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도깨비
김 한 호
옛날 사람들은 도깨비하고 씨름을 했다. 이웃집 노인은 “도채비허고 씨름을 헐 때는 왼 다리를 잡아야 이기는 기여. 오른 다리는 힘이 무지하게 쎄기 때문에 힘쎈 장사라도 이길 수 없는 겨. 왼쪽 다리는 헛깨비랑께.”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도깨비의 오른쪽 다리를 붙들고 밤새 씨름을 하다가 지쳐 쓰러져 죽은 사람도 있었다.
옛 사람들은 도깨비와 더불어 살았다. 그 당시에는 도깨비들이 참 많았다.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어두운 밤이면 헛것들이 도깨비로 보였다. 더욱이 몸이 약한 사람은 헛것에 놀라 죽기도 했다.
도깨비는 사람이 죽은 뒤에 생기는 귀신과는 달리 사람의 모습이나 도깨비불로 나타난다. 대개 도깨비는 빗자루, 짚신, 부지깽이, 절굿공이, 도리깨 등 오래 쓰다버린 일상용품이 변해서 된 것으로 동굴이나 오래된 폐가, 당산나무 고목 속에 살며 밤에만 활동한다. 사는 곳에 따라 산도깨비, 물도깨비, 바다도깨비, 수풀도깨비 등으로 구분한다.
도깨비는 어린 아이가 죽어서 되기도 한다. 그래서 도깨비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들과 장난치기를 좋아한다. 도깨비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리면 돈과 보물이 쏟아진다. 그리고 밤새 솥뚜껑을 솥 안에 우그려뜨려 넣기도 하고, 황소를 지붕 위로 올려놓기도 한다. 또한 가난하고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못된 사람을 골탕먹이는 도깨비는 사람을 속이지만 결국은 자신이 속고 마는 어리석음 때문에 사람들이 친근하고 익살스럽게 여긴다.
도깨비는 『월인석보(月印釋譜)』의 ‘돗가비니’에서 온 말로 ‘씨앗’이나 ‘불’을 의미하는 ‘돗’과 ‘애비’가 합쳐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성인 남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방에 따라서는 독갑이, 도채비, 귓것, 독각귀(獨脚鬼), 망량(魍魎), 김서방, 도깨비참봉, 도깨비영감으로 불리기도 한다. 도깨비참봉은 서해 바닷가에 살면서 어부들의 뱃일을 도와주며, 도깨비영감은 제주도에서 집안을 지키고 물고기를 몰아준다. 지금도 섬진강에는 도깨비가 물고기를 몰아준다는 ‘도깨비 살’이 남아 있다.
그리고 효성스런 나무꾼이 부모님께 드릴 개암 열매를 줍다가 산속에서 잠이 들어 도깨비를 만나게 되지만, 개암 열매를 깨물어 그 소리로 도깨비를 쫓아버리고 도깨비 방망이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처럼 도깨비에 대한 민담은 구전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도깨비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는 밤과 낮의 구별이 없이 사람과 도깨비가 뒤섞여 살았다. 그런데 사람과 도깨비가 밤낮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서로 부딪쳐 싸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 대표와 도깨비 대장이 서로 만나서 협상을 했다. 내기를 하여 이기는 쪽이 낮과 밤 중에서 하나를 먼저 선택하기로 했다.
성질 급한 도깨비 대장이 먼저 문제를 냈다.
“백두산 천지는 잔으로 몇 잔이 되겠는가?”
사람 대표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 잔이오.”라고 대답했다.
도깨비 대장이 “왜 한 잔밖에 되지 않는가?”라고 물으니,
사람 대표가 말하길 “백두산 천지만한 큰 잔에 담으면, 한 잔밖에 되지 않느냐.”라고 대답하니,
도깨비 대장이 “맞소.”라고 했다.
다음은 사람 대표가 문제를 냈다.
“내가 앞으로 넘어질 것 같소? 뒤로 넘어질 것 같소?”라고 물으니,
도깨비 대장이 “사람은 앞으로 걸어가니, 앞으로 넘어질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사람 대표가 “아니! 이렇게 뒤로 넘어지지 않소.”라고 하니,
도깨비 대장이 “내가 졌소.”라고 하여 도깨비가 내기시합에서 졌다.
그래서 그 후부터 사람은 밝은 대낮에 다니고, 도깨비는 어두운 밤중에만 다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와 같이, 도깨비는 오랜 세월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면서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더구나 나는, 도깨비가 김(金)씨가 되었다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어릴 때 별명이 도채비, 도치기였다. 그래서 도깨비에 관한 에피소드가 누구보다도 많다. 아마 나는 전생에 도깨비였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도깨비 이야기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어린 시절에는 도깨비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가 수없이 많았다. 나 역시 전설 같은 도깨비에 얽힌 추억이 남아 있다.
