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설명 |
숨어 신앙을 유지한 산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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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7 31′38″ 동경 127 4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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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10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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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343-4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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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343-5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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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ungsuwon.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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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 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같은 양태로 이루어지게 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풍수원 성당이다. 1888년 6월 20일 본당이 설립되어 풍수원에 세워진 현재의 성당은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것이다. 더욱이 지난 1982년에는 강원도에 의해 지방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바 있는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으로 보여진다. 이 때 서울과 경기도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은 박해의 칼날을 피해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게 된다. 식솔을 이끌고 혹은 혈혈 단신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피난처를 찾던 이들 중에서 신태보(베드로)는 40여 명의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으로 들어선다. 이들이 바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인 풍수원을 이룬 당사자들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교우천을 형성하면서 강원도 최초의 본당 설립을 위한 기반을 닦는다. 바람 소리 새 소리가 유난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감히 다가들지 못하는 첩첩산중에서 이들 신앙 공동체는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기도와 생활을 영위한다.
1855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는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이 때 교우들은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피난처를 찾던 신자들을 불러 모아 큰 촌락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끼리 모인 공동체는 한편으로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면서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188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교우들은 처음 풍수원으로 찾아든 이래 무려 80여 년 동안을 목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 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이룬 채 믿음을 지켜 왔던 것이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된 그 이듬해 교우들은 목자가 없는 양 떼들을 위해 신부가 상주해 돌보아 주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1888년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민 대주교는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신부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르 메르(Le Merre) 이(李) 신부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수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아직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간을 성당으로 사용했었다.
풍수원 성당의 교세는 크게 확장됐고 원주, 춘천, 양평, 횡성, 평창, 홍천 등 주위의 본당들은 모두 풍수원으로부터 분당되어 나온 것이다. 이처럼 강원 지역 전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풍수원 성당에는 오랜 세월 성숙된 신앙의 유산을 배우고 묵상하고자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현재 풍수원에는 대강의실, 5개의 온돌방, 유물 전시관 등을 갖춘 피정의 집이 세워져 있어 개인으로나 단체로 피정을 원하는 순례자들을 도와 주고 있기도 하다.
한편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체 현양 대회가 매년 열리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25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오랜 역사만큼 30여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풍수원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옥중수기를 남긴 순교자 신태보(申太甫) 베드로(1768-1839년)
"네가 3도를 돌아다니며 사교(邪敎)를 전파하여 백성을 현혹한다니 그것이 참말이냐?"
"저는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천주의 교리를 따를 뿐입니다."
"그래 천주교를 믿으면서 그 교를 국법으로 엄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어떻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잘 알고 한 것입니다."
"알고서 왕명을 어겼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지 않겠느냐?"
"제가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상감께서 너희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하시니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
"순경(順境)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섬기다가 역경(逆境)에 처해서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만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만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입니다. 관장님은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저는 제 신념을 따라 행동하겠습니다."
