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규님의 인생철학
첫째
"인간이 태어나는 데에는 아무런 선택이 없다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그들의공도 아니오 죄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환경하나만으로 그들을
판단한다는것은 절대로 부당하다
둘째
인간이 죽는다는것에도 아무런 선택이없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이 앞에 있는 서진규 반듯이죽는다 내가 보장한다
그런데 내앞에 계신여러분들도 다 죽습니다
셋째
우리가 이생애에 살수있는 기회는 단한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은 단한번 뿐입니다
'단 한번!!"
넷째
그러나 한번 주어진 이기회를 어떻게 살다갈것인지 그것은 바로내가 결정합니다
죽음! 죽음에 이르러 그죽음이 나를 원할때
아무리 피하려 해도 안될때 그들이나를 데리려 왔을�
멋이게 맞이하면서 떠나십시오
그러나 살아있는동안에는
한번 주어진 이기회를 멋지게 살다 가십시오
다시오지 않는 기회입니다
다시는...오지 않는 기회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도의 조그만 어촌입니다. 제가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저희 어머니가 앓아 누우셨어요. 엿 공장을 하는 가난한 엿장수의 집이었는데 일꾼이 하나 쓰러져 누워 있으니 일손이 굉장히 딸리죠. 그것보다도 더 깡촌에 있는 저희 친할머니가 오셔서 살림을 돌봐주셨는데 제가 태어나니까 할머니가 받아주셨는데 그 할머니의 환영사 "이까짓 씰데없는 가시나 놓으려고 온 식구를 그렇게 고생시켰나." 아기가 태어나면서도 너무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막 울더랍니다. 그런데 저희 할머니는 여러분들 아시죠? 아기 태어날 때 뱃속물과 핏물에 푹 쌓여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인간이니까 죽지는 말라고 콧구멍 뚫어주고 입 닦아 주고 그냥 낡은 포대기로 둘둘 싸아 가지고 옆으로 그냥 윗목으로 밀어버렸답니다. 그리고 사흘을 안 씻었답니다. 어떻게 변하는지 아세요? 산소의 도움을 받아서 이 물들은 딱딱하게 굳습니다. 그리고 아기까지 같이 굳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나니까 살갗은 완전히 거북이 껍데기 머리는 완전히 딱딱한 돌덩어리랍니다. 그리고 배고프다고 우는데 그 얼굴이 완전히 쭈글쭈글 해져서 이것은 할머니의 얼굴인지 원숭이의 얼굴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사흘된 아이의 얘기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참다못해서 물 좀 데워달라고 씻기겠다고. 8시간을 씻어서 그것이 벗겨지더랍니다. 그러고 나니까 인간의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48년생이니까 54살이죠? 화장을 안 하거든요. 그런데 54살의 피부치고는 참 곱다고 합니다. 곱지요? 가까이에서 보면 더 곱거든요. 어쩌면 이 뱃속물과 핏물 피부에 좋은 것이 아니었나? 우리 할머니가 내가 나중에 화장하느라고 고생하지 말라고 어릴 때 사흘동안 남들보다 더 사흘 길게 이 물에다가 푹 담궈 놓은 것이 아니었나? 아기들 태어날 때 얼마나 피부가 곱습니까. 그래서 저희 할머니는 애기가 태어나면 삼신할머니가 오잖아요? 그 삼신할머니가 저를 위해서 찾아왔는데 마침 그 때 우리 집에서 육군사관학교 입학준비를 하고 계시는 막내아들, 그 분은 태어나기 전에 저희 할머니가 용꿈을 꾸었다고 해서 돌자 돌림 해서 용돌. 그런데 그 작은아버지가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공부를 하고 계시니까 저희 할머니는 제 삼신상에다가 물 떠놓고 밤낮으로 그렇게 비셨어요. "우리 아, 우야든지 사관학교 입학해 가지고 훌륭한 군인이 되게 해 주이소." 삼신할머니 얼마나 바빠요. 지나가다가 들으니까 사관학교, 군인 아! 야를 나중에 군인 만들라고 저 노인네가 저렇게 기도를 하는 갑다. 저도 우리 할머니 덕분에 이렇게 군인이 되는 팔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참 우리 할머니 고마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저희 작은아버지도 물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도 잘 아시는 김종필 명예총재님. 아니요. 그 분이 저희 작은 아버지가 아니고 그 분과 같은 8기생, 5.16을 기억하시는 분은 8기생의 막강했던 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막강한 8기생의 1인이 되었지요. 그리고 힘이 막강했던 그 시절에 승승장구해서 별 하나까지 올라가고 인정을 받고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실력이 있고 시대가 밀어 주고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있어도 자기의 체력과 자기의 건강이 자기를 밀어주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그렇게 군이 막강하던 그 시절에 54살의 나이로 별 하나에서 군복을 벗고 돌아가셨습니다. 아까도 원장님 너무 바쁘셔서 운동을 못하신다고 해서 "원장님 오래 사셔야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운동 너무 서두르지 말고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지금 할 때, 할 수 있을 때 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도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 자신의 건강 버릴 수 없습니다. 건강이 없으면 내 꿈도 모든 것도 허사가 되고 맙니다.
