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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적 소견 |
▲서울고법은 이윤성 교수의 부검소견을 인정했다. 피해자 목의 상처가 수평이거나 위에서 아래쪽으로 있으므로 범인은 키가 176㎝인 피해자보다 키가 컸을 가능성이 많고 또 마주보고 있는 상태에서 배를 찔리기까지 했는데도 방어흔이 없었으므로 범인이 피해자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매우 센 사람이었을 것이다.
▲대법원은 『증인 스스로도 키에 관해서는 피해자의 위치와 움직임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에 다 들어맞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런 것이고 소변을 보는 자세에 따라 가변적이라고 진술했고, 방어창이 없다는 점도 피해자의 당시 상태에 따라 상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둘 다 무죄될 수도
판결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대법원은 패터슨 진술의 신빙성을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패터슨에 대한 유죄 심증이 담겨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리에 대한 무죄 판결이 패터슨이 범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살인현장의 유일한 목격자인 증인의 진술이 흔들리는만큼 피고인이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둘 중 하나는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이 사건의 경우 대법원 판단을 좀더 쉽게 해석하면 「패터슨이 범인일 수도 있기 때문에 리가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앞으로 사건은 어떻게 될까. 일반적으로 대법원이 파기환송한 사건을 검찰이 재상고할 경우 검찰주장에 특별히 새로운 사실이 없는 이상 대법원은 종전의 판결에 따라 판단을 확정한다. 그러나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이 사건의 경우 리에게 무죄를 확정하는 것은 패터슨과 곧바로 연관되는 것이어서 대법원도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리의 아버지 이경수씨는 『리가 억울한 누명을 썼으니만큼 빨리 무죄를 확정하고 패터슨 재판의 증인석에 설 수 있게 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진실을 밝혀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터슨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 그러나 담당인 서울지검 형사3부 김경태 검사는 『검찰이 상고를 한 이상 리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뒤 본격적인 재수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검찰의 재수사를 통해 패터슨이 범인이라는 새 증거나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가 밝혀지면 문제는 간단하다. 이에 대해 패터슨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설령 다시 법정에 선다 해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된다. 걱정하지 않는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혹 이 과정에 리가 유죄라는 새 사실이 밝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무죄가 확정된 뒤라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처벌은 불가능하다.
리측 김동섭변호사는 『지금 기록만으로 검찰이 패터슨을 기소해도 대법원은 유죄를 선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 중 하나는 범인이므로 한 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면 당연히 나머지 하나에게는 유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
그러나 서울지법 한 부장판사는 『진술의 신빙성이 흔들리기는 리도 마찬가지 아니냐』며 『설령 검찰이 패터슨을 기소한다고 해도 1심과 2심에서 리에 대한 유죄증거로 쓰였던 진술들이 이번에는 증인 리의 진술을 탄핵하는 증거로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죄에 대한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증거재판주의원칙을 지킨다면 모순된 진술이 얽혀 있는 이번 사건에서는 결국 둘다 무죄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수사, 재판의 몇 가지 문제점
살인 피해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증거 중 하나가 바로 현장이다. 이 사건의 경우 현장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사건발생 직후 인근 소방서에서 119구급대가 도착해 중필씨를 후송했고, 파출소와 용산서 경찰관들이 사건현장에 출동했다. 용산서 경찰관들과 서울시경 감식반은 사진촬영과 지문채취를 하고 현장에서 담배꽁초 등 증거물을 수거했다.
사건 다음날인 4월4일 지휘를 맡은 박검사는 경찰에 『현장을 보존하고 대기하고 있을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 날 그와 이윤성 교수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말끔히 청소돼 있었다.
