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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으로 그리고 비의적으로 자연 속에는 하나의 대원소(ONE ELEMENT)만 있고, 그것의 뿌리에 신성(Deity)이 있다; 소위 일곱 원소가 그 신성의 베일, 옷이며, 그 중에 다섯 가지가 현현하였고 그것들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그 본질로부터 직접, 인간이, 물질적으로, 심령적으로, 멘탈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고려하건, 온다. 4원소만이 후기 고대에는 일반적으로 얘기하고, 다섯 가지 원소가 철학에서만 인정되었다. 왜냐하면 에테르의 체가 아직 충분하게 현현되지 않았고, 그 본체(noumenon)가 여전히 “전능한 아버지(Omnipotent Father)—아에테르(AEther), 나머지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화학과 물리학에서 수많은 하위 원소들, 심지어 전체 숫자를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되는 60개 혹은 70개를 포함하는 이 “원소들”은 무엇인가? 하여튼 그것들의 진화를 역사적인 시작부터 따라가보자.
플라톤이 4원소는 “복합체를 구성하고 분해시키는 그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의 특징을 충분히 말한 것이다. 그래서 우주 숭배(Cosmolatry)는 심지어 최악의 측면에서도 어떤 대상의 수동적인 외적 형태와 물질을 숭배하는 주물 숭배가 결코 아니었으며, 언제나 그 속에 있는 본체를 바라본 것이었다. 불, 공기, 물, 흙은 볼 수 있는 옷에 불과하고, 형태를 채우는 볼 수 없는 혼 혹은 영들의 상징들이었다—무지한 사람들은 숭배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단순히 경의를 표하고 인정한다. 그 다음으로 본체의 원소들의 현상적인 하위 구분이 엘리멘탈, 소위 낮은 등급의 “자연령”으로 형태 속에 채워졌다.
모쿠스의 신통기에서 먼저 에테르를 발견하고, 그리고 공기를 본다; 그 두 가지 원리로부터 유롬(Ulom), 이해할 수 있는 신(Intelligible god) (볼 수 있는 물질 우주)이 태어난다.[1]
오르페우스 찬가에서, 에로스-파네스(Eros-Phanes)가 영적인 알(Spiritual Egg)에서 전개하여 나오며, 아에테르 바람이 그것을 잉태시키는데, 그 바람은 “신의 영(Spirit of God)”으로 “신성한 이데아(원형)”인 “카오스 위를 배회하면서,” 아에테르(AEther) 속에서 움직인다고 말한다. 힌두인의 카타코파니샤드에서, 푸루샤, 신성한 영이 이미 원물질 이전에 서있고, 그 둘의 합일로부터 위대한 세계혼, “마하 = 아트마, 브라흠, 대생명의 영(Spirit of Life)”이[2] 솟아나온다; 이 후자의 명칭은 보편혼(Universal Soul) 혹은 애니마 문디(Anima Mundi), 신성 마법사와 카발리스트의 아스트랄 빛과 동일한 것으로, 아스트랄 빛은 그것의 마지막이자 가장 낮은 구분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들[στοιχεῖα]은 이렇게 우리 우주 세계의 네 가지 거대한 구분에 붙여진 실체 없는 원리들(incorporeal principles)이었고, 크레져가 그 원시 믿음을 일종의 마기즘(magism), 심령적 이단주의 그리고 효력의 신격화로 공정하게 정의한다; 신봉자들을 이런 효력과 밀접한 공동체로 결속시켰던 하나의 영성화이다.” (9권, p. 850) 사실 너무 밀접해서 이 효력 혹은 거대한 힘의 하이어라키가 점진적인 일곱 등급 상에서 숙고할 수 있는 것에서 숙고할 수 없는 것까지 분류되어 왔다. 그것들은—이해를 돕기 위한 인위적인 도움으로써가 아니라—그것들의 화학적 (혹은 물질적) 구성요소부터 순전히 영적 구성요소에 이르기까지 실제 우주적 등급에서 칠중이다. 무지한 대중들에게 신(Gods)은 독립적이고 지고한 신들(gods)이다; 그들이 지성적일지라도, 많은 것으로 이루어진 하나(in pluribus unum)라는 철학적 문장의 영(Spirit)을 이해할 수 없는 광신자들에게는 데몬(daemon)이다. 헤르메스 철학자에게 그것들은 그가 다루는 원리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맹목적인” 혹은 “지성적인” 힘(FORCES)이다. 문명화된 우리 시대에 그것들이 결국에는 단순한 화학 원소들로 격하되기까지 길고 긴 밀레니엄이 걸렸다.
