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총신대학신학대학원 명예 교수이신 박용규 교수님이 유튜브를 통해 하신 강의의 내용을 녹취한 것임을 밝힙니다.)
(3) 청교도운동이란 무엇인가? 청교도운동 그 기원과 해석 - YouTube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청교도 운동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일머(Aylmer)가 그의 책, 간추린 <17세기 영국사(17 Century England)>에서 지적한 것처럼 어떤 역사 사건이건 그 시대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심은 그 시대에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리고 그 일들이 어째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연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청교도 운동의 기원과 해석의 문제입니다.
오덕교 교수님(Professor. DeokKyo Oh)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청교도 운동은 하나의 교파운동이 아니라 성공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와 같은 다양한 부류에 속하는 개혁자들에 의해서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칼빈과 쯔빙글리에 의해 세워진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서 기독교적인 가정, 교회, 국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지금까지 청교도 운동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혹은 교리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연구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보는 시각에 따라 청교도 운동의 성격이 조금씩 상이합니다.
청교도 운동을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조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청교도 운동을 종교개혁의 범주 속에서, 청교도 운동을 혁명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연구하려고 하는 이들은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의 독립 혁명과 같은 맥락에서, 개신교 정통주의 범주 속에서 청교도들을 연구하려고 하는 이들은 정통주의 맥락에서 청교도 운동을 조명했습니다.
청교도 운동의 성격과 정의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청교도 운동은 적어도 그 발단에 있어서는 카톨릭의 예식을 따르는 영국 국교에 불만을 갖고 있던 칼빈주의자들이 영국 교회가 로마 카톨릭주의로 퇴보할 것을 우려해서 온전한 개혁과 교회의 순수성을 외쳤던 개혁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청교도들은 영국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급진파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순수한 개혁의 외침은 성경이야말로 최종적인 권위를 지닌다고 하는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청교도들에게 성경은 삶에 적용되어져야 할 표준이며 정확무오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자 개혁의 표준이었습니다.
기원상 청교도라고 하는 말은 너무도 엄격한 계율적 삶을 꼬집어 부르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라고 하는 말은 맹신적 순수 추종자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교도라고 하는 말은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인 1564년에 발견됩니다.
그러나 사상적인 의미에서 청교도라고 하는 말은 그 이전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이펀(Marshall M. Knappen) 교수는 <튜더왕조의 청교도주의>라고 하는 저서에서 감독이나 왕의 권한에 의해서 제약을 받지 않고 성서를 번역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고 하는 점에서 윌리엄 틴데일에게서 청교도의 사상적 원형을 찾았습니다.
비록 청교도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부터 청교도적인 이상을 목적으로 삼는 그리고 모델로 삼는 기독교 운동이 존재했던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청교도 운동은 종교개혁 운동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17세기, 정확하게 엘리자베스 1세 통치 하에 초서(Chaucer) 주교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토마스 카트라이트가 개혁을 외치던 1570년부터 1643년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리기까지 청교도 운동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교회의 조직적 갱신과 영적 갱신을 외쳤던 청교도들이 순수한 설교를 강조하고 종교서적을 출판하고 종교서적과 설교를 통해서 청교도 정신은 하나의 혁명처럼 급속히 확산된 것입니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여왕의 통치 하에 영국은 교황을 그리스도의 사자로 믿는 구 카톨릭에 충성하는 카톨릭 교도와 쯔빙글리와 칼빈을 충실하게 따르는 개신교도들, 가장 다수인 영국 국교회 등 세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기간 동안에 있었던 통일령에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어리를 승계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랜 갈등을 청산하기 위해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간의 타협접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타협점은 국민의 여망이자 영국이 당면한 종교적 분쟁을 종식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신학에서는 칼빈주의를 따라 영국 국교회를 결성합니다.
국교회의 최고 수장은 왕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59년 수장령(Act of Supermacy)과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발표해서 주일이나 성일에 교회에 불참하는 자들에게 노동자 일주일의 임금에 해당하는 1실링의 벌금을 물렸습니다.
1571년에 영국은 영국 국교회 39개조를 채택해서 행위공덕설, 화체설, 미사, 마리아 무죄설을 거부하고 성경만이 구원의 최종적인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손상되었고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으며 성찬시에 떡과 포도주를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아야 하고 그리고 목회자들이 결혼할 것을 분명히 명문화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의 개혁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의 개혁정책에 만족하지 않고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심지어 성직자들이 입는 예복을 적그리스도의 옷이라고 거부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런 청교도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보다 오히려 로마 카톨릭 쪽으로 전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자연히 청교도들과 여왕 사이에는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언 모임입니다.
여왕은 캔터베리 대주교 에드먼드 그린달을 시켜서 성경을 연구하는 이 비공식적인 예언 모임을 금지 시키고 그 모임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린달이 여왕의 명령을 거부하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후임자 휫기프트를 시켜서 그것을 실현시켰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위에 오른 후에 처음부터 호전적인 신교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특별히 메리 여왕 때 쫓겨나서 제네바 취리히, 프랑크푸르트에서 훌륭한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을 목도하고 돌아와서 진정한 개혁을 추구하는 열성적인 프로테스탄트들은 그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교회의 잔재를 거부하는 한편 교회의, 해석이나 전승보다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교구마다 참되고 영적인 교직을 세우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제네바 같은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
엘리자베스의 온건한 개혁에 만족하지 않고 제네바 모델을 따라 비성경적이고 부패한 형태로부터의 총체적인 개혁을 이들이 외친 것입니다. 외형적인 형식주의를 일소하고 내면적인 순결을 강조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교회의 장식, 성의, 중백의, 백색제의, 오르간, 십자가 상징, 감독제도, 교회 재판등을 공격하고 설교, 성수주일, 장로교 정치를 강조했습니다.
