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보고 ..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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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의 외부적 이야기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는 1593년 스물 아홉 살인 셰익스피어의 런던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셰익스피어 인 러브 ]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젊고 활발하며 혈기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졌지만,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일은 거의 가망이 없는 일로 치부되고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모차르트와 더불어 창작의 고통을 겪지 않은 유일무이한 천재였으며 평생을 자신이 속한 극단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노후를 위해 스트래퍼드에 집을 사둘 정도로 성실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 영화의 바탕이랄 수 있는 [ 로미오와 줄리엣 ]을 한번 생각해 보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10대 소년과 소녀는 첫눈에 서로에게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마치 자신들이 성인인 것처럼 연애담을 보여 주는데 이건 거의 청소년의 탈선과 다름없다. 이뿐 아니라 로미오와 줄리엣 두 가문 사이에서 피비린내나는 칼싸움이 벌어지고 이런 칼싸움 액션에 서로간의 증오와 복수 그리고 죽음(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으로 끝을 맺지만) 이 이글거린다. 지금 보아도 과다한 아드레날린 분비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이것을 보고 다른 혹자들은 웃을 지도 모르겠다.) 같은 [ 로미오와 줄리엣 ]을 읽노라면 한번쯤은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는 이러한 기발한 상상에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아마도 셰익스피어는 여자 심리에 능통하고 여자를 다룰줄 아는 사람이며 연애 박사에다 언변 즉 여자를 한방에 꼬실 수 있는 화술도 매우 훌륭하였으리라는 상상..... 위에서 미리 언급하였지만 셰익스피어가 그랬었다는 가망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 상상은 매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마크 노먼은 여기에다 엘리자베스 시대 당시 여자가 연극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제작자는 평소에 역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사랑에 빠진다면 바로 이런 여장남자와 가능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낸다.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이 아이디어에 [ 브라질 ], [ 태양의 제국 ], [ 러시아 하우스 ]를 쓴 각본가 탐 스타파드(역시 모방의 천재!)와 [ 미세스 브라운 ]의 감독 존 매든이 붙었다.
이 기발한 상상에 의한 결과는 독특했다. 극장주는 ‘ 개가 나오는 연애담과 코미디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를 쓰라고 강요한다. 단지 희극적 요소를 위해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개가 미국에서는 매우 친근한 동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극장주의 강요에 돈에 쪼들리던 셰익스피어는 ‘ 로미오와 해적의 딸 에델 ’이란 코미디 각본을 쓰려 점술가의 카우치 (정신 분석 의자)에 눕는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 로미오와 줄리엣 ]을 쓰지 않고 그 전작이라고 할 수 있는 [ 로미오와 해적의 딸 에델 ]을 썼다면 과연 지금의 셰익스피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내가 만약 영화 감독이라면 이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를 패러디 해서 셰익스피어가 [ 로미오와 해적의 딸 에델 ]을 썼다면 어떻게 될까? 한번 내 나름대로 영화를 찍어 보고 싶다.
어쨌든 18세 소녀에서부터 40살 아줌마 관객까지를 노린 16세기 역사와 20세기 상상력의 음모는 결국 헐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와 영국의 시대극(COSTUME DRAMA)을 정략 결혼시키기에 이르렀고 이 결합은 18개의 예비 오스카를 잉태했다.
이렇듯 16세기 드라마 [ 셰익스피어 인 러브 ]에는 지금 여기의 웃음이 깃들여 있다. 우선 [ 로미오와 줄리엣 ]의 장면을 역사적 사실로 가정한 상황설정이 재치있다. 또 영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종류의 돈이든 상관하지 않는 극장주와 능력이 있어도 재능을 썩히고 있는 여배우를 보고 있노라면, 현재를 객관화하는 시대극의 거리와 현실을 풍자하는 코미디의 전복력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쌍인가를 문득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는 가볍지만(로맨틱 코미디이니까) 상큼하게 해낸다. 작가와 부유한 상인의 딸이라는 신분의 계급에 가로막힌 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는 또 한 쌍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그려지고 이들의 사랑과 좌절은 극중 로미오와 줄리엣 각본이 진척되는 것과 맞물리면서 발전한다. 무대를 경계로 현실과 연극이 섞이는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는 어느새 우디 알렌의 [ 브로드웨이를 쏴라 ]를 중세 영국으로 옮긴 듯한 유머를 선사하게 된다.
