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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모든것(활약상,자료) 스크랩 빙그레 이글스- 이정훈
엘도라도 추천 0 조회 86 09.05.19 11: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91년 10월 31일. ‘한·일 슈퍼게임’에 참가하는 한국 선수단이 서울에서 출발해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는 ‘슈퍼게임’은 두 나라 올스타가 총출동하는 큰 경기였다. 그러나 점잖게 말해 올스타전이지 실제로는 ‘야구전쟁’이었다.

한국은 ‘일본에만은 질 수 없다.’라는 오기로 똘똘 뭉쳐 있었고, 일본은 ‘한국에 지면 망신’이라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한국은 대회의 중요성을 참작해 시즌을 마감하고 부산에서 1주일간 합숙훈련을 했다.

이윽고 대회가 열리는 도쿄돔 앞에 도착한 한국 선수단. 난생처음 보는 돔구장의 위용에도 한국 선수단은 겁먹지 않고 일본전 승리를 다짐했다. 이 가운데 빙그레 외야수 이정훈의 결의가 가장 돋보였다. 이정훈은 방일 전부터 “일본강점기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당한 설움과 모욕을 야구를 통해 되갚아 주겠다.”라며 일본전을 별렀다.

11월 2일 역사적인 ‘슈퍼게임’ 1차전이 도쿄돔에서 열렸다. 일본 선발 투수는 그해 16승 8패 평균자책 3.16를 기록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구와타 마쓰미였다. 시속 145km의 묵직한 속구와 포크볼, 슬라이더 등 수준 높은 변화구를 구사하는 구와타는 한국 타자들에겐 타도의 대상임과 동시에 경외의 인물이었다.

경기 전 한국기자들에게 “천하의 구와타라고 겁낼 게 있나. 통렬한 순간이 올 테니 지켜보라.”라고 큰소리쳤던 한국팀 1번 타자 이정훈이 타석에 섰다. 그해 타율 3할4푼8리로 타율왕에 오른 이정훈은 한국프로야구의 자존심이었다.

드디어 구와타가 초구 속구를 던지는데. “딱!” 이정훈의 배트가 대기를 가르고. 도쿄돔 한편의 한국응원단에서 함성이 쏟아지며. 구와타가 마운드 아래로 쓰러졌다.

“안타! 안타!” 도쿄돔에 마련된 한국 방송국의 중계부스에서 일제히 ‘안타’ 하는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정훈이 구와타의 초구를 받아쳐 투수 머리를 스치는 깨끗한 중전안타를 기록한 것이다. 1루를 향해 힘차게 뛰는 이정훈에게서 많은 야구팬은 예상을 뒤엎은 한국의 극적인 승리를 예감했다. 이는 이정훈도 마찬가지였다. 1루에 진루하며 이정훈은 ‘오늘 다 죽었어.’ 하는 말을 내뱉었다. 역시 ‘악바리’다운 근성이었다.

‘오늘 다 죽었어.’라, 역시 ‘악바리’란 별명답다. 일본을 향한 결의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런가? (입맛을 다시며)하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반대?

‘오늘 다 죽었어.’라고 했을 때 여기서 죽임의 대상은 구와타를 비롯한 일본 선수들이 아니고 우리 선수들이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구와타의 초구를 ‘딱’ 받아쳤을 때 공 끝이 하도 좋아 깜짝 놀랐다. 원래대로라면 정확한 스윙 타이밍에 맞아 중견수를 훌쩍 넘는 2루타가 나왔을 속구였다. 하지만, 구와타 공의 종속이 워낙 좋다 보니까 정확한 타이밍에 스윙한다고 했는데도 배트 뒤쪽에 맞고 말았다. 순간 ‘우리 타자들 다 죽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 다음 타자부터 줄줄이 삼진을 당했다(웃음).

두 번째 타석에서도 안타를 치지 않았나.

구와타가 속구는 안 던지고 슬라이더, 포크볼만 던졌다. 투스트라이크 쓰리볼까지 몰리니까 그때야 결정구로 다시 속구를 던졌다. 이를 놓치지 않고 잘 받아쳐 유격수 키를 넘어가는 2루타를 기록할 수 있었다.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한 빙그레 선수들.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가 이정훈이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계가 눈독을 들인 한국 최고의 교타자였다

구와타 뿐만이 아니다. 그해 센트럴리그 사와무라상과 최우수선수(MVP)상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히로시마 카프의 사사오카 신지를 상대로도 3안타를 치며 슈퍼게임에서 무려 3할9푼1리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정직하게 말해 당시 슈퍼게임에서 당신과 홈런 3개를 기록한 김성한(해태)이 없었다면 크게 망신을 당할 뻔했다. 특별히 남모르게 준비한 것이라도 있나.

