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14년 12월 5일 금요일
●일정: 타이페이→ 기차(자강호, 2.5h)→ 화련 도착→ 타이루거 협곡 관광[1. 장춘사 2. 연자구 3. 자모정]→
아미족 민속공연→ 타이페이 귀환→ 호텔투숙
[기차역으로 가는 길]
오늘은 기차를 타기에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야 하는데 오늘 따라 한 팀의 일행이 나타나지 않아 가이드도
찾아 나섰고 우리는 차 안에서 영문을 모르고 기다리는데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차는 탈 수 있을지 걱정이 될 무렵 몇 명의 늙은 아낙네들이 헐래 벌떡거리고 나타나 미안하다고 했으나
시간을 지키라는 말에는 화난 수탉 같이 달려들려고 했는데 정말 경상도 기질을 잘 나타냈다.
우리도 늙었지만 저렇게 늙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가이드가 뭐라고 해도 아무소리도 못했는데
차가 막힐 때마다 기차를 노칠 것 같아 마음 조렸지만 그들은 이런 것을 알기나 할런지...
먼저 대만의 지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위에 기록했으며, 가이드는 오늘이 3일 째인데 한 이틀만 지나면
나오는 질문인데 아무도 묻지 않아 이야기 한다면서 일명 대만 껌에 대한 애기를 했다.
(빈랑(檳榔, betel nut)과 빈랑 걸 이야기)
대만에 오면 낮에도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런 것을 적이 없었는데 그곳이 빈랑을
파는 가게의 표시라고 했으며, 빈랑은 동남아에서 생산되는 약제라고 한다.
원주민들이 칡처럼 씹는 이것은 아레이카(Areca)라는 야자나무의 일종으로 열매로 오늘 가는 곳에서 많이 볼 수
있다고 했으며, 빈랑은 천상의 열매라고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높은 산에 사는 원주민은 추위를 잊으려고 혈액순환을 돕는 빈랑을 많이 씹는다고 했으며, 빈랑은 열매만으로는
효과를 얻기가 어려워 양념 즙을 넣어 가공한다고 했다.
부추 잎에다 석회가루를 살짝 깔고, 열매를 쪼개 넣고 이것을 말아서 입에 넣고 씹으면 석회와 빈랑 열매즙과
부추가 상호작용하여 각성효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피곤해서 졸음이 올 때 잠을 깨우는 각성효과 때문에 운전기사들이 많이 이용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여 가계가 많다고 했으며, 특이 고속도로 입구 쪽 도로에 많다고 했다.
<빈랑 가게>
지금은 많이 사라진 원주민의 모계사회는 남성이 여성을 떠받들고 사는 사회로 모든 결정권이 여자에게 있다고
했으며, 결혼도 여성이 남성에게 포로포즈 할 때 혈액순환 제 빈랑 열매를 입에 넣어준다고 한다.
결혼을 허락하면 열매를 씹으면 되고, 싫으면 뱉으면 된다고 했으며, 빈랑을 구강 건강에는 최악으로 많이 씹은
사람은 치아가 검게 변색되고 더 악화되면 아예 치아가 없다고 하다.
그러기에 절대로 씹지 말라고 했는데 각성뿐 아니라 열이 확 오른다고 했으며, 주 고객층이 남자들이라 아주
날씬한 여성(빈랑 걸)이 가릴 것만 간신히 가리고 판다고 했다.
여름철에는 길거리에 나와 있어 볼 수가 있었지만 지금 겨울에는 옷을 입고 있거나 실내에 있어 보기 힘 드는데
고속도로 들어갈 때 가계 안에서 초록색 비키니를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게는 가이드가 말한 것처럼 많지는 안았으며, 대부분 고속도로 입구나 사람이 많이 지나가는 곳에 힘들게
찾을 수가 있었지만 사진에 담으려고 사진기를 꺼내면 이미 지나가 버려 어려웠다.
밤이면 네온사인 때문에 찾기 쉬울 것이지만 낮이라 네온사인도 보이지도 안했고, 커진 곳도 없어서 겨우
하나만 성공했으나 그것도 행운이라 생각했다.
참고로 빈랑은 동남아에서 많이 씹지만 특히 많이 씹는 나라는 대만과 스리랑카가 있는데 스리랑카 제조법은
비텔(betel) 잎에 아레이카 열매를 쪼개 넣고, 석회가루까지 넣는 것은 대만과 동일하다.
그러나 스리랑카 하나를 더 넣어 씹는데 그것은 담배 잎을 썰어 넣는 것이며, 이것을 씹다가 가끔은 뱉어 내기도
하는데 피 색깔이어서 매우 혐오스러워 법으로 금지시켰으면 좋겠다.
빈랑은 중독성 때문에 암에 걸려 죽은 사람도 있는데 대만의 쇼핑센터에서는 반입금지 하는 곳도 있다.
가이드의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일행 중에 한분이 가이드의 양해를 얻어 남은 시간동안에 인사도 하지 않고
여행을 했으나 늦었지만 각자의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으며, 대단한 한국을 주제로 강연도 했다.
<하리산빈랑 가게와 네온사인>
[기차를 타고]
다행히 딱 맞게 9시에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 신성(태로각) 역까지 2시간 40분 동안 가면서 우리 칸에는 우리
일행뿐이었고, 어제 산 홍화용과(红火龍果)는 이름과 잘 맞는 다는 생각을 했다.
용과는 검은 깨가 섞인 흰 속살은 무르고 단맛이 강해 먹기도 좋지만 맛도 있었고, 아침에 먹은 과일이 남미에서
먹은 것과 같이 생겨서 가이드에게 이름을 물어 보았는데 백가지 향이 있다고 해서 백향과(百香果)라고 했다.
호텔 식사 때마다 바닥이 나 먹기가 동작 빠르지 않으면 얻어먹기 힘들 정도였고, 남아 있던 대만새우깡과
깨강정을 먹는 재미도 있었으나 주위 경치는 크게 볼 것이 없었다.
다만 앞에 앉아 여행하던 젊은 한 쌍은 애정표현이 부끄러울 정도로 진했는데 대만의 애정표현을 이 정도로 해도
괜찮은 곳이라는 것을 짐작케 했으며, 우리도 내릴 때 그들도 함께 내렸다.