내가 사는 읍내에는 서천과 동천이 흐르고 있었다. 서천에는 물이 맑아 은어와 징게미, 다슬기와 반딧불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서천 건너 서산에는 밤이면 반딧불처럼 도깨비불이 휙휙 날아다녔다. 달빛이 부옇게 비치는 흐린 날이면 도깨비불은 더욱더 극성을 부렸다. 마을 어른들은 올해는 유난히 도깨비불이 많이 떠돈다고 했다. 어떤 이는 마을 뒤에 있는 저수지 둑이 무너져 홍수가 난 뒤부터 귀신불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 해는 여느 해보다 보릿고개가 심해 굶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청보리를 베어다 죽을 쑤어 먹거나, 파란 하늘이 비치는 밀죽을 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 객지에서 흘러들어와 김부잣집 머슴으로 빌붙어 사는 박샌이(박생원의 준말로 낮춰 부르는 말) 술이 만취가 되어 푸념을 하고 있었다.
“자식이라고 한 놈 있는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자식 새끼 데지자 마누라도 미쳐 도망가버리고… 이 놈의 신세, 어이! 어이!”
술이 취해 울부짖으며 신세타령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동네 어른 중에 한 사람이 달래면서 도깨비 이야기를 했다.
“어이, 머시기! 요즘 서산에 거시기가 있는 디, 자네가 한 번 가 볼랑가?”
술이 취해 울던 박샌이 머시기, 거시기란 말에 눈이 뚱그래지며,
“도채비 말이지라우?”
“아, 글쌔 시상에 무신 변고가 생길랑가 서산에 도채비불이 밤마다 돌아다녀!”
“자네가 그 놈을 잡아오면 술 한 동이 사지.”
술이 취한 박샌은 쇠스랑을 둘러메고 서천을 건너 서산엘 갔다. 아무리 술이 취한 객기라도 한밤중에 산속에 혼자 간다는 것은 여간 담력이 크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 일이었다.
박샌이 돌아왔다고 동구 밖이 시끄러웠다. 달려나가 보니 박샌의 쇠스랑에는 해골바가지가 걸려 있었다. 아낙네들은 무서워 모두 도망가버렸다.
도깨비불은 혼불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죽으면 뼈에서 인(인화수소)이 나와 그 빛이 밤하늘에 떠돈다고 한다. 또는 밤에 야생 길짐승이 인골을 물고 다니는데 그것이 도깨비불처럼 보인다.
그런데 도깨비불이라고 잡아온 박샌은 인골을 쇠스랑에 찍어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 후 사건이 생겼다. 동네 처녀가 서산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발가벗긴 채로 죽임을 당했다. 경찰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수사는 미궁에 빠지게 되었다. 소문만 뒤숭숭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또다시 서산 공동묘지 골짜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정신병자의 소행이라거니, 치정에 얽힌 원한으로 여자를 죽였다느니, 소문만 흉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사반장이 “밤에 그 곳에 가서 함께 잠복을 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일에 협조할 경우, 쌀 한 포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무도 협조하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 좀 모자란 듯 어리숙한 박샌이 나섰다.
“내가 가지라우. 내 목숨은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닌 깨.”
“쌀밥이라도 한 번 실컷 먹어 볼라요.”
김부자는 몇 번이고 말렸지만 박샌이 워낙 황소고집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건이 예상되는 날, 그 지점에서 형사와 박샌이 함께 잠복하기로 했다.
약속한 날, 하필 비가 내렸다. 초여름비가 치렁치렁 내리니 으시시 추위가 밀려왔다. 박샌은 겨울에 입는 두꺼운 코트를 입고 쇠망치와 작은 말뚝을 들고 산으로 갔다. 그 곳에 잠복해 있었다는 증거로 그 지점에 말뚝을 박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초저녁에 산에 올라간 박샌이 자정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사람들은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형사는 먼저 산에서 내려오고 애꿎은 박샌만 화를 당한 것이라고 했다.
새벽녘이 가까워오자 남정네들은 횃불을 들고 서산 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로 행했다. 멀리서 박샌이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놔라, 이놈아!”
“놔라, 이놈아!”
“놔라, 이놈아!”를 반복해서 외치는 소리가 피를 토하듯 골짜기에 메아리져 울부짖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보니, 박샌은 말뚝을 두꺼운 코트 자락에 박고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마 술이 취한 박샌은 도깨비가 자기를 잡고 놔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도깨비에 홀린 듯 헛소리를 하며 제 정신이 아니었다. 시들시들 아파 눕던 박샌이 세상을 떠나자 동네사람들은 박샌이 말뚝을 박았던 공동묘지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
우리들은 서산에 있는 공동묘지 그 골짜기를 가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깨비나 귀신이 살고 있을 것 같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용감한 동무가 말했다.
“밤에는 도깨비가 나타날지 모르니, 낮에 가보자.”
용기 있는 동무들과 함께 들을 지나고 내를 건너서 산으로 갔다. 민둥산으로 에워싸인 오솔길을 굽이돌아 산속 깊숙이 들어갔다. 낯선 산속에는 도깨비들이 모여 있는 듯 웅얼웅얼 도깨비소리 같은 바람소리가 났다. 바람소리는 숲속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 계곡물이 흐르는 골짜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잠깐! 이상한 물체가 움직여….”
