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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태양계 그리고 우주에 있을 생명 혹은 존재에 대한 씨크릿 독트린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아래 내용을 보면 SD에서 얼마나 균형있는 견해를 제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씨크릿 독트린 2권, 3부,
IV장 (b) 행성 체인과 다수의 체인에 대하여
고대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 이외의 다른 세계를 알았는가? 모든 구체가 칠중 체인—그 중에 오직 하나만 볼 수 있다—이고 볼 수 있는 모든 별 혹은 행성처럼 이것들도 “인간을 갖는” 혹은 가졌거나 가질 것이라고 단언할 때 오컬티스트들의 자료는 무엇인가? 항성계가 우리 구체들에 미치는 “도덕적 물리적 영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종종 묻는 질문이고 모든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두 가지 중에서 첫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 있는 첫 번째 법칙은 다양성 속의 균일성이고, 두 번째는 유추이다.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 경건한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지만, 교회와 오만한 하수인들이 어떤 다른 행성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는 가정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영원히 가버렸다. 아담과 이브, 뱀, 그리고 피를 통한 보상이 따르는 원죄가 너무 오랫동안 길을 가로 막아왔고, 이렇게 보편 진리가 우리의 작은 인간의 미친 듯한 자만에 희생되었다.
이제 그 증거들은 무엇인가? 세속인에게는 추론적 증거와 논리적 추리를 재외하고 아무것도 없다. 무수히 많은 투시가들과 입문자들 세대가 획득한 지식을 믿는 오컬티스트에게는, 비밀의 문헌들(Secret Books)에서 제공하는 자료로 충분하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다른 증거가 필요하다. 어떤 카발리스트들과 심지어 동양의 오컬티스트들은 국가들의 모든 신비 문헌 속에서 이 점에 대한 균일한 증거를 찾지 못해서,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꺼린다. 심지어 그런 “균일한 증거”가 곧 제시될 것이다. 한편 우리는 그 주제를 일반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서, 어떤 과학자들이 다른 니코데무스들과 함께 그렇게 생각하듯이, 그것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터무니없는지 볼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아마도 거주한 “세계들”의 복수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가 거주하고 다소 우리와 유사한 존재들이 가득 채운 지구처럼 상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연스러운 본능을 따르는 것이다. 진실로 그 질문이 이 구체의 생명의 역사로 제한되는 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어느 정도 혜택을 갖고 추론할 수 있으며, 최소한 지성적인 질문을 묻는 어떤 희망을 갖고 인류의 모든 고대 성전에서 말한 “세계들”이 무엇이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을 어떻게 아는가 (a) 어떤 종류의 존재들이 일반적으로 구체들에 거주하는지; (b) 우리 지구보다 우세한 행성들을 다스리는 존재들이 우리가—예를 들어, 우리가 지구를 여러 조각 자르고, 운하를 내서 그것으로 우리의 기후를 완전히 바꿈으로써, 결국에는 작은 행성들 (소행성 혹은 미행성)에게—무의식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영향력을 우리 지구에 의식적으로 행사하지 않는지. 물론 시저의 부인처럼, 소행성들이 우리의 의구심으로 영향받을 리가 없다. 그것들은 너무 멀리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에소테릭 천문학을 믿기에, 그것에 대하여 확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추론을 우리 행성 체인 너머로 확장하면서 태양계의 한계를 건너가려고 할 때, 우리는 진실로 건방진 바보들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의 헤르메스 금언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지구 상에 있는 대자연은 모든 형편없는 것과 쓰레기를 놀라운 변형으로 사용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결코 반복하지 않으면서 가장 신중한 경제를 보여준다는 것을 믿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모든 무한한 태양계들 속에서 이 지구를 아주 근접하게 닮아서 보통의 힘으로 그것의 유사성과 봉쇄를 상상해서 재생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구체가 없다고 합당하게 결론 내릴 수 있다.[1]
그리고 진실로 우리는 소위 모든 과학 소설과 달, 별 그리고 행성에서 온 영의 계시 속에서 발견하듯이 로맨스 소설 속에서 인간과 사물들의 그냥 신선한 조합 혹은 변형, 심지어 우리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에서 성질과 생명이 우리와 완전히 다를 때도, 우리가 익숙한 생명의 형태들과 격정을 발견하게 된다. 스웨덴보그가 그런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 데 탁월하였다.