당시 햄버거가게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경찰관 등 20여명이 현장에 나와 감식 등을 하다가 새벽이 되면서 2, 3명만이 남아 현장을 지켰다. 그런데 새벽 5시경 한 경찰관이 어디에선가 전화를 받더니 「현장을 치워도 된다」고 해서 청소를 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 관계자에게 이 부분을 질문했으나 『정확히 어디에서 그런 지시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박검사는 『현장이 보존됐더라면 사진에 나오지 않은 미세한 핏자국이나 바닥의 혈흔, 족적 등에 대해 전문가의 좀더 정밀한 의견을 받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또 이 사건은 두 명의 피의자와 주요 증인들이 모두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수사 초기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대표적인 것은 통역문제. 박검사는 『수사를 처음 진행한 경찰에서는 전문통역인이 없어 의경에게 통역을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뒤 통역문제로 수사에 애로가 많았다』고 말했다. 리의 아버지 이씨는 『1심 재판과정에 통역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러 차례 항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대사관측에 통역문제와 관련해 『검찰이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하면서 리에게는 한국말을, 패터슨에게는 영어를 사용해 공정성을 잃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미 대사관이 1심 재판부 사무실에 그 사실을 지적하는 팩스를 보내 재판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미행정협정(SOFA)에 따라 우리 법원이 미국인 증인들을 마음대로 부를 수 없다는 문제점도 발생했다. 서울지법과 서울고법은 랜디를 증인으로 소환했으나 그는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사건 직후부터 패터슨이 검거될 때까지 그와 함께 있었던 핵심증인으로, 수사과정에서 여러번 진술을 번복했기 때문에 법원으로서는 꼭 불러야 했던 인물이었다.
검찰은 서울지법이 그를 소환했을 당시 그가 미국에 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리의 아버지 이씨는 『서울고법이 그를 소환할 당시 그는 한국에 있었다. 그러나 법원도 검찰도 그를 소환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주한미군 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의 김동심 간사는 『한국내 미국인들을 법원이나 수사기관이 부르는 것은 미국측 협조없이는 힘들다』며 『이런 일은 언제든지 또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심 이부장판사도 『가능한 한 많은 미국인 학생들을 증인으로 부르고 싶었으나 법원이 이들에게 직접 소환장을 보낼 수 없고 외무부나 검찰을 통해 미국측의 협조를 얻어야 했다. 바로 지척에 있는 증인도 마음대로 소환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실제로 미군 영내에는 한국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미군영내는 출입 허가증(Pass)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다. 설사 법원에서 집달관이 가더라도 출입이 통제되고 또한 미군영내 관계자들이 송달 의무를 무시하더라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중필이가 죽고 모든 희망도 끊어졌어요. 정말 하루하루가 말할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에미 가슴에 평생 못을 박는 아픔이지만 지금 이대로는 중필이를 보낼 수 없어요』
이런 과정들을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은 답답할 뿐이다. 아무 죄없는 중필씨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와 한 줌 재로 뿌려진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너무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어머니 이씨의 절규다.
피해자는 두 가족, 진실 꼭 밝혀져야
리가 살인범으로 기소돼 징역 20년을 선고받을 당시 가족들은 진실을 밝히려는 자신들의 고통이 이제야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가 지난해 9월 무죄로 풀려나오고 패터슨 역시 지난해 8월 사면돼 자유의 몸이 되면서 이들은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거리로 나선 가족들은 점점 「법조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씨는 『검사들이고 판사들이고 전부 무능한 사람 같아요. 아니면 무슨 비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라며 둘 중 하나인 범인도 밝혀내지 못하는 검찰과 법원을 원망했다.
중필씨 가족은 두 사람을 모두 공범으로 기소하지 않은 검찰을 원망하고 있으나 박검사는 『두 사람에게 윤리적으로 같은 비난을 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범행이 분명한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을 모두 기소하는 것은 검사로서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한다.
리와 패터슨이 모두 자유의 몸이 되자 가족들은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진상규명을 호소했다.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필씨의 매형 서씨는 『지난해 11월 서울지검에 패터슨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는데 직원들은 「고소장을 제출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며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필씨 가족은 또 국민고충처리위원회나 감사원 등에도 가서 호소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가족들은 이 사건에 관심을 보인 국회의원들에게도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입에 발린 말 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들은 지난해 11월 검찰에 대한 국정감사 때 한나라당의 한 의원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보좌관들로부터 『이 사건을 더 이상 진척시킬 생각은 없다』는 말을 듣고 물러서야 했다. 결국 검찰은 지난해말 몇몇 방송과 신문이 이 사건을 보도하자 마지못해 재수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것.