<홍화용과의 들어낸 속살과 배 짼 배향과>
[화련에 대한 이야기]
식당으로 향하면서 화롄(화련, 花蓮)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대만의 22개 현 중에 가장 면적은 넓지만 인구는
가장 적은 34만 7천 명이 살고 있어 그 만큼 적게 개발되어 공기 오염도가 가장 낮은 곳이라 한다.
대만에서 많이 보는 대리석들이 동쪽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하고, 화련 지명의 어원에 대한 것은 2개가
있다고 하며, 그 첫 번째는 대만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난류인 쿠로시오 해류가 있다고 한다.
동쪽 산악지형에 많은 비가 오는데 검은 색의 흙탕물이 대량으로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해류와 만나 회돌이를
치게 되어 한국의 안동의 하회(下回) 마을 같이 돌아올 회(回)자와 물결 랑(浪)자가 대만 발음으로
화롄이라고 한다
화롄을 대만 정부가 강제로 표준어를 만들면서 꽃 화(花)에 연밥 련(蓮)을 사용해서 화련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지금은 없어 졌으나 동부의 산악지역에 사는 원주민 얼굴에 그려져 있는 문신 때문에 생긴 것으로
그림 화(畫) 자에 뺨 도(못 찾음) 자도 대만 발음으로 화련이라고 한다.
<화련의 태로각 역>
<태로각 협곡>
대만에서 태풍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지역이 화련이기에 농토가 별로 없다고 했으며, 이 태풍은 높은 산맥에
부딪치면 세력이 급격히 약화 되면서 많은 비를 뿌린다고 한다.
그리고 태평양판이 대륙판을 밀어붙여 본토 쪽으로 1년에 2,5cm 이동하며, 지진도 가장 많은 지역인데 이곳
특산물은 한국의 강원도 같이 돌이 많이 나기에 여기 사람들을 ‘석두’라고 부른다고 한다.
머리가 나빠서 ‘돌대가리(石頭)’가 아니라고 했으며, 먼저 미륜대반점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대만의 14부족
중 아미족민속공연을 본다고 했는데 태로각 주변 산에 사는 원주민을 태로각 부족이라고 했다.
아미족은 태양을 뜻한다고 하고, 대표적인 색깔은 붉은 색이라고 하며, 모계사회의 남자들은 힘쓰는 일만 하는데
밤낮으로 힘을 잘 써야 하고, 사냥이나 집짓는 일을 한다고 한다.
1983년 ‘태로각국가공원(太魯閣國家公園)’으로 지정되었고, 이름의 어원은 다이얄 족의 전설적인 추장 타로코의
왔으며, 태로각은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고, 대만어로는 ‘타이루거’라고 한다.
원주민은 ‘타이로’라고 하며, 민속공연을 본을 본 후 옥 공예품을 전시한 곳에 들른다고 한다.
<미륜대반점 주위와 옥공예 전시장>
[아미족 민속공연 관광과 옥공예 전시장]
점심을 먹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바쁘게 달려갔으나 빈자리가 많은 것도 고민하게 만들었으며, 기다림 없이
바로 시작했는데 한 번 공연에 나오는 사람이 10명도 안 되는 소규모였다.
가무에 능한 아미족 원주민들이 신을 위하여 농사와 수렵, 축제, 결혼 등의 테마로 50분 정도 남도문화극장에서
공연하며, 마지막 결혼 공연은 관람객도 참여했으나 우리는 일찍 나왔다.
<아미족 공연 동영상>
옛날 김찬삼 여행기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복장을 입은 원주민 처녀가 부모를 지게에 지고 이동하던 모습을
보았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데 이들을 직접 보게 되어 감회가 컸다.
밖에 나왔을 때 과일파는 차가 있었으며, 맛있다고 한 석가가 보였는데 가격도 2개에 100NT 이라 무척 싸다는
생각이 들어 맛만 보려고 2개만 샀는데 먹을 수가 없어 버렸다.
<관람객과 함께한 아미족의 결혼식 관경>
광륭기업(光隆企業)이라는 대만에서 제일 큰 대리석 공장의 공예작품을 구경했는데 공예품 관람실로 들어가기
전 대만에서 제일 크다는 푸른색이 나는 옥 원석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을 들었다.
정말로 돌이라는 것이 믿기 힘들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옥공예 품들을 구경하고 차에 올라 정각 오후 2시에
태로각 협곡으로 향하면서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었다.
<1. 대만에서 제일 큰 옥 원석, 큰 사진은 아름다운 옥 공예품들>
[타이루거 협곡으로 가면서]
태로각 협곡을 지나 가는 동서횡단도로 8번 국도는 1960년에 개통했는데 이 대 공사를 한 이유는 3가지로
그 첫번째는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건너 올 때 같이 온 사람들이 200만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 중에 절반이 군인들로 국민당은 이들에게 바로 본토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으나 점점 고향으로 돌아 갈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면서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 동요를 막기 위해 전에 없던 일을 계획했다고 한다.
2번째 이유는 대만의 동서 길이 중에 가장 넓은 부분이 약 140km 인데다 교통이 불편하여 물자 수송도 어렵고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통제가 원활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3번째 이유는 중국 공산당이 대만의 서쪽을 공격하면 동쪽으로 도망갈 길이 없기에 퇴로의 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하루에 5~6 천 명씩 동원해서 협곡을 따라 191km 정도의 길을 뚫었다고 한다.
공사인부들은 강제성을 가지고 동원했는데 본토에서 같이 온 패잔병과 범죄자 그리고 길을 잘 아는 원주민을
동원해서 동과 서의 양쪽에서 시작하여 중간에서 만났다고 한다.
당시 장비가 넉넉지 못해 큰 것은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으나 험한 곳은 사람이 먼저 산에 올라가 밧줄을 내리면
그 밧줄에 매달려 정을 사용해서 길을 뚫었다고 할 만큼 험난한 공사였다 한다.
<도로공사 당시의 사진>
10년을 예상했던 공사는 212명의 사망자와 700여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3년 9개월 만에 끝냈다고 했는데 1956년
7월 시작해서 1960년 5월에 끝냈다면 가이드 말이 맞고, 인터넷의 4년 6개월은 틀린다.