서진규가 어릴 때는 참 너무 멍텅구리 같았다고 해요. 제 이름도 제대로 못쓰고 초등학교 1,2,3학년 거의 꼴찌에서 맴돌고 집안식구들이 걱정을 하고 저거 커서 어떻게 살지 걱정이라고. 그런데 저도 마음의 패러다임이 바뀌니까 아이가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달라지도록 마련을 해준 계기가 바로 제천이라는 곳입니다. 충청북도 제천, 충북 제천에서는 제가 거기 출신이 아닌데 거기서 잠깐 살았는데 거기 출신인지 알고 충북에서는 저만 나왔다 하면 틀림없다고 합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부산에 살다가 제천에 이사를 갔는데 저희 아버지가 저희 부모님도 초등학교도 못나오셨어요. 아버지가 철도 말단 공무원 - 보일러실에서 일하시는 - 이었는데 사실 월급이 쥐꼬리잖아요. 여기도 공무원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월급이 참 어렵잖아요? 그런데도 노름병이 있으셔서 툭하면 빈 봉투만 들고 오셔요. 결국 저희 어머니가 생활전선에 나서셨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술장사입니까? 13살, 12살짜리가 엄마가 술장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열등의식을 주든지 그냥 남들이 내가 술집 딸이라는 것을 알까봐 몰래 집에 들어갔다 몰래 나오고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마침 저희 언니가 저보다 8살이 많은데요. 제게는 언니가 있고 오빠가 있고 밑으로 남동생이 셋입니다. 그런데 언니가 제가 초등학교 6학년때 시집을 가 버렸어요. 시집을 가면서 제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언니가 그렇게 큰 바람막이었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큰 딸이 없으니까 작은 딸이 해야지, 그리고 그때부터는 온 집안살림을 그리고 또 술장사하는 뒷바라지를 이 13살짜리 아이에게 다 하라고 합니다. 저는 원체 게으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해 봤습니다. "엄마! 오빠도 있고, 동생도 있는데 같이 하면 우리다 학생인데 일이 좀 수월할 것이 아니냐 왜 나만 시키느냐" 그랬더니 우리 어머님 말씀이 "니는 가시나 아이가" 그래서 제가 "가시나가 왜요. 내가 언제 가시나로 못 낳아 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다가 죽도록 두들겨 맞았어요. 그때부터는 제가 입만 튀어나와도 주먹이 날아옵니다. 제가 옛날에 머리숱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지금 훤하잖아요. 하도 우리 어머니한테 휘둘리다보니까 머리카락이 다 빠진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나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우리 어머니가 차별을 심하게 하고 거기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까 우리 어머니뿐이 아니더라고요. 주변사람들이 그렇게 다 차별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차별을 보고 저는 멋진 반항아가 되기로 했습니다. 멋진 반항아는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도 그때그때 순간순간 폭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폭발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매밖에 없고 승산이 없다, 멋진 반항아는 미래를 기약한다, 그때는 고개를 숙일지언정 마음까지 굽히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냥 마음만 굽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뒤로 나는 실력을 키운다, 힘을 키운다, 그리고 미래에 가서 꼭 복수를 해 주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것이 멋진 반항아의 삶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긴 얘기가 있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잠깐 빼겠습니다. 그 당시에 사실 막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참 많았습니다. 제천에 가보신 분 계실지 모르겠는데요. 제천의 겨울은 아마 남한에서는 가장 추운 곳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추운 곳입니다. 아까 어떤 분이 저한테 개울보고 옛날에 남자아이들은 고기를 잡고 그랬는데 여자들은 어떤 기억이 있느냐 추억이 있느냐 그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빨래하던 추억이 있습니다. 7식구의 빨래를 머리에 이고 추운 겨울에 개울로 갑니다. 지금 13살짜리 아이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울에 가보면 물이 다 얼어 있습니다. 그때는 고무장갑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다 보면 빨래는 왜 이렇게 부피가 크고 왜 이렇게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고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고 몸은 사시나무 떨 듯이 합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나는 언젠가 꼭 성공하겠다. 나는 언젠가 꼭 큰 인물이 되고 말겠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여자도 남자 못지 않게 꼭 할 수 있다는 것을 꼭 증명해 보이고 말리라! 그때 돼서 우리 어머니는 틀림없이 나를 인정을 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틀림없이 인정을 해 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성공을 함으로써 그들을 승복시키겠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됩니다. 마음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지요. 나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그렇게 엄청난 인물이 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가난한 술장사의 딸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공부밖에 없습니다. 그때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쉬운 줄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할 때 저는 전교에서 2등을 합니다. 여자아이 중에서는 1등 그것도 집안일 다 해 가면서 틈틈이 잠 못 자 가면서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때 우등생이 되고 고등학교도 우등생이 됩니다. 사실 저희 어머니가 술 주정을 많이 하셨어요 저녁만 되면, 저희 막내동생이 지금 41살인가 되는데요. 정신연령은 약 5살, 쉬운 말로 저능아죠. 우리 어머니는 술을 좀 많이 파실려고 낮에도 같이 술을 많이 마시고 그리고서는 밤중이 되면 만취가 됩니다. 아버지는 보일러실에서 일하기 때문에 주로 야근이 많지 않습니까? 밤 11시가 되면 "진규야 요강 가져온나" 라고 합니다. 저는 얼핏 잠이 들었다가 요강 들고 가면 속이 부대껴서 거기에 다 토해냅니다. 그리고 토하고는 저를 붙들고 울면서 신세한탄을 합니다. 언니가 시집잘못간 것에 대해서, 저희 막내 동생이 저능아인 것에 대해서, 술장사를 해야 한다는 신세에 대한 것, 그리고 가끔가다가 생각이 나면 제 머리채를 잡습니다. "다 느그 때문이다." 