기자는 취재 마지막인 3월11일과 12일 각각 패터슨과 그의 아버지, 리와 그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들은 서로 『우리도 이 사건의 피해자』라고 말했다. 둘이 공범이 아니라면, 한 사람의 말은 진실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피해자는 두 가족이다.
이경수씨는 『검찰과 법원이 패터슨을 범인으로 지목한 CID 초동 수사자료를 잘 검토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믿지 않았으며, 박검사가 리가 범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패터슨의 변호인처럼 행동하는 등 편파적 수사를 했다』며 검찰과 1, 2심 법원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그는 『2년동안 아들의 누명을 벗기느라 사업이 망해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준 것이 마음아프다』는 말을 꼭 보도해달라고 했다.
반면 패터슨의 아버지는 『CID는 영장도 없이 우리 집과 사물함 등을 뒤졌으며 증거도 없이 패터슨을 「노르테14」갱단으로 몰고 범인인 것처럼 단정하는 등 고의적으로 패터슨을 범인으로 몰아세웠다』며 CID를 공격했다. 그는 「패터슨에게 갱 전력이 없다」는 내용으로 미국 경찰이 변호인을 통해 보내온 보고서를 꼭 인용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사건은 점점 잊혀져가고 있지만 가족만이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 이후 지금까지 PC통신의 게시판에는 「중필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글이 올라온다. 또 홍익대생들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 뒤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중이다. 둘 중 하나는 범인, 진범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아직 진행중이고 진실규명 여부는 검찰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 있다.
◆<표1>화장실에 가기 전 상황에 대한 관련자 진술(대법원 판결문 인용)
<리>
● 칼을 가지고 놀다가 누구에게 주었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경찰 1회)
● 제이슨에게 준 것 같다. (경찰 3회)
●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패터슨이 칼을 호주머니에 넣은 것 같다(검찰 1회)
● 칼을 만져보고 다른 친구에게 준 것 같은데 그 친구가 누구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패터슨이 칼을 호주머니에 넣는 것을 보았지요」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예」라고 대답(1심공판)
● 패터슨이 접혀진 칼을 펴면서 가자고 해서 장난으로 생각하고 같이 갔다(별다른 진술을 하지 않고 있다가 검찰 2회부터 진술)
<패터슨>
● 칼을 본 적이 없다. 피고인이 칼을 그의 주머니에서 꺼내기 전에 그 칼을 본 적이 없다, 만져본 적도 없다(CID 조사보고서)
● 리가 칼을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경찰 1회조사∼검찰 4회조사)
● 리가 화장실로 가자고 했다(CID 조사보고서)
● 리가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화장실로 따라오라고 했다(경찰 2회조사때부터)
<제이슨>
● 리가 칼을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리가 패터슨에게 뭔가 보여주겠다, 화장실로 따라 오라고 했다. 리가 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검찰 1회)
● 어떤 사람이 화장실 가는 것을 보고 조금 있다가 리와 패터슨이 화장실로 따라 가는 것을 보았고 그때 「뭔가 보여주겠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누가 그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같은날 리와 패터슨과의 대질신문)
● 리가 칼을 오른쪽주머니에 넣는 것을 본 적은 없고, 마지막으로 리가 갖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 같이 가자, 내가 너에게 뭔가를 보여주겠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등 뒤에서 이야기해 누가 했는지 모르겠다(1심법정)
◆<표2)화장실에서의 정황(대법원 판결문 인용)
<리>
