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과 월출산 소풍~
일 자 : 2009년 9월 5일~6일
장 소 : 전남 영암군 도갑리 왕인박사유적지와 도갑사, 개신리 월출산
산높이 : 809M
산행코스 : 천황사지 주차장→구름다리→매봉→사자봉→천황봉→금릉경포대→경포산장→주차장
부산에서 목포까지 바다어귀를 살짝 비껴서 이어진 2번 국도는 참으로 한가롭고 아름다운 길이다.
순천에서 조부모님 산소의 벌초를 마치고 들어선 2번국도~
갈대만으로 유명한 순천만 입구를 지나고 낙안읍성을 거쳐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인 꼬막으로 잘 알려진
벌교와 득량만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먹고사는 녹차 밭 보성, 그리고 도자기로 유명한 강진 등 도로에서 약간만 벗
어나도 진풍경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이 2번 국도이다.
우측으로 솔내음을 가득안고 부는 상큼한 산바람과 좌측으로 짠 갯내음 물씬한 알싸한 바닷바람을 동시에 맞으며
영암으로 향했다.
영암!
영암(靈岩)이란 지명은 월출산의 구정봉에 있는 흔들바위에서 기원했다 한다.
높이 1m에 둘레는 열 아름쯤 되지만 몇 명이 흔들어도 똑같이 움직이고‘신령스러운 바위’라는 뜻에서 월출산 아
랫마을을 영암으로 불렀다는 것이다.(동국여지승람).
전국에서 기가 세기로 유명한 고장답게 氣라는 글을 많이 접할 수가 있었고 그래서인지 유명하고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백제시대의 왕인박사를 비롯해 신라말엽 풍수지리의 시조이며 불자인 도선국사와 조선시대세조의 스승 수미왕사,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 선생, 그리고 본인은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원래 고향이 영암인 바둑계의 거목 조훈현
국수 등이 그들이다.
혹시 영암아리랑의 하춘화도 이 고장일까?
군서면에 있는 왕인박사 유적지를 찾았다.
도갑산 문필봉아래 자리한 유적지는 넓고 깔끔했으며 유적지에는 왕인박사 동상과 비단잉어가 가득한 연못, 그리고
수석전시관, 홍살문, 사당, 정자, 박사 생가터 등이 있는 웬만한 놀이공원 규모의 크기였다.
왕인박사의 생가터를 지나 도갑산 문필봉에는 문산재라는 집과 집 앞에 돌로 깎아 만든 석상이 있다.
유적지 측에서는 문산재가 왕인박사의 공부하던 곳이라 하고 석상은 후손들이 만든 왕인박사상이라 한다. 하지만
도갑사 및 불교계에서는 석상을 문수보살이라 하고 문산재를 문수암이라는 절 암자로 주장하는 측면도 있던 것 같
다.
지금도 50세가 넘은 마을 어른들은 문수암이라 부르고 있고 일부 지도책에서도 문수암이라 표기되어 있는 것을 나
도 확인 했었다.
만약에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문산재를 억지로 끼워 넣은 사실이라면 크나 큰 역사적 오류를범하고 있고 후손들에게
잘못된 역사를 가르치는 낯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적지를 나와 도갑사로 향했다.
월출산 국립공원에 포함된 도갑사는 국립공원답게(?) 주차비 포함 거금 7,000원을 지붏해야 도갑사로 들어 갈수가
있다.
버들치 등 민물고기가 노니는 맑은 물이 있는 도갑계곡의 한쪽 일주문을 지나 서어나무와 동백이 양옆에 도열해 있
는 돌계단을 지나면 절문이 나타난다.
번뇌를 벗어 버린다는 절문에 해당하는 도갑사의 제1의 구경거리인 국보50호 해탈문은 해체 복원중인지 천을 둘러
쳐 아쉬움이 컸지만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만큼 다시 복원이 필요한 듯 했다.
