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천지창조
하나님의 빛과 양자역학
창세기 1장 1절 ~5절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첫 절은 천지창조에 대한 요약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늘(들)과 땅이 시작되는 첫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질과 공간과 시간이 창조된 것이 포함됩니다.
하늘(들)과 땅의 시작에 대한 둘째 견해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의 진술에 의해서도 확인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는 '엘로힘'으로써 복수형입니다.
아마도 이 복수형은 하나님의 장엄하심과, 예수님, 성령님을 나타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일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하시니라'는 동사는 히브리어에서 단수로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 하나라는 개념을 가리켜줍니다.
창조에 대한 고대 근동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매우 두드러진 차이점을 보이는 것으로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오직 유일하신 존재로 이해됩니다. 곧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 계십니다. 히브리어 동사 '바라'(창조하다)는 구약성경에서
항상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취합니다. 이 동사는 언제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창조한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동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태초에'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 절은 하나님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알려줍니다. 사실상 이 본문('태초에')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맨 처음에 땅은 형체가 없고 비어 있었다고 묘사해 줍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아 4:23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이 어구는 땅에 아직 피조물이 없고 또한 질서가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는 빛이 아직 없는 상태를 가리켜 줍니다.
이와 같은 최초의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서 바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언급은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다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창세기 1장1절과 2절 사이에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며 또한 이 기간에 땅이 황폐하고 공허하게 되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3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단순히 말씀하시면, 무엇인가 창조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절대적인 능력을 지니시고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각각의 피조물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똑같이 창조됩니다.
이 말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에 대한 열 번의 표현 가운데 첫 번째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된 것 가운데서 빛이 처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4~5절에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이 좋았더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5절은 어떻게 하나님이 한 주간의 단위로 시간의 질서를 정하셨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빛이 있으라"는 새로운 날에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과학적으로 양자역학과 하나님의 빛과 치유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양자역학이란 무엇이고 양자역학과 빛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양자역학은 매우 작은 양자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과학으로, 원자와 기본입자의 규모에서 물질의 거동과 에너지와의 상호작용에 대해 설명합니다. 대조적으로 고전물리학은 오로지 인간 경험을 통해 익숙한 규모에 대해서만 설명하는데, 예시로는 달과 같은 천체의 움직임 등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은 어떤 측면에서는 입자처럼 행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합니다.
물질(전자나 원자같은 입자들로 이루어진 우주의 "어떠한 것들")또한 파동 같은 행동을 보입니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빛이 전자기복사이면서 독립적인 단위인 광자임을 보여주고, 그 빛의 에너지, 색깔, 스펙트럼의 세기를 예측합니다. 하나의 빛, 즉 광자는 전자기장의 관측 가능한 가장 작은 양인 양자입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광자는 관측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양자화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양자역학의 상보성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양자역학을 처음 시작할 때 반드시 파동(波動; wave)과 입자(粒子; particle)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잔잔한 호수에 골프공 하나를 던지면 골프공이 빠진 곳을 중심으로 물결이 동심원을 이루면서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여기서 입자인 골프공은질량을 가지고 있으며, 그 위치가 공간의 일정 부분을 점유하고 있고,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실체(實體)입니다
상보성의 원리에 의하면 빛이나 물질이 특성이 전혀 다른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설명 불가할 것 같은 100% 입자성과 100% 파동성이 실제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해서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양자역학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정신의학에서와 같이 우리는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매우 작은 상처들이 만약 전자와 같이 작은 것이라고 한다면 양자역학에서
일어나는 것이 삶의 문제에서도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빛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치료의 광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문제를 비추어 버린다면 그 문제는 가두어지고 활동성이 줄어들어 버려서 입자(particle)가 파동(wave)으로 바뀌어 버릴 수 있습니다.
말라기 4장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그날은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춥니다. 해가 어둠과 구름은 몰아내고 빚과 즐거움을 가져오듯이 공의로운 해는 어둠과 압제와 질병을 몰아내기 위해 나타날 것입니다.
이 해가 가져온 공의는 악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그 행위가 의로운 자들에 대한 보상을 함께 포함합니다.
이 예언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됐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의 광선인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포로되고 결박된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 이십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빛'과 하나님의 '빛'이 임할 것이라는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하십니다.
예수님의 치료 현장입니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책임지는 로마 장교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로마 백부장은 유대인 전통에 대한 놀라운 민간함을 드러내며 자신이 예수님을 자신의 이방인 집에 맞아들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 유대인은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이스라엘 중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 즉 예수님이 곧 오래 기다려 온 메시아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은 '놀랍게 여겨' 백부장의 모범적인 믿음을 칭찬하며 이스라엘의 믿음 부족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말씀과 양자역학과의 관계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게 파동입니다 파동은 우리가 물가에 돌멩이를 던졌을 때
물결에 이르면서 퍼져나가는 것을 파동이라고 하고 또한 음악에서도 악기를 통해서 음율이 퍼져나가는 것이 역시 파동으로
볼 수 있고, 여기에는 또한 전자파도 포함이 됩니다. 파동은 원래 원자핵 주위에 전자가 거기에 나타날 가능성 입니다.
