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조가 지는 강둑에 앉아 우혁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린다.
갈대로 장식된 섬 하나가 눈앞에 떠있고 물의 흐름조차 인식할 수 없는 강의 하구가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게 머물러 있다. 바다로 향하는 강의 끝에는 낙동강 하구언이 을씨년스럽게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위로는 또 엄청난 수의 자동차들이 서로가 빨리 가야한다고 아우성 친다. 저 도로가 아니었으면 강 건너편과의 소통을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거의 재난 수준이었으리라. 저런 유용한 구조물이 건설되기 전 그를 막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했던가? 환경의 파괴가 이루어진다고 판된되는 곳이면 우혁은 언제나 바쁜 시간을 쪼개 달려갔었다. 하지만 이 하구언에 관한 투쟁에서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들이 윗통을 벗어 젖히고 불도저가 달려가는 앞길에 드러누울 때 그는 군중 속에 묻혀 숫자만 하나를 늘려 주었다. 확실하지 않으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저 하구언은 우리의 동지들이 반대했던 그런 걱정스러운 결과를 창출해내지 않았다. 생태계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머물러 오히려 저를 추진하던 관료들의 의견이 옳지 않았나 착각이 들 지경이다. 그럼에도 동지들은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나서 극력 투쟁하지 않았다면 이런 정도의 환경개선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도 그렇게 믿고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상호간의 미움과 반목에 신경이 쓰일 뿐이다. 당시 환경단체에서 판단한 해악은 개발과 미개발의 비율로 따져 60:40 수준이었다. 동지들은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계산이라고 확신하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에 의한 진실 왜곡을 감안하면 그보다 더 작은 위험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판단하여 소극적 가담으로 태도를 결정했었다.
관청과 환경단체 쌍방의 노력으로 시민들은 교통을 위한 도로와 환경의 보존, 모든 것을 얻어 가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두 단체 모두를 지지하지 아니하고 어느 한 편을 선택해 다른 편을 비난한다. 편을 택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인간의 속성때문이다.
주전자 하나 때문에 바뀌어 버린 그의 운명은 생각해보면 상당히 우스운 일면이 있었다. 물은 100℃에서 끓는다. 그러나 적지 않은 양의 물들은 끓는 온도에 이르기 전에 기체가 되어 날아간다. 심지어 전혀 가열하지 않아도 상태를 변화시키는 물분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리차가 끓어올라 뚜껑이 들썩거리는 은빛 주전자를 보며 우혁은 자신이 그 0.01%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행태의 알갱이와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외부에서 열을 공급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에너지를 얻어 날아가는, 남들은 끓을 생각도 하지 못하는 때에 기체로 차고 오르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갑작스런 깨달음은 서서히 그를 정상적인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평범한 사람들과의 친분과 애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사랑 없이는 견딜 수 없는 속성을 가진 우혁으로서는 쓸데없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경계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과 섞이어 중요하지도 않은 편견과 이기로 가득 찬 대화에 적극 끼어 드는 것은 자존심이 더욱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가능한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그저 웃기만 하다 굳이 친구들이 그의 의견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한에 있어서만 알쏭달쏭한 핵심을 겉도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곤 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넌 그렇게 가만히 있으려면 왜 우리들하고 같이 다니냐?"
"너희들을 좋아하니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면 모두들 어이가 없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저 놈의 '좋아하니까'뿐, 도대체 네 머리 속에는 뭐가 들어있냐?"
