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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지역 |
o 미래사 편백나무 숲
o 종현산 적송 군락지
o 걸망개 숲
o 물개 숲
o 클럽 ES 통영리조트 소나무 숲
o 당포마을 당산나무
o 원항마을 팽나무 숲
o 관유마을 은행나무
o 산양초등학교 곰솔나무 동산
o 죽전마을 당산나무
o 야솟골 탑내 숲
o 추도 후박나무
o 연대도 당산나무
용남면
o 달포마을 당산나무
o 대안마을 은행나무
o 동부마을 느티나무
도산면
o 덕치마을 당산나무
o 원동마을 숲
o 최 씨 선산 곰솔나무와 배롱나무 숲
o 가오치 팽나무
o 송지단 적송 군락지
o 수월마을 숲
o 구촌마을 곰솔나무 숲
o 잠포마을 숲
광도면
o 용호마을 돌탑과 팽나무 숲
o 대촌마을 돌탑과 천개사 은행나무
o 상촌마을 느티나무
o 안정사 적송 숲
o 임내마을 팽나무
욕지면
o 욕지 모밀잣밤나무 숲
o 학사목
o 원량초등학교 소귀나무
o 용천사 장수나무
o 상촌마을 천왕산 신당숲
o 불곡마을 바닷가 팽나무
o 옥섬 숲
o 외로운 팽나무와 유동마을 당산나무 숲
o 도동마을 당산나무
o 우도 생달나무와 후박나무
한산면
o 한산도 제승당 풍치림
o 의항마을 해송 숲
o 대촌마을 팽나무와 느티나무
o 장곡마을 당산나무
o 봉암마을 독메산 소나무 숲
o 예곡마을 해안 숲
o 죽도 당산나무
o 대매물도 대항마을 당산나무 숲
o 비진도 팔손이나무
o 비진도 외항마을 소나무 숲
사량면
o 진촌마을 팽나무
o 돈지초등학교 팽나무
o 내지마을 느티나무 숲
동 지 역 |
o 미우지 느티나무 숲
o 동개섬 소나무 숲
o 데메마을 느티나무
o 봉숫골 느티나무
o 용화사 수원지 주변 적송 숲
o 착량묘 팽나무 숲
o 통영 충렬사 동백나무와 느티나무
o 김약국의 딸들 무대가 된 느티나무
o 벼락당 후박나무
o 통영 세병관 느티나무
o 무전동 굿당 팽나무와 소나무 숲
o 우포마을 팽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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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양읍
산양읍은 동쪽에는 미륵산이 우뚝 섰고 서쪽으로는 장군봉이 자리해 있다. 남쪽으로는 다도해 푸른 물결을 거느린 희망봉이 있고 북쪽으로는 병풍처럼 둘러싸인 구망산이 내려다보고 있다. 일찍이 당포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고 임진년 난리 속에서도 당포해전에서 대승함으로써 한산해전의 교두보 역할을 다 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연막개, 남평들, 신봉들 같은 문전옥답은 철따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했다. 점점이 박혀있는 보석 같은 섬들을 거느린 바다는 우리의 영원한 보물창고다. 굴, 멍게, 축양 등은 삶의 밑천이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가는 이의 전설을 안고 있는 곳이 세포마을이다. 포구가 가늘고 깊다는 순 우리말 ‘가는 개’를 ‘세포’라고 고쳐 불렀다니 민망스럽다. 지금은 차라리 꽃대궐로 이름 붙여도 좋을 전원 마을이다.
오른쪽으로 벌포를 비롯한 열세 개의 자연마을을 거느리고 게처럼 엎드린 풍화반도를 따라 돌아 나오면 활목이다. 활의 목처럼 생긴 궁항마을과 까마귀처럼 생긴 오비섬 처녀총각은 결혼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유효하다니 아이러니다.
갯벌을 막아 농경지로 만든 연막개들을 지나면 읍소재지 마을이다. 최근 완공된 스포츠파크가 없었더라면 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장군봉을 신격화 하는 원항마을은 장군봉 정상에 삼덕마을 제당을 지어 매년 섣달 그믐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 당포성을 중심으로 성 안과 성 밖을 구분했던 마을이 당포다. 동백이 가장 아름다운 중화, 연명마을을 지나 다도해 올망졸망한 섬들을 발 아래로 거느린 달아공원에 올라서면 어느덧 풍경화 속에 내가 서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한때 통발어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달아마을을 지나면 수산과학관이다. 태평양을 바라보며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이곳은 바다의 산 증인이다. 일출과 일몰을 함께 구경할 수 있는 귀한 곳이다. 코앞에 보이는 만지도, 연대도, 저도, 학림도, 송도, 오곡도도 다 산양의 가족들이다. 척포, 새바지, 걸망개를 지나면 삼칭이 마을이다. 옛날 삼천진이 있었다 하여 붙인 삼칭이 마을이다. 종현산 아래로 떨어져 생긴 복바위는 삼칭이 마을의 명물이다. 산양의 마지막 마을 수륙터 코끝에 앉은 곳은 한산도다. 관광일주 동백로를 따라 열세 개의 마을에다 풍화반도와 섬마을 등 서른 개의 마을마다 제 나름의 특성을 살려 순박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가족처럼 살아가는 곳이 산양이다.
미륵산 편백나무 숲
/산양읍 영운리 915-1번지/
미륵산은 통영의 객산이다. 미수ㆍ봉평ㆍ도남동과 산양읍을 경계 짓는 46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산정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옛 천제단을 비롯하여 제2봉에는 봉수대가 있다. 산기슭에는 용화사, 관음암, 도솔암, 미래사를 품고 있어 호국성지인 동시에 불교문화의 요람이다.
미륵도 가운데 높이 솟아 그 자태가 수려할 뿐 아니라 정상에 서면 사방팔방 탁 트인 쪽빛 바다 위로 520여 개의 섬들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2008년 개통한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로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100대 명산의 하나로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미륵산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땔감을 제공하고 재산 1호인 암소를 배불리 먹여 키웠다. 오염되지 않은 약수를 공급하고 산책할 수 있는 오솔길도 주어 영육을 살찌웠다. 청설모, 통영병꽃 등 온갖 희귀 동식물과 구녕바위, 신선바위, 신선대 등을 두어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아 예인으로 키운 곳이다. 유치환, 윤이상을 비롯한 통영문화협회 회원들이 뻔질 나게 오르내리며 친목을 도모하고 작품을 구상한 곳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청마의 안내로 미륵산에 오른 시인 정지용이 왜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산양관광도로를 따라 가다 이운마을 고개에 이르면 미래사 가는 길 이정표가 나타난다.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다 보면 편백나무 숲 속에 고즈넉이 앉은 절이 미래사이다. 미륵산 등반 후 영운리로 하산하면서 잠깐 들러도 된다.
이 절은 효봉스님의 상 수제자 구산수련대선사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 창건하였다. 주로 효봉 큰스님의 문도들이 주지를 역임하면서 차츰 키워 온 선도량이다.
