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30세 |
시조31세 |
시조32세 |
시조33세 |
시조34세 |
시조35세 |
시조36세 |
시조37세 |
시조38세 |
시조39세 |
시조40세 |
시조41세 |
시조42세 |
시조43세 |
시조44세 |
시조45세 |
12중조 |
밀양 1세 |
밀양 2세 |
밀양 3세 |
밀양4세 |
밀양5세 |
밀양6세 |
밀양7세 |
밀양8세 |
밀양9세 |
밀양10세 |
밀양11세 |
밀양12세 |
밀양13세 |
밀양14 |
밀양15세 |
밀양1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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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대군 |
욱 |
란 |
영정 |
기세 |
시주 |
찬행 |
태사공 |
효신 |
공필 |
육경 |
대화 |
간 |
은산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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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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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화 |
윤공 |
광례 |
유효 |
흥 |
규정공 |
규정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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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신 |
사문진사 |
교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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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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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
호영 |
사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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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길 |
진록 |
밀직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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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직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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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휘 |
실휘 |
충헌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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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헌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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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 |
이하 도평 |
의사공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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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평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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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복야공 |
이하 좌복 |
야공 파 |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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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야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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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 |
추세 |
시후 |
유손 |
밀직부사 |
문귀 |
영부 |
염 |
영년 |
영동정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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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직부사영동정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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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 |
호 |
지온 |
수강 |
판도판각 |
이하 판도 |
판각공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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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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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후 |
련 |
지윤 |
성린 |
삼사좌윤 |
3. 덕기 |
정구 |
기 |
옥성 |
천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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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좌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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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명 |
광후 |
정국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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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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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
순 |
지병 |
성룡 |
운성군파 |
이하 운성 |
군 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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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 3형제<3언(彦)>는 각기 달리 편제하였고, 태사공계(: 태사공, 규정공, 사문진사공, 밀직군, 충헌공)는 각 각 편제하였으며,
본 장에서는 태사공계(太師公系) 7위를 제외한 5위(밀직부사공, 영동정공, 판도판각공, 삼사좌윤공, 정국공)와 운성군편으로 편제하였다.
밀직부사공 박양언(密直副使公 諱 良彦)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휘 양언(諱 良彦)은 밀성대군(密城大君) 휘언침(諱 彦忱)의 8세손으로 고려조에서 봉익대부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를 지냈다.
한때 상계(上系)의 조부, 증조부, 고조부 3대의 휘(諱)를 실전(失傳)하기도 하였으며, 공에 관한 기록도 1741년 발간한 밀성박씨연계대보(密城朴氏聯系大譜→辛酉大譜)를 보면 "中祖 良彦 密直副使" 만 기록되어 있듯이 일전휘(一傳諱)로 후대에 상고(詳考)된 뚜렸한 기록도 없는 상태이다.
유지(遺址)와 배위(配位)도 전해지지 않는다.
공(公)의 위패(位牌)는 옥천(沃川) 원덕사(遠德祠)에 모셔졌다.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파조(派祖)이다. |
영동정공(令同正公) 박원광(諱 元光)
영동정공(令同正公) 휘 원광(諱 元光)은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휘 양언(諱 良彦)의 6세손이요 밀성대군(密城大君)언침(諱 彦忱)의 13세손(世孫)이다. 시호(謚號)는 襄惠(양혜)이다. 고려조에 벼슬이 영동정(令同正)에 이르고 재상중서령(宰相中書令)을 지냈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홍건적이 서경 함락시에 안유 이방실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으며 신축년에 박문거가 전몰한 즉 홍언박과 함께 대가호종(大駕扈從)하여 평란에 공을 세워 보리공신보국숭록대부((輔理功臣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
유지(遺址)는 실전(失傳)이고 옥천(沃川) 원덕사(遠德祠) 배향되었다.
배위(配位)는 교위(校慰) 인백(仁伯)의 여(女)로 구보에 나와있다.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 파조(派祖)이다. |
판도판각공 박천익(判圖判閣公 諱 天翊)
공(公)의 휘(諱)는 천익(天翊)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봉익대부 판도판각(奉翊大夫 版圖版閣)에 올랐다. 밀성대군(密城大君)의 8세손(世孫)으로 밀성박씨 12중조 가운데 한분이시다.
유지(遺址)는 실전(失傳)이며 옥천(沃川) 원덕사(遠德祠) 배향되었고 밀양 삼량진 검세리에 설단(設壇)하여 후손들이 세사(歲祀)를 드린다. 향사일은 음력(陰曆) 9月 20日이다.
판도판각공파(判圖判閣公派) 파조(派祖)이다.
판도판각공(判圖判閣公) 단(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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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좌윤공 박을재(三司左尹公 諱 乙材) 공(公)의 휘(諱)는 을재(乙材)이고 호(號)는 아천(雅川)이다. 밀성대군(密城大君)의 8세손(世孫)이다. 고려의 명종조(明宗朝)인 1197년(明宗27年, 丁巳)에 문과(文科) 급제하고 벼슬이 판삼사좌윤(判三司左尹)과 밀직사 (密直司)의 부사(副使)에 올랐다. 유허지(遺墟址)는 실전(失傳)되어 충북 옥천(沃川) 원덕사(遠德祠) 와 신남서원(莘南書院)에 배향되었다. 또한,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수덕재(修德齋)의 경현사(景賢祠)에 위패를 봉안(奉安)하고 음력 3월15일과 음력9월15일 제사를 올린다. 배위(配位)는 전해지지 않는다. 삼사좌윤공파(三司左尹公派) 파조(派祖)이다.