숲이 우거진 음습한 곳에 이르자 앞서 가던 동무가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수풀 속에서 놀란 장끼 한 마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푸드득 날아갔다.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놀랐는지 아무도 먼저 나서는 동무가 없었다. 다들 슬금슬금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산새들이 “킥킥킥 째액 째액” 웃고 있었다.
그 날은 도깨비는커녕 도깨비가 산다는 골짜기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삶의 희망이 없던 어려운 시절에 도깨비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사실 도깨비는 인간이 창조해 낸 상상의 세계이지만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세상에는 사람의 탈을 쓴 도깨비의 허상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는 6ㆍ25전쟁 중에 태어나서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자랐다. 더욱이 우리 꼬맹이들은 전쟁의 상처와는 아랑곳없이 철부지 도깨비처럼 천방지축 뛰놀기만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깊은 숲속이나 들녘 보리밭에 가면 문둥이들이 잡아먹는다고 했다. 그 무렵 서정주 시인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고 노래했다.
3년간의 한국전쟁은 한반도를 완전히 벌거벗은 폐허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전후 세대인 우리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되새김질하며 살아야 했다. 더욱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빨간 도깨비들이 세상을 설치고 다녔다. 1950년대는 6ㆍ25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우익과 좌익의 이념 대립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전쟁 뒤끝이라 상이용사도 많았고, 고아와 거지도 많았다. 매일 같이 무슨 집회가 그리 많이 열리는지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그런데다 그러께는 큰 비가 내려 봉강저수지 둑이 무너져 물난리가 났다. 처마까지 물이 차올라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과 가축이 죽었다. 더구나 농토가 물길에 휩쓸려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 당시에는 보릿고개가 있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파아란 하늘 아래 푸르른 보리밭길을 걸어가노라면, 굶어 죽은 거지들이 낮도깨비처럼 보리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가뭄이 심하던 그 해는 거지들이 많이 죽었다. 아침, 저녁밥 때면 동네에 나타나던 뻐꾸기 할애비도, 영순네 에미도 보리밭에 쓰러져 있었다. 설익은 청보리를 한입이나 입에 물고 죽어 있었다.
6ㆍ25전쟁 때 우리를 도와주던 미군이 백운산 빨치산을 토벌한다고 우리 고장에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읍내 경찰서 근처였기 때문에 경찰서 운동장에 놀러가면 미군을 만날 수 있었다.
“헬로! 기브 미”
미군에게 손을 벌리면 껌과 초콜릿을 주었다. 어떤 때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그런 미국사람들이 보릿고개로 굶주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구호품으로 우유와 강냉이를 주었다. 우리들은 점심 때면 바께스에 가득 담아온 누런 강냉이죽을 꿀꿀이처럼 맛있게 먹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동무들 중에는 제대로 먹지 못해 올챙이처럼 배가 튀어나오고, 제대로 입지 못해 헐벗은 몰골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동무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기생충 검사를 하여 약을 먹고 난 다음날 변소에 가면, 희멀건 회충이 기어다니고 악취가 진동했다.
“여름방학 숙제 다 했어?”
“어떤 것?”
“포리 10통 허고, 쥐 꼬랑지 100개 말이야.”
여름방학이 되면 숙제도 많았다. 방학책뿐만 아니라 곤충 채집과 식물 채집을 하고, 퇴비 증산이라 하여 풀도 베어와야 했고, 파리를 잡아 성냥통에 담아와야 했으며 쥐꼬리도 잘라서 내야 했다. 파리나 쥐꼬리는 썩기 때문에 일찌감치 방학 숙제를 한 동무들은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방학 숙제를 하기 위해 빨치산 토벌하듯 파리나 쥐를 보이는 즉시 때려잡았다.
그 당시에는 6ㆍ25전쟁을 겪은 뒤라서 사회가 혼란스럽고 경제가 궁핍하여 사람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다 이승만 정권은 부정부패와 독재정치로 국민들의 저항을 받아 마침내 1960년 4ㆍ19혁명과 1961년 5ㆍ16군사정변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웃집에는 수염도 깎지 않고 도깨비처럼 장발을 한 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사법고시 준비생으로 시골에 내려와 있으면서 우리들에게 서울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그런데 핏빛 동백꽃이 처연하게 뚝뚝 떨어지던 어느 날, 그가 보이지 않았다. 4ㆍ19혁명이 일어나 데모를 하러 서울에 갔다고 했다. 그 후 그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이듬해, 별 두 개를 단 박정희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깡통모자에 검은 썬그라스를 낀 박정희 소장은 혁명공약을 내세웠다. 우리들은 혁명공약을 구구법 외우듯이 외었다. ‘가난을 물리치고 반공을 국시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우리들은 개구리와 뱀이 기어다니는 논둑길을 걸어가면서도 혁명공약을 큰 소리로 외웠다. 혁명공약을 잘 외우면 공산당 빨갱이도, 가난도 없어질 거라는 선생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는 도깨비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새마을운동으로 마을마다 가로등이 생기고, 집집마다 전등이 밝혀지면서 도깨비들은 어디론가 꼭꼭 숨어버렸다. 그게 아니면 박정희 군사 독재에 도깨비들마저 벌벌 떨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매년 8ㆍ15광복절이 되면 군민 체육대회가 열렸다. 광복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축 마라톤이었다. 마라톤 우승자는 영웅이 되었다. 그래서 마라톤 대회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했다.