하여튼 선한 기독교인들과 특히 개신교도들은 그들이 모세를 존경한다면 사원소에 대하여 더 많은 존경을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모세5경 모든 페이지에서 유대의 법 제공자(모세)가 간직했던 신비적 중요성과 참작한 것을 성서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성소(Holy of Holies)를 간직한 장막은 “우주적 상징으로, 그것의 여러 의미들 중에 하나로, 원소들, 사방위 그리고 에테르에게 바쳐진 우주적 상징”이었다. 조세푸스는 그것이 에테르의 색인 백색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유대 사원과 이집트 사원에서—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에 의하면—다섯 기둥으로 지탱된 거대한 커튼이 지성소(sanctum sanctorum)를 (지금은 기독교 교회에서 제단으로 나타내어진다) 분리시켰으며, 세속인에게 접근가능한 부분부터 사제들만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된 이유를 설명한다. 커튼의 네 가지 색은 네 가지 주요 원소를 상징하였고, 오감 때문에 인간이 사원소의 도움으로 획득할 수 있는 신성에 대한 지식을 나타냈다. (잡록 I., v. § 6)
코리의 고대 단편모음에서, “칼데아인의 신탁들” 중의 하나에서 우리 시대 저명한 두 과학자가 쓴 “보이지 않는 우주(Unseen Universe)” 같은 독창적인 언어로 원소들과 에테르에 대한 생각들을 표현한다.
거기서 말한다: “에테르에서 만물이 나왔고, 그것으로 만물이 돌아갈 것이다; 만물의 이미지가 지울 수 없게 그것에 각인된다; 그리고 그것은 볼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형태 심지어 이데아(개념)의 나머지의 저장소 혹은 씨앗들의 저장소이다. 우리 시대에 발견된 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단순한 마인드를 가진 선조들’에 의해서 수 천 년 전에 예상되어 왔다는 우리 주장을 이 경우가 이상하게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시스 언베일드)
사원소와 유대인들의 ‘말라킴(malachim)’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들은 랍비들과 후대 교부들의 신학적 술책으로 여호와로 합쳐졌지만, 그것의 기원은 다른 모든 나라들의 우주적 신의 기원과 동일하다. 그들의 상징은 옥수스 강변에서 태어났건, 상이집트의 불타는 모래에서 혹은 눈 덮인 신성한 테살리아 산의 정상과 비탈길을 덮고 있는 기괴하고 얼음의 야생 숲 속에서 태어났건 혹은 아메리카의 팜파스에서 태어났건, 반복하지만, 그들의 상징은 그 원천을 추적해볼 때 언제나 하나이자 동일하다. 이집트인이건 펠라스기인이건, 아리안이건 셈족이건, 지역의 수호신(genius loci)은 그것의 통일성에서 모든 자연을 품었다; 그러나 특히 나무, 강, 산 혹은 별 같은 사원소의 창조물 중의 하나가 사원소가 아니듯이 그것은 사원소가 아니다. 지역의 수호신—원래의 웅장한 의미가 거의 사라졌을 때인 다섯 번째 근원인종의 마지막 아인종이 늦게 덧붙인 것—은 누적된 칭호에서 언제나 그의 모든 동료들의 대표자였다. 그것은 천둥으로 상징된 주피터(Jove) 혹은 아그니(Agni)처럼 불의 신이었다; 그것은 바루나(Varuna), 넵튠(Neptune) 등처럼 어느 신성한 강이나 산 혹은 하류의 황소로 상징된 물의 신이었다; 그것은 바이유(Vayu)와 인드라(Indra)처럼, 허리케인과 폭풍우 속에서 나타나는 공기의 신이었다; 그리고 플루토(Pluto), 야마(Yama)처럼, 지진에서 나타난 땅의 영 혹은 신이었다.