방일 전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도쿄돔 안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몸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천장 뚜껑은 닫혀 있지, 일본 취재진은 수백 명이 몰려와 연방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지, 도통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이유로 스윙해도 제대로 된 스윙이 나오지 않았다. ‘이거 큰일이네!’ 하는 걱정 때문에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

‘이 대회는 슈퍼게임이 아니라 해태와의 한국시리즈다. 상대 투수는 구와타, 사사오카가 아니라 해태의 선동열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우리(빙그레)가 해태에 또 졌다. 한국시리즈에서 4번 만나 4번 모두 졌으니 얼마나 응어리가 쌓여 있었겠나. 그래 속으로 ‘이번 슈퍼게임은 한국시리즈의 연장선상’이고 '해태에 복수할 기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름대로 부담과 긴장감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슈퍼게임은 한·일 두 나라 야구의 수준차가 얼마나 큰지 보여준 좋은 기회였다. 타격, 투구, 수비, 벤치의 작전능력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몇 수 아래였다. 하지만,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과 올해 제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보듯 한·일 두 나라 야구는 이젠 대등해진 느낌이다. 슈퍼게임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뛸 수 있는 유일한 한국 타자"란 소릴 들었던 당신으로선 감회가 색다를 법도 하다.

포크볼을 예로 들자. 1991년 한국에서 포크볼을 뿌릴 수 있는 투수는 태평양 정명원(히어로즈 2군 투수코치)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정)명원이 포크볼은 높은 코스로 공이 몰리는 경우가 많아 장타를 맞을 때가 잦았다. 수준급 포크볼로 보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슈퍼게임에서 우리 타자들이 일본 투수들의 포크볼에 말린 것도 그런 고차원적인 포크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즘 국내리그를 보면 수준급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들이 꽤 많다. 슈퍼게임의 교훈을 국내 야구인들이 잘 활용한 덕분이 아닐까.

대구 3대 야구천재였던 이정훈

야구사에 큰 획을 그은 선수들을 보면 대개 유년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야구천재’들이 많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었을 듯싶다.

운동엔 확실히 소질이 있었다. 육상이면 육상, 축구면 축구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야구는 대학 때까지 야구선수로 활약했던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대구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시작했다. 내 자랑은 아니고 경상중학교로 진학할 즈음에는 주변에서 나를 “야구천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상중학교 구성원이 대단했다.

(고개를 끄덕이며)학교 야구부 사상 역대 최강이었다. 내야수 강기웅, 투수 이상훈(청보-OB) 등 쟁쟁한 동기생이 많았다. 당시 경상중 도성세 감독님이 대구상고 감독님한테 내기 경기를 제안할 만큼 전력이 강했다.

경상중에서 대구상고로 진학했다. 그때는 경상중에서 대구상고로 진학하는 게 일종의 관례였다.

거기다 워낙 경상중 구성원들이 좋다 보니까 졸업생 학부모들끼리 “이 구성원 그대로 대구상고에 진학해 고교야구를 휩쓸자!”라는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대구고에서 “경상중 졸업생들이 모두 대구상고로 진학할 시 팀을 해체하겠다.”라며 강수를 두는 바람에 대구시야구협회에서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추첨 끝에 원래부터 예정됐던 대구상고 유니폼을 입었다

이정훈은 경상중에서 야구에 눈을 떴다. 중학시절 그는
대구지역 중.고야구부에서 가장 스윙이
아름다운 선수로 꼽혔다. 사진 아래줄 맨 오른쪽이
이정훈이다. 사진 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는
강기웅이다

고교시절 성적을 보면 입학 운이 썩 좋았다곤 볼 수 없을 듯하다.

그럴 수도. 대구상고 구성원이 원체 좋지 않다 보니 졸업할 때까지 전국대회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당시 대구지역 고교 타자 가운데 ‘빅3’가 있었다. 당신과 경북고 유중일, 대구고 강기웅이 그들이었다.

(유)중일이가 가장 잘 나갔다. 중일이는 2학년 때부터 전국대회에 당당히 주전으로 나갔다. 경북고가 최강이다 보니 우승은 일도 아니었다. 언론의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밖에. 대구고도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강기웅에 대해 모르는 야구인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예외였다.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어렵사리 출전했다손 쳐도 1회전에서 탈락하기 일쑤였다. 딱 한 번 기회가 찾아왔는데.

언제였나.

고 2때인 1981년 황금사자기대회였다. 당시 감독님이 바뀌면서 팀 전력이 급상승한 덕분에 4강까지 진출했다. 당시 결승진출을 놓고 우리와 맞붙은 상대는 광주 진흥고였다. 그때 진흥고 에이스가 ‘까치’ 김정수(KIA 투수코치) 선배였다. 얼마나 공이 좋았는지 우리 팀 타자들이 꼼짝도 못했다. 내가 친 3안타가 그날 팀 안타 거의 전부였으니 말 다했지.

그래도 전국에 당신의 이름을 알린 첫 순간이었다.

맞다. 전국대회 4강 안에 들면서 체육특기자 자격이 쥐이어졌고 타율 5할6푼3리를 기록하며 대회 타율왕에 올랐다. 그나마 동기들과 비슷한 레벨로 오르는 순간이었다

태극마크를 달지 못한 사내

대구지역 고교 야수 ‘빅3’ 가운데 유중일은 한양대, 강기웅은 영남대로 진학했다. 서울 아니면 연고지 대학에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연고가 없는 부산 동아대로 진학했다.