캐릭터 상으로는 빅토리아 시대 당시 영국의 연극계를 주무르던 역사적 인물과 가상의 인물들이 교차한다. 하지만 거의 이야기가 내용 전개에 벗어나는 것을 찾아 보기 힘들 만큼 매우 아기자기하게 이루어 지고 있으며, [ 셰익스피어 인 러브 ]가 시대극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 셰익스피어 인 러브 ]의 고증은 매우 정교하다. 패스트가 휩쓸고 지나간 런던의 거리가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재현되고( 중세가 단순히 문화적 암흑의 시대였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게 할 만큼) 특히 ‘ 코스튬 드라마 ’라는 별칭 그대로 의상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그들이 입고 다니는 의상을 보고 있으면 마치 자신이 지금 중세 시대에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매우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단순히 미국 헐리우드 대스타들로 포진시키지 않고 나름대로 다양하게 미국의 인디 계열에서부터 영국의 정통 시대극 배우들까지 골고루 캐스팅했다. 정통 영국 배우들의 특이한 발성과 미국 배우들의 능청스런 영국식 엑센트가 한 스크린 안에 뒤섞여 있다.(어색함이 들지 않을 만큼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 역으로는 기네스 펠트로와 조셉 파인즈가 공연했고 조연으로는 [ 미세스 브라운 ]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역을 맡았던 주디 덴치와 [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의 루퍼트 에브렛, [ 샤인 ]의 제프리 러시, 벤 에플렉까지 이들은 탐 스타파드와 각본 하나만을 믿고 뭉쳤다고 한다.
시대와 배우와 장르를 섞어낸 무정부적인 유머와 박물관 관행이던 시대극을 회춘시킨 공로로 영국의 (필름/시네마)는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를 ‘ 시대극 장르의 [ 스크림 ] ’으로 비유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대극은 헐리우드에서 돈벌이가 안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작품성을 불문하고 거의 배제되어 왔다. 하지만, 이 [ 셰익스피어 인 러브 ]를 계기로 시대극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고 헐리우드도 이젠 시대극이라는 장르를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마치 저예산 영화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막상 보고나면 이 영화가 의외로 돈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영국의 정신적 유산과 미국의 자본이 결합한 가장 이상적인 사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 영화의 내부적 이야기
◆셰익스피어가 사랑에 빠졌다!그녀는 누구일까?
1593년 런던 자신의 재능을 의심치 않던 젊은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위기에 빠진다. 그 위기는 극장주 핸슬로우가 코를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악독 고리대금업자의 빚을 갚기 위해 코미디를 써달라고 그에게 조르지만 고갈되어 버린 듯한 그의 재능은 샘솟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셰익스피어는 모차르트와 더불어 창작의 고통을 겪지 않을 만큼 대단한 작자였지만 헐리우드의 상상력은 그의 그 엄청난 재능을 하루 아침에 뭉게 버린다. 그런 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한 일은 다름아닌 주술사를 찾아간 것이다. 영화에서가 아닌 실제 셰익스피어라면 아마 자기 스스로 해결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주술사를 찾아 가는 장면은 영화에서의 희극적 요소를 가미시킨 것이다. 주술사에게 상담하러 간 셰익스피어에게 주술사는 사랑의 부적으로 새로운 여신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그 새로운 여신인 기네스 펠트로가 아닌가 생각했는 데 전혀 아닌 잘 나가는 커튼 극장의 버베이지의 정부인 로잘린에게 사랑의 부적을 주고 새로운 열정으로 극본을 쓰지만 로잘린과 극단 배우의 밀회장면을 목격하고는 원고를 불태워 버린다. 여기에서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데 로잘린이 버베이지의 정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녀와 극단 배우와의 밀회를 보고 그녀를 포기한다는 것은 조금 말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부유한 상인의 딸인 바이올라는 왕실 공연에 우연히 나타난 셰익스피어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가난한 귀족으로 돈 밖에 모르는 웨식스 경과 정략 결혼을 앞두고 있는 몸이다. 그녀가 셰익스피어를 인간적인 면에서 반했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연극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가진 그녀가 셰익스피어를 통해 은근히 자신의 내면적 욕구(연극 배우)를 실현시키려는 것에서 그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 로미오와 해적의 딸 에델 ]이라는 셰익스피어의 오디션에 남장을 하고 참가하지만 그녀의 재능에 반한 셰익스피어에게 자신의 이름은 토마스 켄트라고 대답하고 도망가 버린다. 셰익스피어 희곡 중에서 여성이 남장을 하는 것이 몇 편 있는데 [ 베니스의 상인 ]의 포오샤, [ 십이야 ]의 비올라가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바이올라도 남장 분장을 통해 자신의 꿈(연극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사랑을 다 이루려고 한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 시대에서 여성이 자신의 꿈을 위해 남장 분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있다.