이들은 우주적 신들로, 모든 우주론 혹은 신화에서 발견되는, 하나 속에 모두를 언제나 통합한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도도나의 주피터를 가졌으며, 그는 자신 속에 사원소와 사방위를 포함하였고 고대 로마에서 “주피터 문더스(Jupiter Mundus)”라는 범신론 칭호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제 근대 로마에서는 데우스 문더스(Deus Mundus), 하나의 세속의 신으로 되었으며, 특별한 성직자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그가 가장 최근 신화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신으로 되었다.
불, 공기, 물의 신으로써, 그들은 천상의(celestial) 신이었다; 하위 영역의 신으로써, 그들은 지옥의(infernal) 신들이었다; 뒤의 형용사(지옥의)는 단순히 지구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들은 “하위 왕국의 주(Lord), 등등”, 야마, 플루토, 오시리스라는 각각의 이름으로 “지구의 영들(Spirits of the Earth)”이었고, 그들의 지상의 특징이 그것을 충분이 증명해준다. [3] 고대인들은 사후에 지구에 있는 림버스(limbus), 즉 카마로카 보다 더 나쁜 거주처를 알지 못했다. 도도나의 주피터가 지하 세계의 왕인 아이도네우스(Aidoneus) 그리고 로마의 풀루토 혹은 디스(Dis) 그리고, 크레우저에 따르면 (I, vi, 1장), 신탁이 주어지는 지하세계인 디오니시우스 크토니오스(Chthonios)와 동일하다고 주장된다면, 그러면 아이도네우스와 디오니시우스가 아도나이(Adonai) 또는 아담의 서 (코덱스 나자레스)에서 여호와를 부르는 “주르보 아도나이(Jurbo Adonai)”의 토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오컬티스트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대는 태양을 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아도나이(Adonai)로 불리며, 그의 이름은 또한 카두쉬(Kadush)와 엘-엘(El-El)” 이고, (코덱스 나자레우스, I, 47; 시편 89, 18) 또한 “주 바쿠스(Lord Bacchus)”이다. 바빌론 이전의 대신비 혹은 소드(Sods)의 바알-아도니스(Baal-Adonis)가 마소라(Massorah)로 아도나이가 되었고, 나중에 모음화된 여호와(Jehovah)가 되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이 맞다. 이 모든 주피터들은 같은 가족이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 속에 여호와가 포함되어야 한다. 주피터-에어리오스(Aerios) 혹은 팬(Pan), 이집트인의 주피터-암몬(Ammon), 그리고 칼데아인의 주피터-벨-몰록은 모두 상관관계가 있으며 주르보-아도나이와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어떤 우주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구체적인 상징을 창조하는 그 성질과 힘 그리고 그 힘의 물리적 물질적 직물이 그것을 통해서 외부로 현현하는 에너지라는 것을 증명한다.
쉴링이 말했듯이, 원시 종교는 물리적인 현상에 대한 단순한 집착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근대의 우리 사두개인들이 아는 것보다 더 고양된 원리들이 “천둥, 바람, 그리고 비 같은 단순한 자연의 신성의 투명한 베일 밑에 숨겨져 있다.” 고대인들은 자연의 힘 속에서 물질 원소와 영적 원소를 알았고 구분할 수 있었다.
