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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범주: 멜로/로맨스/우정/가정] |
벼르고 벼르던 솔희의 이번 콘서트가 끝났다.
S석에 앉아 있던 정균은 솔희의 연주간 몸짓과 동작, 그리고 표정을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일부러 연기해서 만들 수 없는 저 표정과 몸짓, 곡의 선율과 리듬뿐 아니라 곡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나오는 표정과 동작이다.
솔희는 슬리브리스로 젖가슴의 절반 정도가 드러나 있으며 아래에는 발목을 덮는 긴 맥시드레스 연미복 차림이었다.
솔희의 그 모습으로 연주가 끝난뒤 청중들을 향해 인사할 때의 그 아름다운 미소, 특별히 미용과 메이크업을 받은 아름다운 얼굴 그것을 정균은 청중석에 앉아 감상한다.
(저 피아니스트 인물도 정말 미인이네, 결혼했다지 아마?)
정균은 주변에서 이렇게 들리는 수근거림을 즐긴다.
(내가 바로 저 여자의 남편이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팔불출 남편이기도 하다.
연주회가 끝나고 오픈 디너 행사에서 정균은 솔희의 옆을 지켰고, 그런 순간엔 솔희는 정균을 각별히 챙긴다.
정균은 일 시간과 겹치지 않은 한도 내에선 늘 솔희의 연주회에 참가하거나 주말엔 직접 라이드를 책임졌다.
정균이 바라본 솔희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그도 함께 즐기길 원했다.
애프터 행사 이후 정균은 솔희를 위하여 렉서스 GS350 차문을 직접 열어주고 그녀가 조수석에 앉을 때 드레스의 레이스 자락을 잡아 올려주었다.
주변에선 정균은 솔희의 연주활동을 외조하고 솔희는 연주회가 끝난뒤 애프터 행사에서 외조해준 남편을 각별히 챙기면서 애프터 행사에 남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그런 완벽한 능력을 갖춘 음악애호가 남편과 미모의 음악가, 즉 완벽한 부부로 평가하고 있다.
차에 올라 좌석을 살짝 뒤로 재낀 솔희는 긴장이 풀리기도 하고 연주회가 만족스러워 세상 행복한 아름다운 표정을 짓는다.
“여보, 당신 오늘 정말 훌륭했어 최근에 본 가장 높은 성취같아. 그 어려운 리스트곡을 홀로 소화한 것도 그렇고!”
“정말이죠?!”
정균은 화려한 무대 메이크업이 되어 있고 특히 입술의 표면에 번들거리는 글로씨가 탐이 난 나머지 고개를 돌린 솔희에게 얼굴을 가져다 댄다.
“쪼오옥!, 쪽!”
기분이 더 좋아진 솔희는 눈을 지긋이 감고 키스를 받아들이고 입술을 살짝 벌려주었다.
아직도 콘서트홀의 주차장 주변에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지만 솔희는 늘 순간과 감정에 충실한 여자였기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솔희는 성취감과 함께 풀린 긴장감 덕분에 정균의 두텁고 울퉁불퉁한 입술을 즐겼으며, 정균은 솔희의 꿀물같은 타액과 뒤섞여 녹은 립스틱을 빨간 젤리처럼 흡입하고 있다.
차내에서 기나긴 혀키스를 끝내고 서로의 몸이 이격되자 정균은 아쉬운 듯이 시동기 버튼을 누른다.
솔희는 조수석 선바이져를 열었고 자동으로 열린 미러에서 LED불빛이 나오는 것을 이용해 입술을 점검하고 있는 듯 했다.
“어머, 이게 뭐에요........당신 잘 좀하지, 립스틱 다 망가졌네!”
솔희는 거즈를 꺼내 입술 주변을 닦아 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불쾌한 말투는 아니었고 귀여운 투정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날은 정균이 맞는 33회 생일이었다.
하필 연주회가 토요일인 그날 저녁 5시에 있었기에 7시 넘어 오픈 디너를 함께 했으니, 이들 부부가 따로 할수 있는건 없었다.
솔희는 핸드백에서 생일 축하카드와 턱시도용 나비 넥타이가 든 작은 박스를 꺼내어 정균의 턱시도 주머니에 넣어준다.
“지금은 운전 집중하세요, 집에 가서 읽어 보세요”
“그러고 보니깐 오늘이 내 생일이네, 당신 연주회랑 겹친데다가 저녁도 콘서트 홀에서 먹었으니 걍 넘어갈줄 알았는데 당신이 내 생일 챙겨줘서 고마워, 당신도 바빴을텐데 언제 생일카드랑 선물이랑 준비했어?”