신라말엽 왕의 명령으로 문수사라는 절터에 도선국사가 도갑사를 지었고 그 뒤 수미왕사가 조선시대 때 다시 지은
것이 한국전쟁 때 거의 불타 없어지고 다시 지은게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근래 새로 중창된 대웅보전은 2층 구조로 전각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불로 약사여래와 아미타불이 자리하
고 후불탱화는 특이하게 목조각으로 되어있었고 흔치 않은 닫집까지 만들어져 있다.
외부 구조는 2층이 팔작지붕구조로 되어 있고 부연에 다포식으로,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화려
한 단청도 웅장하고 화려한 전각모습에 한몫하고 있었다.
순천에서 내리쬐는 태양아래서 벌초를 하고 곧바로 영암으로 와 하루 종일 쏘다녀 지칠대로 지친 마누라의 지청구
도 있고 해서 저녁 무렵 얼큰한 짱뚱어탕에 밥을 말아 먹고 무거워진 몸을 영암읍에서 눕혔다.
월출산!
호남정맥의 한쪽 옆에서 솟은 산으로 국립공원 20개중에 가장 막내인 20번째로 지정된 산이다. 면적도 막내답게 가
장 작으며 지리산의 거의 10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월출산은 영암읍, 군서면, 학산면, 강진군 성전면을 품는다.
산 대부분이 화강암 암반으로 이루어진 월출산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장관에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
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구름다리에서 보는 장군봉에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광암터의 풍경은 자그마한 카메라로는
한번에 표현 할 수 없어 3장을 이어야만 절경을 표현 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마치 설악의 공룡능선을 옮겨놓은 듯하였다.
산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화강암 암반으로 마그마가 지하에서 서서히 식으며 이루어진 것으로 영암땅에 그 천황봉이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얼마큼의 장구한 세월이 흘렀을까?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 중 한 구절에 월출산이 등장한다.
월출산이 높더니만은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왕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워 버렸다.
두어라 햇살이 퍼진 다음 안개 아니걷히랴.
임금 주위에 있는 간신배들을 비판하는 시조이지만 분명 월출산 봉우리를 천왕봉으로 표현하고 있다.
혹자는 월출산 정상 봉우리를 윤선도도 천황봉으로 표현하여 일제의 잔재와 관련이 없다 한다.
일제의 잔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윤선도가 천황봉이라 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인터넷 시대에 잘못 된 정보는 일파만파로 퍼져 그것이 정답으로 굳어져 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것에 대한
심각성을 너무 간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심정이다.
각종 기술과 한자문화를 전수해 일본 고대문화인 아스카문화를 일으키게 하여 일본의 대스승으로 불리우는 왕인박
사의 업적과 그 일본이 대스승의 나라를 침탈해 지명까지 바꿔버린흉악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우울한 역사
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 원본 사진(도대체 왕자가 왜 황자로 보인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 월출산 산행도
↗ 영암읍에서 도갑사 가는 길 (도갑사 입구에서 조금 더 지나면 왕인박사 유적지가 나온다)
↗ 유적지 입구
↗ 왕인 박사는 이곳 영암이 고향으로 태어난 곳의 지명을 聖基洞이라 하며 박사와 관련된 이름의 유래가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왕인박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일본사에 나온 것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生死의 연대도 불확실하다. 백제때의 근구수왕 때로 짐작할 뿐이란다.
당시 백제와 왜의 교류가 활발하고 백제가 문화적인 우위에 있어 여러 학자와 기술자들이 파견되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아직기와 왕인이다. 왕인의 후손들은 아직도 일본의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왕인 박사는 유교의 경전인 논어와 한자를 일본에 처음 알려 준 사람으로 일본 아쯔까문화의 시조라 할수 있으며 대은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허나 실제 일본에서는 한자를 알게 된 시기가 차이가 난다 하여 그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한다.
↗ 유적지내에 있는 연못에 배롱나무(흔히 꽃이 오래간다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백일홍이라는 이름은 이 나무에게는 붙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엄연히 백일홍이라는 국화과의 식물이 따로 존재하고 있는데도 겹쳐 부른다는 것은 어딘가 억지스런운 면이 보이는 것 같다.