그러나 심지어 더 그렇다. 보통 사람은 육체적 감각들이 그와 연결시키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의식 상태에 대한 경험을 갖지 않는다. 인간은 꿈꾼다; 그들은 꿈이 육체 두뇌에 인상을 주기에 너무 깊은 심오한 잠을 잔다; 그리고 이런 상태들 속에 여전히 의식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런 신비들이 탐구되지 않고 남아 있는 동안에, 자연의 경제 속에서, 인간이 여기서 경험하는 어떤 것과도 아주 다른 의식 상태들에 속하는 구체들의 성질에 대하여 도움이 되도록 우리가 추론하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것은 글자 그대로 맞다. 왜냐하면 심지어 위대한 초인들도 (물론 입문한 분들) 그분들이 숙달된 투시가일지라도 우리 태양계에만 속하는 행성들과 그곳의 거주자들의 성질과 겉모습에 완전히 익숙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분들은 거의 모든 행성 세계들에 거주자들이 살고 있지만, 우리 태양계의 행성들에만—심지어 영으로—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분들은 또한 심지어 그분들조차도 여기 지구에서 가능한 의식 상태들과 다르지만 우리 태양계 속에 있는 여러 의식계들—우리 지구 너머 구체들의 체인의 세 가지 계—과 온전한 친밀성(라포)을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식하고 있다. 그런 지식과 상호관계가 그분들에게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보통 사람의 지각에 닫혀 있는 의식의 여러 계로 꿰뚫고 들어가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들이 그 지식을 소통하였더라도, 세계가 더 현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들이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다른 형태의 지각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행성들은 우리 태양계 너머의 별들처럼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있다. 그것은 과학자 자신들도 인정해온 사실이다. 라플라스와 허쉘은 무분별한 추론을 현명하게 자제하였지만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유명한 천문학자 C. 플람마리온에 의해서 동일한 결론이 도출되었고 일련의 과학적인 고려사항들로 지지되었다. 그가 내놓은 주장은 엄격히 과학적이며, 유명한 물리학자,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의 생각 같은 것으로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심지어 물질적인 마인드에도 호소한다.
그가 쓴다: “시인이 부르듯이, 저 ‘메마른 영들(barren spirits)’ 혹은 ‘상스러운 혼들(base souls)’은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하게 거주하는 천체라고 믿게 되었으며 지구도 거주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만약 그런 마인드들이 지질학의 추론에 익숙하였다면, 그들은 지구에 무수히 많은 해 동안 거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 수많은 기간 동안 만국의 왕(Universal King)의 광대한 영역에서 단 하나의 지성적인 피조물도 없었고, 원생 동물 형성 이전에 무한한 공간 속에서 식물도 동물도 없었다는 불가능한 결론에 이른다.”[2]
플람마리온은 생명의 모든 조건들이—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듯이—최소한 어떤 행성들에 실재한다는 것을 추가로 보여주고, 이런 조건들이 우리 지구 상에서 있는 것보다 그 행성들 위에서 훨씬 더 유리함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렇게 관찰된 사실들뿐만 아니라 과학적 추론이 투시가들의 진술과 일치하고 생명—지성적, 의식적 생명—이 우리 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에도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하는 인간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천성의 목소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이 보통 사람의 능력이 그 너머로 그를 데려갈 수 없는 한계선이다. 많은 것들이 로맨스와 이야기들로, 어떤 것은 순전히 공상적이고, 다른 것들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빽빽이 들어서 있다. 이것들은 다른 구체들에서 삶을 상상하고 묘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같이, 그들은 우리 주위의 삶의 드라마의 왜곡된 복사판만을 제시한다. 그것은 볼테르에게 현미경 아래 있는 우리 인류의 인간이거나 드 베르주라크에게 공상과 해학의 우아한 장난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저에서 새로운 세계가 우리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항상 발견한다. 이런 성향이 너무 강해서 입문하지 않은 투시가들일지라도 수련 받지 않을 때 자연스럽더라도 그것의 포로가 된다; 스웨덴보그를 보면, 그가 머큐리 (수성) 거주자들의 옷을 입고, 우리 유럽에서 입는 옷을 입고 영의 세계(spirit-world)에서 만난다.
