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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라 소르코-람(Shira Sorko-Ram)
4월은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에서 죽어간 6백만의 유대인들을 기억하는 달이다 (4월 7일 일몰부터 4월 8일까지). 사이렌이 울릴 때, 모든 차량이 멈추고 사람들은 2분간 서서 묵념을 한다.
그리고 4월 14일-15일에는, 이스라엘 땅을 지키다가 죽어간 23,000명의 유대인 군사들과 테러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2,400명을 기리는 추모일로 또 사이렌을 울린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는 독립 기념일이 있는데,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기쁨의 날 (4월 15-16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심각한 대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의 공포가 66만의 이스라엘 유대인들-죽음의 수용소를 피해 도망 나온 많은 이들-을 움직인 것임을 인정한다. 너무나 압도적인 역경의 변수에도 불구하고 옛 유대 국가를 재탄생시킬 정도의 간절함에 이르렀던 것이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DNA의 일부인 것과 똑같이, 이 민족의 1/3이 죽어갔던 이야기도 이들의 DNA에 있다.
홀로코스트를 설명하는 것은 실상 수백만 명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허나 이것들은 너무나 끔찍하고, 너무나 잔혹하여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5살짜리 아이와 그 어머니가 누가 살아남(아 노역자가 되)고 누가 가스실에서 살해될 것인지의 “선택”을 받는 줄에 서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죽음의 줄로 보내졌다.
자신의 차례가 오자 어머니는 외쳤다. “부디 이 아들을 살려 주세요!” 나치 장교는 자상한 얼굴로 어린 아이를 보더니 오라고 불렀다. 장교는 그 아이를 들어올려 한 번 안아주더니, 벽에 내던져버렸다. 아이는 죽기까지 계속해서 벽에 머리를 부딪혀졌다.
헬레나 프랑크 홀리츠(Helena Frank Holits)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저는 여성들의 죽음의 행진에 있었을 뿐이에요. 친위병에게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어 봤지요. 그는 대답했어요. ‘아무 데도 아니야. 너희가 죽을 때까지 행진하는 거다.’” 행진은 1월의 눈 오는 날로부터 1945년 5월의 비 오는 날에 이르기까지 106일 동안 800km를 이어졌다. 헬레나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다.
1백만 명의 아이들이 총살되고, 가스실에서 처형되고 두드려 맞으며,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이 글을 계속 읽기를 바라는 것은, 유대 민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영웅과 같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또 그들의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자녀들로 구성되었다. 그 중 다수는 어떤 그리스도인, 어떤 제사장, 어떤 세속 유럽인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로 작정했기에 지금도 살아있다. 이 “의로운 이방인들-이스라엘은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중 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다.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기념일-올해 4월 8일-을 기억하며, 이렇게 수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한 라울 발렌베르크의 이야기를 나눠본다.
-다비드 라자루스(David Lazarus)
1944년의 봄이었다. 유럽의 웬만한 유대인 사회는 거의 빠짐 없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은 나치가 다른 나라들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멸절 계획을 가지고 헝가리의 825,000 유대인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마침내 유럽 유대인들이 완전 멸절될 위기에 있음을 깨닫는다. 너무 오래 꾸물거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드디어 미국이 관여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OSS (CIA의 전신) 첩보원들을 통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최대한 많은 유대인들을 구하고자 하는 은밀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쟁 난민 위원회(the War Refugee Board)를 세웠다.
그는 공식 대표 아이버 올슨(Iver Olsen)을 스톡홀름으로 파견했다. 스웨덴의 정부도 헝가리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중대한 시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덴 사람들과 더불어 올슨은 부다페스트 유대인 구출 작전을 지휘할 사람을 찾았다.
헝가리의 825,000 유대인들은, 헝가리 관료들이 미국 및 영국과 비밀 회담을 열고 있었음을 히틀러가 발견하기까지 전쟁의 대부분 기간 동안 안전했다. 그 결과, 1944년 3월, 나치 부대들은 부다페스트로 행군하였고 유대인 멸절 계획은 즉각 시행됐다.
