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은
유월은
네 눈동자 안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화사한 네 목소릴 들려주셔요.
유월은
장미 가시 사이로 내리는 빗방울처럼
화안한 네 웃음 빛깔을 보여 주셔요.
하늘 위엔 흰구름 가슴 속엔 무지개
너무 가까이 오지 마셔요.
그만큼 서 계셔도 숨소리가 들리는 걸요.
유월은
네 화려한 레이스 사이로 내다보이는 강변
쓸리는 갈대숲 갈대새 노래 삐릿삐릿.....
유월은
네 받쳐든 비닐우산 사이로 빙글빙글 돌아가는 하늘빛
비 개인 하늘빛 속살을 보여 주셔요.
젊은 딸들에게
딸들아,
우리 나라의 젊고 이쁜 딸들아,
이제 우리 나라에는 가을이 가고
가을 풀벌레들의 강물 소리도 얼어붙고
낡은 무덤과 지붕들 위에 지친 산맥들 위에
순백의 흰눈이 내려 덮여야 하는 겨울이 온다.
그러나 딸들아,
나는 오늘 잘 여문 벼이삭 수수이삭들을 보며
너희들의 잘 여문 가슴을 생각하고
잘 익은 콩꼬투리며 팥꼬투리들을 보며
너희들의 그 이쁜 발가락 손가락을 생각한다.
또한 딸들아,
감나무 가지 위에 마지막 남은 홍시를 보며
너희들의 탐스런 대리석의 젖가슴을 생각하고
가을 하늘같이 맑고 맑은 눈빛을 생각한다.
생각하고 생각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고 속삭이는 작은 시냇물 소리를
그 가슴 안에 가진 딸들아,
보다 더 많이 눈에 덮여
은은히 살 부비며 흐느끼는
솔바람 소리를 그 가슴 속에 지닌 딸들아.
너희들은
햇빛 속을 희고 빛나는 이빨로 웃으며
크고 튼튼한 알종아리로 종종종 걷다가도
돌아와선 수틀 앞에 조용히 앉을 줄도 알고
방안의 그 큰 고요의 호수 속에도 잠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딸들아,
우리 나라의 젊고 이쁜 딸들아,
나는 오늘 믿는다.
너희들의 가슴의 그 고요한 호수만을 믿는다.
믿고 또 믿는다.
누님의 가을
바야흐로 이 나라에는 누님의 가을입니다.
뻐꾸기 뻐꾸기 꾀꼬리 찌르레기 같은 것들
모두 목이 쉬어 재 넘어가고 먹구름도 따라가고
이제 이 나라에는 바위 틈서리로 섬돌 밑으로
날카롭고 미세한 강물 다시 흐르기 시작하여
눈물어린 안구를 말갛게 씻고 바라보아야 할
누님의 가을입니다
누님.
그 아득한 미리내를 건너
깊은 밤마다 꽃상여 타고 하늘 나라로 시집 가신 누님.
들국화 꺾어 싸리꽃 꺾어 꽃다발 만들어 드릴 테니
무덤을 열고 꽃가마 타고
서리기러기 줄 서 날으는 하늘로 해서
치마 끝에 초록 수실 빨강 수실 넘실거리며
두 눈고피에 파란 불 켜 달고
오십시요. 부디 이 땅에 다시 강림하십시오.
이제 이 땅의 모든 꽃들과 열매와 나무들은
일 년치의 죽음을 장식하기 위하여
예쁘게 예쁘게 치마 저고리를 갈아 입었고
이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죽어서도 이름이 잊혀지지 않기를 꿈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님.
어찌하여 풀벌레 울음 소리는 밤새워
아직도 우리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돌아오라, 목청을 돋구어
이 땅의 적막을 보태는 것이겠습니까?
어찌하여 여윈 풀잎은 작은 이슬방울 하나에도 힘겨워
고개를 떨궈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누님.
바야흐로 이 나라에는 누님의 가을입니다.
그 아득하고 깜깜한 눈물의 무덤을 열고
저 미세한 풀벌레 울음 소리의 강물을 노 저어
아무도 모르게 가만가만
이 땅의 풀과 나무들 속으로 오십시요.