그것이 밤마다 계속되는 저의 악몽입니다. 저는 도망가려고 생각을 해 봤습니다 보따리 싸고. 그런데 제가 보따리 싸고 서울로 간들 그때는 김강자 서장님도 안 계셨잖아요. 지금 김강자 서장님이 계신데도 많은 젊은 여자들이 팔려가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감옥 같은데 갇혀 가지고 다 죽은 사람도 있잖아요? 그 당시에 가봤자 승산이 없다, 나는 꼭 성공해야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갑니다. 되게 신기하지요. 그 지경에 제가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해서 고등학교를 서울로 갑니다. 저는 실력을 키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부를 잘 했습니다. 우등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실력이 있는 자는 군이든 공무원이든 학교든 사회든 어디가서든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존댓말을 잃지 않는다면. 태도가 틀려먹은 사람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같이 일하기도 싫고 부하로도 싫고 상관으로도 싫습니다. 태도만 올바로 가지고 실력만 키워놓으면 세상 어디 가든지 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방에 가면 가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요. "여기는 지방이 되어서요 여기 학교 아무리 나와봤자 서울 반 못 따라갑니다." 너무나 좁은 짧은 생각입니다. 앞으로 지금 학생들의 미래는 내 옆에 있는 같은 동료와의 경쟁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계가 열려 있습니다. 글로벌시대. 어디 가서든지 경쟁을 할 수 가 있습니다. 서울대, 죄송합니다만 미국에서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세계에서 경쟁해서 이 사람을 인재로 키우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학벌이 아니고 실력입니다. 실력은 선생님이 머리에다 집어 넣어주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밥 먹이듯이 입으로 떠 먹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가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하고 자기가 쌓아 가는 것입니다. 그 실력만 쌓아놓으면 세계 어디든지 세계를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때는 사실 그렇게까지 원대하게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을 가겠다고 하니까 저희 부모님이 펄쩍 뛰지요. 저는 선생님들을 동원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들 권위가 굉장히 떨어져서 어떤 때는 땅을 파고 찾아봐도 찾기가 어렵다는 그런 얘기를 가끔 듣습니다마는 그 당시에는 선생님들 참 막강했습니다. 선생님들 말씀을 누가 감히 거역을 합니까? 그 선생님들이 저희 집에 와서 부모님을 설득을 합니다. "보내십시오. 얘는 미래가 있습니다.” 결국 저는 마침 저희 작은 아버지 - 저희 삼신할머니 도움을 받았던 작은 아버지 - 가 서울에서 대령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촌들 틈에서 공짜로 잘 방이 생긴 것입니다. 부모님이 양식대고 학비대고, 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풍문여고. 거기서 성적이 우등생이었죠. 반장까지 하고 꿈도 키워가고,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오면서 저는 이 세상에는 남녀의 차별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빈부의 차별, 권력이 있고 없고의 차별 그것도 얼마나 당당하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이 아이는 아직 멍텅구리가 되어 가지고 자기가 스스로 벌어 가지고 대학을 갈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을 갈 정도의 실력도 안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님 도움을 받아서 대학을 갈 처지는 전혀 안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대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려고 나섰는데 그 당시에는 은행이 참 인기가 좋았어요. 제 동창들 중에서도 두 명이나 은행에 취직을 하고 했는데 그 아이들이 둘 다 저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에요. 아! 이 애들이 하면 틀림없다 나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은행에 찾아갔는데 당신을 밀어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신을 보증해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은행에서 �겨 났고 보다시피 취직을 하려고 하지만 갈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서는 시골에서는 다 큰 것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작은 집에 빈둥거리는 것이 보기 싫어서 빨리 내려오라고 합니다. 내려와서 살림 살다가 시집이나 가라고.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어머니 아직도 술장사하고 계십니다. 거기 가서 제가 다 큰 처녀가 술 장사 하는 일을 도와 주다가 어디로 시집을 갈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한국의 현실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서울에 꼭 남아야겠는데 저희 부모님은 양식도 끊어버리고 용돈도 다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목구멍은 살아야겠고 결국 저는 저희 사촌언니의 도움을 받아서 가발공장에 직공으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요스페셜에서 "가발공장에서 하버드까지"가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아무리 상상력이 좋고 꿈이 좋아도 가발통 붙들고 그 먼지구덩이 속에서 가발을 엮어가고 있을 때는 힘이 안 납니다. 상상력도 오지 않습니다. 나오는 것은 눈물과 한숨밖에 없습니다. 가발을 만드는데 울면서 만들고 있으니까 이것이 계속 미스가 됩니다. 잘못 만들어 내면 이것은 돈이 안 나옵니다. 그 당시에 육영수재단에서 만든 양지회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아주 조그만 방에 이층침대가 3개, 거기서 6명이 먹고 자면서 있는데 하루에 40원, 그런데 그 40원이 없어 가지고 저는 수시로 밥을 굶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주선을 해서 엑스트라까지 해보는데 그래도 먹고 살기에는 굉장히 버거웠습니다. 그렇게 지쳐있는데 같이 일하던 직공들 아니면 그 육영수회관에 있던 다른 직공이라든가 상점점원이라든가 식당종업원이라든가 아주 거의 완전히 초등학교도 거의 안나온 사람들도 있고 시골에 부모님한테 돈을 보내야 하거나 동생 학비를 대줘야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내가 울고 있으니까 불쌍해서 밥을 사주고 그 밥을 얻어먹으면서 저는 또다시 기운을 찾습니다. 물질적으로 내가 보상을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에 저는 마음으로 약속을 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나는 꼭 이루고 말 것입니다. 