●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기에 물을 틀어놓고 손을 씻으며 거울로 보니 패터슨이 피해자가 서 있는 소변기의 우측에 있는 대변기 출입문을 열어 들어가려고 하더니 다시 나와서 갑자기 피해자의 목을 2~3회 칼로 찔렀다. 그때 피의자가 돌아서서 패터슨과 마주보게 되었는데 그 후부터는 패터슨에게 가려 패터슨이 피해자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피해자가 패터슨에게 달려들려고 헛손질하는 것을 보았고 그러던 중 패터슨이 밖으로 나가 자신도 따라 나갔다.(경찰과 검찰에서)
● 패터슨이 피해자의 가슴과 목을 3~4번 찌르자 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피해자 앞에 있는 패터슨의 머리 얼굴 온몸에 피가 덮였지요 라는 변호인의 질문에 그렇다 라고 대답.(1심공판)
<패터슨>
● 이 사건 범행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아는 바도 없다고 하다가 이 사건 범행에 관여하였는데 리가 칼을 꺼내서 피해자의 몸통 윗부분을 몇 차례 찔렀고 피해자가 피를 몹시 흘리고 자신을 때리려고 하여 피해자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으며 피해자의 목에서 피가 솟아나 피를 덮어썼다(CID조사보고서)
● 리가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시지손가락 위로 칼날이 나오도록 움켜잡고 피해자의 등 뒤에서 목부위 등을 6∼9회 찔렀다(경찰1회)
● 리가 대변기문을 열어보고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다음 오른손 시지와 중지 사이로 칼날이 나오게 잡고 피해자 뒤에서 목부위 등을 몇 차례 찌른 다음 뒤돌아서는 피해자의 가슴부위를 3~4회 찌른 후 팔을 휘두르는 피해자의 반대편 목부위를 여러 차례 찌르고 칼을 화장실 한가운데 쪽에 버리고 밖으로 도망가버려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칼을 집어들고 나왔다.(경찰 3회)
● 피해자가 자신을 붙잡으려고 오른손으로 어깨 부분을 잡아 피해자를 밀었다.(검찰 1회)
● 피해자가 양손으로 목부위를 감싸쥐고 자신의 몸쪽으로 쏠리자 양손으로 피해자의 가슴을 밀었다.(1심공판)
● 화장실 안쪽의 피해자가 사용하지 않고 있던 나머지 소변기와 세면기 사이에 세면기 우측 모서리부분과 그 모서리 옆 벽면에 기대고 서서 범행을 목격했다.(1심 현장검증과 공판)
◆<표3>화장실과 두 사람의 옷에 묻은 핏자국에 대한 판단
<서울 고법>
● 옷에 묻은 핏자국에 대해
피해자를 밀치는 과정에 피를 뒤집어 썼다는 패터슨의 진술은 그가 리보다 많은 피를 뒤집어쓴 경위에 관해 설명이 가능하다.
● 좌측 목에서 나오는 피는 그 양이 너무 많아 먼 곳까지 분출되기는 어렵기 때문에 피해자와 직접 접촉하거나 매우 근접한 거리에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되며, 리의 진술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패터슨이 피해자의 좌측 목에 치명상을 가한 후 피를 뒤집어 쓸 정도의 신체 접촉이 있었거나 매우 근접한 거리에 있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리가 세면기 거울을 통해 패터슨이 오른쪽 목을 찌르는 것을 보았고 그후 몸을 돌리고 뒤로 약간 물러나 패터슨의 뒤에 서서 이후 상황을 목격한 것이라면 피해자의 몸에서 분출된 피가 직접 리의 상의에 묻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세면기에 묻은 핏자국에 대해
좌측 목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다량의 피가 세면기 우측 모서리에 집중적으로 묻어 있는데 패터슨의 진술과 같이 피해자가 세면기 옆에 서 있던 패터슨 쪽으로 넘어와 좌측 목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울컥 나오면서 묻을 수 있고 이는 패터슨이 밀치자 피해자가 왼쪽으로 쏠리면서 소변기 좌측의 모서리에 쓰러졌다는 진술과도 부합하는 일인 반면, 리의 진술만으로는 세면기에 집중적으로 묻은 피와 피해자의 최종위치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대법원>
●옷에 묻은 핏자국에 대해
리의 상의 핏자국은 스프레이로 뿌린 듯 하다는 것이므로 피해자의 오른쪽 목 상처에서 나오면서 생긴 핏자국이라고 볼 수 있고 리나 패터슨이나 피해자가 오른쪽 목을 가격당한 뒤 몸을 180° 돌려 가격한 사람과 마주보게 되었다는 것이므로 리가 세면기 앞에 서있었을 경우도 그같은 핏자국이 생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면기에 묻은 핏자국에 대해