오셔서 붉은 나뭇잎들을 더욱 불게 물들이고
익어가는 온갖 과일들을 더욱 달디달게 익히시어
이 나라의 가을을 더욱 완전무결한 죽음이게 하십시요.
이 나라의 가을을 완성하게 하십시오.
가시나무새의 슬픈 사랑이야기 /나태주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모를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변방의 둘레를 돌면서
내가 얼마나 너를 생각하고 있는가를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까마득 짐작도 못할 것이다.
겨울 저수지의 외곽길을 돌면서
맑은 물낯에 산을 한 채 비춰보고
겨울 흰 구름 몇 송이 띄워보고
볼우물 곱게 웃음 웃는 너의 얼굴 또한
그 물낯에 비춰보기도 하다가
이내 싱거워 돌멩이 하나 던져 깨드리고 마는
슬픈 나의 장난을
2.
솔바람 소리는 그늘조차 푸른빛이다.
솔바람 소리의 그늘에 들면 옷깃에도
푸른 옥빛 물감이 들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조차 그만
포로소롬 옥빛 물감이 들고 만다면
어찌겠느냐 어찌겠느냐.
솔바람 소리 속에는
자수정빛 네 눈물 비린내 스며 있다.
솔바람 소리 속에는
비릿한 네 속살 내음새 묻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 마음조차 그만
눈물 비린내에 스미고 만다면
어찌겠느냐 어찌겠느냐.
3.
나는 지금도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내음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살얼음에 버려진 골목길 저만큼
네모난 창문의 방안에 숨어서
나를 기다리는
빨강 치마 흰버선 속의 따스한 너의 맨발을 찾아서
네 열게 발가락의 잘 다듬어진 발톱들 속으로.
지금도 나는 네게로 가고 있다.
마른 갈꽃송이 꺾어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처마 밑에 정갈히 내건 한 초롱
네 처녀의 등불을 찾아서.
네 이쁜 배꼽의 한 접시 목마름 속으로
기뻐서 지줄대는 네 실핏줄의 노래들 속으로
상수리 나뭇잎 떨어진 숲으로 -작가(시인): 나태주
오뉴월에 껴입은 옷들을 거의 다 벗어가는 그대여.
가자, 가자.
나도 거의 다 입은 옷 벗어가니
상수리나무 나뭇잎 떨어져 쌓인 상수리나무 숲으로
칡순같이 얽혀진 손을 서로 비비며.
와삭와삭 돌아눕는 낙엽 아래
그동안 많이도 잃어진 천국의 샘물을 찾으러,
가으내 머리 감을 때마다
뽑혀나간 머리카락들을 찾으러.
가자, 가자.
마지막 남은 옷들을 벗기 위하여
상수리 나뭇잎 떨어진 상수리나무 숲으로
이젠 뼈마디만 남은
열개 스무개 발가락들 서로 비비며.
열개 스무개 마음의 뼈마디들 서로 비비며.
다시 산에 와서 --작가(시인): 나태주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길길이 쌓이는 壯雪을 또한 탓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낫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낫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대숲 아래서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외할머니
시방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옷 입고 흰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오나오나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
들길을 보며
조마조마 혼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시방도 언덕에 서서만 계실 것이다,
흰옷 입은 외할머니는.
어머니 치고 계신 행주치마는
어머니 치고 계신 행주치마는
하루 한 신들 마를 새 없이,
눈물에 한숨에
집뒤란 솔밭에 소리만치나 속절없이 속절없이…….
봄 하루 허기진 보리밭 냄새와
쑥죽먹고 짜는 남의 집 삯베의
짓가루 냄새와 그 비린내까지가
마를 줄 몰라, 마를 줄 모라.
대구로 시집간 딸의 얼굴이
서울서 실연하고 돌아와 울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박혀 눈에 가시처럼 박혀
남아 있는 채,
남아 있는 채로…….
이만큼 살았으면
기찬 일 아픈 일은 없으리라고
말하시는 어머니, 당신은
오늘 울고 계시네요
어쩌면 그렇게 웃고 계시네요.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달밤
어수룩히 숙어진 무논 바닥에
외딴집 호롱불 깜박이는
산이 내리고
소나기처럼 우는
개구리 울음에
물에 뜬 달이 그만 바스라지다.