고 3때, 아마 5월 말쯤 됐었을 거다. 강병철 당시 동아대 감독님이 학교로 찾아왔다. (기억에 선한 듯 흐릿하게 눈을 뜨며)지금은 나이가 드셔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어찌나 미남이신지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관상 자체도 무슨 마력 같은 게 있으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날 보자마자 “니가 정훈이가? 정훈아, 니 학교 간판은 보지 말고 내보고 입학해라. 내 니 키워줄게.” 하시는데 입학원서에 도장을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는 영남대에 입학할 생각이 아니었나.

당시 영남대 성기영 감독님이 대구상고를 자주 찾으셨다. 오실 때마다 내게 5만 원이고 7만 원이고 용돈을 주셨다.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넙죽 잘 받았다(웃음).

용돈은 영남대에서 받고 입학은 동아대로 한 셈인데.

용돈 받으면 내 혼자 먹지 않았다(웃음). 3분의 1일은 내가 갖고 나머지는 야구부 학부모회 회장님께 드렸다. “우리 반찬 해주실 때 이 돈 보태셔서 더 좋은 반찬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럴 때면 어머님들이 “우리 정훈이는 생각하는 게 이래 어른스럽노” 하며 좋아하셨다.

한양대, 건국대, 고려대 등에서 뒤늦게 입학 전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동아대행을 선택했다.

강병철 감독님한테 빠져서 간 거지 뭐. 게다가 당시만 해도 남자의 의리라는 게 목숨보다 중요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당신처럼 고교유망주라면 당시엔 동기생을 동반 입학시키고 거액의 계약금을 받기도 했다. 대개 가난한 야구선수들은 대학 4년 동안 이 돈을 생활비로 쓰게 마련이었다.

동기생 한 명이 같이 입학하긴 했는데 (길게 한숨을 내쉬며)스카우트비를 받지 못했다. 중간에서 누가 가져갔다. 돌아보면 난 돈과는 별로 인연이 없던 것 같다

대구상고 시절 이정훈은 빠른 발과 폭넓은 수비, 정확한
타격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팀이 워낙 약체라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사진은 1981년
황금사자기대회 당시 광주진흥고와의 4강전에서
득점에 성공하는 이정훈이다

당신과 연고는 없었지만, 당시 동아대는 대학야구 최강이었다.

그때 동아대는 국가대표의 산실이었다. 박동수, 오명록, 김진욱(두산 2군 투수코치) 등 쟁쟁한 투수들과 김한조, 김상훈(SBS 스포츠 해설위원), 이동환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선수들이 모두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여기다 강병철 감독님이 국가대표 감독을 맡으실 때라 선수와 감독이 모두 태극마크를 달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대학 시절 당신은 한 번도 국가대표를 경험하지 못했다.

언제나 내가 내 복을 찬 꼴이었다. 대학 1학년 때 첫 번째 기회가 왔다. 강병철 감독님이 날 스카우트하고서 곧바로 롯데 수석코치로 가셨다. (허탈한 표정으로)강 감독님 한 분 보고 입학한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다행히 어우홍 감독님이 후임으로 오셔서 마음을 다잡고 학교생활을 했다. 이때만 해도 내겐 작은 꿈이 있었다.

작은 꿈?

당시 동아대 외야진은 좌익수 김한조, 중견수 조성옥 선배가 확실히 자기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괜찮은 우익수가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작고 다부지고 발이 빠르니까 어 감독님이 생각하기엔 내가 우익수로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사실 조성옥 선배 자리가 탐이 났다. 2, 3달만 바짝 훈련하면 국가대표 스타였던 조 선배보다 타격이면 타격, 어깨면 어깨, 수비면 수비 모두 능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래 조용히 중견수 수업을 받았는데.

받았는데?

하루는 어 감독님이 훈련 중에서 오셔서 “정훈이 우익수로 가” 하시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화가 ‘팍’ 났다. 왜 내를 우익수로 보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불만의 표시로 중계플라이 할 때 공 잡아 하늘로 던져버리고, 땅바닥으로 패대기치는 등 항명을 계속했다. 문제는 어느 정도 표시가 나고 말아야 했는데 항명이 누가 봐도 항명이란 티가 났다는 데 있다. 연세가 예순에 가까우셨던 어 감독님이 그걸 모르겠나. ‘어허, 이 녀석 봐라.’ 하시면서 날 바로 찍으셨다. 그때부터 춘계대학대회, 백호기대회에서 줄곧 벤치를 지켰다. 대타, 대수비는 고사하고 대주자라도 나가지 못했다.

1학년 후반기에 괘씸죄에서 풀려난 걸로 안다.

어떤 대회에 대타로 나가 잘 쳤다. 그 이후 어 감독님이 기회를 자주 줬다. 2학년이 될 무렵에는 조성옥의 뒤를 잇는 국가대표 중견수 후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2학년이 돼서도 '국가대표 중견수 이정훈'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는 동국대 이중화의 차지였다.

(잠시 침묵하다가)그해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 아버지가 운동선수랑 사귀는 걸 대단히 싫어하셨다. 얼마나 상처가 컸는지 모른다. 나도 참 어렸던 게, 그 친구와 도망갈 생각을 다 했지 뭔가(웃음).