줄기가 붉어 나무백일홍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줄기가 수피를 벗으면 매끈해서 누드나무라고도 하고 손으로 툭 치면 바르르 떤다 해서 간지럼 나무, 꽃이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피고 진다 해서 양반나무라고도 불리운다. 중국 명칭은 紫薇花라 한다.
↗ 역마살이 다분한 내 덕에 따라 다니며 수발하기 바쁜 마눌.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에 힘든 벌초를 하고도 내색하지 않은 사람이 고맙다.
↗ 왕인박사 생가 앞 개천의 세심교
↗ 왕인박사의 생가터 (담장과 석축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생가터에서 문필봉쪽으로 올라 가면 문산재와 양사재가 있고 돌에 새겨진 상이 나온다.
영암이라는 고장이 워낙 기가 센 고장이어서 유명한 분들이 많이 나온다고 하며 그 중에 왕인박사와 도선국사가 대표적이라 하는데 도선국사가 지었다는 도갑사측에서는 문필봉에 있는 문산재와 양사재, 그리고 석상이 불교 유적이라 주장하는 측면이 있다. 문산재는 문수암이라는 암자라 하며 아직도 마을 어르신들은 문산재를 문수암이라 부른다 한다. 석상은 왕인박사가 아닌 문수보살상이라 하며 우리나라 어느 역사서에 나와 있지도 않은 왕인박사의 일대기를 지어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주장한다.
왕인박사 유적지를 나와 월출산쪽으로 5분여 가면 도갑저수지를 에둘러 도갑사에 이른다.
↗ 도갑사의 입구를 상징하는 일주문
↗ 절 입구 계단. 좌우로 큰키로 굴참나무가 있고 신갈, 개서어나무도 뒤질세라 세력을 뻗치고 있다. 단풍나무,쪽동백,동백나무등이 중간을 점령하고
닭의 장풀, 씀바귀, 고사리류들이 나름대로 밑에서 생을 유지하고 있다.
↗ 도갑사의 5층석탑과 그 옆에 느티나무 거목. (도갑사는 신라 말엽 영암 출신의 도선국사가 중국 유학 후 옛 문수사 절터에 창건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고
전쟁과 화재등 여러 재난을 거쳐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처음 도갑사 창건시 유명한 설화가 있다.
국운이 기울어 가는 신라 말엽 ~
월출산 기슭에 신라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웅장하게 99칸자리 절을 짖도록 왕은 명을 내린다.
그리하여 國手로 명성이 자자한 大木 사보라 노인이 일을 맡게 되어 팔순이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서까래를 다듬는다.
그런데 상량식을 며칠 앞두고 다듬어 놓은 서까래를 자로 재어 본 사보라 노인은 그만 아연 실색 하고 만다.
어이 된 일인지 도면대로 낱낱이 자로 재어 잘라 놓은 서까래가 얼토당토않게 짧아져 있는게 아닌가?
몇번을 자로 재어 보아도 짧은 서까래가 길어 질리가 없었다.
새로 나무를 구할수도 없었고 제 날짜에 법당을 지을수 없었던 노인은 왕명을 어긴죄와 서있는 나무만 보아도 나이를 알아 맞추는 자신의 명성에 먹칠을 하게 되어 그만 몸져 눕고 만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의 며느리는 지극정성으로 시아버지를 공양하며 약을 달여 먹이지만 좀체로 나아 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시아버님을 졸라 사연을 듣고 난 며느리는 어느 날 ~
집안에서 바깥의 서까래를 보는 순간 한줄로 가지런한 서까래가 두줄로 보이는게 아닌가!
불빛과 그림자가 비쳐 두줄로 보인 것이었다.
그때 며느리는 시아버님께 달려가 말했다.
"짧아진 서까래를 두줄로 덧대면 더 튼튼한 법당이 되지 않겠습니까?"