체육대회를 구경하던 촌로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저 사람들 다 도깨비 마라톤이지 뭐! 젊은 놈들이 히바리(힘)가 있어야제.”
“그기 뭔 소린디?”
“면장 만세 삼창이지.”
‘도깨비 마라톤’은 농어촌에서 일만 하고 살던 젊은이들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모두 낙오하고 만다는 이야기다. 마라톤은 장거리 달리기이기 때문에 체력을 안배하여 달려야 하는데, 출발 신호가 울리자마자 100m달리기하듯 달리다가 힘이 부쳐 막상 결승점에는 한 사람도 도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시골 장터에 도깨비시장 서듯 한바탕 왁자지껄하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면장 만세 삼창’은 지역행사 때면 만세 삼창을 하는데, 이 만세 삼창은 면장이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이는 일제시대 때 무식한 면장이 행사장에서 할 일은 오직 일제를 찬양하는 만세를 부르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하나마나 한 일이나, 들러리밖에 되지 않는 사람을 그렇게 일컬었던 것이다.
면장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옴천 면장 맥주 따르듯 한다.’는 말이다. 강진군 옴천면은 인구가 강진 읍내에 있는 리(里)만도 못해 재정이 빈약했다. 그래서 군수가 오면 맥주 거품을 최대한 많이 나게 하여 맥주 한 병을 여러 잔이 나오게 따른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염산 면장 닭 모가지’라는 말도 있다. 영광군 염산 면장은 군수가 좋아하는 닭 모가지를 눈치 없이 자기가 먼저 먹어치워 면장 직에서 모가지(해임)를 당했다는 이야기에서 회자된 말이다. 예전에는 면장이 ‘홍어 ×’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전라남도에는 3성(城) 3평(平)이 있다. 3성 3평은 재와 평야가 있는 고을을 말한다. 높은 고개가 많은 장성(長城), 곡성(谷城), 보성(寶城)을 3성이라 하고, 넓은 평야가 있는 함평(咸平), 창평(昌平), 남평(南平)을 3평이라 불렀다. 이 3성 3평은 지역민들이 드세고 기질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지역 사람들을 차별하는 말로 3성 3평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3성 3평은 옛말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빛(光)의 시대다. 광 산업이 발달한 광주(光州)와 제철 산업이 번창한 광양(光陽), 그리고 신령스런 원자력이 있는 영광(靈光)이 새로운 남도의 3광(光)으로 떠오르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 한국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 운동과 조국 근대화를 통한 경제 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2년 10월에 장기 집권을 위해 헌정을 중단하고 유신 체제를 확립하여 독재 체제로 치달았다.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한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대내외적으로 전개했다. 이 무렵에는 독재 정치에 반발한 장발머리를 한 대학생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박정희 독재에 동조하는 위정자들을 질타하며 밤낮으로 시위를 하고 파출소를 습격했다. 유신헌법을 개정하자는 많은 국민들의 동조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동하는 등 강경정책을 실시하다가 1979년 10ㆍ26사태가 발생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나는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대학에서 연인을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라는 황홀한 단어에 빠져들었다. 돌이켜보면 짧은 시절이었지만 행복한 날들이었다. 나의 자전적 수필 「은하수 흐르는 세월」을 보면,
“어느 봄날, 녹색의 잔치인 ROTC 축제에 그녀는 나의 파트너가 되었고, 우리들은 초록빛 사랑으로 물들어갔다. 그녀를 알고부터 세상은 아름답게 보였고, 삶은 의미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와 만남은 가슴 설레는 환희였으며, 우리는 대학에서 꿈처럼 아름다운 청춘을 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가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칠 년 동안이나 그리움의 강가에서 서성거려야만 했다.”
그렇지만 곧이어 닥친 고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ROTC장교로 임관하여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공수특전사에 차출되어 ‘악으로 깡으로’ 훈련을 받았다. 고통을 즐길만한 여유도 없었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싸움을 하는 검은 베레모는 죽음을 불사하는 도깨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내 삶에 희망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내 글 속에 살아 있는 증인이었다.
“눈 시리도록 기다리던 수많은 날들의 편지는 떨어져 지내는 둘 사이의 유일한 대화의 통로가 되었다. 군대에서 고되고 힘든 훈련을 받을 때, 그녀의 편지는 괴로움의 골짜기와 아픔의 벌판을 헤매다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해주는 사랑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아느냐!