"우정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
또래들과의 대화는 인간사이의 애정이라는 차원을 떠나서는 그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는 독서와 사고를 통해 조금씩 자신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진정한 길잡이는 책의 형태로 존재할 뿐 현실 속의 어느 곳에도 그와 함께 하며 이끌어줄 동지는 없었다. 그럴수록 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심해만 가고 우혁은 계속 말수가 적은 학생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움을 잉태하는 세상 속에서 침묵은 대단히 훌륭한 방어수단이었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폭발한 것은 짝지가 양아치같은 급우 세명에게 난삽한 폭행을 당하고 나서였다. 시퍼런 멍이 구렁이처럼 휘감은 친구의 몸을 보며 아무리 두려워도 더 이상 침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그렇지만 그 방식은 정정당당하여만 했다. 이왕 몸을 드러냈으니 더 이상 비겁하고 싶지 않았다. 폭행범들을 불러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보상을 약속하지 않으면 교무실에 알리겠다고 사전통보를 하였다. 그리고 며칠뒤 그는 교무실에서 학생부 교내계 선생님에게 사건의 전모를 고발하고 있었다. 전과가 누적된 한 아이가 퇴학 처분을 받고 두 명은 각각 무기정학과 유기정학을 당하였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흐르고 우혁은 밤 늦은 학교 화장실에서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복수를 꿈꾸는 세명과 마주하였다. 손에는 당연히 쇠 파이프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망쳤어!"
"나, 나는 아니야!"
강증산을 배반하고 자신을 위한 종단에 탐닉하는 변절자처럼, 또 다른 비겁으로 신상의 위기를 모면하는 발언이 끝나며 우혁의 후원자들이 밀어 닥쳤다.
"이 개새끼들! 우혁이를 건들일 거면 우리하고 먼저 끝장을 보자!"
세력에 밀린 그들이 모두 담을 타고 도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통쾌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나서고 싶었던 세상에 비겁을 남긴 자신이 초라하였다.
그렇게 또 다른 몇개월을 흘리고 수학여행을 맞이하면서 더욱 어려운 일이 생겼다. 여행의 마지막 날 인생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술 담배를 숙소로 들이기로 한 20여명의 같은 방 친구들과 의견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일반 음료수나 과자 등으로도 충분한 추억이 된다며 우기는 그는 모든 급우를 적으로 돌려야 했다. 정당함을 등에 업은 그의 승리는 당연하였으나 우혁은 너무나 가혹한 대가를 치르어야만 했다.
여행이 끝나고 등교를 한 우혁은 자신이 외톨이가 되었음을 알았다. 공부를 잘 하는 급우들은 진학을 핑계로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절친하게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배신자 취급했다. 그 결과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채워주던 만큼의 깊고 따스한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고 정정당당했던 대가를 너무나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왕따가 두려워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등을 두드려 주는 친구들마저 없었으면 더욱 암울했을 것이나 드러내지 못하는 우정은 우정이 아니었다. 외롭고 쓸쓸함이 온몸을 적셨다.
그런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그의 독서는 점점 편협해졌다.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운 존재들의 이야기로 편중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위대한 존재들도 다수의 탄압을 피해 가끔은 숨고, 또 가끔은 비겁하였다. 하물며 위대하다고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야 불의를 행함에도 핑계가 있을진대, 정의를 행함에 있어 숨고 드러남이 어찌 비겁의 잣대로 마음을 흔들 수 있는가?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숨어서 행동하기로 결심하였다. 비겁의 이름을 지혜로 바꾸어 버렸다. 그렇게 이름을 숨긴 정의의 투사가 되어 살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그림자가 되어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적지 않은 실수를 더 저질렀다. 친구에게 돌아올 아르바이트를 다른 여학생에게 돌려버린 교수와 정면충돌을 하고 그 화를 피하기 위해 군대로 가는 기차를 타면서, 졸병들에게 상습적인 폭행을 일삼는 고참과 철창 행을 각오한 주먹다짐을 벌이고 중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우혁은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었다. 비록 학우들에게는 인기를 얻을 수 있었지만 교수들에게는 요주의 학생으로 낙인찍혔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졸병들에게 얻은 이익이 고참들의 경계로 인해 상쇄되어 결국에는 남는 것이 없는 장사였던 것이다. 그는 손해가 없는 좀 더 완벽한 행복을 원했고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서야 비로소 정교한 솜씨를 자랑하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자랑스럽게 살아왔었어! 세상에 맑은 물이 된다는 생각으로 언제나 가슴 뿌듯했는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와 버렸나?'