나는 꼭 뭔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때 가서 나는 여러분의 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당신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차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겉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가는 사람들이 "저거 미쳤어"그랬을 거예요. "하도 굶더니 쟤가 정신이 돌았구나" 그러나 말을 안 하면 사람들은 그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 저는 마음속에 다지고 또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길을 찾아서 간 곳이 바로 관악골프장의 식당 종업원입니다. 식당종업원 노릇을 하면서 저는 이렇게 꿈은 대단한데 그 당시에 제 꿈이 암행어사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암행어사의 상징, 정의의 사도, 그래서 억울하게 자기가 강하다고 해서 자기가 있다고 해서 약한 자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짓밟는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당당히 맞서리라 그리고 거기서 쓰러져 가는 이 사회의 잘못된 폐단 때문에 쓰러져 가는 그 사람들에게 힘이 되리라.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리라 혼자 상상을 합니다. 멋있는 암행어사의 옷을 입은 멋진 모습을.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아마 수십만 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저로 인해서 일어서고 있습니다. 힘을 얻고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원장님을 통해서 많은 한국의 지도층들을 가깝게 만나고 나는 그들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고 이것이 왜 평등이 필요한가 왜 다른 사람에게 차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이 사회를 올바른 사회로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열심히 설득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모습은 암행어사의 모습은 아닐지 모르지만 암행어사의 옷이나 군복 멋있잖아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장님이 하시는 LMI라는 것이 있지요. 이번에 미국 갔다 오신 것도 그 LMI라는 Leadership Management International이라는 것인데요. 세계적으로 리더들을 키워내는 프로그램입니다. 미국 폴마이어라는 사람이 개발을 해낸 것인데 지금 전 세계 60여개 국에서 이 방법을 활용을 하면서 훌륭한 리더들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원장님이 저와 같이 제가 그 일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그 자료를 한번 주시더라고요. 읽어보니까 아주 중요한 대목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대여섯가지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를 가지는 것, 구호를 가지는 것, 그리고 비주얼 라이져 하는 것이지요. 상상으로나마 그 자기가 목표를 달성했을 때 그 기분을 맛을 봐라, 느껴라, 그리고 원하라 그러면 어려움이 닥쳐도 장애가 닥쳐도 그것을 넘고 이겨나갈 힘이 생긴다. 바로 그것을 설득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삶으로써 그것을 하나의 증명을 한 셈입니다. 그리고 또 그 LMI가 제 삶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은 이것은 서진규이기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가능하다는 그것을 역설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아까 제 앞에 계시는 분들 중에서 어느 누가 제2의 서진규 아니면 서진규 그 이상 세계를 이끌어나갈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치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대한 꿈과 현실, 사실 굉장히 차이가 나잖아요. 저는 무언가 연결점을 만들자, 그래서 골프장에서 일을 하면서 영어회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사람들 아마 일요스페셜 보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헨리와 윌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샌디에고에서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일주일에 한시간 배우는 것입니다. 영어가 얼마나 늘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영어실력이 아니라 나는 지금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그리고 또 헨리와 윌마를 통해서 뭔가 세계적인 시야를 넓혀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재미있었던 것은 그를 통해서 영어회화반을 통하게 되다 보니까 제 첫사랑도 만나게 됩니다. 첫사랑 하니까 저쪽에서 꼬박 조시던 분이 얼른 고개를 들고 저를 쳐다보시는데 누구라고는 말씀을 안하겠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제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제 이상형 모두가 이상형이 있잖아요. 제 이상형은 키 180㎝에 75kg정도 그런 사람을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났던 그 사람은 키가 165㎝, 그런데 이 마음의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이 사랑이 어쩌면 증명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는 저는 180㎝을 원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멋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고 나니까 마음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그 쪽으로 빠지고 나니까 저는 165㎝ 이상으로 매력적인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을 증명을 해줍니다. 여러분들도 꼭 사랑해 보셨을 것입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기 전과 사랑하고 있는 때 그리고 사랑이 완전히 없어진 때 그때 내 마음 내가 보는 시야 얼마나 달라 보이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달라질 수가 있고 그렇게 마음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잣집 외동아들 -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태권도 유단자로써 미국 가서 2년이나 태권도를 가르치고 왔고. 저는 그때부터는 정말 여자다운 그런 꿈을 꿉니다. 그래 이렇게 멋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오손도손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인생이지. 