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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수 시인 동시집 『나팔꽃의 사랑법』
희망의 속삭임, 휴머니즘적 인간애
남진원(시인, 문학평론가)
1. 시작하는 글
조옥수 시인께서는 강릉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2006년 [아동문학세상] 여름호에서 동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습니다. 2019년에는 강릉문학작가상을 받았습니다. 강릉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았으며 전에는 강릉의 바다시낭송회, 강호시조문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현재는 솔바람 동요 문학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마음속에 품은 뜻이나 감흥을 소리 내어 노래하거나 말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노래나 말을 문자로 나타내었다. 감흥적인 말이나 노래를 압축하여 감동적으로 표현한 문자언어가 시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는 사람들이 즐겨 읽고 많이 창작하는 작품이다. 소리예술인 음악이나 색채예술인 그림 보다도 시는, 짓기에 편리하고 비용도 많이 들지 않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예전에는 느낌이 떠오르면 공책이나 원고지에 글을 적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에 모든 것을 다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시를 쓰는 데에는 간편하고 비용면에서도 매우 경제적이다. 창작하기 좋은 시대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여건임에도 좋은 시를 만나기 어렵다. 새롭고 신선한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시는 어렵거나 감동 없는 평이한 글자의 나열 같은 작품들로 외면을 받기 때문이다. 일반 성인 시도 이러한 데, 동요 동시는 아동문학이라는 이유 하나로 독자들에게 서자 취급을 받지는 않는지, 염려가 되기도 한다.
요즘 아동문학, 특히 동요 동시를 성인 시보다 아랫자리에 두고 폄하를 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게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한국문인협회에서 발간하는 『월간문학』2023년 6월호에 발표 작품을 봐도 아동문학을 경시하는 태도를 지울 수 없다. 성인 시 40편, 수필 27편인데 반해 동시는 2편, 동화는 1편이 고작이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발간해 온『월간문학』을 봐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인 시나 산문이 동요 동시나 동화보다 우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 하는 우열적인 판단은 어리석은 태도이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작품 발표의 예를 보면 아동문학에 대한 홀대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아동문학 홀대 생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동문학 홀대의 원인 중에는 분명 작가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동문학인들이 좋은 작품으로 깊은 감명을 주고 성인 시보다도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었을 때 생각은 달라질 것이다.
이번에 동요, 동시집을 내는 조옥수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잘 짜여진 운율의 리듬감과 신선한 표현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뛰어난 시를 쓰는 시인의 높은 안목에 감탄이 연신 나올 뿐이다. 동요 속에 강렬한 시적 이미지가 내포되어 큰 감동을 준다.
동요 동시는 시의 원초적인 본향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선한 마음인 순수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요, 동시야말로 모든 시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동요 동시는 음식으로 치면 날마다 먹어야 하는 밥과 같은 영양식이다.
조옥수 시인은 2006년 『아동문학세상』신인상 수상으로 문단에 나왔다. 그간 시낭송도 활발하게 하여 강릉의 [바다시낭송회] 회장을 지내고 강릉의 시조문학 동인회인 [강호시조문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특히 [솔바람동요문학회] 사무 일을 보면서 동시와 동요에 뛰어난 작품 활동을 하여 <강릉문학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한 역량있는 동요 동시 작가이다. 그리고 나와는 20여년 간 함께 시를 읽고 공부한 문학 도반이기도하다.
문단에 나온지 17여 년 만에 귀한 동요 동시를 모아 시집을 낸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겸손과 미덕을 갖춘 시인이 많은 기간 숙성 시키고 발간하는 시집에 먼저 축하를 드린다.