낙동강의 물결은 잔잔하게 마지막 햇살의 몸부림을 받아내고 있다. 잠시후면 어둠이 깔리고 그의 몸과 갈대와 강물은 하나의 색으로 합쳐갈 것이다. 단순한 빛의 차단만으로 삼라만상이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그의 마음을 적신다.
그 사건이 있고 난 후로 이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경찰에서는 범인의 신분조차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혁은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하다. 주변의 그 누구도 그에게 의혹의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너무나 평범하고 온건한 시민의 모습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환경주의자라는 것도, 불의를 대하면 꼭 응징의 절차를 밟는다는 것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두 명은 너무 많다. 혼자라야 한다. 그것만이 실수를 하지 않는 방법이다. 언론은 떠들어대었다. 극렬 환경주의자의 소행임이 분명하다고. 그러나 아무도 우혁의 흔적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심지어는 범인이 잡히는 경우를 대비해 온갖 법적 대응과 여론에의 호소를 준비하고 있는 환경단체의 지도자나 추종자들도 그가 그들의 동지임을 알지 못한다.
보통사람들로부터의 사랑과 세상을 개혁하는 선구자로서의 자부심을 모두 충족시키는 그의 생활은 일상과 투사의 길을 넘나드는 긴장감까지 합쳐 더욱 만족스러웠다. 시간이 흐르고 고참이 되었을 때 그는 절묘하게 자기의 생각을 숨기고 양측에게 모두 호감을 사 커투사와 미군 사병(GI)으로부터 동시에 존경받는 유일한 하사관이 되어 있었다. 커투사들에게 불공평한 행위를 하다가 강등이 된 몇 명의 미군도, 보급계의 물건을 빼돌려 팔아먹다 헌병에게 잡혀간 오병장도 자신들의 불행이 우혁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우혁은 그저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 좋은 전우였을 뿐이다.
상병을 달고 포천에서 팀스피리트 훈련을 수행하다 한밤중에 야전간이 침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루티넌트(부관)의 권총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운명처럼 그 물건이 꼭 필요할 것 같은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장소로 두 번이나 작전을 나와본 우혁은 전임 CO드라이버(중대장 운전병)에게서 알아두었던 술처럼 금지된 물건을 숨겨두는 조그만 바위 틈새를 알고 있었고, 소음기까지 달린 그 총은 당연히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두운 공간에서 비닐봉지에 쌓인 채 몇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MP(헌병)들이 들이닥치고 중대는 발칵 뒤집혔다. 같은 텐트에서 생활하던 군인들은 물론이요, 그 텐트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병과 장교가 모두 일일이 불려 다니며 치밀한 조사가 펼쳐졌지만 결국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 삼엄한 경계 속에서 우혁은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자신이 그토록 철저하게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리라는 것은 생각 밖의 일이었다. 털끝만큼의 떨림도 없었다. 미래를 대비한 이 정도의 일은 숱하게 넘어야할 산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난 평범한 인생을 살아갈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 권총 하나쯤은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물건이다. 이렇게 위안하며 도둑질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몰아내었다.
ETS(제대일)를 맞아 2년간 정들었던 막사를 떠나, 커다란 가방하나에 개인 짐을 싸들고 왜관 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를 기다리던 중 그는 갑작스런 MP들의 수색을 받았다. 1년 전 권총 분실사건 용의자의 제대를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가 불시에 검문을 하는 그들을 보며 역시 미국의 헌병답다고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소의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허술하게 처신할 것이면 아예 행동에 옮기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일년정도는 더 기다렸다가 포천으로 가서 물건을 찾아올 것이다. 너희들의 수사망에 쉽게 걸릴 이 정우혁이 아니란 말이다.
