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렏 베르나드 노벨과 노벨상(Alfred Bernard Nobel and Nobel Prize)
“매년 인류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들 중에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분야에 최우수 인재에게 금메달과 상금을 시상해 달라”는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12월 10일(노벨의 기일)에 노벨상을 시상하고 있다. 노벨상 기금을 운영해 오던 스웨덴 중앙은행에서 추가로 기금을 마련하여 매년 경제학 분야에도 노벨을 기념하는 뜻으로 경제학상을 1969년부터 현재까지 시상해오고 있다. 노벨경제학상은 스웨덴중앙은행이 1968년 제정한 상으로 공식 명칭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중앙은행 경제학상이다. 그러나 알프렏 노벨의 유언에 따른 원칙에 의거해서 스웨덴왕립과학원이 선정해 시상해 오고 있다.
“알프렏 노벨은 어린 시절부터 과학기술과 폭약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생전에 355개의 발명특허를 얻었고, 그들 중에는 유명한 폭약 TNT에 관한 특허도 있다”
알프렏 베르나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임마누엘 노벨과 카롤리나 노벨과 카롤리나 안드리에타 알셀 사이에서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임마누엘은 발명가이자 공학기술자이었다. 한때 그는 탄광을 운영하는 사업가이었으나 실패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그 뒤에 아들 알프렏 노벨은 아버지의 사업에 관해서 면밀히 분석하고, 실패의 원인을 찾아서 이들을 극복하고 크게 성공했다.
어린 시절의 알프렏 노벨은 병약한 편이었으나, 과학 분야에 지적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폭약에 관심이 많아 그의 아버지로부터 폭약에 관한 공학의 기초를 터득했고, 한편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광산 발파용 폭약과 공작기계를 제작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한때1842년에는 노벨가족이 모두 스톡홀름을 떠나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버지와 합류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러시아에서 재기한 알프렏 노벨의 부모는 아들에게 개인 가정교사의 지도를 받게 할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알프렏 노벨은 16세 나이에 폭약에 관한 유능한 화학자가 되었다. 한편 외국생활에 스웨덴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알프렏 노벨은 1850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1년간 화학을 공부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장갑함 모니터 호를 만든 기술자 존 에릭슨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4년간 일할 기회도 가졌다. 그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돌아온 알프렏 노벨은 크림 전쟁 시기에 군수품을 만들어 납품하던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1856년 전쟁이 끝나자, 방향을 바꾸어 그 회사는 증기선 부품 제작에 손을 댔다. 생소한 사업에 손을 댔다가 경영난에 시달려 1859년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 알프렏 노벨은 부모와 함께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왔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직후 알프렏 노벨은 아버지 소유의 토지에 마련한 조그만 실험실에서 폭탄 제조실험에 착수했다. 당시 광산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폭약은 화약의 일종인 흑색화약이 유일한 제품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 무렵 발견된 액체 폭약인 니트로글리세린은 폭파는 뛰어났지만, 휘발성이 강해 안전에는 문제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프렏 노벨은 그 문제점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1862년에 들어서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제조하기 위해 공장을 세우고, 니트로글리세인의 약점이자 문제점인 순간 폭파를 제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63년 노벨은 금속용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채운 다음 목제 점화 플러그를 끼워 넣는 방식을 사용하여 안전하고 실용적인 뇌관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즉, 점화장치에 소량의 흑색화약을 넣어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을 폭파시킬 수 있는 유도방식의 특허였다. 이 발명특허로 알프렏 노벨은 폭약 제조업자로써 일인자가 되었고, 한편 유명한 발명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 1865년 알프렏 노벨은 폭파 캡슐(blasting capsule)이라는 뇌관의 발명특허를 얻었다.
그는 1867년 니트로글리세린을 투과성이 높은 규산이 함유된 규조토에 스며들게 해 말리면 사용과 취급이 훨씬 용이하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노벨의 생애에서 2번째로 중요한 발명특허인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이다. 그는 이 다이너마이트로 영국(1867)과 미국(1868)에서 발명특허를 냈다. 이 다이너마이트는 노벨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모든 토목공사에 굴착공사, 수로발파, 철도 및 도로 건설에 이용되고 있다. 이어서 계속 발명특허를 얻어내 355개의 특허로 세계 20여 개국에 93개의 회사를 설립 운영하여 막대한 재산가가 되었다. 그러나 알프렏 노벨은 1895년에 협심증으로 고생하다 그 다음해 1896년 12월 10일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돌아갔다. 사망 후에 남긴 것이 있으니, 그것이 제1차 유언장과 제2차 유언장이었다. 제1차 유언장은 알프렏 노벨이 사업을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을 때, 집안 동생의 죽음을 보고 자기가 죽으면 이 많은 돈이 어찌될 것인가라고 생각하며 남긴 것이고, 제2차 유언장은 세상을 하직하기 직전에 남겨 놓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류를 위해 크게 공헌한 사람에게 최고의 명예로운 노벨상을 주도록 유언하다!”
