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날과 노인의 날 만든 이 / 노인학 및 예수님생애연구가 / 감정평가사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민원상담 전문위원/『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저자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세요?
오늘이 어버이날입니다. 제가 매년 어버이날을 남다른 감회로 보내고 있음을 잘 아시지요? 바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 덕택입니다. 벌써 30년 전 제가 5학년 때 저를 서울서 공부시키시려 이사를 했어요. 병약하시던 어머님은 제가 6학년이 되자마자 더욱 편찮으셔서 시골 외가로 가시고 아버님마저 부산서 근무하시게 되어 저 혼자 밥을 해 먹으면서 학교를 다녔지요.
조리질을 할 줄 몰라 신문지에 쌀을 쏟은 후 돌과 뉘를 하나하나 골라가며 밥을 했고요. 서울로 출장오신 어느 날, 분명히 제가 돌을 골라 낸 후 밥을 지었는데 아버님은 돌을 ‘꽉’ 씹으셨지요. 어린 제가 미안해 할까봐 씹으신 돌을 ‘꿀꺽’삼키셨어요. 돌을 씹으신 것도 미안한데 꿀꺽 삼키시니 더욱 말할 수 없는 부정(父情)을 느꼈습니다.
아버님! 이런 일도 있었지요. 숙제 하느라 풍로에 밥 올려놓은 것을 잊어 먹고 새카맣게 태운 후 “배가 고파 먼저 먹었어요.”라고 거짓말 한 것 말입니다.
아버님은 “잘 했다.” 하시며 한 숟가락을 뜨시고 “사실은 나도 먹었다.” 하시면서 상을 물려 주셨고요. 그러나 저는 알지요. 밥이 타서 제가 먹을 것이 없자 안 먹었으면서 먹었다 한 것을 눈치 채시고 상을 물려 주셨음을! 아버님의 사랑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래 앓던 귀를 수술하던 고 1 때, 수술비가 모자라 어머님과 같이 한숨 쉬시던 아버님! 그러나 저에게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전신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아버님은 제 머리맡에 꿇어 앉아 간절한 기도를 하고 계셨어요.
“아버지, 돈 많이 쓰게 해서 미안해요.” 라고 말씀드렸을 때 “별 걱정 다 한다.” 며 손을 꼭 잡아 주시던 아버님! 정말 고맙습니다. 가정형편상 초등학교도 못 나오신 아버님께서 저를 대학원까지 나오게 하시고요. 오늘이 마침 어버이날이라서가 아니라 아버님, 어머님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님은 저의 거름이 되셨어요.
한정된 지면관계로 아버님이 저에게 베푸신 사랑의 예를 더 쓰지 못합니다만, 아버님이 얼마나 고마우면 선린상고 2학년 때 우리나라 처음으로 아버지날을 만들었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날을 만든 지 꼭 10년 후인 1973년부터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합한 어버이날이 되었고 오늘로 벌써 제18회입니다.
이에 관해 월간「부동산」3월호,「직장인」5월호, 5월6일자「가톨릭신문」과 인터뷰 하였으며, 오늘 PBC 평화방송에서도 저를 초대하여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을 만든 동기와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된 과정을 생방송했습니다만, 아직도 저는 너무나 부족하여 부모님의 깊으신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심려를 끼쳐드리는 일이 많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님이 고마워 아버지날을 만들었던 16살의 제가 흐르는 세월 따라 어느 새 40대 중반이 되었고 젊으셨던 부모님께서는 칠십을 바라보시는 노인이 되셨어요.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모쪼록 즐겁고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제18회 어버이날에 불효자 돈희 올림
오늘은 제35회 어버이날입니다. 그러고 보니 위의 글은 이미 17년 전인 1990년에 당시 필자가 과장으로 재직하던 한국토지공사의 사보(社報)인「토지」5월호 특집 ‘가정의 달에 꾸민다.’ 에 실린 글 중의 하나이며, 졸저『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의 일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을 만든 사람이며, 그 후 17번이나 더 어버이날이 지나갔습니다. 위 글을 쓴 것은 제가 노인의 날을 만든 지 22년 후이지만, 그 때까지 노인의 날은 제정되지가 않았습니다. 만든 후 28년까지도 노인의 날이 제정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 글을 쓴 7년 후인 1997년에, 제가 한국토지공사에 부장으로 근무중이던 때에, 만든 지 29년만에 비로소 노인의 날이 제정되었습니다. 즉 제가 만든 후 강산이 무려 3번 변하는, 한 세대(世代)가 되는 세월이 흐른 29년만에야 국가에서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금년의 노인의 날은 제11회가 되고 있습니다. 저의 선린상고 선배님이기도 한 방정환 선생이 24세에 만든 어린이날은 방 선생이 만드신 지 22년만에 제정되었고, 제가 21세에 만든 노인의 날은 제가 만든 지 29년만에 제정되었습니다. 노인의 날은 어린이 날 보다 7년이 더 걸린 셈입니다.