스웨덴은 중립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스웨덴 외교관들은 여전히 유럽 전역을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올슨은 나치 학살 공장의 톱니를 향해 들어갈 각오가 된 스웨덴 사람을 찾았다.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다 할 줄 알면서, 별다른 감독이나 지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독립적인 사람을 말이다.
후에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의 유명 교수가 된 앤드루 네이기(Andrew Nagy)는, 당시 14세로 스웨덴의 은신처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1944년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때 다른 나라에서 지원하는 근처 은신처에 거하고 있던 이들이 체포되어, 도나우(Danube) 강까지 행진하여 나치에 의해 총살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도나우 강둑에 세 줄로 묶인 채 있던 적이 빈번했다. 가운데 사람이 총을 맞으면,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셋이 같이 떨어져 익사했다. 헝가리 나치가 이런 식으로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발렌베르크는 참모들에게 누가 수영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발렌베르크 사무실의 한 여인은 그 사건을 확증했다. “저희는 갔습니다. 그 추운 밤에 도나우 강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물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지요.” 발렌베르크와 참모들은 5-60명의 사람들을 구했다.
~ 발렌베르크의 참모
그리고 스웨덴의 기독교 집안, 유명 은행가 출신의 라울 발렌베르크(Raoul Wallenberg)가 등장했다. 그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수많은 언어와 문화를 공부한 사람이었다. 흥미롭게도 1936년에 그의 할아버지는 당시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던 이스라엘 땅의 하이파에 직장을 얻어주었다. 거기서 그는 점점 커져가는 나치의 위협을 피해 유럽에서 도망 온 유대인들과 처음 마주하게 되고, 현재는 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분노로 압제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936년이라는 해는 특별히 고토로 돌아와 살게 된 유대인들에게 있어 소란스러운 때였다. 1930년대에 도착한 엄청난 수의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한 아랍의 경계로 촉발된, “대 아랍 폭동”의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1935년, 66,00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했는데 대부분은 독일에서 왔다. 나치주의의 발흥으로 상황이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국이 아랍의 반대를 인하여 성지 이스라엘로 이민할 수 있는 유대인의 숫자를 심히 격감시켜, 대규모 유대인 이민이 있었던 마지막 해이기도 했다. 이 때는 바로 히틀러가 세력을 잡은 때였다.
발렌베르크는 아랍의 압도적인 인구와 우월한 무기, 위협적인 군대와 광대한 경제 잠재력이 1936년 성지의 44만 유대인 남녀노소와 나란히 놓인 광경을 목도했다.
아이를 안은 여인에게 발포하는 독일 군인 (장소 불명)
그런데, 세계 2차 대전 중 다시 스웨덴에 돌아온 그는 유대 민족이 나치에 의해 멸절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제 당장 체제적으로 학살되고 있는 헝가리 유대인들의 구출 작전을 지도할 의무를 받은 것이었다.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하는 그의 능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출장 차 헝가리에 수 차례 다녀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2세인 발렌베르크가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허나 그의 동업자이자 전쟁 난민 위원회 이사 콜로만 라우어(Koloman Lauer)는 라울 발렌베르크가 적임자라고 믿었다. 사고가 민첩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기백 있고 감정 이입을 잘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발렌베르크는 외교적 위장을 하여 보내져, 구출 작전을 지도할 수 있었다.
“1944년 11월의 어느 날, 저는 발렌베르크를 한 기차 역에 태워다 주었습니다. 열차 한 대 분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향해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발렌베르크는 힘써 SS 요원들을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리고 기차 지붕 위로 올라가 아직 잠기지 않은 문들을 통해 보호 여권을 배포했습니다. 그는 내려오라는 독일인들의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다가 시십자(헝가리 나치당) 요원이 소리치며 그에게 내려오도록 발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무시하며 잠잠히 손을 뻗는 이들에게 여권 나눠주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마지막 여권을 나눠준 뒤, 발렌베르크는 여권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기차에서 내려 근처에 주차되어 있는, 스웨덴 색으로 표시된 트레일러 차량으로 향하라고 명했습니다. 독일인들과 시십자 군인들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어쩔 줄 모르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개인 운전수 산도르 아르다이(Sandor Ardai)
발렌베르크는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거기엔 비범한 조건이 붙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누구와 관계를 하든지 모든 권한을 달라고 했다. 부다페스트의 스웨덴 대사를 먼저 통하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보통의 통로가 아닌, 외교적 급사가 있어야겠다고 요구했다.