사중의 주피터, 네 얼굴의 브라흐마처럼—공기의, 지상의, 빛나는 그리고 해상의 신—사원소의 주(主)이자 주인이 모든 국가의 위대한 우주적 신의 대표자로 선다. 불에 대한 힘을 헤파이스토스-벌컨에게 넘겨주고, 바다에 대한 힘을 포세이돈-넵튠에게, 땅의 것을 풀루토-아이도네우스에게 넘겨주지만, 공기의 주피터는 이 모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에테르(AETHER)가 최초부터 모드 원소들의 통합이었고, 그것들보다 우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전통에서 중앙 아시아 사막에 있는 거대한 동굴인 어떤 석굴을 가리킨다. 그 속으로 빛이 십자 형태로 사방위 지점에 놓인 얼핏 보기에 네 개의 자연적인 구멍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온다. 정오부터 일몰 한 시간 전까지 어떤 자연적인 혹은 인위적으로 준비된 토양과 초목 상태에 따라서 그 빛이 네 가지 다른 색으로—적색, 파란색, 오렌지-황금색 그리고 흰색—흘러 들어온다. 그 빛은 위에 지구를 나타내는 구체가 있는 하얀 대리석 기둥으로 둘러 쌓인 중심에 집중된다. 그곳을 “짜라투쉬타의 석굴”이라고 부른다.
네 번째 인종인 아틀란티스인의 예술과 과학 아래 포함될 때, 우주 신을 믿는 사람들이 그 신들의 지성적 간섭으로 합당하게 돌렸던 사원소의 현연이 과학적인 성격을 띠었다. 고대 사제들의 마법은 그 당시에는 그들의 신에게 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지상의 인간 언어는 주들(Lords)에게 도달할 수 없다. 각자가 각 원소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한다”—의미가 많이 담긴 문장이다. 인용된 “규칙의 서(Book of Rules)”는 그 원소-언어의 성질에 대한 설명으로서 추가한다: “그것은 단어들이 아닌,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 숫자 그리고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셋을 어떻게 합치는지 아는 사람은 주관하는 거대한 힘(Power) (필요한 구체적인 원소를 섭정하는 신)의 반응을 불러올 것이다.”
이렇게 이런 “언어”는 인도에서 주문(incantation)이나 만트라(Mantra)의 소리로, 소리가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마법 인자이며, 유한자와 불멸자 사이에 소통의 문을 여는 열쇠들 중에 첫 번째이다. 성 바울의 말씀과 가르침을 믿는 사람은 그가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문장들만 뽑고 다른 것은 거부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성 바울은 우주적 신의 존재와 우리 속에서 그들의 실재를 가장 부정할 수 없게 가르친다. 이교주의는 이중의 동시적 진화를 가르쳤다: 로마 교회의 도래 아주 오래 전에 “창조”—로마 교회가 갖고 있듯이 "영적 그리고 세속적(spiritualem ac mundanum).” 대중적 어법은 이교주의 또는 “우상숭배”의 가장 번성한 시대 이후 신성한 하이어라키에 관하여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제는 허위의 가식으로 되어버린 주장들과 함께, 이름들만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플라톤이 최고 원리—"아버지 아에테르(Father AEther) 혹은 주피터—의 말로 이 말들을 표현하였을 때: “내가 모든 신들의 작업의 아버지이듯이(operumque parens) 나는 신들(gods)의 신들(gods)을 만든 자이다(opifex)”; 그는 이 문장의 진의를 충분히 알았지만, 성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의심스럽다: “하늘이건 땅이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더라도, 많은 신들과 많은 주들이 있으나,” . . . . 등등 (고린도전서 8:5).[4] 둘 다 그런 조심스러운 용어로 제시한 것의 취지와 의미를 알았다.
왕립학회 회원인 W. R. 그로브 경이 힘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대인들은 보통의 유추에서 동떨어진, 그리고 그들에게 알려진 어떤 기계적 작용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자연 현상을 목격하였을 때, 그들은 그것을 혼 혹은 영적, 초자연적 힘으로 말했다. . . . 공기와 기체도 처음에는 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후에 그것들은 더 물질적 성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똑 같은 단어 뉴마(πνεῦμα) 영 등도 혼이나 기체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가이스트(geist)에서 온 가스(gas), 고스트(ghost) 혹은 영 단어도 영적 개념이 점차로 물리적 개념으로 변형되는 예를 제공한다 . . .” (89페이지) 이 위대한 과학자는 (“물리적 힘의 상관관계” 5판 서문에서) 이것을 원인들과는 간섭할 일이 없는 정밀 과학의 유일한 관심사로 여긴다. 그가 설명하길,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는 이 힘과 추상적 관계에 있으며, 단어들은 오직 편리성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 각각과 모두를 발생시키는 궁극의 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아마도 계속 그럴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작용의 기준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의 원인을 하나의 전능한 영향으로 겸손하게 돌려야 하고, 그것의 영향을 연구하고 실험으로 그것의 상호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에 만족해야만 한다.” (xiv 페이지.)