그러나 효친경로사상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만든 위 두 날이 무색할 사건이 주위에서 너무나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 매우 가슴 아픕니다.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가 다 있음에도 생일에는 물론 추석명절과 설날이 지나고, 일 년 365일이 다 지나도 어느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자, 너무 외롭고 허망한 80대 노부부가 함께 자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노부모가 둘째 아들 집에 찾아가자 아들과 며느리가 못 들어오게 하고, 그래도 갈 곳이 없어 돌아가지 않자 가스와 보일러를 끊고 여행을 떠나버린 것을(이것이 자식이고 며느리입니까?) 이웃과 딸이 발견했을 땐 아버지는 이미 얼어 죽고, 어머니는 의식불명상태로 겨우 목숨은 붙어있었던 사례도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 4월에도, 50대 아들과 딸 며느리 사위가 서로 안 모시려고 83세 홀어머니를 두고 다툰 것을 주민이 신고하고, 경찰에서 가족들에게 인도하려 했으나, 서로 안 데려 가려고 해서 존속유기죄로 처리한 것을 여러 독자 분들도 생생히 잘 아실 것입니다.
어떤 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이 없던 시절에, 그래도 무슨 날이 있으면, 마치 어린이날이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어른들과 사회에서의 어린이에 대한 관심도가 다르듯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마음, 자식과 자손된 마음에, 아버지날을 만들었고, 노인을 학대하거나 길거리나 양로원 등에 버리는 자녀들이 있어, 대학생 때 정말 만들기 힘든 노인의 날을 만들고, 3년을 준비해 노인의 날 행사 시범까지 보이면서, 위 두 날이 제정되도록 하기에 모든 노력과 정성을 다 바쳐 왔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말씀드려, '적어도 인간이라면 아무리 인간 망종이요 인두겁이기로서니,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이 없으면 몰라도 이 두 날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부모나 노부모를 학대하거나 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두 날을 만들었으며, 드디어 아버지날은 어버이날의 형태로, 노인의 날은 명칭 그대로 국가에서 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는 조짐이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인간이 시초부터 형인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우리는 그 후손이라 원죄를 타고 나서 그렇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올바른 가정교육과 학교교육, 사회교육, 참다운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정말 가슴 답답하기만 합니다.
까마귀도 늙은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 합니다. 부모를 모를 수밖에 없는 부화기에서 태어난 병아리나 꿩 새끼도 자기 부모를 안다면 버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까마귀나 닭이나 꿩도 안할 일을 어떻게 명색이 사람인 어버이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버립니까? 회한으로 눈물 나게 합니까?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불교와 기독교를 말하지 않더라도, 그 많은 동물 중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는 정말 어렵고, 부모와 자식과 부부란 인연이 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인연으로 태어난 자식도 머지않아 바로 자식의 부모가 되고, 노부모가 됩니다. 딸과 며느리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훗날 자기가 딸을 낳으면 장모가 되고 아들을 낳으면 시어머니가 됩니다. 부모나 시부모가 따로 있는 별난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그대는 언제나 자식이고, 언제나 며느리고, 사위입니까?