현재 사업용으로 기능을 상실한 것은 동서를 관통하는데 버스가 7시간 걸리기 때문이라고 했고, 지금은
관광용으로 쓰이며, 가다보면 길은 좁아지고, 산은 해발 3,000m 넘는다고 한다.
<도로공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이 된다.>
공사가 험해서 산에 올라간 사람은 짐승한테 당했으며, 지진과 사고로 죽은 사람을 모신 곳이 장춘사로 우리가
갈 첫 번째 장소인데 장춘사(長春祠)는 절 사(寺) 자가 아니고 사당 사(祠)자라고 한다.
1958년 같은 해에 장춘사와 같이 건축한 선광사(禪光寺)는 대만에 도입된 미터(m)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던 최초의
기념비적인 절로 그 위에 있는 건물은 선광사 종이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선광사와 장춘사의 위치>
[장춘사(長春祠) 관람]
30분 정도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보았던 곳인데 이곳은 공사 때 죽은 인부들의 영령을 위해
만든 장춘사로 흩어지기 전 가이드의 구호에 따라 일행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협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비록 작지만 리우 강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고, 당시 공사 중인
사진도 보면서 공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리우 강 위에 놓인 붉은 다리는 장춘교(長春橋)로 이 다리를 건너 장춘사까지 가는 길은 급경사이어서 길을 낼 수
없는 곳은 바위를 뚫어 길을 냈으며, 바위 뚫는 기술은 중국에서 보아서 알고 있지만 이곳에서도 발휘했다.
장춘사를 품고 있는 산은 얼마나 경사가 심한지 거의 직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산을 쳐다보니 산이 내게로
넘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이런 산도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경사가 심한 산은 처음 보았기에 장춘사보다 더 기억에 남았는데 생각보다 현지 사람들이 많이 왔다.
<1. 장춘교 2. 장춘사>
장춘사 건물 아래로 흐르는 물은 여러 갈래의 작은 폭포를 이루어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냈지만 희생자들의
원한에 맺힌 눈물 같이 느껴졌고, 사당 안에는 위패 앞에 초불 대신 전등이 켜있고, 향료와 몇 가지 가구만 있다.
돌아오는 길에 '아미타불' 줄인 ‘미타’라는 이름을 가진 미타암(彌陀巖)이 있고, 동굴 안에는 3개의 불상이 있다.
그 앞에는 강 쪽으로 뻗은 전망대는 강 위와 아래의 경치와 주위를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강 아래는
우리가 차를 건너던 다리도 보였고, 강 주위 협곡은 보기는 괜찮았으나 감탄할 정도는 아니다.
<3. 장춘교 사당 4. 미타암>
[자모교(慈母橋)에 대한 이야기]
이제는 차를 타고 상류로 올라가면서 자모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터넷에서 몇 개를 보았으나 가이드
이야기가 가장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이드 이야기만 기록한다.
이 다리 부근에는 공사 중인 인부들의 면회소가 있었는데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장경국씨가 이곳에 왔다가
면회소에 찾아 온 어머니들을 보면서 그도 옛날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고 한다.
어머니 모복매(毛福梅)는 1939년 항일전쟁 때 일본의 폭격으로 집 더미에 깔려 사망하자 울분에 찬 장경국은
집 앞에 ‘피로 피를 씻는다(이혈세혈, 以血洗血)’라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비석까지 세워가며 어머니의 복수를 다짐했던 그는 어머니에 그리움이 극진했던 사람이었으며, 그는
사랑 자(慈)와 어미 모(母) 자를 넣어 다리의 이름을 자모교(慈母橋)라로 했다고 한다.
주위에는 대리석이 하도 많아서 다리도 대리석으로 치장을 했다고 하며, 다리 옆에는 면회 온 사람들이 햇빛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바위 위에 지은 것이 자모정(慈母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두꺼비가 왕관을 쓴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했지만 찾아보지 못했는데 그 작은 자모정 앞에는 원주민이
사는 산골마을로 들어가는 출렁다리(서스펜스)가 있다고 하며, 오늘 그 다리까지 건너본다고 한다.
<자모교와 자모정>
태로각 협곡은 말이 필요하지 않는 곳으로 눈으로 감상하면 이 작은 나라에 이런 웅장한 경치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며,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양의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우리에게 동의를 구했으나 가보지를 못해서 대답을 안 하는지 몰라도
비교할 곳이 따로 있지 감히 어디다 비교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 대답을 안 했다.
가이드도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했는지 몰라도 길이 만해도 대만 전체 폭의 3.2배가 되는 약 450㎞이며, 폭은
0.2~29㎞인 그랜드 캐니언의 한 계곡에도 미치지 못하는 태로각을 비교하는 것은 좀 무리이다.
태로각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오기 전 태로각을 그랜드 캐니언에 비교해서 조금 기대를 했는데
기대에 비해 너무 실망했기에 기대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리우 강과 대만의 그랜드 캐니언>
이곳은 1999년 규모 7.3의 지진으로 무너진 것이 지금도 수시로 무너진다고 했으며, 2012년 10월 크게 무너진
것을 지금도 보수중이였으며, 지금도 낙석이 떨어져 위험한 지역이라고 한다.
우리는 위험한 지역에서는 하차를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늘 출발을 늦게 한 팀이 미안하다는 인사와 함께
바나나를 주었는데 익지 않아서 들고 다니다가 내버렸다.
조금 더 가면 댐이 보였는데 이곳은 일본사람이 만들었다는 발전소로 중국말로는 시판 발전소이고, 한국말로는
개판발전소라고 해서 웃었지만 유머인지 실제 이름인지 헷갈린다.
<개판발전소와 댐>
지금 발전은 하지 않고 물만 가두어 놓았는데 석회석 때문인지 물이 회색이었고, 다른 팀들은 안전모를 쓰고
걸었던 연자구(燕子沟)를 우리는 위험하다는 핑계로 내리지 않았는데 장춘사에서 약 7km 지점에 있다.
