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자: 1월 24일(금) - 1월 26일(일), 2003년
여행자: 윤정혜, 정경아, 문록선, 김석영
여행 주제: 근수정 팔경 유람. (윤정혜씨 고향인 해남면 북일면 금당리 제각에 있는 팔폭병풍에 써있는 근방 빼어난 팔경 )
관산명월(冠山明月) 주작청람(朱雀淸嵐) 평사낙안(平沙洛雁) 완도귀범(莞島歸帆) 숙승숙운(宿僧宿雲), 봉대봉화(烽臺烽火) 응봉초적(鷹峰草笛) 도암모종(道庵暮鐘)
1. 첫째 날 1월 24일 : 장흥, 해남
새벽부터 준비하고 7시에 우면동 윤정혜씨 집에 정시에 모여 싼타페에 짐을 부리고 서울 출발. 휴게소에서 윤정혜씨로부터 근수정 팔경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기대감이 벅찼음.
12시에 장흥에 도착. 윤정혜씨의 이종 6촌 오빠 김석중씨 부부와 만남. 장흥읍 신녹원관에서 떡벌어진 한 상을 받아 경탄을 금치 못하며 점심식사. 11시 조금 지나서 연락 받고도 천관돌김 4상자를 준비한 김석중오빠의 순발력있는 친절과 그 부인 박인옥 여사의 모자에 모두 경탄을 금치 못함.
보림사(寶林寺) (유치면 봉덕리) : 통일 신라 시대 고찰. 단청을 칠하지 않은 오래된 나무색에 안심을 하며 평면적으로 펼쳐진 사찰 안을 유유히 거닐음. 국보급 철조 비로자나불(국보 117호)에 삼배를 올리고 3개의 석탑 앞에서 사진 촬영. 뒤로 둘려쳐진 산자락에 차나무와 밝은 햇살, 맑은 공기에 여행 시작부터 마음이 풀리기 시작.
용호정(龍虎亭) (부산면 용반리) : 물 수급 정책으로 근처 모두가 수몰될 위기에도 빼어난 경관 속에 자리잡은 용호정. 석중오빠가 어릴 때 멱감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살얼음 얼은 샛파란 물 위 정자를 다리 위에서 즐김.
방촌리 석장승(관산읍 방촌리) : 고려시대 것임이 한눈에도 역력한 남, 여 석장승. 은근한 미소속에 감추어진 힘이 오래된 돌 속에서도 가슴에 닿을 듯.
관산읍 방촌마을 향반 장흥 위씨 종가(중요 민속자료 161호) : 옛 선조의 운취와 기품이 느껴지는 사랑채와 정원을 마음 놓고 즐기기도 전에 극악스럽게 짖어대는 개 두마리, 어디 감옥소에서나 볼 수 있을 방범등에서 강도와의 전쟁인 현실을 느껴야 했던 씁쓸함. 집앞 연못위에 휘드러진 적송을 바라보며 이 전통가옥이 부디 무사해 주기를 바라면서 떠남.
관산명월(冠山明月) : 8경 중 제일인 천관산의 달. 비록 달은 보지 못 했어도 천관산 장천재(존재 위백규의 사당)에 올라 500년 된 소나무와 소나무 숲에서 마음까지 씻고 내려옴.
찻집: 그런 곳에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한 아늑한 찻집으로 인도한 김석중 오빠.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가슴을 뒤흔들 듯이 크게 울리는 산 속 찻집에서 복분자차의 향기에 취해 행복해 하면서 다음 여행엔 장흥에서 목욕도 하고 창도 들어보리라 새로운 계획에 마음만 분주.
북일면 금당리(金塘里) 새집 : 2시간도 채 못되어 해남 윤정혜씨 집에 도착. 지은 지 80년이 되었다는 집의 단정한 모습이 친근하고. 일산 윤원식 오빠의 새들이 우리를 반겨주고. 윤정혜씨 6촌 오빠 윤정상씨 부부의 배려로 따뜻한 방에서 메생이국, 자연산 굴, 무우생채, 고등어 조림에 남도의 진한 김치로 맛깔스런 저녁을 먹음. 한국은행 하용이 선배가 보내준 와인 두병의 환상적인 맛에 모두 감격하며 취해 버림. 아주 행복해 하면서.
수학여행 때 처럼 넷이서 한방에 모여서 자고 뜨끈한 방바닥엔 살이 데일 듯해도 코가 날라 갈 듯 강한 외풍 속에서 12시가 넘어 녹초가 되어 잔 첫 날 밤.
