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성여왕 때의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백제의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잘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하였다. 배가 곡도(鵠島)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는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하니, 섬에 있는 신지(神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래서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으니, 못의 물이 한 길이 넘게 치솟았다. 그 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양패가 잠에서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말하고,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하고 물으니, 여러 사람이 말했다. "나무 조각 50개에 각각 저희들의 이름을 써서 물에 가라앉는 것을 보고 제비를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패는 그 말대로 하였다. 군사 거타지의 이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었다.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거타지에게 말했다. "나는 서해약(西海若, 서해 바다의 신)이오. 늘 해가 뜰 때면 중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타라니의 주문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도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 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 먹곤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반드시 또 올 것이니 그대는 그 중을 활로 쏘아 주시오." 이 말을 들은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長技)입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그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어 먹으려 하였다. 이 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하며 말했다. "공의 은덕으로 내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이 말을 들은 거타가 말했다. "따님을 저에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를 두 마리의 용이 호위하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신라의 사신이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하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거타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하여 함께 살았다. |
이 이야기에서 당나라에 가는 신라 사신 양패(良貝) 일행은 '곡도(鵠島)' 즉 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 가지 못하고 10여 일을 묵는다. 양패가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대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섬에 남겨 두자 문득 순풍이 일어 황해를 계속한다.
이 서해신은 중으로 변신하여 자기의 가족을 잡아먹는 늙은 여우를 물리치기 위해 양패가 데리고 가는 군사 중 활을 잘 쏘는 거타지를 원했던 것이다. 서해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었던 양패는 활 솜씨를 발휘하여 늙은 여우를 물리쳐 서해신을 도와준다. 도움을 받은 서해신은 자기를 도와준 양패에게 딸을 아내로 주어 은혜에 보답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백령도는 신라 때에 중국과 왕래하는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사신양패는 백령도에서 서해신에게 거타지를 제물로 바치고 순풍을 얻어 항해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백령도 지역에는 오래 전에 항해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백령도에는 「거타지설화」 외에도 「용난 개울」, 「용이 올라간 참샛골」,「두 용이 싸운 용기포」,「용의 승천과 용신제」 등 용에 관련된 전설이 많이 있다. 황패강 교수는 학술조사를 위해 백령도에 다녀간 뒤에 쓴 기행문에서 "거타지 이야기에서 꽃으로 변하는 용녀는 「심청전」에서 연꽃으로 변하는 심청과 흡사하다."고 밝힌 바 있다.
거타지 설화와 「심청전」은 지리적 배경이 같고, 내용상으로 공통 되는 점도 있어 서로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고려의 대호문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고려 고종 7 (1220)년 이세화가 백령진장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고을에는 옛날부터 향교가 없었는데 이세화가 처음으로 향교를 창건하고 아전들의 자제를 모아 글을 가르쳤다.
이들이 몇 해 안 가서 모두 인재가 되어 과거에 응시한 자까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온 고을이 그를 사모하였으며 여러 번 글을 올려서 그의 아름다운 행동을 포장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백령도에 유교를 전해 준 사람과 시기를 말해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백령도와 관련된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이를 종합해 보면 백령도는 국방과 관련되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나 땅이 협착하여 진장을 포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보면, 고려 태조 때에는 대광(大匡) 유검필을 이 곳으로 유배 하였다가 불러들였다고 하며, 회종 때에는 최충헌이 그의 생질 박진재를 이 곳으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였다고 한다. 고종 때에는 김중구(金仲龜)와 추밀부사(樞密部使) 김경손을 백령도로 귀양보냈 다가 죽였으며, 충렬왕 때에는 김흔과 이분희를 백령도에 유배시켰다고 한다. 이로 보아 고려 때에는 백령도가 유배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령도가 유배지로 이용될 정도로 교통이 나쁘며, 모반할 수 없는 악조건을 갖춘 곳이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시대의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에는 왜구를 포함한 외부의 적들이 백령도를 침범한 일, 이에 대한 백령도의 대응 방식, 그리고 지리적 조건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도 백령도는 군사적으로 요충지이지 취약 지역이며 척박한 곳이라 하였다.
백령도는 조선 시대에도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조선 광해군 8(1616)년에 정인서가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광해군 12(1620)년에는 문신 이대기(李大期)가 정인홍 사건에 연루 되어 백령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유배되어 있는 동안 당시의 백령도 풍물을 기록한 『백령도지(白翎島誌)』를 남겼다. 이 문집에는 백령도의 지리적 특징과 지형, 산업, 국방, 풍속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는 백령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갑오경장 직후에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상소하던 사람들이 백령도로 귀양왔다. 그 중 공주 사람 김성진은 중화동에 사는 허득(許得)에게 성서를 전하고, 함께 힘을 합하여 중화동 교회를 세웠다.