평양 복심법원 이찬형(李燦亨 1888~1966) 판사는 독립투쟁을 하다 재판에 회부된 청년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청년은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이찬형을 향해 호통을 쳤다. “네 이놈 듣거라! 왜놈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고 목숨 바쳐 싸웠거늘 똑같은 조선사람인 네놈이 왜판사가 되어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단 말이냐! 짐승보다 못한 놈!” 청년은 이찬형의 얼굴에다 퉤퉤 침을 뱉어 버렸다. 이 때 이찬형은 사색이 되어 집으로 왔다. 판사생활 10년에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그는 식음을 전폐하고 “오판이야! 오판!”하며 미친듯이 되뇌이기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번뇌의 나락에 빠져 한동안 고통으로 지새웠다.
일찍이 이찬형, 아니 효봉은 평남 양덕군 쌍용면에서 지주 아버지 이병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은 사서삼경의 신동으로 칭송을 받았다. 성장해서 광성보통학교를 나와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결혼 해 2남 1녀를 두었다. 그 후 와세다대 법정학부 졸업과 동시에 귀국해 법관생활을 시작해 1914년~1923년 사이 경성지법·함흥지법·평양 복심법원 판사를 거쳤다. 그의 재임 기, 독립과 관련된 애국지사들이 법망에 걸려 고통을 받는 시기에 하필이면 사법기능의 한 자락을 맡게 된 것이었다.
법관생활을 하다 느닷없이 부딪힌 결정적 충격으로 인해 효봉은 입산하고 말았다. 1926년 38세의 늦깎이로 입산해 올깎이 중에 못지않게 득도하는데 용맹정진으로 일관했다. 한때 금강산 범기암 벼랑의 토굴 속에서 법 탐구에 몰두했는가 하면 통도사의 용성龍城스님, 북간도의 수월水月스님을 찾았으나 구하고자 하는 환희심을 얻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한 적도 있었다.
생의 후반기에는 해인사 가야총림, 금정사, 통영 도솔암, 미륵산 토굴, 미래사에서 고절의 수행을 거듭했다.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사명대사가 주석했던 표충사 서래각에서 시자들이 숨을 몰아쉬는 스님에게 마지막 말을 청했다. “나 오늘 갈라네”“언제쯤 가시렵니까?”“오전에 가지” 그리고 나서 오전 10시에 세수 79세, 법랍 42년을 일기로 입적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합천 해인사에 있던 효봉스님이 제자들과 함께 부산을 거쳐 배를 타고 해남 대흥사로 피난 가던 중 심한 바람으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마침 통영 미륵산에 있는 도솔암이 비었다기에 며칠 쉬어갈 요량으로 들렀으나 살만해서 아주 눌러 앉아버렸다. 소문을 들은 완산, 경산, 범용, 경운, 탄허, 성수 등 한국 불교계의 거물들이 줄줄이 내려왔다. 그들이 머물자 통영 도솔암은 한국 불교계의 요람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효봉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았던 ‘무소유’의 법정스님이 사미승으로 있었던 절이라 하여 스님께서 열반 후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효봉도 가고 법정도 떠났지만 미래사는 더욱 절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절 주변의 편백나무 숲은 전국 사찰임야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약 100여 년 전 일본인이 심어 가꾸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가자 미래사에서 매입하여 오늘날의 숲으로 가꾸어 온 것이다. 절 전체를 뒤덮고 있는 편백나무 숲의 면적이 너무 넓어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자라고 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수천 그루의 편백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늘어선 가운데 그 특유의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고 있다. 편백나무는 항균성 물질인 피톤치드 정유함량이 제일 많은 나무로 산림욕을 통해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 해소와 면역기능 향상은 물론 소염 진정 등의 효능이 탁월하다고 한다.
최근 편백 잎에서 정유한 물질인 ‘아토치드가습액’이 폐렴균과 칸디다균 살균에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이 입증되기도 했다.
웰빙바람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편백나무 숲을 찾고 있고 암을 극복하려는 환자들도 편백나무 숲 곳곳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인근 나폴리농장에서는 편백나무를 활용한 아이템을 개발해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하니 편백나무의 명성을 알만하다.
종현산 적송 군락지
/ 산양읍 영운리 산 55-1번지/
도남동에서 차를 몰아 동백나무 숲으로 반쯤 가려진 한산 앞바다를 훔쳐보며 수륙마을을 지나면 곧장 영운리이다. 영운초등학교 맞은편에는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종 하나가 하늘에 매달려 있다. 줄을 놓아 버리면 금방이라도 바다에 빠져버릴 것 같은 형국이다. 종의 표면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수백그루의 적송을 수놓았다.
산의 형세가 마치 거대한 종을 하늘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생겼다하여 종현산鐘懸山이라 이름 지었다. 마을 공동 소유의 산이라 하여 동네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운은 마을 뒤로는 통영의 객산인 미륵산이 마을을 안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이운마을을 감싸고 있는 남산(불썬당먼덩)과 왼편으로는 종현산이 있어 천연요새다.
이 산에는 수 천 그루의 적송이 자라고 있다. 토양이 마사토로 소나무의 자람이 더디어 화분 위의 분재를 감상하는 것과 같다. 봄에는 온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여 소나무와 어우러지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혹여 흰 눈이라도 올라치면 더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조경업자들이나 소나무 분재를 좋아 하는 사람들이 늘 눈독을 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삼칭이 마을로 들어오는 바다 입구에는 종현산에서 떨어져 생긴 것처럼 복바우가 버티고 서 있다. 해면 위로 솟은 바위의 형상이 남근을 닮았다고 하여 삼칭이 좆바우라고도 일컬었는데 지금은 상스럽다하여 복바우라 부르기도 한다.
‘삼칭이 복바우’라는 남근암 형상의 바위에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옛날 선녀 세 명이 옥황상제의 근위병 세 명과 사랑을 나누다 발각되어 벼락을 맞고 그 자리에서 돌로 변해 지금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바위 맞은편에 소라모양의 동굴이 나란히 패어져 있는데, 여자의 성기와 닮았다 하여 자식을 원하는 부부가 기원을 드리면 아이가 생겼다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영운리는 일운ㆍ이운ㆍ수륙 등 세 개의 행정마을을 거느리고 있다. 이곳은 미륵섬 남쪽 해안지역으로 옛 통제영의 삼천진三千鎭이 있었던 곳이다. 삼천진이 설치된 포구라 하여 삼천포 또는 삼천진리라고 칭했으며 토박이지명으로는 삼칭이라 일컬었다.
전래의 일운과 이운은 옛날 조세양곡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정박했던 포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영운리는 병합된 두 마을의 영원한 행운을 기원하는 뜻에서 영운이라 이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 삼도수군통제영의 효시가 되었던 한산진을 설치했던 한산도 제승당과 고 박정희 대통령의 하명으로 세우긴 했지만 아직도 준공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한산도 문어포의 한산대첩기념비가 지척에 있다.