당신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다소 놀랍다. ‘이정훈’ 하면 오직 야구밖에 모르는 이로만 알았는데.

어렸을 때이니만큼 뭐든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해 계속 방황하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꼭 보여주마’ 하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그때 야구가 나를 찾아왔다. (다시 침묵하다가)지금의 아내와 만나기 전까지 어떤 여자와 교제도 아니 세상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연습하고 밥 먹고 자고 하는 게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1986년 대학 4학년 때도 국가대표 제의를 받은 것으로 안다. 그런데 역시 무산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대비해 대한야구협회에서 최정예 국가대표를 만들려고 동분서주했다. 내게도 제의가 왔다.

1980년대 중반 부산 동아대는 대학야구계의
절대 강자였다

그럼 결국 국가대표가 됐단 말인가.

(고개를 흔들며)아니다. 제의는 왔는데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협회에서 국가대표가 되는 조건으로 2년간 프로에 가지 말고 대표팀에 충성할 것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물론 꼭 한번 달고 싶던 태극마크를 위해 그 같은 조건을 수용할 의사도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국가대표가 되지 않았나.

(짧게 숨을 토해내고 나서)부모님이다. 특히나 어머니가 나 때문에 고생을 무지하게 하셨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순 없었다. 집안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버는 게 우선이었다.

22경기 연속안타 기록의 신인 돌풍

1987년 동아대 졸업과 함께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다. 연고를 고려하면 삼성 라이온즈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었어야 했다.

당시는 1차 지명자가 각 팀당 3명이었던 시절이다. 음, 처음부터 삼성이 날 지명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왜냐? 그해 삼성은 외야보다 내야가 약했다. 외야는 장효조, 장태수, 허규옥, 이종두 같은 대스타들이 즐비했지만 내야는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거나 적극 세대교체가 필요한 선수들이 많았기에 유중일, 강기웅 등 내야 출신들이 지명될 확률이 더 높았다. 여기다 188cm의 장신 왼손투수였던 한양대 장태수도 삼성으로선 놓칠 수 없는 카드였을 거다.

결국, 삼성은 1차 지명에서 당신을 뽑지 않았다. 빙그레가 2차 1번 지명에서 두 번째 선수로 당신을 뽑았다.

(묘한 표정을 지으며)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있다. 배성서 당시 빙그레 감독과 노진호 단장이 나를 청보에 뺏기지 않으려고 모사를 꾸몄다.

모사라, 어떤 모사였는지 궁금하다.

2차 지명에서 청보 강태정 감독님이 무조건 날 뽑으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청보에 마땅한 투수가 없어 당장 신인 투수도 뽑아야 할 판이었다. 청보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배 감독님과 노 단장이 다른 구단 관계자들이 있는 곳에서 연기했단다. “이정훈은 천천히 뽑아도 되잖아. 2차 2번 지명해도 되고 좀 늦게 뽑아도 되지 않아?” 하며 마음에도 없는 소릴 흘리고 다녔단다. 청보가 이를 듣고 “옳거니” 하면서 ‘2차 1번 지명에서 투수 2명을 먼저 뽑아도 빙그레보다 우리가 순서가 먼저이니 2차 2번 지명 때 이정훈을 찍으며 되겠고 나’하고 예상했단다. 하지만, 백날 예상만 백날 뭐하나. 빙그레가 나를 2차 1번 지명에서 두 번째 선수로 뽑았는데(웃음).

1987년 1월 계약금 1천500만 원, 연봉 1천20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빙그레에 입단했다.

그것도 어렵게 받은 돈이었다. 난 처음엔 계약금으로 2천만 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빙그레는 “이중화 같은 국가대표 출신도 계약금이 1천500만 원인데 대표팀 경험이 일절 없는 네가 무슨 2천만 원이냐. 그냥 계약금 1천500만 원에 연봉 1천100만 원을 받아라.”라며 거부했다. 하지만, 나도 “마음 같아선 최고대우인 2천500만 원을 요구하고 싶은데, 국가대표 경력이 없으니까 500만 원 깎아 2천만 원을 달라고 하는 것”이라며 버텼다. 아마 구단에서 ‘뭐 저런 게 다 있나?’ 했을 거다. 결국, 연봉 100만 원 더 받는 걸로 합의했다(웃음).

빙그레는 1986년 창단했다. 당신이 입단한 해가 창단 2년째였는데.

팀이 많이 약했다. 일단 개개인의 기량이 다른 팀에 비해 떨어졌고 코칭스태프의 리더십도 강력하지 못했다. 이 팀 저 팀에서 선수들을 데려오다 보니 팀워크도 문제였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메우려고 배성서 감독님이 우릴 엄청나게 훈련했다.

입단하자마자 주전 자리를 꿰찼다.

꿰찼다기보다 준비된 주전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준비된 주전?

그렇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 나무 배트로 훈련했다. 프로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빠르기와 번트를 비롯한 작전수행능력도 프로에선 크나큰 장점이었다. 시범경기가 끝날 무렵 배 감독님이 날 주전 좌익수로 못 박았다.

