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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 뉴스정보 스크랩 용호동 이야기
박두춘 추천 0 조회 276 12.11.22 22: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용호동(龍湖) 이야기

용호동은 해양수산부 산하기관 국립해양조사원이 1992년 수로 업무편람에 용호동 잘록개(승두말)북쪽 조군돌(작은 돌)까지를 동해로 표기하고 오륙 도부터 남해로 서해와의 경계를 전남 해남군의 남쪽 끝(땅 끝 마을까지)로 하였다.

그러나 기상청은 동해와 남해안의 경계를 부산시와 울산시의 해상경계점으로 정하여 기상관련 자료를 보도 하고 있다.

용호동은 동해안에 속한다.

동해의 표기는 기원전37년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 동해명칭을 새겨놓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해로도, 표기 하고 있는 실정이다.

동해의 환경은 1966년~1991년까지 구소련이 핵폐기물을 투기하였고,

우리나라도 1991년부터 2007년까지 동해에 투기한 폐기물 총량2352만3000톤을 투기 하였다.

폐기물 중에는 생태계 치명적인 카드뮴.납등 중금속 상당량이 포함 되었다.

동해는 급경사를 이루는 대륙 봉으로 수심이 깊다.

최심부는 북동쪽 오지리 섬[尾尻島] 부근의 3,762m이고, 평균수심은 1,530m이다.

쓰시마[對馬] 해류와 북한해류가 서로 마주쳐 조경(潮境)을 이루며, 난류성 어족(오징어)과 한류성 어족(대구, 명태, 청어,)이 풍부한 조경어장을 형성한다. 해저곡(海底谷:沈溺谷)이 발달한 경성만(鏡城灣)과 영흥만(永興灣)은 저서어류(底棲魚類)멸치 어장을 이루었다.

기후변화로 난류어종인 자리 돔이 북상하여 어장을 이루고 있다.

또한 심해는 갑각류 대게와 붉은게 등의 어장이 형성되어 어민의 생활향상에 도움이 되고 있다.

동해의 최남단이며 오륙도와 광안대교가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용호동의 법정 동은 1910년 토지조사 사업이 시작되어 1914년 법정동명 용호동 으로 등록 되었다 . 2012년 현재 행정 동은 용호1~4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용호의 지명은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서기1589년(선조2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새벽안개 속을 바삐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 침략의 일등공신 승려 겐소(玄蘇)다

승려의 신분으로 조선에 잠입하여 조선팔도의 군사시설. 관청의 규모 산과강의 높이 ,각 마을의 인구수, 봉수대의 위치 등을 샅샅이 조사해서 만든 지도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받쳤던 인물이다.

그는 풍수지리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느 3월 새벽 동 틀 무렵 동래부의 군사요충지 를 살피기 위해 해운대 장산에 올라 수영강과 해안선을 두루 살피다 깜짝 놀랐다.

하현달이 수영만 검은 바다에 용의 비늘처럼 퍼져

용(龍)이 호(湖)를 감싸고 용틀임 하고, 곧 승천 할 형국임에 놀랐다.

동이 트자 은빛 바다는 금빛으로 변하여 하늘로 퍼져 갔다 ,

아 조선은 .......무슨생각 을 하고 있었을까?

승려 겐소(玄蘇)의 용호 풍수지리경은 다음과 같았다.

용의머리는 동산(瞳山)에 두고 북향 을 향해 용설(龍舌)은 동산 끝에서

섶자리를 휘감아 드넓은 은빛 바다를 향하고 있다 .

동틀 무렵 용눈(龍眼)은 瞳山(동산) 백년사 아래 금빛으로 변하고 지금의 각시당 은 수심에 젖어 그늘져 있었다.

이 마을에는 동래부의 자매 관기(官妓)가 살고 있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기생(妓生 각시)은 관청으로부터 왜구(倭寇)가 노략질 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좌수영이 지척이며 바다가 완만하여 왜선이 정박하기 적합한 곳이 지금의 용호만이었다.

기생은 비상식량을 준비하여 주민들이 산중으로 대피하도록 하였다.

평소에 멧돼지가 많아 개와 동행하며 산새를 익혀 온 터라 숲이 우거져 나무마다 이끼가 자라 을씨년스러운, 지금의 잘록개(송두말) 골짜기에 숨어 지내도록 하였다.