최근에는 도남동의 충무마리나 리조트에서 수륙마을을 거쳐 낚시공원, 해골바위, 일운마을까지 연결된 해안도로는 도보와 자전거 도로로 조성되어 각종 마라톤대회를 비롯하여 트라이애슬론 대회가 열리고 있다. 약 4km 구간의 이 길은 국토해양부의 해안누리길로 선정되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걷기 좋은 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수산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지만 최근에는 곳곳에 펜션이 들어서고 음식점이 늘어나고 있다. 더더욱 이운항이 다기능복합어항으로 개발된다는 계획이 발표됨으로써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걸망개 숲
/산양읍 신전리 324-1번지/
걸망개 숲은 신봉마을에 있는 방풍림이다. 규모면이나 나무의 종류로 보아 어느 곳보다 완벽하게 조성된 숲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세가 약해지고 이곳저곳에서 죽어가는 나무가 많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숲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이다. 도남동에서 영운리를 거쳐 가는 길이 있고 산양읍에서 양지농원과 박경리기념관이 있는 신봉고개를 넘어 오는 길이 있다. 또 하나는 산양 삼거리에서 달아마을과 봉전을 거쳐 오는 방법도 있다.
지금은 산양일주 동백로와 박경리기념관으로 세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지명이다. 이 마을의 원래 토박이 지명은 걸망개였으며 거을망포巨乙望浦, 걸망포傑望浦, 건망포建望浦 등의 한자로 표기했다.
이곳 해안의 절골에 유서 깊은 절이 있었다. 마치 스님이 등에 메는 걸망(바랑)처럼 둥글게 생긴 포구 또는 미륵산 큰 망의 남쪽에 인접한 큰 포구라 하여 큰망개의 뜻에서 유래하여 걸망개라 일컬었다.
인걸이 없어 인재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에는 임진란 전부터 김ㆍ여ㆍ백 세 성씨가 처음 들어 와 살았다고 하며 임진란 때 풀띠로 엮어 만든 거적(뜸)을 삼천진三千鎭에 납품했다고 전한다.
이 숲은 400여 년 전 방풍림으로 심었다고 하는데 600㎡의 면적에 팽나무,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자연 파종된 소나무까지 가세하여 약 스무 그루의 거목이 줄지어 서있다. 매년 이 숲에서 마을의 풍어와 풍년을 비는 마을 동제를 지내고 있어 당산 숲이라 하기도 한다.
작년 가을에 찍어두었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찾은 날은 마침 일요일이자 추석을 앞둔 성묘철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벌초를 마친 사람들이 당산 숲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당산나무 아래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하며 주변 청소도 책임진 마을 토박이 가게 아주머니는 금시 나를 알아보고 “나무에 벌레가 많아 못살겠으니 시청에 가거든 꼭 나무에 약을 쳐 달라”며 부탁한다. 모든 것을 예사로 보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당산나무는 그 노구를 이끌고 오늘도 인간들이 배출한 그 지독한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도 끄떡없이 신선한 공기를 내뿜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이야 동제를 지내는 풍습도 사라졌지만 산양관광일주도로를 찾아 온 관광객들에게 쉼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의 휴식처이자 마을 일을 논의하는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걸망개 숲 앞까지 바닷물이 들고나던 해안을 매립하여 본래의 모습은 찾아 볼 길 없다.
지금도 산유골에서 발원한 맑은 계곡물이 산유골 저수지에서 한숨을 돌렸다가 다시 신봉들을 적시고 걸망개 바다와 합류한다. 신봉은 상촌, 중촌, 양촌, 남촌 등 네 개의 자연마을을 거느리고 있으며 주민들은 주로 신봉들에서 나락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최근 한국 소설문학의 거목 박경리 선생의 유택이 마련되고 기념관까지 들어서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찾고 있다. 특히 박경리 묘소에서 바라다보는 신봉들판과 걸망개 숲, 그리고 한산앞바다의 풍경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왜 선생께서 온 세상을 주유하다가 이곳에 와서 영면하고 계신지를 문득 깨닫게 된다.
"아이 목구멍에 젖 넘어가는 소리와 내 논에 물들어 가는 소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다.“라고 말씀 하신 선생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물개 숲
/산양읍 미남리 134-6번지/
미륵도 산양관광도로를 돌다보면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마을이 마동馬洞이다. 마동으로 들어가는 길은 달아마을에서 수산과학관 쪽으로 새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가는 방법과 달아마을과 봉전마을의 중간 지점에서 가파른 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어느 곳에서도 마을은 보이지 않지만 고갯마루에 이정표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마동은 전래의 설화 아기장수와 용마龍馬를 비롯하여 마을 뒷산 지명인 말랑봉 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척포와 수포 두 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수포(물개)는 마동 동북쪽에 있는 자연마을인데 북쪽 큰 골짜기의 계곡물이 개울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포구라 하여 일컬었던 토박이 지명이다. 한때 이 두 개 마을을 아울러 화양초등학교 미남분교가 있었으나 오래 전 폐교되어 옛 건물만 을씨년스럽다.
박경리의‘홍합’이라는 유고시에 나오는 첫개는 척개를 일컫는다. 지금도 척포에는 박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으로 보아 이를 뒷받침한다.
통영 항구의 동충 끝을 지나고
해명 나루 지나고
작은 통통배
용화산 뒤편을 휘돌아 가니
첫개라는 어촌이 있었다.
인가가 몇 채나 되는지 희미해진 기억
푸른 보석 같은 물빛만은
지금도 눈에 어린다.
친지 집에서는 내가 왔다고
큰 가마솥 그득히 홍합을 삶아내어
둘러앉아서 까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던 홍합
그때처럼 맛있는 홍합은
이후 먹어본 적이 없다.
내 나이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손님은
큰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잠은 작은집에서 잤는데
아저씨는 어장에 가고 없었다. <하략>
박경리의 <홍합>
수포(물개)마을 어귀에는 예사롭지 않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줄지어 서있고 느티나무 숲 속으로 조그마한 충혼탑 한 기가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탑 뒤편으로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모밀잣밤나무 등이 어우러져 주변 경관이 더욱 아름답다.
“이 충혼탑은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6․25동란을 맞아 조국 수호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마동 출신 전몰 용사 박용조, 천종권, 정영준, 김남천, 이맹도, 김봉건, 정태완, 전종철, 이암우 등 아홉 명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뜻을 후손에 전하기 위해 ‘마동 제대 장병 동지회’에서 1958년 달아고개에 건립하였던 것을 1978년 5월에 이곳으로 옮겨 와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는 내용의 설명문이 탑의 내력을 소상히 얘기한다.