백령도의 행정 조직은 조선 시대에는 군사 조직과 겹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섬의 최고 수장(首長)인 첨사는 이 섬의 사령관 격인 행수군첨절제사로 삼품 당상관인 문무 겸직의 전제관이었다. 섬을 다스리기 위해 행정구역을 진내면(현재 진촌리 일대), 북면(북포리와 연화리 일대), 남면(남포리 일대)으로 나누고 각각 풍헌 내지 향장을 두었다. 이것이 최말단 조직이 되어 행정을 보좌하였다.
첨사는 병조에 속한 벼슬로, 왜적과 해적으로부터 섬을 방어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첨사는 절충장군을 비롯한 이방·호방·병방으로 두어 섬을 통치하였다. 첨사는 죄인을 먼저 참하고 뒤에 보고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첨사가 집무하던 진촌에는 섬을 방어하기 위해 토성을 축성했던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또 첨사 밑에 필요한 관원을 현지에서 뽑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역대 첨사 중에는 주민의 재물을 빼앗고 횡포를 일삼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선정을 베푼 첨사도 있었다고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선정비는 모두 여섯인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두 진촌리 남산의 반공유격전적비가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고종 31(1894)년 갑오경장 때 진(鎭) 제도가 도장(島長) 제도로 바뀌면서 백령도는 장연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도장에게 군사권은 주지 않고, 행정·사법권만 주어 섬을 다스리게 하였다. 19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면장을 두게 되었다. 면장은 행정만을 수행하고, 순사 주재소가 설치되어 경찰 행정 책임을 수행하게 되어 행정·사법의 양권이 분리되었다.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자, 장연군에 속하였던 백령도는 옹진군 백령면 으로 남한에 속하게 되었다. 6·25 사변 후에 생긴 휴전선으로 옹진반도에 있는 옹진군의 대부분이 북한의 지배에 들게 됨에 따라 백령도·대청도·소청도를 포함한 백령면은 경기도 옹진군게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7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령면에 속했던 대청도와 소청도가 대청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그래서 백령도 1개 섬이 옹진군 백령면이 되어 내려오다가 1996년 3월 1일자로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개
백령도는 동경 124도 53분, 북위 37도 52분 지점에 위치한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의 섬이다. 이섬은 면적 45.84제곱킬로, 해안선의 길이 56.8킬로, 최고높이 해발 185미터로 우리 나라 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222.2킬로 떨어져있는 이 섬은 북한의 황해도 장연과는 직선 거리 10킬로, 장산곶과는 15킬로 떨어져 있다. 백령도 서북쪽의 두무진과 북한의 장산곶 중간에는 만고 효녀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위해 뱃사람에게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 바다에 빠졌다는 인당수가 사나운 물결을 꿈틀거리고 있다.
백령도의 남쪽에는 인당수에 빠졌던 심청이 용궁에 갔다가 타고 온 연꽃이 조류에 밀려 왔었다는 연화리와 그 연꽃에 걸려 있었다는 연봉바위가 있다.
이섬은 동쪽과 북쪽으로는 북한의 황해도 옹진반도와 장연군을, 남쪽으로는 대청도를 마주 보고 있다. 이 섬의 북쪽에는 이섬의 최고 지점을 이루는 산이 있고, 동쪽 해안선은 작은 만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항해 중에 어려움이 생기면 피난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이섬은 신라 시대부터 중국과 배로 왕래할때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
백령도는 제4기 빙하기 때에는 황해도 옹진반도와 연결되었던 평원상에 돌출한 잔구상의 지형으로 해수면의 상승으로 저지가 침수되어 잔구의 윗부분이 남아 육지와 분리되어 섬으로 된 지형이다. 섬전체가 ㄷ자형으로 섬의 동쪽이 만입지형의 갯벌중간대를 이루어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 만입지형의 넓은 뻘이 최근에 간척되어 농지와 저수지로 변하고 있다. 해안선은 동부의 만입지형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단조로운 해안선을 이루고 암석해안과 사반해안이 교체되어 발달하였다. 섬의 동북족에 위치한 용기포와 용기원산은 원래 섬이었으나 연안사주의 발달로 백령도와 연결된 전형적인 육계도이다.