현재는 한 마리의 제비도 없다고 하지만 제비가 사는 동굴들이 많다고 해서 연자구로 불리는 이곳은 태로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는데 이제가면 또 올 수 없는 곳을 보지 못해 서운했다.
1983년 국립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전에 없었던 가이드레일을 설치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나 안전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했으며, 약 18km 정도를 관람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자모교에 도착해서 가이드가 일행의 단체 사진을 찍어주었고, 서스펜스 다리로 향하면서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산에서 온 사람이 있었지만 먼저 말문은 열개한 것은 딸과 같이 온 어머니이다.
이것이 이번 여행에서 다른 팀과 나눈 첫 대화였지만 비행기를 제일 늦게까지 타면서 이야기가 이어질 줄은
짐작도 못한 일이었으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자모정 앞의 흔들다리>
(원주민이 기독교를 믿게 된 동기)
이제는 일정에 있는 것을 다 보았으니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으나 더 상류로 향했는데 가면서 들은 이야기는
중국의 복건(푸젠)성 사람들이 대만에 와서 개간할 때 한족과 원주민은 전쟁을 할 만큼 갈들이 심했다고 한다.
이 때 원주민에게 신망이 두텁고 존경을 받던 네덜란드 선교사가 한족과 원주민 사이에 중재역할을 했을
그때까지도 원주민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았지만 원주민이 기독교를 믿게 된 동기가 있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1년에 한 번 조상께 풍년을 기원하는 대제사를 드릴 때 쓴 재물은 다름 아닌 사람을 죽인 머리였다고
하며, 선교사는 이 풍습을 없애기 위해 원로들을 모아 놓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재물을 다른 것으로 바꾸도록 권유했지만 아무리 존경하는 선교사의 이야기이라도 수천 년간의 풍습을
바꿀 수는 없다고 원로들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럼 제가 지정하는 사람을 잡아 재물로 쓰면 조상들이 매우 좋아할 거라고 건의 했고, 원로들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했으며, 선교사가 지명한 날짜를 알려 주었다.
그날 동구 밖에 빨간 모자와 빨간 옷을 입고 가는 사람을 확인하지 말고 목을 처서 재물로 사용해라고 했고,
그들은 선교사 말대로 그 사람의 목을 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존경하던 선교사 자신이었기에 원주민은 큰 후회와 더불어 큰 감명도 받아서 원주민들은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기독인구가 90%가 넘는 것은 그 분의 순교 때문이라고 한다.
(원주민의 모계사회와 얼굴문신을 하게 된 이유)
아주 옛날 대만에 아무도 살지 않았을 때 구전(口傳) 된 이야기로 대만 학자들은 대만의 원주민을 대만 바로
밑에는 필리핀이나 주위에는 있는 오키나와 인도네시아의 원주민과 같은 혈통이라고 한다.
이원주민을 ‘미크로네시아(Micronesia)’라고 했는데 참고로 '작다'는 뜻인 ‘마이크로네시아’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폴리네시아(Polynesia, 많다는 뜻)와 멜라네시아(Melanesia, 검다는 뜻)의 혼합 요소를 가지고 있다.
네시아(nesia)는 섬이라는 뜻이고, 멜라닌(melanin)은 동물에 있는 갈색이나 흑색의 색소를 말하며, 많을수록 검게
되는데 미크로네시아는 우리 초등시절에 배웠던 말레이 인종이다.
<태평양의 섬들>
다시 가이드 이야기로 돌아오면 대만 원주민은 키가 작고 아담한데 가마득한 옛날 필리핀의 작은 어촌에
전염병이 돌아서 마을 사람들이 전멸되다시피 했을 때 어린 누나하고 남동생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누이는 살기 위해 동네를 벗어나려고 나무로 엮어 만든 뗏목을 타고 나섰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타고 도착한 곳이 대만이라고 하며, 사람이 없는 대만에서 남매는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누이는 자손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해서 얻은 결론은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으며, 누이 말에 복종하던
남동생에게 어느 날 어느 동굴에 가면 여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혹시 내가 없더라도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 색시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으로라고 해 놓고 누이는 산으로
나물한다고 들어갔으며, 그 날이 되어 동생은 동굴에 갔다고 한다.
동굴에 도착한 동생은 동굴에 앉아 있는 여인의 뒤 모습은 많이 본 모습이지만 문신해서 붓은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어서 그 여인을 데려다 아내로 맞아 살면서 1주일 정도가 지나 붓기 빠진 얼굴은 누님이었다.
그러지만 어찌하라! 남동생은 누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며 살았으며, 그때부터 모계사회가 되었고, 여인들은
얼굴에 문신을 하는 이유이고, 근친사회이었으나 지금은 네덜란드, 한족, 일본 등의 혼혈들이 많다고 한다.
<화련의 어원과 모계사회가 된 얼굴 문신>
[태로각 휴게소]
원주민들이 운영한다는 휴게소에 들렸으며, 산 중이라서 그런지 좀 추워서 찬 음료는 시키지 못하고 이름은
잊어지만 따뜻한 음료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고 시간도 많이 거렸는데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차외에 간식수준에 해당하는 찰밥을 나무 잎에 싸서 주었는데 시간도 없지 차도 마셔야지 남들은 내 버렸지만
음식 버리는 것을 죄로 배운 우리에겐 버리는 갓이 쉽지 않아 억지로 먹었다.
휴게소에 파는 물건은 원주민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살만한 것은 없었고, 구경만 했으며, 이로써 태로각 관광을
마치고 저녁 먹을 태평양 반점으로 향했는데 반점 주위의 과일가게들이 한글로 적어 놓은 것도 보였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면 한글로 적었을 가 생각했는데 저녁 먹는 식탁에는 우리가 먹던 것과 같은 맛을
지닌 김치가 나와서 다시 한 번 한국 관광객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했다.
많은 팀들은 이곳 바닷가도 갔지만 우리는 다시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로 돌아와 오늘도 늦게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낼 타우 가든으로 향했는데 이 호텔 위치가 궁금했다.