하늘에 날개 편 나의 모습을
하늘가 어디엔가 메아리친
나의 음성을…….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불러본 이름은 ‘사랑하는 그대의 이름이었다.’라고 고백한 나의 사연에 그녀는 울고 말았다. 어느 때는 훈련을 받고 있는 심산유곡에까지 그녀의 편지가 낙하산에 실려 배달되곤 했을 때, 가슴 깊숙이 피어오르는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독수리 작전을 할 때였다. 우리의 가상 공격목표는 정읍군 칠보면에 있는 수력발전소였다. 우리 팀(장교 2명, 부사관 10명)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기 하기 위해 인천에서 군함을 타고 변산반도 앞바다까지 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에서 고무보트로 갈아타고 노를 저어 해변가로 침투하고 있을 때였다. 노를 저을 때마다 바닷물에서는 도깨비불 같은 파란 인광이 반짝거렸다. 그 인광은 반딧불이나 별똥별보다도 더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감상에 빠질 겨를도 없이 육지로 침투하는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다.
모의 무장공비인 우리 팀은 낮에는 진달래꽃이 피어 있는 산속에서 은거하고, 밤이 되면 도깨비처럼 활동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밤에만 산길을 걸어 공격목표 지점에 가까운 산속에 비트를 치고 공격 준비를 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선임하사와 부중대장인 나는 저녁 어스름녘에 정찰을 하러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산 중턱 진지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예비군 몇 명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몰래 진지를 돌아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소나무 뒤에서 용변을 보던 예비군이 놀라 소리쳤다.
“누구야! 손들어!”
깜짝 놀라 도피하고 있는데, 수력발전소에서 벌써 연락을 받았는지 사이렌 소리가 울리더니 산이 쩌렁쩌렁하게 방송이 울려퍼졌다.
“지금, 모의 무장공비가 발전소 뒷산에 침투하였으니, 예비군은 즉시 출동하기 바랍니다.”
예비군들은 산 아래에서 포위해오고, 산 위에는 헬리콥터가 우리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선임하사와 나는 양 갈래로 나뉘어 도망갔다. 산 아래에서는 개미떼처럼 예비군과 방위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전투가 아니라 마치 토기몰이 같았다. 나는 도망가다 어쩔 수 없이 포로로 붙잡혔다. 그렇지만 한밤중에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깨비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어리바리한 쌕끼들, 다 잡아놓은 포로를 놓쳐”
수력발전소 지휘본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나는 포로로 잡혔지만 우리 팀은 발전소 수차를 (가상으로) 폭파하는데 성공했다.
다음 날 작전을 종결하고, 우리 지역대는 시내를 통과하는 시가행진을 했다. 쌍권총을 가슴에 차고, 검은 썬그라스를 낀 나는 검은 베레모 위에 낙하산 마크와 중위 계급장이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유별스럽게 내 뒤에는 꼬맹이들이 줄줄 따라다녔다. 한 녀석이,
“저 중위 아저씨는 어제 포로로 잽혔대.”
『전우신문』에 그녀의 「초록빛 사랑」이라는 글이 실렸다.
“어느 이른 봄엔 정읍에서 작전을 마치고 상경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에서 달려가 상봉한 시간은 겨우 14분뿐이었을 때, 우린 할 말을 모두 잊어버렸다.
열차가 떠나는 플래트폼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은 오직 혼자뿐이었고, 나의 환송을 받는 이들은 시냇가 조약돌처럼 빛나는 군인 모두의 눈동자였을 때,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으랴!”
공수특전사에서 2년여 근무를 하고, 병과를 바꿔 전방에서 정훈장교를 했다. 별을 달기 위해 장기 복무를 자원했다가 제대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데 10ㆍ26사태 이후 정세가 급변했다. 전두환 소장은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1979년 12ㆍ12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군인들의 정권 장악에 반대한 국민들은 자유 민주주의 헌정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광주에서 절정을 이루어 마침내 5ㆍ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1980년 5월, 나는 휴가를 받아 광주에 있으면서 광주, 목포, 순천 등지에서 일어나는 시위 현장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다. 그 때의 일들을 「꽃넋」이라는 수필로 발표했다.
“전방부대에 근무하기 이년 전에는 계엄군으로 파견된 공수특전사 장교로 근무했었다.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들이 군사 쿠데타에 휘말리어 무고한 광주시민들과 피를 흘리는 전투를 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시민들과 군인들이 희생당했다. 만약 내가 아직도 그 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더라면 고향사람들과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을 것이 아닌가?
그 무렵 전방부대에서 정훈장교로 근무하던 나는, 군사정권의 지시에 따라 5ㆍ18을 불순분자들의 폭동이라고 병사들에게 교육시켰다. 그 이듬해 제대를 하여 교직에 근무하면서도 5ㆍ18에 대해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그 뿐만 아니라, 화염병이 난무하는 대학생들의 시위 현장을 보면서도 방관자로서 구경만 했다.
군사정권이 바뀌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나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깨닫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그 해 처음으로 망월동 묘지를 찾아가 오월 영령들에게 역사의 죄인으로서 참회했다.”