이런 성향에 대하여 말하면서, 플람마리온이 그의 책, “복수의 거주 가능 세계에 대하여”에서 말한다: “이 주제에 대하여 글을 써온 저자들의 눈에서, 지구가 우주의 전형이고, 지구의 인간이 하늘의 거주자들의 전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다른 행성들의 성질이 본질적으로 다양하고 존재의 환경과 조건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반대일 가능성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한편 존재들의 창조와 그들의 구성요소에 들어가는 질료들을 관장하는 힘들이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반면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 다른 구체들에 어떤 방식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 주제에 대하여 쓴 사람들은 지상의 생각들로 지배되었으며, 그래서 오류에 빠졌다.” (“복수의 거주 가능 세계에 대하여,” p. 439.)
그러나 플람마리온 자신도 그가 여기서 비난하는 바로 그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가 지구 상에 있는 생명의 조건들을 다른 행성들에서 “다른 인류들”이 거주하기 위해서 적응하는 정도를 결정하는 표준으로써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무익하고 공허한 추론을 그만두자. 그것들이 우리의 가슴을 열의의 흥분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의 멘탈적 영적인 이해를 확장시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 인위적인 자극만 유발하고,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에 대한 무지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속에 간직된 무한대에 대한 무지에 점점 더 눈멀게 만들기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 속에서 언급된 인류의 “다른 세계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행성체인과 지구의 다른 상태들뿐만 아니라, 거주한 다른 구체들—별과 행성—이라고 안전하게 결론 내릴 수 있다; 동시에 후자에 대하여 결코 추론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고대 전체는 생명의 보편성을 믿었다. 그러나 실제 입문한 문명국가의 투시가 어느 누구도 다른 별에 있는 생명을 지상의 생명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지구들(earths)”과 세계들이 의미한 것은 1) 각각의 만반타라와 긴 기간의 엄폐기 후에 우리 구체의 “재탄생”과 2) 대륙들이 대양을 위한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사라질 때, 그리고 대양과 바다가 격렬하게 바뀌게 되어 극으로 파도를 보내서 새로운 대륙으로 놓을 때, 지구 표면의 주기적인 전체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서—세계-성전들 중에서 가장 어린 것—로 시작할 수 있다. 전도서 1장에서, 왕-입문자의 이런 말을 읽는다: — “한 세대가 지나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지만, 지구(땅)는 영원히 있다” 그리고 다시, “있어 온 그것이 있게 될 그것이다; 그리고 행해진 그것이 행해지게 될 그것이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이런 말로 인류의 여러 인종들이 휩쓸려 가는 연속적인 대변동이나, 더 깊게 돌아가서, 지구의 형성 과정 동안에 지구의 다양한 변화들을 언급하는 것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지금 보듯이 우리의 지구만을 말한다고 듣는다면, 그러면 신약성서를 인용할 것이다. 거기서 성 바오르가 (히브리서 1장) (신)이 모든 것의 지명된 상속자이고, 그에 의해서 세계들이 (복수)[3] 만들어졌다는 그 아들(Son) (현현된 힘)에 대하여 말한다.
이 “권능(Power)”이 호크마 혹은 지혜(Wisdom) 그리고 말씀(Word)이다. 우리는 아마도 “세계들”이라는 용어로, 별들, 천체들 등등을 의미한 것으로 들을 것이다. 그러나 “별들”이 바울 서신의 무지한 편집자들에게 “세계들”로써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심지어 그것들이 입문자 (“마스터-건축가”)였던 바울에게 알려졌음에 틀림없었다면, 이 점에 대하여 저명한 신학자, 와이즈만(Wiseman) 추기경을 인용할 수 있다. 창조의 6일의 기간과 6,000년의 기간, 6일의 불명확한—“너무 명확한”이라고 말할까—기간을 다루는 그의 책 1권 309페이지에서, 만약 우리가 성 바울의 진술 속에서 넌지시 암시한 것을 가정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 바울의 그 진술의 의미에 대하여 총체적인 암흑 속에 있다고 그가 고백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첫 번째 구절과 두 번째 구절 사이에 지나간 기간—그 원시의 순환들, 즉 전도서 1장에서 나타내어진 (세계의) 파괴와 재생산들; 혹은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리고 글자 그대로 의미로, (복수의) 세계들의 창조를 말하는 (히브리서 1:1) 구절을 받아들이는 것 . . . 모든 우주발생론이 똑같은 생각을 암시하고, 첫 번째 시리즈의 순환들로, 그것 때문에 세계가 파괴되고 다시 새롭게 나타난다는 전통을 보존한다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고 그가 추가한다.