1978년 충혼탑을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면서 심은 것으로 보이는 느티나무의 수령은 약 30~4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호성 마을 이장은 “예전에는 마을주민을 비롯하여 유가족, 미남분교 학생, 군부대 장병들까지 참여하여 현충일 행사를 크게 치렀다. 그러나 지금은 유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에서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아 행사는커녕 현충일을 기해 이장이 주변 청소를 하고 마을대표로 술 한 잔 정도 따르는 것이 전부다. 마침 통영해병전우회에서 매년 잊지 않고 조화를 보내줘 고맙다”라며 아쉬워한다.
“내년부터는 마동마을 청년회 주관으로 정성껏 현충일 행사를 마련함으로써 이를 마을 전통으로 만들어 보겠다.”며 확고한 의지를 밝히는 이장의 성의가 고마울 따름이다.
클럽 ES 통영리조트 소나무 숲
/ 산양읍 미남리 697번지/
산양관광도로의 중간 지점에 있는 마을이 달아마을이다.
옛 가야지역에 산재한 다라多羅계의 지명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 다라ㆍ다래 등의 음차 표기한 한자 지명이라는 설과 한자 지명을 풀이하여 주변의 지세가 마치 코끼리의 어금니를 닮은 것에서 유래했다는 지명 유래설이 있다.
이 마을은 한때 장어통발업의 성업으로 산양에서 가장 부자 동네로 알려지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잦은 해난사고로 인한 사업 실패로 현재는 장어통발업을 하는 어민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학림도, 만지도, 연대도 등 연안 섬으로 나가는 길목으로 연중 낚시 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달아공원에서 바라다 뵈는 보석 같은 아름다운 섬과 사량도 너머로 지는 낙조는 가히 일품이다. 특히 통영수산과학관에서 보는 일출과 일몰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통영의 제일가는 명당이라 할 만하다.
최근에는 수산과학관 위에 친환경적으로 조성된 클럽ES 통영리조트로 인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마을이기도 하다.
한려해상국립공원구역으로 지정되어 개발행위가 제한되는 이곳에 수산과학관을 짓기 위한 통영시의 노력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되고 남는다.
수산과학관 건립 당시 확보해 두었던 시유지(지금의 클럽ES 통영리조트 자리)를 구입하여 지금의 명물로 만들기 위해 공들인 이종용 회장의 마인드와 집념은 다 아는 사실이다.
클럽ES 통영리조트는 25,864㎡의 대지 위에 연면적 10,203㎡, 106개의 객실을 갖춘 가족호텔이다. 주황색 기와와 흰 외벽, 아치형 창과 기둥 등 지중해의 이국적 풍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곳이다.
코발트빛 바다와 올망졸망한 섬으로 물길을 이룬 삼백리 한려수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다운 한려수도의 자연경관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법으로 지정한 한려해상국립공원구역의 산꼭대기를 파헤쳐 호텔을 지었다면 수많은 환경단체의 반대에 부딪칠 만도 한데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숲 속으로 보일 듯 말 듯한 호텔의 외관은 오히려 보는 이에게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이는 오로지 명작을 만들겠다는 이회장의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돌, 바위, 나무들을 모두 살려 조경의 재료로 쓴 그의 아이디어는 감동적이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과 바다와 연결된 듯한 소나무 숲 사이의 야외 수영장과 인근 야산으로 이어진 오솔길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주말마다 연출하는 야외 공연은 리조트의 품격을 더 높인다.
공사 도중 중기를 잘못 작동하여 소나무 한 그루를 다치게 한 중장비 기사를 그 자리에서 해고했다는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다. 곳곳에 제 스스로 몸매를 갖춘 수십 년 된 늘씬한 적송들, 군락을 이루며 하늘 높이 치솟은 곰솔과 상수리나무 숲은 우리의 숨을 멈추게 한다. 아름다운 건축상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만든 아름다운 숲 덕분이므로 소나무에게 감사 제사를 드릴 만도 하다.
제아무리 좋은 집을 지었던들 저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없었다면 이토록 세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 어느 조경사가 얼마나 많은 돈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을 설계하고 시공할 수 있단 말인가. 개발과 보존이 왜 손잡고 가야 하는지를 이곳에서 배울 일이다.
당포마을 당산나무
/산양읍 삼덕리 373-1번지/
산양읍 삼덕리는 당포ㆍ 원항ㆍ 궁항 등 세 개의 행정마을로 구성된 곳이다. 특히 당포마을은 당포성과 당포해전의 역사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다.
당포마을을 감싸고 있는 당포성지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영장군이 병사와 많은 백성을 이끌고 성을 쌓고 왜구를 물리친 곳이다. 성안에는 관아가 즐비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선조 25년(1592)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당포성이 점령당하였으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는데 이것이 당포승첩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성이 허물어져 지금 남아있는 석축의 길이는 752m, 최고 높이 2.7m, 폭 4.5m이다. 동․서․북쪽에는 망을 보기위해 높이 지은 망루터가 남아 있고 문터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쌓은 작은 옹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성지는 도 기념물 제63호이다. 1960~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배고프던 시절 문화가 밥 먹여 주느냐며 멀쩡하던 성돌을 빼다가 선착장을 메우고 마을 안길을 포장하는데 썼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당포성 복원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시군 통합 당시 현장으로 뛰어다니던 때가 엊그제만 같은데 이제 제법 제 모습으로 복원되어 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포해전과 관련한 난중일기(당포파왜병장)일부를 소개한다.
1592년6월2일(양력 7월10일) 맑다. 아침에 떠나 바로 당포(고성현 :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앞 선착장에 이르니 적선 20여 척이 줄을 서서 정박해 있었다. 우리 배가 둘러싸고는 서로 싸움을 벌였다. 적의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였다. 배 위에는 누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됨직하였다.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우뚝 앉아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편전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비가 퍼붓듯 마구 쏘아 대었더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졌다. 순간 모든 왜적이 놀라서 한꺼번에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남김없이 모조리 무찔렀다.
임진년(1592)년 옥포(합포), 적진포, 사천해전에 이어 네 번째 맞은 당포해전의 전말이다. 이는 한산대첩보다 먼저 거둔 청사에 빛나는 대 승첩이자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교두보 역할을 한 중요한 해전이었다. 당포앞바다는 여수와 부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이순신 함대가 바람을 피해 정박하면서 작전을 구상하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마을 어귀의 벼랑 끝에는 팽나무 네 그루가 이리저리 엉켜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다. 나무 밑에는 남녀 돌벅수 한 쌍이 정겹게 서 있다. 아직도 목에는 띠가 둘러져 있고 벅수 앞에는 최근 누가 치성을 드렸는지 술잔과 떡이 차려져 있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어촌으로 신에게 만선과 안녕을 빌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만 해도 토속신앙이 가장 성행했던 곳 또한 이 마을이다. 산양일주도로가 확장되기 전에는 이 마을로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노거수와 돌벅수에게 절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마을에서는 정월 초사흘 새벽 온 동네 사람들이 밥상을 들고 나와 목신 앞에 제사를 지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했다.