중견수 이강돈, 우익수 고원부를 고려할 때 주전 좌익수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다.

성과? 글쎄. 중학교 때부터 중견수만 봐서 그런지 좌익수는 공도 안 오고 별로 재미가 없었다. 수비코치님한테 찾아가 “저를 중견수 시켜주시면 좌우 타구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잡을 수 있습니다. 중견수로 바꿔주십시오.”라고 큰소리쳤다.

바꿔달라고 바꿔주던가.

그때 (이)강돈이형이 어깨는 참 좋으셨는데 내보다 순발력은 늦었다. ‘딱’ 중견수 오자마자 이리저리 빠지는 타구를 다 잡아냈디만 감독님 입이 귀에 걸렸다.

이정훈은 하체의 밸런스를 중시하는 타자였다. 거기다
뒷다리 허벅지의 중요성을 깨달은 타자였다.
1992년 이정훈은 타율 3할6푼과 함께 25홈런을
치는 괴력을 발휘했다. 힘이 아닌 머리로
연구한 결과였다

1987년 당신 하면 기억나는 게 있다. 신인 시즌 최다안타(124안타)와 22경기 연속안타다.

내가 만약 5년 이상 경력의 타자였다면 아마도 30경기 연속안타도 가능했을 거다. 그땐 신인이라 그런 중대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일 반드시 안타를 기록해야지.’ 하는 강박관념 때문에 새벽 3시에 깨기 일쑤였다.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22경기 연속안타 행진에 도전할 때 상대가 삼성이었다. 당시 (유)중일이와 내가 치열하게 신인왕 경쟁을 벌일 때라 삼성이 내게 정면승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삼성 선발 양일환 선배가 정면승부를 걸어왔다.

양일환에게 안타를 기록했나.

(고개를 흔들며)어데. 원래 내가 그 선배한테 약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도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9회 초 마지막 타석일 때 마운드에 삼성 마무리 권영호 선배가 올라왔다. 볼 카운트는 투스트라이크 스리볼. 당연히 공을 뺄 줄 알았다. 이만수 선배도 걸리라고 사인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자꾸 권 선배가 고개를 흔들었다. 삼성 벤치에서도 사인이 나오는 것 같은데 또 흔들지 뭔가. 그러더니 갑자기 ‘픽’하고 바깥쪽으로 속구를 던지는 거다. 그래 ‘딱’하고 받아쳤지. 아니 이게 뭐야. 3루 오대석 선배가 그걸 또 다이빙 캐치하네. 속으로 ‘에이 틀렸구나’ 하는데 이게 웬걸.

공이 글러브에라도 맞고 튕겼나.

(두 눈을 크게 뜨며)아니 어떻게 알았나. 오 선배 글러브 끝에 맞고 페어가 됐지 뭐야. 22경기 연속 안타에 성공하고 나니까 삼성에서도 내가 대구 출신이라고 수고했다고 덕담해주시고 장내 방송을 통해서도 기록달성을 언급해주셨다. (환한 표정으로)무엇보다 관중이 기립박수를 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22경기 연속 안타에 성공하자마자 기록은 중단됐다.

당시 숙소였던 대구 수성호텔에서 동료가 “축하한다.”라고 샴페인을 터트렸다. 긴장이 풀렸는지 술 몇 잔 마시고 잤는데 다음날 경기에서 안타를 못 쳤다.

‘22’에서 멈춘 게 못내 서운했을 듯싶다.

(고개를 흔들며)그땐 그냥 빨리 끝나고 싶었다. 스트레스가 워낙 심하다 보니까 기록에 대한 갈망보단 그냥 마음 편하게 경기를 대하고 싶었다.

그다음 경기에서 안타 행진을 시작해 다시 12경기 연속안타를 쳤다. 중간에 기록이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34경기 연속안타도 가능했다.

하일성 당시 KBS 해설위원이 방송에서 날 가리키며 “신인선수가 연속안타를 치다가 멈추면 슬럼프에 빠지는 게 기본인데 이정훈 선수는 다시 연속 안타 기록행진을 하고 있다. 저 선수가 정말 신인선수 맞습니까?” 하며 놀랐던 게 기억난다.

결국 1987년 신인왕을 수상했다. 유중일, 강기웅 등 아마추어 시절 라이벌들을 프로에 와서 꺾은 셈이었는데.

야구는 정말 모르는 거다. 오늘 3할 타자가 내일의 4할 타자가 될 수 있고 2할 타자가 될 수 있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건 답답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포기하지 말아야 이해가 되기도 한다

‘밀어주기’ 타율왕, 그러나

1988년 방위복무 중에도 96경기에 출전해 타율 3할2푼3리 고타율을 기록했다.

그때 말이 많았다. 원정경기를 하려면 부대에서 휴가증을 받아야 하는데 상대팀에서 “무슨 방위가 경기에 출전하느냐?”라고 항의하는 통에 경기에 나가지 못할 뻔한 적도 있었다.

1989년 방위 소집해제가 되면서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시즌을 눈앞에 두고 척수마비로 자칫 식물인간이 될 뻔했다.