용기포에서 남서방향으로 3km 정도 발달된 사곶해수욕장은 세립질의 규사로 이루어져 물이 잘빠지고 단단하여 천연 비행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최근 진촌리 앞 갯벌을 간척하기 위하여 방조제를 쌓은 후 실트(모래와 점토의 중간입자)질의 입자가 유입되기 시작하여 특성이 변하고 있다. 진촌리앞 만입지형내에 위치한 갯벌은 백령도에서 보기드문 뻘지대이나 1991년 부터 농지조성과 수자원 확보를 위하여 간척지개발사업이 시작되어 1991년 완공되었다
옛날 황해도 어느 마을에 열심히 글공부를 하며 지내는 선비가 있었다. 매우 가난하게 사는 선비의 집가까이 사또의 거처가 있었다. 사또는 딸하나를 두었는데 그 선비가 사또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사랑했다. 그래서 선비는 밤이면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가 사또의 딸과 깊은 정을 나누곤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사또가 가난한 선비를 미워하여 그 고을에서 쫒아내면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라고 했다. 그 선비는 헤어지는 마당에 사또의 딸과 만나서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때가 있을 것이다. 꼭 만날 날이올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자 그런날이 머지않아 올것이니 참고 기다리자."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
그 선비는 어느 섬에 도착하여 역시 글공부를 계속하면서 사또의 딸을 그리워하고 만나게 될날을 기다리며 지냈다. 하루는 하얀 학이 울안에 종이 한 장을 떨어뜨렸다. 얼른 그 종이를 주워 읽어보니 그 아가씨의 사랑의 고백을 담은 연서었다. 그래서 다른 종이에 "여기가 어느 지점이다"라고 적어서 그 학에게 주었다. 그학은 길이 잘든 학이었던지 다지 그것을 물고 사또가 사는 집으로 가서 그 딸에게 전해 주었다.
학이 전해준 쪽지를 받은 사또의 딸은 그 선비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함께 잘살았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그 섬을 "흰 백자, 날령 자를 써서 백령도라 불렀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심청전과 내용은 흡사하다. 그러나 심청이가 연꽃으로 환생한 것이 아니고 심청을 바다에 빠뜨릴 때 중국상인들은 배에 있던 비단으로 심청의 온몸을 꽁꽁싸서 빠뜨렸고 심청이는 비단덕분에 바다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류에 의해 황해도 덕돔포라는 포구에 떠밀려가서 임금이 아니라 그마을 원님에게 불려가 원님의 아들과 혼인을 하고 맹인잔치도 임금이 아니라 그마을 원님이 열어 아버지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주요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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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5년부터 지역주민들이 건립을 추진해온 ‘심청각’은 각계의 고증을 구하여 고전소설[심청전]의 주무대인 백령도에 1999년 10월 21일 세워지게 되었다.20년의 고증작업 및 행정적 준비기간과 4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진촌리 산 146-10에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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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무진 선대암은 백령도 북서단 해안에 약 400m 거리에 걸쳐 기암절벽이 발달하여 있는 지대를 지칭한다. 두무진 일대의 지질은 원생대의 상원계에 속하는 세립질 규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암은 대체로 백색 또는 담회색을 띠고 있다. 규암들은 해식작용에 의하여 해안에 따라 약 30~40m 높이의 절벽 또는 바위기둥을 이루고 있고 해식동굴도 보인다. 해변에는 자갈들이 널려 있는데 일부 규암은 풍화작용에 의하여 그 표면이 약간 붉은 색을 띠고 있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그후 러.일 전쟁때 이곳에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건설되었는데 지금도 콘크리트 흔적이 남아있다. 그때무터 명칭이 두무진(頭?津)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두무진 뱃터에서 유람선을 타고 포구를 빠져 나가자마자 왼편으로 기괴하고 아름다운 바위들이 마치 사열을 받은 듯 늘어서 있는데 선대암,형제바위,코끼리바위,장군바위,촛대바위 등이 그 이름들이다. 유람선을 타고 남쪽해안을 따라 돌면 수억년 동안 바람과 비,운이좋은 날은 코끼리바위를 지날 때 물범이 헤엄치고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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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동남쪽 진촌리 사곶마을 해변에 위치한 사곶의 사빈은 주로 석영으로 구성된 모래가 펼쳐진 길이 2km,폭0.2km(썰물시)의 천연해수욕장이다. 단단하게 다져진 고운 백사장이므로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달려도 바퀴가 모래에 빠지지 않는다.