“목신께 비나이다. 벅수님께 비나이다. 우리 동네 동민은 일 년 열두 달 삼백 예순 날을 하루같이 건강하고 바다에 나가면 고기 잘 잡히고 농사지으면 대풍이 들고 먼 길로 가거나 장사를 하거나 소원 성취되도록 두 손 모아 비나이다.” 라며 정성껏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미신이라 없앨 것이 아니라 전통을 계승․보존하는 것도 우리의 할 일이다.
원항마을 팽나무 숲
/산양읍 삼덕리 522-2번지/
산양읍 삼거리에서 욕지 행 뱃머리가 있는 곳으로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수십 그루의 팽나무와 소나무 숲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곳이 원항마을이다. 뒤로는 장군봉이 버티고 서 있고 앞으로는 당포바다가 천연 요새를 이룬 곳이다. 마을 앞 해안이 매립되어 새로운 도로가 나기 전까지는 이 숲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마을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근세에 와서는 당포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바다를 매립하여 진입도로를 새로 만들었다. 초입에는 욕지를 비롯해서 섬으로 내왕하는 선박들로 늘 붐빈다. 구 당개가 있던 삼덕조선소까지를 매립하여 조성하는 국가어항개발계획으로 주변 지가가 상승하는 등 주민들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로 난 진입로 입구 오른쪽에는 최초 서양인 도래지표석이 서 있다. 규장각에서 발굴한 조선 왕조의 국경수비일지『등록유초』에 “1604년(선조37)6월 15일 포르투갈 상인 ‘주앙멘데스’가 통영 당포항에 표착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서양인인 것이다.
옛 당포만호진 입구의 원문轅門 에 해당하는 잘록한 목을 형성한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원래 원항․원목으로 일컬었던 것에서 유래하여 훗날 원항으로 변천된 지명이다.
마을 뒤편의 장군봉은 원항마을 주산으로 문필봉을 거느리고 있고 미륵산, 구망산, 장군봉 등 세 봉우리가 삼각 꼭짓점을 이룬다. 산 능선 위로 우뚝 솟은 둥근 바위산정이 투구에 갑옷 차림을 한 장군의 형세를 닮았다하여 장군봉이라 이름 붙였다는 설과 임진란 때 의병장 탁연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여기에 진을 쳤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등의 설이 전해진다.
장군봉 정상에는 삼덕리 마을제당인 장군당과 천제당 두 채의 건물이 있다. 이곳 당포진에 수군만호가 있던 시절에는 초가였는데 1925년 기와지붕으로 개수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장군당, 산신화, 목마(용마), 천제당, 돌벅수 한 쌍, 당산신목 등 일련의 민간신앙 자료들이 골고루 잘 갖추어 있어 민간신앙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마을의 동제는 정월 초하루 첫 새벽에 천제당, 장군당에서 먼저 산신과 장군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마을로 내려와 벅수제와 용왕제를 지낸다. 동제를 주관하는 소임은 벅수 앞에서 동네 안녕을 기원하는 축문을 외우고 각 가정의 대주 이름을 부른다. 축이 끝나면 절을 하고 소지를 올린다. 용왕제는 배를 부리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참석한다. 이것을 보면 벅수제는 마을의 안녕과 농업에 관련된 신이고 용왕제는 어업과 관련된 신임을 알 수 있다. 벅수제, 용왕제가 끝나면 마을의 메구꾼들이 풍악을 치고 지신밟기를 한다.
마을 어귀에 있는 이 아름다운 숲은 수백 년 된 팽나무 아홉 그루와 소나무 네 그루로 이루어진 신선 같은 숲이다. 어촌마을의 숲은 대부분이 해풍을 막기 위해 바닷가에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물론 새로운 진입로가 나기 전에는 이곳이 마을 진입로의 입구이다.
이 숲은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소통의 장이었고 정월 초하루 새벽에는 극진히 밥상을 차려 놓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당산제의 제단이기도 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최근에는 일련의 제사 과정을 스님에게 대행하게 하는 등 오랜 풍습이 차츰 사라져 가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동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마을 숲이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관유마을 은행나무
/ 산양읍 삼덕리 412-1번지/
당포마을 너머 동네가 관유마을이다. 즉 당포마을에 속한 열대여섯 가구로 구성된 조그마한 자연마을 이름이다. 옛 당포성의 동문 밖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토박이지명으로 성밖과 성외라 부르기도 했다.
관유寬柔는 한말에 개칭된 동리명인데 중용의 글귀 가운데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을 가르쳐 무도한 것을 갚지 않는 것은 남쪽 지방의 강점이니 군자가 거처하는 곳이다’에서 딴 지명이라 전해진다.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오랜 세월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 약 2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나이에 비해 그렇게 덩치가 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열매가 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은행나무이다. 건너편에 있는 산양초등학교의 암은행나무가 이 나무와 짝을 지어 엄청난 열매를 맺는다니 기이한 일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당산나무 또는 목신이라 하여 신성시 한다. 나무 밑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남녀 돌하루방 한 쌍이 서 있다. 원래는 나무장승 한 쌍이 있었는데 이것이 썩어 못쓰게 되자 마을의 조세윤 씨가 사비를 들여 돌하루방으로 교체하였다 한다.
우리 지방에는 대부분 마을 어귀에 액을 쫓고 마을을 지키는 신으로 석장승을 모신데 비해 돌하루방이 생경하긴 하지만 마을의 안녕을 위한 정성이 대단하다. 예로부터 관유마을은 당포․원항마을과 더불어 산양에서도 민간신앙을 가장 많이 믿었던 곳이기도 하거니와 현재까지도 그 풍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마을이다.
소임으로 지정된 제주가 섣달 그믐날 마을 뒷산의 산제터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다음날 정월 초하루 새벽에는 집집마다 밥상을 마련해 나와 이 은행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제를 지내며 쳐 두었던 금줄은 정월 대보름날 메구를 친 후에 걷는 것이 상례다. 최근에는 누가 이 당산나무에 와서 제사를 지냈는지 정월달이 아닌데도 금줄이 쳐져 있고 제사 지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즘도 제사의 효력이 있는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은 꼭 정월달이 아니더라도 가족이 배에 나가 사고가 나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곳 목신 앞에 와서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해 달라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햇빛 좋은 어느 가을날 노랗게 물든 그 장엄한 은행나무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 숙여지고 숭배의 마음이 우러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산양초등학교 곰솔나무 동산
/ 산양읍 남평리 858번지/
산양읍 소재지에는 산양초등학교와 산양중학교가 형제처럼 아래위로 위치해 있다. 산양초등학교는 1938년 4월 13일 개교하였다. 올해로 68회 5,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전통 있는 학교이다. 현재는 학림∙ 곤리∙ 풍화분교를 거느렸지만 모두 다 합해야 120여 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는 작은 학교로 바뀌었다.
그 지역의 학교는 단순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센터이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학교 운동장에서는 수시로 가설극장이 열렸고 콩쿠르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가을 대운동회가 되면 숫제 학생들의 운동회가 아니라 어른들, 특히 면 전체 마을대항 체육대회를 방불케 하였다.