'차라리 그때 발각되어 감옥이나 조금 살고 나오는 것이 나을 뻔했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신중하고 철저한 일 처리 때문에 더 큰 고통 속으로 빠지다니 인생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술과 담배를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런 화학물질에 기대어 살아가는 족속들을 비웃곤 하던 그였다. 삶 속에서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좌절은 맨 정신과 마음으로 받아낸다는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제기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지만 기대했던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고 갈대 숲에 잠들었던 이름 모를 새들만이 일부 날아오른다. 비장한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한 사람의 죽음을 뒤로할 때,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담담한 마음으로 신속하게 현장을 빠져 나와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철저하게 위장이 된 상태에서 일상생활에 임해 왔다. 투사에게 죄책감이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인 셈이며, 하물며 그 대상이 죄악의 원흉인 다음에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우혁은 투쟁의 핵심을 환경운동에서 찾았다. 그것만이 인간들이 같은 종족과 다른 생명체들에게 행하는 해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다른 것들은 고작해야 서로 잘 살기 위한 이기심의 조그마한 표출로 최악의 경우 다소의 인간들을 죽이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죄의식도 없이 대부분의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환경의 파괴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식물에게서 삶의 터전을 빼앗아버리는 지구의 멸망을 향한 협주곡이었다. 그것을 막는 것이 그에게 남겨진 절대절명의 과업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숭고한 일이라 할지라도 목표의 달성을 위해 폭력이나 살인 등의 방식을 쓰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믿었다. 물론 한두 사람을 죽여서 완전히 해결될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았겠지만 환경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범죄였다. 그러나 신문에서 "왜관 미군부대 대량의 기름유출"이라는 기사를 접했을 때 우혁은 자기의 투쟁이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변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환경단체들은 즉각 실태조사를 벌여 수년간에 걸친 기름과 미정화된 폐수의 무분별한 유출로 수천평의 땅이 이미 썩어 버렸고, 오염지역이 점차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언론의 보도와 부대 앞의 시위를 통해 대책마련을 촉구했지만 SOFA(한미행정협정)를 무기로 버티는 미군 측은 아무런 사과나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착취는 그토록 몰염치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친 환경주의자들과 언론은 서서히 그 사건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사건자체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혁은 그럴수록 더욱 강한 전의를 불태웠다. 미국인들과 2년 동안 함께 살면서 은연중에 느꼈던 인종차별에 의한 모욕감이 감정의 표면으로 솟아올라 30년이 넘게 형성된 미묘한 애국심과 뒤섞여 상처받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회복하라고 요구했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준비로 훔쳐낸 권총 그리고 그가 근무했던 캠프 캐롤의 습관적이고도 지속적인 환경파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않는 부대 사령관, 이 사건의 해결에 우혁 이상의 적임자는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을 정한 그는 일주일의 여름휴가를 광복절과 일요일 연휴와 연계해 10일간의 여유를 얻었다. 캠프 캐롤에는 서문과 북문이 있다. 북문은 주로 802 공병대대의 차량들이 이용하고, 서문은 69 수송대대가 드나들었으며 부대 사령관은 69 대대장이 겸임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혁의 감시대상은 서문이었다. 대구의 한 여인숙에 숙소를 정한 그는 새벽같이 왜관으로 올라가 미리 보아 두었던 인적이 없는 산등성을 기어올랐다. 망원경의 둥그런 시야 속에는 서문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이 잡혀져 올라왔다. 이제는 기다려야 한다.
오전 10시쯤 목표하는 차가 눈에 들어왔을 때 우혁은 온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범퍼에는 선명하게 69-6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6은 대장의 상징이요, 69는 대대의 표상이다. 중대장은 중간에 중대를 의미하는 앞파벳이 붙어있는 3/4톤 컥비로 공무를 보러 다닌다. 미군 장교들은 개인적인 용도로 군용차를 이용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는 저리도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작자들이 약한 국가와 국민에게는 왜 그리도 잔인하고 예의가 없는지. 그는 즉시 시간과 차가 나간 방향을 기록한다. 규칙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거사를 내년으로 미뤄야 한다.