수시로 왜구의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정예 일본 군대 이었다,

서기 1592년(선조25년)음력4월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10일전 대마도 도주소오 요시토시(宗義智)는 그들의 대장(隊長)이자 장인(丈人)되는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앞에 조선 지도를 펼쳐 수미산(수장산) 골짜기를 가리키며 이곳 마을은 그냥 지나치라고 대장께 잘 말씀 드리라며 겐소가 부탁하드라고 전했다.

고니시 유끼나가는 부리부리한 눈이 튀어 나올 듯이 펄쩍 뛰었다.

수미산 자락(용호포구)에 제1진 18,700 병력 중 최 첨예 군인과 군선 일부를 숨겨 놓을 군 기지로 계획 하고 있는 터였다.

“그 놈이 !이유가 무엇 이냐?

이유는 묻지 말라 했습니다.

튀어 나올 듯 한 눈동자에 붉은 빛발이 섰다

“그래 내가 그 마을 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거야!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끼나가와 불교신자 겐소 와의 종교적 갈등 이었다.

겐소는 명당에 피를 뿌리고 싶지 않았다. 조선전쟁 7년 동안 조선의 정보를 성심껏 유끼나가에게 제공한 대가로 결국 겐소의 부탁을 들어 준 셈이다.

명당 용호(龍湖)에 악행(惡行)을 저지르는 것은 조선정벌(征伐) 실패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해 음력4월14일 해질 무렵 까지 기생(각시)은 장자태(장자산)에서 꼼작 하지 않았다, 저 멀리 은빛 달빛아래 검은 점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치욕의 임진왜란, 본대는 절영도와 우암 그리고 좌수영으로 상현 달빛에 빨려 들어갔다, 나머지 병선은 은빛 찬란한 이 마을 포구로 들어 닥쳤다

물속에 잠긴 장산이 꿈틀거렸다.

개와 함께 두 기생(妓生)은 잘록개 반대쪽인 동산말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산을 두 고비 넘어 포구 동쪽에 당도 했다,

개는 출렁이는 바다에 꿈틀 거리는 장산을 바라보며 무슨 까닭인지 목 놓아 울부짖었다. 개마져 왜군을 불러 모았다.

기생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다. 발 빠른 병사들이었다. 비탈길 옆 작은 석굴을 발견하고 숨어들었다. 개는 왜병들의 움직임 에 계속 짖었다.

왜병들은 동굴을 향하여 여러 번 무어라 고래고래 고함을 내뱉었다.

나오라는 뜻이리라, 그래도 개를 꼭 껴 않은 채 꼼작 하지 않았다 .

결국 총소리가 메아리쳐 들려 왔다.

그날부터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후일 두기생의 주검을 거두어 이기대 양지 바른 곳 동해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묘소를 만들어 생명의 은인으로 마을 수호신으로 섬기며 개와 함께 마지막을 보낸 작은 굴을 각시 당이라 하여 사당을 세워 제를 지냈다. 오늘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기생의 묘지는 11월에 벌초를 하고 있다 .

두 기생은 철따라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홍수와 가뭄을 대비하여 관계시설을 만들어 해마다 풍년 들게 하고 농번기가 끝나면, 물때를 정확히 맞추어 바다에 나가 그물을 치게 하니 언제나 만선으로 돌아 왔다,

해풍에 약발이 오른 초목으로 병든 마을 사람들을 치유토록 하였다.

밤이면 마을 사람을 모아 글을 가르치니 기생은 마을의 촌장이며 의사이고 신(神)이었다.

 

조선의 정치권력 무능과 기강해이 편당정치가 불러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동안 백성은 고통과 수난(受難)의 세월 이었다. 결국 조선은 폐망을 자초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2년여 경과한 음력9월 어느 날 동래부 기생들은 수장당한 병사들 과 수미산 두기생의 영혼을 달래는 무혼 굿을 하였다. 그곳이 훗날 이기대(二妓臺)라 부르게 되었다.

.

훗날 조선침탈(朝鮮侵奪) 직후 동산(瞳山)을 동광맥(銅鑛脈)있다하여 동산(銅山)이라 하기도 하였으나, 용의 눈자리 동산(瞳山)이 유력하다.