알프렏 노벨은 자기 자신이 화학자이자 과학기술자이었다. 또한 그는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이었다. 자신이 발명한 폭약들이 건설하고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류와 국가들에 대한 기여는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알프렏 노벨의 유언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알프렏 노벨이 남긴 유언 중 귀중한 노벨상 설립에 관한 부분이다.
“노벨 자기가 죽은 후에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모든 유산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해야 한다. 유언 집행자는 그것을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바꿔 투자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그 이자로 매년 그 전해에 인류를 위해 최대의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금 형식으로 분배한다. 그 이자의 상금 몫은 똑같이 5등분 하여 다음과 같이 할당하라”고 되어있다.
“물리학상은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상은 화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나 개선을 이룬 사람, 생리학·의학상은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업적을 세운 사람, 문학상은 문학 분야에서 인류를 위해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평화상은 국가 간의 우호 증진 또는 상비군의 폐지나 감축을 위해 평화회의의 개최나 추진을 위해 최대 또는 최선의 일을 한 사람 중에서 선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관리는 물리학상과 화학상은 스웨덴 왕립과학원에서, 생리학·의학상은 스톡홀름의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문학상은 스톡홀름의 아카데미에서, 그리고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가 선출하는 5인의 위원회로 구성된 평화상 심사위원회에서 선발하여 각각 수여하도록 한다.”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후보자의 국적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스칸다나비아 사람이건 아니건 가장 적합한 인물이 수상하여야 한다. 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라고 유언에 남겨놓았다.
1901년 제1회 노벨상이 선발되어 수여된 이래 지금까지도 그 유언의 뜻에 따라 선정되고 수여되고 있다. 제1회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X-Ray를 발견한 렌트겐(Rőntgen)이고, 노벨화학상은 삼투압 발견과 화학동역학 법칙을 발견한 반트 호프(van't Hoff), 노벨생리학·의학상은 혈청을 이용한 디프테리아 치료법의 발견으로 에밀 아돌프 폰 베링(Behring)이 수상하였다. 그리고 제1회 노벨문학상은 낭만적인 기질과 예술적 완벽성의 작품을 쓴 쉴리 프리돔(Sully Prudhomme), 노벨평화상은 ‘국제적십자’라는 세계적 구호기구 탄생을 맨 처음 시작하여 공헌한 장 앙리 뒤낭(Jean Henry Dunant)과 '국제영구평화동맹‘을 설립한 프레데리크 파시(Frėdėric Passy)가 공동으로 수상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지금 현재(2017년)까지 117회의 노벨 수상자를 선정하여 상금과 금메달을 주었다. 다만 세계 2차 대전 당시 3년(1940-1942)간은 시행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금년까지 노벨상 수상자들을 각 분야별로 보면, 노벨물리학상은 207명, 노벨화학상은 178 명, 노벨생리학⦁의학상은 108명, 노벨문학상은 110명, 노벨평화상은 (104+27)명(단체 포함), 노벨경제학상은 79명으로 나와 있다. 앞으로 노벨상이 계속될 것으로 보면, 우리도 한 번 도전해 볼만한 명예로운 큰 상이다. 청소년 꿈나무들에게 지속적으로 홍보하고 교육해야 희망이 있다. 머지않은 장래 우리나라에서도 노벨평화상뿐만 아니라 노벨과학상, 노벨문학상, 노벨경제학상이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가 기초를 다지고 일등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다. 최근에는 노벨상을 얼마나 많이 수상했느냐 하는 것이 그 나라의 기초과학 수준이나 국력상승을 가늠하는 잣대로도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선진국으로 진입해 이제는 노벨상의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할 시기라고 본다. Nobel Science 매거진은 이러한 사명과 전망을 가지고 정진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가 깊은 이해와 협력이 있어야 한다.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들에게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축하를 보낸다.
2017. 10. 11
한국노벨과학문화연구원 원장 노벨사이언스 편집위원장 성 용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