순교자 신태보(1768-1839년)의 "옥중수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의 활동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에 미쳤다. 특히 1801년 전국적인 박해로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려고 사제 영입운동에 참여하여, 친척이자 주동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이여진에게 북경에 다녀올 여비를 마련해 주는 등 온갖 노력과 활동으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가운데 더욱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신태보가 남긴 두 개의 소중한 기록 때문이다. 첫째가 자신의 옥중 심문과 생활을 적은 "옥중수기"이다. 이는 당시 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프랑스 신부인 샤스탕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둘째는 1801년 최초의 전국적 박해가 있은 뒤 살아 남은 여교우와 어린이들을 이끌고 눈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간벽지로 이동하는 여정을 적은 기록이다. 교우들은 밀고를 피하고 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고향을 떠나 심산유곡에 숨어 은밀히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포졸의 감시 속에 여비도 장만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교우들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며 또 먼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짧지만 그가 남긴 기록으로 그때의 참상과 고난을 극복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해 가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신채보는 사제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복할 여비를 마련하느라 많은 고생을 한 뒤에 이제는 오직 자신의 구령을 위한 기도 생활에 전념하려고 긴 유랑 끝에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서 홀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그가 수많은 교회 서적을 필사하였기에 그가 베낀 교회 서적들이 증거물로 관헌의 손에 들어가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1827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밀고 당하리라고 짐작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 있으나 그해 4월 22일 새벽닭이 울 무렵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상주에서 전주로 압송되면서, 전주 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걷지도 못해 소와 말에 채워져 호송되고 있는 교우들을 만났다. 신태보는 그들과 밤을 세워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서 관가에 압류된 책들 가운데 자신이 필사했던 책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행적을 숨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한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이 쓴 "옥중일기"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첫날 심문에서 앞의 문답이 있은 뒤 관장은 가장 가혹한 고문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내 팔을 뒤로 결박하고 팔과 등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넣고 나졸 하나가 그것을 다룰 참이었다. 그뿐 아니라 말총으로 꼰 밧줄을 가지고 양 무릎과 복숭아 뼈 있는 데를 묶어놓고는 양쪽 정강이 사이에 굵다란 몽둥이를 열 십자로 끼워 두 사람이 각각 한쪽 몽둥이 끝을 타고 앉아 누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등 뒤에서 끼운 몽둥이를 잡아당기고 또 한편으로는 다리 사이에 끼운 몽둥이를 힘껏 누를 적에 내 몸은 공중에 떠오르는 것 같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온몸의 뼈가 다 바수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까무러쳤다. 관장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결박을 좀 늦추어주라고 하였다.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 햇빛이 활활 타는 관솥불같이 보였고,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간 것 같았고, 온몸이 불덩어리 같았다."
이러한 심문과 문초는 하루종일 이어졌고 포졸이 뾰족한 작대기로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 말에 답하기를 재촉하였다. 신태보가 다른 동료들에게 해가 미치지 않도록 간단히 답하고 침묵하자 관장은 호통을 치며 다시 고문을 명했다. "내 다리를 번쩍 쳐들고 양쪽 몽둥이를 힘껏 내리 눌렀다. 내 몸에는 이미 목숨이 붙어 있지 않고, 입에는 침이 바싹 마르고, 혀가 입 밖으로 힘없이 나오고, 눈이 툭 불거져 나오고,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바른 대로 모두 불어.'하고 포졸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빨리 죽음을 내려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그날은 4월 그믐이었다. 밤이 되니 관장이 이렇게 말하였다. "날이 저물었군. 오늘은 첫날이기에 겨우 본보기만 보여주었을 뿐이지만 내일부터는 정말 호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오늘 밤 잘 생각해서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라." 그런 다음 내 결박을 풀고 나졸 두 명이 다리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옥으로 데리고 갔고 이내 저녁을 갖다주었다. 그러나 나는 앉을 수도 없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밥 냄새를 맡으니 구역질이 나서 조금도 먹지 못하니 막걸리 한 사발을 입에 갖다대어 주기에 조금씩 몇 모금 마셨다."
신태보는 첫날 고문에 이미 앉지도 먹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큰 칼을 씌워 밤을 세우게 했다. 다음날 이여진이 숨은 곳을 말하라고 윽박질렀고, 그가 이를 거절하자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나는 다시 주뢰의 형벌을 당하게 되었다. 바로 얽은 것을 조이는 바람에 나는 벌써 의식이 거의 없어졌는데 너무 세게 눌렀기 때문에 몽둥이가 부러졌다. 이 소리를 듣고 나는 다리가 부러진 줄 알고 질겁을 하여 내려다보았다. 나는 말이 들리기는 하여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술을 갖다주었으나 받아 삼키지 못하였다."
신태보에 대한 심문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아침마다 문을 여는 소리가 음산하고 불쾌하게 들렸다. 그는 고문 중에 까무러치고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면서도 "칠극"을 해설하고 교리를 설명하며 꿋꿋이 신앙을 고백했다. 마침내 사형이 내려졌으나 집행이 연기되었다. 옥에서 생긴 상처가 곪아 악취를 풍기는 가운데 시중드는 젊은 교우들의 애덕을 감사하는 말로 그의 수기를 끝내고 있다.