그 추기경이 조하르를 공부하였다면, 그의 의문들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드라 수타(Idra Suta) (조하르, iii., 292, c)가 말한다: “존재하게 되자마자 사라진 오래된 세계들이 있다; 불꽃들(Scintillas)로 불러진 형태를 가진 그리고 형태가 없는 세계들—왜냐하면 그것들이 대장장이 망치 아래에서 모든 방향으로 날아가는 불꽃같았기 때문이다. 어떤 세계들은 오랫동안 계속할 수 없는 원초의 세계들이다. 왜냐하면 ‘노인(aged)’—그의 이름이 신성하다—이 아직 그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 작업자가 아직 ‘천상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5] 다시 시몬 벤 로차이의 카발라 오래 전에 쓰여진 미드라쉬(Midrash)에서, 랍비 아바부가 설명한다: — “성스러운 한 분(Holy One)이, 그분의 이름이 축복받기를, 이 세계 이전에 잡다한 세계들을 연속해서 형성하였고 파괴하였다[6] . . . 이제 이것은 첫 번째 인종들 (“에돔의 왕들”)과 파괴된 세계들을 말한다.”[7] “파괴되었다(destroyed)”는 것은 여기서 “엄폐(obscuration)”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제시된 설명을 계속 읽을 때 이것이 분명해진다: — “그것들 (세계들)이 사라졌다고 말할 때, 인간 (우리) 형태가 존재하게 되었을 때까지, 그들 (그들의 인류)은 진정한 형태가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속에 모든 것들이 구성되고 모든 형태들을 간직한다. . . .[8]—그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그들의 지위에서 가라앉는 것을 나타낸다. . . “(활동 속에 있는 세계들의 위상).[9]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들의 파괴에 대하여 읽을 때, 이 단어는 많은 의미를 가지며, 조하르와 카발라 논고에 있는 몇 가지 주석에서 매우 명확하다.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삶을 마친 많은 세계들의 파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질학적 변화와 쇠퇴처럼 사라진 몇몇 대륙들의 파괴를 의미한다.
신비스러운 “에돔의 왕들”이 가끔 파괴된 “세계들”로 언급된다; 그러나 그것은 “망토(cloak)”이다. 이스라엘에서 왕이 통치하기 전에 에돔에서 통치한 왕들 혹은 “에돔의 왕들”이 “이전의 세계들”을 결코 상징할 수 없지만, 단지 이 지구에서 “인간이 되려는 시도”만을 상징할 수 있다: 조하르가 말하는 그리고 우리가 첫 번째 근원인종으로서 설명하는 “아담 이전 인종들(pre-Adamites races).” 왜냐하면 여섯 지구—마이크로프로소푸스(Microprosopus)의 여섯 “사지”—에 대하여 말하면서, 여섯—지구 체인에서 우리 구체 위에 있는 여섯 구체—이 창조되었을 때 일곱 번째 (우리의 지구)가 산입되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에돔의 첫 일곱 왕들이 창세기에서 계산에서 제외된다. 유추와 치환의 법칙에 의해서, “지혜”와 “지식의 서”에서처럼, “칼데아 수의 서(Book of Numbers)”에서, “원초의 일곱 세계들”도 “원초의 일곱” 인종 (그림자들의 첫 번째 근원인종의 아인종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시 에돔의 왕들은 “에서(Esau) 에돔 사람들의 아버지”의 아들들이다 (창세기 36:43); 즉, 에서는 성서에서 네 번째 근원인종과 다섯 번째 근원인종, 아틀란티안과 아리안 사이에 있는 인종을 나타낸다. “두 국가가 그대의 자궁 속에 있다”고 주(Lord)께서 리브가(Rebekah)에게 말했다; 그리고 에서는 붉고 털이 있다. 창세기 24절부터 34절까지, 다섯 번째 근원인종의 탄생의 비유적인 역사를 간직한다.