<태평양 반점 앞의 과일가게>
[4일] 14년 12월 6일 토요일
●일정: 타이페이 관광[1. 고궁박물관 2. 충렬사]→ [15:45] 타이베이 출발(2.5h)→ [19:00] 부산 귀환
[호텔과 충렬사 이야기]
오늘은 귀국 짐을 싸가지고 차에 올랐는데 짧은 여행이지만 밤늦게까지 강행했기에 쉽지 않은 여행이었으며,
우리가 묵은 호텔이 타이베이와 1시간 거리에 있으니 하루 2시간은 호텔을 오간 시간이다.
하루 2시간씩 오고간 호텔은 어느 방향에 있는지 궁금했으나 검색하면 나올 줄로 생각했는데 가이드에게 물어
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으나 그래도 그 시간에 대만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위안이 되었다.
충렬사의 교대식을 구경할 때 못해도 속으로 못한다고 하는 것이 예의라고 미리 예고하는 것을 보면 교대식이
어떨 것이라는 짐작이 갔으며, 교대식이 끝나면 지금까지 없었던 쇼핑을 딱 한 번 한다고 했다.
<충렬사 정문>
[천수이볜(진수편, 陳水扁) 이야기]
대만에 대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전 총통인 천수이볜의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는 1950년 대만남부 도시인 타이난 현의 가난한 소작농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1969년 그는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여 대만의 수제만 들어간다는
타이완 국립대학을 두 번이나 합격했는데 처음은 경영학이고, 두 번째는 법과라고 한다.
대학 3학년 시절에 사법고시를 합격한 수제(秀才)로 가장 젊은 변호사가 되었고, 상법을 전공하고 졸업했으며,
내과의사의 딸 우수전과 1975년 결혼했고, 정치에 입문한 계기는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사건’이라고 한다.
1980년대에 이르러 대만의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우리의 시사지와 같은 말지 ‘새로운 대만’이라는
잡지를 출간하여 여론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1981년 타이페이 시의회 의원이 되어 4년 일했다.
1994년 타이베이의 시장으로 선출되어 4년을 일했을 때 성매매업소인 공창을 없애는 등 일을 잘 했는데 그는
2000년 제10대 총통선거 때 그는 민진당 후보이고, 국민당은 대만의 대부호 정치인 롄잔이었다.
롄잔이라는 이름의 한문 연전(連戰)은 할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연전연승하라고 지은 이름으로 경제에서는
1조원을 넘는 재산을 가졌으니 맞는 이름이지만 정치에서는 연패하여 이름이 무색해 졌다.
그는 천수이볜에 연전연패 했으며, 아들은 국민당인 롄성원(連勝文)으로 2014년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 야당
후보 커원저(柯文哲)에게 패했다.
<왼편이 롄잔이고, 우편은 시진 핑이다.>
천수이볜는 645만 표, 롄잔 후보는 642만 표로 약 3만 표 차이로 신승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국민당 51년의 장기집권을 막을 내리게 했다.
2004년 제 11대 총통선거에서 다시 롄잔 후보와 맞서게 되었고 그는 여론조사에서 뒤지고 있었는데 선거전날
대만남부 타이난에서 유세 중이던 그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저격사건이 있었다.
의문이 많았던 이 사건은 후에 자작극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여론은 역전되어 천수이볜은 647만 표, 롄잔은
644만 표로 2000년 때와 같이 3만 표 차이로 승리했으나 8년의 집권하는 동안 그는 부패했다.
그는 집권이 끝난 2008년 천수이볜은 비밀자금 횡령 및 불법자금 세탁 등의 밝혀진 금액이 대만 달러로 10억
(한화 400억)의 혐의로 구속되었었고, 전 가족과 측근들이 다 부패에 연루되었다.
부부는 징역 17년 6개월을 선고받아 지금도 머리를 박박 깎고 복역 중인데 대만은 우리나라 같이 힘 있는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환자복입고, 마스크하고, 휠체어를 타는 그런 식으로 웃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있으면 출감하는 일이 없다고 했으나 2015년 1월 5일 천수이볜 휠체어를 타고 나와 가오슝에 있는
저택으로 한 달간 가석방 됐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대만도 우리한테 배운 것 같아 좀 씁쓸했다.
천수이볜은 옥중 출판으로 후임자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가하는 정치적 보복이라고 비난하고 마 총통의 성급한
친 중국 정책들을 비판했다고 하는데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충렬사 근위병 교대식 관람]
중국인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만만디(manmandi)는 굼뜸 행동 또는 진행속도가 느린 것을 이르는 말인데
오늘은 그 진수를 보는 날인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 교대식이 막 시작됐다.
이 교대식은 사람이 얼마나 느리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느림의 미학을 느껴볼 수 있다.
<느림의 미학이 시작됐다.>
여행 중에 몇 번의 교대식을 볼 수 있었는데 화려한 버킹검 궁의 교대식, 빠른 동작과 과잉된 몸짓으로 웃음
짖게 하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인 와가 국기하강식 등을 보았다.
이번 교대식은 소규모인 7명이 충렬사 정문에서 시작하여 충렬사 내부까지 들어가서 2명을 교대를 해 주고,
다시 5명만 돌아와 정문의 위병을 교대해 주면 끝난다.
교대식만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매 시간마다 교대식이 있다고 하니 광장에는 쉬지 않고 교대식을 하는 것이고,
근무자는 교대식을 기다리다가 근무가 끝난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음 하는 것을 보지 않았으니 광장은 몇 분간만 휴식하는지 궁금했으며, 행사 자들이 전진하면 관람자들도
이동할 수 있기에 옆에서는 볼 수 있지만 정면에서는 볼 수 없다.
느림을 절도 있게 보여 준다는 것이 쉽지는 안을 것인데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을지는 가늠할 수 있었으며,
교대식이 끝나면 옆에서 협조하던 사람이 복장을 고쳐주면 끝난다.
이제부터는 눈도 가깜박거리지 않는 살아있는 밀랍인형이 되는데 그들이 얼마나 인내력이 있는지 시험해 보는
사람도 있으니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2명을 교대를 해 주고 돌아가는 모습 2. 밀랍인형 같은 위병>
대만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원산대반점 그랜드호텔(The Grand Hotel)이 바로 옆에 있어 가이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려 가 보았는데 정면은 시간이 없어 못보고 옆면만 보았다.