그녀를 찾아 집까지 따라간 셰익스피어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파티에 참석한 바이올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셰익스피어는 처음에 버베이지 정부인 로잘린을 사랑하다가 포기하고 또 바로 바이올라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데 이러한 셰익스피어의 모습은 사랑이 소위 말하는 환각(ILLUSION)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얼마전에 개봉했던 영화 [인스팅트]에서도 나오는 데 이 영화에서 의사로 나오는 쿠바 구딩 주니어가 죄수인 앤소니 홉킨스를 지배하고 앤소니가 지배를 당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의 환각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배하는 사람이 지배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앤소니 홉킨스가 그에게 직접 깨닫게 한다. 결국 쿠바 구딩 주니어는 자기가 오히려 지배를 당하고 있었고 앤소니가 자신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발코니(발코니하면 항상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그 멋진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에서 그녀와의 안타까운 만남을 가진 셰익스피어는 토마스 켄트가 바이올라임을 알게 된다. 그때의 셰익스피어의 희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셰익스피어는 바이올라의 사랑에 영감을 얻어 무서운 속도로 극본을 완성하게 간다.( 역시 사랑의 힘은 사람이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단번에 돌아오게 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 낮에는 로미오 역을 맡은 토마스 켄트와 극작가의 신분으로 밤에는 사랑하는 연인으로서의 행복한 시간을 갖지만 웨식스 경과의 결혼날짜가 다가온다. 결혼이라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자의 자유로운 행동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것을 바이올라는 느끼고 있을 것이다. 또 설상가상으로 바이올라가 여자임이 밝혀지면서 극장을 (여자가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어겨서)불법공연으로 폐쇄명령이 내려진다. 궁여지책으로 로즈 극장 대신 커튼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바이올라 대신 셰익스피어가 로미오 역을 맡는다. 바이올라의 결혼식이자 공연 당일 여자 역을 맡은 소년은 갑작스럽게 변성기를 맞는다. 이것은 우연이라 하기엔 그 필연성(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의 만남 )이 결여되어 보인다. 결혼식을 마치고 극장에 달려온 바이올라는 소식을 듣고 줄리엣으로 무대에 서고 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어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곧 그들이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나지만 바이올라가 여장남자가 아니가 진짜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 엘리자베스 여왕이 극장에 들어온다. 바이올라임을 알고도 그녀가 토마스 켄트라고 확인해 준 덕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분명 관객들은 알고 있었지만 여왕의 어명과 그들(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의 혼신의 연기와 감동받아 아마 눈 감아 준 것이 아닌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왕의 자신도 정략 결혼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에 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는 안타까운 마지막 이별을 나눈다. 