그해 4월 소집해제 되는 통에 팀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지 못했다. 편하게 마음을 먹었으면 됐는데 ‘제대하고 잘해야지.’ 하는 다짐이 강해 개인훈련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 시즌을 며칠 앞두고 수비 훈련할 때 직선 타구를 잡았는데 허리가 삐끗했다.

그때 쉬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그땐 정반대였다. 몸이 부슬부슬 아프니까 되레 스스로 화가 났다. 그래 타격연습을 실컷 치고 한의원에 찾아가서 지압을 받고 왔다. 그날 저녁까진 괜찮았는데 그 다음 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갔다.

병명이 뭐였나.

척수 인대손상이었다. 그냥 가만히 놔둬야 하는데 배팅하고 거기다 지압까지 받았으니 척추가 남아날 리가 없던 모양이다. 일주일간 대소변을 누워서 보는 등 거의 한 달간 입원해 있었다.

하지만, 퇴원하자마자 또다시 연속경기 안타 행진을 시작했다.

15경기 연속안타를 쳤을 거다.

과거 기록을 보면 무슨 연속안타와 부상에 한이 맺힌 사람 같다. 연속안타 뒤에 어김없이 부상이 찾아오고 부상에서 벗어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연속안타 행진을 시작하고. 15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할 무렵인 8월 12일 부산 롯데전에서 8회 초 2루 도루를 시도하다가 2루수와 충돌하며 왼쪽 어깨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했다.

누가 아닌가. 그날 3타수 무안타에 그치면서 연속안타 행진이 불투명해졌다. 그 와중에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하니 얼마나 화가 나. 이거 또 포수랑 시비가 붙었네. 1루로 곱게 간 다음에 초구에 2루로 냅다 뛰었다.

초구에 ‘냅다’ 뛴 이유라도 있나.

초구에 도루 시도해 성공하면 그만큼 포수 자존심 뭉개는 일도 없으니까(웃음).

그래 성공했나.

성공은 무슨. 2루수가 잡으라는 공은 안 잡고 무릎으로 내 왼쪽 어깨를 찢더라고. (언더 셔츠를 벗고 왼쪽 어깨수술 자국을 보이며)지금은 시간이 흘러 수술자국이 줄어서 그렇지 예전엔 이래 컸다고.

그 경기로 사실상 시즌아웃됐다.

정말 아쉬웠다. 부상 전의 흐름을 계속이었으면 타율왕은 내 차지였다. (고)원부형이 타율 3할2푼7리로 타율왕이 됐다

이정훈은 1991, 1992년 2년 연속 타율왕에 오르며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교타자로 불린 장효조를
뛰어 넘을 ‘미래의 전설’로 지목됐다. 그러나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1년 드디어 타율 3할4푼8리로 타율왕에 올랐다. 타율 3할4푼7리의 장효조(롯데)와 3할4푼5리의 팀 동료 장종훈을 근소한 차로 이긴 것이었는데. 그러나 뒷맛은 개운치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김영덕 감독이 당신을 타율왕에 오르게 하려고 경기에서 빼고 장효조를 볼넷으로 걸리는 등 이른바 타율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말이 많았다. 난 감독님에게 ‘무조건 출전하겠다.’라는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와 정면승부를 벌인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영광스러운 기회였다. 하지만, 김 감독님은 “잠자코 쉬어” 하면서 내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감독은 삼성에 있을 때도 자기 팀 선수 이만수의 타율왕을 위해 롯데 홍문종에게 9연타석 고의볼넷을 지시한 바 있다. 김 감독이 그토록 선수들 타이틀에 목을 맨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이 비난받더라도 내 선수의 기록은 감독이 반드시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셨다.

다음해인 1992년 타율 3할6푼을 기록하며 당당하게 2년 연속 타율왕에 올랐다.

기쁘기도 기뻤지만 ‘타율관리’로 타율왕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더는 듣지 않게 됐다

호랑이 앞에서 한없이 작았던 독수리

1988, 1989,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와 만났지만 모두 패했다. 따지고 보면 빙그레만 해태에 약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갖춘 빙그레가 단 한 번도 해태를 꺾지 못하고 준우승 3번에 만족한 건 미스터리다.

개개인의 실력이나 벤치 싸움은 비슷했다. 하지만, 딱 두 가지에서 차이가 났다. 먼저 선수들의 자세다. 해태는 노아웃 만루 기회가 되면 웨이팅 서클에 있는 타자가 타석 바로 뒤에 와 주문을 외운다.

무슨 주문인가?

“앞 타자 무조건 삼진 먹어라. 이 기회는 내가 살릴 테니.” 하지만 빙그레 타자들은 웨이팅 서클에 있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었다.

?

“앞 타자 네가 싹쓸이해라.” 그러니까 빙그레 타자들은 해태 타자들과는 달리 ‘내가 경기를 만들어 보겠다.’라는 승부사 기질이 약했다.