릴레이에 있어서만큼은 나는 6년간 한 번도 마을대표 자리를 다른 친구에게 내 준 적이 없었다. 청군백군 경기에서도 번갈아 청백 띠를 갈아매며 종횡무진 달리고 또 뛰었다. 누구도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이 없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끝나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1960~70년대에는 약 700여 명의 학생들이 북적대던 때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 집에서 보통 2~3명의 형제나 자매가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다. 거의 두 살 터울인 나는 아래로 누이 한 명과 바로 위로 누나와 함께 6년간 초등학교를 다녔다. 최근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하여 이대로 가다가는 학교의 존립마저 위태롭다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학교의 전통을 증명이라도 하듯 교문 안으로 들어서면 깔끔하게 정리된 운동장과 적절히 배치된 정원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교문 앞의 둥근 정원의 소나무 동산을 비롯하여 교사校舍를 오르내리는 세 개의 계단을 따라 제 스스로 몸매를 갖춘 곰솔나무와 동편 곰솔 군락지는 학교의 전통과 연륜을 대변한다.
나의 유년 시절만 하더라도 학교 울타리를 따라 벚나무와 소나무가 이중으로 도열하고 있었다. 우리는 늘 이 소나무와 벚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애향단 깃발을 앞세우고 위기양양 등굣길에 올랐다. 4월이 오면 새 순을 피워낸 그 푸르던 소나무와 눈이 부시도록 화사하게 핀 벚꽃과의 아름다운 조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벚꽃과 소나무의 수명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머지않아 수명을 다할 벚꽃나무를 염두에 두고 이중으로 소나무를 심어 가꾼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우리는 눈부시게 핀 벚꽃과 사계절 내내 푸르럼을 자랑하는 소나무 밑에서 청운의 꿈을 키웠다. 가난했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다.
청년 시절 유난히 보름달이 밝은 4월의 봄밤이 오면 우리는 막걸리를 사들고 학교를 찾았다. 술잔 속으로 떨어지는 꽃잎에 취해 낭만을 찾아 헤맸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정원과 오래된 소나무 숲이 조성된 학교는 보지 못했다. 그 화려했던 벚나무는 수명을 다해 자연으로 돌아갔고 살아남은 소나무마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곳저곳에서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 누가 세월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 아름다운 나무들을 돌보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수백 명의 학생들이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며 철없이 뛰놀던 그때가 좋았다.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저 아이들이라도 소나무처럼 올곧게 자라 이 나라의 동량이 되길 기도해 본다.
죽전마을 당산나무
/ 산양읍 남평리 825-4번지/
죽전竹田 마을 한 가운데는 족히 몇 아름이 되고도 남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수백 년 동안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경배 받고도 남음이 있는 위엄 있고 신령스러운 존재다. 이 당산나무는 정확한 수령을 알 수 없으나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지금의 모습대로 있었다 하니 족히 200년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네 그루가 있었는데 두 그루는 말라죽고 현재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누가 언제 왜 심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어느 선각자가 훗날 정자나무로 심은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유년 시절 우리는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을 어귀에 있는 이 당산나무를 거쳐 학교를 오갔다. 우리의 유일한 놀이터요 도서관이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제 스스로 몸매를 가꾸고 품격을 지키며 꿋꿋하게 서 있는 저 나무를 보며 자란 덕택으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설날을 전후하여 금줄을 두른 나무 앞에 놓인 명태와 떡과 과일은 늘 우리들 차지였다. 몇몇 아이들은 귀신 앞에 놓았던 음식이라 하여 먹기를 꺼려했지만 나는 이를 가리지 않았다.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루, 이틀에 걸쳐 큰 제사가 올려진다. 마을에서 제주로 선정된 소임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여 그믐날 밤 구망산 아래 산제터에서 밤샘 제사를 지낸다. 다음 날(정월 초하루) 새벽에는 마을 주민들이 이 당산나무에 정성껏 밥상을 올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의를 올린다.
이 기간에는 짐승을 도축해서도 안 되고 아이를 낳는 것은 더더욱 금물이었다. 산기가 있는 산모는 다른 마을로 피해야 하는 등 그 제의의 절차는 조금의 부정도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이 기간에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제의 비용을 물어야할 뿐 아니라 마을에서 쫓겨 나가야 하는 법 보다 더 엄한 관습이 있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어길 수 없는 마을의 규범이었다.
물론 옛날처럼 모든 격식을 갖추어 제례를 지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근까지 수십 년 동안 이런 맥을 잇고자 하는 몇몇 분들의 정성으로 옛 풍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그마저도 올해부터는 제례를 지낼 수 없는 사정을 목신에게 고하고 제의를 포기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온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는 소통의 장이 되어주었고 늘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약하며 우리에게 시원한 안식처를 제공해 준 살아 있는 목신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죽전은 근세에 남전마을에서 죽전과 양산마을이 함께 분동되면서 전래의 큰 마을인 죽전지명을 딴 것에서 유래했다. 자연마을로 죽전과 양산이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마을 인근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한 것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 대밭골의 한자 지명이다. 옛날 둔전답을 관리하던 관아가 있었다는 작은 뜸 궁집몰이 있다. 양산陽山은 양지바른 산기슭에 위치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속칭 양삭골이라고도 한다.
현재 읍사무소를 비롯하여 우체국, 중학교, 초등학교, 공공도서관, 스포츠파크 등 공공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읍 소재지이다.
당산나무 아래는 1950년대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가 그림을 그리거나 사냥할 때 가끔 이용하던 별장 같은 농장(현 산양읍 남평리 826-4)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제주도 등의 피난생활이 여의치 않자 통영으로 피난 왔던 이중섭에게 물감, 캔버스 등 미술재료를 공급해주는 등 이중섭의 실질적인 후원자가 김용주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중섭은 민선 초대 충무시장이었던 김기섭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 김용주는 부인에게 부탁하여 당시 가족도 없이 홀로 동원여관[통영우체국(현 항남동 258-6)과 보건약국 부근에 위치해 있던 일본식 적산방]에서 작업하고 있던 이중섭에게 된장, 간장, 김치 등 반찬을 만들어 보냈다. 이중섭이 통영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자 농장 일꾼(머슴)을 시켜 소달구지에 쌀과 부식을 실어 산양면 농가에서 시내까지 실어다 주었다고 서양화가 박종석은 그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김용주(金容朱, 1910. 10. 14. ~ 1959. 1. 15.)는 통영에서 태어나 1934년 동경 카와바타미술학교 양화부川瑞畵學校 洋畵部를 졸업하고 1940년 같은 학교 인체연구실에서 6년간 연구과정을 마치고 귀향하였다. 1940년‘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작품 <외출>, <회상> 2점이 동시 입선되었다‘부산미술전’에 초대작가로 출품하였으며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시내 ‘녹음다방’에서 연이어 3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중앙화단을 도외시하며 고향에서 조용히 작품 활동을 했다. 평생 3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투계(방위)>, <미완성 누드>, <소녀상>, <아내의 초상>, <옥잠화>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자화상>, <바위>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양삭골 풍경>은 1950년 경 산양중학교 뒤편의 솔라끝에서 양산마을 뒷산(일명 산부랑)을 보고 그린 풍경화로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화가 김용주가 이곳에 농장(화실)을 마련한 것은 이 아름다운 당산나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표지석 하나라도 세워 화가를 기억할 일이다.
