 힌두와 이슬람 건축양식이 잘 조화되어 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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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쉬 마할(Sesh Mahal)이라는 거울궁전은 이 성채의 최고의 장소이며, 우아한 품위를 풍기는 실라 마다(Shila Mata)사원은 라자 만 싱이 방글라데쉬의 Jessore에서 가져 온 '어머니 여신상(Mother Goddess)'은 한 때 수천 명의 참배객들로 붐볐다고 한다. 무굴이 만든 딜라람 가든(Dilaram Garden)이나 모한바리(Mohan Bari Garden) 정원도 있다고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보지를 못했으며, 이 성은 신을 벗는다고 했지만 신발을 신고 다녔다.
<큰 사진: 암베르 성의 전경이고, 작은 사진: 궁전의 일부>
![](https://t1.daumcdn.net/cfile/cafe/18211B274CAAE67061)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 자이푸르의 마지막 유적지 잔타르 만타르로 향했으며, 이곳에서는 중 가이드가 설명을 하였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태양의 그림자를 이용한 해 시계로 구조가 똑 같은 구조물이 2개씩 있다. 자이푸르의 위도인 27도만큼 기울지게 만든 구조물이 중앙에 있으며, 좌우(오전, 오후)에 있는 원형 평판의 흰 대리석에 나타나는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비가 2개가 있다. 작은 것은 20초까지 읽을 수 있는 눈금이 흰 대리석에 새겨져 있으며,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는 30m 높이의 ‘삼랏 얀트라’는 규모가 작은 것보다 10배가 되어 2초까지 읽을 수 있다. 그림자 시계로 이렇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것이 경이로우며, 유적에서 본 해시계들은 실제로는 시간을 알 수가 없었지만 이곳은 실제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 큰 수확이다. 기울기가 다른 원판이 구조물 앞뒤로 달려 있으며, 원판 가운데 작은 막대기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비는 3월 21일 (춘분)까지 그림자가 나타나고, 반대편의 원판은 기울기가 반대로 되어 있어 원판에는 9월 21일(추분)까지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 해시계는 1년의 시간을 측정하는 장비 같다. 간격이 일정한 구멍이 뚫린 둥근 구조물 중앙에 긴 검은 막대기가 세워진 2개의 구조물은 하나는 오전의 그림자가 생긴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고, 다른 구조물은 오후의 시간을 측정하는 곳이다. 이해하기가 난이한 곳은 지구의 반쪽을 파낸 모양으로 만들어진 흰 대리석의 한 곳은 온전한 상태이나 한 곳은 부분적으로 일정한 간격의 공간이 있는 곳이다. 2곳 다 지구의 날줄과 씨줄이 같이 많은 선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데 용도는 잘 알 수 없으며, 이곳에도 똑 같이 작은 사각형이 4개의 줄에 의해 반구 중앙에 위치하도록 고정되어 있다. 이 작은 사각 중앙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과한 빛이 지구 반구에 나타나도록 된 구조물로 중 가이드는 ‘황소자리’ 등 12개의 별자리를 연구하는 시설이라고 했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햇빛으로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별빛으로 그림자가 생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나 300년 전에 이런 관측소를 만든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삼랏 얀트라' 꼭대기에 있는 작은 돔 모양의 전망대는 달과 별의 관측, 계절풍 등을 관측하는 곳이며, 이곳에는 16개의 관측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다른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인도 옷을 입고, 빈디를 한 우리나라 아가씨와 같이 설명을 들었는데 빈디가 궁금하여 물었는데 다른 유적지에서 칠해주고는 팀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잔타르 만타르: 인도의 첨성대인 천문대는 산스크리트어로 ‘마법의 장치’라는 의미로 천문대는 마자하라 자이 싱 2세 (Maharajah Jai Singh II)가 천문학에 매우 관심 많아서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천문학 관측소를 자이푸르와 델리, 바라나시 등에 직접 만들었는데 그 중 이곳이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지역의 돌과 대리석으로 만든 관측소는 아직도 건재하며, 1901년 완전 복구가 이루어졌고, 1948년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큰 사진: 잔타르 만타르의 작은 해시계, 작은 사진(왼편): 별 자리를 연구한 지구의 반구모습,
오른편: 2초까지 읽을 수 있는 큰 해 시계 '삼랏 얀트라', 계단 위의 작은 집은 별과 달을 관측 하던 전망대>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11B274CAAE67062) [아그라로 가는 길] 어제 잤던 호텔로 향하면서 중 가이드가 ‘헤나’는 이곳에서는 ‘히나’라고 부른다고 하며, 헤나는 식물이라 색깔은 진한 갈색 하나 밖에 없었으며, 머리 색깔에 따라 염색된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오늘 점심을 먹고 헤나 체험을 한다고 했지만 별로하고 싶은 생가도 없지만 팁은 우리가 낼 것이라는 생각에 모두가 반대하여 안 하기로 했으며, 점심을 먹고 아그라로 향하는 길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들이 많이 보여 물 사정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인도에서는 마우리 왕조의 뜻이 공작새라고 하여 이 새를 많이 볼 것으로 생각했으나 들에 사는 야생의 검은 공작새와 휴게소에서 본 공작새가 전부이나 어느 유적지의 놋쇠로 만든 문이 공작새인 것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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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가 아그라에 유명한 3가지는 1번째가 타지마할이고, 2번째는 식물로 만든 과자라고 하며, 3번째는 정신병원이 유명하여 좀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면 ‘아그라에 갔다 와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해가 지고 결혼하는 장면이 보이자 샌디가 인도의 결혼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주었는데 인도에도 결혼시즌이 있으며, 연애결혼이 없고, 중매결혼만 있다고 한다. 그러면 가끔 본 데이트하던 연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조금은 의아해졌으며, 결혼식은 오후 9시부터 시작하여 잔치는 일출 때까지 하고, 2일 후에는 아버지나 오빠가 친정으로 데려가서 3일 동안은 잠자리는 하지 못하며, 신랑은 신부를 위해 글리세린을 준비한다고 한다. 오늘은 가장 기대하고 고대하던 이번 여행 중에 가장 하이라이트인 아그라에 도착했다.