그의 메모는 너무나 유별난 것이라, 그 문제는 스웨덴의 총리에게까지 올라가게 됐다. 총리는 국왕 구스타프 5세(Gustav V)와의 논의 후에야 발렌베르크의 조건이 받아들여졌음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제 1944년 7월이 되었다. 앞선 세 달 동안 악명 높은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미 아우슈비츠로 헝가리의 유대인들 40만 명을 기차 화물칸에 실어 보낸 상태였다. 아이히만은 동유럽의 게토와 학살 수용소로 유대인들의 대량 이송을 조직적으로 성공한 자였다. 나라 전체에 23만의 유대인만 남은 상태였다. 그 중 20만이 부다페스트에 있었다. 아이히만은 모든 계획들을 중단시키기 위한 계획을 실행 중이었다. 24시간 안에 헝가리의 모든 유대인들을 이송시키는 것이었다!
추측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들로, 나치의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는 아이히만을 명해 이송을 일시 중단하라고 했다.
라울 발렌베르크를 보자. 그가 쓰는 방법들에는 틀에 박힌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즉시로 부다페스트에 사무실을 열어, 400명의 유대인 자원자들이 운영을 하도록 “고용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표시로 그들이 달고 있던 노란 색 다윗의 별을 떼라고 했다. 이제 스웨덴의 외교적 보호 하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재빨리 몇 백 개의 진짜 스웨덴 여권들을 나눠준 뒤, 라울 발렌베르크와 참모들은 사제(homemade)스웨덴 “보호 여권”의 디자인을 하는 데에 착수했다. 발렌베르크는 이전에 독일과 헝가리 관료들이 대외 상징에 취약함을 익혔다. 그래서 그는 파란 색과 노란 색(스웨덴의 나라 색)으로 매력적인 인쇄를 하고, 가운데에 왕관 3개의 문장을 박았다. 그리고 적절한 도장과 서명으로 모양을 갖췄다. 발렌베르크의 보호 여권 (‘슈츠파스’라 불림)은 국제법상 어떠한 가치도 없었지만, 그가 촉구하는 이들에게는 존중이 요구됐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슈츠파스는 소지자에게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는 데서 면제권을 제공했다. 그는 헝가리 당국을 설득하여 4,500권을 발급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헝가리 외무성에 대한 약속과 공허한 위협으로 정말 수천 권의 슈츠파스를 마구 발급할 수 있게 되었다.
“저는 어려서 발렌베르크의 심부름꾼이었어요. 독일어와 헝가리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국경을 통과할 수도 있었고 또 사환 역할도 했지요.” 모세르는 발렌베르크가 800명의 노역군들이 마우트하우센(Mauthausen) 수용소로 행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의 이야기를 한다. “저는 발렌베르크와 함께 차를 타고 행진하는 곳으로 향했어요. 발렌베르크는 스웨덴 여권을 가진 사람들은 손 들라고 했지요. 그의 명령에 따라, 저는 여기저기를 오가며 사람들에게 여권이 있건 없건 손을 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든 모든 이들의 보호 감독권을 요청했고, 그의 입장이 너무나 강경하여 헝가리 경비원들 중 아무도 반대를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웠던 것은 그의 태도가 절대적일 정도로 설득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 -참모진 요니 모세르(Joni Moser)
미국 국방성의 재정으로, 발렌베르크는 부동산 임대를 시작했다. 그는 부다페스트 주변의 32채의 건물을 빌려 그것이 스웨덴 외교 면책 특권으로 보호 받는 치외법권이라 선언했다. 이 때도 발렌베르크는 나치들이 정부의 공식 문장에 심히 감명 받은 상태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복잡하게 디자인된, 공식적으로 보이는 표시들을 건물에 달았다. 그 중엔 “스웨덴 도서관” 및 “스웨덴 연구소” 등이 있었다. 그는 과도한 크기의 스웨덴 국기를 빌딩 전면에 내걸고, 문마다 반짝이도록 압인된 정부 방패를 달았다.