이 정책을 받아들이고, 위에 인용된 말, 즉 “발생시키는 궁극의 힘”의 영성의 체계를 사실상 인정한다면, 물질의 원소, 오히려 그것들의 복합물—불, 공기, 물 혹은 땅에 실재하듯이—속에 내재하는 이 특질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것이 더 비논리적일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 힘들을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의 진정한 성질을 다양한 비유들로 숨기면서, 일반 대중의 혜택을 위하여 (혹은 손해를 주면서), 그들은 그것들을 거꾸로 뒤집으면서, 염두에 둔 다수의 목적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상징으로 숨겨진 진리의 핵에 두꺼운 베일을 드리우려고 하였지만, 미래 세대의 현명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비유나 그림문자 형태 뒤에 있는 그 진리를 구분할 수 있도록 충분히 투명하게, 미래 세대를 위한 어떤 기록으로써 그 상징을 보존하려고 언제나 노력하였다. 고대인들인 저 고대 현자들이 미신과 쉽게 믿는 성향 때문에 비난 받는다; 그리고, 근대 예술과 과학에 박식하고, 그들 세대에서 현명하고 교양 있는 바로 그 국가들이 유대인의 인격화된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의 살아 있는 무한한 신으로써 오늘날까지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비난한다.
“미신”이라고 주장된 것은 무엇이었나? 예를 들어, “바람들은 거인 티포이우스(Typhœus)의 아들들”이었고, 아이올로스(Aeolus)가 그들을 마음대로 묶었다가 풀어놓았다가 한다고 헤시오도스가 믿었으며, 다신론자인 그리스인들도 헤시오도스를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였다. 단일신을 믿는 유대인도 그들의 등장 인물에 대한 다른 이름들을 가진 똑같은 믿음을 가졌고, 기독교인들이 오늘날까지 같은 것을 믿고 있는데, 왜 그리스인은 그러지 않겠는가? 헤시오도스의 아이올로스, 보레아스 등등은 이스라엘의 “선택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카딤(Kadim), 짜폰(Tzaphon), 다렌(Daren), 그리고 루아흐 하잔(Ruach Hajan)으로 불렸다. 그러면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그리스인들은 아이올로스가 바람을 묶었다가 풀었다가 한다고 배운 반면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주 신(Lord God)이 “코 구멍에서 연기가 나오고 입에서 불이 나온 채, 지품 천사 위에 타고 날았으며, 바람의 날개 위에서 보였다고” 열렬히 믿었다. (II, 사무엘서, 22:9, 11.) 두 국가의 표현은 모두 비유적이거나 둘 다 미신적이다. 우리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연과의 예리한 일체감과 모든 자연 현상 뒤에 있는 신비하고 지성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서 생긴 것으로, 근대인은 더 이상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다. 만약 불과 바람에게, 특히 불에게 자주 제물을 바쳤던 이스라엘에서 이것이 신성한 숭배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로 크세르크세스 함대가 접근할 때, 신탁에서 “바람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충고할 때, 델파이 신탁을 듣는 것이 그리스 이교도들에게는 “미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은 태워버리는 불”이며 (신명기 4:24) 일반적으로 불로서 나타났고 “불에 휩싸였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엘리아가 “거대한 강력한 바람 속에서, 그리고 지진 속에서” (1열왕기, 19:11) 그(주)를 찾지 않았던가?” 기독교인들도 그들을 따라서 하지 않나? 더구나 그들은 오늘날까지 똑 같은 바람과 물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가? 그들은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비, 건조한 날씨, 무역풍 그리고 폭풍우를 잠재우기 위한 특별한 기도가 지금까지 세 가지 기독교 교회 기도서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신교 수 백 개 종파도 모든 재앙의 위협에 대하여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는가? 그런 기도에 주피터 플루비우수(Pluvius)가 대답하지 않듯이, 여호와도 대답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이교도나 기독교에서 똑 같은 이런 힘 또는 이런 원소를 지배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힘에게 요청하는 이런 기도가 있다는 사실을 바꿔 놓지는 않는다; 혹은 그런 기도를 이교도가 그의 우상에게 빌 때만 우둔한 우상숭배이자 터무니없는 “미신”으로 믿어야 하고, 천상의 수취인 이름이 바뀔 때마다 똑 같은 미신이 훌륭한 신앙심과 종교로 갑자기 변형되는 것으로 믿어야만 하는가? 하지만 나무는 그 열매로 알아본다. 그리고 기독교 나무의 열매가 이교도 나무의 열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왜 기독교가 이교도보다 더 숭배를 명령하는가?