“그럼 당신 챙길 사람 아내 밖에 없는거죠”
“말이 나와서 그런데 여보, 당신한테 할 말 있어”
“뭔데요?”
“우리 결혼하고 나서 내 생일날 당신이 나를 위해 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지, 지금 집에 들어가서 작은 소야곡이라도 하나 3분 짜리라도 들려줄래? 이를테면 비제의 사랑의 노래같은 종류...”
“휴우..........여보, 정말 미안해요..........콘서트 방금 끝났는데 며칠 동안 건반이라면 치를 떨가에요, 일이나 콘서트를 연장하는 기분이에요. 그리고 우린 가족이쟎아요? 좀 쑥스럽기도 하고....”
솔희와 결혼하면서 음악 매니아인 정균은 늘 꿈꾸었다.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아내가 그의 생일이나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에 예쁜 피아노곡 하나라도 그만을 위한 특별 연주 하나를 해주길 바랬었다.
신혼초에 정균은 자기의 생일에 다른 선물같은거 필요없으니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쳐달라는 부탁을 한적이 있다.
(네에? 라흐마니노프?! 그거 얼마나 기교가 까다로운 곡인줄 알아요? 업 앤 다운이 너무 심하고 악보대로 치는게 아니라 그 작가가 원하는 분위기에 빠져들기도 힘들어요. 손가락도 제대로 따라주지도 못하고요, 당신 음악 좋아하는거 알아요, 하지만 듣는거랑 연주하는거랑 천지차이에요)
(그럼 작은 소품곡들, 5분 짜리라도 나만을 위한 연주를 해줄수 있는거지?)
(정균씨! 진지하게 말씀드린다면 저는 집안에서까지 연주회를 할 수는 없어요. 아직까지 전 음악을 자유자재로 즐길수 있는 여유가 안되어요. 유치원 동요 하나일지라도 그냥 마구 칠수 없는게 전문가들의 입장인걸요? 당신은 이해해줄거라 믿어요. 하지만 약속할께요, 제가 기반잡고 나서 음악을 내 삶 속에서 조명하며 즐길수 있게 되었을 때 당신을 위한 연주를 헌정할께요.)
3년이 지나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지금도 솔희는 거절의 표시를 하고 있었다.
“제 연주를 보고 싶으면 제 콘서트에 와서 보시면 되요. 가정에서는 가정의 일만 집중하자구요”
솔희가 가정에서 살림을 열심히 한것도 아니고 가정 일에 집중한 적은 별로 없다.
설겆이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의 감각을 둔하게 한다하여 솔희는 어려서부터 집에서 못도 안 박고 설겆이도 안 배웠기에 주로 정균의 몫이었다.
그렇다 해도 정균은 더 이상 연주를 부탁하기가 곤란해졌고 무슨 말을 더 했다간 아내에게 쫌생원으로 몰릴까봐 입을 다문채 운전에 집중한다.
솔희는 정균을 위한 가정음악회를 굳이 열어야 하는가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웬지 남편을 쇼파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상황이 무척이나 쑥스럽다는건 진실이었다.
솔희는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그가 정해준 형식대로 그가 정해준 카테고리로 연주를 하는 것을 싫어했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의 작은 연주 요청을 수락한다면 정균이 이를테면 라흐마니노프나 현대음악같은 더 큰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기에 시초부터 작은 부탁을 원천봉쇄할 생각을 한 것이다.
토랜스의 어느 창고 건물을 개조한 앙상블 연습실에서 5명의 멤버는 서로 악보를 놓고 분석해 가고 마크해 가며 프로젝트를 짜고 있었다.
“솔희 언니, 왜 이리 오늘 따라 피곤해 보일까? 어제 잠 못잤나봐?”
“아니, 너무 잘 잤는데 춘곤기인가?”
솔희는 오늘따라 지나치게 하품을 많이 하고 있었고 기운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피자와 음료수를 가진 히스패닉계 배달원이 음식을 그들에게 전달하고 단말기에 싸인을 받은뒤 사라졌다.
그때 솔희는 양념치킨 냄새에 역한 기운을 느끼며 일어서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게 뭔가 잘못 먹은게 있었으면 토사물이라도 나와야 할텐데 침말고는 나오는게 없다.
“언니, 집에 들어가봐야 하는거 아냐? 연습 되겠어?”