그는 13년의 옥고를 끝에 1839년 5월 29일 70세의 고령으로 전주 감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가 남긴 수기는 야만적인 고문을 신앙으로 이겨낸 영웅들의 모습을 후세들에게 증언하고 있다. [출처 : 김길수,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8년 10월호]
제2대 주임신부 정규하(鄭圭夏) 바오로(1863-1943년)
충남 아산군 신창면 남방리(忠南 牙山郡 新昌面 南方里)에서 부(父) 정기화(鄭基化, 마태오)와 모(母) 한 마르타의 3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병인(丙寅) 박해로 가족과 함께 충청도 일대를 유랑, 음성(陰城) 장호원을 거쳐 15세 경 충주(忠州) 근방 소탱이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재산을 전부 잃고는 다시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주, 그 뒤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상경, 명동 주교관 내 글방[韓漢學校]에서 공부하다가 1884년 3명의 동료와 함께 말레이반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1891년 신학생들과 함께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과 함께 종현 성당(鍾峴聖堂)[지금의 명동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서품 후 강원도 횡성(橫城) 풍수원(豊水院) 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47년간을 그 곳에서 사목(司牧)하였다.
부임 초, 동학혁명의 실패와 1896년의 민비시해사건, 아관파천(俄館播遷)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산골인 풍수원에도 나타나곤 했는데 그들을 맞아 격려하고 침식을 제공하였고 풍수원 본당 교우들 중에도 상당수가 의병에 가입하였다. 1907년에는 건평 120평의 연와조 성당을 건축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성당 사랑방에 삼위학교(三爲學校)을 개설하고 논산에서 박 토마스를 선생으로 초빙,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 삼위학교는 후일 광동국민학교로 발전하였다. 1942년 노환으로 보좌 김학용(金學用) 신부에게 풍수원 본당의 운영을 맡기고 휴양하다가 이듬해인 1943년 10월 23일 81세로 선종, 풍수원 성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풍수원본당 '바이블 파크' 조성사업 본격화
한국의 대표적 성지 순례지 가운데 하나인 원주교구 풍수원본당(주임 김승오 신부) 일대의 '바이블 파크' 조성사업이 오는 4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강원도와 횡성군은 지난 2일 풍수원성당에서 주민 설명회를 갖고 오는 2004년까지 국비와 지방비 등 모두 110억원을 투자해 성서와 휴양마을, 천주교 박물관(역사마을), 수련 편의시설, 천국동산 등을 갖춘 바이블 파크를 연차적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사업 첫해인 올해는 오는 6월말까지 실시설계가 완료되면 이미 확보된 13억2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진입로와 십자가의 길 정비 등 기반공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성서마을에는 초가 성당을 비롯해 산상 강론광장, 십자가의 길, 수목원 등이 들어서며, 휴양마을에는 순례객을 위한 통나무 휴양촌 등이 건립될 예정이다. 역사마을에는 지하성전과 성심학당 등을 복원해 옛 교우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게 된다.
횡성군은 "풍수원본당 일대를 정신문화의 중심지와 새로운 관광 휴식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며 "기반공사는 올해부터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시설공사는 내년부터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풍수원본당 김승오 신부는 "국내 최대의 성지 순례지에 걸맞는 바이블 파크가 조성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겠다"면서 "그 동안 주요 관심 사항이었던 향후 바이블 파크 관리 및 운영권도 천주교에서 맡기로 관계 당국과 합의를 보았다"고 말했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에 위치한 풍수원성당 일대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형성한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1907년 정규하 신부가 지금의 성당(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을 건립했다.
<평화신문, 2001년 2월 18일 제 614호, 김정호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원주교구 풍수원 성당 (상)
첩첩산중에 자리잡은 '그림같은 성당'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성당은 어떤 모습일까.
