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민 노동자 부부의 애국 |
서 지 문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
2004년 4월 27일,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1세기 전에 하와이로 이민갔던 고 권 도인씨와 그의 아내 이 희경씨가 대전국립현충원의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188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 난 권 도인씨는 1904년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하고 싶었으나 집안의 둘째 아들로서 부모에게서 학자금도 지원받을 수 없고 땅도 물려받을 수 없는 처지라서, 마침 그 때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모집광고를 보고 미국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을까해서 지원했으나 연령 미달로 좌절하고, 이듬해 나이를 만 18세로 속여서 선발이 되었다고 한다. |
사탕수수밭의 소년 노동자 |
처음 카우아이 섬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연령 미달임이 탄로가 나자, 나이 든 노동자들보다 일은 오히려 많이 했는데도 첫 해에는 2달러 적게, 월 16달러 밖에 받지를 못했다고 한다. 권 도인씨는 나중에 부유한 사업가가 된 후에도 이 일을 회상하면 몹시 분개했다고 한다. 2년의 계약 기간이 끝난 19세 때 호놀룰루로 가서 가구점에서 견습생이 되어 가구 제작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생계 대책이 좀 서자 당시의 다른 이민 노동자들 처럼 사진 교환을 통해 신부를 데려와서 대구 출신의 이 희경씨와 결혼했다고 한다. 1894년생인 이 희경씨는 대구에서 선교사들이 설립한 신명여중의 1회 입학생으로 입학 해서 수석으로 졸업 하고 1912년에 하와이로 시집을 갔는데, 이 희경씨 역시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미국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을까하고 갔지만 배에서 내리자마자 결혼식을 하고 가난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실망했지만 그래도 젊은 청년의 사진을 보고 정혼했다가 하와이에 도착해 보니 신랑이 40대, 50대여서 비참했던 많은 사진 신부 들에 비하면 여섯 살 연상의 의욕적인 남편과 결혼한 이 희경씨는 운이 좋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 희경씨는 곧 실망을 떨치고 빈한한 신혼생활 속에서도 다른 한국여성들과 함께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해서 매주 떡과 잡채, 산적 등 음식을 만들어 팔아서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1918년 말에 3•1독립운동자금 10만불을 만들어, 네 살 먹은 딸을 친정 부모님께 보여 주기도 할 겸 귀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지한 미화가 세관에서 적발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돈은 몰수당하고 수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타깝게 3•1운동의 소식을 옥중에서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2년 후에 석방이 되어서 하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부부는 그 후 세 명의 아이를 더 두어서 네 자녀를 길렀고,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는 날, 자녀를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던 (이때 혼자되었던) 권 도인씨는 졸업식장 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좌절과 고된 현실을 애국으로 승화 머리가 좋고 아이디어가 풍부했던 권 도인씨는 가구 제작 업자로 크게 성공해서 하와이 최상류층 인사들의 가구를 주문 제작 하고 늘 새로운 발명품을 궁리해서 가구에 관한 특허를 40여개나 땄다고 한다. 그의 발명 아이디어는 하와이 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활용되었는데 특히 2차대전 중에 그가 제작한, 공습을 피하기 위해 불빛은 새어나가지 않으면서 환기는 되는 커튼은 큰 힛트 상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이디어 개발에만 골몰해서, 직물소파 바느질이나 종업원 관리등 사업은 부인 이희경씨가 맡아서 했고, 그의 사업이 수익을 낸 것도 부인의 관리 덕분이었다고 한다. 이 희경씨는 남편의 사업을 위해 공장에서 일을 하는 한 편 독립자금 모금과 교회에서 한글 가르치기 등 한인 사회를 돕기 위한 일도 헌신적으로 했는데 권 도인씨는 부인이 집 밖에서 많은 일을 하고 돈을 기부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 사업이 성공하면서 대한인국민회의 간부를 역임하며 많은 독립자금을 내 놓았다고 한다. 이 희경씨는 한국이 독립한 2년 후인 1947년 교통사고로, 50대 초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권 도인씨는 1962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한국 정부가 이 부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를 인정해서 훈장을 수여하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을 제안했을 때 한국에 자주 성묘를 올 수 없는 자녀들은 망설였지만 조국에 대한 부모의 간절한 염원을 아는터라 결국 온 가족의 합의로 2004년에 대전으로 부모를 이장했고, 올 10월 초 막내딸 에스터 여사가 완성된 묘역과 묘소, 그리고 비석을 보기 위해서 84세의 나이를 무릅쓰고 내한했다.
후손의 감격과 안도 에스터 여사는 수많은 애국영령들과 함께 잠든 부모의 완성된 묘와 부모의 공적사항이 쓰여 진 비석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와 체력으로 다시 방한은 어렵겠지만 부모가 그토록 잊지 못하던 조국의 품안에서 잠들었고 조국이 부모의 애국심을 인정해서 그들의 묘를 관리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무한히 안심시키는 것 같았다. 참배가 끝난 후 대전예술문화회관에 나들이를 갔는데 10월의 첫 토요일을 즐기러 나온 인파가 엄청나게 많았다. 에스터 여사는 한국이 발전해서 지방 도시에도 아름답고 멋진 문화회관이 있고 문화를 향유하러 나온 가족이 많은 것을 보고 너무도 흡족해 했다. 한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을 뿐 아니라 국민의 문화수준도 높다는 생각이 한국의 장래에 대해 낙관하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나라의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애국혼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재산을 바쳐 독립을 지원했는가를 망각하고 산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하여 이 나라를 굳건히 지키고 발전시키고 화합하며 내실 있게 살아야 할 우리의 도리를 너무 쉽게 잊고 산다. |
첫댓글 미소님
좋은 글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애국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렵지요.
지금도 숨어서 실천에 옮기는 많은 애국을 하시는 모든 분들께 박수를...
미소님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고맙습니다.. 숨은 애국자 정말로 많지요..~
우리의 제자님들께서도 모두다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나름 열심히 사는것이 애국입니다 미소님은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것도 진정한 애국이지요..애국은 방법은 달라도 뜻은 같으니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은 그들의 피와 땀이 녹아내려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사는것도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합니다.......
당연하지요.. 그리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다른이들의 수고와 고통을 알려하지않고 제 욕심채우느라 잔머리만 굴리네요^^
감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