1980년대는 경제 성장과 더불어 우리 국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아가던 때였다. 그런데 전두환 소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도깨비처럼 “별 네 개 달아라, 뚝딱!”, “대통령 해보자, 뚝딱!” 자기 마음대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민주화를 열망하는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화염병을 던졌다. 계속되는 시위에 시내는 화염병과 최루탄의 매캐한 연기가 뒤범벅이 되어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대학생들이 도깨비처럼 나타나 던지는 화염병은 도깨비불보다 더 무서운 불이 되어 민주화를 염원하는 더 큰 불바다가 되었다. 그리하여 전두환 정권의 군부 독재와 비리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6월 민주항쟁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6ㆍ29민주화선언이 이루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사분규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더욱이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우리 국민들은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어 인권침해, 여성권익, 환경문제 등에 대한 시민단체의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한국 사회는 구조적인 모순으로 빚어진 소득 분배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극심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시위는 끊이질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도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가 서울에서 열려 준우승을 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세계 4강의 대열에 올랐다. 이 무렵 나는 섬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었다. 완도에서 서울까지 아시아경기대회와 서울올림픽을 관람하러 갔다. 호돌이 마스코트 선정에 당첨되고, 친구의 도움으로 VIP 명찰을 달고 경기장을 관람했다.
군사 독재하에서 정치는 엉망이었지만 경제는 그런 대로 돌아갔다. 특히 스포츠는 세계적인 강국으로 떠올랐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축구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4강에 올랐다. 그 때 붉은 경기복을 입고 뛴 한국 선수들을 외국 기자들이 붉은 원령(red devils)이라고 한데서 ‘붉은 악마’가 등장하게 되었다. 붉은 악마는 1997년에 비로소 정식 명칭으로 정해졌다. 그 후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대~한민국’이 4강에 오르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처음으로 창설된 WBC 야구 월드컵에서 ‘푸른 도깨비’가 등장했다. 푸른 도깨비는 도깨비가 방망이를 든 모습으로 야구 응원단으로는 딱 맞는 명칭이었다. 푸른 도깨비 응원단 덕분에 그동안 변방 야구로 인식돼왔던 한국 야구가 자랑스럽게 세계 4강에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대회인 올해에는 준우승을 했다. 푸른 도깨비 야구 응원단은 붉은 악마 축구 응원단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0년대 들어와서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와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활력 있는 경제로 전환하려다가 경제 여건의 악화와 외환 부족으로 1997년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더욱이 사회 지도층의 부도덕한 비리와 부유층의 과소비 풍조는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여기에다 도덕적으로 해이된 경제 질서는 많은 사회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마침내 한국 경제는 1997년 IMF(국제통화금융) 구제금융이라는 경제환란을 맞아 기업과 은행이 부도가 나고, 실직자가 늘어나 우리 국민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향 마을에서는 수백 년 된 당산나무가 벼락을 맞아 쓰러지자 동네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라고 수군댔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식으로 하필 그 무렵에 IMF 경제환란이 닥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시대에 불가사의한 일들이 벌어졌다. 어느 절에서는 불상이 3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하고, 어느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상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진위 여부에 의견이 분분했다. 하긴 옛날에는 마을 뒷산 큰 바위나 서낭당의 노거수가 울면 변란이 생긴다고 했다. 도깨비가 나타나던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일들이 과학 문명이 발달한 이 시대에까지 그러한 이야기가 회자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도깨비에 홀린 듯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한강의 기적이라 할 만큼 그렇게도 잘 나가던 한국 경제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깡통을 차고 말았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IMF 경제환란으로 친구인 최부장이 사표를 썼다. 속상한 기분에 과음을 하여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에서 밤늦게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한 이유는 집에 오던 길에 어떤 놈한테 얻어맞았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분명히 여기서 맞았다구. 그 녀석이 내 마빡(이마)을 후려갈기고 사라져버린 거야.”
최부장의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를 때렸는지 알 수 없었다. 혼자 중얼거리던 그가 느닷없이 마네킹을 붙들고 시비를 하고 있었다. 만취한 최부장은 길옆 공사장에 주의하라고 세워둔 마네킹에 부딪치고는 누군가에게 맞았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마네킹에 피가 묻어 있었다.
최부장처럼 IMF 경제환란으로 술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특히 시대가 급변하고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폭탄주가 유행했다. 우스갯소리로 북쪽의 김정일이 남쪽의 핵폭탄주를 제일 무서워한다고 한다. 남쪽에는 거리마다 총알택시에 대포차요, 집집마다 핵가족인데다 심지어 왕대폿집에서 핵폭탄주까지 마시고 있으니 무서워하지 않겠는가?
그 당시에는 많은 기업이 부도가 나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의 보증을 서주다 함께 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최부장 역시 IMF 경제환란으로 실직자가 된 이 시대의 희생양으로 아닌 밤중에 도깨비를 만난 셈이다.