먼저 입구에 하늘 높이 솟은 뾰족탑을 가진 고색창연한 고딕식 건물이어야겠다. 그리고 구석구석엔 오랜 역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이 배어 있어야 하겠고, 아늑함을 맛보기 위해선 크기는 적당히 작은 것이 좋겠다. 게다가 시끄러운 시내 한복판이 아니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시골 언덕에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함께 서 있다면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같은 성당이 아닐까.
그림같이 아름다워 영화 촬영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당, 최근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러브레터'의 배경으로 나와 시청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그 성당이 바로 강원도 횡성 첩첩산중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풍수원 성당(주임 김승오 신부)이다.
6일 풍수원성당 앞마당에서 만난 백여남(가타리나, 39, 수원교구 수지본당)씨는 이 성당을 처음 찾은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참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성당으로 들어오는 길은 또 얼마나 운치 있는지요. 의자 없는 성전 바닥도 시멘트가 아니고 나무라서 그런지, 차가워도 느낌은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합니다. 나중에 꼭 다시 오고 싶어요."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이자 국내 일곱번째 고딕·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인 풍수원 성당이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 전인 1907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도시가 아닌 강원도 두메 산골에 세워지게 된 데에는 박해와 얽힌 간단치 않은 배경이 숨어 있다. 풍수원 성당 역사를 알아보기에 앞서 풍수원 성당의 아름다운 풍경부터 감상해보자.
서울에서 성당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고개를 넘으면 왼쪽 저 멀리에 족히 수백년은 돼 보이는 커다란 나무에 살짝 가려진 성당이 수수한 자태로 다가온다. 왼편으로 뚫린 길을 따라 '유적지 풍수원성당'이라고 새겨놓은 표지석을 지나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하늘을 가릴듯한 커다란 느티나무와 사이좋게 마주한 고풍스런 성당이 말없이 객을 맞는다.
크고 으리으리하게 잘 지은 대도시 성당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참으로 아담하고 소박한 성당이 아닐 수 없다. 건물 전체 면적은 120평. '어떻게 생긴 성당일까' 궁금한 사람은 명동 성당을 떠올리면 된다. 물론 명동성당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지만, 겉모습은 19세기말 가장 일반적 성당 건축형태였던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은 명동 성당을 빼다박은 꼴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6개씩 좌우로 늘어선 기둥과 둥근 아치형의 천장이 조화를 이루고, 반원형의 제대 뒷부분에는 3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은은한 빛을 발한다. 성당은 아직 의자 없이 그냥 마루바닥이다. 그래서 더 정감있다.
성당 왼쪽으로는 성당만큼이나 고풍스런 2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유물전시관이다. 1912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원래 사제관이었으나 지난 97년에 대대적으로 수리한 다음 유물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본당 차원에서 전시관을 운영하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곳에 전시된 320여점의 유물들 또한 흘깃 보고 지나칠 것들이 아니다.
100여년 전 이 성당을 지은 정규하 신부가 쓰던 책상을 비롯해 19세기말 당시 사용하던 촛대, 십자가, 성합, 기도서, 사진 등 유물 하나하나는 앞서간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톨릭 교회사에 관심있는 이라면, 유리 전시관에 진열된 성물 하나하나에서 신앙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이라면 둘러보는 데 최소한 한나절 시간은 배정해야 할 것이다.
풍수원 성당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주변 자연 풍광을 빼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사색하고 싶은 사람은 성당 왼편 언덕으로 나 있는 십자가의 길을 올라가 보자. 푸른 숲을 지나 더없이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며 걷는 그 길은 일상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주고도 남음이 있다.
십자가의 길 끝에 펼쳐지는 묵주동산. 대형 십자고상과 마리아상을 빙 둘러 축구공 크기만한 묵주알을 땅에 박아 만든 동산은 단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너른 공간이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선조들을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쳐도 좋고, 같이 간 길동무랑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면 아마 세상을 잊을 것이다.