“그러게, 피아노는 우리들끼리 돌아가면서 대충 땜빵할테니깐....”
멤버들이 그녀를 걱정해주자 솔희는 못 이기는척 집에 들어가서 쉬어야겠다고 일어난다.
어차피 그 시간은 오후 6시가 넘은 저녁 시간이었다.
“아아, 어찌 이럴수가!! 그토록 주의했는데, 설마설마 했는데, 이거 현실 맞어!?”
화장실에서 임신테스터를 든 솔희는 경악하고 있었다.
명확하게 붉은 두줄이 그어져 있는 임신테스터는 솔희의 마음을 시소타게 만들고 있다.
솔희는 놀랍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자기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 그리고 신비로움이 가득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하필 그때 정균이 퇴근하여 화장실로 들어오고 있는 것을 솔희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여보! 그게, 그 표시가 양성반응 맞지?”
솔희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떡이자 정균은 솔희를 그대로 품에 안았다.
솔희는 그대로 정균의 넓은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아아, 여보, 드디어 내가 아빠가 된다니....당신은 엄마가 되는거고, 우리도 세상에 태어나서 그런 경험도 해보는구나”
“........몰라요, 솔직히 예상도 안했는데.......”
임신은 솔희의 예상 밖의 일이긴 했다.
솔희는 부부관계 횟수를 신혼때부터 제한을 걸었던데다가 자신의 생리주기와 겹치지 않도록 주의해 왔다.
하지만 결혼한지 4년 가까운 세월 동안 텀이 불규칙한 부부관계는 어찌 보면 임신의 가능성을 더 높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보, 이제 당신 몸을 보중해야 할 때야. 당분간 일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과 아기의 건강보다 중요한건 없다는 사실 명심해.”
정균은 솔희의 손을 잡아 끌고 침대에 앉힌뒤 자신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솔희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고 진심어린 충언을 하고 있었다.
솔희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이 복잡다단한 감정을 그 자리에서 엔조이하기로 했다.
이 둘이 침대에 마주 앉아 기나긴 키스를 나누는 동안 정균은 아무 변화가 없는 솔희의 배꼽에 오른 손을 대고 있었다.
다음날 정균은 직장에서 축하인사를 받기에 바빴고 그는 의기양양했으며 만면에 웃음이 가득찼다.
그는 가슴 속이 뭔가 충만함으로 가득찬 그런 든든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2세, 2세하는구나. 솔희로부터 내조는 받지 못해도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는데 그녀가 내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로부터 든 감정은 예전에 상상도 못하던 그런 행복감이야.....)
정균이 바깥에서 임신축하인사를 받으며 우쭐대는 동산 솔희는 응접실의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번민하기 시작했다.
신비감과 기쁨도 잠시, 정균으로부터 일을 줄이라는 충고를 받은 솔희에겐 여자로서 냉정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솔희는 그녀의 작은 뱃 속에 작은 생명이 피어난 것을 알게 되었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과 두려움이 함께 떠올랐던 것이다.
임신이라는 사실은 솔희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녀 안에 자리한 작은 생명이 그녀의 음악적 목표와 꿈을 방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솔희는 안다.
정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의 배를 빌려 아이를 낳길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솔희는 그녀의 자유로운 삶과 음악적인 열망, 그리고 성공으로 매진하는 길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임신, 출산, 육아가 현실이 되면 그녀는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녀가 해왔거나 목표하고 있는 일들을 대부분 포기해야만 할 것이었다.
솔희는 아이의 존재를 지우고 추가로 난관시술을 받을 것을 결심했다.
바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아이폰을 찾아 그녀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는 산부인과 번호를 검색했다.
“여보, 나 오늘 일찍 들어가는데 당신 오늘 연습 오전만 있다고 했지? 뭐 먹고 싶은거 없어?”
“아뇨, 특별히....”
“딴 여자들은 매일 뭐 먹고 싶다느니 하면서 남편을 잡는다던데 당신도 좀 그래봐라. 딱 이때 아니면 언제 그래 보겠어?”
“본죽에서 참치야채죽이나 픽업해 주세요”
“오잉? 그거 산후조리때나 먹는거 아닌가? 알았어”
방금전에 픽업한 참치야채죽을 신주단지처럼 자동차 뒷 좌석에 고정시킨 정균은 휘파람까지 불며 게이트를 통과해서 창문을 열고 서행을 한다.
야자수 나무와 종류를 알수 없는 침엽수들이 모두 정균을 반겨주고 있는 것 같다.