각시당 아래는 구석기 시대 인적(人跡)이 남았던 곳이다

용(龍 )가슴은 장자태 (長子泰)정상에 두고 심장은

제석곡(祭石谷) 제당(祭堂)에 모신 산신과 삼존불상을 모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점지하고 있다.

장자태 정상에 오해야항 봉수대가 자리하고 십여 보아래 옹달샘이 있어 봉수 꾼이 차나무를 심어 관리한 흔적이 남아 있다. 봉수대 터 옆 에는 사금파리 무더기가 있었다.

봉수대가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증거 이다.

장자태는 장산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장자 봉이라 하기도 한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등록한 용호주변 산중에 장자산이 유일한 산이다.

 

용의 앞다리는 오륙도를 향하여 수리(不老長生약이든 호리병)섬을

움켜쥐려다 놓쳤다, 또 하나의 다리가 용마산(龍馬山)이다

마가 신선을 태우고 하늘로 올랐다고 하여 신선대가 있는 산을 용마산이라고 한다.

용마산 아래 용당(龍塘), 울창한 송림 남쪽에 신선이 타고 온 말의 발자국이 바닷가 바위에 흔적으로 남아 있었으나 항만 공사 중 채석 하여 자취를 감추었다.용당동의 앞산 봉우리산은 자궁(子宮)이며 ,생식기는 밤나무 숲이 우거진 갓골,

 

갓골에서 석포를 거쳐 황령산에 걸쳐있어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았다.

자궁을 용당에서는 보오지산(신용산 神龍山)이라고 도한다.

갓골에는 큰 사찰(東明불원)이 있어 공덕으로 끊어진 정기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 동명(東明) 호칭(呼稱)의 사용은 1925년 지금의 LG메트로시티 상가부근178번지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여 용호,용당 지역 주민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초대교장으로 왕기통(王基統 태조 왕건32대손)선생님, 2대 교장 에 김 유상(金有相)선생님이 역임하신바 있다.

대연동에 사립 용연(龍淵) 보통학교가 설립되면서 동명학원생은 전원 용연보통학교에 편입하여 공부에 열중 하였다

그 후 지역민의 문맹퇴치(文盲退治) 노력 일환으로 야학교 건립기금을 왕 씨 문중에서 전액 기부 받아 용호동 309-1번지에 대지138평에 목조건물80여 평(265㎡)정도에 3교실을 마련하여 수업 을 시작 하였다. 여기가 용호분교로써 1955년까지 수업 하였으며 그 후 대연국민학교에 편입 되었다.

그러나 백두대간의 정기는 지게골 (대연고개)과 석포고개 (감만2동) 그리고

당곡(용당입구)등 세 곳이 도로가 생겨 맥이 끊어 진지 오래다.

용의꼬리(龍尾)는 수장산(水藏山)이라 호(湖)의기(氣)를 감추고 있다

일본은 1908년부터 수장산을 평가 절하하여 수미산(水尾山)이라하여 꼬리 취급하여 조선 해수산 조합본부가 수미산 아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끝 밖에 소(龍沼)가있다

용호진입로는 수장산(水藏山)을 휘감아 돌아 용설(龍舌)이

출렁이는 바다를 타고 들어 왔다.

호(湖)에는 소랑강(小浪江용호천)이 흘러 바다를 살찌우고

갈맷빛을 더해 고운 모래 뻘(개흙)에 섶자리(애기거머리말)가 넓게 자리하였다

먼 옛날부터 제석곡 아래 언덕에 집터를 마련하여

가가호호(家家戶戶)들어서고 우환(憂患)없이 풍족하게 살아왔다.

동래부지 (東萊府誌)』와 『동래부읍지 (東萊部邑誌)』에 보면 용호동은 동래부(東萊部) 남촌면(南村面) 분포리(盆浦理)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경종원년(1721년) 이후부터 옛터 자리(제석곡아래 남쪽)에 처음 몇 집이 정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며 농경생활을 해왔다.

이들은 점차 동해 바다줄기인 아랫마을 모래 뻘(개흙)에 내려와서 염전을 일구어 영농과 제염을 주업으로 생계를 이어왔으며, 여기저기에 집단부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형성된 4개 부락의 명칭은 제일 먼저 정착된 구부터 1패(牌), 2패(牌), 3패(牌),4패(牌)로 부락단위의 이름이 불려졌다. 그후 패를 통으로 개명하였다

1패(牌)는 현재 백운 초등학교 아래를 말하고, 2패(牌)는 현재 용호중학교 아래를 말하며, 3패(牌)는 현재 용호1동 새마을 유아원 부근을 말하고 4패(牌)는 현재 용문중학교(구 용호여자중학교) 아랫마을을 말한다.