잘 만든 “공식” 간판을 입구에 내건 32개의 스웨덴 “도서관들”은 외관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치는 결코 이들의 계획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치 기병들이 가가호호 유대인들을 찾아 습격하자, 유대인들의 비밀 정보망을 타고 순식간에 확산된 소식은 지역 내 그 모든 새 스웨덴 “도서관들”은 은신처가 되었다. 발렌베르크의 건물들은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 어떤 증인들은 실상 많은 이들이 그 은신처에 몸을 숨겼다고 세 번 이야기한다.
부다페스트의 일부 중립 외교 공관들은 발렌베르크의 예를 따라 슈츠파스를 발급하기 시작했고, 다른 모든 나라의 수많은 외교관들은 난민들을 위한 은신처를 열 마음을 갖게 되었다.
폴란드의 집단 처형장으로 향하는 화물칸에서 응시하고 있는 유대인 소녀
그 동안 아이히만은 무자비한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그는 약속한 국외 이송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거대한 무리의 유대인들에게 헝가리를 걸어서 떠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첫 번째 행진은 1944년 11월 20일에 시작되었고, 부다페스트와 오스트리아 국경 사이 200km에 달하는 노상 환경은 너무나 소름 끼치는 것이라 나치당원들조차 반대 시위를 했다.
수천의 유대인들은 끝없는 줄을 서서 행진했다. 굶주리고 얼어붙은 모습으로, 엄청난 고통 가운데 말이다. 그리고 수천 명이 중도에 낙오했다. 바로 이 행진 중에 발렌베르크의 행동이 전설로 남게 된 것이다. 라울 발렌베르크는 그들과 잔류하여, 계속 슈츠파스와 음식물, 약품을 배급했다. 그는 나치에게 위협과 금품 제공을 번갈아 했다. 그리고 결국은 그가 준 슈츠파스를 받은 이들의 석방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발렌베르크는 죽음의 행진 가운데 끼어있던 17,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이 다시 헝가리 유대인들을 열차에 가득 태워 보내기 시작했을 때, 발렌베르크는 구출 작전을 강화했다. 유대인들로 가득 찬 화물 열차들이 역 앞에 섰을 때, 발렌베르크는 심지어 그 위에 올라가 열차 지붕을 따라 뛰며 여러 묶음의 보호 여권들을 전달했다. 한 번은 독일 군인들이 그를 총살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발렌베르크의 용기에 너무나 감명을 받아 일부러 총을 높이 겨냥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무사히 점프하여 내려와, 자신이 준 슈츠파스를 받은 유대인들이 열차를 떠나 자신과 함께 도시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발렌베르크는 뇌물을 전달할 적임자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팔 스짤라이(Pa’l Szalay)에게서 아주 강력한 동맹을 발견했다. 그는 시십자(the Arrow Cross)-나치 헝가리 경찰-의 고위 관료였다.
개선 러시아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기 위해 도착하기 이틀 전, 라울 발렌베르크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 게토 전체에 사는 유대인들을 완전 학살할 작전을 실행시켰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주 헝가리 독일 군대 사령관 아우구쉬트 슈미트투버(August Schmidthuber)임을 그는 알았다.
발렌베르크의 동맹 스짤라이는 괜찮은 뇌물을 받고서 슈미트투버를 찾으러 떠났고, 그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그 내용은 라울 발렌베르크가 슈미트투버 장군이 학살에 대한 책임을 개인적으로 질 것이요 전후에는 전범으로 목 매달릴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학살은 최후의 순간에 취소되었는데, 그것은 라울 발렌베르크가 간섭한 결과였다. 약 7만 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저희 부모님은 모두 독일(오스트리아)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에 선택되셨고, 14세였던 저는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부다페스트의 게토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좀’ 나았지요. 그런데 한 경찰관(이름이 라드바니Radvanyi였던 것 같습니다)과 함께 어떤 신사가 헝가리 헌병 및 시십자 녀석들과 적극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불과 몇 m 떨어진 곳에서 저는 그들이 헝가리어와 독일어를 섞어 대화하는 것을 넘겨 듣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수년 후 사진을 통해 알아본 라울 발렌베르크)은 그 ‘어른들(40세 이상)’ 중 여성은 ‘게토 줄’에 설 수 있게 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엄마는 당시 39세였는데 25세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발렌베르크와 그 고위 경찰관에게 달려가, 제발 좀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경비병들은 엄마의 문서를 요구했지만, 발렌베르크가 끼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숙녀 분을 압니다. 스웨덴에 있는 저희 집에 방문하셨던 일이 있는데 40세가 넘으셨습니다.’ 저희 엄마는 게토 줄에 서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여자 분(친구의 가족)은 죽음의 행진 줄에 남아 있었는데, 저희에게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부켄발트(Buchenwald) 수용소에서 행진이 끝났는데, 수백 명의 여자들 중 10-12명 가량 밖에 생존하지 못했고 자신이 그 중 하나라고 말입니다.”