1997년말에는 제 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호남사람들은 이 지역 출신인 김대중 후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하여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그동안 정치적으로 응어리졌던 호남의 한을 풀게 되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자 IMF 경제환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시장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2000년 6월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6ㆍ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같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남북간의 화해정책으로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같이 평화로운 시대에 ‘문학의 해’를 비롯하여 한창 문학이 꽃피던 1990년 초에 비로소 나는 문단에 들어섰다. 평소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대학교 때는 문학회 활동도 하고 문학상도 받았지만 등단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광주수필문학회에 가입하게 된 것을 계기로 ‘수필’과 ‘문학평론’으로 등단하여 문단 활동을 함으로써 문인협회 임원과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제 작가로서 나의 작은 소망은, 독자들이 나를 기억해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쓰는 일이다. 나의 수필집 『춤추는 꽃』서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현실에 대해 고뇌하고 성찰하는 마음으로, 내 영혼이 깃든 향기로운 수필을 쓰고 싶었다. 풀꽃같이 소박하고 진솔한 삶을 노래하고, 빛바래지 않은 순수한 빛깔의 감정을 구김살 없이 쓰고 싶었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사랑과 지혜가 넘치는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은하수 흐르는 밤하늘을 바라볼 때면 ‘은하수’라는 뜻을 지닌 내 이름처럼(은하수 漢, 은하수 鎬) 아름다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밤하늘에 은은한 별빛이 쏟아지는 은하수! 얼마나 서정적이며 아름다운가. 나는 그 행복한 꿈이 이루어지기를 염원하면서 오늘도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고 있다.
또한 나는 「김소월 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김소월 시를 집대성한『슬픈 시인의 노래』를 발간했다. 그동안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의 일들을 「홍시」라는 수필로 발표했다.
“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는 형편임을 알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새벽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로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캠퍼스에는 부모형제들이 서성이고 있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낯선 곳에서 홀로 시험을 보는 그 순간에 불현듯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장학금을 받고 가정교사를 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군장교로 군복무를 하였다. 공수부대에서 낙하산 훈련을 받던 극한상황에서도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휴전선 백마고지에서 남녘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교사가 되었다. 섬마을 선생님이 되어 섬아이들과 더불어 살 때는 마냥 즐거웠다. 어릴 때의 소망인 선생님이 된 것도 어머니의 정성이었다고 생각하니 어머니가 고마웠다.
시골 학교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불철주야 공부를 하였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낮에도, 찬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는 겨울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공부하였다. 매주 몇백 리가 넘는 먼 길을 다니면서도 남들이 하기 어려운 공부를 한다는 보람에 힘든 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한 지 이십 년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나는 먼저 부모님 산소에 찾아가 절을 올렸다.”
한 세기가 바뀌는 밀레니엄 축제로부터 21세기가 시작되었다. 더구나 2002년에는 대한민국이 한ㆍ일 월드컵 4강에 올라 6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붉은 물결의 축구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더욱이 붉은 악마의 유니폼을 입은 도깨비 같은 수십 만의 인파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민국’을 외칠 때는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인권과 권익이 향상되고 사회 참여 등 민주 역량이 한층 성숙해졌다.
또한 2007년말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이명박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전국적인 촛불시위가 번졌으며, 곧이어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은 IMF환란 이후 또 한번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5월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해 봉하마을에서 자살을 했다. 도깨비가 놀랄 일이었다.
그 날 뉴스를 듣고 심란하여 술이나 한 잔 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식당엘 갔다. 유난히 식당이 널널(널찍)했다. 손님이 없다보니 음식에 정성이 없어 음식맛이 개미(감칠 맛)가 없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기인(귀여움)도 없는 어린애가 제멋대로 뛰놀고 있더니, 느닷없이 도깨비 방망이로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솔찬히(대단히) 아팠다. 하마터면 영금을 당할 뻔했다.
“이 놈의 짜식이! 버르장머리 없이….”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가 오더니, 대뜸
“애가 장난한 것 가지고, 왜 우리 애기를 울려요!”
“애기를 그리 나무라면, 기죽지 않아요!”
적반하장, 도리어 큰 소리를 친다.
“애들 교육 잘 시켜요. 이런 곳에서 함부로 장난치지 않도록 말이욧.”
언제, 우리나라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지.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제 자식밖에 모르니, 원 참! 벌건 대낮에 개망나니 같은 낮도깨비를 만난 것처럼 기분이 언짢았다. 더구나 젊은 여자가 교양 없이 대들어 몹시 기분이 나빴다.
요즘엔 왕자병, 공주병 든 애들이 많아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이 많다. 그것은 자기 자식밖에 모르는 부모들의 과잉보호가 빚어낸 결과이다. 한국은 ‘누가 누가 잘하나’, ‘배워서 남 주나’라는 출세 지향의 교육으로 ‘자기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교육으로 변질되어 ‘꿈 너머 꿈’이 없다.