잠복한지 3일째 되는 날 저녁 6시쯤 병사들을 실은 10여대의 차량이 대구로 향하는 국도로 사라지고, 밤 12시가 되어 69 대대장의 차가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한 우혁은 강렬한 확신을 얻었다. 작전이다. 부대 근처에서 행해지는 대대단위의 소규모 작전이라면 보통 3일에서 5일에 걸칠 것이고 대대장은 비슷한 시간에 시찰을 나갈 것이다. 하루 더 관찰에 시간을 할애했다가 3일만에 끝나는 작전이라면 낭패다. 모험을 건다. 잘못된 판단이라면 올해는 포기한다. 새벽에 산을 내려와 대구로 향하던 우혁은 낙동 강변에 늘어선 미군들의 텐트와 장비를 보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강변을 온통 파헤치고 농작물을 망가뜨리면서도 나라를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항의하는 한국 농민들을 도리어 비웃고 힐난하던 백인들의 야비한 입 언저리가 눈에 어른거렸다.
준비과정에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그는 기동력을 위해 승용차를 사용하기로 한다. 11시 반이 넘은 국도 주변의 어둠에 차와 몸을 숨기고 대대장을 기다린다. 시간이 되고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고 달려올 때 우혁은 신음소리처럼 낮은 소리를 흘린다.
"규칙적인 너희들의 습관이 나를 돕는구나!"
모퉁이를 도는 차를 향해 무턱대고 걸어가자 컥비는 사고를 피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며 길가로 밀려나간다.
"What the fuck is this!"
튀어나오는 욕설을 귓가로 흘리며 재빨리 몸을 날린 그는 대장이 타는 오른쪽 뒷문을 열고, 작전차량에 잠금 장치를 하지 않는 미국 군대의 약점을 비웃으며 번쩍이는 계급장 위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렸다. 동시에 운전병의 어깨와 허벅지를 관통시킨 그는 무전기의 마이크까지 박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역시 미제 소음기는 성능이 좋다.
"Is this battalion commander?(이자가 대대장이지?)"
두려움에 질려 'Yes, sir!'를 반복하는 병사의 머리를 때려 실신시키고 승용차에 올라탄 우혁은 차량의 왕래가 드문 국도변 왜관 톨게이트를 피해 성주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향해 새로이 뚫린 왕복 8차선 도로로 차를 몰았다. 12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도로는 차들의 물결로 술렁거렸고, 그 틈에 섞인 하얀 승용차 한 대는 사건이 나고 채 반시간도 되지 않아 대구라는 대도시 속에 묻혀 버렸다.
갓길에 잠시 차를 멈추고 낙동강 위를 지나는 고속도로의 다리 아래로 슬며시 권총을 떨어뜨리는 우혁을 주의 깊게 쳐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국에서 뽑힌 유능한 수사관들도 총알의 고유번호를 제거하는 치밀함까지 보인 8년 전의 커투사 전역병을 의심하여 파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저 이름을 대면 알만한 환경운동과 관련된 과격분자 몇 명이 경찰서를 드나들었을 뿐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전국은 전대미문의 미군 대대장 살인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현장에 떨어져 있던 Green peace(국제환경연합) 스티커는 몇 달 전의 폐유 유출사건과 이번 테러의 연계 가능성을 시사했고 세상은 우혁이 목표한대로 환경보존, SOFA, 애국심 등을 주제로 한 논쟁으로 들끓게 되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는 대부분의 언론들은 환경보호나 불공평한 SOFA 개정을 위한 노력은 좋으나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조하거나 폭력을 동원하는 것은 시대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위험한 발상이라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갔지만 한겨레신문사는 '안중근 이후 최대의 쾌거'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게재했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신념에 차있던 우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 선을 본 아가씨와 결혼을 약속하고, 양가 부모까지 대면을 마친 남녀는 자연스레 여관을 찾았는데 불행하게도 예비신부는 처녀가 아니었다. 어차피 삼십이 넘은 여성에게 남자 경험이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이기에 철저하게 첫 경험인 척하는 아가씨의 태도에 조금 기분이 나빴을 뿐 이런 일로 파혼까지 치닫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날 버스 안에서 만난 키가 훤칠하게 큰 여인에게서 발생되었다.