~ -생존자 게오르게 보로스(George Boros)
발렌베르크의 참모로서 그의 일대기를 쓴 얀 라르손(Jan Larrson)은 순회 강연 중 어떻게 한 사람과 그의 팀이 그처럼 많은 이들을 나치의 처형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었는지 질문을 많이 받는다. 라르손에 따르면, 그는 일반적 영웅은 아니었지만, 두려움이 없고 능숙한 협상가이자 조직자였다. 게다가 그는 뛰어난 연기자였다. 나치와의 충돌 중에 그를 구해준 재능이 그것이었다.
또한 그는 두 가지 다른 성격을 보였다. 하나는 차분하고 유머러스하면서, 지적이고 따뜻한 모습으로, 동료들이 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 라울 발렌베르크는 나치당과 대면할 때의 모습이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어떨 때는 나치 당원들에게 소리치고 위협할 수 있는 공격적인 사람으로, 또 어떨 때는 아첨하거나 뇌물을 주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들은 발렌베르크에게 큰 감명을 받아 요구를 들어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스웨덴 외교관 신분이었다는 것이 있다. 독일 사람들은 결코 침범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엄청난 용기가 없었다면 그의 신분도 아무런 유익이 없었을 것이다.
리르손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결국 라울은 부다페스트가 점점 전장으로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점점 더 위험 부담을 떠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폭탄이 비 오듯 떨어지고 있었고, 소비에트 부대들은 외곽에서부터 조여 들고 있었습니다. 라울 발렌베르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45년 1월 10일로, 저는 그에게 피할 곳을 찾으라고 다그쳤습니다. 특별히 시십자-헝가리의 나치당-가 그를 찾고 있던 중이었으니까요.”
그의 대답은 평범했다. “나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임무를 받아들인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최대한 많은 유대인들을 구출했다는 보고를 할 수 있기 전에는 스톡홀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발렌베르크는 매일 다른 집에서 자며, 시십자 당원들 내지 아돌프 아이히만의 부하들에게 체포나 살해되지 않도록 경계했다.
러시아, 미국, 영국이 도시를 폭파하는 가운데, 혼돈과 약탈이 창궐하게 됐다. 유대인들은 페스트(Pest)의 게토 두 군데에 갇혔다. 많은 정부 공무원들과 외교관들은 도망쳤다. 발렌베르크는 계속해서 적십자의 편에서 싸우며, 동맹을 찾거나 경찰들을 매수했다.
전쟁의 맨 종국에 이르러 모든 상황들이 전적으로 필사적이 되었을 때, 발렌베르크는 자신의 슈츠파스의 간소판을 발급했다. 그의 서명만이 담긴 흑백 등사판이었다. 혼돈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는 이것조차 문제가 없었다.
새로운 헝가리 나치 정부는 설치 직후에 모든 슈츠파스가 무효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발렌베르크는 겨우 엘리자베스 “리젤” 케메니(Elizabeth “Liesel” Kemeny) 남작 부인을 사귈 수 있었다. 남작 부인은 외무성 장관의 아내로, 그녀의 도움을 받아 발렌베르크는 보호 여권의 효력을 복구시킬 수 있었다!