[8일] 2009년 5월 4일 월요일 아그라 관광 [타지 마할(Taj Mahal)] 오늘은 5시에 기상하여 타지마할로 향하면서 샌디의 설명을 들었는데 인도의 있는 29개의 세계문화유산 중에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타지마할이라고 하며, 마할은 왕관의 뜻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라고 세계에서 가장아름다운 건물의 하나인 타지마할은 2만 명이 하루 12시간씩 노동하여 22년(1631년~53) 동안 만든 무덤이라 한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자한에게는 360명의 부인이 이었지만 가장 사랑했던 왕비의 본래 이름은 '아르주만드 바누 베굼' 이었으나 '황궁의 보석'이라는 뜻을 가진 '뭄타즈 마할'으로 부르게 되었다. 왕비는 17년 동안 14번째 아이를 낳은 후 열병으로 1629년 사망했다고 하며, 그녀는 결혼한 후로는 배가 꺼질 날이 없었다고 하고, 건물의 특징은 모든 것이 대칭이나 샤자한의 무덤으로 대칭이 깨졌다고 한다. 내부온도는 최대한 51도C이고, 최소한 -2도C가 되도록 설계했으며, 내부온도가 외부온도보다 6도C가 낮다고 하고, 19번의 강진에도 끄떡없었던 비결은 우물을 파고 스리랑카에서 수입한 흑달 나무로 채워서 기초를 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착시현상을 일으켜 실물보다 크게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착시현상은 중 가이드가 그림을 대비시켜 실험으로 보여주어 이론은 이해를 했는데 그림처럼 착시현상을 일으켜줄만한 대비되는 구조물은 4개의 기둥 밖에 없다. 하얀 대리석의 타지마할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리고 아침, 한낮, 석양의 시간에 따라 또 달빛에 따라 느끼는 색감이 다르다고 하는데 더디어 정문을 통과 하고 역사적인 타지마할 앞에 섰다. 이 감격은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또 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인파 제법 많았으며, 영국의 다이애나비가 앉아서 사진을 찍어 유명해진 사진 찍기에 뷰포인트인 대리석 의자는 이미 인도 사진사들이 점령하고 영업하느라 바빴다. 좀처럼 현지 사진사들에게 자의로 사진을 찍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찍고 싶은 마음에 좀 한가한 곳에서 인도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잘 안 되는 표정에 어설프게 폼을 잡고 사진 2장을 찍었다. 타지마할 쪽으로 향하는 양쪽의 통로 가운데 연못이 있으며, 연못에는 물고기는 없고, 올챙이만 보였으며, 연못 양쪽에는 작은 이태리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왼쪽은 들어가는 통로이고, 오른쪽은 나오는 통로인데 중간쯤에 타지마할을 사진 찍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은 대리석 기단에서 다시 폼을 잡아보고 타지마할의 본 기단에 올라갔다. 가이드가 준 덧신을 신고 정문을 향해 폼을 잡아보고 왼쪽에 있는 회교사원 쪽으로 갔는데 이곳에서는 야무나 강과 2km에 있는 아그라성이 잘 보이는 곳으로 또 한 번 폼을 잡았다. 내부로 들어가면 어두웠는데 안내인이 플래시로 비추면 상감기법으로 만든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늬들을 구경할 수가 있었으며, 사진을 찍지 마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아무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없다. 무덤의 구멍 뚫린 팔각 벽 안에는 왕비 뭄타즈 마할의 관이 중앙에 있으며, 타지마할에서 유일하게 대칭을 갰다는 샤자한의 관이 그 옆에 있으며, 왕비 것보다 조금 더 크다. 샤자한은 야무나 강 건너 맞은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다가 아들의 유폐로 중지되었고, 죽은 후에 왕비의 무덤으로 오게 되어 모든 대칭의 구조물에 오점을 남겼다. 무덤을 나와 오른편에 있는 회교사원으로 향했는데 한 인도인 막대기를 들고 오라고 손짓을 했지만 일행들도 보이지 않았고, 인도인도 미덥지 않아 사원 구경을 포기하려고 했다. 앞서 가던 서울 분이 인도인을 따라 가더니 나보고 어서 오라고 해서 사진을 찍어 달라는 줄 알고 갔는데 사원 문 모양은 배경이 되었고 그 가운데 있는 타지마할은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까이에 있는 대구분도 불러서 같이 이동하면서 여러 가지의 문 모양에 따라 배경이 달라지며, 이렇게 찍은 사진도 책자에 소개 될 정도로 유명한 장소인 것은 나중에 알았다. 다른 일행이 찾으면 알려주려고 2분은 계속해서 따라가고 나는 일행들에게로 돌아왔는데 끝까지 따라간 서울 분한테 3명의 팁으로 3달러를 내라고 했으나 자기 것만 주고 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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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방법도 다양하지만 수입이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들어갈 때 찍은 사진을 찾아들고 상감기법으로 만든 공예품을 파는 곳으로 향했으며, 커다란 문을 통과하면 궁궐 같은 기분이 든다. 이 기념품 가게는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어 만드는 공정과 가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불을 끄고 플래시를 그림 뒤에서 비추면 훨씬 더 아름다운 무늬를 볼 수 있다. 가격은 재료들이 보석의 수준이라 감히 엄두도 못 내고 구경만 대충하고 소파에 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불러 따라 가보니 공정과정을 보여주는 곳으로 소년들은 작은 돌조각을 1달러 달라고 한다. 주인 몰래 파는 듯했지만 오래세월을 그렇게 팔수는 없을 것이므로 하나의 장사 수단으로 보였으며,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온누리 팀과 같이 있는데 이 팀은 카마슈트라(sex: 성)로 유명한 애로사원이 있는 카주라호로 떠날 것이다. ★타지마할: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물로 궁전형식의 묘지로 198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으며, 구조물은 모든 것이 좌우 대칭으로 기단 높이 5.5m, 종횡 94m의 기단 위의 중앙 무덤의 높이 58m이다. 무덤 건물 4모서리에는 높이 42m의 첨탑이 세워졌으며, 바같 방향으로 1도 기울리게 하여 지진 때 영묘 쪽으로 넘어자자 않도록 만들어 졌고 타지마할은 22년 동안에 국고를 탕진하여 완성하였다. 많은 재보와 미술공예품도 모아놓았다고 하며, 흰 대리석은 라자스탄에서 모든 귀금속과 돌은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중국 등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큰 사진: 타지마할 전경, 작은 사진(아래): 타지마할에서 바라 본 정문>