경현사(景賢祠) 경현사(景賢祠)는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휘 을재(諱 乙材)를 주벽(主壁)으로 휘 원의(元義), 휘 인우(麟祐), 휘 위(葳), 휘 천(蕆), 휘 수(粹), 휘 령(齡), 칠현중조(七賢中祖)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추모 향제(追慕 享祭)하는 사당이다.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명방촌의 모아재 경내에 있으며 인근에 세거하는 밀성박씨 일문이 서기1995년(乙亥)에 합심 성력으로 창건하였다.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휘 을재(諱 乙材)는 시 조왕 박혁거세(始祖王 朴赫居世)의 37世孫이며 밀성대군(密城大君)이신 휘 언침(諱 彦忱)의 8세손(世孫)으로 밀성박씨 12중조(中祖) 중의 한 분 이시다.
정국군 박 위(靖國君 諱 葳) 공(公)의 휘(諱)는 위(葳)이며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의 8세손(世孫)이다. 공(公)께서는 경상도의 여러 성(城)을 쌓는데 공헌한 바가 많은데, 고려 공민왕 때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있으면서 분산성(盆山城)을 쌓았는데, 1376년(禑王2年, 丙辰)에는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아갔고 1384년(禑王10年, 甲子)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1385년(禑王11年, 乙丑)에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로 나아가 동래성(東萊城)과 울산의 학성(鶴城)을 쌓았다. 1388년(禑王14年, 戊辰) 상원수(上元帥)로 있으면서 요동(遼動)에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389년(昌王元年, 己巳)에 대마도를 정벌하여 돌아왔다. 그해 11월에는 판자혜부사(判慈惠副使), 1390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얼마 후에 문하부(門下府)의 평리겸대사헌(評理兼大司憲), 1392년에 조선조가 개국되자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지고 1398년에는 문하부참찬도제조(門下府參贊都提調)가 되었으며 8월26일에는 도진무(都鎭撫)로 있다가 돌아가셨다.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에 있는 신남서원과 충북 옥천의 원덕사에 배향되었으며,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수덕재의 경현사에 봉안하고 봄에는 음력3월15일과 가을에는 9월15일 두차례 제사를 드린다. 공의 유적지(遺跡地)는 창원시의 용지 공원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김해시의 분산성(盆山城) 정상에 충의각(忠義閣)이 있으며 산성의 성안에는 축성기념비(築城紀念碑)가 있다. 정국군공파(靖國君公派) 파조(派祖)이다.
삼사좌윤공파조(三司左尹公派祖) 휘 을재(諱 乙材)
위치 : 경남 밀양시청도면 고법리 명방촌
위치 : 경남 밀양시청도면 고법리 명방촌
모아재는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휘 을재(諱) 을재(乙材)를 주벽(主壁)으로 휘 원의(元義), 휘 린우(麟祐), 휘 위(葳), 휘 천(蕆), 휘 수(粹), 휘 령(齡),을 7현중조(七賢中祖)로 경내의 경현사(景賢祠)에 위패를 봉안하고 추모향제(追慕享祭)하는 재숙소로 삼사좌윤공의 26世 후손 귀흠(貴欽), 27世 후손 창규(昌圭)등의 주간(主幹)으로 1995년 乙亥에 후손의 성력창건(誠力創建)했다.
모아재(慕雅齋)
휘 원의(諱 元義)公은 光祿大夫와 尙書左僕射로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封)하였고시호(諡號)는 혜문공(惠文公)이며,
휘 인우공(麟祐公)은 호(號)는 초암(草菴)이며 고려조인(高麗朝人)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이며 조선조(朝鮮朝)에는 증 병조판서(贈 兵曺判書)이고
휘 위(諱 葳)公은 공양왕 원년(恭讓王 元年) 기사(己巳1389년)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로 제수(除授)받고 일등공신(一等功臣)이며 경상도원수(慶尙道都元帥)로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征伐)하여 공적(功績)을 높이였고 고려충의백 정국군(高麗忠義伯 靖國君)을 봉하였으며
휘 천(諱 蕆)공은 정국군(靖國君)의 아우(弟)로써 대광보국(大匡輔國)숭록대부(崇祿大夫)와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러 구산군(龜山君)에 봉하였고,
휘 수(粹)公은 조선태종조시대(朝鮮太宗時代)에 청백리(淸白吏)로 벼슬이 장사랑 참봉(將士郞 參奉)이고 이조정랑(吏曹正郞)이며
휘 령(諱 齡)공은 공민왕조(恭愍王朝) 인으로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로 창원군(昌原君)에 봉(封)하였고 조선조에는 증 정헌대부(贈 正憲大夫)와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諡號는 양정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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