1945년 1월 13일, 행진하는 소비에트 군대는 어떤 사람이 커다란 스웨덴 국기를 문 위에 단 건물 바깥에 홀로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게 됐다. 라울 발렌베르크는 놀란 소비에트의 하사관에게 유창한 러시아어로 자신이 소비에트가 해방시킨 헝가리 일부의 관할 스웨덴의 공사 대리라고 밝혔다. 발렌베르크는 부다페스트 동쪽 데브레첸(Debrecen)에 위치한 소비에트 군사 본부를 방문할 허가를 얻어, 자신의 인도적 전략을 설명하게 되었다. 1월 17일에 수도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길, 발렌베르크는 소비에트의 호위를 받으며 “스웨덴 집들”에 멈추어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도합 12만 명의 유대인들이 “최종 해결책”에서 살아남았다. 유럽에 남은 유일하게 실질적인 유대인 사회였다. 발렌베르크는 페스트에 잔류한 유일한 외교관이었다. 이제 그는 소비에트 측에 재건 계획을 제안하려 했다. 그 목표를 염두에 두고 그는 운전수인 필모스 랑펠더(Vilmos Langfelder)와 몇몇 소비에트 경비병들을 데리고 데브레첸으로 갔다. 거기엔 임시 정부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말리놉스키(Malinovsky) 사령관에게 접근하려 했다. 그 와중에 “경비병”으로 알았던 이들이 그들을 KGB(당시 NKVD)에 넘겨주었고, 그들은 “군사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들을 다시 볼 순 없었다.
러시아는 분명 유대인들에 대해 그들과 다른 태도를 갖고 있었고, 사력을 다해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이 사람을 이해할 수도, 믿어줄 수도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어쩌면 그가 CIA의 요원으로 류블량카(Lyublyanka)-모스크바의 KGB 본부-감옥에 갇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수년 간, 많은 나라들은 라울 발렌베르크에게 어떤 일이 생긴 건지 공개해줄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 측은 항상 그가 심장 마비로 1947년 7월 17일에 (35세의 나이로!) 류블량카에서 죽었다고 주장해 왔다. 허나 전후 KGB 감옥에서 외국 수감수들이 풀려나자, 많은 목격자들이 스웨덴 당국 측에 그를 실제로 만나봤으며 결단코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해 왔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부다페스트에서 근무했으며 발렌베르크의 친구이자 동료인 스웨덴의 페르 앙게르(Per Anger) 대사에 따르면, 그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한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아야 한다고 한다.
어느 밤, 발렌베르크는 <최종 해결책>의 저자이자 자신의 적수인 아돌프 아이히만과 그의 부관 크루메이(Krumey)의 약점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아이히만은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 만찬 날 저녁, 발렌베르크는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겨 약속을 잊었다. 그는 아이히만과 크루메이가 차에서 내리는 때에 막 도착했다. 대접할 음식도 없었고, 하녀는 하루 쉬라고 내보낸 상태였다. 발렌베르크는 얼른 도시를 떠난 한 귀족의 근방 집을 빌려 사는 베르크(Berg)와 카를손(Carlsson)에게 전화하였다. 그들은 티 하나 없는 식기들 및 그 집의 하인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베르크는 이렇게 회고한다. “저희 집엔 전혀 당황의 기색이 없었습니다…완전히 갖춰진 상태였습니다…라울은 독일인들과 도착했습니다…탁월한 저희 요리사 덕분에 만찬은 성공이었습니다.”
식사 후, 두 명의 독일인들과 세 명의 스웨덴인들은 거실로 옮겨 정치적 대화를 가졌다. 베르크는 이 만남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경우엔 발렌베르크가 아이히만과 특별히 협상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치주의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전쟁이 어떻게 종결되었으면 좋겠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용감하고 총명하게도 나치의 신조를 하나하나 쪼갠 뒤, 그 지지자들이 처참히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제가 볼 때 그의 의도는 자신의 견해를 돋보이게 하여, 아이히만이 헝가리 유대인들의 이송과 학살을 중지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정도의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히만은 발렌베르크가 자신과 총통에 대해 담대하게 공격하는 데에 당황했습니다.