승부사 기질이라,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물론 선동열이라는 위대한 투수의 영향도 컸다. 8회 지고 있을 때 선동열 선배가 나와 몸만 풀어도 ‘에이 경기 끝났네!’ 하는 분위기가 실제로 있었으니까. 빙그레에도 역대 좋은 투수들은 많았지만 큰 경기에서 선동열처럼 상대를 압도할 만한 투수는 눈에 띄지 않았다.

큰 경기는 경험과 승부사 기질 그리고 에이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구단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지금 한화는 선수단 지원도 좋고, 사기를 북돋우려고 돈을 잘 쓰는 편이다. 그러나 과거 빙그레는 영 아니었다. 한국시리즈에 올라갈 때마다 선수들이 구단에 ‘당근(매리트)’을 요구하면 구단이 늘 하는 말은 “걱정하지 마. 한국시리즈에서 우승만 해봐!”였다. 우승하라고 당근이 필요하지 우승 다했는데 당근이 무슨 필요가 있나(웃음).

그래도 해태보단 낫지 않나. 해태는 한국시리즈 우승 기념으로 선수들에게 ‘종합과자선물세트’를 선물했다 하지 않나.

해태는 그래도 과자류가 많으니까 종합과자선물세트라도 주지. 빙그레는 빙과류가 많으니까 이거 뭐 ‘종합아이스크림선물세트’도 줄 수가 없고(웃음). 그때는 해태가 오히려 빙그레보다 요소요소 돈을 잘 썼다. 없는 살림에도 선수들 사기 진작 차원에서 알게 모르게 지원을 했다고 들었다. 참, 내가 운이 없는 게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1995년부터 구단에서 돈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라(웃음).

1992년 한국시리즈 상대는 해태가 아니라 롯데 자이언츠였다. 호랑이에게 3번 연속 진 것은 그렇다손 쳐도 거인에게 진 이유는 무엇일까.

1986년 빙그레 창단 뒤 1992년까지 총 4번 한국시리즈에 도전했다. 그 가운데 정말 1992년은 우리가 우승할 줄 알았다. 그해 빙그레가 팀 타격 부분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지 않았나.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한국시리즈를 대하는 마음이 다소 안일했다.

4번째 한국시리즈 도전이었으면 결의가 각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안일이라니?

극명한 예가 있다.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와 해태가 붙었는데 우리 선수들이 해태가 점수를 내면 쥐죽은 듯이 조용하고 롯데가 득점하면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며 생난리를 쳤다(웃음). 선참급 몇몇 선수들은 해태가 올라와 설욕할 기회를 얻기를 바랐는데 후배들은 하도 지다 보니까 롯데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롯데가 심리적으론 우리에게 더 힘든 상대였다.

어째서였을까.

해태가 아니라 롯데이니만큼 이번엔 꼭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부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다 염종석 공이 무척 좋았다.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고 불린 우리 팀 타선이 계속 침묵했으니까

1994년 빙그레는 한화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1999년이
되기까지 과거 빙그레의 영광은 뒤찾을 수
없었다

4번의 도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 상실감이 컸을 듯싶다.

왜 아니겠나.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20타수 10안타 타율 5할을 쳤는데도 또다시 준우승에 만족해야 한다니 얼마나 억울한가. 운명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 시상식을 하거나 말거나 화장실 뒤에 가서 ‘펑펑’ 울었다.

고통스럽게 끝난 ‘악바리’의 현역

1992년을 기점으로 빙그레도 당신도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부상 탓이 컸다. 1992시즌이 끝나고 동계훈련 때였지 싶다. 그때 정민철이 방위복무를 했다. 내가 (정)민철이를 참 예뻐했는데 하루는 민철이가 뛰는 걸 보고 내 딴에는 시범을 보인다고 뛰었는데 갑자기 발에서 ‘뚝’하는 소리가 났다. 그 자리에서 발을 쩔뚝이기 시작했는데 오른쪽 발뒤꿈치 인대가 끊어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오른쪽 발뒤꿈치 인대 파열 정도면, 재활을 통해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

(한숨을 내쉬며)누가 모르나. 하지만, 그때는 우리야구가 과도기에 있던 때라 변변한 트레이닝이 시스템이 없었다. 지금이야 부상이다 싶으면 바로 아이스하고 다음날 MRI(자기공명장치)로 촬영해 약물치료를 할지 수술을 할지 정확히 판단하지만, 당시는 병원에서 하는 말이 “깁스하고 푹 쉬세요.”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나도 40일 정도 깁스를 하고 움직이지 못했다.

40일이면 참 긴 시간이다. 당신처럼 투지가 강한 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구장에 나가 몸을 움직이길 원한다.

내가 그랬다. 깁스를 하는 통해 스프링캠프를 참가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그래 하루에도 수천 번씩 스윙을 하며 몸을 만들려고 분주히 노력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번에는 손목에서 ‘찍’ 소리가 나지 뭔가. 그때 직감적으로 ‘아, 이거 큰일 났다.’ 하면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손목에 부상이 온 건가.

(고개를 끄덕이며)오른쪽 손목 인대가 끊어졌다. 이때도 대응이 현명하지 못했다.

또 깁스만 했나.