이 핏자국은 멀리서 뿜어져 생긴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쏟아져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고, 이윤성의 증언에 의하면 이는 피해자가 가격을 당한 후 나가다 넘어지면서 묻을 수도 있고…리가 세면기 앞에 있고 패터슨이 소변기 쪽에 서 있으면 피해자가 가격을 당하는 도중에 또는 후에 세면기 우측으로 가 핏자국을 묻히는 데 별다른 장애가 없다. 그러나 패터슨이 세면기 우측 모서리와 그 모서리 옆 벽에 기대 서서 범행을 목격했다면 피해자가 패터슨이 가리고 있는 세면기 우측 모서리에 접근해 많은 핏자국을 남길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이고, 또 피해자는 9차례나 가격당해 매우 짧은 시간에 사망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데 패터슨이 밀치고 나간 후 다시 세면기 쪽으로 접근해 핏자국을 남기고 다시 벽 모서리쪽으로 넘어졌을 것으로 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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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년 4월3일 밤11시경 이태원의 한 패스트푸드점 화장실에서 대학생 조아무개가 영문도 모른 채 잭나이프에 9군데를 찔려 사망했다.
살인현장에 있던 용의자는 두 명. 둘 중 분명히 범인이 있는데 이들은 수사 때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이 살인자라고 주장했고 법원조차 한 사람에게는 무죄를, 또 한사람은 기소중지로 미국출국 후 법원 출두에 응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17일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97년 4월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에서 미국인에 의해 살해된 조아무개(당시 22세)의 사건 처리과정에서 검사의 과실이 인정된다며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사건 발생 후 유죄였던 용의자가 무죄가 되고 또 다른 용의자는 미국 출국 후 법원출두에 응하지 않아 더 이상 재조사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유족들은 “검사가 용의자의 출국금지기간을 연장하지 않아 용의자가 미국으로 출국, 진실을 규명할 기회를 놓쳤다”며 국가를 상대로 지난 2001년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1, 2심 판결에서는 “검사의 잘못은 인정되나 수사가 종결되지 않았다”며 원고패소 판결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법원이 유가족들의 손을 들어줬고 이번에 유족들에게 각 1천5백만 원과 1백만 원씩을 지급하라는 대법원의 최종 배상 판결이 내린 것.
이에 대해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고유경 사무국장은 “이번 판결은 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유족들의 주장 중 한가지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며 “피해사건에 대한 배상이 아니란 점에서 검사의 과실을 인정한 판결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죽음을 당한 조아무개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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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9년 홍익대학교에서 열린 2주년 추모식. ©사진/고인의 추모사이트(http://joongpil.new21.net)중 |
재미로 사람을 죽였다?
사건은 지난 97년 4월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오후 3시경 여자친구 김아무개(당시 22세)와 국기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 조아무개는 저녁때 생맥주를 간단히 마시고 밤 10시 무렵 김아무개를 데려다 주기 위해 이태원으로 갔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던 조아무개는 이태원 근처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고 여자친구가 음료수를 사는 사이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나 조아무개는 화장실에서 두 명의 용의자 미군속자녀 아더 페터슨(당시 18세, 이하 페터슨)과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당시 18세, 이하 리)중 누군가에게 오른쪽 목 3군데, 왼쪽 목부위 4군데, 가슴 부위 2군데 등 9군데를 휴대용 칼(일명 재크나이프)로 찔려 숨을 거뒀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사건 직후 페터슨은 1층 화장실에서 친구들이 모여있던 4층 화장실로 올라가서 피가 묻은 얼굴과 손을 씻고 미8군내 52번 게이트 출입문으로 들어가 바지를 바꿔 입고 범행에 사용된 칼을 하수구에 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피묻은 옷과 신발은 드레곤호텔 보관함에 숨겨두었고 다음날 CID(미육군범죄수사대) 수사요원에게 붙잡혔다.