이렇게 개종한 유대인인 슈발리에 드라크와 프랑스 귀족의 로마 카톨릭 광신자인 후작 더 미르빌이 히브리어에서 번개(lightning)는 격노(fury)와 동의어이고, 항상 사악한 영에 의해서 다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주피터 풀구르(Jupiter Fulgur) (벼락) 혹은 풀구란스(Fulgurans) (번개의 근원)가 기독교인들이 엘리키우스(Elicius) (번개를 부르는 신)로 부르며, 번개의 혼, 그것의 데몬(daemon)으로써 비난했다고 들었을 때;[5] 우리는 똑 같은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의 주 신(Lord God)”에게 똑 같은 설명과 정의를 적용해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들의 신과 교리를 악용할 우리의 권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두 명의 열렬하고 박식한 로마 카톨릭 사람에게서 나오는 앞에서 말한 진술은 적어도 성서와 예언자들이 있는 곳에서는 위험하다. 진실로 “이교도 그리스인들의 우두머리 데몬,” 주피터가 그의 분노를 일으킨 자들에게 치명적인 번개와 천둥을 던졌다면, 아브라함과 야곱의 신도 그랬다. 사무엘서 2권에서 “주께서 하늘에서 천둥을 쳤고, 지고자(Most High)가 그분의 음성을 내셨으며, 화살(벼락)을 내보내서 그들을 (사울의 군대) 번개로 흩어지게 하였으며,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본다. (2 사무엘서 22:14, 15)
아테네 사람들은 보레아스에게 제물을 바쳐왔다고 비난 받는다; 그리고 이 “데몬”은 펠리온 산의 바위 위에서 페르시아 함대 400척을 침몰시켰고 좌초시켰다고 비난 받으며, 그리고 너무 격노하여 “크세르크세스의 모든 마법사들이 테티스에게 제물을 바쳐도 그것을 거의 상쇄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 “폴림니아,” 189-191) 매우 운 좋게도, 적—또 다른 기독교 국가—의 “기도” 때문에 어느 한 기독교 함대에 일어나는 대규모의 유사한 재앙을 보여주는 기독교 전쟁의 기록에서 입증된 단 하나의 어떤 예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이 보레아스에게 열렬히 기도하였듯이, 각자가 상대방의 파멸을 여호와에게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이다. 둘 다 부드럽게 애정을 가지고 깔끔한 흑마법 조각에 호소하였다. 신성한 간섭의 그런 절제가 상호 파괴를 위해서 공통의 전능한 신에게 호소한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이교도와 기독교 사이에서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만약 미래 어떤 전쟁 동안에 그런 신성한 기도 때문에 적국 함대 400척이 난파되었다면, 개신교도의 영국 전체가 기뻐하며 주께 감사할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우리는 다시 묻는다: 주피터, 보레아스 그리고 여호와 사이에 차이가 무엇인가? 이것 이상이 아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척—말하자면 자신의 “아버지”—의 범죄는 항상 용서받고 종종 칭찬받지만, 반면에 우리 이웃 부모의 범죄는 언제나 교수형으로 기쁘게 처벌한다. 하지만 범죄는 똑같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축복”이 개종한 이교도의 윤리보다 더 진전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위의 내용은 이교도 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신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며, 둘 다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공평하고, 어느 한 쪽을 유리하게 증거를 제시하는 것을 거부하며, 기도하거나 믿지도 않고, 그런 “개성적인” 인격신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교양 있는 신학자의 비논리적 맹목적 광신주의를 기묘하게 보여주는 비교로서 병행해서 제시된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두 믿음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도덕성 혹은 영적 성질에 미치는 각자의 영향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고대 시대에 “루시퍼의 빛”이 그랬듯이, “크리스트의 빛”이 이제 동물 인간의 가증스러운 얼굴에서 비춘다.