미 메이저리그 타자 켄 그리피 주니어는 나와 똑같은 손목 인대를 다쳤는데 수술하고 얼마 있다 다시 복귀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 수술은 고사하고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다쳤는지도 알지 못했다. (혼잣말을 하듯)그때 치료를 잘 받았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했을 텐데. 바보처럼 손목에 붕대를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감고서 경기에 출전했다
 

 

이정훈은 천안북일고 감독으로 아마추어 야구 발전에
헌신 중이다. 그의 야구이론은 그러나 프로에
접목하는 게 더 이상적이다

야구는 과학이지 요행이 아니다. 그래 요행이 통했나.

공이 오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왜냐? 배트에 공이 맞으면 진동이 손목에 전해져 고통이 말도 못하게 심했기 때문이다. 코칭스태프가 그제야 부상상태가 심각한 걸 알았다.

코칭스태프가 상태를 알았으면 충분한 휴식을 제공했을 텐데.

(강한 어조로)휴식은 무슨 휴식. 내가 거부했다. 난 야구선수다. 야구선수는 죽어도 그라운드에서 죽고, 힘이 1%라도 남아 있으면 야구장에서 소진해야 한다.

수술도 못하고 재활도 어려운 상황에서 선수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대포 주사를 맞았다.

‘대포 주사’라면 ‘데포메드롤’이란 말인데. 마취 성분으로 인해 통증이 경감되기도 하지만 잘못 맞으면 오히려 부상이 악화하는 약물이다. 세계반도핑기구(WADA)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금지하는 스테로이드 물질이기도 하다. 물론 그때는 KBO의 약물규정이 없던 때다.

약물의 성분은 몰랐다. 그저 통증이 너무 심해 고통을 참고 경기를 뛰고 싶었다. 원래 대포 주사는 두 번 이상은 절대 놔주지 않는데 난 세 번 주사를 맞았다. 처음엔 효과가 있었다. 대포 주사를 맞자마자 청주구장에서 홈런을 쳤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그 기분이 계속 지속했나.

아니다. 얼마 안 있다 공을 치면 다시 손목에 고통이 전해졌다. 그럴 때면 다시 대포 주사를 맞으러 갔다. 무슨 아이들 소풍 가는 것처럼 대포 주사를 맞으러 갈 때가 제일 행복했다. 왜냐? 고통이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발이 듣지 않았다. 재기하려고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고, 벌침까지 손수 놨다. 하지만, 손목 인대 부상으로 스윙 균형이 무너지면서 몸 전체가 곪기 시작했다. 결국, 1995년 삼성으로 이적해 두 시즌을 보내고 1997년 OB로 이적했지만 재기에 성공하지 못하고 그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연구하는 야구인이 되고 싶다.

1997년 현역 은퇴 뒤 미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싱글 하이A팀에서 코치연수를 떠난
이정훈. 미 마이너리그에서 ‘악발이’ 이정훈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지도자로
미국 선수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

1998년 한화의 지원으로 미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 싱글 하이A팀서 지도자 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현역 시절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한국시리즈를 1999년 코치가 돼서 경험했다.

그때 내가 한화 타격코치를 할 때였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고 나니 하늘을 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한편으로 ‘선수도 우승했으면 얼마나 더 기뻤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뒤 LG 코치를 거쳐 지난해 11월부터 천안북일고 감독을 맡고 있다. 팀을 맡은 지 4개월 만인 지난 3월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이끄는 저력을 발휘했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게 재밌다. 프로에서 배우고 축적한 것을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5월 20일 청룡기대회 첫 경기를 대비하고 있다.

현재 야구기술서적을 집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도 찰리 로나 테드 윌리엄스처럼 현장의 야구인들이 야구기술서적을 펴내야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한다. 타격에 관한 기술서적을 준비 중이다. 왜 그렇지 않나. 프로야구가 생긴 지 좀 있으면 30년이 되는데 변변한 야구기술서적 하나 없다면 이게 말이 되나.

한국에서 이순철 MBC ESPN 해설위원만큼이나 야구이론에 정통한 야구인을 꼽는다면 단연 당신이다. 좋은 책이 나올 것으로 믿는다.

책도 책이지만 정말 되고 싶은 지도자상이 있다.

그게 뭔가.

한국에서 김성근 SK 감독님과 주루면 주루, 타격이면 타격, 수비면 수비에 관해 폭넓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야구인이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나는 많지 않다고 본다. 그 가운데 나는 김 감독님과 야구이야기를 했을 때 지치지 않고 내 의견을 밝힐 수 있을 만큼의 공부는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현장 지도자라고 연구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야구는 마술이 아니라 과학이라고. 야구가 처음 날 찾아왔을 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다. 야구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노력하면 발전한다고.



이름 : 이정훈(李政勳)
생년월일 : 1963년 8월 28일
체격 : 171cm / 73kg
이력 : 대구상고-동아대-빙그레-한화-삼성-OB-한화 코치-LG 코치-천안북일고 감독
프로입단 : 1987년
통산성적 : 개인통산 918경기 출전 타율 2할9푼9리 918안타 188홈런 353타점 151도루 / 1991~1992년 2년 연속 타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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