어른들이 어릴 때 동요 동시나 동화를 읽지 못하고 성장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동요 동시, 동화는 어린이의 정서적 능력이나 지적 능력 향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른이 되었을 때 참된 인격성은 어릴 때의 학습 환경과 정서적, 지적 능력에 좌우되기도 한다. 이런 영향 때문에 좋은 아동문학 작품집을 낸 조옥수 시인은 많은 어린이들에게 행복해지는 꿈과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2. 작품 들여다보기
아동문학은 사랑과 희망의 문학이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 등 교훈적인 내용을 서술만 한다면 지루하고 읽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이 시적 이미지로 정제되어 있으면 큰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나팔꽃 사랑법
함께 놀고 싶어서
귓속말 하고 싶어서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누가 눈치 챌까봐
해님도 모르게
달님도 모르게
살금살금 기어가서
안아 주었는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구나
코스모스야 미안해
대신 분홍 나팔을 불어줄 게
위의 동시는 착상이 참 재미있는 작품이다. 우리 주위에서 나팔꽃은 덩굴식물로서 다른 식물을 감고 올라가는 식물이다. 나팔꽃이 코스모스를 휘어 감고 올라가자 코스모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모습을 동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동화적인 발상 속에서 사랑의 속성을 잘 드러냈다. 일반적으로는 나팔꽃이 코스모스를 감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습 쯤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겼을 것이다. 그런 나팔꽃의 모습과 코스모스를 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가의 마음이 늘 깊은 사랑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동시 ‘나팔꽃 사랑법’에서 보면 나팔꽃의 깊은 사랑이 오히려 코스모스를 쓰러지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상처받은 코스모스에게 분홍 나팔을 불어줌으로써 치유와 상생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사랑의 깊은 내면에는 사랑만큼 깊은 상처도 있음을 동요로써 상징화하고 있는 역작이다.
조옥수 시인은 자연의 동식물에서 사랑의 진한 엑기스를 뽑아올릴 뿐만 아니라 확장됨을 보여주기도 한다.
봄이 오면 오시겠지
예뻐라 우리 아가 매일매일 쓰다듬던
지난 봄 돌아가신 할머니 보고 싶어
엄마! 할머니는 언제 쯤 돌아오실까요?
파릇파릇 새싹 돋는 봄이 오면 오시겠지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으로 오실 거야
거리마다 방글방글 벚꽃으로 오신단다
시인의 마음속에 희망이 있다.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가의 기다림은 할머니가 곧 돌아올 것을 믿는다. 엄마는 아가에게 할머니가 오신다는 희망을 말한다. 봄이 오면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 그리고 거리마다 활짝 피어나는 벚꽃으로 오신다고 이야기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사람은 살다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생명이 있는 만물은 모두 살다가 죽는다. 그런 죽음이 있기에 슬프기도 하지만 우리 사는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 육체적인 몸은 사라지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에 대한 사랑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기에 봄이 되면 새싹이 돋는 날 개나리 진달래 제비꽃을 보며 할머니의 사랑과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마음속에는 늘 할머니가 살아있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희망과 기다림의 아름다움에 물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동요 동시 동화는 이러한 사랑의 문학이기에 그 어떤 문학보다 아름답다.
조옥수 시인은 연로하고 편찮은 시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몸소 봉양하고 돌보아오신 효부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심성이 아름다운 동요 동시를 빚어내게 한 것일 것이다. 동요 ‘봄이 오면 오시겠지’는 ‘봄’이라는 계절을 통해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봄’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 자연과의 소통을 노래한 작품 ‘봄 오는 중’을 보자. 새싹과 꽃눈이 나오는 봄의 정경을 동요적 형태로 재미있게 그려놓아 매우 관심을 끈다.