네가 무슨 암행어사냐, 네가 무슨 정의의 사도니? 네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그냥 해 본 거야, 그런데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아마 운명의 여신이 굉장히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저에게 그때까지는 겪어보지 못했던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그 당시에 아주 잘 나가던 좋은 대학을 나온 어떤 차관의 딸과 결혼을 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강인하게 일어서려고 버둥거리던 서진규는 무너졌고 먼발치에서 그 사람 모습 한 번만 보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고 밤중에도 울면서 헤매고 목소리 한번만이라도 듣게 해 달라고 그리고 결국은 서진규는 죽을 각오를 합니다. 죽자, 뭐할려고 사니? 네가 원했던 오직 한사람 그 사람마저 너를 버리고 떠났지 않느냐 네가 더 이상 살아서 뭐해 그리고 우리 다 죽을 것 아니냐 어차피 죽는 것 지금 죽자. 그리고 가장 죽기 쉬운 방법을 찾기 시작을 했습니다. 물에 빠져서 죽으려고 하니까 숨이 막혀 죽을 수가 없어요. 약을 먹고 죽으려고 하니까 배가 아파서 못 죽고, 어떻게 죽는 방법이 가장 쉬울까 하고 찾고 있는 제 눈에 띈 것은 엉뚱하게도 조그만 신문광고 직업소개소에서 낸 미국가정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조그만 신문광고 그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듯이 그것을 잡았습니다. 미국에 가자, 헨리와 윌마가 그랬다 미국은 평등사회라고. 나 같은 여자도, 없는 사람들도 하면은 된단다. 한 번 가보자 그리고 수속을 시작했습니다. 제 나이가 스무살 여러분들 생각에는 무엇이 제일 먼저 마음에 머리에 떠오릅니까? 똑같습니다. 딴 사람들도‘이 사람들이 너같이 어리숙한 애들 데려다가 창녀로 팔아먹으려고 하는 거다. 미쳤다고 갈라고 그러느냐.’저도 무서웠습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런데 저도 사실 그 사람들에게 눈물은 보이기 싫고 약한 점은 보이기 싫고 자존심 때문에, 그래도 갈거야 그렇게 하면서도 이불 뒤집어쓰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무서워서. 그리고 왜 꼭 나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처절한 생각에, 그렇게 울고 있는데 제가 그때 그 추운 개울가에서 발견했던 나의 상상력 그리고 내 목소리 그것이 들려옵니다.
그 개울가에서 그 목소리가 내가 힘들 때마다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너는 이 세상에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너는 나중에 엄청난 인물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네가 여기에 태어났을 리가 없다. 이것은 너를 크게 키우려는 하나의 수단과 방법에 불과하다." 상상입니다. 그런데 그 상상이 이 얼어 가는 물 속에서도 제 손을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자신의 마음을 쓰기가 얼마나 힘이 큰지 저는 거기에서 깨닫게 되고 그런데 제 목소리가 제가 지금 미국 가는 게 두려워하면서 울고 있을 때 또 들려옵니다.
"가라. 너에게는 죽음의 비상구가 있지 않느냐, 너의 죽음의 비상구는 네가 세계 어디를 가든 너와 함께 간다. 그리고 가서 정말로 네가 창녀로 팔려가서 못 견디겠다, 그게 삶이 아니다, 우리 어차피 다 죽는 목숨이다. 그 죽음의 비상구의 열쇠 바로 네가 가지고 있지 않느냐. 맞아 맞아, 네가 없는 세상은 끝이다. 가봐라. 해보지도 않고 남들이 그런다고 해서 너는 거기서 그냥 포기하려고 그러느냐" 그리고 밀고 나갑니다. 1971년 3월 9일 나는 뉴욕으로 갔습니다. 백불을 들고 돈을 꾸어서 비행기표 값 수수료, 완전히 One-Way 티켓을 들고 뉴욕에 도착을 했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가 잡았던 그 지푸라기, 그것은 지푸라기가 아니었고 쇠 동아밧줄 그리고 동아밧줄 끝에는 제가 상상도 못했던 기대도 못했던 엄청난 행운과 기회와 영광이 그리고 오늘의 행복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남들이 뭐라 그런다고? 남들이 내 불행 살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저는 또 한가지 인생의 중요한 철학을 터득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인간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한번 주변을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가 자기 부하든, 동료든, 상관이든 스스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기를 키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부탁을 안 해도 도와주고 싶잖아요. 그것은 어느 나라 인간이나 거의 다 똑같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기 전에 사실 한국 식모는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계속 해 오던 게 한국식모일 아닙니까? 그러나 미국식 식모는 어떻게 하는지 잘 모릅니다. 사람들이 제가 창녀가 된다고 했지만 10%는 어쩌면 제가 진짜 이 집에 가서 식모를 할지 모릅니다. 일도 할 줄 모르면서 무슨 일을 합니까? 계약은 계약인데. 그래서 미국 식모 일을 배우기 위해서 저는 제가 영어를 배우던 헨리와 윌마의 식모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여덟 달 동안인가를 그 집 식모 일을 했습니다. 한 달에 만원을 받고, 그런데 제가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하루는 이 사람들이 불러요. 아무튼 거기에서 일을 하면서 화장실까지도 정말로 타일을 매일마다 번쩍거리게 닦아놨습니다. 거기서는 밥을 먹어도 그리고 먹다가 떨어진 거 주워 먹어도 깨끗할 정도로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가르쳐 준 것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내가 찾아서 배워가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그래요.
‘남들이 하찮게 보는 식모일 그것까지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나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정말 대단하다. 지금 미국가는 케이스 너 잘못된다. 우리가 너를 데려가마. 우리가 너의 스폰서가 되어주마. 그 집에서 한 달에 300불을 준다고 했지? 3년 동안 있어야 된다 그랬지? 우리집에서도 300불을 주마 3년 이상 있어도 좋다. 거기다가 우리는 니가 그렇게도 원하는 대학을 보내주마’
부탁이 필요 없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그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노력을 한 거죠. 나는 이미 길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수속을 시작하던 것은 계약은 계약이니까 수속은 계속하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자기들은 센디에고로 가고 나는 뉴욕으로 가는데 ‘뉴욕에 가서 뭔가 잘못되면 우리한테 콜렉투콜 한 통만 해달라 그러면 우리가 언제든지 사람을 보내서 너를 돕고 그리고 비행기표를 보내주마. 센디에고로 데려오마, 우리가 너를 보호해주마.’