오늘의 명언 : 서정도 연연함도 끊어야 성장을 한다. (김 석중)
2. 둘째 날 1월 25일. 해남, 강진, 땅끝, 완도
아침 일찍 윤정혜씨 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가서 인사를 올림. 넘치는 에너지에 울음을 터뜨린 록선이와 윤정혜씨. 우리 모두 윤씨 문중에 오른 듯 산뜻하고 따뜻한 기분.
주작청람(朱雀淸嵐) : 주작산 맑은 아지랭이. 팔경 중 단연 돋보이는 주작산을 윤 정상 오빠의 환상적인 운전 솜씨로 눈내린 산굽이를 돌아, 조금 등산해서 그 가슴 벅찬 탁틔임을 만끽한 아침.
산 정상 정자에서 내려다 보는 그 많은 섬들이 산인지 섬인지... 마음 속 찌꺼기가 다 날아가버릴 것 같아 심호흡을 하며 많이 행복에 겨워했던 순간. 눈 덮힌 산 길을 내려오며 나눈 많은 이야기들이 그 차고 맑은 공기속에서 더 맑아지는 것 같았지?
평사낙안(平沙洛雁)
숙승숙운(宿僧宿雲) : 대둔산 봉우리 사이에 있는 평평한 바위산인 구름다리, 그곳에선 중도 구름도 자고 간다나. 차안에서 고개 들어 바라만 본 숙승숙운의 바위 구름다리. 모두 혀가 꼬여 발음은 잘 못해도 그 시적인 감흥을 느낄 수 있었지.
봉대봉화(烽臺烽火)
응봉초적(鷹峰草笛)
도암모종(道庵暮鐘) : 백련사의 저녁 종소리. 백련사는 艸衣禪師 등의 유명한 고승들이 많이 거쳐간 유명한 절이라는데 너무 화려한 단청에 약간 기가 질려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만 하고 떠남. 트랙스타 등산화로 칭송을 한몸에 받았던 록선이는 가는 곳 마다 신발 끈 매고 푸는 고역...
다산 초당(茶山草堂) : 강진 귤동 다산초당은 백년사 에서 1.5KM 쯤 차 밭을 지나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서 도착. 흐드러진 동백꽃 숲 속에 조용한 천일각(天一閣)은 지금도 하늘과 하나가 될 것 같고, 다산 정약용이 책을 500권이나 썼다는 동암. 유배지의 외로움과 설움을 연못 속 물고기를 보며 달랬다는 툇마루에 앉아 우리 모두 그 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지.
죽림오현(竹林五賢) : 다산 초당을 지나 다시 백련사로 돌아오는 대나무 숲길에서 우리 모두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난 게 너무 감격스러워 이번 여행에는 비록 오지 못했어도 마음은 닿아있는 유현이까지 넣어 죽림 오현을 결사. 동백꽃 망울이 탐스러운 숲길을 걸으면서 동백사우지정 (冬栢思友之情)에 들뜨기도 하고. 산길을 오르내리며 달아오른 얼굴을 씻어주는 대나무 숲속 바람결과 발 옆에 펼쳐진 차 밭의 향취, 곁에 있는 친구들로 아무 것도 아쉬울 게 없어 가슴이 터질듯한 희열을 느낀 곳.
북일 기사 식당 : 다시 해남으로 돌아와 기사 식당에서 맛깔스런 한정식에 새끼조기 매운탕으로 흐뭇한 점심.
녹우당(綠雨堂) : 해남읍 연동리 녹우당, 고산 윤선도, 공재의 유물 전시관. 어제 밤 외풍에 시달렸는지 몸살기가 있는 록선이는 차에서 쉬고. 우리 셋은 해남 윤씨 종가집 안방까지 들어가 윤형식씨와 윤선도의 16대 종손녀인 윤지영의 시를 들으며 천재가 정말 이 세상에 있다는 걸 마음 깊이 느낌. 다실의 고즈넉하면서도 긴 마루를 보며 꼭 여름에 다시 와서 문들을 활짝 열고 대나무 숲을 내다 보며 그윽한 차를 마셔보리라 다짐하며 떠남.
달마산(達摩山) 미황사(美黃寺) : 기암절벽에 영기가 흐르는 달마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고 단청없는 대웅전의 장엄함에 압도된 절. 부도전으로 걸어가 5분간 명상. 명상 후 우리를 놀래킨 것은 정경아의 표정과 자태. 그건 바로 반가사유상의 온유한 미소와 이 세상에 아무 집착이 없는 경지. 다시금 이 친구의 경이로움을 흠뻑느낀 순간. 부도전 조각 중에 유난히 게, 개구리, 원숭이가 많이 눈에 띄어 이 동물들이 무얼 상징하는지 궁금해짐. 이번 여행 중 유일하게 우리 내부에서 답을 얻지 못한 의문...