봄 오눈 중
땅속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반쯤 문 열고 얼굴만 뻐끔뻐끔
연둣빛 새싹에게 물었더니
봄바람이 문 두드리기에
신발 신고 있는 중이라네
나뭇가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얼굴 반쯤 내밀고 입술만 뾰족뾰족
자줏빛 새 눈에게 물었더니
봄바람이 볼을 대기에
뽀뽀하고 있는 중이라네
봄이 되면 새싹들은 땅에서 솟아나고 나뭇가지에서는 꽃망울이 고개를 내민다. 이런 현상은 아주 당연한 자연의 이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새 울고 꽃 피는 봄은 응당 그러려니 하며 신기함이나 새로움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 자연의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으면 이 세상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고 기적이 아닌 것이 없다. 그렇기에 비 오고 바람 부는 것조차 감탄과 놀라움의 대상이 된다. 하물며 봄이 되어 돋아나는 새 잎과 나무의 살결에서 움이 돋아나오는 꽃망울에 대한 경이로움은 얼마나 클 것인가! 기적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확연히 알았기에 시인은 붓을 들고 그 신비함을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궁금하다. 땅속에 무슨 일이 생긴 것임을 알 것 같다. 연둣빛 새싹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새싹의 대답, 봄바람이 문을 두드리기에 신발을 신고 있는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던 것이다. 신기함은 놀라움으로 이어지고 나뭇가지에게도 눈이 갔다.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꽃망울에게도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련의 시적 문답은 평범속에서 비범함을 발견한 세계이고 비범함에서 평범한 세계를 발견한 시인의 뛰어난 안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사랑을 시적 운율로 그린 멋진 작품들을 만나 보자. 모성 가득한 어머니의 품 같은 넓은 마음을 형상화한 작품, ‘늘 푸른 바다’에서는 희망을 노래하고 포용의 미덕을 배운다.
늘 푸른 바다
눈 앞에 펼쳐진 파아란 바다는
양팔 활짝 펴고 자신감이 넘친다
더위야 와라 햇살아 너도 와라
시원한 품 속에서 맘껏 뛰놀다 가거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 모래사장
넓게 자리 펴고 운동장을 만든다
더위야 와라 바람아 너도 와라
울룩불룩 모래판에 씨름 한판 하고 가라
이 동요를 읽으면서 바다가 왜 늘 푸른 바다인지를 알 것 같다. 더위가 와서 햇살이 와서, 바람이 와서 맘껏 뛰놀다 가게 하는 바다기에 늘 푸른 것임을. 바다의 품속에서 맘껏 뛰놀기도 하고 모래판에서 씨름도 한 판 하라고 한다. 그게 바다의 마음이고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기도 하다. 바다를 보면 넓은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생각나고 어머니를 떠올리면 넓은 바다가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임을 알겠다.
다음의 동시 ‘할아버지 무릎 체중계’에서는 가족의 포근하고 끈끈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할아버지 무릎 체중계
밥 많이 먹은 날 할아버지 무릎에 앉으면
많이 컸구나 무릎 눈금 쑥 올라가고
할아버지 기쁨 눈금도 쑤욱 올라가지요
감기로 밥 못 먹은 날 살짝 무릎에 앉으면
많이 아팠구나 무릎 눈금 쑥 내려가고
할아버지 입가 웃음 눈금도 쏘옥 내려가지요
우리들 건강과 행복이 쑥쑥 자라나면
할아버지 즐거워 사랑 눈금도 쑥쑥 올라가지요
할아버지 무릎에 앉으면 세상에 다시 없는 포근한 의자가 된다. 아이들도 즐겁고 할아버지는 더 기쁘고 행복하다. 할아버지 무릎을 ‘무릎 체중계’라 생각한 시적 발상이 놀랍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할머니나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 속에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이다. 밥 많이 먹은 날엔 무릎이 무거워도 할아버지는 즐겁고 감기 걸려 아픈 날엔 무릎이 가벼워도 할아버지 마음은 걱정이 된다. 이런 일상의 미세한 일들을 놓치지 않고 뛰어난 작품으로 창작하였다. 읽어보면 쉽고 재미있어도 실제로 이렇게 쓰기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조옥수 시인의 또 다른 작품 ‘아빠 품에 안기면’, ‘머리감기’ 등도 가족의 사랑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작품이다.
또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동요 ‘할아버지 벽시계’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읽고 또 읽다 보면 잔잔한 슬픔과 아름다운 사랑이 가슴에 전해진다.