풍수원 성당 가는 길
서울에서 팔당, 양수리를 지나 양평에서 홍천 방면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용두 삼거리에서 오른쪽 횡성 방향으로 나가 6번 국도를 탄다. 10㎞쯤 가면 고개가 나오고 고개를 내려서면 왼쪽으로 성당이 보인다. 한강을 끼고 팔당과 양수리를 지나는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적격이다.
문의 : 033-342-0035
<평화신문, 제724호(2003년 5월 18일), 남정률 기자>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 원주교구 풍수원 성당 (하)
200년 전 세워진 한국교회 첫 교우촌
90년대 베스트 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화두로 던졌다. 그냥 봐서는 그저그런 유물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깃든 역사적 의미를 깨달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볼 수 있다는 뜻인데, 풍수원성당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자그만하고 예쁜 성당에 불과한 풍수원성당이 이 땅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1887년 이듬해에 대도시가 아닌 강원도 산골짜기에 설립된 데는 이 지역이 모진 박해를 견디고 신앙을 지켜낸 교우촌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다.
이곳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0년대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무렵이다. 박해가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 지역에 살던 40여명의 신자들이 8일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메다 깊은 산골 풍수원에 정착한 것. 화전과 옹기구이로 생계를 유지하며 80여년간 성직자 없이 신앙을 간직해오던 신자들은 1888년 당시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가 이곳에 강원도 최초의 본당을 설정하고 르메르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파견함에 따라 신앙의 꽃을 피우게 된다.
1907년 지금의 성당을 완공한 2대 주임 정규하(1863-1943년) 신부는 초기 풍수원성당 역사와 동일시되는 인물이다. 정 신부는 김대건,최양업 신부에 이어 1896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우리나라 세 번째 신부. 사제품을 받은 그 해 풍수원 본당에 부임해서 선종할 때까지 무려 47년을 오로지 이곳에서만 사목했던 그는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성당을 지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 본당에서만 무려 50년 가까이 사목한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본당이나 사제 수 모두 얼마 안되던 교회 초창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풍수원 성당 공사는 전적으로 교우들의 땀과 정성으로 이뤄졌다. 벽돌 쌓는 방법을 몰랐던 탓에 서울 명동 성당 건립에 참여했던 중국인 벽돌공을 불러온 것을 제외하고는 남자 신자들이 산에 올라 아름드리 나무를 베고, 성당 아래 200m 떨어진 가마에서 벽돌을 굽는 등 대부분의 일이 신자들 몫이었다. 여자 신자들도 줄줄이 서서 벽돌을 날랐다.
성당 건립 기금은 당시 돈으로 6천원. 강원도 일대 지주와 가난한 신자들이 크고 작은 돈을 내놓았는데, 거금 1500원을 희사한 김말구 할아버지에 얽힌 일화가 재미있다.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공사장으로 올라와 "내 돈 내놓으라"고 주정을 했다. 그러면 정 신부는 "말구, 너 이리와! 네 돈 다 가져가라"고 꾸짖었고, 할아버지는 그 때마다 "신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빌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술만 취하면 또 돈타령을 했고, 다음날 어김없이 정 신부에게 꾸중을 들었다. 땀흘려 일하던 신자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성당을 찾게 되면 한적하기만 한 앞마당에서 100여년 전 그런 일이 벌어졌었다는 사실을 한번쯤 떠올려보는 것도 색다른 맛일 게다.
정 신부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을 뿐 아니라 강원도 전교사를 황금기로 이끌었다. 정 신부 사목 당시 주변 12개 군을 관할하며, 신자 수 2000여명에 달하는 전교의 중심으로 성장한 풍수원 성당은 이후 춘천, 원주교구의 모태가 된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풍수원성당은 요즘 대대적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성당 일대를 세계적 성지순례 코스로 조성하는 바이블 파크(유현문화관광지) 조성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원주교구가 지난해부터 횡성군과 함께 추진 중인 이 사업은 95억여원을 들여 2005년까지 대지 78만평에 6만8천평의 바이블 파크 동산을 조성하는 것으로, 동산에는 수목원과 피정의 집, 미술관, 정규하 신부 동상, 천국동산, 가마터 등이 들어서게 된다.
