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 묘골 박씨 문중의 랜드마크, 태고정(太古亭)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회 사무국장)
묘골박씨
우리 대구에는 400-500년 내력을 지닌 세거 문중이 많이 있다. 그중에는 ‘묘골박씨’라 불리는 문중도 있다. 묘골박씨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충정공파(忠正公派)의 별칭이다. 그런데 별칭이라고 해서 가볍게 보면 안 된다. 왜냐하면 ‘묘골박씨’라는 4글자 속에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직계후손이라는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는 2015년, 2016년, 2017년 3년간에 걸쳐 달성군 하빈면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활동한 바가 있다. 당시 필자가 묘골 해설에 있어 즐겨 사용하는 컨셉이 있었으니, 바로 ‘묘(竗)골·묘(妙)골·묘(廟)골’ 스토리텔링이다.
묘(竗)골·묘(妙)골·묘(廟)골
먼저 ‘마을 터가 묘해서 묘(竗)골’이라는 키워드를 살펴보자. ‘竗’는 ‘땅이름 묘’인데 땅이 묘하게 생겼다는 의미를 담은 글자이다. 실제로 풍수지리에서는 이곳 묘골을 ‘회룡고미혈(回龍顧尾穴·용이 머리를 돌려 자신의 꼬리를 바라보는 혈)’, ‘여성의 자궁혈’, ‘파(巴)자 혈’, ‘귀인봉 혈’ 등의 명당길지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마을의 유래가 묘해서 묘(妙)골’이라는 키워드이다. ‘妙’는 ‘묘할 묘’이다. 따라서 ‘묘(妙)골’은 묘한 동네라는 의미가 된다. 도대체 무엇이 묘하다는 것일까? 바로 560년 내력의 이 마을의 유래가 묘하다는 뜻이다. 아래는 ‘박비(朴婢·朴斐)’ 혹은 ‘박일산(朴壹珊)’ 이야기로 세상에 잘 알려져 있는 스토리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하게 한 번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인 1456년(세조 2) 음력 6월. 사육신에 의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했고, 박팽년 선생 집안은 멸족이 되었다. 남자들은 아버지·형제·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 9명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여자들은 공신이나 관청의 노비가 되었다. 하지만 신의 가호가 있었던 것일까. 당시 박팽년 선생의 둘째 며느리인 성주 이씨는 임신 중이었다. 사내아이를 출산하면 죽이라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지만, 이씨 부인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친정집 여종의 딸과 바꿔 17년을 몰래 키웠다. 이 아이가 바로 ‘박일산[박비]’이며 그가 태어나 자란 외가곳이 묘골이었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많은 옛 기록들은 물론이고,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되어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어 묘(廟)골’이라는 키워드를 알아보자. 주지하다시피 묘골에는 사육신을 제향하는 사우(祠宇)인 ‘육신사(六臣祠)’가 있다. 묘골에 사육신을 위한 사우가 처음 세워진 것은 대략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의 일이다. 이후 그 사우는 ‘하빈사(河濱祠)→낙빈서원(洛濱書院)→육신사’의 변천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이러한 내력 탓에 이 마을을 사당[廟(묘)]이 있는 마을, 곧 묘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1713년(숙종 39)에 발간된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 선생의 문집에 ‘육신사’라는 시와 함께 그 주(註)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묘동육신사재대구(庿洞六臣祠在大丘·묘동 육신사는 대구에 있다)’
여기에서 ‘庿(묘)’는 ‘廟(묘)’의 옛 글자체로 음과 뜻이 서로 같다. 이러한 사실을 참고해볼 때 묘골을 ‘사당이 있는 마을’로 보는 것 역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할 것이다. 참고로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자 명재 윤증의 문인으로 동래부사·호조판서·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묘골의 랜드마크, 태고정(太古亭)
묘골 가장 깊숙한 곳에는 이 마을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자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건축물이 하나 있다. 보물 제554호로 지정된 ‘태고정’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40년 전인 1472년(성종 3), 성종 임금으로부터 사면을 받은 박일산[박비]은 이곳 묘골에 99칸 종택을 지었다. 그리고 종택에 딸린 정자도 하나 지었으니 태고정이다. 하지만 이 태고정은 임진왜란 때 종택과 함께 왜적의 손에 소실되었다. 이후 1614년(광해군 6)에 정자만 다시 복원하였으니 지금의 태고정이다. 참고로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 태고정에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인 한석당(閒碩堂) 박중림(朴仲林)의 신위를 모셨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신위를 육신사 내 별묘인 충의사(忠義祠)로 옮겨 제향하고 있다.
현재 태고정 대청에는 시판이 몇 개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이 하나 같이 다 의미심장하다. 임진왜란 때 묘골은 왜적에 의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묘골에서 유일하게 건물 하나가 살아남았으니 바로 박팽년 선생의 사당이다. 당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가 묘골을 방문하여 이 놀라운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시를 한 수 남겼다. 현재 태고정 대청에 걸려 있는 ‘난후인가백부존(亂後人家百不存)’으로 시작되는 시가 그것이다. 그리고 조선중기의 문신인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은 재미있는 오언절구 한 수를 남겼다. 이 시는 매구마다 ‘태고(太古)’가 들어있는 까닭에 ‘사태고시(四太古詩)’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임란 직후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이 묘골에서 명나라 사신에게 직접 써서 전한 한 오언율시는 그 내용이 자못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 시는 ‘묘골박씨는 충신들의 후예[朴氏忠賢後], 하빈은 순임금이 질그릇을 굽던 곳[河濱舜所陶], 이러한 내력이 있는 땅에 (당신들)명나라 사신이 방문했도다[今朝繡衣過]’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대구와 박팽년
지난 2017년은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대구를 비롯한 선생의 연고지로 알려진 세종시·대전시 등지에서는 대대적인 기념사업이 열린 바가 있다. 참고로 세종시 전의면에는 ‘박동(朴洞)’과 ‘(上·中·下)대부리(大夫里)’라는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대전시 회덕에는 선생의 유허지와 유허비가 남아 있다.
유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승백강(魂昇魄降)’이 일어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선생의 혼은 충주의 불천위사당에, 백은 노량진의 사육신묘에 의지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죽어 이름 석 자를 남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조 충절의 대명사인 취금헌(醉琴軒) 박팽년 선생은 자신의 ‘이름 석 자’와 ‘혈손(血孫)’을 어디에다 남겼을까! 그렇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다 남겼다.
이상끝...
첫댓글 감사히 보고 갑니다...
늘~~기쁜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