또 다른 용의자 리는 친구 신디아를 만나 “페터슨이 사람을 찔렀다”고 말한 후 집으로 돌아가 피묻은 옷을 벗어놓고 잤다. 다음날 새벽 페터슨이 살해사건으로 TV에 난 것을 본 리의 아버지가 깨워서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검찰에 자수했다.
이때부터 이들의 엇갈린 주장이 시작된다. 둘은 서로 범행을 부인하며 상대방이 조아무개를 죽였다고 주장했고 검찰은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 부검의 소견을 결정적 증거로 삼아 6번의 심리를 거친 끝에 리에게는 살인죄 혐의로 무기징역을, 페터슨은 증거 인멸에 따른 폭력죄 등으로 기소돼 징역 장기 1년6월, 단기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98년 페터슨은 복역 중 8.15특사로 사면됐고 리는 항소심에서 징역 20년까지 감형됐다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대법원까지 간 끝에 99년 9월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분명히 범행현장에서 피해자가 사망했는데도 범인이 포함된 용의자 2명 중 누구의 범행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채 용의자 둘 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검찰 ‘재수사 의지’절실
법원의 무죄판결 후 유족들은 리가 아닌 페터슨을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하고 ‘살인죄’로 고소, 재수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검찰 측에서는 “재수사를 하겠다”는 말만 한 채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신병확보조차 않다가 출국금지기간을 연장하지 않아 출금조치가 풀린 다음날 페터슨은 김포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출국하고 말았다.
이후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검찰은 미 법무부에 페터슨의 살인 혐의에 대해 미국에서 조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사법 공조요청서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 측으로부터는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했고 검찰은 2002년 10월 페터슨에 대해 기소중지결정을 내렸다.
유가족 측에 따르면 “처음엔 검찰에서 고소장을 받아주지 않으려고 했다”며 “고소장을 제출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사연이 보도돼 여론화가 형성되자 부랴부랴 고소장을 접수받았다. 그러나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고 두 명의 범인 중 한 명의 진범도 가리지 못한 채 사실상 수사가 종결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유족들은 99년 12월24일 담당검사를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했고 2000년 8월 리와 페터슨을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검찰의 수사 소홀에 책임을 물어 국가를 상대로 1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그러나 담당검사에 대한 고소건은 무혐의 결정 통고를 받았고 국가배상 신청은 기각되는 등 항소심에서까지 과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지난해 9월에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고 지난 17일 “유족들에게 1천5백만 원을 지급하라”는 확정판결을 받았다.
결국 아무런 이유 없이 살해당한 조아무개 사건은
▲초동수사 당시 다음날 영업을 계속할 정도로 현장이 보존되지 않고 말끔히 치워진 점
▲통역문제 등으로 원활한 수사가 이뤄지지 못한 점
▲페터슨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는 친구 등 중요 참고인의 소환이 이뤄지지 않은 점
▲검찰이 기소 당시 공범이 아닌 단독범행으로 섣불리 결론 내린 점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더 이상 수사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 사건일지 =
* 아더 페터슨
97년 4월26일 증거인멸 등 혐의 구속기소
98년 1월 증거인멸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징역 장기 1년6월 단기 1년형 선고
98년 8.15 특별사면 석방
98년 11월9일 피해자가족 ‘살인죄’고소
* 에드워드 리
97년 4월26일 살인혐의 구속기소
98년 1월 20년형 선고
98년 4월 대법원 파기환송(무죄 취지)
98년 9월30일 무죄 판결 석방
99년 9월3일 상고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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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가족, 억울함 넘어 허탈
“억울한 죽음 후 하루도 편한 날 없었다”
조아무개의 죽음 후 가족들의 삶은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어머니 이아무개는 아들을 죽였을 용의자 두 명이 석방된 날부터 하루도 집에서 편히 쉬어본 적이 없다고.