십자가의 사용, 특정한 사제들의 예복, 제단에서 행해지는 성찬식 등, 국교 속에 남아있는 전통적인 요소들을 반대한 것입니다.
또한 주일성수도 강력히 주장해서 이날에는 단지 종교의식과 자선행위만을 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성직자들의 방탕한 생활은 더욱더 이들에게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감독제도를 반대한 것은 그 제도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교회 정치제도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교회의 정치제도는 장로교 정치였습니다.
그러나 장로교 정치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고 청교도들 중에서는 개교회 독립을 강조하는 이들도 상당수가 있었습니다.
개교회를 강조하는 독립파들 중에는 성인의 세례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역사에 침례파들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교회 정치에 있어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고 장로교, 분리주의자, 그리고 침례교 등 실로 다양했습니다.
급진적인 분리주의자들은 교회와 단절하고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회중교회를 설립하기를 원했습니다.
온전하 개혁을 외치면서도 청교도들을 싫어하는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초기의 분리주의는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550~1633)에 의해서 주도되었기 때문에 브라운주의자들로 역사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카트라이트와 장로교 정치제도
청교도 중에는 기성교회, 즉 영국 국교회에 머물면서 개혁을 추진하기를 원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교회 정치 형태로서 당시 영국 국교회보다는 장로교 정치를 원했습니다.
장로교적인 교회 행정이 성경적인 기독교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히 스코틀랜드나 제네바 교회의 모델을 따라서 장로교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 토마스 카트라이트였습니다. 탁월한 청교도 지도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의 개혁자였던 카트라이트는 156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설교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성경은 신학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교회 정치의 기초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카트라이트는 감독정치를 반대하고 칼빈의 제네바 교회를 따른 장로교 정치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주로 감독교회의 옹호자들을 반대한 정치신학 변증서들이었습니다.
교회마다 훈련을 위해 장로를 지명하고 교인들이 목사를 택할 것과 대감독, 부감독 제도를 폐지할 것, 그리고 교직의 동등성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교 정치를 의미했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청교도들은 점점더 장로교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 <권징지침서>에 담겨진 교회 사상은 영국 청교도들에게 지성적인 유산이 된 것입니다.
카트라이트는 과감한 개혁 정신 때문에 교수직과 대학에서 추방당하여 유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제임스 1세와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사촌인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과 그녀의 두번째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제임스 6세가 왕위를 계승해서 제임스 1세(James Ⅵ & Ⅰ, 1603~1625)가 되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세웠던 요구 조건, 즉 남성적인 인물과 왕가 출신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왕위 계승은 순조로웠습니다.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성숙한 성년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사실은 1610년 앙리 4세의 죽음이나 1643년 루이 13세의 죽음으로 발생했던 프랑스의 혼란한 상황과는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했던 제임스 1세와 교회 지도자들이 당면한 중요한 문제는 로마 카톨릭 교인들과 다른 반대파인 청교도들에 대해서 어떠한 정책을 실시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와 주교들은 로마 카톨릭의 위험에 대처하면서도 청교도들과도 많은 투쟁을 치러야 했고 재임 말년에는 그들의 세력을 저지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제임스는 엘리자베스와 유사한 종교정책을 답습하고자 했습니다.
장로교 색채가 강한 스코틀랜드에서는 주교 제도를 부활해서 좀 덜 엄격한 장로교를 만들었고 영국에서는 장로교 제도를 폐지하고 감독제도를 강화시킨 것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실시하던 정치 방식으로 영국을 통치합니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각료를 임명해서 영국인들로부터 이방인이라는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왕실의 도덕적인 수준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무모한 낭비벽, 화려한 의복, 계속되는 축제와 무도회 등으로 제임스 왕은 항상 스캔들에 휩싸였습니다.
심지어 제임스 왕이 동성애자라고 하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볼 때, 17세기 영국 정부는 무능하고 불안정하고 낭비가 심한 부패한 정부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감독 제도를 선호했습니다.
제임스 1세하에 영국에서 감독제도를 강화시키는데 앞장섰던 캔터베리 대주교 리처드 뱅크로프였습니다.
그는 감독제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므로 이러한 제도가 없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일련의 교회법을 제정해서 ‘감독없이는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선언한 제임스 입장을 지원했습니다.
그의 통치하에 이룩된 종교적인 업적가운데 기억할만한 것은 역시 킹 제임스 버전(King James Version)입니다.
킹 제임스 버전(KJV, King James Version)이라고 칭하는 제임스 1세의 통치 하에 완성된 흠정역 성경번역은 역사의 걸작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성경 역본 중에서 킹 제임스 버전은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고 영어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의 업적 가운데 또 하나는 영국 국교에 남아있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 국외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락한 점입니다.
이 시대에 청교도의 신앙이 급격히 영국에 보급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케임브리지 시에서 번성합니다. 엘리자베스 치하의 월터 미드웨이 경이 청교도 정신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임마누엘 대학교를 설립합니다.
청교도의 세력은 그곳을 통해 급속하게 확산되었습니다.
토마스 풀러가 1655년에 “나는 오늘날 청교도 신앙이 모든 대학교수들의 반수 이상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고백할 정도로 청교도들의 영향이 당시에 굉장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청교도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와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을 들 수 있습니다.
토마스 굿윈은 19세기 때 말을 타고 존 로저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 56㎞를 달려갈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후에 옥스포드 막랄린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되어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