부모나 자식과 배우자는, 핵가족인 내 한 가정, 내 한 몸, 편하자고 버릴 존재가 아닙니다. 자식이 내 가족이듯 부모도 내 가족이어야 합니다. 친부모, 시부모, 처부모를 구별하여 대우 하지 맙시다. 친부모, 시부모, 처부모는 모두 '나를 낳으신 부모,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 내가 가장 보살펴 드려야 할 부모' 님일 뿐입니다.
감히 말하지만, 자식과 부모와 배우자는 모두 한 가족으로서 보호의 대상이지 버릴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고도 자기는 천당이나 극락가겠다고 기도하고 합장합니까? 왜 사람으로서 가장 기본으로 해야 될 일을 팽개치고 살아가려 합니까? 그것이 가난 만인 탓입니까? 늙고 병드신 탓입니까? 부모나 시부모와 장인장모가 보기 싫거나 보살피기 싫으면 "낳으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로 시작하는 <어머니 마음> 이라는 노래를 3절까지 부르십시오. 웬만한 찬송가나 성가(聖歌), 찬불가 이상으로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 것입니다.
자식에게, 부모에게, 배우자에게 잘 할 수 있는 것은 이승에 있을 때뿐입니다. 이승에 있는 기간은 긴 것 같아도 짧습니다. 이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온갖 역경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무명의 효자녀, 효부, 사위도 얼마나 많은지를 아셔야 합니다. 이승에 있을 때 잘 해줍시다.
윗글의 주인공인 저의 아버지는 69세부터 12년간을 위암수술과 수술도 할 수 없는 부위의 폐암과 후유증으로 갖은 고생을 하셨으며, 그런 중에도 3년전부터 요양원에 가신 어머니를 위해 같이 계시면서 애쓰시다가 극심한 폐렴과 패혈증까지 발생하여 중환자실에서 고생만 하시다가 2년 전에 83세로 돌아가셨습니다.
78세인 어머니 역시 69세이던 9년 전부터, 심한 노인성우울증과 파킨슨병 등으로 고생하시고, 3년 전부터 거동을 못하시어 아버지와 함께 노인요양원에 게시다가 1년 전부터 노인전문 너싱홈에서 지내시고 계십니다. 9년 전부터 지금도 병원에서 3개월마다 한보따리 되는 약을 처방받아 갖다드리고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도 한 달에 한두 번씩 아내와 함께 찾아뵙고 있습니다. 화장실 출입도 못하고 불편한 몸으로 살아 가시니 오죽 답답하시겠습니까?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기 전인 60여년 전부터, 젊은 시절부터 몸이 몹시 허약하셨으니 더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신 아버지의 영혼이, 천당에 계실 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어떻게 지내실지는 정말 몰라, 아버지 방에 그대로 모셔둔 사진으로 뵐 때마다, 또 외로울 때마다, 산다는 것이 힘들 때마다, 기도를 하게 됩니다. 남의 도움 없이는 당신 몸 하나 못가누시고 용변도 불가한 사랑하는 어머니를, 자식으로서도 잘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찾아 뵐 때마다, 생각날 때마다, 걱정이 되어 잠이 안 올 때마다, 눈물짓게 됩니다. 기적처럼 일어나셔서 '화장실 출입만이라도 하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기도 하고요.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제가 초등학교시절, 하교 길에 우산 없어 온 몸 비에 젖었을 때 발가벗기시고 목욕시켜주시던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저를 지켜보시고, 어머니는 너싱홈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도, 저를 위해 항상 기도해주시면서 마음속으로 보시겠지요. 코흘리개 당신 아들인 저도 벌써 회갑이 되었고, 10년 안팎, 늦어도 20년 안팎이면 틀림없이 하늘나라에서 뵙게 되겠지요. 저도 부모님을 닮아 어릴 때부터 몸 여러 군데가 너무 심하게, 그리고 자주 아플 때면, 어릴 때 저를 꼭 껴안아주시던 아버지 어머니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요, 하느님만이 아신다 하니, 그리고 귀한 인연 받아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승에 있는 동안 열심히 일하며, 기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올해가 제11회인 노인의 날인데, 제35회 되는 어버이날처럼, 제35회가 되는 노인의 날이 되는 해까지 제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의 날이 제11회이긴 하지만, 노인의 날이 있다는 것조차 아직 모르는 국민이 대다수입니다. 노인의 날도 지금의 어버이날처럼 제35회 쯤 되면 그 때는 많은 국민이 알게 되겠고, 그렇게 되면 어른들에 대한 효심도 지금보다는 살아날 것을 믿고 싶습니다. 부모님께서 저의 거름이 되셨듯이 저는 효친경로사상을 부활시키는 일에 거름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조금이라도 부활이 된다면, 그것으로 대만족할 것이며, 하느님과 부모님께 저를 만물중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주심에 대해 더욱 더 감사와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제 35회 어버이날이 되고 보니, 오늘 따라 작고하신 아버지, 몸이 말을 안 들으시면서도 기도해주실 어머니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이 글을 썼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끝으로, 효사상의 부활에 기여하기 위하여 시의에 맞게 졸 글 실어주신 <참좋은이들 21> 김향기 발행인님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5월의 메시지