1904년에 간행된 『경상남도 동해군 가호안』에 의하면 남하면 관내에 용호리가 있는데 용호리의 그 당시 호수는 56호라 되어있다.

남하면 10개 동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동(洞)이었으며 윤씨와 왕씨, 박씨, 김씨, 전씨 등이 주로 살고 있었다.

1930년 10월 국세조사의 부대사업으로 실시된 내용을 편찬한 『조선의 성(性)』(조선총독부편,1936)에 의하면 그 당시 서면 용호리 에는 35세대의 파평 윤씨 동성마을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해방 당시 용호동에 거주했던 씨족을 보면 김해 김씨, 금녕 김씨, 파평 윤씨, 개성 왕씨, 담양 전(田)씨, 밀양 박씨 등이 모여 약 100여 호를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1910년 5월 간행된 『한국수산지』2집에 의하면 용호동은 인가 159호의 어촌마을이었다.

채소 농사와 식염행상에 종사하는 부녀가 많았다. 어업은 자망으로 청어 및 대구를 어획하는데 불과하였다고 한다. 채소로는 콩밭 열무배추가 명품이었다.

또한 김 윤만씨가 가지고 있는 호적부필사본(김교환씨가 가지고 있는 광무11년 2월에 작성한 원본)을 보면 16개통에 159호주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농민은 158호이며 상민이 1호였다. 그 호적부에는 외갓집의 외조부까지 등재되어 있으며 생부와 의붓아버지까지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기와집이 4집, 나머지가 초가였는데 2칸이 34집, 3칸이 81집, 4칸이 6집, 5칸이 13집, 6칸이 10집, 7칸이 8집, 8칸이 2집, 9칸이 1집 있었는데 셋방을 사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동래부지리록(東萊府誌里錄)』에 분포리(盆浦理)는 동래부의 관문서에 28리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영조 이후 마을이 동래부 남촌면 (東萊府 南村面) 으로 불리다가 서기 1910년 동래군 용주면 용호리(東來郡 龍珠面 龍湖里)로 변경(4년 1월 1일)되었다.

최근에는 대단위 고급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으나 문화시설은 거의 없고 용호 4동백운포와 용호2동 sk 뷰 아파트 경유 시내버스 종점과 차고지 정비공장 등이 있다.

현재 용호동은 남구에서 교육과 문화면에서 비교적 발전이 늦은 지역이다.

교육시설에는 용호초등학교, 용산 초등학교, 백운 초등학교, 운산 초등학교,분포 초등학교 용문 초등학교,오륙도 초등학교등 7개교와, 용호 중학교, 용문 중학교(구 용호여자중학교) 분포 중학교, 오륙도 중학교 등 중학교가 4개교 있으며, 고등학교로는 분포 고등학교 와 예문 여고 그리고 부산디자인 고등학교가 있다.

 

이 땅(地)이 용(龍)의 승천(昇天)의 몸부림으로 당(塘)과 소(沼)가생겼다.

용은 불로장생의 약이든 수리 병을 잡아 승천 하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고 약을 바다에 쏟아버렸다. 그 후로 수리섬 병주둥이 부근에서는 지금도 큰혹돔이 유유히 다닌다는 어부들의 입소문이 났다 .

용호동은 3면이 해안으로 해초가 풍성 하였으나 ,해초 채취권은 남천동 어민에게 있었다. 이를 바로잡아 지역 주민들의 생계수단으로 왕기영(王基永)씨 가 해초 채취권을 환수 하였다.

암석에 붙어있는 자연산 해초(미역,모자반,가시리,톳,사각,파래,김등)를 채취 할 수 있는 구역을 각전(覺田)이라 하였으며, 용호동은 동산말에서 백운포 맹밑(맨끝) 까지 23구역으로 나누어 동민이 공동 관리하고 매년 각전 공개경매를 음력 7월7일 시행하여 여기서 발생한 매수입금(賣收入金)으로 동 운영비에 사용하여 왔으나, 법률변경 조례에 따라 용호동 어촌계소관으로 바뀌었다.