<야솟골 탑내 숲>
/ 산양읍 남평리 647-1번지/
세포고개에서 산양 삼거리를 거쳐 산양읍사무소를 지나면 최근 준공한 통영산양스포츠파크의 위용이 대단하다. 스포츠파크 정문 앞에서 좌회전 해 들어가면 곧장 만나는 마을이 금평錦坪마을이다. 원래의 토박이 지명은 ‘야싯골’, 한자 지명으로는 야소冶所, 야소곡冶所谷 등으로 일컬었다. 1900년 진남군 때 마을의 주산인 현금산懸錦山 지명의 금자를 따서 금평동이라 칭한 데서 유래했다. 전래의 지명 야싯골, 야소곡은 옛날 인근 산에 여우가 많이 서식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한자 지명 야소곡을 풀이하여 옛날 병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자연 마을로 탑내와 상촌이 있다. 탑내(아랫담)는 마을 입구에 있는 돌탑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해서 탑내라 칭한다.
야솟골은 중생대 백악기 말의 화산 분화구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미륵산 정상에서 보면 어머니의 자궁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분지이다. 통영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없는 섬 속의 마을인 셈이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두 개의 이끼 낀 돌탑이 있고 내川를 따라 백년 이상 된 아름드리 팽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 울창한 탑내 숲이 위치 해 있다. 이 숲은 오래 전 마을 사람들이 방풍림으로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느티나무, 팽나무 등 활엽수 열아홉 그루와 소나무 열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늘 이 나무를 돌보고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 탑제와 당산제를 지낼 때만 해도 수세가 좋았는데 왠지 모르게 요즘은 말라 죽는 나무가 많아졌다. 벌써 고사하여 베어 낸 나무도 여러 그루다.
지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나무를 돌보고 숲 속의 두 개의 탑도 예쁘게 단장하여 세시풍습을 되살린다면 마을의 아름다운 상징이 될 것인데 차츰 무관심해지는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미륵산에서 발원하여 금평과 죽전 들판을 거쳐 연막개 들판을 적시며 가는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산양천은 이 방풍림을 더욱 살찌운다. 아름다운 숲이 좋아 오래전부터 숲 앞의 부지를 구입해 계획한 끝에 아름다운 집을 지어 사는 젊은 부부의 혜안이 부럽다. 마침 이 부부가 조성한 연못 가운데는 아주 특별한 시비 한 기가 서 있다.
2009년 시조시인 서우승 1주기를 맞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연못 한 가운데 세운 ‘물소리’ 시비다.
아주 찾아 나서지는 말고
까마득한 옛 얘기 속 더듬듯
한 여든 해쯤
실안개 속 더듬어 가게나
가다가 지치면 그곳에
오두막채 하나 마련해 살다가
아주 잊지는 말고
한 여든 해 잊고 살다가
문득 왁자그레 물소리 나서
그때 그 몸살이 도져올라치면
또 나서게
더도 말고 한 여든 해
「물소리」전문
그가 살았을 때 마을 청년회에서 시인을 졸라 마을 입구에 ‘야솟골 찬가’라는 시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내 요람 야솟골은 씨할만한 동네
산울림이 뇌이는 동화 속에 잠기어
세월도 비켜가는 그런 동네
법 보다 먼저 순리를 익히어
우러러 섬기고 굽어 아끼며
울타리 넘나드는 치자향기 이웃
눈만 주면 풀빛도 따라와 주고
삼동 볕도 나누어 쬐는 사람들
세상 눈치 안보고 옛말 하면서
까치밥 한 알 감도 남겨두는 동네
「야솟골 찬가」전문
야솟골은 통영에서 학구열이 가장 높은 곳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장수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마을 앞 약간 넓은 들을 제외하고는 9부 능선까지 이어지는 다랑이 논밭에서 대대로 농사짓고 살면서도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두 집 거쳐 한 집에서 판사, 검사, 박사, 변호사, 변리사, 한의사 등 훌륭한 인재를 배출했다 하여 SBS방송국에서 ‘출세’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함으로써 전국에 알려진 마을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골이 깊고 물이 좋아 훌륭한 인재가 나온다고들 한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이 숲이 명당을 더욱 명당답게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믿는다.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 개통과 산양스포츠파크 준공으로 인해 야소마을도 개발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진입도로 확․포장도 진행되고 있다.
말 못하는 수목이라 하여 무조건 잘라내고 허물 것이 아니라 돌탑도 더욱 아름답게 보수하고 숲도 잘 정비하여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을 일이다.
추도 후박나무
/산양읍 추도리 508번지/
추도는 산양읍에 속해 있으며 통영항에서 21km떨어진 섬으로 2.5㎢의 면적에 희망봉이라는 큰 산과 작은 산을 축으로 대항, 미조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추도楸島는 섬의 형상이 자루가 긴 농기구인 가래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된 토박이 지명 가래섬의 한자 지명이다.
섬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잘록하게 생긴 큰 목을 일컬었던 토박이 지명 한목의 한자 지명이 대항이며 샛개와 먼당이라는 뜸을 거느리고 있다. 미조는 옛날 남해도 미조마을 사람들이 맨 처음으로 이주해 와 정착했던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며 뜸으로 물개(어둔골)가 있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한려페리호를 타면 학림, 송도, 저도, 연대도, 만지도를 거쳐 추도의 대항, 미조에 도착한다. 섬의 서쪽 끝 미조마을 가운데는 수령 5백 년의 후박나무 한 그루가 민가의 담장을 등지고 서 있다.
섬 전체가 2~30도의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어 겉으로는 참 빈곤하고 척박한 섬 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곳이다. 섬의 서쪽에 있는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용두도(암)는 본섬과 붙듯이 떨어진 곳으로 감성돔과 볼락이 많이 잡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낚시꾼들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곳이다.
특히 추도는 물메기가 많이 잡혀 싱싱한 물메기회를 맛볼 수 있다. 마을 덕장에서 말린 메기는 전국의 유명 백화점으로 팔려 나간다. 서해안에서 잡은 물메기를 추도에서 잡았다고 소비자에게 원산지를 속이기까지 한다니 추도 물메기의 명성을 알만하다.