“저 불운한 이교도들은 그들의 미신에서 엘리멘트(Elements)를 이해력을 가진 어떤 것으로 여긴다! . . . 그들은 여전히 그들 우상인 바이유(Vayu)—신 아니 오히려 바람과 공기의 데몬—를 믿는다 . . . 그들은 그들의 기도의 효과를 확고하게 믿고, 그들 브라만이 바람과 폭풍우를 지배하는 힘을 확고하게 믿는다. . . .” (코친에서 선교사 라부아지에, 식민지 저널에서) 이것에 대답으로, 우리는 누가복음 8장 24절에서 인용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과 물의 맹위를 꾸짖으셨고, 그들은 멈췄으며 잠잠해졌다.” 기도서에서 또 다른 인용을 하겠다: . . . “오 바다의 처녀여, 바다의 축복받은 어머니이자 숙녀, 그대의 파도를 멈추라 . . .” 등등. (페니키아 선원들이 그들의 처녀신 아스타르테(Astarte)에게 한 구절을 복사한, 나폴리와 프로방스 선원들의 기도.) 제시된 병렬 비교에서 나오는 논리적이고 억누를 수 없는 결론이자 선교사의 고발은 이렇다: 브라만들이 그들의 엘리멘트-신에게 한 명령이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브라만들의 힘이 예수의 힘과 동등하게 놓인다. 더구나 아스타르테가 기독교 선원들의 “바다의 처녀(Virgin of the Sea)”보다 효력에서 조금도 약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개에게 나쁜 이름을 지어주고, 매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개가 유죄라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보레아스와 아스타르테는 신학적 공상에서 악마일 수 있지만, 방금 말했듯이, 나무는 그 열매로 판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이교도처럼 비윤리적이고 사악하다는 것이 보인다면, 인류가 신과 우상을 바꾸는 것으로 무슨 혜택이 있겠는가?