할아버지 벽시계
할머니 방에 눈 크게 뜨고 걸려있는
커다란 벽시계
일어날 시간이에요 땡땡
아침 먹어야지요 땡땡땡
할머니는 그 소리 혼자 들으며
할아버지 목소리인가 귀 기울여요
할머니 방에 부엉이 되어 걸려있는
커다란 벽시계
잠잘 시간이에요 땡땡
세수 해야지요 땡땡땡
할머니는 그 소리 혼자 들으며
할아버지 숨소리인가 귀 기울여요
요즘에는 벽시계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전에는 잘 사는 집 안에는 웬만하면 커다란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시간을 금방 알 수 있기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계시는 방안에 걸어놓기도 하고 거실에 걸어놓기도 하였다. 벽시계가 치는 숫자를 들으면 시계를 보지 않아도 몇 시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세시에는 세 번, 다섯 시에는 다섯 번을 울렸다. 3인칭 관찰자로 쓰여진 이 동시에서 벽시계가 울리면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1인칭 어린이의 입장에서 외할머니 댁을 찾는 모습을 상상하며 쓴 ‘보고 싶은 마음’이란 동시를 보자.
보고 싶은 마음
외할머니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맞아 주실까
툇마루에 앉아
손 흔들어 주시겠지
장독대에 채송화로 앉아
활짝 웃어주시겠지
콩닥콩닥
보고 싶은 마음은‘
벌써 똑 똑 똑 대문을 두드리지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귀여움 속에서 또 외할머니의 푸근한 보살핌이 있는 생활을 한 어린이들은 아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것이다. 주거 생활이 아파트 생활로 바뀌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자는 사회 현실이 안타깝다. 동시를 읽고 있으면 늘날의 이런 아파트 문화에서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가족애의 따스한 정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더욱 값진 효용성이 있는 작품들이다.
조옥수 시인의 동요 동시들은 따뜻한 가족애를 통해 ‘사랑’을 전하는가 하면 또 많은 동요 동시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기도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주체적 자아의 건전성을 담보하는 건강한 동시들도 만날 수 있어 기뻤다.
돋보기
눈에 대면 왕눈이
발에 대면 왕발
손에 대면 큰 손
살그머니 가슴에 대어 보자
두근두근 부푼 내 마음
자신감도 쑥쑥 커진다
‘돋보기’는 본래의 사물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학습자료이면서 생활에 필요한 과학적인 도구이다. 이 돋보기는 일상생활에서 어린이나 어른들이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다. 어린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건을 더 크게 보기 위해 돋보기로 들여다보곤 한다. 나도 처음 돋보기를 사용했을 때 신기함을 느꼈다. 본래의 사물보다 훨씬 커 보이는 모습에 놀라워하고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시력이 떨어져서 글을 읽을 때 미세한 사물을 볼 때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다.
이 동시는 동시로 쓰기 어려운 소재인데도 매우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공감대가 높다. 인체의 부분들을 이용하여 병렬적인 기법으로 쓴 작품이다. 눈, 발, 손과 가슴에 돋보기를 대어 보며 놀라워한다. 그 놀라움은 ‘놀랍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왕눈이’, ‘왕발’, ‘큰 손’ 등으로 환치되어 이미지화 하였기에 느낌의 전달이 성공적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면 시로서는 성공적이라 할 수 없다. ‘가슴’에 대어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게 표현한 것이다. 즉 가슴에 대어 보면서 ‘왕눈이’, ‘왕발’처럼 마음도 부풀어지고 자신감이 쑥쑥 커진다고 하였다. 돋보기를 ‘눈’, ‘발’, ‘손’에 대어 보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고 행동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시적이지 못하다.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멋진 반전에 일어난다. 가슴에 대 보는 것이다. 가슴에 대면서 마음이 부풀어지는 것을 느끼고 자신감도 커진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시를 읽으면 자신감을 갖게 되고, 자신감이 생김으로써 희망까지 품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작품 역시 주체적 자아로써 밝고 건강한 모습을 그려내어 독자에게 환희로움과 기쁨을 준다.