달밤.
안개는 피어서 꿈으로 가나,
물에 절은 쌍꺼풀눈
설운 네 손톱을,
한 짝은 어디 두고
홀로이 와서
입안에 집어넣고 자근자근 씹어주고 싶은
네 아랫입술 한 짝을,
눈물 아슴아슴
돌아오는 길.
어디서 아득히 밤뻐꾸기 한 마리
울다말다 저 혼자도 지치다.
나 혼자 이슬에 젖는 어느 밤.
천천히 가는 시계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어쩌다 이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있다 가고 싶었는데
아는 듯 모르는 듯
잊혀지고 싶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대 가슴에 못을 치고
나의 가슴에 흉터를 남기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나의 고집과 옹졸
나의 고뇌와 슬픔
나의 고독과 독선
그것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과연 좋은 것이던가
사는 듯 마는 듯 살다 가고 싶었는데
웃는 듯 마는 듯 웃다 가고 싶었는데
그대 가슴에 자국을 남기고
나의 가슴에 후회를 남기고
모난 돌처럼 모난 돌처럼
혼자서 쓸쓸히.
겨울 연가
한겨울에 하도 심심해
도로 찾아 꺼내 보는
당신의 눈썹 한 켤레.
지난 여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그것들.
움쩍 못하게 얼어붙은
저승의 이빨 사이
저 건너 하늘의 한복판에.
간혹 매운 바람이 걸어 놓고 가는
당신의 빛나는 알몸.
아무리 헤쳐도 헤쳐도
보이지 않던 그 속살의 깊이.
숙였던 이마를 들어 보일 때
눈물에 망가진 눈두덩이.
그래서 더욱 당신의 눈썹 검게 보일 때.
도로 찾아 드는
대이파리 잎마다에 부서져
잔잔히 흐느끼는
옷 벗은 당신의 흐느낌 소리.
가만가만 삭아 드는 한숨의 소리.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몸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닦아 주고
매만져 준다
당분간은 내가 신세지며
살아야 할 사글세방
밤이면 침대에 반듯이 눕혀
재워도 주고
낮이면 그럴 듯한 옷으로
치장해 주기도 하고
더러는 병원이나 술집에도
데리고 다닌다
처음에는 내 집인 줄 알았지
살다보니 그만 전셋집으로 바뀌더니
전세 돈이 자꾸만 오르는 거야
견디다 못해 전세 돈 빼어
이제는 사글세로 사는 신세가 되었지
모아둔 돈은 줄어들고
방세는 점점 오르고
그러나 어쩌겠나
당분간은 내가 신세져야 할
나의 집
아침저녁 맑은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고 닦아 준다
두 이름
어머니란 이름은 네모지고 엄마란 이름은 둥글다 어머니란 이름은 딱딱하
고 엄마란 이름은 말랑말랑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엄마란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언제나 어머니였을 뿐, 할머니를 할매라 부르며
자랐다 그것도 외할머니를 그렇게 부르며 자랐다 그러나 끝내 할머니 속에
는 엄마가 없었고 어머니 속엔 할매가 없었다. 그 두 이름 사이를 오가며
어린 나는 자주 어리둥절했고 때로 미달한 마음과 섭섭한 마음 아스므레
애달픈 마음을 살았다 하나의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두 이름이 있는 것
은 불행한 일이며 불완전한 둘보다는 완전한 하나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첫차
낯선 고장 낯선 여관방에서
하루 밤 묵고 일어나
깨끗한 이부자리에게 감사하고
밤새도록 선잠 든 얼굴 비춰준
전등불에게 감사하고
푸석한 얼굴 씻어줄 맑은
수돗물에게도 마저 감사한다
이 새벽아침에도 따끈한 국물을 파는
밥집이 열려 있었구나
밥을 먹으면서도 감사하고
깍두기를 씹으면서도 감사한다
지금껏 내가 사랑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새삼스럽지 않은 깨달음에도 짐짓
소스라치며 진저리치며
어둠을 뚫고 가는 자동차에게 감사하고
운전기사에게도 감사해야지
나 오늘도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첫차로 떠난다
세상 속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노(櫓)
아들이 군에 입대한 뒤로 아내는 새벽마다 남몰래 일어나 비어있는 아들방