▶충렬사(忠烈祠): 우리나라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이곳에는 항일운동 때 전사한 33만 명의 호국영령을 위해
건립했으며, 본 건물은 자금성의 태화전을 모티브로 지었다고 한다.
<1. 충렬사 전경 2. 가- 충렬사 본 건물 3. 나- 충렬사 좌측 건물 4. 다- 충렬사 우측 건물>
[중정기념당으로 향하면서]
쇼핑하러 가는 줄 알았는데 이번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중정기념당으로 향하면서 설명을 들었는데 부지는 25만㎡,
우리의 7.5만평으로 1975년 4월5일 서거한 장개석총통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야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중정기념당의 현판이 내려지고, ‘민주기념관’으로 개명했으나 2008년 다시 국민당이
정권을 재집권하면서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2000년 야당 천수 천수이볜 정권을 잡으면서 장개석 이름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중정공항도 도원공항으로
바꾸었고, 곳곳에 많던 장개석 동상도 철거했다고 한다.
장개석은 대만에서 집권한 26년 동안 대륙수복에 대한 생각 밖에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며, 그는 죽을 때 고향 마을에 시신을 묻어 달라고 유언해서 무덤은 없다고 한다.
장개석 마을과 비슷한 자보라는 곳에 장경국도 마찬가지로 대리석관에 안치 되어 있다고 했는데 인터넷에는
장개석이 늘 대륙에 다시 들어갈 전략을 구상했다고 하는 ‘츠후 공원’이라고 한다.
기념당에는 각국에서 받은 훈장과 특히 우리나라에서 받은 것도 전시되어 있다고 하며, 기념당을 구경한 후
대만에서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하라고 했다.
기념당은 충렬사에서 출발하면 그 사이에 있는 사림관저는 두 번째 날에 보았고, 조금만 더 가면 기념당으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로 후문 패루엔 대충문(大忠門)이라고 쓰여 있다.
<기념당 후문인 대충문과 패루>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관람]
기념관을 둘러싼 1,200m의 긴 회랑과 높이 70m의 흰 대리석기념관은 2층 구조이며, 본 기념관을 올라가는
88개의 계단은 장개석(1887~1975년)이 죽을 때 나이라고 한다.
8각형의 기념당 지붕은 동양 사상의 8덕(德)으로 예, 의, 염, 치, 도, 제, 충, 신이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는데 들어올 때는 후문이지만 나갈 때는 정문이라고 한다.
기념당을 축소해 놓은 모형도 앞에 섰는데 2개의 건물은 예술의 전당으로 기념당에서 오른쪽이 오페라음악당인
국가음악청(國家音樂廳)이고, 왼쪽은 극장인 국가희극원(國家戱劇院)이라고 한다.
<기념당의 모형도>
내부에 전시된 사진 중에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1924년에 세운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개교식 사진이다.
그 사진 안에 긴 흰옷을 입고 안경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 김구선생님으로 임시정부요인을 초청해서 참석하게 된
동기라고 하며, 이 학교는 우리나라 사람도 연관이 있어 아래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총통의 아버지가 소금장사를 했다는 마을과 가게이고, 가족사진은 송미령 부인이며, 위의 가운데가 장경국이고,
그 옆 서양여자는 장경국이 소련에서 10년간 공산주의를 하면서 아버지를 성토할 때의 공산당동료라고 한다.
<1. 황포군관학교 2. 소금가게와 마을 3. 총통 가족사진>
군복 입은 장개석 모습을 한문글자만 사용해서 완성한 그림 앞에서 여자한분이 유리가 있는 줄 모르고 사진을
찍으려다 부쳤고, 가이드는 ‘그렇게 해서는 안 깨진다.’라고 말해 모두들 웃었다.
필리핀 화교가 기증했다는 검은 방탄차 캐딜락은 장개석이 대만에서 처음 탄 승용차라고 하며, 이제는 1943년
11월 22~26일에 있었던 이집트 카이로회담 때 사진 앞에 섰다.
이 회담은 중국대표 장개석, 미국대표 루즈벨트, 영국대표 처질이 이집트 카이로 모여서 한 회담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1914년 이후 취득한 일본영토를 몰수하는 내용이다.
초등시절부터 배웠던 우리에겐 매우 중요한 회담으로 처음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보장받았으며, 이때 통역을 한
사람은 송미령인데 직설적인 총통의 말을 부드럽게 잘 통역했다고 한다.
<1. 한문글자로 만든 장개석총통 2. 총통이 탔던 방탄차 승용차 캐딜락 3. 카이로 회담 사진>
이제는 총통이 말년에 근무했다는 집무실을 축소해 놓은 곳에서 설명한 것은 듣지를 못했고, 이번에는 1969년
사고 때 탔던 승용차를 구경했으며, 장개석과 송미령이 군대를 사열 하는 사진 앞에 섰다.
송미령이 장개석보다 한발 앞서서 가는 사진으로 여자들 힘이 강한 것은 중국이나 대만이나 다 같은 계통이라
남자들이 부엌일을 많이 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한다.
1943년 송미령이 미국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기립박수를 받았고, 돌아올 때는 12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기에
여성에게 꼼작 못하는 이유라고 했으며, 지금도 대만여성은 남자들보다 돈을 더 벌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여자들이 힘이 강한 이유>
이제는 맥아더 장군 사진 앞에서 설명을 들었는데 세계의 5성 장군이 3명 있는데 맥아더와 아이젠하워 그리고
장개석이라고 하며, 1950년 우리나라 6.25가 일어난 후 대만을 잃지 않기 위해 미 7함대가 대만해협에 왔을 때
찍은 사진으로 모택동의 심기를 몹시 건드렸다고 한다.
장개석은 6.25가 본토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였고, 맥아더가 만주를 폭격하면 군대를 상륙시키려 했을
때 맥아더는 OK 했으며, 장개석도 미 대통령에게 만주폭격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트루먼대통령은 거절과 함께 맥아더를 해임했는데 총통은 맥아더에게 대단이 미안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장개석은 괴멸직전의 공산당이 살아나게 한 시안사건을 일으킨 장쉐량(장학림)을 무척 미워했다고 하며, 장개석
군대는 잘 싸웠으나 군벌군대가 부패해서 그들에게 준무기는 바로 공산당에 팔았다고 한다.