그런이유로 6.25전쟁때에는 천연비행장과 유엔군 작전 전초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천연비행장은 이탈리아 나폴리와 더불어 전세계에 두곳밖에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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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포와 중화동 포구 남쪽해안은 우리나라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둥근 자갈들이 해안을 덮고 있는데,남쪽으로 1km정도 형성된 이곳이 바로 ‘콩돌해안’이다 콩과 같이 작은 모양을 지니고 있어 ‘콩돌’이라 불리는데 색상이 백색,회색,갈색,적갈색,청회색 등으로 형형색색을 이루어 해안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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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코스
일자 | 시간 | 교통편 | 세부일정 | 식사 |
1일 | 06:40 07:10 11:30 14:00 18:30 |
쾌속선 전용차량 유람선 |
인천연안부두 집결(연안여객터미널 내 백령여행사) 연안부두 출발 백령도 도착, 중식및 숙소배정 두무진 유람선여행 (선대바위,촛대바위,코끼리바위, 병풍바위,장군바위,통일기원비등) 석식후 자유시간 |
중식 석식 포함 |
2일 | 08:00 08:30 11:30 12:10 |
전용차량 쾌속선 |
기상 및 조식 심청각(효녀심청,장산곶조망등) 등대해안(천연동굴,전쟁의도피처) 사곶천연비행장(천연기념물391호) 담수호경유(백령도 최대의 간척지) 콩돌해안(천연기념물392호) 중화동(백년역사의교회,해안가) 중식(메밀냉면.토종돼지고기등) 백령도 용기포항 출발 -안녕히 가십시오- |
조식 중식 포함 |
2박3일코스
일자 | 시간 | 교통편 | 세부일정 | 식사 |
1일 | 06:40 07:10 11:30 14:00 18:00 |
쾌속선 전용차량 유람선 전용차량 |
인천연안부두 집결(연안여객터미널 내 백령여행사) 연안부두 출발 백령도 도착,중식 및 숙소배정 심청각(효녀심청,장산곶조망등) 두무진 유람선여행 (선대바위,촛대바위,코끼리바위, 병풍바위,장군바위,통일기원비등) 숙소로 이동 투숙 석식후 자유시간 |
중식 석식 포함 |
2일 | 08:00 08:30 12:00 13:00 16:20 |
전용차량 |
기상 및 조식 등대해안(천연동굴,전쟁의도피처) 사곶천연비행장(천연기념물391호) 담수호경유(백령도 최대의 간척지) 콩돌해안(천연기념물392호) 중화동(백년역사의교회,해안가) 중식(메밀냉면.토종돼지고기) 사곶해수욕장 자유시간 석식후 쇼핑등 자유시간 |
조식 중식 석식 포함 |
3일 | 08:00 09:00 11:20 12:10 |
전용차랑 쾌속선 |
기상 및 조식 시내자유시간 및 약쑥공장견학 등 쇼핑시간 중식 백령도용기포항 출발 -안녕히 가십시오- |
조식 중식 포함 |
백령도 바다낚시
일자 | 시간 | 세부일정 |
1일 | 06 : 40 07 : 10 12 : 00 13 : 00 18 : 30 |
인천 연안부두 집결(연안여객터미널 내 백령여행사) 인천 연안부두 출발 백령도 용기포항 도착후 중식 및 숙소배정 바다낚시배 승선, 바다낚시 체험 석식후 자유시간 |
2일 | 08 : 00 08 : 30 11 : 40 12 : 10 |
기상 및 조식 심청각→사곶천연비행장→콩돌해안→두무진 유람선 중식(메밀냉면) 백령도 용기포항 출발 |
유적답사 2박3일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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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안부두 집결 연안부두 출발 백령도 도착,중식 및 숙소배정 백령도 인삼밭 인삼캐기 체험(체험후 구매가능) 두무진 유람선 및 명승지 -분단이후 어민들의 안타까운 죽음.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 -전국민의 바램을담은 통일기원비 석식후 자유시간 |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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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및 조식 동키부대막사-말등패총-하늬바다-심청각 -6.25때 항전하던 민간유격대 동키부대.신석기유적 말등패총. 천연기념물393호 감람암 포획현무암.효녀심청의제당 심청각 중식(메밀냉면.토종돼지고기) 사곶천연비행장-(천연기념물391호) 담수호-콩돌해안(천연기념물392호) 중화동해안(1896년건립.중화동교회) 석식 캠프화이어(인근부대 인가시) |
08:00 09:00 11:30 |
조식 6.25정찰부대 해군14인용사 충혼비 종교와 전쟁의 도피처 용기원산 중식 백령도 용기포항 출발 |
자유여행
06:40/08:00 08:00 식사 불포함
일자
시간
세부일정
식사
1일
07:10/08:30
11:20/12:40
14:00
인천연안부두 집결(선표수령)
백령도로 출발!
백령도 용기포항 도착(차량인수.숙소확인.안전수칙확인)
두무진 유람선등 백령도 여행 (차량인수시 관광지도등. 간단한 여행코스 안내 해드립니다)식사 불포함
안천수칙 준수!
2일
09:00
11:30/12:00
12:10/14:00
기상 및 개별조식
천연비행장.콩돌해안등 백령도 일주여행
중식후 승선준비(차량반납)
백령도 출발!
선박요금
상기 일정은 기상 및 선박상황, 현지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시간
선박
요금
07:10
마린브릿지호
왕복 97,500
08:30
데모크라시호
왕복 97,500
백령여행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