신과 기독교 성자들이 행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그것이 성공하더라도 단순한 인간들에게는 범죄가 된다. 마술과 주문이 이제는 우화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런 주문이 유스트니아누스 제정 시절부터 영국과 미국의 주술 금지 법안에 이르기까지—진부하지만 오늘날까지 폐기되지 않은—심지어 그런 주문이 의심될 때도 범죄자로 처벌받는다. 왜 키메라를 처벌하는가? 또한 콘스탄틴 황제가 철학자 소파트로스가 바람을 풀어놓는 바람에, 기근을 끝내기 위하여 곡물로 가득 찬 배가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게 막아서 그를 사형에 처한 것을 읽는다. 파우사니아스도 간단한 기도와 주문으로 우박을 동반한 강력한 폭풍을 멈추는 사람을 그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말했을 때 조롱 받았다. 이런 것이 근대 기독교 작가들이 폭풍과 위험에서 기도를 권하고 그 효능을 믿는 것을 막지 못한다. 거의 100년전에 단언하는 유명한 작가 스프렌저를 믿을 수 있다면, 호포와 스타드라인 두 명의 마법사이자 주술가가 과일에 주술을 걸어서 마술로 한 농장에서 다른 농장으로 수확물을 옮겼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졌다. “누가 주문으로 한 곳의 과일을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가.” (세르비우스가 쓴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Eclogues)에 대하여)
이제 아주 조금이라도 미신의 그림자도 없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물의 이중 성질—영적 그리고 물질적 성질, 가시적 그리고 비가시적 성질—을 믿을 수 있고, 과학이 증명한 것을 거부하지만 사실상 이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 장을 끝내도록 하자. 왜냐하면 윌리암 그로브 경처럼, 우리가 다루는 전기가 볼 수 없는 어떤 것, “모든 힘을 발생시키는 궁극의 힘,” “하나의 편재하는 영향력”에 영향 받은 보통 물질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그러면 고대인들이 그랬듯이, 모든 엘리멘트는 그 성질에서 이중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다. “에테르 불은 순수한 카비르(KABIR)의 발산이다; 기체(공기)는 에테르 불과 지상의 불의 합일에 불과하고, 지상에서 그것을 안내하고 적용하는 것은 낮은 위계의 카비르에 속한다”—아마도 오컬티스트는 그것을 엘리멘탈로 부른다; 그리고 똑 같은 것이 모든 우주 엘리멘트에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다양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자성적 힘, 교감적 힘, 반감적 힘, 신경적 힘, 역동적 힘, 오컬트 힘, 기계적 힘, 멘탈적 힘—모든 종류의 힘;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섞이고 통합되어 우리가 지성적 힘 그리고 윤리적 힘으로 부르는 그런 힘으로 되는 것을 보면서, 육체의 힘은 그 본질에서 모두 생물학적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말하자면 육체의 힘은 지성적 윤리적 힘의 매개체이다. 인간 속에 있는 혼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것들의 실재와 혼합이 우리 존재의 바로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실 인간 속에 있는 자아(Ego)를 구성한다. 이 잠재하는 힘들은 이제 과학에서 자연적이라고 간주되고 여겨지는 생리적, 물리적, 기계적뿐만 아니라 신경적, 희열을 느끼는, 투시와 투청 현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물리력으로 부르는 것에서 왜 인간이 자연에서 유일한 예외이고, 심지어 원소들도 그들의 매개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믿음을 고대 종교와 함께 “미신”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1] 무버스(Movers): “페니키아인(Die Phönizier),” 282.
[2] 웨버: “아카데미 강연,” 213, 214, 등등.
[3] 성서의 게헨나(고난의 땅)는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계곡이었다. 만약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믿는다면, 그곳에서 단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이 몰록(Moloch)에게 그들 아이를 제물로 바쳤다. 스칸디나비아의 헬(Hel) 또는 헬라(Hela)는 몹시 추운 지역—다시 카마로카—이었고 이집트인의 아멘티(Amenti) 정화의 장소였다. (아이시스 언베일드, 2권, p. 11 참조)
[4] 우리가 해석하듯이, 개신교도는 고린도서에 있는 그 구절을 해석하는 일을 우리에게 떠넘길 수 없다; 왜냐하면 영어 성서에 있는 번역이 애매하게 되었더라도, 원래 구절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로마 교회는 사도의 말을 그 진정한 의미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로마 교회가 저작을 승인한 후작 드 미르빌이 확인해주었듯이, “그 사도에 의해서 직접 영감을 받은” 그리고 “그의 구술을 받아쓴” 존 크라이소스톰의 성 바울의 사도에 대한 주석을 참고하라. 그리고 그 특별한 구절을 언급하면서 성 크라이소스톰이 말하길, “그리고 사실 신으로 불리는 그것이 있지만 . . . . –왜냐하면 실제로 몇몇 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동시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원리(God-principle)와 우위의 신(Superior God)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자 불가분인 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멈추는” . . . . 이렇게 나이든 입문자들도 작은 신을 숭배하는 것이 신 원리(God Principle)에 결코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말했다. (드 미르빌, “영에 관하여(Des Esprits),” 2권, 322.)
[5] “우주숭배,” 41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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