파동이 커진다는 것은 전자가 거기에 나타날 가능성이 또는 확률이 크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전자를 하나님의 빛으로 생각해보면 매우 영적인 인사이트를 줍니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 상대성이론이 아니고, 광양자가설입니다. 그 전까지 당연히 빛은 파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인슈타인은 빛은 입자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 이후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합니다.
양자역학의 파동-입자의 이중성이고 중첩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신심리학에서 무의식 속에 있는 우리의 상처, 분노, 슬픔, 피해 등이 파동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매우 작은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우리가 이것을 보게 되면 이 파동은 이제는 입자가 되어버려서, 우리의 생각에 떠오르게 되고, 이것이 우리의 존엄성에 상처를 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또한 그 파동이 입자가 된 것은 우리가 볼 때부터 입자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 때부터가 아니라 처음부터 입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를 양자역학에서는 현재가 과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근거를 보고 있습니다.
이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양자 얽힘과 치유의 관계를 살펴 보겠습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매우 작은 원자와 같은 상처의 파동이 우리가 관찰함으로써 표면으로 떠올라서 의식 속에서 입자화되어
우리를 계속적으로 상체 내고 그 아픔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이를 치유하는 방법과 양자역학과 관계가 있을까요? 단순히 파동을 관찰함으로써 입자가 되었고, 그 입자가 된 것은 관찰한 시점이 아니라 파동이 시작된 때로부터, 즉 과거까지 소급되어 입자가 되기 때문에 이를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양자역학에서는 중첩성, 불확정성, 이중성만이 아니라 양자얽힘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측정하기 전까지는 두 입자 중 어느 입자가 업(up, +) 스핀 값을 가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값을 가지는 얽힘 상태의 경우 첫 번째 입자 A가 업(up, +) 스핀 값을 가지면 두 번째 입자 B는 무조건
다운(down, -) 스핀 값을 가집니다.
두 입자 중 하나를 우주 저 멀리 떨어트려 놓아도 입자 하나의 양자상태는 다른 입자로 순간적으로 전달됩니다.
예를 들면 지구 어느 곳에서 물체를 세웠고, 달에도 같은 물체를 세웠을때 이 물체가 지구의 어느 곳에서 넘어졌을 때
달에서의 물체도 같이 넘어집니다. 이 때에 두 물체가 넘어지는 시간 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주에서는 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뒤집는 것입니다.
이렇듯 양자얽힘에서는 두 번째 입자의 결과는 첫 번째 입자의 결과가 측정으로 결정됨과 동시에 결정됩니다.
이 양자얽힘이론을 보면서 우리의 상처라는 노출된 입자와 상관관계를 가진 한 쌍중 나머지 입자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빛이고, 성령님의 치료의 광선이 됩니다.
마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하인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짐과 동시에
병고침, 즉 치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말씀은 빛보다 빠르게 백부장 하인에게 전달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예수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모두를 갖추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자얽힘의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통신 역활을 합니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넘어 섰습니다.
아인슈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설명으로, 양자얽힘 현상을 유령 같은
원격작용(spooky actions at a distance)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물질의 국소성(locality)을 주장하였는데, 국소성이란 한 공간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이와 분리된 다른 공간적
영역에서 일어난 작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가 서로 옆집에 살고 있다고 하고, 둘 사이에 아무 정보의 교환이 없다면 공간적으로 분리된 둘은
서로에게 아무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철수가 옆집의 영희를 불러내려면 큰소리로 외치던지, 전화를 하던지, 다른 사람을 시켜서 메시지를 전하던지
어떤 방법을 써야 합니다. 이때 철수가 영희에게 무슨 방법을 써서 소식을 전하려 해도 상대성이론에 따라 절대
빛의 속도보다는 빠를 수 없습니다.
양자얽힘 현상을 보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얽힘 상태에 있는 두 전자는 공간적 분리와는 상관없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비록 서로 우주 반대 끝까지 떨어져 있더라도 이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계이기 때문에 두 전자는 상대방의 결정 결과를 시간 제약 없이 바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물질의 비국소성은 어떤 이론에 의하여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기본 본성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원리로 본다면 우주에 양자얽힘 상태에 있는 모든 존재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성도의 연결도 하나의 계 안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전체적으로 연결된
물질의 특성 때문에 텔레파시, 데자뷔, 동시성과 같이 현실 세계에서 이해하기 힘든 기적적인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식의 한계 때문에 볼 수 없는 초공간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가 전자를 관측하는 경우에만
전자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입자와 파동의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
관측에 상관없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양자얽힘 현상도 두 개로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입자가 초공간을 통하여 연결된 하나의 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상 하나의 개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으므로 한쪽 입자의 상태 변화가 자연스럽게 즉각적으로
초공간을 통하여 다른 쪽 입자의 상태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양자얽힘은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통신방법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는 역시 기적과도 같은 현상입니다.
성도들은 내 안에 성령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통하여 내 안에 성령이 초월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또 성령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신비한 일입니다.
양자얽힘에 의하면 성도가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우주 어느곳에 있던 상달될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그 비밀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양자역학이 그 답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빛이십니다.
양자역학이든 물리학이든 우주 천체 과학도 하나님의 창조하신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구원의 빛이시고 생명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