약화된 선전 문구를 던진 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을 했다. “‘발렌베르크 씨, 그대가 옳다는 것은 인정해야겠군요. 저는 그런 식의 나치주의를 믿어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치주의는 저에게 능력과 부를 줬지요. 제가 누리는 이 유쾌한 삶이 곧 끝날 것을 전 압니다. 제가 가진 비행기들이 더 이상 파리로부터 여자들과 와인, 동양으로부터 진미들을 가져다 주지 못하겠지요. 제 말과 개, 이 곳 부다페스트의 호화스러운 구역도 곧 러시아가 취하게 될 것이고, SS 요원인 저는 그 자리에서 총살되겠지요. 저에겐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따라 제 능력을 엔간히 거칠게 행사한다면, 이 곳 부다페스트에서의 휴식기를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비밀 공사 씨, 제가 경고합니다. 저는 그대를 멈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제가 보기에 그대를 없앨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면 그대의 스웨덴 외교 여권은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사고는 생기기 마련이고, 중립 외교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말로 아이히만은 발렌베르크에게 정중한 작별을 고했다. 그 만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육중한 트럭이 발렌베르크의 차에 충돌하여 속도를 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분명 아이히만의 소행이었던 듯하다.”
~ -스웨덴 공사관에서 라울과 함께 일한 라르스
베르크(Lars Berg)와 고테 카를손(Gote Carlsson)
[주: 아돌프 아이히만은 국제 적십자가 그에게 준 부정 통행 허가증(laissez-passer)을 사용하여 아르헨티나로 도망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모사드(Mossad)/ 요원에게 잡혀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62년에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에서 민사 재판을 통해 사형된 유일한 사람인 것이다.]
독일과 헝가리 내 독일 패거리들 전체의 조직에 도전하며 자신의 상상력을 공격용 무기로 쓴 발렌베르크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사람들-그 중 일부는 선의를 가진 외교관들-의 도움으로, 발렌베르크는 인간의 용기에 한계가 없음을 증명했다. 설득과 위협,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외교적 창의성의 과정을 거쳐, 이 32세의 스웨덴 청년은 헝가리 유대인 수만 명을 몇 번씩이나 구할 수 있었다. 그가 구출한 모든 이들에게 있어, 그의 영웅적 행위에 영예를 돌린 것은 비극이었다.
1981년, 발렌베르크에게 구출된 사람 중 하나였던 미국의 탐 랜터스(Tom Lantos) 의원은, 발렌베르크를 미국의 명예 시민으로 만드는 법안을 후원했다.
1985년, 발렌베르크는 먼저 캐나다의 명예 시민이 되었고 그가 사라진 1월 17일은 국경일인 “라울 발렌베르크의 날”로 선포되었다.
1986년, 그는 이스라엘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텔아비브의 라울 발렌베르크 거리에는 헝가리에 세워진 것과 똑 같은 동상이 놓였다. 그 동상의 모습은 계속해서 많은 유대인 및 이방인들에게 “한 사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라울 발렌베르크의 100주기였던 2012년 7월 26일에는, 미국 의회로부터 “홀로코스트 기간 중 그의 성취 및 영웅적 행위를 기리며” 의회 금메달을 수여 받게 되었다.
그는 메시아 예슈아께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하신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었으니 말이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The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은 2013년 3월 4일자 신문에 나치 조직의 거대성이 이제서야 겨우 충만히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13년 전,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연구원들은 모든 게토들, 노역 노동장들, 강제 수용소들과 살해 공장들을 문서화하는, 무시무시한 과업을 시작했다. 이 곳들은 나치가 유럽 전역에 설치한 시설들이었다. 그 결과는 홀로코스트 역사에 심취해 있는 학자들까지 충격을 느낄 정도의 것이었다. 그들은 대략 7천 개 정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현재까지 이들이 분류해 놓은 것만 42,500곳이다. 유대 인종을 박멸시키려는 나치의 작전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는 유럽 사람들 절대 다수를 생각해 보라.
참고 자료:
http://en.wikipedia.org/wiki/Raoul_Wallenberg
http://www.sweden.se/eng/Home/Society/Government-politics/Facts/Raoul-Wallenberg/
http://www.wallenberg.umich.edu/heroism.html
http://www.raoulwallenberg.net/wallenberg/testimonie/stories/george-boros-my-mother-s-quot/
http://www.raoulwallenberg.net/wallenberg/raoul-wallenberg-s-biography/
Testimonies can be found at:
http://www.raoulwallenberg.se/his_persstorie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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