가정의 달에 효를 생각하며
청파 이돈희
가정의 달인 5월에는 근로자의 날·어린이날·어버이날·스승의 날·성년의 날.부부의 날 등 귀한 날들이 속해 있습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90% 이상이 대상이 되는 위 날들은 다 그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 년 열두 달 중 다른 달이 아닌 5월 가정의 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각 가정이 잘 되어야 사회가 잘되고 나라가 잘됨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화목한 가정이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기본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변할지라도, 어린이와 성년이 된 자는 어버이와 스승이 잘났거나 못났거나 지극정성으로 섬기며 존경하여야 합니다. 반대로 어버이와 스승은 자식과 제자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잘 양육해야 합니다.
근로자와 직장인은 동료와 힘을 합하여 성실히 일하여야 하고, 그 대신 직장과 국가는 어떤 경우든지 생계를 보장하여 주고 퇴출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각 가정과 직장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이것이 제대로 제자리를 잡지 않아서,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효를 주제로 쓰는 글이기에, 여기서는 효를 생각하게 되는 노인의 날과 어버이날 중 어버이날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어버이날은 1956년부터 1972년까지 17년 동안 어머니날이던 것이 다음해인 1973년부터 제 1회 어버이날로 변경되었습니다. 아버지날은 그보다 10년 전인 1963년에 제가 처음으로 만들었고, 이화여대에서는 그 8년 후인 1971년에 만들었으며, 이화여대에서 아버지날을 만들고 행사한 2년 후인 1973년부터는 5월 8일 어머니날이 아버지날과 합쳐진 어버이날로 변경되었으며, 그것이 올해로써 벌써 제35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날은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 2학년 학생이던 1963년에 아버지들도 자식들로부터 당당하게 사랑의 카네이션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에 목말라 했던 저와 아버지 없는 가정에 있는 친구들의 외로움과 물질적인 어려움을 보면서, 각 가정에서 자녀들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시고 노력하시는 부모님을 위하여 당시부터 어버이날을 만들고 싶었지만, 이미 국가에서 부모의 절반인 어머니를 위해 정한 어머니날은 있으면서, 나머지 절반인 아버지를 위하는 아버지날이 없어서 제가 1,252명에게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아버지날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날을 만든 후에 여러 신문사와 방송국을 찾아가서 협조를 구했지만, 고등학생이 만든 것이라고 잘 호응해주지 않았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독자투고도 많이 했지만 성과가 거의 없어서, 40년전인 1967년부터는 당시의 우리나라 4대 일간지라 생각되던 동아·조선·중앙·한국일보 등에 조그맣게 광고를 했습니다. 동국대학교 학생이던 당시에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광고하기엔 광고비가 너무 비싸서 아주 조그맣게 광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8년에는 주간한국·주간중앙·소년세계 등 유명일간지보다 광고비가 훨씬 저렴한 여러 신문과 잡지에 광고하는 중, 이화여대 신문인 이대학보(梨大學報)에까지 아버지날을 알리는 광고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지면 관계로 자세히 쓰진 못합니다만, 이대학보에 광고가 나간 지 3년 후인 1971년에 이화여대에서도, '이화의 아버지날'을 만들고 행사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날을 제가 할 당시엔 호응을 잘 안했으나, 이화여대에서까지 만드니 수많은 언론기관에서 보도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물론 제가 만든 아버지날이 이화여대 보다 8년이나 앞선 때문에 아버지날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호응이 적었을 수도 있지만, 고등학생과 대학생에 불과했던 저같은 개인보다는 아무래도 단체나 기관·학교·사회와 국가가 힘이나 파급효과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제가 아버지날을 만든 지 10년이 되던 해인 1973년에, 5월 8일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변경된 것입니다. 지금의 어버이날이 처음부터 어버이날이 아니고, 어머니날이던 5월 8일이 언제부터인가 어버이날로 바뀐 것임을 현재 45세 이상 된 사람은 거의 다 압니다.