모자반 (몰)과 곤피(다시마과 표면돌기가 있고 진한 흑갈색), 돌미역은 유명한 용호동 해초류의 대명사였다.

부산시 환경공단 용호하수처리장 처리수를 바다에 방류하고 수영강 하수처리장의 방류수도 연안 해류를 따라 용호연안을 오염시켜 백화현상 등이 발생하여 각종어패류와 해초가 사라져 죽음의 바다로 변 하였다.

환경공단은 주민 복지를 위해 옥상에 운동장을 만들어 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바다 살리기를 위한 방편은 아닌듯하다.

가까운 광안 해수욕장과 동백섬 넘어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는 수영강에서 흘러 내려온 것으로 연안 해류를 따라 좌우로 번갈아모래 톱을 이루어 왔다.

결국 용호동 연안오염은 해수욕장의 오염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깨끗한 바다를 유지하기 위해 부산시와 중앙정부는 더 늦기 전에 대책을 강구하여할 것입니다.

국가는 의료비의 비중이 늘어 감에 따라 국민의 건강권리 권을 위해 산책로와 곳곳에 운동기구를 설치하여 관리하고 있다,

용호동은 해안 지형이 아름답고 갈맷빛 푸른 숲길과 툭 트인 은빛 조각물결이 푸른바다를 조망하여 갈맷길은 이제 이지방의 자랑을 넘어 전국투어가 되었다.

출렁이는 이기대 구름다리를 지나면 마음은 더 설래 이고 울창한 송림에 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는 알려지지 않은 피톤치드가 파도에 부서진 바다조각에 담겨온다.

장 바위를 지나 오래도록 땔감으로 베이지 않은 한그루의 마지막 나무(낭)가 남았든, 낭 끝을 숨차게 오르면 저 멀리 치마바위가 태공들을 불러 모아 장대 숲을 이룬다.

치마 바위 전망대에서 보는 바다는 유난히도 하얗게 부서진다.

공포감이 밀려 와 한 여름에도 소름 꽃이 핀다.

산 중턱에 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었든 곳은 이제 숲 속에 가려 자취도 없다,

그러나 지명은 밭이 보이는 골짜기라 밭골새 라 한다.

밭골새 개울물소리가 파도소리에 엎여 들리지 않자 가파른 길이 지키고 있다.

계단 길 아래 50여m지점에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버티고 돌 틈 늘 푸른 돈 나무 사이에서 약수가 흘러 목마른 낚시 군의 목을 추겨준다. 이곳이 병풍 함 약수터다.

노박 덩굴 노란 옻을 입은 붉은 열매가 핀 아름다운 길섶을 지나면 농 바위가 수 천 년 전부터 기다리고 있다.

대나, 버들, 혹은 싸리 등으로 엮어 만들어 내부에 한지를 발라 옻 따위 등을 넣어두는 것을 농(籠)이라 하였다.

농을 포개어 놓은 것과 같다 하여 농 바위라고 한다.

이는 바다에서 물질하든 해녀들이 약속지점을 정하면서 널리 알려 졌다고 한다.

그러나 갈맷길 농 바위 전망대에서 보면 쪽머리에 똬리를 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는 것 같아 전설이 있을 법하다,

농 바위 전망대에서 10여m가면 가파른 계단아래 외롭게 서 있는 돌이 있다.

돌의 이름은 숭충(崇忠큰벌레가 서있다)이며 이 골짜기를 숭충 골 이라고 한다.

길 따리 느릅나무 숲을 지나고 보리장나무가 뒤엉켜 은빛 잎사귀가 바람에 팔랑이는 길을 지나면 평지(平地)가 끝이다,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갈맷길 산행은 이렇게 오르고 내리는 길이 있어 대마도가 한눈에 보이는 넓은 동해바다가 더 알차게 느껴진다. 두어 번 숨을 고르고 나면 산 태골 전망대가 있다.

바다에서 바라보면 가파른 산사태로 생긴 깊은 골짜기가 두개 있다.

산태 보다 지옥 같은 절벽이 어울린다. 오르막길을 뒤뚱뒤뚱 넘어질듯 걸어도 산태 골은 보이지 않는다. 지칠 때 쯤 되면 오륙도가 보이는 남해안 부산 외항과 절영도가 한눈에 담긴다.