농구공 같이 부풀어 오를 솔희의 배, 찬란한 봄날 팔로스 버디스의 해변가 정균은 썬글래스와 야구모자를 쓴채 반바지를 입고 유모차를 끌고, 시원한 단색 원피스를 입은 솔희는 그의 팔짱을 끼고 샌들을 신고 산책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집안으로 들어서는 정균은 아내가 이렇게 초저녁도 안된 시간에 집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믿을수 없는 현실이다.
이래서 자고로 가정에는 아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맞는듯하다.
(고롬, 고롬, 옛 으르신들 말씀이 하나도 그른게 읎지. 나도 나이가 요즘 장난아니다 보니깐 옛 사람들 말이 정말 현실적이고 이로운 말들이라는걸 깨닫게 되지)
“여보!!”
정균은 계단 위를 총총걸음으로 뛰어 올라갔다.
솔희는 부부침실에 누워 있었고 머리카락은 산발되어 있었다.
“아니, 여보, 증세가 심해졌나? 기운이 없으면 없다고 말을 하지, 그럼 내가 다른 조치를.....”
침대 옆 테이블에는 “OO산부인과”라고 적혀진 약봉지가 놓여 있었다.
설마 감기몸살약을 산부인과에서 처방받아온건가? 아니면 혹시 유산?
정균의 뇌리 속에는 온갖 불길한 상상이 스친다.
결국 불길한 예감은 반드시 맞는다는 말을 어떤 못된 놈이 했던가?!
정균의 어조는 결혼 이후 최고조에 달했다.
딱딱하고 차갑고 매섭게 솔희를 몰아세우기 시작했고 그것은 결혼후 정균이 처음으로 솔희에게 대하는 무섭고 단호한 모습이었다.
“허락없이 아이를 지워?! 당신 제 정신이야? 낙태는 살인이야! 당신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야? 게다가, 게다가, 난관수술까지?! 그게 뭔지 알아? 평생 임신을 못하게 되는 수술이쟎아!! 그건 아이 낳을만큼 낳은 아주머니들이나 받는거쟎아? 우린 아직 아이도 없는데 어쩌자고 그런 수술까지 받은거야?”
기운없이 늘어져 있던 솔희는 침대에서 상반신을 세운채 정균의 이런 꾸짖음에 당황했던지 눈물을 쭈욱 떨어뜨렸다.
남편의 꾸짖음에 솔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느린 텀으로 훌쩍거렸다.
“네, 맘껏 야단치셔요. 당신 분이 풀릴때까지.”
그녀의 순종하고 정숙한 태도에 정균은 살짝 누그러뜨러지며 솔희에게 약간 다정한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 분이 풀리고 안 풀리는게 문제가 아니야. 당신은 돌이킬수 없는 일을 했기 때문이야. 없어진 생명은 다시 찾아오지 않고, 당신이 추가로 받은 수술은 복구가 불가능한걸로 알고 있어. 지금은 시기상조라던지 아이 생각이 없다해도 언젠가는 아이를 갖고 싶은 때가 올텐데 그때는 아무것도 할게 없어”
솔희는 흐느낌을 멈추었고 괜히 내가 너무 심했나라고 느낀 정균은 손수건을 빼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보, 내가 미안해. 당신 몸이 우선인데 내가 너무 놀라고 황당해서 화냈어”
정균은 남자답게 아내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진짜 전쟁이자 솔희의 반격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여보! 제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조건이 뭐였는지 아시죠?”
정균은 결혼전 솔희가 결혼조건으로 임신과 출산을 강요하거나 강권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을 내세우고 정균은 거기에 그리하겠노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해 내었다.
“그 많은 구애자들 뿌리치고 당신을 선택한 이유는 당신은 한입으로 두말 안할 분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죠. 그런데 막상 이런 상황에 닥치니 당신도 결국 다 똑같은 사내들중 하나였다는건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정균은 그녀의 조근조근하면서도 과거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말에 그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당신한테 정관수술이라도 받으라고 말할수도 있었지만, 당신한테 그런 문제로 짐을 지우기가 싫었어요. 콘돔싫어하시는거 알아서 그냥 아무 때고 안에다 사정해도 저는 다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그 이후의 몫은 전부 여자인 제가 뒤치다꺼리하게 된 셈이네요. 당신한테 그런 수고 안끼치려고 수술받은거에요, 뭔가 잘못됐나요?”
“여보, 그, 그건...말이지!”