미국은 더 이상 나에게는 두려움의 장소가 아닙니다. 엄청난 힘이 생긴 거죠. 미국에 가서 처음에 식모 일을 해야 되는데 가보니까 벌써 딴사람이 차지하고 있어요. 진짜는 진짜였지만 진짜로 식모가 필요한데 식모가 한국에서 수속하느라고 2년이 걸리다 보니까 어떻게 견딥니까, 그래서 남미여자를 데리고 쓰고 있더라. 자기네들이 스폰서니까 거기서 일을 하려면 해도 좋다. 아니면 딴 데 자리 취직을 해도 좋다. 그리고 수시로 보고만 해라 왜냐하면 우리는 너의 스폰서이기 때문에 너에 대한 책임이 있다. 굉장히 좋은 분들이었어요.
나를 소개해 주었던 소개소 그 사람은 한국사람 형제입니다. 형은 뉴욕에서 식모를 필요로 하는 가정을 찾고 동생은 한국에서 일을 할 사람을 뽑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래요. 미국에는 취직할 데 많다 걱정하지 마라. 제가 백불을 들고 갔는데 첫날밤은 2류인가 3류인가 하는 호텔에서 잤잖아요. 그 집에 너무 멀어서 갈 수가 없어요. 하룻밤 잤는데 25불이 달아났어요. 100불 들고 갔는데 사흘 것 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취직자리도 없고 갈곳도 없고 망설이고 있으니까 한국여자 금방 온지 얼마 안된 사람을 소개를 해주고 그 집에서 내가 돈을 벌 때까지 먹고 자게끔. 그리고 그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식당에서 일하던 것도 경력이라고 저는 한국식당에 취직을 했습니다. 아주 고급식당입니다. 1971년 한 달에 천불을 벌었습니다. 엄청난 수입입니다. 나는 빚도 다 갚고 집에 용돈도 보내고 이제는 완전히 이제는 집안에 영웅이 됐죠.
그리고 내가 원하던 아파트도 빌리고 텔레비도 사고 신나는 거죠. 그리고 1년 반만에 저는 꿈에도 그리던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학교 다니고 저녁에는 일을 하고 그 당시에는 청혼도 참 많이 들어왔습니다. 외교관도 있고, 유학생도 있고,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일들이죠. 그런데 운명이었는지 그 사람들을 다 뿌리치고 이번에는 진짜로 180에 75㎏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합기도 7단입니다. 미국에 잠깐 시합하러 왔다가 저와 눈이 맞아서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됩니다. 주변에서들 다 말렸지만 너무나 멋있게 생겨서 저는 그 모양만 보고 사랑에 빠지고 나니까 제가 이 사람을 위해서 사랑이 있는데 무엇을 못하리 하고 결혼을 하고 태어난 아이가 우리 딸 성아입니다. 이 아이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홍일점 야구선수, 학교신문 편집장 그리고 또 퓨처 비즈니스 리틀 아메리카 2년 연속 회장, 학교 3학년 때는 전교 학생회장, 졸업할 때는 1등.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아이의 이름을 보셨을 것입니다. 1995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죠. 미국에서는 해마다 250만 명의 고등학생 졸업생 중에서 141명을 뽑아서 대통령상을 줍니다. 거기에 한국계 아이가 3명이 있었죠. 그 중에 하나가 제스민 성아 조. 바로 우리 딸입니다.
그 아이가 작년 여름에 하버드 정치외교과를 졸업하고 이번에 소위 미사일 장교가 되었습니다. 4년 연속 ROTC를 해서 ROTC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소위 임관을 해서 여러분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군산 거기에서 하늘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아이가 어릴 때도 멍텅구리 같았고 말도 저희가 항상 외국에 돌아다니다 보니까, 영어와 한국말과 일본말 그런 사이에서 굉장히 황당했었고 지금은 한국말, 일본말, 영어가 능통합니다. 미래에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만 중요한 것은 제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제가 스스로 희망의 증거가 되고자, 가능성의 증거가 되고자 노력을 했기에 저희 딸이 또 다른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는 하나의 증거를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이 아빠를 만났는데 결혼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너무 생각하는 데에서 정말 큰 차이 넘지 못할 벽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전혀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저희 남편은 여자는 무조건 절대로 남편에게 복종을 해야 된다, 그리고 마누라는 1년에 서너번은 두들겨 맞아야지 제자리를 안다. 사랑에 푹 빠져있을 때는 이 매까지도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그 강한 주먹, 합기도 7단입니다. 키가 얼마입니까? 덩치가 얼마입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매를 맞으면서 나는 또 다시 좌절하게 되고 비열해지고 정말 비참해집니다. 단 한가지 터득한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매를 맞아서는 안되겠지만 어쩔 수 없이 꼭 매를 맞아야 한다, 그럴 때는 몸에서 힘을 쫙 빼버리세요. 완전히 고무처럼 되가지고 치면 이쪽으로 휘청, 저쪽으로 휘청, 얼굴은 깨지고 터지고 피가 나고 그래도 아프진 않습니다. 맞는 것도 억울한데 아프지는 말아야지, 제가 매를 맞으면서 터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프지 않는 것까지는 좋은데 더 무서운 현실이 제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을 합니다.