그들이 점령한 곳에서는 착취로 인해 국민의 불만을 쌌고, 공산당은 부패와 착취를 하지 않아 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 국민당 패배의 원인이라고 한다.
<맥아더 장군과 장개석 총통>
(한국과의 관계된 전시물)
1924년 황푸군관학교 개교식 때 초청받았던 사진 중에 군복을 입은 사람은 초대교장 장개석이고, 중앙에 선
사람은 손문이며, 왼쪽 앞이 김구선생님이시라고 한다.
장개석은 처음에는 우리나라 임시정부를 못 본 척했다고 했으나 1932년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장개석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했다고 한다.
1936년 시안사건으로 살아난 공산 때문에 우리는 국토가 분단되었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 오는 신세가
되었으며, 1953년 진해를 방문했다고 했으나 그해는 이승만대통령이 대만을 답방한 해이다.
사실 진해 방문은 1949년 8월7일로 본토에서 쫓겨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국순방이 쉽지는 않았을 것인데
한국을 방문한 것을 보면 얼마나 2나라 사이가 얼마나 우호적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1953년 11월 이승만대통령이 대만을 방문하여 독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해서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을 총통에게
수여했는데 11월 27일 한국총통(總統) 이승만 한국1등건국훈장(韓國一等建國勳章)이라고 적혀있다.
<1. 황푸군관학교 개교식 때 사진 2. 한국1등건국훈장>
다음은 1966년 2월15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만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으로 이때 새마을운동과 장기집권을
배워갔다고 하면서 점쟁이가 이름을 보고 풀이하기를 朴의卜자는 점을 본다는 뜻이라고 한다.
木자는 十+八로 집권기간을 말하는데 18년을 넘기면 안 된다는 뜻이고, 가운데 正자는 지붕을 빼면 정지할
止자와 아래 下자와 합친 것으로 즉 ‘하야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빛날 희 熙자와 아래의 점 4개는 4번의 빛 즉 4발의 총탄을 의미하는데 점쟁이가 미리 애기해 주어야 했는데
미처 못 했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이름을 재미로 했다고 해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1974년에 새마을운동을 시작했지만 중국은 1934년에 시작한 ‘신생활운동’은 날아빠진 것을 새로이
하자는 운동으로 길거리 용변 등을 개조한 운동이라고 한다.
박정희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이 운동을 배워간 것이 새마을운동이고, 경제개발에 벤처마킹 했으며, 또 하나
배워간 것이 종신집권이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
이것으로 가이드의 설명을 마쳤는데 송미령과 부당한 관계였다는 월키 루이스 사진이 있는가 물었는데 없다고
했으며, 11시 반에 정문에서 모이기로 하고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갔다.
전시관 2층으로 향한 사람은 나 외에 2사람이 더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2층 안은 공사 중이어서 접근도 못해
보았으며, 2층에서 내려다보는 정문 광장 오른 쪽에는 국가음악청이 있다.
왼쪽에 있는 국가희극원을 보고 내려왔으며, 우리 팀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고 정문으로 향했는데 정문패루에
쓰여 있던 대중지정(大中至正)을 천수이볜 총통이 자유 광장(自由廣場)으로 바꾸었다.
<왼쪽은 국가희극원, 중앙 패루는 자유 광장, 오른 쪽은 국가음악청>
▶중정기념당: 장개석 총통이 서거하자 그를 기념하기 위해 대만인들과 전 세계화교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건립했으며, 타이베이시 중앙에 위치하여 경축일이나 단체들의 행사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기념당의 하얀 아치형 '자유 광장(自由廣場)’의 푸른 기와지붕은 명나라 건축양식으로 높이 30m, 폭 71m이며,
25만㎡ 부지에 정원과 연못이 있고, 붉은 화단은 자애, 평등, 박애의 신정정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1층 전시관 중앙에는 총통의 흉상이 있으며, 총통의 결혼, 가족, 중국통일을 위한 혁명, 일본의 항전, 공산당과
전쟁, 대만통치 등의 자료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고, 총통의 유품도 전시되었다.
1950년대 전용 가마도 있으며, 2층에는 25톤의 장제스 총통의 좌상이 있고, 천장엔 중화민국 국기가 조형되어
있으며, 위병교대식이 볼만하다고 한다.
참고로 장개석, 송미령, 제2차 국공합작, 황푸군관학교를 기록해 보았다.
<1. 중정기념당 2. 기념당 광장>
※장제스(蔣介石 1887~1975): ‘6.25 동란 때 100만의 대군 중에 50만을 본토에 50만을 한국에 파병하여 중국
대륙을 회복하려 했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혼이 난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대만으로 온 뒤 군사통치 체제를 수립하여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대만사람들은 훌륭한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양면적인 사람이다.
장제스는 우리나라 독립역사에는 아주 중요한 사람으로 1923년 4월2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해군총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일본수뇌부를 일거에 제거한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4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도 못한 일을 일이었으며, 중국 국민을 통쾌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때부터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다시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1943년 11월23일 카이로 회담 때 우리나라를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연합군 관리아래 두려고 했으나 장제스
부부는 밤에 루즈벨트를 찾아가 3시간을 설득하여 조선의 독립을 얻어냈다.
12월1일 카이로선언에서 최초로 우리나라독립을 선언했기에 학자 간에는 이날을 기념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윤봉길 의사의 사건이 이루어낸 일이다.
※송미령(1899~2003년): 아버지 송가수(宋嘉樹)는 미국서 받은 감리교목사를 그만두고 상해에서 미국의 새로운
기계를 수입하여 대부호가 된 뒤로 손문을 후원하였고, 3딸과 3아들 모두를 미국 웨슬리대학에 유학시켰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중국최초의 유학생 된 딸들 중에 맏딸 애령이는 돈을 사랑하여 공자직계후손인 대부호
공상희에게 시집갔으며, 그는 후에 국민당 재무부장이 되었고, 애령은 숨어서 돈 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둘째 딸 경령은 조국을 사랑한 여자로 1915년 22세인 그녀는 49세이며, 삼민주의를 주장한 손문에게 시집가려고
하여 아버지는 감금했으나 유모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였고, 손문은 부인과 별거하고 경령과 결혼했다.