![](https://t1.daumcdn.net/cfile/cafe/20211B274CAAE67063) [아그라 성(Agra Fort)] 점심을 먹고 야무나 강변에 있는 아그라 성으로 향했고, 샌디는 아그라 있는 인구 중에 20%는 관광객이라고 하였으며, 인도에는 아그라 같은 성이 400개 정도가 있다고 한다. 아그라 성은 악바르, 자한기르, 샤자한 시대에 만든 건축물로 악바르는 적 사암으로 건축했으며, 자한기르는 적 사암과 대리석을 혼합해서 건축하였고, 샤자한은 대리석으로 건축했다고 한다. 아그라 성과 타지마할의 모든 재료는 450Km 밖에서 가져 온 것이라고 하였으며, 차에서 내려 아그라 성으로 향했는데 붉은 성벽은 설명대로라면 악바르가 만든 것이 되겠다. 해자 위에 놓여 있는 다리를 통해 ‘아마르 싱(Amar Singh)문’을 지나 우측의 자한기르의 궁전으로 향했으며, 샌디는 같은 문양도 없지만 힌두교, 불교, 기독교 문화가 혼합된 것이라고 한다. 자한기르 궁전의 정문 돔은 아래는 불교식, 중간에는 힌두교식, 상층은 기독교식이라고 하였고, 궁전의 동쪽 방은 햇빛이 들지 않아 여름 방으로 사용했으며, 시원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햇빛이 잘 드는 서쪽 방은 겨울 방이고, 자한기르 도서관에 있는 기둥은 돌 하나라고 했으며, 이란의 '나디르 샤'가 가져갔다는 자한기르의 그 유명한 다이몬드(코히누어: kohinoor)와 보석을 보관했다는 방을 둘러보았다. 샤자한이 8년간 유배되어 매일 타지마할을 바라보던 곳에서는 저마다 폼을 잡았고, 샤자한이 조언을 듣던 미팅 룸을 지나 옥상에 있는 이란에서 가져온 시금석의 검은 돌은 뜨겁지만 앉아서 폼을 잡아보았다. 흰 돌은 여름 방에 검은 돌은 겨울 방에 사용했다고 하며, 이곳에서도 야무나 강과 타지마할 드넓은 평원이 한 눈에 보였고, 이곳을 지나 건물 중앙에 있는 넓은 잔디밭은 물건을 사고팔던 ‘미나 바자르’라고 한다.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악바르가 건축했으며, 백성의 문제를 해결해주던 일반회의실 ‘디완 이 암(Diwan i am)’으로 법원의 역할을 했다고 하며, 앞뜰에 있는 무굴제국의 우물을 보았다. 가까운 곳에 100년 전에 세웠다는 흰 대리석 사원이 보였는데 50년 전부터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한꺼번에 많은 곳을 보고 설명을 들어 어디가 어딘지 생각이 나지 않았으며, 어느 곳은 많이 파손된 상태로 있는 곳도 있고, 어떤 곳은 화려한 문양이 있는 곳도 있었다. 악바르 방, 악바르가 아들 자한기르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방, 자한기르의 방, 샤자한 방이 있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으며, 사진이 아니면 기억해 내기도 힘들었는데 더 많은 사진을 찍어야 할 것 같다.
아그라 성은 멀리 또는 높은 곳에서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내부로 들어가면 내부만 볼 수 있기에 성 전체는 알 수도 없거니와 이제는 어디에서 식사를 했는지 또 어떻게 생긴 호텔에서 잤는지 대충 기록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여행기를 쓰기에도 점점 힘들어 진다는 것을 느낀다. ★아그라(Agra): 인도북부 델리에서 동남쪽 204km 위치하고, 인구 약 112만으로 우타르 프라데시 주(州)도 이며, 델리, 자이푸르와 삼각형 이루어 황금 트라이앵글을 이룬다.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악바르가 1558년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겼으며, 10년(1564년~74)에 걸쳐 막대한 예산으로 아그라 성을 건축하였는데, 샤자한 왕 때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 5대 황제 샤자한이 델리로 수도를 옮기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대 황제 아우랑제브 원년인 1658년 델리로 수도를 다시 옮길 때까지 약 100년간 수도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을 때도 행정중심지로서 역할을 다 하였고, 오늘날도 지방행정부의 청사가 있으며, 무굴제국의 영향으로 지금도 회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큰 사진: 아그라성 정문, 작은 사진: 샤자한이 8년간 유배된 창에서 매일 바라보던 타지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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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월(Bhusawal)로 가는 길]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긴 이동을 위하여 부사월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중 가이드는 바라나시 때와 같이 침대 좌석이 다 구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홀로 온 사람과 2분이 온 사람들에게 먼저 좌석번호를 나누어 주자 울산 팀이 지난번에 양보했는데 또 양보할 수 없다고 팀원 전체가 항의하여 나누어준 것은 없었던 것으로 했다. 이번에도 중 가이드가 100만원 줄 터이니 좌석을 구해보라고 할 때 울산 한분이 서서라도 가겠으니 100만원을 내 놓으라고 하자 중 가이드는 할 말이 없었는지 최선을 다 하겠다고 한다. 오늘저녁 식사까지 준비를 마친 요리사 철수는 이제 철수한다고 하며, 이별의 인사를 할 때 그동안 감사했다는 마음으로 팁을 각출하여 전했는데 불편한 몸이라 건강하기를 바랬다. 인도는 개찰이라는 것이 없어 대기실뿐 아니라 승강장까지 승객들이 차지하여 누워있거나 잠자는 사람까지도 있어 복잡하고, 더럽고 지저분하며, 조금 후진 곳은 쳐다볼 수도 없다. 양보했으면 못자랄 좌석도 양보 안한 덕에 모두가 좌석이 있게 되어 안심을 하였고, 안 갈듯했던 중 가이드가 같이 탑승하여 모두들 실망하는 말투인데 자리가 있으니 있기가 편했다. 아직은 해도 있고, 저녁도 먹지 않아서 주위에 있는 인도사람들과 일행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도 했는데 남편이 전기기사인 인도인 부부는 매우 친절했으며, 룸메이트와 음악도 바꾸어 듣고 명함도 받았다. 다른 편에는 차림새가 깨끗하고 기풍이 풍기는 사람은 어떤 역에 기차가 멈추었을 때 내려갔으며,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물이 있는데도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분은 머리에 손을 얻고 축복을 해 주는 것 같았으며, 그들은 감사의 표시로 돈을 건넸는데 샌디가 힌두교의 성직자라고 한다. 이분은 일행도 많았으며, 일행들이 먹을 것을 계속 먹을 것과 음료수를 주었는데 이런 음식을 먹고 도난당한 여행기도 보았지만 이들은 의심이 되지 않아 인도음식을 맛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여행자들보다 인도인들의 가방에 달린 쇠사슬을 보고, 기차여행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짐작하게 했지만 우리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번 열차는 지난번 열차보다 더 열악하여 창 쪽에 한명이 더 있어 총 9명이 자도록 되어 있었다. 내 mp3로 4분의 울산 사모님들을 엮어 놓은 모습이 재미있었으며, 저녁을 먹고 맨 꼭대기에 있는 침대로 올라가니 지난번보다 에어컨 휀(fan) 소리 더 요란했는데 아들이 준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들었다.