문앞에 무릎 꿇고 앉아 몸을 앞뒤로 시계추처럼 흔들며 기도를 한다
하느님 아버지, 어떻게 주신 아들입니까? 그 아들 비록 어둡고 험한 곳에
놓일지라도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채금져 주옵소서
도대체 아내는 하느님한테 미리 빚을 놓아 받을 돈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하느님께서 수금해주실 일이라도 있다는 것인지 계속해서 채금(債金)져 달
라고만 되풀이 되풀이 기도를 드린다
딸아이가 고3이 된 뒤로부터는 또 딸아이방 문앞에 가서도 여전히 몸을 앞
뒤로 흔들며 똑같은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 아버지, 이미 알고 계시지요? 지금 그 딸 너무나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오니 하느님께서 그의 앞길에 등불이 되어 밝혀주시고 그의 모든
것을 채금져 주옵소서
우리 네 식구 날마다 놓인 강물이 다를 지라도 그 기도 나룻배의 노(櫓)가
되어 앞으로인 듯 뒤로인 듯 흔들리며 나아감을 하느님만 빙긋이 웃으시며
내려다보시고 계심을 우리는 오늘도 짐짓 알지 못한 채 하루를 산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창문이 덜컹댑니다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또
나를 생각하나 봅니다
바람이 붑니다
낙엽이 굴러갑니다
어느 먼 별에서 누군가 또
나를 슬퍼하나 봅니다
춥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증거
외롭다는 것은 앞으로도 내가
혼자가 아닐거라는 약속
바람이 붑니다
창문에 불이 켜집니다
어느 먼 하늘 밖에서 누군가 한 사람
나를 위해 기도를 챙기고 있나 봅니다.
선물
나에게 이 세상은 하루 하루가 선물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빛이며 새소리,
맑은 바람이 우선 선물입니다
문득 푸르른 산 하나 마주했다면 그것도 선물이고
서럽게 서럽게 뱀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았다면 그 또한 선물입니다
한낮의 햇살 받아 손바닥 뒤집는
잎사귀 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이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름 없어 가여운
풀꽃들 하나 하나도 선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지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이 우선적으로 가장 좋으신 선물입니다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진다 해도 부디
마음 아파하거나 너무 섭하게 생각지 마서요
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가보지 못한 골목들을
그리워 하며 산다.
알지 못한 꽃밭,
꽃밭의 예쁜 꽃들을
꿈꾸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두근거려지는 일이겠니
새로운 길
나는 신문을 한 1년쯤
묵혔다 읽는다
어떤 때는 2, 3년, 더한 때는
10년이 지난 신문을 읽을 때도 있다
그렇게 읽어도 새로운 소식을
담은 신문이 내게는 정말로
신문이 될 수 있기 때문
나는 남들이 새로운 길이라고 소리치며
달려가는 길은 가지 아니한다
오히려 사람들이 왁자지껄 그 길을
걸어서 멀리 사라진 뒤
그 길이 사람들한테 잊혀질 만큼 되었을 때
그 길을 찾아가 본다
그런 뒤에도 그 길이 나에게
새로운 길일 수 있다면 정말로
새로운 길일 수 있기 때문
나에게 새로운 길은 언제나
누군가에게서 버림받은
풀덤불에 묻힌 낡은 길이다.
다락방
이담에 집을 마련한다면
지붕 위에 다락방 하나 달린 집을
마련하겠습니다.
문틈으로 하늘 구름도 잘 보이고
바람의 옷소매도 잘 보일 뿐더러
밤이면 별이 하나 둘 돋아나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는
그러한 다락방을 하나
마련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속상하거나 답답한 날은
다락방에 꽁꽁 숨으렵니다.
그대도 짐작 못하고
하느님도 찾지 못하시도록.