“그리고 고대 시대의 왕들은 죽었고 그들의 우두머리들 (왕들)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고 시프라 드제니오우타 (3)가 말한다 . . . “흰 머리와 유사하게 처음에 형성되지 않은 국가의 머리(Head): 그것의 사람은 이런 형태에서 오지 않는다”고 조하르(iii)가 말한다 . . . “그것 (흰 머리, 다섯 번째 근원인종 혹은 옛날부터 있던 분)이 자신의 혹은 현재의 형태 속에서 자체를 가다듬기 전에 . . . 모든 세계들이 파괴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렇게 쓰여 있다: 그리고 벨라(Bela), 브올(Beor)의 아들이 에돔에서 통치하였다” (창세기 36). 여기서 “세계들”은 인종들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에돔의 또다른 왕 혹은 그런 왕)이 죽었고, 또다른 왕이 대신에 통치하였다” (창세기 31 이하).
이런 “에돔의 왕들” 아래 숨겨진 상징과 비유를 지금까지 다루어 온 어떤 카발리스트도 그것의 한 가지 측면 이상 인식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파괴된 세계들”도 아니고, “죽은 왕들”도 아니다; 둘 다이고 훨씬 더 있지만 현재는 다룰 공간이 없다. 그러므로 조하르에 있는 신비한 비유를 남겨두고, 물질 과학의 확실한 사실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먼저 일반적으로 거주한 세계들의 복수성을 믿어왔고 그리고 우리 세계 앞에 있던 세계들을 믿어온 위대한 사상가들 리스트에서 몇 명을 인용해보자. 라이프니츠, 베르누이 그리고 “광학(Optics)”에서 읽을 수 있듯이 아이작 뉴턴 같은 위대한 수학자들이 있다; 박물학자 뷔퐁; 회의론자 콩디약; 베일리, 라바터,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 그리고 최소한 신비주에 대하여 의심한 마지막 두 명과 대조로 디드로와 대부분의 백과사전 작가들. 이들 후에 근대 철학의 창립자, 칸트가 온다; 시인 철학자들, 괴테, 크라우스, 쉴링; 그리고 보디(Bode), 퍼거슨 그리고 허쉘부터 라랑드, 라플라스와 최근의 그들의 많은 제자들까지.
진실로 영예로운 이름들의 놀라운 리스트이다; 그러나 물리 천문학의 사실들이 다른 행성들에서 조직화된 생명의 실재를 심지어 더 강력하게 말한다. 이렇게 프랑스 알레스, 희망봉(Cape of Good Hope), 헝가리 그리고 다시 프랑스에 각각 떨어진 네 개의 운석에서, 여기 지구에서 유기적 생명과 변함없이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탄소의 형태, 흑연이 분석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런 탄소의 실재가 우리 대기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용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탄소가 운석의 중심에서 발견되어 왔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여 진다; 반면에 1857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르게일에 떨어진 운석에서, 물과 이탄이 발견되었고, 이탄은 식물 질료의 분해로 항상 형성된다.
그리고 다른 행성들의 천문상의 조건들을 조사하면, 우리 지구보다, 심지어 인간이 익숙한 조건 하에서 생명과 지성의 계발을 위하여 훨씬 더 적응된 몇 가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가 쉽다. 예를 들어, 목성에서 계절이 지구처럼 폭넓은 범위 사이로 변하는 대신에 거의 지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고, 지구보다 12배 길게 지속한다. 목성의 축의 경사 때문에, 목성의 계절은 거의 전적으로 그 궤도의 외심에 전적으로 기인하고, 그래서 천천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변한다. 그것이 고온 상태 속에 있기 때문에, 목성에서 삶이 불가능하다고 듣는다. 그러나 모든 천문학자들이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말한 것을 M. 플람마리온이 말한다 그리고 그는 안다.
한편 금성은 인간 생명이 지구상에 존재하듯이 거기에는 덜 적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의 계절이 더 극단적이고 온도 변화가 더 갑작스럽기 때문이다; 네 개 내행성, 수성, 금성, 지구 그리고 화성에서 하루의 길이가 거의 똑같다는 것이 특이하다.