신촌 등 서울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진상규명을 호소하는 서명을 받았고 매형 서아무개는 다니던 건설회사마저 그만두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그뿐이었다.
용의자마저 모두 석방시켜버린 검찰은 재 수사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몇 년이 지나도록 수사에 진전이 없어 사실상 수사는 종결된 상황이고 지난 17일 대법원의 배상판결을 받았지만 그것조차 사건에 대한 피해보상이 아니라 검찰 과실에 대한 일부 보상일 뿐 진실이 아니기에 판결에만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피해자의 매형 서아무개는 “그나마 법원 판결을 받았다는 자체에 의미를 두자면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진실이 밝혀진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며 “범인을 잡기 위해 해볼 수 있는 건 모두 했지만 허사였다”고 허탈해 했다.
특히 아직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지만 검찰의 수사 재개 의지가 불투명한 상태라서 이렇게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종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속에 자포자기 심정을 나타냈다.
어머니 이아무개 역시 “자식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살아가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아느냐”며 “칼로 무참히 찔려 살해당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아들을 생각할 때 아직도 가슴에 한이 맺힌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아직도 아들이 살아있어 학교를 마치고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사람을 죽이고도 오히려 살인자들은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데 이 나라의 법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분함을 전했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고유경 사무국장은 “긴 세월동안 진범을 밝히기 위한 유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는 검찰의 적극적인 재수사 의지가 진범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며 오는 4월3일 ‘기일’을 맞기 전 검찰의 움직임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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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관점, 각기 다른 용의자 지목
△ CID(미육군 범죄수사대)…아더 페터슨 지목
사건발생 다음날 “페터슨이 사람을 죽였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은 CID는 페터슨을 검거해 조사를 벌였고 그가 하수구에 버린 칼과 피묻은 옷 등을 찾아냈다.
CID는 수사과정에서 페터슨의 손에 새긴 3개의 점 문신모양과 특유한 말투를 통해 그가 LA의 히스패닉계 갱단 ‘노르테14’소속이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페터슨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했다.
특히 상대를 급습한 뒤 순식간에 목이나 가슴, 배 등을 흉기로 가격하는 ‘노르테14’의 범행수법이 조아무개 살해방법과 동일하다는 점과 페터슨이 사건 발생을 전후해 대마초와 LSD를 복용했다는 자백도 함께 얻어냈다.
법의학자 데이비드 특별수사관 역시 몸에 피묻은 형태를 기초로 페터슨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 검찰…에드워드 리 지목
검찰은 CID의 수사보고서에도 불구하고 페터슨의 진술에 보다 신빙성을 두고 범인으로 리를 지목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부검을 맡았던 이윤성 교수(서울대 의대)가 “상대는 피해자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 정신이상자이거나 환각상태에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부검소견에 무게를 두었다. 리는 180cm에 몸무게가 105kg이고 페터슨은 172cm에 63kg였다. 피해자 조아무개의 키는 176cm.
리에게만 거짓반응이 나온 거짓말 탐지기의 테스트 결과도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변호사 측은 “용의자 둘 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해왔는데 검찰이 페터슨에게는 영어로, 리에게는 한국어로 질문해 결과를 얻어내 신빙성이 적다”고 반박했다.
또한 ‘환각상태’의 도핑테스트 결과 둘 다 음성반응이 나와 페터슨의 마약복용 진술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의하면 대마초나 LSD는 복용한지 3∼4일이 지나면 양성반응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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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윤성교수! 당신이 목에 칼침을 직접 맞아봐야 덩치와 상관없다는 것을 알것 같군. 오줌누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칼에 연거푸 찔리는데 무슨 덩치와 관계있냐? 그리고 양놈들은 키가 작아도 키높이 구두신느다는 것 모르냐, 븅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