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는 매우 평범해 보이는 한 중년 남성이 이후 인류의 정신세계를 통째로 바꿔놓을 만한 혁신적인 삶의 방법을 시험해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였고,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자기에 대한 의문과 반성은 서양철학이라는 독특한 지적 추구의 전통을 세웠습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다이몬이라 이름 붙여진 내면의 목소리가 유년시절부터 임종할 때까지 끊이지 않고 그를 쫓아다녔다고 합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거나, 결정을 내리려 할 때마다 내면의 목소리는 한 번 더 생각할 것을 요구했고, 또 다른 대안은 없는지 따져볼 것을 강요했다 합니다.
이 목소리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소크라테스는 당시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져 있던 유명한 문구인 ‘너 자신을 알라’에 집착하게 됩니다. 이후 평생에 걸쳐,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우매한 아테네 시민법정에 내어주면서까지, 스스로의 내면을 탐구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수많은 현자(賢者)들이 있었고 각자 나름대로 지혜를 추구하였지만, 소크라테스가 모색한 진리 추구의 방향은 그전까지 전무하였던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전까지의 현자들은 해와 달의 움직임이나, 동물과 식물이 번성하는 방법 등 자연법칙을 탐구했고, 또한 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법이나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너 자신을 알라’는 식으로 인식 주체인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일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들은 스스로를 재귀적으로 관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 것이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이라며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여유를 갖는 것은 아니지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어리석음과 무지의 늪에 빠지지 않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나 피폐해져 버렸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은 지난 2500년 동안 서양철학의 큰 화두가 되어왔습니다. 이 거대한 질문에 대해 서양철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답을 모색해왔습니다. 첫 번째는 그의 직계 제자인 플라톤에 의해 수립된 방향이며, 두 번째는 2000년이 지난 후 철학자라기보다는 보르도의 포도주 상인이자 노련한 정치가였던 몽테뉴에 의해 수립된 방향입니다. 아시다시피 플라톤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중요시했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 사회가 고정불변의 법칙에 의해 조화로운 질서를 이루기를 염원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보다는 ‘인간은 이래야만 한다’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철학자인 왕이 시민들의 삶을 세세한 부분까지 설계하고 지도, 계몽하는 정치체계를 꿈꾸었습니다.
이에 비해 몽테뉴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보다는 설령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관조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조화로운 삶의 길이 있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일 뿐입니다. 만약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어리석은 일을 반복해왔다면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몽테뉴라면, 그러한 본성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을 때 고뇌하기보다는 껄껄 웃으며 함께 동행할 길을 모색할 것입니다.
플라톤과 몽테뉴 두 사람이 모색한 길은 달랐지만,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보려는 목표를 추구한 것은 동일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렇게 알게 된 하나하나의 지식이 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당사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철학, 특히 19세기 말에서야 비로소 철학으로부터 독립을 꾀한 심리학은 이렇듯 자연이나 타인의 비밀을 풀어보려고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려는 소크라테스의 시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지금은 전문가의 시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철학의 문제나 심리학의 문제 역시 노련한 전문가의 소관이라 치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삶을 치열하게 되돌아보고 진리에 다가가려 애쓰는 것은 윤리적 요청이기도 하기에, 철학과 심리학은 바로 우리 스스로 부단히 탐구해야 하는 공부인 셈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자기 내면의 목소리의 부름에 성실히 임했던 것처럼 우리들 모두 삶에서 부딪히는 후회나 반성, 궁금증과 의문에 대해 성실히 그 답을 추구해야 합니다.
최근에는 이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독자 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라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습니다. 대형 서점의 한쪽 귀퉁이는 아예 심리학 관련 서적만으로 독립된 코너를 이룰 정도입니다.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가에 대한 관심 역시 그 어느 때보다 높으며, 과거와는 달리 큰 저항감 없이 상담을 받거나 자기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여행에 동참하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편 마케팅, 여론 조성, 광고, 사회운동, 교육 등 ‘인간’이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심리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응용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련 전공자에 대한 수요도 높은 편이며, 동시에 비전공자 역시 일정한 상식을 갖출 것을 요구받습니다. 그러나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며,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용어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관련 기사나 문헌에 접근하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본서는 자신의 삶에서 어렴풋하나마 두 가지 갈증을 느끼고 계신 분들을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첫째, “왜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가? 왜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패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갈증입니다. 둘째, 언론매체나 보고서, 인터넷 등에서 심리현상과 관련된 내용에 흥미와 관심이 끌리면서도 전문용어나 소위 “~~법칙”이 뭔지 몰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느끼는 갈증입니다.
이를 위해 심리학 관련 문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용어나 법칙 중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여겨지는 100개의 아이템을 추려내었습니다. 대체로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심리학 관련 서적에 소개된 아이템 및 인터넷 블로그 등에 자주 등장하는 아이템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각 아이템에 대해 그 유래와 의미, 이후 이어진 논쟁들을 가급적 심리학 영역에 처음 접하는 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였으며, 덧붙여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모습을 바꿔 나타나는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제 개인적 경험은 물론, 정신과 의사로서 이십 년 가까이 임상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경험을 글월 속에 녹여내기 위해 애썼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예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어떤 독자에게는 실소를, 어떤 분에게는 씁쓸함을 자아낼지도 모르며, 심지어 또 다른 분에게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을 불러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몽테뉴가 말했듯, 인간 세계는 모순과 혼란이 충만해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이런 가치를 지지하는 것 같다가도, 또 다른 부분에서는 동일한 가치가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떨떠름한 상태에서 책장을 잠시 덮고 나면 이 모든 법칙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에도 절대로 옳은 법칙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딱 맞아떨어지는 해답이 없다 할지라도, 무지한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삶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아는 상태에서 그 한계를 수긍하는 삶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키는 데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세상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기획을 하고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반복되는 아이디어 회의를 거쳐 책의 줄기를 잡아주신 케이앤제이 출판사 기획팀의 공이 무엇보다 크다 할 것입니다. 반복되는 교정을 통해 단순한 오류의 수정은 물론 더욱 효과적인 표현을 시도하면서 글을 빚고 다듬어주신 교정팀 역시 숨은 저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 컴퓨터에 조금씩 쌓여가는 원고들을 아빠 몰래 훔쳐보면서 키득키득거리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제게 묻기도 한 제 큰아들의 도움에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2011년 9월
정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