일본사람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미국사람들은 ‘남에게 봉사하고 사회를 위해 기부’하는 교육을 시킨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기죽지 마라’라고 가르친다고 하니,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육은 미래세계를 살아갈 새로운 세대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그러나 남에게서 배운 지식은 흐르는 냇물 같고, 자신이 터득한 지혜는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논어에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知知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라고 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고 실천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다는 온갖 더러운 물을 받아들여 하루에 70만 번의 파도를 쳐서 맑은 물로 정화작용을 하는 것처럼 자기 성찰을 통해 내면의식을 강화하지 않으면 훌륭한 인격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한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나는 2세 교육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교육에 대한 열정이 많다. 그래서 앞으로 학생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온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고 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라는 칼럼집에서 행복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행복의 파랑새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찾기 어려운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지만 쉽게 찾을 수 있는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평범한 삶 속에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기쁨과 만족을 느낄 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으로 행복을 느끼고 사는 방법은 많이 웃어야 한다. 얼마나 잘 웃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뀌고 사회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웃을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긴다. 이는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행복은 욕심부리지 않고 안분지족하는 삶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삶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고 베푸는 미덕 속에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즐거움과 만족에서 오는 삶의 기쁨이며,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만족인 것이다.
따라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기를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원만한 인간관계로 남을 돕거나 베풀면서, 매사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나는 살아 있는 것들, 다시 말하면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지구는 생태계의 파괴로 여섯 번째 멸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과거와 달리 소행성 충돌이나 지각 변동 등 자연적 원인이 아닌 인류 문명이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기후 변화, 산림 파괴 등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에 의한 재앙으로 많은 동식물이 사라지고 인간만 살아남는 ‘고립기’가 올지도 모른다.
더욱이 최근에는 자연 재해나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있다. 2004년에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서 쓰나미가 일어나 23만 명이 사망하고 5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2008년에는 미얀마에서 허리케인으로 수만 명의 사망자와 수천만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그리고 중국 쓰촨성에서 지진으로 7만 명이 사망하고 1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올해는 미국과 호주 등지에서 산불이 발생하여 큰 피해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에이즈를 비롯하여 인간 광우병, 사스, 조류 인플루엔자, 신종 플루 등 많은 전염병들과 질병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지금까지 천연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 등의 유행병은 인류 역사를 바꾸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생태계의 보존과 더불어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이란 수필을 발표하여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아름다운 삶이란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들에 핀 풀꽃처럼,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연스럽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록빛 들녘의 아름다운 풍경을 좋아하고,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그리워한다. 또한 자연에서 들리는 새소리, 풀벌레소리, 시냇물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는 아름다운 소리들이다.
어릴 때 나는 포플러 잎새들이 시냇물소리에 따라 춤을 춘다고 생각했다. 시냇가 가장자리에 숲을 이룬 포플러나무 이파리가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이, 마치 이파리들이 춤을 추는 듯이 보였다. 그럴 때면, 벌과 나비들도 풀꽃 위로 날아와 춤을 추었다.
- 중략
모든 생명체를 가진 삼라만상은 태어나서 결국 죽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생태계의 파괴로 동식물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소중한 까닭은 생명은 유한하며, 모든 생명체는 그들 나름대로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것들이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 의미를 지닐 때,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속엔 자연을 가꾸고, 남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사람들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우거진 숲과 지저귀는 새, 예쁜 꽃들이 피어 있는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사람들 마음마다 사랑이 깃들어 있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리스어로 그저 흘러간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하고, 의미 있게 보낸 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한다. 우리는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아야 한다. 결국 인생이란 열심히 살다간 흔적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주어진 배역에 따라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연극처럼 살아가야 한다.
오늘은 은하수 흐르는 어두운 밤길을 아내와 함께 걸었다. 마치 멀고 험난한 길을 여행하는 동반자처럼 말이다. 부부의 인연으로 만난지 내년이면 서른 해가 된다. 우리 부부를 보고 서로 닮았다고 한다. 그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살아오면서 같이 웃고, 같이 고뇌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하나처럼 닮아버렸는지 모른다.
얼마 전, 광주지하철문학관에서 시화전이 열렸다. 나는 수필 「난과 더불어」 마지막 부분을 서예가 취정(翠亭) 선생과 동양화가 송산(松山) 선생에게 부탁했다. 서예 글씨도 명필이거니와 동양화는 도깨비 같은 사람들이 신명나게 사물놀이를 하는 모습이었다. 시화전을 감상한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참으로 좋다고 했다. 서로 닮아가는 아내와 함께, 나도 시화에 나오는 그런 글과 그림처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도깨비 같은 사람들이 사는 어수선한 세상이지만 나도 그들과 더불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난처럼,
나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런 모습이면 좋겠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면 참 좋겠다.
나도 난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
김 한 호
약 력
ㆍ전남 광양 출생
ㆍ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수필가
ㆍ광주문인협회 부회장, 전남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회원 등
ㆍ전남문학상, 공무원문학상, 올해의 작품상 수상
ㆍ저서 『슬픈 시인의 노래』,『춤추는 꽃』,『백조 문학의 이해』
『행복한 삶을 위하여』,『살아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ㆍ광양태금중학교장, 전남미래교육연구회장
☎ 019-624-6554
첫댓글 저 역시 유년시절 도깨비 이야기 속에 자랐고, 근대 역사를 공부하듯 선생님의 깊으신 글에 빠져들어 오래오래 머물러졌지만, 아쉬워 다시 한 번 선생님의 글속에 젖어보고 싶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를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