섬의 명물로 자리 잡은 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며 제주도와 울릉도 등 따뜻한 남쪽 섬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로 일본, 대만, 중국 남쪽에도 분포하고 있다. 주로 해안을 따라 자라며 껍질과 열매는 약재로 쓰인다. 나무가 웅장한 맛을 주고 아름다워서 정원수, 공원수 등에 이용되고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용으로도 심겨지고 있다.
바닷가 언덕에서 자라고 있는 이 후박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수고 14.4m, 남쪽줄기둘레 2.26m, 북서줄기둘레 2.1m의 크기로 줄기는 중간에서 나누어져 하나는 수평으로 바다를 향해 뻗어 있고 다른 하나는 위를 향해 자라고 있다. 주변에는 돈나무, 느티나무, 예덕나무, 꾸지나무, 보리밥나무 등이 같이 자라 바람을 막아 주는 방풍림의 역할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나무가 마을을 보호한다고 믿고 있다. 이 후박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생물학적 가치가 높아 1984년 11월 19일 나무나라에서는 최고의 영예인 천연기념물 제345로 지정·보호하고 있으며 보호구역은 314㎡이다.
연대도 당산나무
/ 산양읍 연곡리24-17번지/
통영항에서 남쪽으로 18km 남짓 떨어져 있는 연대도는 경사가 급하고 남쪽 해안에는 높이 10m가량의 해식애가 발달하여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이다. 섬의 북서 해안에는 평지가 있어 47세대 80여 명의 주민이 형제자매처럼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연대도 전체의 면적은 784㎡이다. 섬 정상을 연대봉이라 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왜적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섬 정상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봉화를 올린 데(연대煙臺)서 연유하였다.
이 섬에는 사적 제355호로 지정된 통영 연대도 패총이 있다. 패총은 섬의 동북쪽 모습에 따라 U자로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는 신석기 시대 무덤구조를 알려주는 돌무지 시설과 여러 몸체 분의 사람 뼈화석도 나왔다. 신석기 시대 층위가 4개 이상 밝혀졌고 앞으로 자세한 발굴을 거듭하여 남해안의 동삼동, 상노대도 유적과 견주어 연구되어야 할 중요한 유적이다.
숙종 44년(1718)에 군창軍倉에 속해 있던 통영군 산양면 연대도(현 통영시 산양읍 연곡리 연대마을) 둔전 30여 마지기 땅을 떼 내어 충렬사 운영비에 쓰기위해 사패지賜牌地로 지정하였다. 연대마을 주민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모두 개인소유로 이전되었다.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한려페리호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 통상적인 방법이지만 이는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여간 불편하지 않다. 최근 연대도를 비롯하여 오곡도, 학림도, 저도, 만지도 등이 아름다운 섬으로 널리 알려짐에 따라 섬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산양읍 미남리 달아마을에서 인근 섬으로 오고 갈 도선건조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섬에는 난대성 상록수림을 비롯하여 곳곳에 아름드리 해송이 우렁차게 자라고 있고 마을 좌우로 오곡도와 만지도가 나란히 앉아 있다. 앞으로는 학림도와 저도, 뒤로는 내부지도와 외부지도가 있어 거센 파도를 막아준다.
특히 몽돌해수욕장 주변의 해송 숲은 마을로 불어오는 북풍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심었다. 옛 조양분교의 왼쪽 돌출부분의 소나무 숲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연대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과 점점이 떠 있는 주변 다도해 풍경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시시때때로 울부짖는 성난 파도와 바람을 잠재우고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섬사람들에게는 기도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느 섬엔들 서낭당(당산)이 없을까마는 연대도의 서낭당은 특이하다.
섬의 최고봉 연대봉의 위당산과 마을뒤편의 아래당산(중당)이 있다. 음력 정월 초사흘을 전후하여 길일을 받아서 이곳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먼저 봉화를 올렸던 연대봉 위당산(큰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혼을 달래는 산제를 모신다. 다음은 마을 중간에 위치한 소나무와 대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아래당산(중당)에서는 휘하 장졸들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낸다. 마지막으로 새벽 5~6시를 전후하여 마을 정중앙에 위치한 별신굿터에서 별신장군제를 지낸다. 이때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정성껏 준비한 밥상을 들고 나온다. 제주가 마을 전체 조상들을 들먹이며 밥상을 먹인다. 윗당과 중당의 제사는 스님이 주관하고 별신장군제는 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셈이다. “차린 것은 없지만 왕림하셔서 술밥 간에 잘 자시고 우짜든지 1년 365일 고기 많이 잡히게 해주고 농사 잘되게 해 주이소. 그라고 사고 안 나게 해 주이소”라며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무당을 불러 3일간 별신굿을 하며 제사를 지낸 적도 있다며 최두기 이장은 그래도 그때고 좋았다고 술회한다.
연대도를 비롯하여 인근 섬에는 크든 작든 1섬 1학교가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폐교되고 섬에 아이 울음 그친 지 오래이지만 주민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 연대도는 탄소제로 통영 에코아일랜드 조성을 위해 그 어느 섬 보다 바쁘고 활력이 넘치는 희망의 섬으로 변했다. 지속가능한 자원 활용을 통해 탄소를 배출하는 화석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섬으로 만들고 있다. 마을에서는 태양광 발전시설과 풍력발전시설을 건설하여 에너지를 자급하고 폐교된 조양분교를 리모델링하여 연대 에코아일랜드 체험센터를 조성하는 프로젝트사업이 한창이다.
이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화석에너지 제로의 에코아일랜드 조성사업이라는 점과 주민이 스스로 운영하는 친환경적인 사업임과 동시에 천연자원을 활용하여 주민소득사업으로 직결된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2011. 7. 20. ~ 7. 22. 개최된 통영연대도 제1회 지역에너지학교에는 전국 각지에서 지역에너지를 활용하고 있는 전문가에서부터 경험과 기술을 배우기 위해 참여한 학생까지 20여개 단체 80여 명이 모여 뜨거운 열기를 보여 주었다. 물론 아직 현재진행 중에 있긴 하지만 본 사업의 숨은 공로자는 누가 뭐라 해도 ‘푸른 통영21’의 윤미숙 사무국장의 진한 섬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대도는 뭍 처녀가 시집오고 싶을 정도로 풍족한 섬이었다. 지금도 주변의 풍부한 어족자원과 어패류 채취로 고소득을 올리는 부자 섬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약속의 땅 연대도가 더욱 살기 좋은 해상 낙원이 되길 당산 목신께 빌고 또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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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보급이다...이 귀중한 자료 도향께서 잘유지보관 해야겠다
순철아 잘했다. 앞으로도 승승장구 하시길 바란다. 가끔 너를 펼쳐본다.
허지긴 나를 그 당산나무 아래로 데려가 쉬게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서우승 선생님 이야기도 해줘서 고마워 오래전 청마 묘소 가는 길 함께 걸으며 이야기 했던 서 선생님 생각이 나네. 가느리지만 힘이라 생각 했는데 어찌 그렇게 일찍 가시다니 행사 때 못가서 미안 탑리에는 내가 혼자 한 번 댕기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