<아잔타 석굴의 위치도를 참고 할 것>
![](https://t1.daumcdn.net/cfile/cafe/1268AB034CAAE90CBA)
[9일] 2009년 5월 5일 화요일 아잔타 관광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부사월이라는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아잔타로 향했는데 여러 사람이 배탈로 고생을 하여 걱정이 했지만 별 탈이 없었으나 아침부터는 조짐이 좋지 않아 지사제를 복용했다. 아잔타에 도착하니 우리를 만중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각자 손님을 물색하고 따라오며, 나올 때 들려달라고 자기 가게를 가리키며, 파는 물건도 보여주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품목이다. 이곳에서는 유적지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배터리로 움직이는 버스를 타고 4km에 있는 석굴에 이르며, 여행일정에 자유여행사를 선택한 것도 아잔타가 있었던 것도 한 이유이다. 이곳도 중국에서 보던 가마꾼이 있었으며, 샌디를 따라 계단을 오르면 사진으로 보았던 석굴의 입구들이 보였는데 내가 세계의 역사적인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믿기기 않았으며, 배 아픈 고통도 사라졌다. 역사를 배우면서 궁금했던 것들이 저 석굴에 있을 것을 생각하니 어서 가 보는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더운 것은 어쩔 수 없었으며, 아잔타는 현장이 쓴 ‘대당서역기’에도 나오는 곳이다. 아잔타는 지금은 건기라 물이 없는 와고르(Waghore) 냇가에 말발굽처럼 휘어진 1.5km의 계곡에 있는 70m 암벽에 만들어진 전기 석굴은 BC2세기 때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후기석굴은 굽타왕조 시대에 AD5~7세기경에 대승불교가 만들었다고 하며, 건축은 중단을 거듭하면서 800년 동안 이루어졌다고 하고, 연대가 제각각인 것은 인도는 중세이전 역사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석굴은 미완성까지 합하면 모든 석굴은 30개이라고 하며, 28개의 석굴 중에 우리가 본 것은 26번까지 이며, 나머지 2개의 석굴은 가는 길을 달라 가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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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은 크게 2가지 형식으로 사원(성소)형식인 카이티야는 9, 10, 19, 26, 29번 석굴이고, 승려가 기거하던 비하라(수도원) 형식은 1, 2, 6, 8, 12, 13, 16번 석굴이라고 한다. 석굴번호는 입구부터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졌으나 만들어진 연대와는 무관하며, 가장 오래된 것은 수투파가 있는 8~12번으로 불상은 후대에 첨가 된 것이라고 하며, 후기의 석굴은 26번이라고 한다. 어설픈 보수 작업으로 훼손된 벽화는 향후 50년도 보장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라고하며, 피해를 주리기 위해 모든 작업은 물론 카메라 플래시 사용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자들은 돈을 주면 묵인하거나 아예 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해 놓고 돈을 달라고 했으며, 배짱이 있는 사람과 눈치 것 몰래 찍는 사람도 있어, 양심의 가책 속에 몰래 몇 장을 찍었다. 석굴을 다 관람하지 않았기에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와 샌디에게 들은 것을 함께 정리했다. 1번 석굴: AD6세기경 석굴로 가장 아름다운 설굴이며, 가장 최근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곳 프레스코 화법의 그림은 쌀겨가루와 돌가루를 반죽하여 붙이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방향을 바꾸어도 사람을 따라오는 소의 머리도 있고, 인도를 상징하는 코끼리는 여기의 그림을 복사한 것이라고 한다. 유명한 ‘연꽃을 든 보살(연화 수 보살: 蓮花 手 菩薩)’ 등의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 호오류우 절(호류 사)에 남긴 금당벽화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번 석굴: 가장 큰 홀로 28개의 기둥과 불상이 있어 궁궐로 추정하기도 하며, 붓다가 1.000번을 변신했을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고, 붓다가 태어나기 전, 붓다가 태어날 때의 그림이 있다. 붓다의 가족(아버지, 어머니, 부인 야소데라)의 그림이 있으며, 이 석굴을 나올 때 입구 위에서 원숭이가 굴린 돌에 사고를 당할 번한 일이 있었다. 4번 석굴: 8가지 근심으로부터 구원받고자 여인이 미친 코끼리로부터 도망치는 그림이 있는 곳이다. 7번 석굴: 부처를 뇌성병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무칠린다 용왕의 부조가 있다. 8번, 9번 석굴: 소승불교의 사원으로 수박 위에 수투파(탑)가 있으며, 기둥 사이로 한 명씩 수도를 했다고 하며, 샌디는 대승불교로 잘 못 알고 있었다. 10번 석굴: 동인도 회사의 영국장교 존 스미스가 호랑이게 쫓겨 들어와 처음으로 유적이 발견된 방으로 네클레스 모양에 그가 기념으로 남겨 놓은 사인(서명)이 있다.
<존 스미스 서명에 1819년이 선명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8AB034CAAE90CBC) 12번 석굴:승려가 살았던 승원, 4개의 방과 돌침대가 있으며, 침대 귀퉁이에는 작은 4각 관물함의 구멍도 있다. 16번 석굴:입구에 코끼리상이 있고, ‘죽어가는 공주’와 이곳에 가장 유명한 벽화인 석가 이복동생(Narda)이 출가하자 부인(Sondari)이 상심한 아내의 그림이 있다. 17번 석굴:가장 벽화 상태가 많아 볼거리도 많으며, 천녀들과 악사들이 연주하는 그림과 가장 야한 그림도 있는 곳인데 아우랑가바드 역에도 같은 그림이 있다고 한다. 19번 석굴: ‘조각가들의 보물 상자’라고 불리는 곳으로 입구 왼쪽에는 7개의 코브라 상이 머리 위에 있는 뱀의 왕 나가(Naga)와 7개의 코브라 상이 있는 부인 나긴스(Nagins)가 최고의 조각품으로 알려졌다. 26번 석굴:우리에게 잘 알려진 6m의 누운 부처상(와불)이 있으며, 감독하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라 권유하며, 노골적으로 팁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곳을 나와 입구로 향했다. ★아잔타 석굴(ajanta caves): 아잔타 석굴은 1819년 호랑이 사냥하던 스미스라는 영국병사가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1.100년 만에 발견되었으며, 뭄바이에서 450km, 아우랑가바드 106km의 거리에 있다. ★굽타왕조(AD320-550): 쿠샨왕조의 분열 시에 북인도를 통일한 왕조이나 성립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불교가 쇠퇴하고 브라만교를 보호 육성하여 힌두교가 종교로 꽃피운 왕조인데 불교의 평등사상은 카스트제도에 맞지 않으므로 사라지게 되었다. 간다라예술에서 헬라문화가 빠지고 순수 인도식의 단정한 굽타예술은 '아잔타'에 석굴문화를 남겼으며, 이 예술은 당나라로 당은 신라에 전하여 '경주 석굴암'을 만들었고, 아잔타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 호오류우 절에 금당벽화를 남겼다.