만약 여왕이 명령에 의해 그 정략 결혼을 깨뜨렸다면 이 영화는 졸지에 졸작으로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글을 포기하는 것은 자신을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이라며 바이올라는 셰익스피어에게 당부하고 셰익스피어는 바이올라를 주인공으로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상상과 현실사이의 자유로운 환상여행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가? SFX 기술력과의 행복한 동거동락으로 끝없이 미래로 향하던 헐리우드의 상상력이 이제 방향을 틀었다. 역사적 사건에 약간의 허구와 재해석, 그리고 작가적 시선을 드러내어 재구성하던 시대물의 기본틀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14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9명의 허구의 인물과 5명의 실존인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마음껏 상상해낸 이 전대비문의 ‘헤프닝’은 셰익스피어가 작가로서 위기를 맞는 것이 그의 성공적인 자신감의 위축과 함께 온 것일 지도 모른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정신과 의사의 카우치 같은 의자에 누워 점성술사에게 자신의 재능이 사라져버렸음을 고백하는 젊고 혈기왕성한 셰익스피어의 모습과 그에게 사랑의 부적을 전해주는 점성술사의 현대적인 재현처럼 영화의 초반부는 현재의 헐리우드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투영해낸다. 돈 앞에 서는 맥도 못추는 가난한 극장주는 자신의 작품을 지킬 엄두조차 못내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무자비한 고문도 서슴치 않는 악덕고리업자는 금융자본자의 전형성을 희극화시킨다.
개가 나오고 해적왕이 나오고 로맨스가 있는 연극을 주문생산하고 이익분배와 캐스팅까지 좌지우지하는 고리대금업자는 연극의 매력에 감동받아 진정으로 예술을 사랑하게 되어 심지어 출연까지 하게 된다. 연극은 악의 씨앗이며 여자들을 음탕하게 만든다며 설교하던 신부도, 연극에서의 사랑은 실제의 사랑이 아니라며 차갑게 내기를 걸던 엘리자베스 여왕도, 특별석을 만들어 돈을 벌 기회만 노리는 무지막지한 고리대금업자도 [ 로미오와 줄리엣 ]을 보고 감동의 물결을 이룬다. 어쩌면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만든 이들도 이 영화가 ‘몰아의 감동’과 ‘흥행’을 담보해주는 성공작이 되리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역사는 한바탕의 버라이어티 엔터테인먼트 쇼를 즐길 수 있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떠오른 것이다. 어쩌면 엘리자베스 왕조시대의 [타이타닉]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헐리우드는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1593년과 1998년, 그리고 헐리우드의 스튜디오와 런던의 무대, 시공간의 차이를 넘나드는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자기창조의 그 힘든 제의를 400여년전의 극장을 빌어 살짝 고백한다. 여기에서 실제와 허구의 변별점을 찾아보려는 최소한의 이성은 정말 무의미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극과 비극을 넘나들면서, 어쩌면 같은 말일지 모르지만 헐리우드의 코미디와 로맨스 장르를 오가면서 (셰익스피어 인 러브)는 상상 속 허구의 인물과 실존 인물들 사이를 매끈한 박음질로 이어간다. 헐리우드 장르영화의 세련된 클리쉐와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에서 추출된 여러 모티브와 캐릭터들은 유쾌하게 자기자리를 찾아간다. 창작 동기와 과정이 공개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라의 남장 여자의 활약은 [베니스의 상인]을 명예를 얻기 위해 정략 결혼을 해야 하는 바이올라가 ‘딸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말할 때에는 [리어왕]의 코델리아가 겹쳐 진다. 발코니에서의 아쉬운 이별장면과 바이올라 방에서의 밀회, 희극적인 조연들의 탄탄한 뒷받침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넘나들며 혹은 극본과 영화장치를 넘나들며 미증유의 호흡을 만들어 낸다.