얼른 이해가 안가던 사보라 노인은 머리속에 그려진 법당이 있어 당장 일어나 불사를 다시 하게 된다.
"그렇구나! 부연하면 되겠구나, 날렵하고 육중해진 부연한 지붕의 멋을 감히 누가 흉내 낼수 있으리오!"
노인은 언제 몸져 누워 있었냐는듯 손끝에서 춤을 추는 듯한 신들린 기술을 발휘하여 법당을 완성한다.
이리하여 세워진 道岬寺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附延 양식의 지붕을 가진 절이 탄생하게 된다.
지금이야 팔작지붕에 부연식이 많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발상이었지 않나 싶다.
며느리가 도와서 된 서까래라 해서 婦延이라고도 부른다는데 그건 좀 억지스럽다.
↗ 보기드문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대웅보전은 1970년대에 소실된 것을 올해 초쯤 낙성을 한 것이다.
세존이 문수와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둔 大雄殿과는 달리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협시불로 둔 전각을 한단계 높여 大雄寶殿이라 한다.
↗ 조성된지 얼마 되지 않아 화려한 단청이 눈부시다. (팔작지붕에 다포식 건축양식)
↗ 물을 담아 두거나 곡물을 씻는다는 도갑사 석조
↗ 도선국사와 수미왕사의 영정이 있는 國師殿과 우측에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번역 연구하는 일을 하며 왕사로 책봉된 수미왕사의 기록이 새겨진 守眉王師碑閣
↗ 천불전에는 천불이 없었다. 이제 봉안을 시작하려는지 1기당 50만원이라는 금액이 뜨악하게 만들었다. 50만원 곱하기 1,000이면 5억
↗ 천불전에 불상도 대웅보전과 같다. 대신 대웅보전에는 후불탱화가 조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천불전에는 탱화로 되어있다.
↗ 巫佛習合의 결과물인 산신각(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 유신론에서 무불습합을 비판하며 불교의 개혁을 피력한다)
누구나 절을 찾는데엔 이유가 있을것이다.
불자들이면 부처를 알현키위해 가고 아님 문화재를 구경하러 가는 사람도 있을 터이고 친구따라 강남 가듯이 가는 사람도 있겠고 누구든 절집을 찾는 이유가 있겠지만 불자가 아닌 나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싶다. 절은 어딘가 속세의 번잡함과 어지러움에 따로 떨어진 별개의 장소인 듯, 시간이 잠시 멈추어 진 공간같은 여유가 있어 좋다.
그렇게 절을 찾다보니 미처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한편으론 얼토당토 아닌 말이 사실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을 볼땐 어이없어 씁쓸한 기분도 느끼곤 한다.
형님 부부가 목사, 전도사이시라 만나면 교회에 나오라 성화지만 난 절집이 좋다.
↗ 도갑사 산신각내의 산신상 (보통 三聖閣이라하면 독성각, 산신각, 칠성각을 의미하며 七星閣은 북두칠성을, 山神閣은 단군을 의미하는 산신을, 獨聖閣은 혼자 깨우친 분 (혹시 나반존자, 불교에서는 다른 의미의 해석도 있음)을 모시고 신성시 하는 우리나라의 토속 신앙의 결과물이다. 독성과 산신은 둘다 노인의 형상으로 하얀 수염과 긴 눈썹을 지니고 있지만 산신만이 호랑이와 같이 등장한다. 일부 절에서는 삼성각에 불상을 세우는 절도 봤다)
↗ 도갑사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미륵전 아래의 용수폭포(폭포 바로 위에 자그마한 정자가 있어 운치가 그만이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이 있는 미륵전은 촬영 절대금지라는 팻말에 겁이나 담질 못했다.