<아잔타 석굴의 전경>
![](https://t1.daumcdn.net/cfile/cafe/1368AB034CAAE90CBB) [아우랑가바드(Aurangabad)] 아잔타 석굴 입구에 있는 점심을 먹고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잠자리인 아우랑가바드로 향하면서 오후엔 일정이 없어 시간이 많으므로 옵션으로 아우랑제브가 타지마할을 본떠 만들었다는 비비카마크바라 묘의 관람을 추천하여 가보고 싶었으나 호텔에 도착하여 더 이야기가 없어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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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식사 중에 내일 기상시간을 말하지 않아 샌디에게 물었더니 기다려 보라고 하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 전 룸메이트에게 다시 기상시간을 물어보다가 내일 일정은 엘로라에 들리지 않고 뭄바이로 바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려하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물어보지도 않고 일정을 바꾼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엘로라 들리려면 아무래도 기상시간이 더 빨라야 할 것 같아 샌디 방으로 찾아 갔으나 없어서 그냥 잤다. ★아우랑가바드: 인도중서부 마하라슈트라 주 행정중심도시로 1610년 말리크 암바르가 건립하고 ‘카드키 (바위가 많은 곳)’라고 했으나 무굴제국황제 아우랑제브가 이름을 아우랑가바드로 바꾸었다. 북쪽으로 아잔타 구릉지대에 석굴사원인 엘로라와 아잔타 사원, 아우랑제브의 능묘, 다울라타바드의 요새 등이 관광지로 유명하며, 인구는 약 30만 명 정도이다.
[10일] 2009년 5월 6일 수요일 엘로라와 뭄바이 관광 [다울라타바드(Daulatabad)] 아침에 샌디를 만났을 때 항의를 했더니 엘로라를 들린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샌디가 어제 기상시간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은 엘로라를 들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고, 이것을 허락한 사람들은 울산 팀이다. 보지는 않았지만 엘로라는 아잔타와 비슷하여 볼 필가 없을 것이고, 뭄바이의 도비가트를 자랑하면서 그것을 보려면 일찍이 뭄바이에 도착해야 한다고 하면서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중 가이드 대신 샌디가 입장료 80달러 챙겼을 것이고, 시간의 여유와 혹시 유류비도 챙겼는지 모르겠다. 같은 울산 사람으로 울산 팀에게 미안했으나 일찍이 알았더라면 일찍이 나섰을 것인데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노랑풍선 TC 들은 100%의 찬성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아우랑가바드에서 13km 쯤 가면 ‘다울라타바드’라는 요새가 나타나며, 산꼭대기에는 요새도 보이는데 이 요새에 대하여 샌디가 간단하게 이야기하였으나 기억하지 못해 인터넷 것을 옮겼다. ★다울라타바드: 12세기 야다브(Yadav)왕조의 왕인 빌라마(Bhillama)가 만든 것이라고 하며, 델리의 술탄인 모하메드 빈 투그라크(Mohammed Bin Tughlaq)가 도시의 미래라는 뜻의 '다울라타바드'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다울라타바드'의 요새>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8AB034CAAE90DBD) [엘로라 석굴(Ellora Caves)] 엘로라 석굴은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의 유적지가 3개의 유적지가 유일하게 한곳에 있다고 하였는데 3종교의 뿌리가 같으므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성채에도 뿌리가 같은 유태교, 기독교, 회교가 한자리에 있다. 엘로라에 도착하면 정면에 보이는 것이 16번 석굴사원인 카일라쉬(카일라사나타) 힌두사원으로 유적지를 관람할 때는 어느 것이 어느 종교 유적지인지도 모르고 따라 다녔으며, 석굴번호는 더욱 몰랐다. 설명은 기억도 없지만 기록한 것도 무슨 말인지 몰라 인터넷과 사진을 비교하여 겨우 찾아보았으나 찍은 사진도 얼마 되지 않아 그마져도 힘들었다. 우리가 처음 관람한 곳은 2층으로 된 32번 석굴인 '인두라 신의 회의실'이라고 불리는 자이나교 사원으로 먼저 2층으로 올라가 관람을 했는데 무소유의 교리로 나체상이 많았다. 자이나교 남자들은 공작새깃털로 만든 부채로 성기를 가렸다고 하며, 여인들의 석상들은 관능적인 자태와 유방을 강조하여 매우 선정적이지만 일반 신상은 불교신상과 같아 구별하기가 어렵다. 특히 좌상은 구별이 더 힘드나 일반적으로 불상은 옷을 입었고, 자이나상으로 구별한다고 한다. 천장에는 커다란 꽃 조각이 석굴은 힌두교 사원으로 머리 위에 7마리 코브라가 있고, 그 주위에 천사가 새겨진 시바 신상이 있으며, 석상 머리위에 쌀 나무 조각이 많이 보인다. 쌀 나무아래서 수행하는 석상도 있고,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석상머리 위에도 있으며, 줄을 이용하여 문을 닫고 열었다는 계단으로 내려와 미완성의 코브라를 보았다.
시바 신이 화가 나서 춤을 추면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신상도 있었는데 시바 신을 부르는 소리는 입을 다물고
코로 음~ 소리를 길게 낸다고 한다. 요가의 기본이라고 하는 샌디의 음~ 소리를 들은 후 연꽃이 쌓여 있는 상단 위에 여신상은 4마리의 코끼리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 신상은 3번째 보호자의 신의 부인으로 돈을 상징한다고 한다. 더디어 그 웅장함에 입을 다물지 못하는 16번 카일라 쉬(카일라사나타) 사원은 하나의 바위를 파내어 방도 만들고 조각도 만들고 계단도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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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habharata(마하바라타)라고 쓴 표지가 있는 작은 조각들은 인도의 2대 서사시를 조각한 것이라고 하며, 마하바라타는 서쪽이야기이고, 라마 신(보호자)의 라마야나(Ramayana)는 동쪽이야기라고 샌디가 말했다. 중앙 사원은 지붕과 외벽전체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고, 원형이 잘 보존 된 탑도 있으며, 이 사원을 한 바퀴 돌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 가장 좋은 위치의 입구 안에는 커다란 시바 신(남근 상)이 안치되어 있다. 시바 신의 자가용 소도 있으며, 상단의 지붕은 우주를 상징한다고 하며, 이 사원을 위에서 보면 마차모양인데 시바 신의 고향인 히말라야 카일라 쉬 산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샌디는 시크교도 특징으로 1. 모자 2. 수염. 3. 팔찌 4. 작은 칼로 시크교도들은 특별히 칼을 허리에 차고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인도만 그런지 세계가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믿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이곳의 사원이 많이 파괴된 것은 킬지(힐지) 왕조(1290-1320)의 알라우딘 할지(재위 1296-1316)가 파괴했다고 하였는데 이런 문화적 파괴를 ‘반달이즘’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힌두교의 가정에는 100%가 ‘루시’라는 나무로 만든 신을 모셔야 하고, 여인들은 새벽 5시쯤에 일어나 목욕을 한 후에 기도를 꼭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전에 읽은 책에는 남편을 위해 금식도 한다고 한다. 울산 팀이 꼭 도비가트를 봐야 한다며, 나머지 유적지를 보는 것을 양보하라고 하여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그 정도는 양보해야 도리인 것 같아 바로 뭄바이로 향했다.