땅끝 : 두개의 섬이 환상처럼 떠있던 허준 유배지. 땅끝 전망대로 해안도로를 운전.
완도귀범(莞島歸帆) : 팔경중 가장 우리가 볼 수 없을 것 같던 완도로 돌아가는 배. 땅끝 전망대에서 어둑해지는 하늘, 짓푸른 바다를 내다보며 깨찰빵으로 간식을 즐길 때, 에메랄드같은 초록빛으로 반짝거리는 등대 불빛을 향해서 빨간 불을 반짝이며 신호를 보내며 돛단배 한 척이 완도로 돌아온다. "와!!! 와!!!" 그 것은 감격. 마치 누가 연출한 것처럼 그 시간에 완도로 돌아오는 배, 감격 속에 완도귀범을 본 우리 넷은 이 장면으로 우리 여행이 완결(Completed) 된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완도 활어회 센터 : 뜨거운 감격속에 조잘 거리며 완도로 가서 광어와 우럭을 넉넉하게 사서 해남으로 돌아 옴,
Dinner Party : 윤정상 오빠 내외, 두 아들과 우리 넷 모두 여덟명이 벌인 회 파티. 경아의 놀라운 사교술로 윤정상 오빠는 흐물흐물, 우리 넷이 얻어올 배추와 김치 확보 성공.
오늘의 어록 : 우리 죽림 오현은 종신제야. 누가 죽기전엔 절대로 신입회원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학술원처럼. (문록선)
3. 마지막날 1월 26일. 해남, 옥과, 서울
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이른 아침 낙숫물 소리가 정겹다.
해남 성당 : 록선이는 해남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고, 윤정혜씨는 LPG 가스를 넣고 경아와
나는 빗줄기 속에서도 새벽이 오는 그 프르스름한 기운을 한참 넋놓고 보다가 이불 개고 진공청소기로 청소하고, 설거지 해놓은 그릇들 제자리에 넣고 떠날 준비 완료. 아침에도 커피까지 끓여내는 경아의 의전에 너무 마음이 풀린 윤정상 오빠 내외가 배추와 김치를 바리바리 싸안겨 준다. 모든 짐을 차에 싣고, 30분 정도 걸린 인사를 끝내고 성당에 가서 1시간도 넘게 우리를 기다리며 꽁꽁 얼어 있는 록선이 픽업해서 옥과 성륜사로 출발.
하우당(霞雨堂): 경아의 호를 하우당(霞雨堂)으로 윤정혜씨가 빗줄기 속에 녹우당을 지나면서 시적 영감을 받아 지어줌.
성륜사(聖輪寺) : 청화 큰스님이 계신다는 이 절은 규모가 우선 압도적이다. 고영을이란 탱화화가를 만나고 그가 그린 탱화들(성륜사 외벽 벽화)을 감상. 비만 오지 않았어도 조금 덜 구질구질했을텐대.고영을, 정해숙 선생님과의 짧은 만남 뒤 절 밥으로 맛잇는 점심을 먹고, 재 올린 뒤에 나누어 주는 인절미 맛에 감격도 하고. 주지스님과의 만남에 난데 없이 끼어든 백추자란 사람때문에 모두 마음 상했던 시간. 창밖만 내다 보는 록선이, 졸고 있는 고영을,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나. 그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윤정혜씨와 경아의 너그러움... 찻잔을 거칠게 닦던 주지 스님의 손끝에서 그 분의 불편한 심기 마저도 읽으면서 우리 두 저렇게는 늙지 말라는 경고로 백추자란 사람을 용서하며 묵살했던 오후 1시 반.
록선이의 관록있는 운전으로 5시간 반만인 7시에 서울 도착.
록선이 집 뒷풀이 : 환상적인 세팅위에 와인, 치즈, 오이 소박이, 물김치, 배추, 불고기, 해남 김치에 토골미 밥으로 맛있는 저녁도 먹고 여행의 기쁨을 마무리한 가슴 뿌듯한 5시간. 뒤풀이 시간이 조금도 길게 느껴지지 않게 한 이오의 남도 창에 우리 모두 녹아버림. 춘향가, 흥보가에 만고강산으로 이 남도 여행의 혼을 느끼게 해 준 이오. 지난 72시간 우리 넷은 남도의 예(藝)와 흥(興) 속에 푹 잠겼었다.
여름에는 유현이 까지 죽림오현 다섯명이 다시 한번 멋진 시간을 갖을 수 있기를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