↗ 도갑계곡(버들치등 민물고기가 많았다)
↗ 꽃며느리밥풀
↗ 산박하인듯 한데 아시는 분 급 구함! (점점 눈이 흐릿해져가는 나이에 이런 작은 꽃을 볼려면 돋보기를 써야 할정도가 되어 씁쓸하다)
↗ 미륵전 아래 도갑계곡 다리
↗ 남부지방에서만 자란다는 굴거리나무 (처음 접하는 나무)
↗ 이질에 특효라는 이질풀
↗ 단풍잎 (잎이 5~7조각이면 단풍, 9~12이면 당단풍, 3조각이면 중국단풍, 그밖에 애기 단풍, 봄부터 붉은 색을 띠는 적단풍))
↗ 길가에 흔한 꽃이지만 카메라에 담고나면 언제나 빛을 발하는 닭의 장풀이다. 파란색이 환상적이다.
도갑사구경을 마치고 월출산 천왕사입구로~
↗ 천황사 매표소 입구
↗ 월출산엔 특이하게도 가로수로 중국단풍이 많이 심어져 있다. 워낙 속성수이고 다산성을 가진 나무라 우리나라 고유 수종은 겪어보지 못한 적수를 만난 셈이다.
나에게는 정이 안가는 나무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나무 (어느 종을 가려 호불호를 가리는 나도 못났다)
↗ 천황사 입구 들머리에서 본 월출산(우측이 장군봉, 좌측으로 멀리 있는 천황봉, 높이 보이는 봉우리가 사자봉, 맨 좌측으로 구정봉)
↗ 들머리 천황사쪽으로 ~ (여기도 온통 중국 단풍 일색이다, 워낙 속성수고 값이 싸 조경업자의 속셈이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하다. )
↗ 월출산 캠프장
↗ 천황봉쪽으로~
↗ 본격적인 오름 산행길(토종 단풍이 반갑다)
↗ 남부지방이라 그런지 동백이 지천이다. 특유의 두꺼운 잎이 참기름 바른 것처럼 반질반질한 동백잎이 등로를 안내한다.
↗ 어느곳으로 가든 구름다리로 갈수가 있다.
↗ 다리 건너면 바람폭포쪽으로 가게된다. 이곳으로 해서 바람골을 지나 바람폭포로 해서 직진하게 되면 구름다리를 지나지 않고 천황봉으로 오를 수 있어
고소공포증이 심각한 사람들에겐 우회하는 코스가 된다. 천황봉까지의 거리는 짧지만 급경사의 등로에 질리게 된다.
↗ (옛 사자사지)천황사는 2000년에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중이다. 아담한 대웅전이 요즘 흔한 팔작지붕에 부연식이 없이 단촐한 맛도 정갈하다.
↗ 깨어진 채 외로이 떨어진 천황사 범종(청아한 소리를 냈을 종이 어쩌다 이지경까지~)
↗ 이 바위도 옛 천황사 건립에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 옛날 천황사가 들어서기 전 사자사지 탑이 있었다는 자리.
↗ 그리 높지 않지만 결코 자만할수 없는 산이다. 더군다나 내리쬐는 태양열에 온몸이 불에 물이 끓듯 몸에 수증기가 맺힌다.
↗ 간만에 머리를 들어~
↗ 영암 개신리 마을과 나주, 광주로 이어지는 13번 국도
↗ 개신리 마을과 사자저수지
↗ 큰 암벽이 가로 막으면 그곳이 구름다리 아랫부분이다.
↗ 구름다리 100미터 전
↗ 릿지산행 코스인 암벽 (여기저기에 자세히 보면 하켄이 박혀 있는것을 볼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무관심한듯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앞사람 엉덩이만 보고 간다)
↗ 구름다리 진입로
↗ 구름다리 삼거리 (천황사지 전 천황교 다리건너 바람골로 해서 구름다리로 올라 올수가 있고 반대로 여기서 바람폭포로해서 천황봉으로 오를수가 있다)
↗ 구름다리를 건너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만들어 놓은 쉼터(내 생각대로~)
↗ 어차피 건너야 할 운명이라면 ~ (심판대로 끌려 가는 듯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 청량산의 하늘다리를 건너 본 경험이 있던 지라 까짓것 했지만 밑에 한번 내려다 보지 못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건넜다.