하지만 솔희는 정균의 말을 면도날처럼 절단하면서 진술을 계속했다.
“결혼할때부터 관계는 제가 정한다고 한 의미 모르시죠? 당신도 다 이해하고 지키기로 약속하셨어요. 제가 하자고 하는 밤은 생리주기 다 계산된거였어요. 그래도 당신 아직 팔팔 끓을 시기에 너무 오래 참는거 보고 마음 약해져서 제가 원치 않는 날도 여러번 몸을 드렸어요. 그게 지금의 결과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의 욕구에조차 순종한 제게 당신은 약속에 대한 신뢰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균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솔희는 피아노 연주 기계처럼 편향적으로 키워진 여성이 아니라, 예중시절부터 수 많은 독서와 영화, 시창작 등으로 상당한 언변이 있었다.
“여보! 진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저 알아요, 당신의 속으로는 아이를 원하고 있다는거, 일단 저랑 결혼하고 나면 그 다음엔 아무래도 우연이던 실수던 아이 생기고, 그래서 저한테 아이낳게 하면 된다는 생각까지도 다 알지만 내색을 안했어요. 정 아기를 보고 싶으시면 당신의 아이를 낳아줄수 있는 여자랑 살면 되지 않겠어요?”
정균은 완전히 말문이 막혔고 마지막의 그 건방지고 싸가지 없는 말과 차라리 애낳을 다른 여자를 찾으라는 뉘앙스를 담은 배짱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기운이 빠져버리고 온 몸이 축 늘어진 솔희에게 차마 모질게 야단칠수가 없었다.
“후우........당신 몸조리나 신경써. 그런데 수술 끝나고 나서라도 날 부르지 어떻게 집에 왔어?”
“병원에 갈때는 택시타고 갔고, 끝나고 집에 올때는 병원에서 운영하는 픽업용 밴을 타고 왔어요”
“솔희! 그런 일 있을땐 남편을 적극 이용하는거야...........내가 너무 화내서 미안해,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걸 약속할께.”
정균은 솔희의 몰래 해버린 임신중절수술과 난관수술을 쿨하게 넘어가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굴복하는건지는 헷갈렸지만 이 문제를 계속 끌어서 둘 사이에 좋을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복장을 해체하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솔희에게 변변한 항변도 1회성으로 끝나버리고 말문이 막혀버리고 도리어 솔희에게 사과까지한 정균은 갑자기 화가 나서 찬물을 맥시멈으로 틀어놓았다.
머리카락부터 찬물이 쏟아지자 안구와 시신경까지 어는 것 같았다.
며칠동안의 그 충만한 신비스러움과 자부심에 살았었는데 바로 물거품이 되다니.
솔희가 그토록 독한 여성이었다니......
그전에는 생각하지도 않았건만 솔희의 임신테스트기를 보는 순간부터 그리기 시작했던 이제 아내와 남편이 제대로 결합하고 그 아래서 자녀들의 존재가 든든히 보위해줄거라던 희망이 박살나고 있었다.
정균의 속마음은 솔희가 임신하면서부터 일을 줄이게 되고 출산후에는 연주 일 차제를 그만둘 가능성도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집에 오래 붙어 있는걸 보지 못했던 솔희에게 자녀의 존재는, 그녀의 연주와 성공에 대한 목표를 거두고 전업주부를 하거나 혹은 피아노 학원을 차리는 것으로 진로를 틀 가능성도 높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정균의 나이브한 인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난관수술의 의미는 자유로운 부부생활이 목적이지만, 실은 정균은 솔하와의 약속 때문에 한달에 1~3번 정도 밖에 관계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자의 영구피임술은 자유로운 부부생활만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여자에게도 다른 자유로운 생활을 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선천적인 미모가 탁월한데다가 워낙 분위기에 민감하고 순간순간에 충실한 솔희에게 은근한 혹심을 품은 남자들도 많다는 것이 그를 불안하게 한다.
정균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머리를 흔들며 차가운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을 흐트러 뜨린다.
그리고 이제 평생 솔희는 아이를 갖지 못할 것이고, 중장년을 거쳐 노년이 되어도 자녀가 없는 그들의 가정 분위기를 상상해 보았더니 무관심해질 서로의 관계와 적막하다 못해 암울해질 집안 분위기 밖에 상상을 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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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졸작에 감사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두 감사해요
참 많은 생각이 지나갑니다....
감사합니다.
제 졸필로 인해 많은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니 저도 감사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