사람들이 그러죠. 어느 사람은 악인이다, 어느 사람은 살인마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있고. 그런데 사실 모두에게 이 마음속에 선과 악이 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러나 악을 많이 누르고 선을 밖으로 많이 내보내는 사람 선인이라고 부르죠. 선이 이기지 못해서 악이 밖으로 많이 노출되는 사람 그 사람은 악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살인마라는 사람은 순간적입니다. 순간의 분노에 참지 못해서 그냥 찌르면 그냥 살인마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속에서 살인마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복수를 하고 싶습니다. 힘으로는 되지가 않습니다. 나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 사람이 잠이 들었을 때 나는 칼로 찔러 죽일거다. 이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피를 흘리고 서있을 때 그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얼마나 통쾌하겠느냐,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그리고 그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때 제 마음속에서 또 다시 제 소리가 들립니다. 통쾌하니? 통쾌한데 그 뒤에 쓰러져 있는 남편 뒤에 울고 있는 너의 시어머니 그리고 아이들, 그 얘들은 어떻게 되니, 너의 부모는 어떻게 되니, 너의 형제는 어떻게 되니, 너는 어떻게 되니? 이 사람을 죽이고 나면 틀림없이 나도 나를 죽이던지 나는 감옥에 가게 될 거다. 그 다음에 내 가족들 이 사람들 다 허물어지고 모두가 다 불행해 지도록 이 사람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냐. 떠나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러고 찾아간 곳이 바로 미군이었습니다.
1976년 11월 9일 나는 군용버스에 몸을 싣고 알라바마로 떠났습니다. 훈련장이죠. 사병이었죠. 대학 다닌 지 2년밖에 안됐기 때문에 장교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11월 10일부터 엄청난 훈련이 시작됐습니다. 제 나이 스물 여덟의 생일날이었습니다. 저의 딸은 여덟 달 됐죠. 제가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한국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저와 같이 훈련을 받던 아이들 그 아이들은 그때는 여군단이었죠. 저보다 10살 이상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동양여자는 서진규 한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제가 입대하기 전에 제가 또 다시 임신한 줄은 모르고 입대를 위한 예방주사를 많이 맞다 보니까 아이가 유산이 되었습니다. 입대 한달 전 완전히 만신창이의 몸을 끌고 군에 입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도 학교에서는 못 알아들으면 ‘교수님 제가 못 알아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가능합니다. 군에서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우향 앞으로 가" 저 혼자 좌향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 당황해서 우향 앞으로 가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군에서는 한사람을 개인을 벌하지 않습니다. 꼭 단체로 벌을 줍니다. 저는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아이들한테서 왕따를 당합니다. 이 아이들이 얼마나 밉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힘이 들어 죽겠는데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어서 계속 실수를 하고 나 때문에 벌을 받고 참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외로움에서 끝나는 게 아니죠. 체력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윗몸 일으키기 한번을 못합니다. 못하면 떨어집니다. 배에 힘이 하나도 없죠. 아무리 일어나려고 해도 일어나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단체로 구보를 합니다. 못 따라갑니다. 숨이 목에 차고 뛰고 또 뛰는데 결국 나는 낙오가 되고 다들 나를 버리고 떠납니다. 나는 터덜거리고 따라가다 보면 또다시 쓰러지고 먼지 속에서 울고 있을 때는 왜 그렇게도 여덟 달밖에 안된 우리 딸이 보고 싶은지. 아이가 가엾기도 하구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로 쓰러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또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포기하지 마라. 네가 여기서 쓰러지고 나면 네가 구하고자 했던 그 힘든 사람들 누가 구해줄 거냐. 너는 쓰러질 수 없다. 네가 쓰러지고 나면 네 딸이랑 누가 구해줄 거냐, 너는 쓰러질 수 없다. 일어서라. 여기에서 포기할 순 없다. 다시 일어섰습니다. 나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또 다시 뜁니다.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 그냥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포기함으로써 내 가족은 어떻게 되느냐, 내가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쉽게 포기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힘이 나게 됩니다. 서진규는 일어섰습니다. 또 뛰었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뛰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에 나는 그 200명중에서 일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자기가 막지 않는 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군에서 승승장구합니다. 나중에는 32살에 장교가 되었습니다. 장교가 되고 나서 소대장을 독일에서 하고, 한국에서 작전참모를 하고 그리고 중대장을 했습니다. 퇴계원에서 지하 송유관 그것을 운영하는 일반장교로서는 한국여자 동양여자로서는 최초였습니다. 우리 중대로서는 여자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성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다른 도전을 합니다. 지역전문가, 그 지역 전문가에 뽑히면 그 나라 언어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대학원을 보내줍니다. 나는 동북아 지역전문가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거친 바람 속에서 나를 키웠기 때문에, 나는 강하게 자랐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고 워싱턴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미군에서, 그러기 때문에 물었을 때 내 말은 힘이 있습니다. “왜 안됩니까?” 그들이 그랬습니다. “이 지역 전문가로는 여자를 뽑아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당신은 한국출신의 여자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미국은 평등사회입니다. 내가 여자건 한국출신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사람 말이 “미국은 평등사회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서 같이 일을 해야할 사람들은 남존여비 사상이 들어있는 한국남자와 일본남자들입니다. 그런데 작전상으로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 우리가 어떻게 뽑아서 보냅니까? 더구나 한국여자를 일본남자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그분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부끄러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함부로 하면 내가 가만 안 있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대처 수상이 한국에 왔다. 일본에 왔다. 그러면 당신은 한국 남자들이 일본 남자들이 그리고 한국의 대통령이, 일본의 수상이 그 여자를 보고 당신이 여자니까 같이 일할 수 없소. 그리고 그 여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함부로 해서 협상을 망칠 줄 아십니까? 당신은 한국의 남자와 일본의 남자들이 바보 멍텅구리로 보이십니까? 그들에게도 야심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꿈이 있고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그들에게도 애국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 나라를 위해서 이 협상이 꼭 필요하다는데 상대가 여자면 어떻고 흑인이면 어떻습니까? 당신이 해야할 일은 남자들에게 힘을 주듯이, 밀어 주듯이 나에게도 똑같이만 밀어주십시오. 그리고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함부로 안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기회를 주십시오.” 하루 걸렸습니다. 나는 시험 케이스로 뽑혔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일본말을 배웠죠. 그리고 그 다음에 하버드에 지원을 합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아줌마입니다.