길게 머리를 늘여 뒤로 묶고 호사스럽지 않은 핸드백을 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우혁은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처음 보는 여자를 따라간 그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프로포즈를 했고 그녀도 거부하지 않고 만남을 가져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결혼을 앞둔 아가씨를 만나 혼인전 성에 대한 불성실과 진실의 은폐를 이유로 파혼을 선언했다. 치욕스런 과거에 대해 용서를 빌며 매달리는 여자를 냉혹하게 뿌리치는 우혁은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 속의 악마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긴 했으나 억지로 무시하였다. 일생에 한 번 느끼기 어려운 감정을 핑계로 스스로 눈을 멀게 하였다.
그는 이런 느낌이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오기 힘든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믿었으며,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정에 휩싸인 그는 최선을 다했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 직장 앞에서 기다리기가 일쑤였고, 만원버스로 출근하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아침마다 수많은 승객의 방패막이를 자청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간의 만남 뒤에 버스 속의 여인은 이미 사귀는 청년이 있다며 그를 떠났고, 그제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는 번민에 빠졌다.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반면에 평범한 한 여인의 가슴을 찢어 놓은 죄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돌아서려면 그녀의 부정직을 확인한 순간 돌아섰어야 했다. 더 나은 결혼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현실적 여건을 이유로 눈 감아주려던 자의 갑작스런 태도의 돌변은 명백한 변절이었다. 배신 당한 그녀도 주변의 친지들도 심지어는 가족들마저도 자신의 비리를 알지 못하나 스스로를 속이긴 불가능하다.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 정의의 사도로서의 자격이 사라져 버린 우혁은 빈 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내가 감히 누구를 심판하는가? 특히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았던 2년 전의 기억은 그의 양심을 극렬하게 압박해 들어왔고 견디지 못한 투사를 지금 이 낙동강변으로 몰아온 것이다.
"진정한 투쟁이란 타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자기반성의 목소리여야 함을, 일방적인 강요가 아닌 의견의 조율이어야 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살리는 작업이어야 함을 ...."
새로운 깨달음으로 자신의 일기장 맨 앞 쪽에 굵은 글씨로 써 넣은 투사의 변이 서서히 그의 가슴을 파고들어 극심한 아픔의 상처를 만든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는 투사를 자처하려면 보다 완벽에 가까워야만 한다. 타인을 향해서는 보다 온건한 판단의 잣대를 들이밀고, 자신을 위해서는 훨씬 엄격하고 가혹한 잣대로 판단해야만 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정신으로는 대의를 실천하지 못한다. 대를 위하되 어떠한 소의 희생도 막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성과를 얻는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마음은 대를 위해 더 큰 대를 희생하는 어리석음으로 종결된다. 깨달음이 악행의 시간보다 늦다고 하여 과거를 쉽게 용서해서는 안되는 법, 그는 보다 충분히 고통스럽고 보다 충분히 현명해져야만 한다.
어느덧 동쪽 하늘에서는 자신의 나머지 얼굴을 숨긴 채 왼쪽만 빛나는 낮달이 떠올라 서쪽을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새로운 새벽이 시작된다.
첫댓글 즐독 합니다
단편소설에 답글이 달린 것을 보고 님인줄 알았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