앞 사람을 따라 해맞이 공원 을 비켜 가면 마지막 구덕 전망대가 기다린다.

제주 어멍(어머니)이 아기나 물 허벅(물동이)을 담아 짊어지고 다니는 광주리 를 구덕이라고 한다. 이곳은 물질을 끝내고 젓을 물리기도 하고 해산물을 종류별로 고르기도 하면서 잠시 쉬는 곳이었다.

오륙도가 지척인 잘록개에서 저 멀리 동백섬 누리마루가 어렴풋이 보인다.

잘록개 에는 스카이워크 (Skywalk 하늘걷기)를 설치하여 동해 바다 위를 걷는 짜릿한 맛을 느낄 날이 멀지 않았다.

오륙도 의6개 섬 중 ,육지 가까운 섬을 방패섬 다음이 소풀섬 이다. 이두 개의 섬을 우식도(牛食島)라고 한다. 우식도 를 구전으로 전달하는 과정에 우삭도(又削島)로 잘못기록하고 있다. 소풀섬은 소가 좋아하는 콩과식물 자귀나무가 울창하여 꽃이 필 무렵이면 섬이 붉게 물들어 가장 아름다운 섬이었다.

자귀나무를 곳에 따라 소 찰밥나무라고도 한다. 그래서 소풀섬 이라고 하였다.

소풀섬과 방패섬의 간격이 약 1m정도 떨어져 있어 배를 타고 가면서 떨어진 섬을 관찰하기 힘들어 위치에 따라 한 개로 보일 수 있다.

다음 섬이 수리섬 이다. 용호 풍수 지리경 에서 수리섬은 수리병(호리병의옛말)에 불로장생약이 담겨 있었으나 용이 승천하기 위해 약을 먹기 위해 병을 잡으려다 실수로 넘어트려 누운 채로 돌이 되었다.

다음 내 번째 섬은 송곳처럼 생긴 모양으로 섬 이름 을 정(定)하였다.

다음 섬은 가장 큰 굴 섬이다 남북으로 굴이 있어 굴 섬이라고 하며 늦가을부터 바다 가마우지가 한겨울을 보내는 곳 이기도하여 가마우지 배설물이 섬을 하얗게 덮고 있다. 마지막 밖에 있는 섬이라 밖 섬이라 하였으나 등대를 설치하면서 등대섬이라고 한다. 두 번째 소풀섬을 소나무가 있다고 하여 솔섬으로 부르고 있어 원래의 모습으로 자귀나무를 심어 소풀섬을 복원하여야 할 것이다.

 

장사산 에서 큰 고개를 지나 마을 쪽으로 용의 가슴자리에 개성(開城) 왕(王)씨 선영이 남서를 향하여 있고, 반대쪽에는 용의자궁터에 북동쪽을 향한 파평(波平) 윤(尹)씨 선영이 자리하고 있다. 왕 씨와 윤 씨는 집성부락의 자존심이다. 용호동에 정착하신 첫 할아버지 부인이 파평 윤 씨 할머니이기에 윤 씨들은 왕 씨를 외손이라고 하여 친족이상으로 관계를 유지 하고 있어 타성 씨의 모범이 되고 있다.

개인 신앙으로 장자산 봉수대 약수는 음력2월 영등할머니(2월할만네)인 풍신(風神)이며 2월내방신에게 올리는 장독 대 정화수(井華水) 이었다. 애석하게도 주민이 늘어나자 급수 시설이 부족하여 옹달샘이 있는 원천 마다 파이프를 매설하여 수맥이 막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래도 매년 옹달샘을 청소하며 그 물길이 되살아나길 기원(祈願)하고 있다.

마을의 행사로는.

음력 4월 보름 장자산 작은 고개에서 가뭄과 흉년 없는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 부인들이 손수 만든 제물을 준비하여 기원 제를 올린다.

또한 매년 음력 9월9일은 이 땅의 산신과 삼존불,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세 부처를 경배하고 , 토지 지 신위께 제를 봉행하여 전 동민의 무사안일 을 위해 모든 질병을 몰아내고 사업번영과 태평성사를 기원 한다.

선조들이 그리 하였듯이 인정과 사랑으로 용호동을 내 집처럼 가꾸고 자연을 보존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후세에게 물려주도록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일치단결하기를 바라는 마음,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용호동의 풍수지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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