수성에서 태양의 열기와 빛이 지구에서보다 7배 많고, 천문학에서 그것은 매우 조밀한 대기 속에 둘러 쌓여 있다고 가르친다. 태양의 빛과 열기에 비례해서 생명이 지구에서 더 활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기에, 그것의 강렬함이 여기보다 수성에서 훨씬 더 크다는 것이 더 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수성처럼 금성도 매우 조밀한 대기를 가지고 있고, 화성처럼 양극을 덮는 눈, 그들의 표면을 가리는 구름, 바다와 대륙의 지정학적 배열, 계절과 기후의 변형 모두가 매우 유사하다—최소한 물리 천문학자 눈에는. 그러나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그런 사실들과 고려사항들은 지구에서 알려진 것처럼 이런 행성들에서 인간 생명의 존재의 가능성만을 말한다. 우리가 아는 생명의 어떤 형태들이 이런 행성들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오랫동안 충분하게 나타내어졌으며, 이런 가설적 거주자들이 생리학에 대한 세부사항들로 들어가는 것이 완전히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결국 독자가 익숙한 환경의 가상의 연장선에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주 크게 인용해온 M. C. 플라마리온이 과학의 알려진 사실들과 법칙들로부터 철저하고 정확한 추론을 세운 세 가지 결론에 만족하는 것이 더 낫다.
I. 진화 초기에 활동적인 다양한 힘들이 여러 세계에서 엄청난 다양한 존재들을 낳았다; 유기적 왕국과 비유기적 왕국에서.
II. 생명이 불어넣어진 존재들은 처음부터 각각의 거주한 구체의 생리학적 상태와 관련 속에서 유기체들과 형태들에 따라서 구성되었다.
III. 다른 세계의 인류는 우리와 다르다. 그들의 외적인 육체적 유형과 내적인 조직에서. 마지막으로 성서에 반대되는 이런 결론의 타당성을 의심하려는 경향이 있는 독자는 이 질문을 세부적으로 다루는 플람마리온의 책에 있는 부록을 참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서 같은 책에서 여러 세계들의 복수성을 부인하는 그런 교회 사람들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결관계 속에서 우리는 원시적 교회의 불타는 열의가 정반대에 있는 나라들은 구원의 울타리 밖에 있을 것이라는 근거로 지구의 원형에 대한 가르침에 반대하였을 때를 회고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초기의 과학이 단단한 하늘에 대한 생각, 하늘의 길게 팬 홈에서 별들이 지상의 인류의 특별한 교화를 위해서 움직였다는 생각을 무너뜨리는 데 얼마나 오랫동안 걸렸는지 회고할 수 있다.
지구의 회전 이론이 비슷한 반대를 만났다—심지어 그것의 발견자의 순교에도. 왜냐하면 우리 구체로부터 공간 속에 있는 그것의 당당한 중심적인 위치를 빼앗기 때문에, 이 이론은 승천에 대한 사상에 소름끼치는 혼동을 만들었기 때문이다—“위(up)”와 “아래(down)”의 용어가 단순히 상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이렇게 천국의 정확한 위치의 질문을 적지 않게 복잡하게 만들었다.[10]
최고의 현대적 계산에 의하면, 최고의 망원경 범위 속에는 다양한 크기의 별들이 5억개 못지 않게 있다. 그것들 사이의 거리는 계산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의 미시적인 지구—”무한한 해안에 있는 모래 한 알”—가 유일한 지성적인 생명의 중심인가? 우리의 태양, 우리 행성보다 1300배 큰 태양이 저 거대한 태양—시리우스—옆에서 미미해지고, 다음으로 시리우스는 무한한 공간 속에서 다른 발광체들로 난장이처럼 왜소하게 된다. 작고 모호한 반유목 부족의 특별한 가디언으로써 여호와의 자기중심적 개념이 지각적인 존재를 우리의 미시적인 구체로 제한시키는 그것 옆에서 용인될 수 있다. 일차적인 이유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 인간 자신의 중요성—이기심의 조잡한 형태—의 과장된 이해와 함께, 초기 기독교인들의 천문학적 무지; 2) 만약 거주하는 수 백만의 다른 구체들의 가설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를테면 영원히 “순회하는” 신의 아들에 대한 개념이 관련되는 “그러면 각각의 세계에 대한 계시가 있는가?”라는 압도하는 응답이 잇따라 일어날 것이라는 공포. 행복하게도 이제는 그런 세계들의 존재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불필요하다. 모든 지성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한다. 이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오컬트 과학에서 주장하듯이) 우리 자신과 아주 다른 인류들을 가진 거주하는 세계들이 있다는 것이 일단 증명된다면, 그러면 이전 인종의 진화가 반정도는 증명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가 존재하는 과정에서 지나간 수 백 만년 동안에 몇 번이고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할 준비가 된 지질학자 혹은 물리학자는 어디에 있는가; 오컬티즘에서 부르듯이, 그것의 “피부”를 바꾸면서, 지구가 수반된 대기 조건과 기후 조건에 적응한 특별한 인류를 매번 갖지 않았다고 주장할 준비가 된 지질학자 혹은 물리학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우리를 앞서는 넷의 전혀 다른 인류들이 우리의 아담 인종 (다섯 번째 근원인종) 이전에 왜 존재해서 번성하지 않았어야 하는가?