↗ 다리가 흔들린다는 말에 사람이 없는 순간을 노리느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건너서 갔다. ~아이구 챙피해서리~
↗ 청량산 하늘다리는 연두색으로 칠해져 있고 월출산 구름다리는 붉은 색이다. 청량산 하늘다리보다는 짧은 듯 하지만 서로 더 길다고 우긴다.
↗ 사진 3장을 파노라마로 이어 붙인 사진 (천황봉 광암터 능선)
↗ 천황봉 정상이 눈앞에 보이지만 한참을 더 가야 한다.
↗ 마눌
↗ 나도 기념으로~
↗ 사자봉쪽으로 다시 진행
↗ 사자봉 가는 길에 뒤돌아 보며~
↗ 계단길 옆에 며느리밥풀이 있어 내려다 봤더니 엉뚱한 지네가 사람들의 발자국소리에 죽은 듯 하고 있다. 먹으면 허리에 좋다고 잡자고 한다. 백년 더 산다 해도 난 싫다.
↗ 마눌이 무슨 생각에 빠져 있을꼬?
↗ 천황봉으로 가려면 철다리로 이어진 협곡과 능선의 오르 내림을 반복해야 한다.
↗ 사자봉 앞 능선으로~
↗ 사자봉
↗ 돼지코바위
↗ 내려간 만큼 올라와야 하기에 깊은 내리막길에서는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 사자봉 아래 이정표
↗ 산딸나무 한그루가 열매를 잔뜩 품고 있다. 새들의 훌륭한 먹이가 될듯~
↗ 한입에 쏙 빨아 먹으면 달짝지근 하지만 맛은 별로라 새들에게 양보
↗ 천황봉 서쪽 능선 봉우리
↗ 사자봉 옆 703봉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바위가 책바위라는데 어딜 봐도 책같진 않아 보인다.
↗ 사자봉을 뒤로 하고 천황봉으로~
↗ 천황봉 서릉 향로봉, 구정봉으로 해서 미왕재 거쳐 도갑사로 가는 월출산 종주 길 (마치 이빠진 톱날처럼 생겼다)
↗ 월출산 천황봉 정상 (지명엔 천황봉으로 되어 있지만 일제의 소행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에도 천황봉이 아닌 천왕봉으로 나와있다)
↗ 금릉 경포대 계곡
↗ 경포대 삼거리에서 직진하면 천황봉이고 좌측 길은 경포대로 하산하는 길이다.
↗ 지나온 능선길
↗ 경포대로 하산 길에는 온통 산죽으로 터널을 이루고 있다.
↗ 손톱에 물들이는 봉숭아의 조상격이 되는 물봉선꽃
↗ 듣도 보도 못한 처음 접한 대팻집 나무. (수피가 대체적으로 회백색이며 갈라지지 않는다. 물오리나무 수피와 비슷한 듯~)
↗ 대팻집 나무
↗ 갈수기라서 그런지 수량이 많지 않아 전체적으로 물이 귀한 산이다. 월출산에서는 필히 음용수를 많이 준비 해야 한다. 간만에 본 물에 모두들 등산화를 벗는다.
↗ 구정봉에서 내려오는 좌측길과 천황봉에서 내려오는 우측길이 만나는 지점
↗ 산림욕에 좋다는 종은 다 모여 있는 듯한 편백나무와 삼나무, 소나무 숲길.
↗ 일본산으로 남부지방에만 성장하는 삼나무 잎
↗ 물이 별로 없는 경포대 계곡 한쪽에 바위에 끼었지만 더 안정적인 모습을 한 동백나무
↗ 계속되는 하산 길 (산행에 지친 시간이라 하산 길은 짧을 수록 좋을 것 같다.
↗ 경포대계곡의 금릉교
↗ 하산 길
↗ 특이하게 발씻는 곳이 따로 조성되어 있다.
↗ 월출산 날머리
4시간 40여분의 산행을 마치고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좋은 산행 하셨네요
아름답습니다 구경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