1925년 손문은 북경에서 타계했고, 전세로 살면서 공산당을 도왔던 경령는 죽음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로 피신도
했으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한 이후 2차례나 국가 부주석을 역임했다.
1927년 아버지 송가수는 28세인 셋째 딸 미령이도 기독교인도 아니고, 2번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는 40세인
장제스와 결혼을 반대 하였지만 권력을 사랑한 송미령은 장제스에게 시집갔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 지혜와 외교능력이 대단하여 남편과 한 집무실에서 근무하며, 외교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1943년
2월 18일 중일전쟁에서 무기 면에 뒤진 중국이 미국의 원조를 받기위해 송미령이 미국의회에 섰다.
미국의회에서 중국인으로서는 첫 번째이고, 여자로서는 두 번째로 연설을 행한 여인이 되었으며, 미국인들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10명의 여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남동생 송자문은 국민당의 재정부와 외교부장관, 행정원장을 지냈고,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알려질 졌는데
트루먼대통령이 회고하기를 ‘미국서 원조한 돈은 송미령, 송자문, 공상희 주머니로 들어갔다.’라고 했다.
1940년 루즈벨트와 선거에서 낙선한 월키 루이스와 부당한 관계였다는 심증은 있으나 확인은 되지 않았다.
<밀랍으로 만든 총통부부>
※제2차 국공합작: 1936년 12월12일, 중국 서안의 화청궁에서 남경정부의 부사령관이자 국민당의 2인자인 장쉐량
(장학림)이 국민당의 수장 장개석을 감금시키고 공산당과 합작을 받아낸 사건이다.
1925년 장학림은 상하이 파티에서 송미령을 만나 한눈에 반하여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만주로 떠났으나 장쉐량은 아버지 장작림이 맺어준 위펑즈(우봉지)라는 부인이 있었다.
하늘같던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어 위펑즈(우봉지)와 이혼하지 못하고, 송미령에게 이별 통보를 보냈고, 시안사건
때 그녀의 남편인 장개석을 죽일 수가 없었던 대신 장쉐량은 사형은 면했지만 53년 동안 감금당했다.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에 의해 1924년 6월 16일 설립되었으나,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폐교한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사학교이며, 소련이 경비와 무기를 제공했다.
학교이름은 광저우 황푸에 있었기 때문이고, 비록 약 3년간 6기로 약 7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이 학교가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을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하며, 초대 교장이 장개석이라고 한다.
사진 속의 수염 많은 대머리가 소련의 군사고문단으로 장개석과 마찰이 심했으며, 이 학교에서 배출된 사람들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대에 중요 요직에 많이 진출하여 군사와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국공내전 때 서로 적이 되어 전투를 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국의 독립운동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김원봉, 최원봉, 오성륜 등이 이 학교 출신 교관 및 졸업생이라고 한다.
<수염 많은 대머리가 소련의 군사고문단>
(대만의 쇼핑 소감)
대만에서 마지막 식사를 맛있게 먹으라고 했으며, 식사 후에 발사사지 한 곳에 있는 쇼핑가게로 가면서 아예
가이드 한 보람이 있게 많이 살 것을 솔직하게 부탁해서 남은 돈을 다 쓰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한국 돈이 값어치 없기로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유명하다는 파인애플 케이크라고
부르는 펑리수는 12개 들어 있는 것이 대만 돈 420NT, 1개에 우리 돈 1400원이다.
크기도 곶감보다 작지만 맛도 곶감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건 너무하다고 직원에게 애기했더니 그렇게
비싸지 않다고 하며, 저들도 계산해 보더니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사려고 했는데 하나도 살 것이 없어 밖으로 나와 빈랑 가게를 찾아보았으나 없었으며, 대만에서 본
묘지와 스쿠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호텔 식당의 펑리수>
[대만의 묘지와 스쿠터]
금융천 온천욕을 마치고 타이베이로 돌아오는 길에 대만의 묘지풍습을 볼 수 있었는데 길옆 산에는 작은 동네
같이 보였으나 사람들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작아서 무엇 하는 곳인지 궁금했다.
가이드는 그곳은 가족의 공동묘지라고 했는데 꼭 우리나라 단독주택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사진을 찍지 못해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우나 그냥 자그마한 단독주택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다음은 스쿠터이야기인데 대만에도 엄청나게 오토바이가 다니는데 1세대 당 차가용 1대와 스쿠터 2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그렇게 스쿠터가 많은 이유는 땅값이 비싸서 주차요금이 비싼 때문이라고 한다.
출근시간에는 수많은 스쿠터가 한꺼번에 몰려가는 숫자보다 타는 사람들의 배짱이었는데 예쁜 아가씨들까지도
차의 접근을 무서워하는 기색도 없이 경쟁적으로 달려도 워낙 잘 타기 때문에 사고는 적다고 한다.
대만에서 오토바이는 고등학교 들어가면 탈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어린 사람들이 많다는 탄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남녀노소가 없이 근거리는 오토바이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대만 역 앞에 있는 스쿠터>
[먹거리 천국 대만의 중요 먹기리]
●101층 근방: 호두아이스크림, 망고주스, 샤오롱바오 ●화시지에 야시장: 맛있다는 석과, 망고빙수(아이스크림,
애플망고, 버블티(Boubble Tea) ●태로각 휴게소: 블루베리 ●지우편: 땅콩아이스크림
●야류지질공원: 망고주스, 망고셔베트(빙수), ●음료수: 밀크 티, 밀크 튀김, 컴바이(COMEBUY) 버블밀크 티,
대왕요구르트, 청심복전(淸心楅全) ●과일: 구아바, 파파야, 백향과, 풍리석과(파인애플+우유석과)
●기타: 편의점에서 펑리수(파인애플 케이크) 살 것, chiate 제품이 좋음, 명란 닭꼬치 등.
먹거리는 대만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참고삼아 적어보았으며, 지금까지 지루하고 긴 여행기를 읽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있는 석가는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과일을 잘 골라야 한다.>
첫댓글 긴 얘기 올려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그리고 감사합니다
여행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 놓은 덕택에 대만에 대해 많이 느끼고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