대학교도 처음에 군대 들어가기 전에 2년, 군대생활을 하면서 야간대학을 다섯 군데나 옮겨가면서 14년 만에 졸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이 여자가 하버드를 넘봅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도 하버드하면 껌벅합니다. 한국 껌껌벅이죠. 일본은 껌껌껌벅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실패를 하면 다시는 여자장교들을 뽑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길을 막는다. 나는 엄청난 사명이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나는 기술이나 백그라운드가 필요하다.
일본말, 한국말은 자신 있다. 문제는 하버드라는 백그라운드만 있으면 내가 가서 협상을 하는데 엄청난 도움이 될 거다. 그래서 두 군데에 지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군데 다 합격입니다.
그냥 야간 하버드대학이 아닙니다. 실제의 하버드대학, 20대와 같이 힘을 겨루는 그 하버드대학입니다. 근데 대학원 두 군데 다 합격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군에서 제 학비를 다 대줍니다. 저는 그때 대위였습니다. 대위 월급이 굉장히 셉니다. 인정도 받습니다. 나는 하버드에 가서 공부만 하면 됩니다. 학비뿐만 아니라 학용품 사는 값, 이사 값 모든 것을 다 대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 군데 다 갈 수 없습니다. 한 군데 밖에 못 갑니다. 그래서 J.F.Kennedy School of Government에 못 간다고 사인을 하는데 팔이 떨려서 이름이 안 써집니다. 이게 꿈이냐 현실이냐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발통 붙들고 고물자 옷 입고 대학 뺏지만 단 사람을 봐도 먼발치에서 부러워서 눈물을 흘리던 그 여자가 지금 세계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하버드의 한 곳을 내가 안가겠습니다 하고 사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버드는 정말 수재들이 많이 모입니다. 나와 20대 초반들 같이 경쟁을 합니다. 절대로 나 하버드에서 봐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진규는 기초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거의 평생을 일하면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한번 읽어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읽어본 책이라면 교과서 외에는 소공녀, 소공자 정도, 그런데 이 아이들과 똑같이 경쟁해야 합니다. 정말 죽도록 뛰었습니다. 그리고 석사학위 2년 뒤에 A학점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제치고 그리고 이번에는 박사에 도전을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옛날에 어릴 적에 그냥 뭔가 무조건 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지 사실 하버드까지 가리라고는 상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석사까지도 됐지 않습니까? 박사, 하늘의 별따기란다. 그런데 상상도 못하던 가능성 한번 도전해보자. 첫 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 또 다시 도전을 했습니다. 우리 과, 한국말로 하면 국제 외교사와 동양언어학, 세계에서 32명이 지원을 했습니다. 수재들이, 2명만 뽑습니다.
그런데 50%가 마흔 초반의 아줌마 아닙니까? 뽑혔죠. 그러나 서진규는 군에서 보낸 사람 나는 군으로 다시 복귀해야 합니다. 하버드에 휴학계를 내고 군으로 다시 돌아가서 일본으로 갔죠. 딸과 함께, 그때는 이미 헤어지고 딸과 둘이만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가서 사상 최초의 여성연락장교, 사상 최초의 군사정치고문 여성으로서 그런데 대성공입니다. 나는 명함에다가 첫 자를 첫줄을, 일본은 위에서 아래로 쓰죠. 하버드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그것부터 써놨습니다. 일본사람들이 껌껌벅입니다.
그리고 또 거기는 미군 소령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열등의식을 느끼는 영어와 미군에 대한 그러나 나는 그들 앞에서 당당한 영어로 유창한 영어로 키가 육척이나 되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들은 내 말 한마디에 착착 움직입니다. 그들은 대리 만족을 합니다. 나를 굉장히 위대하게 바라보고 엄청나게 협조를 합니다.
나는 대성공을 했고 내가 있는 동안에 이미 미군 여군 장교가 그 지역 전문가로 뽑혀서 배치를 받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 보잘 것 없었던 가난한 술집 딸, 보잘 것 없었던 그 가발공장 직공이 세계 최강군인 미군을 바꾼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