<큰 사진: 16번의 카일라 쉬 사원의 일부이고, 작은 사진: 머리에 위에 쌀 나무가 있는 자이나교의 유적>
![](https://t1.daumcdn.net/cfile/cafe/17564E054CAAEC3E24) ★마하바라타: 인도의 2대 서사시의 하나이며, 범어로 '바라타 왕조의 대서사시'라는 뜻이고, BC1400~ 1000년으로 추정되는 실제 사건을 이야기 한듯하다. 친척이었던 카우라바가(家)와 판다바가 사이에 벌어졌던 권력쟁탈전이 한 영웅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수많은 전설과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엘로라 석굴: 아우랑가바드 북동쪽29km, 엘로라 부근 2km에 걸쳐 있는 장엄한 1~12번 석굴은 쇠퇴하던 불교유적으로 굽타시대(6~8세기)의 것이며, 중앙 12~29번 석굴은 전성기를 맞았던 힌두교유적이다. 북쪽 400m에 있는 30~34번 석굴은 인도3대 종교였던 자이나교 유적이며, 라슈트라쿠타스(라스뜨라꾸따) 왕조의 크리쉬나 1세(재위 757-783)가 힌두 신 시바를 위해 756년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사원은 100년 정도 걸려서 완성되었다고 하며, 86m의 깊이로 파낸 돌만 20만 톤이고,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가 넓으며, 높이는 1.5배라고 하는데 길이는 50m이고, 높이 29m이라고 한다. 인도에 12개 밖에 없다는 죠띠링감(자연 남근석)이 있다고 하는데 사원 중앙에 있는 시바 신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자연석으로는 보이지 않아 다른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10번 석굴은 목조의 형식을 가지고 있어 일명 '목수의 동굴'이라고 하며, 유일하게 짜이띠야(사리탑)이 있는 곳이고, 12번 석굴은 3층 구조의 사원으로 '띤 탈'이라고 부른다고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2층에는 마하비라(창시자)의 상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샌디가 첫 번째로 믿었다고 하는 조각이 아니 런지?
<엘로라의 가장 규모가 큰 카일라쉬 힌두사원, 사진 오른편이 '마하바라타' 서사시>
![](https://t1.daumcdn.net/cfile/cafe/1768AB034CAAE90DBE) [뭄바이(Mumbai)로 가는 길] 어제 엘로라를 관람하게 되어 있었으나 문을 열지 않는 날이라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지금서 알았지만 오늘 엘로라를 관람한다고 해도 개장시간 때문에 시간을 앞당기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휴게소를 들렀을 때 멀리 현재라고 쓴 건물이 보여 샌디에게 물었더니 현대자동차 공장은 첸나이에 있다고 하며, 이곳은 잘 모른다고 하였는데 옆 사람 휴대폰에 ‘라자누루 나갈’이라고 표시 되어있다. 뭄바이로 들어가는 6차선 고속도로는 지금까지 달리던 고속도로와는 차원이 달랐으며, 우리 차의 속도는 122km라고 하였는데 이런 고속도로의 터널에 아직도 조명등이 없었다. 고속도로 휴게소 변소 앞에는 잡상인들이 많았는데 변소도 여러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으며, 요르단처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사고 난 차량들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로라 윌라’는 아름다운지역답게 좋은 집들도 많이 보였고, 이곳은 부자들이 많이 산다고 하였으며, 고속도로 아래로 보이는 철도역이 문화유산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도의 세계문화 유산 중에 ‘다르질링 히말라야 철도’가 있기는 하지만 이 철도는 인도 북동부 서벵골 주 다르질링 (Darjeeling)에서 실리구리(Siliguri)까지 운행하는 철도이다. 그럼 철도역이 인도의 문화유산이라면 모르겠으나 이곳과는 거리가 너무 멀지만 다르질링 지역의 행정구 안에는 아주 작은 시킴왕국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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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킴왕국은 1975년 주민투표로 97%의 찬성으로 인도와 통합되어 가장 작은 시킴 주가 된 나라인데 이 나라의 젊은 왕 기우루마는 1789년 한 번도 본적 없는 티베트의 공주를 아내로 맏이 하였다. 공주는 워낙 추녀라 보고 기절 할 번하였는데 그녀를 돌려보내면 티베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살자니 고통이라 할 수 없이 왕은 거지로 변장하여 궁을 떠난 후에는 돌아오지 않았다. 왕 없는 궁전을 지키던 그녀도 결국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반대되는 이야기로 에드워드 8세의 이야기는 뭄바이의 인도 문에서 다시하기로 한다. 뭄바이로 들어서자 석양은 처음 보는 아라비아 해(바다)를 아름답게 연출하였고, 바다 위에 세워진 송전탑의 선로가 차를 따라 달려 왔는데 도시 가운데로 들어서자 도로는 막히기 시작한다. 뭄바이의 인구는 아무도 모르나 2.300만명 정도이라 하며, 인도의 산업도시이지만 빈부격차가 너무 커서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고, 미아러(몸 파는 사람)도 많다고 하며, 고자는 인도도 같은 뜻이라고 한다. 얼마나 범죄 조직이 심한지 부자 동네에서 사는 사람은 가난한 동네에 세금을 내야 살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 샌디가 면피로 하는 말인 줄은 몰라도 가난한 사람들로 행복하게 산다고 한다. 뭄바이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라는 ‘다라와이’는 과연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 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한데 판자 집의 미로는 들어가면 찾아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뭄바이는 인도의 ‘헐리웃’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영화를 제작한고 하며, ‘다라와이’ 동네를 지날 때 ‘슬럼독 밀리어네어’ 영화를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2008)는 아카데미 수상은 11개를 받은 반지의 제왕의 다음으로 8개 수상은 하였고, 전 세계 영화상 88개를 석권한 유명한 영화이다.