내가 만든 영화
하얗게 눈 내린 바닷가
소나무 숲길에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보아요
동글동글 눈을 뭉쳐
눈싸움도 하구요
동글동글 눈을 굴려
눈사람도 만들고요
눈밭을 뒹굴다가 하늘 보고 누워 봐요
랄랄라 갈매기 노래 파도 따라 밀려가고
랄랄라 갈매기 노래 구름 타고 밀려오고
찰칵찰칵 동영상으로 만든 영화는
아빠 손 엄마 손 친구 손 안에서
동시 상영중이랍니다
눈 내린 바닷가에서 주인공이 되어 마음껏 즐겁게 활동하는 어린이의 주도적인 자유로운 풍경이 묘사되었다. 시에서 보여주는 순수한 활동성이 자존감을 향상시키고 있다. 행위적 이미지들로 인해 이 시를 생동감있게 만들었다.
3. 맺는 글
작품을 읽다 보니 문득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쥘 르나르의 작 품 한 편이 생각났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쥘 르나르는 가장 짧은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 짧은 시의 내용인즉, 제목은 ‘뱀’인데 내용은 ‘아주 길다’ 라는 게 전문이다.
이런 글을 보고 일반 사람들이나 어린이들도 생각할 것이다. ‘저것이 유명한 작품이라면 나도 유명한 시인이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쥘 르나르가 쓴 것처럼 ‘코끼리는 아주 크다’ 라든가 ‘새는 날렵하다’ ‘쇳덩이는 무겁다’ 등 많은 시를 써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코끼리는 아주 크다’ 라든가 ‘새는 날렵하다’ ‘쇳덩이는 무겁다’ 등 많은 말들을 이미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시는 길고 압축되고 남이 보기에도 멋진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은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느낄 수 있는 안목에 이르면 모든 것이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시적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위대한 시이든 그렇지 않은 시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한다, 문제는 시인이 얼마나 경이로움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뱀이 길다’는 것은 아주 평범한 말이지만 쥘 르나르의 눈에는 뱀의 긴 모습이 얼마나 경이롭고 놀라웠을까! 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여인이 어느 날 평범하게 보이지 않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진실로 경이로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는 놀람과 환희로움으로 다가오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시를 쓰기 전에도 시를 쓴 후에도 일상생활의 흐름은 거의 변함이 없다. 그러나 경이로움괴 기적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면 사물이 달라 보이고 우주가 새롭게 보이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시를 쓰는 일은 개벽한 천지를 맛보는 일이라고 ….
조옥수 시인은 이번 작품집을 내면서 대다수의 많은 작품들이 뛰어난 작품으로 독자의 마음에 재미와 감동의 물결로 다가올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것은, 이미 조옥수 시인이 시적 대상들을 대하면서 환희와 경이로움, 기쁨의 바탕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반대로 놀라움이나 슬픔의 측면에서 출발하는 것도 겉은 이치이다. 작품을 통해, 존재론적 타자들에 대한 공감각 인식능력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조옥수 시인의 많은 작품들에서 보이는 순수한 사랑과 정서적인 안온감이 감동을 배가시키고 있다. 더구나 아동문학의 속성인 ‘희망’을 품고 사물에 대한 속삭임을 듣다 보면 휴머니즘적 인간애와 평화의 건강성을 느낀다.
지금까지 동시집 속의 몇 편들을 나름대로 소감을 피력하는 듯 써 보았다. 동시집에 수록된 많은 동시들은 내가 언급한 이외에도 독자의 체험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미있게 읽을 동시들이라고 보여진다. 이제 독자의 몫이다. 자신의 나름대로 동시를 읽으며 지적 즐거움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동시집 발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빛나는 문운과 문학적 대성을 기대하면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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