그러나 어버이날이나 노인의 날이 다가와서, 데스크로부터 저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은 신문사나 잡지사의 40세 미만이거나 더 젊은 기자들은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변경된 것임을 전연 모르다보니, 저를 찾아 와서는 첫마디가 “선생님은 어버이날도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는 날인데, 왜 반쪽인 아버지날을 만들었는가?, 어버이날이 있는데 왜 또 노인의 날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5월 8일 어버이날이 변경되기 전에는 어머니날이었던 것과, 노인의 날의 필요성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의 기자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만.
미국만 해도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따로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무슨 날 무슨 날 해서 일년 365일이 다 무슨 날이 되다시피 해서 날이 너무 많다며 따로 있던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따로 하지 않고 합친 것이 우리나라에서 어버이날이 된 시초입니다. 아무려면 어버이날이 있는데도 제가 아버지날을 만들겠습니까?
이미 9년 전 제 26회 어버이날을 즈음한 1998년 5월 7일자 <시사저널>의 <사람과 사람>란에서, 저를 취재한 기사에 당시 문정우 기자(현재 부장·대기자)는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된 사연” 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1973년에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뀐 사연은 무엇일까? 한국노인학회 회장 이돈희(51)씨가 바로 5월 8일에 아버지들도 카네이션을 받을 수 있게 만든 숨은 공로자이다. (중략) 그가 뿌린 씨앗은 1971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학생들이 아버지날 제정운동을 개시하고, 1973년에 정부가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개편해 결실을 맺었다.
정부 요로에 끈질기게 진정서를 내 지난해 노인의 날이 공식 제정되는데 기여하기도 한 그는 지난 3월 노인복지개선에 전념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한국토지공사 부장)도 그만 두었다." 고 적고 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 아버지날과 노인의 날, 그리고 한국노인문제연구소와 한국노인학회를 만들어 힘을 다 기울여 노력한 지 40여년이 되어 60세 회갑의 나이에, 가정의 달을 맞고 보니 감회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핵가족으로 가까운 가족끼리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부모와 친지를 찾아뵙고 사랑을 나누게 하고자 어버이날과 노인의 날을 공휴일로 하거나 휴일로 옮겨주기를 효·노인 관련 단체와 정부당국에 희망하고 있는 중이지만, 효를 표방하는 그 많은 효·노인관련 단체, 잡지사나 신문사, 학교가 있으면서도 위 두 날을 공휴일로 하거나 일요일로 옮겨주는 일엔 왜 그리도 무관심 한지 모르겠습니다. 효친경로사상이 실종된 탓입니까? 자기가 하지 않는 일엔 관심갖기 싫은 탓입니까? <사람>은 <사람>이기에 내가 귀찮고 힘들드라도 <사람>과 글짜가 비슷한 <사랑>을 나누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보다 젊고 유능한 젊은 세대들이 나서서 <효친경로사상과 사랑의 부활운동> 을 계승하기를 가정의 달을 맞아 소망합니다. 우리나라의 희망은 믿음직한 젊은이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는 외국 방문 때 교민과 유학생들에게 연설하게 되자 장 ·차관을 일어나게 한 자리에 노인을 앉게 한 후 연설을 하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최고령기자를 맨 앞자리에서 취재하도록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은 본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