<아라비아 해의 석양(뭄바이)>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64E054CAAEC3E25)
[도비가트(Dhobi Ghat)의 집념] 왜? 그렇게 도비카트에 대해 집념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샌디가 너무 설명을 잘했던지 아니면 인간의 삶 중에 가장 비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많이 하던 빨래를 세계의 가장 규모가 큰 빨래터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그럴까? 이유는 몰라도 타지마할이 ‘못 보았기에 말 못하고, 보았기에 말 못한다.’라고 한다면 모로코의 가죽염색 공장처럼 ‘못간 것에 실망하고, 보았기에 실망한다.’고 했는데 도비가트도 그럴 것 같았다. 도비카트는 오전에 가면 빨래하는 모습만 보고, 오후에 가면 빨래 널어놓은 것만 볼 수 있을 것이며, 빨래하는 모습도 단순하지만 빨래 널어놓은 것을 못 본 것도 아니며, 다만 규모가 커다는 것뿐이다. 이곳은 시멘트로 만든 물탱크와 함께 만들어진 경사진 빨래판 앞에서 도비가 빨래를 내리치는 모습과 빨래를 널어놓은 것을 바라나시에서 보았는데 뭄바이는 하루 100만 벌 정도의 빨래를 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도비가트의 카트는 강가의 계단의 뜻이나 강가에서 하던 빨래나 목욕을 공동으로 하는 곳을 말한다고 하는데 도비가트는 도비들의 삶 때문에 같은 인간으로 마음 아픈 관광지이다. 도비는 빨래를 꾼으로 카스트제도에서 상위계층은 빨래를 하지 않기에 이들의 빨래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도비이고, 태어날 때부터 '빨래꾼' 신분이 된다. 저녁식사를 예약한 식당을 지나면서도 포기하고, 도비카트를 보기 위해 오로지 달려왔으며, 시내지리를 잘 아는 대리기사가 운전을 했지만 그도 찾지 못하고 밤만 깊어갔다. 찾지 못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밤이라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며, 인도 문으로 향했는데 지금까지 소모한 시간을 감안 하면 엘로라를 안 들러도 도비카트를 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스페인 가이드 말처럼 ‘못보고 후회하는 것과 보고 후회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는데 어쩌거나 보고 후회하는 것이 좋았을 것인데 잘 못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실망할 것을 생각하니 더욱 미안했다.
<큰 사진: 바라나시 호텔 부근에서 본 도비카트, 작은 사진: 빨래 건조대>
![](https://t1.daumcdn.net/cfile/cafe/12564E054CAAEC3F28) [인도 문(Gateway of India)] 인도 문을 찾는 것도 헤매는 것 같았는데 샌디는 인도 문 앞에는 타지호텔에서 2008년 11월 27일 폭탄테러가 있을 때 현장에 있었다고 하며, 35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25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델리에 있는 인도 문은 위령탑이고, 뭄바이의 인도 문은 관령탑(기념탑)이라고 하며, 타지호텔은 당시에 총격전이 있었던 탄흔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인도 문 광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더위를 식히며, 휴식을 즐기고 있었고, 밤에 본 아라비아 바다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끝으로 하고, 이번 여행일정을 모두 마쳤는데 마지막 관광지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여 가장 아쉬움이 남았으며, 인도의 마지막 식사를 하려고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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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1911년 영국 왕 조지 5세 내외가 인도를 방문한 기념으로 세워진 뭄바이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타지마할 호텔 앞 뭄바이만의 아폴로 부두에 있는 높이 26m 거대한 문이다. 16세기 구자라트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문 양옆에 보조 문이 있고, 주변에는 공원이 있어 시민의 휴식처이다. 인도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시바지의 상이 말 위에서 영국 침략의 상징물인 인도 문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뭄바이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이곳에는 일류 레스토랑과 토산품점이 늘어서 있다. 뭄바이 북동쪽 9㎞ 떨어진 엘레판트 섬(Elephant Island)으로 운행하는 배가 출발하는데 이 섬에는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엘레판타 동굴이 있다. ★조지 5세(1910-36): 아버지의 에드워드 7세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1차 대전 중에 싸운 독일의 빌헬름 2세와는 고종(4촌)으로 할머니가 되는 빅토리아 여왕 즉 장녀 비키(큰 고모)가 낳은 아들이 빌헬름 2세이고, 조지 5세는 친손자로 4촌(고종, 이종)끼리 1차 대전의 주역으로 서로 가족 간에 처절하게 싸웠다. ★에드워드 8세(1936.1.20-12.10): 조지 5세의 아들이며, '사랑을 위하여 황실도 버리고..'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그의 사랑은 세기적 로맨스로 유명해졌고, 세계의 화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2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인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하여 영국 왕 가운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인물로 12월11일 저녁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라고 방송한 후에 그날 밤 오스트리아로 떠났고, 심프슨 부인이 최종 이혼판결을 받을 때까지 그녀와는 떨어져 있었다. 1937년 에드워드는 프랑스 샤토드캉데에서 영국국교회 신부의 주례로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항상 패션 감각과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사람은 부유할수록 좋고 몸은 날씬할수록 좋다'는 말을 하였다고 전해지며, 그의 유일한 지지자는 당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윈스턴 처칠이었다. ★엘레판타 동굴(Elephanta Caves): 작은 엘로라라는 엘레판타 동굴은 뭄바이에 인접한 오만해(海)에 있는 섬으로 시바 신에 대한 숭배를 바위에 새긴 암각예술 컬렉션은 높은 종교적 믿음을 가장 잘 표현한 인도예술 특징 중의 하나이다. ★타지마할 호텔: 경제수도 뭄바이의 고급호텔로 대부호 타타 그룹의 창시자인 타타가 젊은 시절 인도인이라 호텔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난 적이 있어 훗날 돈을 벌어 서양인들에게 보란 듯이 최고급으로 지어 인도인들이 마음대로 출입하게 한 호텔로서 인도인의 자존심을 갖게 하는 호텔이다. 이 인도인의 자존심에 폭탄을 던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도 문 앞에 있는 타지마할 호텔>
![](https://t1.daumcdn.net/cfile/cafe/20564E054CAAEC3E27) ★뭄바이(Mumbai): 인도반도 서해안 중간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인구 1.300(05년)만 명의 최대도시로 인도역사의 선구자로 1885년 인도 독립운동의 모체인 인도 국민회의가 열렸다. 인도를 대표하는 대부분 기업들의 본사가 있어 인도 경제를 지탱하는 최대의 상업도시로 경제의 중심지로 최근 인도 경제 세력들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성장과 더불어 빈부의 차가 극심하여 많은 극빈자들이 가트코파르나 안데리 부근에 빈민가를 형성하여 폭력배들의 소굴로 이용되고 범죄의 온상으로 변해가고 있어 인도의 고민이 되고 있다. 인도나 뭄바이가 있는 마하라슈트라주의 7,900만 명도 70%가 농민이지만 가뭄을 만나면 황폐한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몰려 극빈자들이 되는데 1973년 가뭄으로 300만 명이 뭄바이로 몰려들었다. 본래 섬이던 뭄바이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 30-40층에 달하는 빌딩들 짓지만 이곳에 거주자들은 고소득(교수, 의사, 사업가, 연예인 등) 만 살 수가 있고, 가난한자들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1995년 봄베이에서 뭄바이로 도시 이름을 바꾸었지만 현지인들 모두가 지금도 ‘봄베이’를 고수하고 있다. [뭄바이 공항] 늦은 시간에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공항으로 향했는데 비행기 영수증이 없으면 아예 공항출입을 할 수가 없었으며, 갑자기 영수증을 찾으니 두었던 자리에 있지를 안했다. 남들은 다 들어가고 영수증은 찾을 길 없어 앞이 캄캄했는데 검사원이 승객명단이 적힌 종이 몇 장을 주며, 이름을 찾아보라고 하여 다행히 이름을 찾아내어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늦게 까지 옆에서 걱정해주던 대구 사모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으며, 뒤 늦게 일행을 찾았으나 일행들은 벌써 보딩 패스를 마친 상태여서 안 보였다.