강물과 나는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
바가지로
강물에 비친
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
흰구름 한 송이
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
한참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기르다가 공연스레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강가로 나아가
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
물고기와 흰구름과
새소리 모두
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날부터
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4
나태주
배가 고픈 날은 더욱 춥다
추운 날은 더욱 배가 쓰리다
창 밖에는 빗소리
술잔에 술을 따르듯
쉬임없이 이어지는
가을 빗소리
이 비 그치면 겨울이 오리라
얼음의 외투를 걸친 겨울이 문득
우리 앞을 막아서리라
그대도 이 빗소리 듣고 있는지,
얼룩진 유리창 안에 갇혀
이 빗소리 들으며
나를 생각하는지......
사십(四十)
나태주
1
이제부터는 내리막
비탈길이다.
빠른 걸음으로 가야 하는 길이다.
가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버리면서 버리면서
가야 하는 길이다.
2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
갖지 못하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걸
누리지 못하는 건
섭섭한 일이다.
더구나 남들이 다 버리는 걸
버리지 못하고 사는 건
답답한 일이다.
3
물은 흘러간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며 흘러간다.
물은 울며 간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을
버리며 울며 간다.
그러나 물은
외톨이라는 점에서
나와 같다.
4
모든 사람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찬사가 아니다.
동지로부터 받는 찬사도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욕설이요 소음이요
낭떠러지로 가는 눈먼 길이다.
나태주 시집"빈 손의 노래"[문학사상사]에서
인생을 알아가는 나이가 불혹이 되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공자는 40세가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고(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이라 했다 .갖은 것 다 내어주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걸 누리지 못하는 섭섭함이 있다는 것 등에서 나태주 시인의 인간미가 넘친다 나태주 시인은 스물 여섯에 (71년) 시인이 되였다 오랜 시간 시를 쓰며 시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고 고결하게 많은 시를 남기고 있는 시인 중의 한 분이라 나는 생각한다 의지를 버리지 않고 일생을 산다는 것은 중요하다 숱한 세월 삶을 변화 시키는 무수한 일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시를 쓰고 산다는 일은 인생에서 그리 물질적 도움을 갖지 못한다 다만 인생이라는 나무를 가꾸어 간다는 큰 뜻에서 나를 뒤돌아 보고 바로 세우는 작업의 한 방법이라는 것에 늘 나는 위안을 삼는다 나태주 시인은 몇 안되시는 참시인이라 나는 늘 생각한다 나는 나태주 시인의 시에서 훈훈한 맛, 정감있는 삶을 배운다 그런 시맛을 시 속에 가득 채우시는 시인도 불혹의 나이가 되여 낭떨어지를 바라보았으니...올해 환갑을 맞는 시인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사뭇 궁금하다
현재 공주 상서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나태주 시인은 넉넉한 웃음에 마음씨 좋은 아저씨 또는 할아버지 바로 그 모습의 주인공이다. 그의 시는, 복잡한 도심을 떠나 자연의 품에 안겨 여유를 느끼고 싶어하는 현대의 독자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시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의 시에는 자연이 있고, 잃어버린 고향이 있고, 살가운 이웃이 있고, 추억이 있다.
나태주
충남 서천 출생
공주사범학교 졸업
1971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등단
1979 제3회 흙의 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저서명 부서명 총서명 출판사 출판년
시집 <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 고려원
시집 <대숲 아래서> 예문관 1973
시집 <누님의 가을> 창학사 1977
시집 <모음(母音)> 창학사 1979
시집 <막동리 소묘> 일지사 1980
산문집 <대숲에 어리는 별빛> 1980
시집 <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일지사 1981
시집 <구름이여 꿈꾸는 구름이여> 일지사 1983
시집 <변방> 신문학사 1983
시집 <외할머니> 신문학사 1984
시집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일지사 1985
시집 <굴뚝 각시> 오상사 1985
시집 <목숨 비늘 하나> 영언문화사 1987
시집 <아버지를 찾습니다> 정음사 1987
시집 <우리 젊은날의 사랑> 청하 1987
시집 <빈손의 노래> 문학사상사 1988
시집 <추억이 손짓하거든> 일지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