[1] 최고의 디얀 초한 혹은 행성영도 (유추의 법칙에 의한 의식 너머로) 그들의 본질이 우리 태양계 너머에 있는 세계들의 본질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보이는 행성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고 우리는 배운다. 그들이 더 높은 진화 단계에 도달할 때 다른 우주가 그들에게 열린 것이다. 한편 그들은 우리 태양계의 범위 안과 아래에 있는 모든 세계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2] 전체 대우주에 있는 단 하나의 원자도 생명과 의식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그것의 웅대한 구체들은 얼마나 더 그럴까? — 그것들이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생명의 형태들의 의식 속으로도 거의 들어갈 수 없는 우리 인간에게 여전히 봉인된 책들일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는데, 우리가 결코 수련을 받지 않아서 입문하지 않았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가장 작은 동물들의 의식을 꿰뚫고 들어갈 수 있다고 어떻게 공상할 수 있을까?
[3] 이것은 모든 우주발생론의 로고스(Logos)를 말한다. 미지의 빛—그가 그것과 공존하고 동시대이다—이 “첫째로 태어난 자(First-Born),” 프로토고노스(Protogonos) 속에서 반사된다; 그리고 데미우르고스(Demiurgos) 혹은 보편 마인드(Universal Mind)가 그의 신성한 생각(Divine Thought)을 지시해서 카오스(Chaos) 속으로 들어가서 작은 신들의 형성과정 아래서 일곱 대양—삽타 사무드라—으로 나누어질 것이다. 그것이 푸루샤, 아후라 마즈다, 오시리스 등등이고, 마지막으로 그노시스의 크리스토스로, 카발라에서 호크마 혹은 지혜 “말씀”이다.
[4] 티쿤(Tikkun) 혹은 프로토고노스의 형태, “최초 태어난 자,” 즉 보편 형태와 이데아가 아직 카오스 속에 비추어지지 않았다.
[5] “천상의 인간(Heavenly Man)”은 아담 카드몬(Adam Kadmon)—세피로스의 총합이다. 마치 “마누 스와얌부바(Manu Swayambhuva)”가 프라자파티의 총합인 것처럼.
[6] Bereshith Rabba, Parsha IX
[7] 이것은 우리의 네 번째 라운드 이전에 있던 세 개 라운드들을 말한다.
[8] 이 문장은 이중의 의미와 오컬트 과학에 있는 심오한 신비를 담고 있으며 오컬트 과학의 비밀을 안다면 그리고 알게 될 때 초인에게 그의 보이는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을 준다.
[9] 이드라 수타, 조하르, iii. 136, c. “그들의 지위에서 가라앉는 것”은 분명하다; 활동적인 세계들에서 일시적인 엄폐로 떨어졌다—그들은 휴식하고 그래서 완전히 변했다.
[10] 불가지론의 명성을 가진 가공할 “살라딘” (윌리암 스튜어트 로스)이 쓴 박식하고 재치 있는 작품, “신과 그의 책(God and his Book)”에서, 만약 크리스트가 대포알의 속도로 승천하였다면, 그가 아직도 시리우스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재미있는 계산이 과거를 생생하게 상기시킨다. 그것은 아마도 중세 시대의 인간이 종교적인 단언에서 터무니없고 물질적인 것처럼, 심지어 과학적 계몽의 우리 시대에서도 물질적인 부정에서 지나치게 터무니없다는 근거가 약하지 않은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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