혼자 보딩 패스를 하려고 하는데 영수증을 또 보자고 하여 또 앞이 캄캄해졌지만 정신 없이 찾으니 여권을 넣어
두었던 자리에 있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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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감격은 말할 수가 없었는데 여권만 꺼내고 뒤에 있는 영수증을 보지 못했던 것이지만 더 한심한 것은 여권과 함께 미리 챙겨둔 것을 기억을 하지 못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다. 이제는 기억력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 짜증스럽지만 같이 걱정해 줄 일행도 없다는 것이 더 외로웠는데 호주에서는 남의 영수증도 잘도 찾아 주었건만 막상 내가 당하니 도와 주는 사람도 없고, 정신도
차릴 수 가 없었으나 좋은 경험을 한 것으로 위로로 삼았다.
뭄바이 공항은 1995년 4월 20일에 카이로로 가는 도중 경유지로 밤 1시에 들려 내렸던 기억이 있는
곳으로 기내 짐칸의 문이 안 열려 인도 기술자도 열지 못한 것을 내가 열었던 기억도 있다.
공항에는 아이를 가진 노숙자 같은 차림의 여인도 기억이 있고,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과 깨끗지 못한
공항이었지만 정감이 가는 공항이어서 다시 오고 싶은 공항이었는데 두 번이나 힘든 추억만 남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함께 여행하는 인도 여자 아이와 좌석을 같이 하며,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11일] 2009년 5월 7일 목요일 집으로 인도 속담 중에 ‘델리는 멀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하는데 같은 아시아권이지만 인도는 생소하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여 조금은 신비한 나라로 생각했던 나라이다. 그들의 커다란 신분격차와 또 빈부격차 그러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며, 불만 없이 사는 나라로 유적도 많고 볼만한 풍경도 많으리라 생각해서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이었다. 많은 여행기에는 매력 있는 나라라고 표현하여 기대를 했지만 젊은 사람들이 배낭여행을 하면서는 그렇게 느꼈는지 몰라도 나이든 여행자에겐 이 같은 일정으로 여행하면서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그리고 여행자들에게 편리를 생각해서 되도록 신발을 신게 한다 던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던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못 사는 나라의 못난 자존심으로 보였다. 4대 문명의 발생지로 긴 역사를 가졌지만 세계에 공헌한 것이 없는 인도, ‘인도를 잃더라도 셰익스피어를 잃고 싶지 않다.’는 카알라일의 말이 명언으로 대우 받는 것도 무관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존심을 짓밟은 카알라일의 말을 가장 싫어하겠지만 나도 인도를 한마디로 정의 하라면 ‘거지같은 나라가 거지같은 짓만 한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인도 여행에서 그렇게 느꼈다. 이번이 48번째 나라의 여행이 되지만 이렇게 마음 안 드는 것은 너무 기대를 가져서 그런 것일까? 이렇게 호의적이 못한 것은 나만 그런 것인지? 아니 나보다 더한 사람도 있다. 그는 ‘배낭에 담아온 인도’의 여행기를 쓴 사람의 부인으로 부인은 ‘인도에 하루라도 더 있기 싫다.'고 하루 종일 울었던 사람이다. 이 여행기에 '인도는 돈이나 백이 없으면 못사는 나라로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나라'라고 했으며, 여행기에는 기차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대기자로 기다리거나 고급 칸으로 일수록 빈자리가 있으므로 검표원을 통하여 좌석을 구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 가이드 말 처럼 표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고 하며, 우리가 탄 좌석이 제일 좋은 좌석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탄 기차는 다 2등 칸으로 1등 칸은 4명이 1실을 쓰도록 칸막이도 있다고 하였는데 알았으면 불평을 하였겠지만 몰라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신발을 많이 벗은 것도 처음이고 또 사진도 이렇게 찍지 못하게 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그러면서도 돈을 요구하여 찬란한 유적들의 감명이 반감되는 나라이기도 했다. 여행자들을 봉으로 여기는 가이드, 더운 날씨, 나쁜 공기, 구걸하는 많은 사람들, 물을 사 먹어도 생기는 배탈, 복잡하고 나쁜 도로, 힘든 기차, 많은 인파, 더러운 환경, 시끄럽고 시설 나쁜 호텔 등은 여행을 힘들게 했다. 힘든 남미 여행은 그래도 힘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유적이나 자연이 있었지만 무지한 나로서는 타지마할, 거울궁전, 엘로라의 카일라 쉬 사원을 빼놓고는 이렀다할 만한 곳이 없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 같다. 여행 중에 시간이 부족하여 일행들과 즐거운 시간을 못가지기도 했지만 단체가 많고 홀로가 3명인데다 2명은 여자이라 긴 이동시간에도 ‘낄 곳 없는 것’도 또 한 이유가 되겠다. 봄꽃에 대한 기대와 건기 그리고 낮이 긴 것만 염두에 두고 여행날짜를 선택한 것도 실패 중에 하나로 보고 싶었는데 유적지를 빼고 좋은 점을 찾으려 해도 쉽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어쩌거나 이번 여행으로 장거리와 날짜가 긴 여행은 일단은 끝낸 셈인데 힘들게 쓴 일기이지만 이 지루한 여행일기를 읽은 사람에게 그 인내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며, 대단히 고맙습니다.
<머리만 보이는 많은 사람들, 차도는 없고 인도만 있는 인도, 공해와 소음, 이것이 인도의 모습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64E054CAAEC3E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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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인도는 정보만 들어도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안네요
잔타르 만타르(Jantar Mantar)에서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