문제는 원주교구가 분담해야할 비용이 33억원에 이른다는 점. 지난 4월 바이블파크 조성을 위한 '성역화사업 추진 위원회'를 구성한 풍수원 본당은 묵주기도 100만단 바치기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뜻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후원금(1구좌 100만원)를 모금하는 등 기금 마련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33억원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16대 주임 김승오 신부는 "한국교회사에서 풍수원 성당이 차지하는 비중도 비중이지만 이곳처럼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성지도 드물다"면서 바이블 파크 사업에 모든 신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요청했다.
"깊은 산골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유산을 간직한 풍수원 성당입니다. 와서 보면 알겠지만 지친 심신을 추스리고 나태해진 신앙을 반성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순례지가 바로 여깁니다. 한국교회 귀중한 유산인 풍수원 성당이 모든 이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도록 바이블 파크 사업에 관심과 협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문의: 033-342-0035
후원계좌: 농협 305053-51-024738 예금주: 원주교구
<평화신문, 제725호(2003년 5월 25일), 남정률 기자>
출처--가톨릭정보 http://www.catholic.or.kr/
유물전시관 (옛 사제관)
2005년 4월 등록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된 옛 사제관은 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커다란 나무에 가려져 있어 얼핏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연건평 50평 규모의 2층 벽돌 건물이다. '옛'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지금은 사제관이 아닌 유물 전시관이다. 이 건물은 성당보다 6년 늦은 1913년에 완공됐다. 당시 주임 정규하 신부는 1913년 10월 1일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저희 집 사제관은 이제 준공되었습니다. 지금은 새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썩 잘 지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100여 년 전 시골 벽촌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서양식 2층 건물을 지어놓고 왜 잘 지었다고 할 수 없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필시 현재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연을 알아보려고 해도 옛 사제관 건축과 관련된 기록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정 신부가 건축을 진행했고, 건축에 사용된 붉은 벽돌은 인근 피미기 마을에서 구워 나른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문화재청이 이 건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20세기 초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 건축술이 전해지는 과정을 충분히 분석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서양식 생활방식이 반영된 주거공간이라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층과 2층 거실을 중간에 둔 방 배치와 서재를 보면 당시 사제들의 주거생활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건물 외관은 수수하고 소박하다. 눈여겨 본다면 현관과 창호, 처마 주위의 벽돌쌓기 장식이 돋보이는 정도랄까. 부산스러운 허례를 생략한 깔끔한 인상이다. 사제관은 1997년 대대적 내부 수리를 거쳐 유물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지난 4월에는 강원도와 횡성군으로부터 1억여 원을 지원받아 유물을 온전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항온항습 시설을 갖추고 창틀을 원형대로 복원하는 공사를 마쳤다.
유물전시관 1층 정면에 있는 출입구로 들어가면 뒷문으로 연결된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3개의 방이 있다. 1층 방 3개에는 1909년부터 사용한 청동촛대, 성합(1896년), 성유통(1936년), 향그릇, 제병기(1896년), 병자성사 가방 등 앞서간 신앙 선조들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물들이 가득하다.
1층 왼쪽 구석에 나 있는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2층 역시 가운데 서재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방이 각각 1개씩 있다. 서재 포함 1ㆍ2층 6개 방에 전시된 유물은 320여점. 2층에는 1896년부터 1943년까지 모든 전례에서 사용한 제의와 함께 1887년부터 1915년 사이에 간행된 기도서와 박해일기, 묵상서 등을 비롯해 목판본과 활자 인쇄본을 전시하고 있다. 2층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유물들이 전시된 곳은 서재다. 정규하 신부가 47년간 사용한 나무책상과 일제시대 때 구입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야마하 오르간이 서재 양쪽 구석에서 빛바랜 세월의 정취를 머금은 채 순례객을 맞는다.
출처--성화사랑 http://blog.daum.net/sunghwa/11865302
출처--가톨릭정보 http://www.catholic.or.kr/
출처--성화사랑 http://blog.daum.net/sunghwa/11865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