올리비아 핫세와 레오나드 파이팅 주연의 하이틴 멜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전미와 클레어 데인즈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MTV리듬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성, 그리고 베토벤의 엘리제가 누구일까로 바꾸어 볼 수 있는 (불멸의 연인)의 진지함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는 모두 소용없다. 미국의 버지니아 주가 생기기도 전에 버지니아 담배 농장을 관리하러 떠나야 하는 바이올라와 웨식스 경에 관한 이야기도 귀여운 ‘옥의 티’(역사의 무지 혹은 왜곡이 아니라)정도이며, 크리스토퍼 말로의 죽음과 존 웹스터의 어린 시절의 묘사 역시 ‘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근거없는 믿음마저 안겨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친구들, 또는 그 자신의 시대
에드워드 알레인(1566-1626)-벤 에플렉
크리스토퍼 말로의 비극작품에 주로 출연한 당대 최고의 연극배우. 영화에서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리대금업자를 당당히 압도하는 대배우의 풍모를 보인다. [ 로미오와 줄리엣 ]에서 머큐쇼를 연기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조셉 파인즈
영국의 대문호. 스트레포드의 장갑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8세의 나이로 엔 헤스웨이와 결혼, 세명의 자녀를 두었다. 영화에서는 사랑과 재능을 갈구하는 열정적인 젊은 극작가이자 배우로 바이올라와 숙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필립 헨슬로우(?-1616)-제프리 러쉬
과부가 된 전 주인의 부인과 결혼해 갑부가 된 후로 극장 사업에 투신함. 영화에서는 빚에 쪼들리며 전전긍긍하는 순박하고 줏대없는 제작자로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주디 덴치
천하의 난봉꾼이었던 헨리 8세와 ‘천일의 앤’의 딸. 대영제국의 기초를 확립한 위대한 여왕. 영국과 결혼한 ‘버진 퀸’으로 영화에서는 무대에 오른 ‘금지된 여자’ 바이올라를 눈감아 준다.
바이올라(허구 인물)-기네스 펠트로
작가적 재능의 위기에 빠진 셰익스피어의 뮤즈. 상인계급을 탈피하기 위해 귀족과 정략결혼을 한다. 무대에 대한 열정으로 셰익스피어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 로미오와 줄리엣 ]을 완성시키다.
휴 페니만(허구 인물)-톰 윌킨슨
악덕 고리대금업자이지만 연극의 깊은 매력과 셰익스피어의 재능에 눈떠 열렬한 지지자가 된다. [ 로미오와 줄리엣 ]에 독약을 파는 약제사로도 출연한다.
웨식스 경(허구 인물)-콜린 퍼스
귀족의 허영기만 남은 감수성 제로의 인물. 부유한 상인의 딸인 바이올라와 결혼하여 지참금만을 요구한다. 셰익스피어와 바이올라의 사랑에 대한 질투심에 결투를 신청하지만 둘의 사랑을 막지 못한다,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루퍼트 에버릿
시인이며 극작가로 엘리자베스 시대의 드라마 구조를 발전시킨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영화에서는 [ 로미오와 줄리엣 ]의 기본 아이디어를 셰익스피어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매력
여자가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시기에 무대를 갈망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남장 에피소드, 신분 상승을 꾀하려는 부유한 상인과 명예만 남은 파산한 귀족 간의 정략 결혼, 그리고 당시의 쇼 비즈니스(연극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살을 더해 가면서 격조높은 ‘ 시대물 로맨스 코미디 ’로 완성되었다. [ 로미오와 해적의 딸 에델 ]이 [ 로미오와 줄리엣 ]이 되기까지, 혹은 [ 로미오와 줄리엣 ]이 [ 셰익스피어 인 러브 ]가 되기까지의 겹겹이 겹쳐진 허구와 실제의 경계는 90년대의 속도감으로 포장되어 경쾌하게 흐른다.
어쩌면 쥬라기 시대에 티라노사우러스가 살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과학적인 사실로 알고 있는 아이들처럼 셰익스피어의 [ 로미오와 줄리엣 ]과 [ 셰익스피어 인 러브 ]의 경계를 지우는 영화의 매력은 또 하나의 역사인식의 오류를 선동할 지도 모른다. ‘ 역사 인식의 부재 ’나 ‘ 왜곡된 역사인식 ’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 행복한 ’오락 영화는 당분간 헐리우드의 흥행대작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